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름다운 공주님 (2)
* * *
달빛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밤, 그레이스 황녀는 쥐처럼 살금살금 주방으로 들어섰다.
저녁을 거의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챙겨 온 스카프에 음식을 넣어 가지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자.’
시녀들이 들어올 리 없는 늦은 시각이니 방에서는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소시지를 보는 순간 철두철미했던 계획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레이스 황녀는 홀린 얼굴로 소시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물우물.
긴 소시지 한 개를 손에 들고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기 전에 또 하나를 쑤셔 넣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녀들이 쳐다보는 식사 시간에는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 때면 식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든 먹어야만 했다.
그때였다.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그레이스를 덮쳤다.
“황궁의 음식을 야금야금 훔쳐 먹다니 그러면 안 되는겨. 배고프면 차라리 대놓고 말하고 먹어! 그럼 시녀님들이나 공주님도 이해를 해 주실…….”
그레이스는 너무 놀라 소시지를 든 채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 그레이스 공주님?!”
츄츄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 순간까지 그레이스 황녀는 패닉 상태였다.
궁의 음식을 훔쳐 먹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잘 해 왔다.
누구에게도 들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딱 들켜 버리다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그레이스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울어 보았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제 앞에 서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저 커다란 시녀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레이스 황녀는 눈에 또렷하게 힘을 줬다.
“오늘 본 것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조금이라도 입을 벙긋한다면 대대손손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비록 손에 든 길쭉한 소시지와 입가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기름 탓에 조금도 위엄이 느껴지진 않았겠지만.
그렇게 절망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리려던 차였다.
“자, 잠시만요, 공주님!”
그레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일개 시녀가 황녀를 부르다니.
이런 꼴을 보였다고 내가 우스운 거야? 아니면 좋은 기회다 싶어 약점이라도 잡을 셈이야?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한 손에 소시지를 든 그레이스 황녀는 검을 든 기사처럼 사납게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두 손에 츄츄가 쥐여 준 것은 길쭉한 빵이었다.
“그 소시지는 그냥 먹으면 짜유. 빵에 껴 먹으면 더 맛있구만유.”
“…….”
“새콤한 걸 좋아하시면 머스터드를 뿌려 먹으면 더 좋구유. 식사하시는 데 놀라게 해서 죄송했어유. 그럼 식사 맛있게 하셔유!”
고개를 꾸벅인 츄츄는 곧장 주방에서 사라졌다.
주방에 홀로 남은 그레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이게 끝이야?’
음식을 훔쳐 먹은 것을 들켰으니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볼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억지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츄츄가 보여 준 모습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츄츄는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그레이스를 대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그레이스는 멍하니 서 있다가 손을 움직였다.
길쭉한 빵 사이로 소시지를 올리고 그 위에 머스타드 소스를 뿌렸다.
그러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을 우물거린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맛있어.”
츄츄의 말은 정말이었다.
빵에 소시지를 끼워 먹는 맛은 최고였다.
방금 전까지 그레이스를 휩쓸었던 끔찍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질 만큼.
그 후, 츄츄는 약속을 지켰다.
츄츄는 그날 본 것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자기가 도둑으로 몰리는 순간까지도.’
그레이스 황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츄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아름다운 용모에 우아한 기품을 지닌 이상적인 공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은 누구보다 먹을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미안하다, 츄츄. 내가 너무 비겁했어.”
츄츄의 뒤에 서 있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까지 작은 새처럼 여렸던 황녀의 목소리가 호랑이처럼 우렁찼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녀가 일개 시녀에게 ‘미안해’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츄츄도 동그래진 눈으로 그레이스 황녀를 쳐다보다가 헤실 웃었다.
“괜찮아유, 공주님.”
“그렇게 당하고도 괜찮긴 뭘 괜찮아, 이 미련 곰탱아!”
그레이스 황녀는 꼭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시아나는 그제야 츄츄가 바보 같을 정도로 그레이스 황녀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히 모시는 분이라든가, 예쁜 공주님이라서가 아니었구나.’
새침해 보였던 그레이스 황녀는 엄청나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츄츄는 그런 사람들을 아주 좋아했다.
* * *
시아나와 그레이스 황녀가 마주 앉았다.
츄츄는 그레이스 황녀의 옆에 섰다.
두 사람에게 차를 따라 주기 위해서였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공주님의 차를 따르다니!’
차를 따르는 것은 보통 최측근 시녀가 하는 일이었다.
츄츄는 고작 양산 담당인 제가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하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또르르.
츄츄가 긴장한 얼굴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황녀가 츄츄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 따르는 모습이 꼭 꿀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봐 겁내는 곰 같구나.”
“소, 송구합니다. 지가 너무 긴장을 해서…….”
츄츄가 풀죽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츄츄의 얼굴이 환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레이스 황녀의 입꼬리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달아.’
사실 그레이스 황녀는 차를 마실 때 꿀이나 시럽을 일절 넣지 않지 않았다.
달콤한 것은 혀를 즐겁게 하지만, 그만큼 살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꿀을 넣으니 맛있네.’
홀짝.
그레이스는 풀어진 얼굴로 차를 한 번 더 홀짝였다.
그러나 이내 그레이스는 아차 싶은 얼굴로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더 마시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가는 살이 찌고 말 것이다.
아니, 벌써 늦은 건 아닐까?
‘두 모금이나 마셨잖아.’
그 순간 달콤한 차를 마셔 좋았던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구토가 나올 것처럼.
그런 그레이스 황녀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황녀 저하, 괜찮습니다.”
“…….”
“고작 차 두 모금을 마셨을 뿐이에요. 그 양으로는 공주님의 몸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어요.”
“…….”
같은 일을 겪었다는 말 때문일까.
시아나의 말에는 묘하게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레이스 황녀는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울렁이던 속이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황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행이다.’
시녀들 앞에서 토를 하는 끔찍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레이스 황녀는 몰랐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시아나의 눈빛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츄츄의 눈빛에도.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녀 저하, 언제부터 그런 상태가 되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음식을 먹으면 게워 버리는 일에 관한 것을 묻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질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저런 질문을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레이스 황녀는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그녀는 절실했다.
그레이스 황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그레이스 황녀는 제3황비 라일라의 딸로 태어났다.
그레이스의 성별에 라일라 황비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그레이스의 위로 아들 한 명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배에서 낳은 아들 둘이 황좌를 놓고 싸우는 건 바라지 않아. 차라리 딸이라 잘됐구나.”
라일라 황비는 이전처럼 아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자연스럽게 그레이스는 뒷전이었다.
라일라 황비는 그레이스에게 어려운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엄하게 혼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레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두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아쉬울 법도 하건만 그레이스는 그럭저럭 제 인생에 만족했다.
어린 그레이스는 케이크 한 조각을 앙 하고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으로 태어난 덕분에 맛있는 걸 잔뜩 먹는걸. 나는 행복해.”
진심이었다.
그레이스는 먹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온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고, 자기 전에는 이불 속에서 내일은 뭘 먹지, 라며 행복한 고민을 했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아기 때부터 계속 통통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었다.
“뭐, 일단은 공주니 누구라도 데려가겠지. 그리고 살에 파묻혀서 그렇지, 이목구비는 괜찮잖아?”
친모인 라일라 황비는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딸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시녀들도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다.
“공주님은 정말 사랑스러우셔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그레이스 공주님.”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약혼이라고요?”
14살 된 그레이스는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빵을 우물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라일라 황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공주잖니. 슬슬 약혼을 할 때야.”
14살이면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레이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정된 것이라 해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레이스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약혼 상대가 누구인데요?”
라일라 황비가 대답했다.
“아이작 폰 헤이스팅스. 헤이스팅스 백작가의 셋째 아들이란다.”
툭.
라일라 황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스의 손에 들려 있던 빵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그레이스는 믿을 수 없었다.
아이작.
그레이스 또래의 귀족 소녀들에게 ‘귀족계의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귀족 소녀들이 그러하듯 그레이스 또한 아이작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작 님과 약혼을 한다고?!’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동그란 빵을 든 손을 위로 뻗으며 소리쳤다.
“공주로 태어나길 정말 잘했어!”
그 모습을 본 라일라 황비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레이스, 먹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제발 최소한의 체통은 지키렴.”
물론 어머니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 후 아이작이 황궁을 찾았다.
그레이스 황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귀족계의 왕자님.’
어린 귀족 소녀들이 비밀리에 붙인 별명처럼 아이작은 단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늘 부드럽게 휘어져 있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아이작은 그레이스의 앞으로 다가와 희고 통통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의 약혼자가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레이스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아, 사랑이었다.
* * *
몇 달 후, 그레이스는 곱게 치장했다.
“공주님, 정말 고우세요.”
“누구라도 공주님을 보면 한눈에 반하게 될 거예요.”
호들갑스러운 시녀들의 말을 들으며 그레이스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맞춘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앙증맞은 분홍색 드레스.
왕 리본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
‘솔직히 난 이런 스타일 별로지만 시녀들이 하나같이 예쁘다고 하는 걸 보면 예쁜 거겠지.’
그레이스는 흐뭇한 얼굴로 제 모습을 평가했다.
그레이스가 이렇게 치장에 신경을 쓴 이유는 오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가 무척 특별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사람들에게 아이작 님과 내가 약혼한 것을 공표하는구나.’
그레이스와 아이작의 약혼 이야기가 나온 것은 몇 달 전이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그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
약혼 전 여러 가지 맞춰야 할 조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레이스도 아이작도 말을 아꼈기에 약혼 소식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야.’
오늘부터 모든 이들이 그레이스와 아이작의 약혼에 대해 알게 될 터였다.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갔다.
‘아이작 님을 짝사랑하는 귀족 소녀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 다들 나를 엄청 부러워하겠지?’
열네 살 소녀다운 유치한 생각을 하며 그레이스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레이스가 등장하자마자 모여 있던 소녀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레이스와 비슷한 나이의 귀족 소녀들이었다.
드높은 황족의 권위만큼 황녀의 권위도 드높았다. 그것은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귀족 소녀들은 그레이스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개중에는 백작의 딸 줄리아도 있었다.
