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름다운 공주님 (1)
식재료 관리실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잔느는 시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히 일했고, 사사건건 찾아와 시비를 걸던 옴도 조용했다.
다른 하급 시녀들도 성실히 일했다.
하급 시녀 중 한 명인 소피가 물었다.
“시아나 님, 이제 정말 일이 능숙해지셨어요.”
“그래?”
“네. 꼭 몇 년 동안 이곳에 계신 분 같다니까요.”
소피의 칭찬에 시아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비록 임시로 와 있는 곳이긴 하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던 만큼, 소피의 평가가 기뻤다.
‘앞으로 남은 기간도 열심히 해야지.’
그 결심대로 시아나는 꼼꼼하게 식재료들을 관리했다.
그러던 중 시아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에서 요청하는 식재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네?”
보통 각 궁에서 필요로 하는 식재료들은 양이 일정했다.
크게 인원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도 마찬가지야. 황녀 저하 한 분과 그분을 모시는 시녀와 시종이 총 26명.’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요청하는 식재료의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와서는 27명이 먹는 양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많을 정도였다.
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누가 식재료를 빼돌리고 있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따금 시녀나 시종 중에는 주인의 눈을 피해 황궁의 물품을 빼돌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 또한 한 영역을 관리하는 중급 시녀의 역할이니까.
* * *
시아나는 그레이스 황녀의 궁으로 향했다.
시아나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그레이스 황녀 궁의 시녀 중 한 명인 비비였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시아나는 비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식재료 관리실을 관리하는 시녀 시아나라고 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시아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비비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우리 궁에서 요청하는 식재료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아나는 비비가 정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코 좋은 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비비는 ‘그런 쓸데없는 것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당장 꺼져!’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심각한 얼굴로 시아나에게 속삭였다.
“정말 잘 왔어요. 사실 저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
의외의 반응에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한 점이라면…….”
“최근 들어 황궁 안의 먹을거리가 자꾸 사라지고 있어요. 식사를 위해 모아둔 과일, 빵, 고기 같은 것은 물론 손님용으로 만들어 둔 디저트도 몽땅 말이에요! 그러니 요청하는 식재료 양이 늘어날 수밖에요.”
“……도둑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비비는 끔찍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도둑! 그것도 염치도 없는 음식 도둑!”
“도둑이 외부인일 가능성은요?”
비비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궁에 들어오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외부인이 궁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주방까지 올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기에 제가 먹을거리를 요리조리 숨겨 놓아 봤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기똥차게 찾아내서 먹어치우는지 몰라요. 내부인이 분명합니다.”
시아나가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시아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범행이 계속될 확률이 크네요. 하루빨리 범인을 찾아야겠어요.”
비비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사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애가 있어요.”
“누구지요?”
“세 달 전에 들어온 하급 시녀예요. 키가 거인처럼 크고, 몸집은 곰처럼 우락부락하고, 힘은 황소처럼 센 무시무시한 애랍니다.”
“…….”
시아나는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
‘저 설명, 어딘가 익숙한데.’
비비가 말을 이었다.
“눈치가 보여서인지 사람들 앞에서는 적당히 먹는 척하는데 다 내숭이라니까요. 몰래 음식을 훔쳐 먹는 게 분명해요.”
“……그 시녀의 이름이?”
비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츄츄요!”
시아나는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얼굴이 되었다.
“당장 츄츄 그 애를 데리고 와 죄를 물어야 해요. 궁의 빵과 고기, 사과와 딸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요.”
“…….”
눈을 이글거리는 비비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시녀님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이런 일에 연루되었다는 것만으로 의심받은 시녀는 해고가 될 수도 있어요. 황궁을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러니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글쎄, 그 애가 맞는다니까요!”
비비는 소리를 빽 지르며 츄츄가 얼마나 의심스러운지에 대해 나열했다.
그러나 시아나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챈 비비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다른 시녀들을 불러 줄 테니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분명 다들 저와 똑같은 말을 할걸요.”
* * *
시아나는 비비의 도움을 받아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를 몇 명 더 만났다.
시녀들은 모두 궁에서 일어나는 괴현상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의심 끝에는 항상 츄츄가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츄츄.’
시아나는 츄츄가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워낙에 힘이 세고 부지런하니 당연히 일 잘한다고 인정받으며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음식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을 줄이야.’
시아나는 한편에 서 있던 비비에게 말했다.
“츄츄를 불러 주세요.”
비비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츄츄가 긴장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시녀님, 지를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유.”
낯익은 목소리를 들으며 시아나는 몸을 돌렸다.
“츄츄.”
츄츄의 눈이 사과만큼 커졌다.
츄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오메, 시아나! 이게 얼마만이여.”
같은 황궁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츄츄가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 들어간 후 조금의 시간도 내기 힘들 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간혹 시간이 나는 날도 궁을 나가 자유롭게 지낼 수 없었다.
신입 시녀의 비애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츄츄는 제 앞에 나타난 시아나가 반갑기만 했다.
츄츄가 시아나를 꽉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 여전히 아기 강아지처럼 쪼그맣구먼.”
