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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14/27)

외전 5

식재료 관리실.

한밤에 홀로 창고의 물품을 확인하던 시아나는 예민한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시아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이곳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서 있었다.

라시드였다.

시아나가 눈썹을 모았다.

‘또 왔어, 또!’

며칠 전, 식재료 관리실에 들렀던 라시드는 그 뒤로 별의별 이유를 들어 이곳에 들르기 시작했다.

창고에 아롱다롱 매달려 있는 마른과일이 먹고 싶어서.

새로운 음식이 어떤 것이 왔나 구경하고 싶어서.

작은 동물들의 간식거리를 구하기 위해서.

마치 할일 없는 한량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동네 상점이라도 들른 것처럼 하찮은 이유였다.

하지만 라시드는 일개 한량 따위가 아니었다.

황태자였다.

황궁의 모든 이가 주목하는.

라시드가 한 번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이곳에 들른 것이 알려지면 어떤 소문이 돌지 모른다.

그것도 함께 있던 시아나까지 함께 싸잡혀서.

‘정말이지 그런 추문에 휩쓸리는 일 따위 사양이라고요!’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라시드를 노려보았다.

떨떠름한 시아나의 얼굴에 라시드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라시드는 작은 동물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시아나. 나는 이 궁의 황태자야. 황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도 알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일이라도 숨길 수 있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라시드의 뒤에 있던 호위 기사 솔이 얼굴을 쏙 내밀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조치를 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사하게 웃는 아름다운 황태자와 머릿속까지 근육일 것 같은 덩치 큰 호위 기사.

영 신뢰가 가지 않는 두 남자였지만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벌써 며칠째 식재료 관리실에 오고 있는데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어. 시녀들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이고.’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온 것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제정신은 아니지만 그것을 숨기는 요령은 있어서.’

시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호위 기사 솔은 주변을 살펴봐야 한다는 이유로 창고를 나가고 라시드만 혼자 멀뚱히 서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시아나의 물음에 라시드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대답했다.

“걷다 보니 목이 말라서 들렀단다.”

언제나처럼 하찮은 이유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쪽은 황태자, 이쪽은 시녀인데.

목이 마르다면 잽싸게 물을 드리는 것이 시녀의 임무였다.

시아나가 시녀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음료를 드리면 될까요?”

라시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꼭 입장을 허락받은 민폐 손님이라도 된 것처럼.

어떤 차를 타 달라고 할까 고민하던 중에 라시드의 입에서 깜찍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엣치!”

“…….”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시드를 쳐다보았다.

라시드도 제가 낸 소리가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식재료 관리실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있었기에 작은 가루도 많이 날아다녔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하다 보면 재채기가 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엣치!”

다시 한번 깜찍한 소리가 새어 나온 순간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시아나는 눈치가 빨랐다.

마치 초식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작은 재채기에서 수상함을 느낀 시아나가 물었다.

“혹시 단순히 목이 마른 게 아니라 목 안이 따끔따끔 아프지 않으세요?”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도 건조하고요.”

이번에도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닿은 라시드의 이마가 뜨거웠다.

“감기 기운이 있잖아요!”

“……?”

시아나의 외침에 라시드는 천진한 얼굴을 했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시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제 말 들으셨죠?”

“응.”

“감기라니까요. 할 일 없는 한량처럼 여기에서 노닥거리실 게 아니라 침대에서 푹 쉬셔야 한다고요.”

그러나 제법 심각한 시아나의 말과 달리 라시드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13살 때부터 전쟁터에서 살았어. 적의 검에 베여 피부가 찢어지기도 했고 말에서 굴러 뼈가 부러지는 날도 있었지. 독화살을 맞아 내장이 뒤틀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말이야.”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온 끔찍한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요?”

“그것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뭇잎이 스쳐 지나간 정도란다.”

요컨대,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전쟁터와 비교하면 감기 따위는 신경 쓸 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시아나는 그 말에 휩쓸리는 대신 서늘한 말을 중얼거렸다.

“어디서 개똥 같은 논리를.”

“…….”

“스친 나뭇잎에 독이라도 묻어 있으면 어쩌려고요? 그것도 생명을 앗아 가는 맹독이요.”