줄리아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레이스 공주님,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초여름의 복숭아꽃처럼 어여쁘셔요.”
줄리아는 그레이스를 보면 늘 혀에 꿀을 바른 달콤한 칭찬을 했다.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쁜 애가 나보고 예쁘다고 하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너도 예뻐, 줄리아.”
그레이스의 말에 줄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그 모습에 소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에이. 겸손할 필요 없어요. 줄리아 양이 예쁜 건 사실이니까요.”
“맞아요. 지난번 데뷔탕트 무도회 때에 두 번째로 많은 꽃을 받은 사람도 줄리아 양이잖아요.”
“첫 번째는 물론 그레이스 공주님 이셨고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소녀들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실례합니다.”
어린 소녀들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에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헤이스팅스 백작가의 아들인 아이작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아이작 님께서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시지?’
소녀들의 시선 속에서 아이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레이스 공주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
눈이 휘둥그레진 소녀들 사이에서 그레이스만이 수줍은 얼굴을 했다.
그레이스의 앞에 다가선 아이작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네. 아이작 님은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참, 공주님께서 보내 주신 카아나산 초콜릿도 잘 먹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달지 않으면서도 무척 부드러워서 입 안에서 살살 녹더군요.”
그레이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네요.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고민하여 보냈거든요.”
소녀들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줄리아가 눈썹을 내리며 물었다.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두 분께서 무척 친해지신 모양이에요.”
그레이스가 기다렸던 질문인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약혼이 진행된 후로 그레이스는 하루라도 빨리 이렇게 멋진 남자가 제 약혼자가 된 것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레이스가 기쁜 마음을 여실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실은 아이작 님과 내가 약혼을 하게 되었어.”
그레이스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내뱉는 순간을 여러 번 상상했다.
당연히 놀라겠지?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줄 거야.
두 분 정말 잘 어울린다고, 축하한다고.
하지만 소녀들의 반응은 상상과는 달랐다.
“…….”
소녀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하지만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녀들은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세상에.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그러게요. 아이작 님, 공주님, 진심으로 약혼을 축하해요.”
제 일처럼 기뻐하는 소녀들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방금 전에 느낀 이상한 분위기를 잊었다.
‘내가 뭔가 착각한 것이겠지.’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연회는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라일라 황비는 그레이스 황녀와 아이작의 약혼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사람들은 더없는 기쁜 소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니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은 팔을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행복한 얼굴로 아이작에게 팔짱을 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작 님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시네.’
아이작은 연회장에 계속 있었더니 답답하다며 정원에 나가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고민 끝에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숙녀의 미덕이었지만, 그보다는 아이작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이작 님, 어디 계시려나.’
그레이스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아이작을 찾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아이작을 발견했다. 풍성한 나뭇잎 사이로 반듯한 얼굴이 보였다.
“아이…….”
그레이스는 아이작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작의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레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줄리아?!’
그것을 안 순간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쳐 모습을 숨겼다.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본능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레이스가 있는 것을 알 리 없는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이작 오라버니, 정말 약혼하는 거예요?”
꼭 우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아이작이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줄리아가 인형처럼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성인이 되면 청혼을 한다고 했었잖아요!”
“줄리아, 그건 내가 고작 열 살 때 친하게 지내던 어린 동생에게 장난처럼 했던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어. 나는 열일곱 살, 너는 열네 살. 데뷔탕트 무도회도 치렀으니 우리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지. 너도 그걸 아니까 연회장에서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았던 거잖아.”
정숙한 레이디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아이작이 숨긴 말을 줄리아도, 몸을 숨기고 있던 그레이스도 알아챘다.
그레이스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두 사람이 원래 알던 사이였구나.’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이해는 갔다.
귀족 여인은 이성과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랬다.
행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나거나, 특정한 상대와 엮이면 약혼자를 찾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친하게 지내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서로 모르는 척하거나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냥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줄리아는 그래 보였다.
눈물을 머금은 줄리아의 얼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여인처럼 처연했다.
그레이스는 어렵지 않게 줄리아의 마음을 눈치챘다.
‘……줄리아도 아이작 님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아이작은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거기에 줄리아가 추가된다고 해도 새삼 놀랍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제 내가 아이작 님의 약혼녀인걸. 깔끔하게 포기해야지.’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제 약혼자를 좋아하는 소녀들에게 미안함이나 동정을 가질 만큼 그레이스는 마음이 여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혼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지금 와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거나, 약혼을 물리라는 쓸데없는 말을 하진 않겠지?’
만약 그런다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녀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있었다.
다행히 줄리아는 선을 넘지 않았다.
줄리아는 커다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오라버니가 갑자기 약혼을 했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아이작은 눈썹을 내렸다.
“괜찮아. 이해해. 그리고 미리 말해 주지 못한 것은 이유가 있단다. 상대가 공주님이기 때문에 약혼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비밀을 엄수해야 했거든.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마.”
“……네.”
줄리아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이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
아이작은 무슨 말이냐는 듯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줄리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솔직히 공주님은 좀…….”
줄리아의 뒤편에 숨어 있던 그레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
좀 오라버니와 가문의 차이가 나잖아요?
좀 성격이 제멋대로시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이어 할까 싶어 그레이스는 귀를 기울였다.
줄리아가 말했다.
“뚱뚱하잖아요.”
“……?!”
“아까도 영애들 사이에서 말이 많이 나왔어요. 새하얀 피부에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꼭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 같다고요.”
“……!”
그레이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차마 그레이스가 제 뒤에서 듣고 있다고 생각도 못하고 줄리아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알아요.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뚱뚱한 여인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셨죠. 살이 쪘다는 것은 귀족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모두 포기한 것이라고요. 그런 오라버니의 결혼 상대로 그레이스 공주님이 정말 괜찮겠어요?”
정도를 넘은 질문에 그레이스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물론 그레이스는 제가 다른 귀족 여인들보다 살집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크게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시녀들도 귀족 여인들도, 그레이스를 향해 늘 예쁘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건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스는 약혼이 정해지고 처음 만났던 날, 아이작이 제게 했던 말을 선명히 기억했다.
[아름다운 공주님의 약혼자가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이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줄리아, 내게 질투가 나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가 본데 소용없어. 아이작 님은 절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그레이스의 바람일 뿐이었다.
아이작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가문에 가장 이득을 주는 약혼이니 어쩔 수 없지. 끔찍해도 참는 수밖에.”
“……!”
그레이스는 거대한 쇠망치가 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난생처음으로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 * *
“아이작, 개새끼.”
시아나와 츄츄가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은 헉, 하고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시아나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너무 어이가 없어 실언이 나왔습니다.”
“지, 지도 실수를 했구먼요.”
“…….”
그레이스는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녀가 감히 황녀의 약혼자를 향해 욕을 하다니.
즉시 태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에 갇힐 만큼 엄청난 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레이스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시아나와 츄츄가 온전히 그레이스의 편에 서서 내뱉은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용서하마.”
“황송합니다!”
그레이스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시아나와 츄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내 편이 되어 준 건 고마워. 하지만 아이작 님을 욕하지는 마. 아이작 님은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내가 뚱뚱한 게 잘못인 거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암요!”
시아나와 츄츄는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그레이스는 눈썹을 내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열네 살 때, 제가 뚱뚱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전에 저 말을 들었다면 ‘역시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그레이스는 사람들이 진짜 속내를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줄줄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녀라면 그 일에 더더욱 능숙하다는 것도.
그레이스는 다시 과거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 * *
약혼 발표 연회가 끝난 후 그레이스는 방 안에 처박혀 엉엉 울었다.
그레이스는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가끔 내가 너무 통통한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향해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예뻐요, 공주님!]
그레이스는 그 말에 헤죽거리며 웃었다.
바보같이.
그 말이 그저 꿀을 듬뿍 바른 아부였던 것도 모르고.
‘다들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는 나를 돼지 같다고 비웃었겠지.’
지금까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제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그레이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걸어가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헝클어진 검정색 머리카락에, 리본이 달린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눈이 퉁퉁 부은…… 돼지가 한 마리 서 있었다.
그레이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못생겼어.”
그레이스는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끔찍해.”
제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이 싫었다. 생각 같아서는 칼로 도려내서라도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이성이 그것을 막았다.
그레이스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택했다.
식사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레이스가 식사에 입도 대지 않자 처음엔 난리가 났다.
“공주님, 혹시 어디가 아프신가요?”
호들갑 떠는 시녀들에게 그레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도 좀 해 보려고.”
“무엇을요?”
“다이어트.”
“……!”
지금껏 그레이스에게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말에 시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시녀들은 꺅 하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시 지금까지 내게 예쁘다고 칭찬했던 말들은 다 거짓이었구나.’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살을 빼겠다는 말에 저토록 기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몇 달 후.
헤이스팅스 백작가의 저택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백작가의 3남인 아이작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파티의 주인공답게 새하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작에게 손님들이 다가와 인사했다.
“아이작 님, 생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선물도 하나 챙겨 왔답니다. 라티아의 장인이 만든 시계인데 마음에 들까 모르겠네요.”
라티아의 시계는 최고급품으로 유명했다.
유명세만큼 가격도 대단해서 시계 하나의 가격이 품질 높은 마차에 버금할 정도였다.
아이작은 놀란 얼굴을 했다.
“참석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이런 귀한 선물을 가지고 오시다니요.”
“후후. 이 정도는 챙겨야죠. 황녀 저하의 남편이 되실 분인데.”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손님이 지나간 후 살랑대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 떼가 아이작의 곁으로 다가왔다.
줄리아와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와, 공주님의 약혼자 자리가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인색하기로 소문난 마리앙스 백작 부인이 저런 선물을 챙겨 오시다니 말이에요.”
소녀들의 솔직한 말에 아이작은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렸다.
그 표정을 본 줄리아가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열일곱 살 생일 축하해요, 오라버니.”
그제야 다른 소녀들도 참, 하더니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이작은 부드럽게 두 눈을 휘었다.
잘생긴 귀족 오빠의 미소에 소녀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한 소녀가 부채로 얼굴의 열을 식히며 물었다.
“그런데 그레이스 공주님이 안 보이시네요?”
“그러게요. 진작 오셔서 아이작 님을 축하해 주고 계실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설마 안 오시는 건 아니겠죠?”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시간에 맞춰 오신다고 하셨으니 곧 오실 겁니다.”
“그럼 다행인데…….”
묘한 반응에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실은 저희가 요즘 그레이스 공주님을 못 뵈었거든요.”
아이작이 눈을 크게 떴다.
아이작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약혼을 발표한 날 이후로, 아이작은 그레이스를 본 적이 없었다. 편지로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괜찮다고는 하셨는데. 설마 공주님께서 어딘가 편찮으신 건…….”
심각한 아이작의 얼굴에 소녀들은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거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릴 때부터 공주님을 알아 왔지만 공주님이 편찮으신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맞아요. 얼~마나 튼튼하신데요. 힘이 얼마나 세신지 시녀들도 들기 힘들어하는 물건도 척척 잘 드신답니다.”
“음식도 엄청나게 잘 드시잖아요. 티 파티 때 디저트 10접시는 기본!”
소녀들은 까르르 웃었다.
얼핏 들으면 공주를 추켜세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속에 든 뜻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녀들은 그레이스 황녀를 비웃고 있었다.
‘우아함이나 아름다운과는 거리가 먼 돼지 공주님.’
물론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레이스 황녀의 뒤에는 황제와 황비, 황자까지 버티고 서 있으니까.
다행히(?) 소녀들에게는 고급지게 남을 엿 먹이는 기술이 있었다.
“그레이스 공주님이 늦으시는 건 치장에 공을 들이느라 그러실 거예요. 처음 맞는 약혼자의 생일 파티잖아요.”
“아아. 화려하게 꾸민 그레이스 공주님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이 부분에서 소녀들은 키득거렸다.
쿡쿡거리던 한 소녀가 말했다.
“줄리아 양만큼 예쁜 모습으로 등장하시겠죠.”
갑작스럽게 나온 제 이름에 줄리아가 당황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공주님과 비교가 되겠어요.”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줄리아는 또래들 중 월등히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이작도, 소녀들도.
까르르 웃는 어린 소녀들 속에서 줄리아는 아이작을 쳐다봤다.
아이작은 평온해 보였다.
제 약혼녀에 대한 험담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흥. 설마 오라버니가 어린 여자애들이 하는 유치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이유는 뻔했다.
아이작은 그레이스 황녀에게 큰 애정이 없는 게 분명했다.
‘당연한 일이지. 오라버니는 가늘고 여린 숙녀를 좋아하니까.’
뚱뚱하고, 목소리도 큰 데다가, 눈치 없는 뚱보 따위…… 공주만 아니었다면 절대 인연을 맺지 않았을 텐데.
줄리아는 새삼 화가 치밀어 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던 줄리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오라버니?”
아이작이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만이 아니었다.
줄리아의 곁에서 웃던 어린 소녀들도 똑같은 얼굴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뭘 보고 저렇게 넋이 나간 거야?’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툭.
줄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떨어졌다.
그곳에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얼굴, 길게 늘어진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바람에 살랑대는 연분홍색 드레스, 그 아래로 드러난 팔목은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내 소녀는 아이작 앞에 섰다.
그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아이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레이스 황녀님?”
그레이스 황녀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이작 님.”
“어, 어떻게 이런…….”
아이작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치 그레이스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그레이스를 보지 못한 지 고작 세 달. 그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레이스는 쿡쿡 웃었다.
“놀라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이작 님의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약혼녀로서 노력을 해 보았어요.”
“……그렇군요.”
아이작은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의 그녀는 어여뻤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아이작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름답습니다, 정말.”
“……!”
누군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레이스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아이작의 말은 진심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감탄을 할 때는 이런 얼굴을 하시는구나.’
이전에 제게 예쁘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눈빛은 반짝였고 귀 끝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레이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난 석 달.
그레이스는 식사의 양을 반의반으로 줄였다. 황성 안을 걷고 또 걸었다. 배가 고플 때는 물을 마시며 참았다.
고통의 결실은 달았다.
그레이스는 환하게 웃었다.
‘행복해.’
* * *
시아나와 츄츄는 눈썹을 내렸다.
“……행복하셨다고요?”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행복을 넘어 쾌감까지 일더구나. 아이작 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넋을 놓고 나를 쳐다보았거든. 줄리아까지도.”
그레이스는 아직도 그때 본 줄리아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늘 제 앞에서 웃었던 줄리아는 처음으로 진짜 감정을 드러냈다.
예상도 못한 이에게 져 버린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해피엔딩인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다.
행복은 딱 그날 밤뿐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연회장에서 먹었던 음식들 때문이다.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한번 맛을 보니 정신을 잃고 열심히 먹어 버리고 말았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뚱뚱하고 끔찍했던 그때로.
그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공주님은 아름다우세요, 라며 거짓말을 입에 담는 시녀들.
킥킥거리며 저를 비웃는 소녀들.
……그리고 난감한 얼굴을 한 아이작.
그 순간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우웩!]
그레이스는 토했다.
화려한 카펫 위로 질척한 토사물이 쏟아졌다.
그레이스는 배를 매만졌다. 방금 전까지 볼록했던 배가 쏙 들어갔다.
배 속에 있던 것을 모두 게워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러운 토사물을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웃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레이스가 말했다.
“안심이 됐어.”
“…….”
“아, 이 방법이면 먹어도 살이 찌지 않겠구나, 하고.”
그 후로 그레이스는 평소보다 음식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는 날이 생기면 게워 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토를 하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기만 하면 토기가 올라왔다.
참기 힘들 정도로.
그 말을 들은 츄츄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혹시 공주님께서 식사 시간에 음식을 거의 드시지 않는 것도…….”
“……너희들 앞에서 토할 수는 없잖아.”
“……!”
“실수를 할까 봐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어.”
사람들은 그레이스가 먹는 양이 적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새처럼 먹는 모습이 우아하다며 칭찬을 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작은 새가 아니었다. 요정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면 배가 고픈 평범한 사람.
“……그간 잘 참아 왔는데 몇 달 전부터는 그게 되질 않더구나.”
그래도 한낮에 사람들의 시선이 있을 때는 버틸 수 있었는데, 한밤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는 순간이면 이성이 날아갔다.
그러면 그레이스는 홀린 듯이 먹을 것을 찾았다.
“보이는 것들을 족족 입에 넣은 후에는 방으로 돌아와 토를 했지. 그래야만 잠이 들 수 있었어.”
“…….”
“시간이 갈수록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났어.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간 사람들에게 들킬 거라는 두려움이 생겼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너무 배가 고파서.”
“…….”
시아나와 츄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숨겨 왔던 죄를 고백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한계야. 음식을 입에 대는 순간 짐승처럼 이성이 사라지는 것도, 음식을 먹은 후에 살이 찔 것 같다는 두려움에 토를 하는 것도 끔찍해.”
“…….”
“나를 도와줘.”
그레이스는 황녀였다.
황녀는 결코 시녀에게 도와 달라는 말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체통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레이스는 절박했다.
“…….”
그레이스를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던 츄츄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일개 시녀가 허락도 받지 않고 황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무엄한 일이었지만 그레이스는 그것을 혼낼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츄츄의 품이 너무 따스했기 때문에.
츄츄가 글썽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쥬.”
“……!”
“공주님께서 이렇게 힘드신데 지는 시녀가 되어서 그것도 몰랐구만유. 죄송해유.”
자기 일처럼, 아니 자기 일보다 더 슬퍼하는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눈썹을 내렸다.
‘……정말이지 이 애는 바보 같아.’
눈가가 빨개진 그레이스의 앞에 시아나가 다가왔다.
시아나는 츄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모습은 덤덤하기만 했다.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 타인의 말을 들은 것처럼.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아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기 때문이다.
“힘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저하.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분명 황녀 저하께서는 그 지옥을 벗어나실 수 있어요.”
꼭 그리될 것이라는 믿음이 어린 얼굴이었다.
그레이스는 결국 어린아이처럼 코를 훌쩍이고 말았다.
* * *
시아나는 생각했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께서 제대로 식사를 하려면 일단 음식에 대한 부정정인 감정을 없애야 해.’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찐다.
그레이스에게는 그 생각이 저주처럼 박혀 있었다.
그 두려움부터 없애야 했다.
“황녀 저하, 티바타의 승려들을 아시나요?”
생뚱맞게 나온 말에 그레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 티바타를 섬기는 승려들.
그들은 깊은 숲속에서 신에게 기도만 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유명했다.
“기도를 하기 위해 황궁에 찾아온 승려들을 본 적이 있어.”
“살이 없고 마르지 않았던가요?”
비쩍 마른 승려들을 떠올린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구나.”
“티파타의 승려들은 절대 살아 있는 생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인위적으로 재배하는 밀이나 쌀도 먹지 않고요.”
“그럼 무엇을 먹지?”
“자연에서 나는 식물들만 먹는다고 합니다.”
“……야채 말이야?”
“네. 양배추, 당근, 파프리카, 토마토 이런 것들 말이에요. 야채는 많은 양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
그레이스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제국에는 ‘다이어트’라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극단적으로 금식을 하는 방법을 말했다.
야채를 먹으면 살이 덜 찌고, 고기를 먹으면 살이 더 찌고, 이런 지식들은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납득이 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코끼리는 야채만 먹는데 덩치가 산만하잖아.”
“어머. 코끼리에게 실례되는 말이에요. 그 아이들은 살이 찐 게 아니라 타고난 체격이 큰 것뿐이랍니다.”
“…….”
“풀만 먹는 동물 중에 우악스럽게 살이 찐 동물은 없어요. 제가 보증할게요. 그러니까 식단을 야채 위주로 바꾸어 드셔 보세요.”
그렇게 야채가 괜찮아지면 계란도 먹고, 빵도 먹고, 고기도 먹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추가하면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아나가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보고 알게 된 지식이었다.
그레이스는 영 미덥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보마.”
의외로 순순한 대답에 시아나는 웃었다.
제발 도와 달라고 했던 말이 진심이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야채가 살이 찌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금방 사라지진 않을 거야. 그리고 입맛이 돌면 또 다른 음식을 드실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그레이스는 다시 모든 것을 토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 또한 해결해야 했다.