“…….”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조심해야 해요. 어떻게 병이 커질지 모른다고요.”

그러니 어서 돌아가세요.

―라고 말하려다가 시아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눈앞의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제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아도, 이상한 데서는 고집을 피우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

예상대로였다.

라시드는 싫다는 말은커녕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시아나의 뒤를 졸졸졸 따라왔다.

꼭 주인을 따라가는 개처럼.

그리고 그런 라시드의 뒤를 호위 기사 솔이 따라왔다.

시아나는 이 창피한 기차놀이를 아무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제발.

시아나는 라시드를 데리고 무사히 황태자궁에 도착했다.

“그럼 어서 침실에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라시드가 시아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시아나, 아까보다 목이 더 아파. 몸도 더 뜨거워진 것 같고.”

그걸 왜 저한테 말하세요.

전하의 궁에도 시녀가 있잖아요. 그들에게 챙겨 달라고 하셔야죠.

라고 시아나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는 라시드의 눈빛이 너무 처연했다.

꼭 주인에게 버림받기 싫어 매달리는 병든 개처럼.

‘하아. 저런 눈빛을 하면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잖아.’

결국 시아나는 팔자에도 없는 황태자 간병을 하게 되었다.

시아나는 라시드와 함께 침실에 들어섰다.

나무와 꽃이 우거진 응접실은 여러 번 가 보았지만, 라시드의 침실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방은 과연 황태자의 침실답게 엄청나게 넓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텅 비어 있다니.’

거대한 방 안에는 큰 침대와 도톰한 이불, 그리고 몇 개의 가구들뿐이었다.

마치 황궁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이방인의 방처럼.

시아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휑한 방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라시드의 목소리에 시아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침대에 누우세요.”

침대라는 말에 라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인지 야릇한 표정이 된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감기에 걸리셨으니 푹 쉬어야 한다고요.”

“…….”

“안 아프신 거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볼…….”

“엣치.”

타이밍 좋게 기침을 한 라시드는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난 환자입니다. 매우 아픈 환자입니다.’

이런 눈빛으로.

라시드가 얌전히 누운 것을 확인한 시아나는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시아나가 들고 온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였다.

“꿀과 생강을 탄 우유랍니다. 한잔 드시면 목이 편해지실 거예요.”

“…….”

라시드는 시아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얌전히 잔을 받았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열이 올라 살짝 붉어진 얼굴로.

“역시 네가 타 주는 건 다 맛있어.”

“…….”

시아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쩜 이럴 수 있어?’

열세 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볐다는 남자가.

수없이 많은 이를 베었다는 살육자가.

황좌를 둘러싼 권력 싸움을 하고 있다는 황태자가.

‘어쩜 저렇게 아이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냐고.’

공주로 태어나 시녀가 된 지금까지, 시아나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 보았다.

그러나 라시드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하는 정말 이상한 분이세요.”

라시드는 시녀가 감히 황태자에게 무엄한 말을 한다고 화내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그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난 이상한 남자구나.”

“…….”

“이상한 남자는 어때?”

“……?”

“네 취향이야?”

“……?”

“그럼 좋겠는데.”

“……!”

라시드가 말한 의미를 깨달은 시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순진한 시녀에게 저런 해괴한 말을 늘어놓다니.

명백한 희롱이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차마 그것을 따질 수 없었다.

왜냐면 그것을 따지기에는 살짝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정말이지 심하게 잘생겼기 때문이다.

‘하여간 저 얼굴이 문제야!’

시아나는 끙, 하고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소리쳤다.

“괴상한 말을 줄줄 늘어놓으시는 걸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으신 모양이에요. 어서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라시드가 또 이상한 말을 주절거리기 전에, 그의 가슴 위로 이불까지 올려다 주었다.

딴생각 말고 어서 자라는 듯이.

번데기처럼 이불 속에 갇혀 얼굴만 쏙 내민 라시드가 웃으며 말했다.

“감기에 걸려서 다행이야. 그 덕에 네게 이런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야.”

진심으로 기쁨이 담긴 목소리에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황태자 전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아나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직 한 명의 작은 시녀가 앞에 있을 때뿐이었다.

외전 5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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