“황녀 저하, 앞으로 식사를 하신 후에는 운동을 하도록 해요. 몸을 움직이는 만큼 배 속에 들어간 음식이 소진되는 법이거든요.”
그레이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공주에게 ‘운동’은 ‘노동’만큼이나 거리가 먼 단어였기 때문이다.
“운동이란 것은 기사들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나 하는 것이잖아.”
“그런 과격한 것만이 운동은 아니에요. 몸을 움직이면 다 운동이죠. 산책은 좋아하시나요?”
가장 쉽고 무난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산책은 싫어.”
햇빛 아래에 오래 있으면 피부가 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양산을 쓴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가장 감탄하는 것이 흰 얼굴이야. 피부가 상하는 것은 절대 안 돼.”
그레이스의 말에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우아하고 여린 공주님.
그레이스는 그 모습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시아나는 그레이스가 안쓰러웠다.
그 생각이 얼마나 덧없고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뱉진 않았다.
지금의 그레이스는 그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시아나를 불신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그레이스에게 딱 맞는 운동을 찾아 권하는 것이 나았다.
‘햇볕에 살이 타는 것이 싫은 거라면 승마나 등산 같은 것도 힘들겠구나. 그럼 뭐가 좋을까.’
그때였다.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츄츄가 끼어들었다.
“공주님, 그럼 방 안에서 저랑 운동을 하면 어떠세요?”
츄츄가 두꺼운 팔을 들어 구부렸다. 단단한 이두박근이 불끈 솟아났다.
“이래 봬도 그냥 붙은 근육이 아니거든유. 다 지가 노력해서 키운 거예유. 다른 사람 운동시키는 것도 자신 있구만유!”
씩씩한 츄츄의 말에 그레이스는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너 같은 근육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그레이스가 입을 열기 전, 시아나가 짝 하고 손을 마주쳤다.
“그거 좋네요.”
“뭐?!”
“실내에서 하는 운동이라면 햇빛도 피할 수 있는 데다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츄츄는 황녀 저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불편하지도 않으실 테고요.”
“하지만……!”
그레이스가 도망치려고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시아나가 쐐기를 박았다.
“황녀 저하, 요즘 이빨이 흔들릴 때가 있죠? 음식을 삼킬 때 목도 조금 아프시고요.”
“……!”
눈을 부릅뜬 그레이스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너무 자주 토를 해서 몸이 망가져 버린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면 더 심각해진답니다. 이가 하나둘씩 빠지고 목 안은 헐어 더는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돼요.”
“…….”
“그러면 정말 끝이에요.”
단순히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죽어 버린다.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그레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잠시 후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알겠어. 츄츄와 운동할게.”
“와!”
츄츄는 기쁜 얼굴로 두꺼운 팔을 들어 만세를 했다.
“영광이구만유, 공주님. 제가 공주님을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몸으로 만들어 드릴게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나는 먹은 음식이 소화될 만큼만 움직일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지금의 몸매를 유지하는 거니까.”
“네, 네. 그럼유.”
헤실거리는 거대한 시녀.
눈썹을 찡그린 가녀린 공주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시아나는 흡족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 *
츄츄와 그레이스 황녀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츄츄는 손에 딱 들기 좋게 생긴 돌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레이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뭐야?”
“제가 만든 전용 운동 기구여유.”
츄츄는 먼저 시범을 보였다.
“요 아이를 양손에 들고 이렇게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는 거여유. 맨손으로 체조하는 것보단 이 운동 기구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아유.”
그렇게 말하며 츄츄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편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기에 새하얀 팔이 드러나 있었다.
팔은 어린아이처럼 가늘었다.
‘가장 가벼운 걸로 가져오긴 했지만 드실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츄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돌덩이를 건넸다.
그러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레이스가 태연한 얼굴로 돌덩이를 든 것이다.
츄츄가 커다래진 눈으로 말했다.
“자, 잘 드시네유?”
“가벼우니까.”
그레이스는 새침한 얼굴로 대답하며 돌덩이를 쥔 팔을 움직였다.
그 순간 가는 팔이 볼록해지는 것을 츄츄는 놓치지 않았다.
츄츄는 그레이스의 팔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 보니 마른 팔이라 표가 나지 않아 그렇지 뼈대가 엄청 튼튼하시네유. 천 명에 한 명씩 나오는 황금 골격이여유!”
호들갑스러운 츄츄의 반응에 그레이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게 뭔데. 좋은 거야?”
“그럼유! 최고로 좋은 근육을 가질 수 있는 몸이라는 말이여유.”
“……!”
그 말에 그레이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돌덩이를 손에서 놓았다.
“앗, 공주님. 그렇게 한 번에 놓으시면 위험해유. 손목이 나갈 수도 있다고유. 놓으실 때는 살포시 내려놔야…….”
긴 말을 늘어놓는 츄츄에게 그레이스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나, 운동 안 해!”
그레이스는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싶은 것뿐, 결코 근육질 몸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뚱보가 되는 게 싫어서 해골뼈다귀가 됐더니, 다음에는 근육쟁이가 되라고? 절대 사양이야!’
하지만 그레이스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츄츄가 재빨리 먹을거리를 챙겨 온 것이다.
“시아나의 말대로 야채 위주로 식사를 챙겨 왔구만요.”
거대한 접시에는 샐러드가 듬뿍 담겨 있었다.
마치 코끼리가 먹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하지만 샐러드는 평범한 야채 무덤이 아니었다.
풀냄새 그윽한 샐러드 안에는 고소한 아몬드도 있고, 잘게 찢은 닭고기와 달달한 건포도, 딸기도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알았지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리고 말았다.
몸을 조금 움직였다고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정신을 차리고 소리 질렀다.
“꺄아아악! 다 먹어 버렸어!”
불쾌한 감정이 온몸을 잠식했다. 한시라도 참을 수 없었다.
‘어서 모두 토해 내자.’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츄츄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라고 말하려는 순간 츄츄가 말했다.
“시아나가 공주님께서 식사를 다 하신 후에는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구만유. 공주님, 구토를 한 번 하면 머리카락이 열 가닥 빠지고, 구토를 백 번 하면 이빨이 하나 빠지고, 구토를 천 번 하면 손톱마저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공주님이란들 그런 모습이라면 흉측하겠지요?”
저주와 같은 말에 그레이스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감히 황녀에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하냐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츄츄가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은 저를 약 올리거나 겁주려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참아 보자.’
그레이스는 가까스로 올라오는 토기를 참았다.
하지만 임시방편이었다.
방금 먹은 것들이 곧 살이 되어 제 몸뚱이에 달라붙을 것을 생각하면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레이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아까 하던 운동, 다시 하자.”
“…….”
“그거라도 해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예!”
그렇게 그레이스는 첫 운동을 했다.
그 후부터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운동을 하니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니 음식을 먹었고, 음식을 먹었으니 운동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생각보다 공주님께서 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긴 혔지만, 잘되어 가고 있구먼.’
츄츄에게 중간 상황을 확인받은 시아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시아나는 지금 홀로 식재료 관리실에 있었다.
해가 지자 다른 하급 시녀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갔다.
시아나가 혼자 남은 이유는 내일을 위해 정리해 둔 식재료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잔느가 못된 장난을 쳤던 날 이후로 매일 잊지 않고 하는 일이었다.
식재료를 살피던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밀가루 포대를 모아 놓았어야 할 곳에 보릿자루가 들어 있잖아.”
자루가 똑같이 생겨서 누군가 착각한 모양이었다.
‘역시 확인하기를 잘했어. 자칫하면 밀가루를 보내야 하는 곳에 보리를 보낼 뻔했네.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서 깜빡할 수 있으니 지금 옮겨 두자.’
시아나는 허리를 숙여 보릿자루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무거워!’
시아나는 본래 뼈대가 가늘고 힘이 약했다.
시녀가 되면서 힘이 많이 세지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도무지 여기에서 더 세지지가 않았다.
‘하아. 이 연약한 몸뚱어리.’
부채만 살랑이면 되는 공주라면 모를까, 몸을 쓰는 일이 많은 시녀에게는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츄츄에게 특훈을 받으면 힘이 좀 세지려나.’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힘겹게 끌던 보릿자루가 쑥 하고 들렸다.
시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당근, 감자, 계란, 소시지, 온갖 식재료들이 있는 이곳과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라시드였다.
“저, 전하?”
한 손으로 가볍게 보릿자루를 든 라시드가 빙긋이 웃었다.
“안녕, 시아나.”
아니요. 전혀 안녕하지 못한데요.
그도 그럴 것이 평온하게 인사하기에는 장소와 인물이 너무 어울리지가 않았다.
시아나는 인사를 생략하고 물었다.
“전하께서 이 시간에 이곳에는 왜…….”
라시드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황태자야. 궁을 살펴볼 의무가 있지. 궁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인 식재료 관리실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단다.”
‘아, 네. 그러시구나.’
라고 납득할 리가 없잖아!
‘언제부터 식재료 관리실이 그만큼 대단한 곳이었다고. 아니, 설령 그렇다 한들 어떤 황태자가 그런 것을 신경 쓰냐고요.’
시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개똥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눈빛으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라시드는 역시 속일 수 없는 건가, 라는 얼굴로 눈썹을 내리며 대답을 바꿨다.
“실은 너를 만나러 왔어.”
“……!”
라시드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내 양 볼을 치즈처럼 쭈-욱 늘린 것도 모자라 내 콧등에 입을 쪽 맞추었지. 네가 그런 짓을 했단다, 라고 알려 주니 쌩 하고 도망가 버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다니.”
그렇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제가 한 술주정을 들은 후로 그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츄츄와 그레이스 황녀의 일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딱히 라시드에게 찾아갈 이유도 없었고.
그러나 라시드는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듯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나를 희롱한 것은 너면서. 너무해.”
“……!”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눈을 내리깔고 입을 삐죽이는 얼굴이라니.
꼭 요염한 고양이가 앙탈을 부리는 것 같았다.
꼭 저를 유혹하는 것처럼.
‘으아아아.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시아나는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굳어 버렸다.
라시드는 그 모습을 보며 쿡쿡 웃었다.
‘귀여워라.’
마음 같아서는 품속에 넣고 꼭 껴안고 싶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턱 아래를 간지럽히는 것도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시아나가 나를 경멸하겠지.’
라시드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제 욕망을 참으며 손에 든 보릿자루를 흔들었다.
“아직 일이 남아 있나 보구나. 도와주마.”
황태자가 시녀의 일을 도와주다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평소의 시아나라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나는 지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방금 전에 했던 곤란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멈춘 것만으로 다행이니까.’
시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시드가 환하게 웃었다.
시아나는 한 포대도 들기 힘들어 끙끙거렸던 것을 라시드는 깃털로 채워진 베개라도 들 듯 가볍게 들어 옮겨 버렸다.
보릿자루 네 포를 한 번에 드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곱상한 얼굴과 우아한 태도와 그렇지 못한 힘.’
라시드가 긴 시간 전쟁터를 누볐으며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검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힘도 엄청난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평소에는 너무 나긋나긋하시니까.’
게다가 하늘거리는 옷을 즐겨 입어서 단단한 몸이 전혀 표 나지 않았다.
그저 이름난 예술가가 만든 조각상처럼 아름답고 늘씬해 보이기만 했다.
잠시 후, 시아나의 머리 위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시아나?”
그제야 시아나는 제가 라시드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콕 하고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꺄아아. 이게 무슨 짓이야!’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시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솔직히 말했다.
“힘이 이렇게 세신 걸 보면 옷 속에 가려진 팔뚝이 얼마나 단단할까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황당한 말에 라시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그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내 것이 얼마나 단단한지 궁금해?”
“그, 그게…….”
“궁금하다면 보여 주마.”
시아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라시드는 소매를 걷었다.
이내 흰 옷에 감춰져 있던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시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시드의 팔뚝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울룩불룩한 근육이 얽기 설기 얹혀 단단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멍하니 라시드의 팔뚝을 올려다보던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와, 부럽다.”
“…….”
순간 라시드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아나가 천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팔에 근육이 잘 붙질 않거든요. 전하의 반의반이라도 근육이 붙어 있다면 일하는 게 훨씬 수월할 텐데 말이에요.”
제 가는 팔과 라시드의 팔뚝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아나의 얼굴은 정말로 아쉬워 보였다.
“푸훗.”
결국 라시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큭큭큭, 하고 웃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눈썹을 모았다.
“제 말이 우스우신가요?”
“설마, 그럴 리가.”
시아나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시아나의 동그랗고 앳된 얼굴 아래로 근육질의 몸이 붙어 있는 걸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람쥐의 얼굴에 곰의 몸이 붙어 있으면 그런 느낌일까. 뭐, 그것도 귀엽긴 하지만…….’
라시드가 웃음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난 지금이 좋아.”
“…….”
“작고 말랑말랑하니까. 품에 안기 딱 좋지.”
시아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누가 들으면 딱 오해하기 좋게 말씀을 하시네요. 저와 포옹 한번 한 적 없으시면서 왜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세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두 손을 양옆으로 쭉 뻗었다.
“그럼 지금 안아 볼까?”
시아나는 입을 벌리고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쿵.
시아나는 라시드의 두 손 위로 묵직한 보릿자루를 올려 주었다.
“순진한 시녀를 희롱하지 마시고 일이나 도와주세요.”
“…….”
희롱하는 것 아닌데. 진심인데.
라시드는 억울한 얼굴로 입을 비쭉 내밀었다.
* * *
시아나는 오랜만에 그레이스 황녀의 궁을 찾았다.
‘황녀 저하께서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뵙네.’
시아나는 그레이스의 시녀가 아닐뿐더러 식재료 관리실이라는 근무처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그간 그레이스의 궁에 오지 않았다. 괜히 이런저런 말이 나올까 봐서였다.
대신 츄츄가 종종 시아나를 찾아와 그레이스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츄츄의 말로는 그레이스 황녀님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고 했지.’
얼마나 좋아지셨을까?
시아나는 기대를 품고 문을 열었다.
“어서 오거라, 시아나.”
산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원한 목소리였다.
시아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환한 햇빛 아래, 그레이스 황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시아나가 그레이스를 보지 않은 것은 고작 열흘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레이스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새까만 머리카락, 백옥같이 뽀얀 얼굴.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지만 풍겨지는 기운이 달랐다.
유리처럼 여려서 조금만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았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푸르른 나무 같은 생기가 느껴졌다.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뭘 그렇게 보니?”
“황녀 저하께서 못 본 사이 더 아름다워져서요.”
멍한 얼굴로 내뱉은 시아나의 말에 그레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너도 아부를 하니?”
시아나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부가 아닙니다. 얼굴의 혈색도 좋아지셨고 머리카락도 윤기가 나는 데다가 눈빛도 초롱초롱해지셨는걸요.”
“…….”
그레이스는 원래 시녀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시녀들은 제가 모시는 존재라면 뚱뚱하든, 비쩍 마르든, 심지어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인이든 아름답다며 극찬을 할 테니까.
하지만 왜일까.
시아나의 말은 그런 꿀 바른 거짓말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레이스의 말에 시아나가 방긋이 웃었다.
“무엇보다 편안해 보이세요.”
“……사실 그래. 요즘은 음식을 먹고 토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니까.”
아무리 야채 위주로 먹는다고 해도 그레이스에게 음식을 삼키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행위였다.
하지만 이전처럼 독을 먹는 것 같은 숨 막히는 공포는 아니었다.
‘음식을 먹고 몸을 움직이면 돼. 그럼 절대 살은 찌지 않아.’
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음식을 먹은 후에는 바로 몸을 움직였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나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 두려움조차 사라졌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생각보다 운동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더라.”
그레이스의 옆에서 얌전히 서 있던 츄츄가 끼어들었다.
“그야 공주님은 운동 천재니까유!”
츄츄는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츄츄가 살다 살다 공주님처럼 몸을 잘 쓰는 분은 처음 보는구만유. 아무리 무거운 무게도 들라 하면 척척 들고. 점프를 하시면 저~위까지 쑥 올라가고. 유연성도 좋으셔서 신체 어디든 쫙쫙 찢으시고.”
그레이스가 눈썹을 찡그려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 창피하다.”
“에이. 창피하기는유! 이렇게 훌륭한 재능은 널리 널리 알려야쥬!”
츄츄가 신난 얼굴로 돌덩이로 만든 운동 기구를 가져왔다.
“공주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여 주셔유. 분명 깜짝 놀랄 것이구만유.”
그레이스가 기가 찬 얼굴로 츄츄를 바라보았다.
‘황녀 보고 시녀 앞에서 힘쓰는 모습을 보여 주라니, 제정신이야?’
그러나 그레이스가 뭐라 하기 전에 시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츄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놀랐어요. 그렇게 힘이 좋으시다고요.”
“그냥 좋으신 게 아니여. 완전 천하 장사시랑께!”
덩치 큰 시녀와 쬐끄만 시녀.
두 시녀가 번쩍번쩍 눈을 빛내며 쳐다보니 영 피할 도리가 없었다.
‘괘씸한 시녀들.’
그레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츄츄가 가지고 온 운동 기구로 손을 뻗었다.
“우와아!”
시아나는 눈을 빛내며 박수를 쳤다.
“우어어!”
츄츄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박수를 쳤다.
수달처럼 두 손으로 연신 박수 치는 두 사람 앞에서 그레이스는 거대한 돌덩이를 들고 있었다.
시아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내려놓은 돌덩이를 들어 보였다.
두 손으로 잡아 힘을 줘 보았지만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무거워요. 이런 것을 어떻게 그렇게 거뜬히 드시는 거예요?”
두 눈으로 봤어도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레이스의 팔뚝은 시아나와 큰 차이도 없지 않은가.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냥 돼.”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여도 별수 없다. 사실이니까.
그레이스의 답변에 시아나는 흥분한 얼굴로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을 잔뜩 늘어놓았다.
츄츄도 한껏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지? 그렇지?’ 하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흥. 힘이 좀 센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레이디에게는 오히려 흉이야.’
그레이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것보다 더 무거운 것도 들 수 있는데. 그것도 보여 줄까?”
“네!”
그레이스의 말에 시아나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레이스가 아까보다 더 거대한 운동 기구를 들려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 공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손님이 없던 터라 그레이스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내 시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작 님이십니다.”
“……!”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운동 기구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시아나와 츄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 폰 헤이스팅스.
예상 못한 약혼자의 방문에 그레이스는 난리가 났다.
“어서 치워!”
그레이스의 외침에 츄츄가 황급히 바닥에 늘어져 있는 운동 기구를 들어 침대 아래로 숨기기 시작했다.
그레이스가 방 안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이런 어마어마한 무게의 것들을 들어 올린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절대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시아나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공주님, 앉으세요. 단장해 드리겠습니다.”
격한 운동으로 지금 그레이스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원래는 그레이스의 치장을 맡는 시녀를 불러야 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나에게 몸을 맡겼다.
시아나는 능숙하게 그레이스를 꾸미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고 하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닦았다.
그 위에는 진주 가루로 만든 파우더를 톡톡 두들겼다.
입술 위로는 장미 꽃잎으로 만든 루즈를 한번 스윽.
워낙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었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히 그레이스는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이 되었다.
시아나가 물었다.
“옷은 어떻게 할까요.”
평소라면 그레이스는 코르셋에 페티코트까지 제대로 갖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숄만 걸쳐 줘.”
이래 봬도 약혼 3년차였다.
그 정도는 아이작도 이해를 할 터였다.
* * *
“들어오세요, 아이작 님.”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아이작이 방문을 열었다.
원래 귀족이 황족을 찾아오려면 미리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황궁에 온 후에도 응접실로 안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특별했다.
아이작은 별도의 연락 없이 언제든 그레이스를 찾아올 수 있었고, 응접실이 아닌 그레이스의 방으로 곧장 왔다.
약혼자의 특권이었다.
아이작이 방 안에 들어섰다.
부드러운 진갈색 머리카락, 단정한 얼굴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그레이스의 뒤에 서 있던 시아나와 츄츄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얍삽하게 생겼네.’
분명 잘생긴 미남자긴 했지만 묘하게 별로였다.
‘공주님에 비하면 하아아아안차아아암 모자라.’
시아나와 츄츄는 같은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수고했어. 너희는 이제 가 보거라.”
아무리 시아나와 츄츄가 최근 그레이스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시녀들이라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약혼자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와 츄츄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츄츄가 말을 덧붙였다.
“담당 시녀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더.”
츄츄의 말에 그레이스가 웃었다.
“이제 제법 눈치가 생겼구나. 그렇게 해.”
그레이스의 칭찬에 츄츄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아나와 츄츄가 방을 나갔다.
아이작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시녀들과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요.”
그레이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무척 생각해 주는 시녀들이에요.”
“아랫사람을 아끼는 것은 공주가 갖출 미덕 중 하나지요. 하지만 선을 잘 지키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아랫사람에게 휘둘리는 모양새가 되어 모양이 우스워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네.”
그레이스는 살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작은 평소에 무척 다정했다.
하지만 이따금 그레이스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면 저렇게 하나하나 지적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레이스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작 님은 나를 걱정해서 저런 말을 해 주는 거잖아. 나쁜 생각하지 말자.’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레이스를 쳐다보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평소와는 다르군.’
언제 어느 때에 찾아와도 그레이스는 늘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머리 장식을 꽂고, 허리를 꽉 조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팔랑이는 치맛자락 아래로는 뾰족한 구두가 반짝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머리 장식 하나 없이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에 잠옷같이 헐렁한 드레스라니.’
누군가는 그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운 미가 있다 평할지도 모르지만 아이작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약혼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주란 자고로 누구의 앞에서도 완벽하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거야. 지금처럼 낮잠을 자다가 깨어난 하층민처럼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라!’
아이작은 그렇게 쏘아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무리 제 말을 잘 따르는 약혼녀라 해도 그레이스는 황녀. 그런 식으로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이작은 눈을 휘며 다른 말을 꺼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아이작 님께 부탁드렸잖아요. 언제든 제가 보고 싶어지면 편하게 찾아오시라고요.”
그레이스는 아이작의 급작스러운 방문을 무척 특별하게 생각했다.
의무적인 관계와는 전혀 다른 애틋한 관계라고.
‘바보 같을 만큼 순진한 생각. 그래서 귀엽기는 하지만.’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공주님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꺅!’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어진 그레이스를 향해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반은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답니다.”
“걱정이라니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레이스에게 아이작이 말했다.
“라일라 황비마마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요즘 공주님께서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많다더군요. 여인들의 티 파티에도 참석을 하지 않으시고요.”
“아…….”
그레이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요 근래 그레이스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구토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성 밖에 나가면 야채를 챙겨 먹는 것도 먹고 바로 운동을 하는 것도 힘드니까.’
설마 아이작이 그것을 신경 쓸 줄은 몰랐다.
‘혹시 3년 전처럼 내가 살을 빼느라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건 줄 알고 걱정하신 걸까.’
그런 것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레이스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나태해져서는 안 됩니다, 공주님.”
“……?”
그레이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식사량이 늘었다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 배부르게 식사를 하니 나른해져서 온종일 방 안에서 누워 계셨던 거죠? 잠잘 때나 입을 법한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고 말입니다.”
“…….”
“그러면 정말 곤란해요. 순식간에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신단 말입니다.”
뚱뚱하고, 흉측했던 그때로.
아이작의 다정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그레이스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굳었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 그렇지 않아요, 아이작 님. 예전으로 돌아갈 일은 절대 없어요. 식사량이 는 것도 야채 위주로 먹고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방 안에서는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운동을 하고 있어요.”
상상하지도 못했던 단어에 아이작의 눈이 커졌다.
“운동이요?”
“네. 몸을 움직여서 살이 찌지 않게 관리하고 있어요. 땀을 흘리니 몸도 가벼워지고 잠도 푹 잘 수 있어 좋더군요.”
저도 모르게 운동이 가져다준 좋은 점을 늘어놓는 그레이스를 향해 아이작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주님이 운동이라니.’
아이작에게 운동이란 육체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남자들이 하는.
물론 여자들 중에도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잡일을 하는 시녀들이나 농부들이었다.
그들의 몸은 한눈에 보아도 단단하고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레이스가 그런 몸으로 변할 것을 상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작은 다급한 얼굴로 그레이스의 하얗고 가는 손을 잡았다.
“공주님.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지금 공주님의 모습이 좋습니다. 여리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으로 제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니 운동 같은 것은 그만두십시오. 살이 찌는 게 불안하신 거라면 식사량을 다시 줄이면 되지 않습니까.”
그 순간 그레이스는 가슴이 숨 쉬기 힘들 만큼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할지 알았으니까.
그레이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이작이 돌아간 후 그레이스는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왔구만유.”
그레이스가 운동을 시작한 후 식사를 담당하고 있는 츄츄의 목소리였다.
“…….”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자 츄츄가 말을 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토마토를 얹은 아삭한 양상추 샐러드에 레몬과 마늘을 넣어 만든 새콤한 드레싱이어유. 그리고 그 위에 보슬보슬한 리코타 치즈와 구운 빵을 곁들었구만유.”
츄츄가 고민하여 만든 특제 메뉴.
이름하여 ‘얼핏 보면 풀떼기지만 한 접시 먹으면 배가 든든한 한 끼’였다.
매번 그레이스는 안 먹을 것처럼 굴다 가도 접시를 싹 비우고는 했다.
그러나 츄츄의 기대감과 달리 그레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안 먹어.”
문밖에 있던 츄츄가 눈을 크게 떴다.
한번 말을 하면 얌전히 들으면 좋으련만.
기어이 츄츄는 방 안에 들어서고 말았다. 두 손에는 푸짐하게 담긴 샐러드 접시를 들고서.
츄츄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주님, 그러지 말고 한 접시만 드셔유. 아까 아이작 님께서 찾아오신 탓에 운동을 한 후에 간식도 챙겨 드시지 않으셨잖아유. 분명 배가 고프실 텐데…….”
그레이스가 대답이 없자 츄츄는 초조해졌다.
츄츄는 걱정 어린 얼굴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드셔유.”
“됐다니까!”
그레이스가 짜증이 솟구친 얼굴로 츄츄가 들고 있던 접시를 내쳤다.
쨍그랑-!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접시가 깨지며 안에 담겨 있던 음식이 흐트러졌다.
“으메.”
눈을 크게 뜬 츄츄를 향해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먹기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구, 굶으셨다가 또 폭식을 하시면 어떡해유. 그럼 또 토를 하실 텐데…….”
“그냥 그렇게 살게 둬!”
“…….”
“그렇게 살아도 지금껏 괜찮았으니까.”
아니, 어찌 보면 지금의 몸매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런 좋은 방법을 왜 버리려고 했을까.
“…….”
그레이스의 눈빛이 퀭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처럼.
츄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훌쩍였다.
“하지만 공주님. 시아나가 그랬잖아유. 계속 그러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지실 수도 있다구유.”
츄츄에게는 상상만 해도 소스라칠 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죽지 뭐.”
“…….”
“아이작 님에게 미움받느니 그 편이 나아.”
* * *
츄츄가 방문 앞에 서서 말했다.
“공주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왔구만유.”
방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져가!”
그레이스의 대답은 그것이 끝이었다.
츄츄는 어두운 얼굴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레이스 황녀가 방문을 닫은 지 이틀. 식사를 물린 것도 그때부터였다.
공주님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츄츄에게 다른 시녀들이 말했다.
“공주님은 원래 일 년 중 며칠은 단식을 하셔. 최근 급격히 살이 찐 것을 빼기 위해서 저러시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쓸 것 없어.”
한마디도 덧붙였다.
“이맘때의 공주님은 아주 예민해. 그러니 괜히 공주님을 걱정하는 척한답시고 얼쩡거리지 마.”
시녀들의 눈빛이 사나웠다.
선연한 적의였다.
그도 그럴 게 현재 그레이스 황녀를 모시는 시녀들 사이에서 츄츄의 입지는 최악이었다.
얼마 전 음식 도둑으로 의심받은 것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츄츄는 그레이스 황녀의 식사 담당 시녀로 파격 배정되었다.
그뿐인가.
그레이스 황녀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츄츄를 불러 노닥거리곤 했다.
뭘 하는지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가진 것이라고는 근육밖에 없는 저런 애가 뭐 그리 좋다고!’
그레이스 황녀를 모시는 시녀들에게 츄츄는 적과 다름없었다.
츄츄도 눈치가 있는지라 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수습 시녀였던 시절 나를 가르쳤던 시녀님께서 말씀하셨지. 궁에서는 잘하는 것보다 모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여.’
그레이스는 츄츄의 관심을 원치 않았고, 궁의 시녀들도 츄츄가 나대면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럴 때는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조용히 몸을 낮추어야 했다.
그것이 궁에서 길게 살아남는 법이었다.
하지만 츄츄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려! 공주님이 방 안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 게 뻔한디.’
츄츄는 그레이스를 도와주고 싶었다.
결국 츄츄는 시아나를 찾아갔다.
“시아나, 큰일이여. 공주님이 이상해지셨구먼.”
“그게 무슨 말이야?”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츄츄가 말했다.
“며칠 전 공주님의 약혼자가 찾아왔었잖아. 그 여우처럼 생긴 놈이 뭔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때부터 공주님이 식사를 하지 않고 있구먼.”
짧은 말에서 시아나는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다.
시아나는 츄츄와 함께 그레이스 황녀의 궁으로 향했다.
“황녀 저하, 시녀 시아나입니다.”
똑똑.
방문을 두들겨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녀 저하.”
똑똑.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츄츄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노크를 하면 대답은 해 주셨는디 왜 아무 말도 없으시지? 식사를 너무 오래 하지 않으셔서 쓰러져 버린 것 아니여?”
시아나는 츄츄의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이내 시아나는 결심한 듯 문고리를 잡았다.
“황녀 저하, 들어가겠습니다.”
허락도 없이 시녀가 황녀의 방에 들어서는 것은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츄츄의 말대로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발견하는 게 중요했다.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선 츄츄와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그레이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그레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
츄츄와 시아나는 할 말을 잃었다.
며칠 전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그레이스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생기 없는 눈, 움푹 파인 볼.
입 주변에는 질척한 타액이 맺혀 있었다.
구토의 흔적이었다.
그레이스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안 먹으려고 했는데…….”
“…….”
“이번에는 정말 안 먹으려고 했는데…… 너, 너무 배가 고파서…….”
그제야 츄츄와 시아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발견했다.
어디에서 가지고 온 것인지 모를 접시에는 부서진 빵가루와 작은 고깃덩어리가 묻어 있었다.
그레이스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다, 다 토해 낸 게 맞을까? 배, 배 속에 남은 게 있으면 어쩌지? 응?”
“…….”
“…….”
시아나의 츄츄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깨달았다.
아슬아슬 위태했던 아름다운 공주님이 기어이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을.
“아이구, 우리 공주님, 불쌍해서 어떡해.”
츄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그 옆에 선 시아나는 말없이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한 발짝 다가갔다.
시아나는 무릎을 굽혀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시아나는 품속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그레이스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 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황녀 저하.”
“…….”
그레이스가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이내 그레이스의 눈동자에 한기가 서렸다.
“뭘 그만하라는 거야!”
“…….”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데. 분명 다시 살이 뒤룩뒤룩 쪄 버릴걸.”
흉하디흉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작 님도, 얄미운 귀족 여인들도, 본심을 숨긴 시녀들도, 모두 나를 무시하고 경멸할 거야!”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
그것이 아니면 제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레이스의 눈동자 아래로 처연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아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러면 좀 어때요.”
“……!”
“결국 소중한 건 자기 자신뿐인데.”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황녀 저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 때문에 스스로를 망치지 마세요.”
그레이스는 부릅뜬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레이스는 시아나를 껴안으며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 * *
“이제 좀 진정이 되시나요?”
시아나의 말에 그레이스가 코를 훌쩍였다.
“……응.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나.”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오늘 궁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시아나의 능청스러운 말에 그레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널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말하는 게 이제 막 중급 시녀가 된 애 같지가 않아. 꼭 황족들을 오랫동안 모신 상급 시녀 같다니까.”
“황송한 칭찬이네요.”
시아나가 웃었다.
그레이스가 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방 안에는 시아나와 그레이스 둘뿐이었다.
그레이스가 울자마자 따라 울었던 츄츄는 방금 전 방을 나갔다.
챙겨 올 것이 있다면서.
처연한 울음소리가 사라진 방은 조용했다.
시아나는 따스하게 적신 천으로 그레이스의 눈가를 살포시 눌러 주었다.
그레이스는 얌전히 시아나에게 몸을 맡겼다.
실컷 울어서일까.
퉁퉁 부은 눈 위에 덮인 따스한 온기 때문일까.
‘편안해.’
그레이스는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아나.”
“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말씀하세요.”
“네가 전해 그랬지. 너도 나랑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고. 그러니까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아나를 향해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네 얘기를 듣고 싶어. 너는 왜 나 같은 지옥에 빠지게 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지옥을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
시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저도 황녀 저하와 비슷한 이유였어요.”
“…….”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죠.”
정확히는 살아남고 싶었다.
어린 시아나에게는 저를 지켜 줄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열네 살.
작년보다 키가 한 뼘 자란 시아나는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조건 없이 제 편이 되어 줄 친모는 죽었고 친부는 새 왕비에게 빠져 제게 관심이 없었다.
‘뒷배 없는 공주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가 시아나를 지켜 주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을 때였다.
새로운 힘을 가져야 했다.
시아나는 결론을 내렸다.
‘무력한 어린 공주가 가질 수 있는 힘은 아름다움뿐이야.’
왕국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최고의 미로 꼽았다.
다행히 시아나는 가진 것이 많았다.
잘 다듬어진 밀색 머리카락.
햇볕을 피해 만든 흰 피부.
‘하지만 가녀리지 않다는 게 문제구나.’
시아나는 젖살이 있는 통통한 얼굴 때문에 여린 공주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폭식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구토를 했다.
어린 공주가 견디기에는 혹독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효과가 있었다.
젖살이 빠지고 턱이 갸름해진 것이다. 코르셋까지 걸치니 허리도 부러질 듯 잘록했다.
‘이제 됐다!’
목표를 이룬 시아나는 아직 앳된 얼굴 위로 진한 화장을 하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짧은 시간 사이 변한 공주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다.
“잠시 보지 못한 동안 공주님께서 아름다워지셨네요.”
“그러게요. 꼭 장인이 만든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간 시아나를 무시했던 귀족들이 웃으며 시아나를 둘러쌌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버지의 반응이었어요.
“못난 줄만 알았는데 크더니 죽은 왕비를 닮아 가는구나. 그녀는 미인이었지. 수수하지만 어여뻤어.”
왕은 추억에 잠기듯 웃었다.
시아나가 아버지의 그런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왕이 말을 이었다.
“이대로 쭉 곱게 자라거라. 내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 줄 테니.”
시아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저를 무시했던 귀족들과 아버지가 제게 관심을 가졌으니 이 지옥 같은 생활이 나아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
그것에 취해 시아나는 잊고 있었다.
새 왕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자인지를.
새 왕비는 어여쁘게 웃고 있는 시아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어린 계집년이 조금 컸다고 볼품없는 외모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구나.”
괘씸하게.
새 왕비는 그런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며칠 뒤, 차를 한 모금 마신 시아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배 속이 뒤틀어지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고통이 일어난 것이다.
순식간에 시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독?!’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시아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어떻게든 토해 내야 해!’
살을 빼기 위해 토를 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어린 공주의 삶이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우욱!”
하루 종일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기에 시큼한 위액과 타액만이 나왔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계속 구토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게 배 속을 다 비웠음에도 독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시아나를 망가뜨려 버렸다.
탐스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도톰했던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졌고 매끈했던 피부 위에는 두드러기가 났다.
어느 날, 시아나를 본 왕이 말했다.
“몰골이 끔찍하구나.”
“…….”
“츳, 왕비처럼 곱게 크면 값을 두둑하게 받아 시집을 보낼 수 있을까 했는데 그마저도 힘들겠군.”
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딸을 앞에 둔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었다.
물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어 짜증이 난 상인의 얼굴이었다.
왕뿐만이 아니었다.
시아나 주변을 둘러싸고 웃던 귀족들은 이제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저 시아나를 힐끗거리며 킥킥거렸을 뿐이다.
흠집 난 보석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어린 공주님이 예쁘고 사랑스럽다며 웃던 시녀와 시종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그들은 시아나에게 필요 이상의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시아나는 깨달았다.
‘나의 가치는 오직 아름다움뿐이었구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시아나가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달은 순간 구역질이 차올랐다.
음식을 먹어서 나오는 토기가 아니었다.
제가 가지려 했던 힘에 대한 환멸이었다.
‘내게 허용된 유일한 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것은 끔찍한 독이야.’
힘을 얻는 동시에 나를 갉아 먹는 독.
이따위 힘은 가져 보았자 나를 망칠 뿐이다.
시아나는 한 자락의 망설임도 없이 그 힘을 포기했다.
* * *
열여덟 살의 시아나가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후로 저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그만두었어요. 반짝이는 보석을 몸에서 빼고, 진한 화장을 지우고,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죠. 인형처럼 고왔던 소녀는 사라졌답니다.”
“…….”
시아나의 옆에 있던 그레이스 황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시아나는 그레이스에게 제가 한 나라의 공주였다는 사실은 빼고 말했다.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아름다움을 유일한 힘이라고 믿고, 그 끈을 잡기 위해 애쓰는 존재는 공주만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의 소녀들은 누구든 한번쯤 그 끈을 잡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시 박힌 끈이었다.
잡는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몸매를 날씬하게 하고, 마사지로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고, 머리카락을 탐스럽게 다듬고,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시아나가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남을 위해서 공주님을 꾸미지는 마세요. 그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레이스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시아나는 웃었다.
“그럼요.”
“…….”
“공주님은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황비마마의 따님이잖아요.”
그레이스는 어쩔 수 없이 고된 길을 선택했어야 했던 시아나와 달랐다.
황제와 황비는 딸에게 무심한 대신, 황족으로서의 드높은 권력과 풍요로운 부를 주었다.
“공주님께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사셔도 돼요. 예쁘게 꾸미는 게 좋으시면 최고급 드레스와 보석으로 맘껏 사치를 부리시고요. 먹고 싶은 케이크가 있으면 다 드세요. 마음에 안 드는 자가 있으면 눈을 흘기며 한소리도 하시고요. 그렇게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 없어요.”
“……응.”
“그러다가 마음에 쏙 드는 분이 있으시면 진지하게 만나도 보시고요.”
그 의미를 깨달은 그레이스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는 아이작 님이 있어.”
“알아요. 하지만 공주님이 꼭 현재의 약혼자와 결혼하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요.”
그레이스와 아이작의 약혼은 아이작의 가문에서 밀어붙여 추진한 것이다.
아이작의 집안이 더 이득인 혼약이란 말이었다.
그레이스 황녀 측은 이 결혼이 파투가 나도 하나도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니 그레이스가 이 결혼이 정말 하기 싫다고 엄포를 놓는다면, 라일라 황비는 파혼을 크게 반대하진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파혼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답니다. 잘만 하면 저쪽에 파혼의 원인을 뒤집어씌워 이것저것 얻어 내며 끊어 내는 것도 가능하고요. 그러니 파혼을 원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시아나를 보며 그레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넌 맹한 얼굴로 가끔 무서운 말을 하더라.”
그때였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며 츄츄가 나타났다.
시아나와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츄츄가 끌고 온 카트에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딸기 케이크, 탐스러운 포도, 동그란 초콜릿, 생크림이 들어간 빵, 싱그러운 샐러드.
그레이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다 뭐야?”
“울고 나면 배가 고프잖아유. 공주님께서 허기지실 것 같아서 가벼운 간식거리를 챙겨 왔구만유.
도저히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츄츄가 공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또 너무 눈치 없이 가지고 왔나유? ……그래도 조금이라도 드셔유, 공주님.”
“…….”
그레이스는 츄츄를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며칠 전, 그레이스는 츄츄가 음식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냈다.
평범한 시녀라면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시는 음식을 챙겨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츄츄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그레이스를 찾아왔다.
제발 한 입이라도 먹으라면서.
‘정말 바보라니까.’
그레이스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본 츄츄가 당황했다.
“왜 그러셔유, 공주님. 혹시 제가 공주님이 싫어하는 음식만 골라왔나유? 아니면 먹고 싶으신데 먹으면 안 될까 봐 그러시는 거예유? 만약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유. 제가 살이 쪽쪽 빠지는 운동을 알려 드릴게유.”
혹시나 그레이스가 싫다고 할까 봐 필사적인 얼굴로 말하는 츄츄를 향해 그레이스가 웃었다.
“응, 알려 줘.”
“……!”
“그런데 이번엔 날씬해지는 운동 말고 내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운동을 하고 싶어.”
그레이스 황녀는 강해지기로 했다.
아름다움이 아닌 새로운 힘으로.
* * *
그레이스 황녀의 별명이 바뀌었다.
일곱 명의 황녀 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에서…… 일곱 명의 황녀 중 가장 이상한 공주님으로.
가장 큰 변화는 외모였다.
더 이상 그레이스는 ‘그린 듯한 공주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레이스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보석과 레이스가 살랑이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각이 잡힌 여성용 정장을 입었다.
여인들이 승마를 할 때나 입는 활동성 좋은 옷이었다.
그리고 발을 꽉 조이는 뾰족한 구두 대신 굽이 튼튼한 부츠를 신었다.
“난 사실 얼굴이 답답한 화장도, 살랑대는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도, 발이 아픈 구두도 질색이었어.”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것이다.
제국의 여인은 머리카락 길이가 자유로웠지만,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짧은 머리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제 머리를 보고 충격받은 얼굴을 한 이들을 향해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별 이유는 아니야. 머리가 길면 먹을 때 불편하거든.”
더 이상 그레이스 황녀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행복한 얼굴로 스테이크 한 조각을 큼직하게 썰어 입에 넣었다.
그레이스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거대한 송아지 스테이크, 붉은빛을 띤 토마토 닭고기 스튜, 사과와 건포도를 넣어 만든 샐러드, 산더미처럼 쌓인 쿠키.
테이블 주변에 앉아 있던 시녀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쑥덕거렸다.
“공주님이 정말 저 음식들을 혼자 다 드신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처럼 작은 양만을 먹었던 공주님이었다.
시녀들은 도무지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경악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시녀들을 향해 그레이스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녀의 저주를 받은 것도, 정신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까. 그냥 예전으로 돌아간 것뿐이야.”
그레이스를 어렸을 때부터 모셨던 시녀들은 그 말의 의미를 대번에 깨달았다.
원래 그레이스는 먹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스를 보던 시녀 중 한 명이 나섰다.
오랜 시간 그레이스를 모신 시녀 비비였다.
“공주님, 잘 드시는 것은 좋으나 이렇게 드셨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시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레이스가 쿠키를 오독 씹으며 눈을 흘겼다.
“너희들이 모시는 존재가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에서 황궁에서 제일 뚱뚱한 공주로 돌아가는 것이 싫은 건 아니고?”
그레이스의 말에 비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럴 리가요! 저희는 그저 공주님의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
그레이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랄 게 없겠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거든.”
커다란 소시지를 우물거리는 그레이스를 향해 비비가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 츄츄가 나섰다.
“아이구, 그만들 좀 하셔유. 개도 먹을 땐 안 건드린다는데 공주님께서 식사를 하시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으셔유. 공주님 체하겠어유.”
“……!”
비비와 시녀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츄츄는 일개 하급 시녀였다.
그에 반해 비비와 다른 시녀들은 중급 시녀와 상급 시녀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츄츄에게 위아래도 모르고 말을 한다며 뺨따귀를 때릴 수가 없었다.
현재 츄츄는 그레이스가 가장 총애하는 시녀였기 때문이다.
비비와 시녀들은 분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스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천천히, 우아하게, 테이블 위의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
디저트로 조각 케이크 5개와 셔벗 3접시를 먹은 그레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가를 닦았다.
“음, 이제 좀 배가 차네.”
평범한 사람의 10배는 족히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레이스는 두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츄츄, 시작하자.”
“옙!”
츄츄는 신난 얼굴로 두 손 가득 물건들을 챙겨 왔다.
묵직한 돌로 만든 운동 기구였다.
그레이스가 목을 까닥까닥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더 무거운 무게를 들어 보고 싶어.”
“좋지유!”
츄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팔뚝만한 운동 기구를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흡!”
그레이스는 조금 힘든 얼굴을 했지만 거뜬하게 운동 기구를 들었다.
츄츄가 꺅꺅거리며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단하시구만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무게는 제대로 들지 못하셨는디.”
“후후. 며칠 동안 열심히 힘을 키웠으니까.”
땀을 흘리는 그레이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식사가 끝난 후 츄츄와 함께하는 운동은 그레이스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는 그레이스의 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레이스 공주님!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아이작이 서 있었다.
늘 부드럽게 웃고 있던 아이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아이작은 그레이스에 대한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레이스 황녀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잘 먹고, 잘 움직이고, 목소리까지 커졌다.’
끔찍한 소식은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정색한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곱디고운 손에 도대체 뭘 들고 계시는 겁니까.”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한 아이작과 달리 그레이스는 태평했다.
“내 시녀가 만든 운동 기구예요. 이렇게 들고 올렸다 내렸다 하면 팔에 힘이 붙는답니다.”
이것 보라는 듯 손에 든 돌덩어리를 움직이는 그레이스를 보며 아이작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하십시오! 그러다가 그 가는 팔에 근육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아니, 벌써 생겼잖아?!”
조각상처럼 매끈하기만 했던 그레이스의 팔뚝에 볼록한 알통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작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장도 하지 않으셨군요.”
아이작이 그레이스의 맨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이작은 그레이스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건만,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요즘은 일상생활을 할 때는 화장을 하지 않고 있어요.”
“아아.”
아이작은 절망 어린 얼굴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그레이스의 모습에 예전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이작은 그것에 한 자락 희망을 걸며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공주님, 어떤 꼬임에 넘어가서 이러시는지 몰라도 정신 차리십시오. 이건, 이건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요?”
그레이스는 아이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작은 제 말이 공주에게 닿는다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말을 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공주님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무식하고 흉한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필시 공주님을 비웃을 겁니다. 예전처럼 말입니다.”
아이작은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어떤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특히 외모에 관한 말은 마음 깊이 담아 두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 말을 들을 거야. 내 모습이 그렇게 흉하냐고 두려움에 떨 테지.’
하지만 그 얼마나 바보 같은 착각인지.
그레이스가 또렷한 눈동자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신 황제 폐하와 제3황비의 적녀인 나를 평가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괘씸하기 짝이 없군요. 당장 엄벌에 처해야겠어요.”
“……네?”
“어서 말씀해 주세요, 아이작 님. 누가 감히 저를 보고 비웃던가요?”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녀의 분노가 향한 곳은 명백했다.
아이작이었다.
‘일개 백작가의 영식 따위가 나를 평가하느냐. 아무리 약혼자라 해도 나를 비하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레이스의 분노를 눈치챈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늘 저보다 작고 약해 보였던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저보다 커 보였다.
아이작이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공주님. 저는 정말 공주님께서 안 좋은 말이라도 들으실까 봐 걱정이 되어 그랬습니다.”
그레이스는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하, 시녀들이나 아이작 님이나 하는 말이 똑같구나. 언제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들이 정말 그레이스를 생각했다면, 그레이스가 핼쑥한 얼굴로 굶는 것을 보며 그토록 신나게 박수를 치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고 싶은 감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들은 꽃이 아름답게 피기 위해 제 몸에 달라붙은 가지를 잘라 내는 고통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이제 그레이스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일까.
평소 그레이스의 눈에 아이작은 반짝반짝 빛나는 왕자님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뭐야, 이 비열하게 생긴 여우는.’
놀랄 만치 못생겨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레이스를 늘 설레게 했던 부드럽게 휜 눈이 이상하리만치 얄미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꿀밤을 때리고 싶을 만큼.
따콩!
아이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스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내려친 탓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일그러진 표정을 한 아이작을 바라보며 그레이스가 웃었다.
“아, 미안해요. 오늘 식사를 많이 했더니 힘이 넘쳐서 그만.”
아이작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레이스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아이작 님, 지금 보니 팔뚝이 너무 가느시네요.”
“네? 그, 그게 무슨…….”
“아무리 편안하게 놀고먹는 것이 미덕인 귀족이라지만 근육이 이렇게 없어서야 멋진 성인 남성이라 할 수 있나요?”
“뭐, 뭐라고요?”
황당한 말에 펄쩍뛰는 아이작을 향해 그레이스가 말했다.
“운동을 좀 하세요, 아이작 님. 아이작 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주님!”
아이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 *
그레이스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츄츄가 말했다.
“돌아가는 아이작 님의 얼굴이 장난이 아니던데유.”
아이작은 더는 그레이스의 말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떠나 버렸다.
늘 웃고 있던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그레이스는 차가운 얼음이 든 레몬티를 홀짝이며 말했다.
“뭐 그러다 말겠지.”
불과 며칠 전이라면 아이작의 작은 감정 하나하나까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원하는 만큼 식사와 운동을 하며 몸에 힘이 붙을수록 아이작에 대한 애정이 식어 갔다.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기껏 남부러울 것 없는 공주로 태어났는데 내가 왜 고작 백작가의 셋째 아들에게 눈치를 봐야 해?”
“…….”
“기어도 저쪽에서 기어야지. 나는 아쉬울 게 없어.”
당당한 말에 츄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맞는 말씀이시구만유.”
시녀의 명쾌한 말에 그레이스가 킥킥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얼굴에 맺힌 땀방울 위로 바람이 스쳐 간 순간 기분 좋은 상쾌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