츄츄의 품에 꽉 안긴 시아나가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여전히 곰처럼 튼튼해 보여. 신입 시녀는 잠잘 시간도 없이 일을 하니 수척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하하. 일은 힘들어 죽을 맛이구먼. 그런데 공주님이 계시는 황궁이니 만큼 수습 시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먹을 게 잘 나오니 괜찮어.”
“…….”
츄츄는 듬직한 덩치에 어울리게 먹는 양이 대단했다.
시아나가 3명 있어야 츄츄 1명이 먹는 양을 겨우 따라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츄츄는 먹으면 안 될 음식에 손댈 만큼 식탐이 강하지 않아.’
설령 배가 고프다고 해도 그런 음식은 건들 리가 없다.
츄츄는 소나무처럼 올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시아나는 츄츄를 믿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츄츄,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에서 음식이 자꾸 사라지고 있어. 많은 시녀들이 그 범인으로 너를 의심하고 있고.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시아나는 당연히 츄츄가 펄쩍 뛰며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고 소리칠 줄 알았다.
그런데 츄츄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 그렇구먼.”
츄츄는 눈알을 굴려 시아나의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네가 범인이구나, 하고 소리칠 만큼 수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저 얼굴은 제가 지은 죄가 밝혀져 당황한 얼굴이 아니야. 오히려 그것보다는…….’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츄츄, 너 설마 음식 도둑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
츄츄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뭐, 뭔 소리여. 내가 그걸 어찌 알어!”
츄츄는 거짓말을 못했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겁먹은 개복치처럼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꼭 지금처럼.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도대체 음식 도둑이 누구기에 그렇게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혹시 너랑 친분이 있는 사람이니? 그래서 감싸 주고 싶은 거야?”
“그, 그런 거 아니여. 내는 진짜 모른당께!”
츄츄의 근육이 아까보다 더 부풀어 올랐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츄츄, 나는 식재료 관리실을 책임지는 중급 시녀야. 식재료가 잘 쓰여 지고 있는지, 누군가 빼돌리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
“물론 범인을 잡아도 일을 심각하게 키울 생각은 없어. 더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아 낼 거야. 그러니까 말해 줘, 츄츄.”
츄츄는 난감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잠시 후 츄츄가 시아나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시아나, 니는 쬐그맣고 우유빵처럼 밍밍하게 생겼지만 외모와 달리 일을 야무지게 하지. 그래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일 테고.”
츄츄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게 있어. 그래도 알고 싶은겨?”
도대체 음식 도둑이 누구기에 저렇게까지 말한단 말인가.
이제는 진짜로 범인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츄츄는 끙, 하고 괴로운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찾는 음식 도둑은, 쉴 새 없이 황궁에서 먹을거리를 훔쳐 먹는 그 범인은 바로…….”
츄츄의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레이스 공주님이야.”
시아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레이스.
황제의 세 번째 딸이자, 황성의 수많은 황녀 중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 * *
츄츄는 수습 시녀에서 정식 시녀가 되자마자 그레이스 황녀의 궁으로 배정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황녀의 궁에서 츄츄를 지목한 것이다.
이제 막 정식 시녀가 된 하급 시녀가, 그것도 별다른 뒷작업 없이 황녀의 궁으로 배정받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츄츄는 갈색 제복을 입고 행복한 얼굴로 궁으로 향했다.
“시녀 츄츄, 인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곰 같은 덩치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오늘 처음 궁에 온 하급 시녀를 보기 위해 모인 시녀들이 귀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레이스 황녀 궁의 시녀 비비가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듣던 대로구나. 힘이 넘쳐흘러.”
츄츄의 힘이 장사라는 것은 이미 황궁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츄츄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츄츄는 ‘아닙니다’라고 겸손을 떠는 대신 씩씩하게 말했다.
“네, 힘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뭐든 시켜 주십시오.”
신입 시녀답지 않은 패기에 비비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레이스 황녀님을 모시기에는 격이 많이 떨어지지만…… 뭐 괜찮겠지. 어차피 네게는 기품보다는 힘이 필요한 일을 시킬 예정이니까.”
비비는 손을 들어 올려 시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시녀 두 명이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가져왔다.
긴 나무 막대 위로 두꺼운 천이 지붕처럼 덮여 있는 것이다.
비비가 말했다.
“그레이스 황녀님의 전용 양산이야.”
츄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보통 귀부인이 드는 양산이란 앙증맞은 크기에 깃털처럼 가볍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2명의 시녀가 손에 들고 온 건 그런 양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꼭 거인이 들고 다니는 양산처럼 거대했다.
츄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비비가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그레이스 황녀님에 대해서는 들어 봤을 거야.”
황제의 세 번째 딸.
그리고 일곱 명의 황녀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공주님.
하지만 그 미모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시녀들의 임무는 그레이스 황녀님의 미모를 유지하는 것이야.”
시녀들은 그레이스 황녀가 일어나면 전날 만들어 둔 화장수를 얼굴에 발라 주고, 긴 머리카락을 1시간씩 빗겨 주었으며, 저녁에는 우유를 탄 물에 목욕을 시켜 주고, 자기 전에는 최고급 오일로 온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비비가 양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양산도 바로 그 임무 중 하나야. 햇볕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눈처럼 새하얀 공주님의 피부가 흉하게 타 버릴 테니까.”
“그, 그렇군요.”
츄츄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츄츄를 향해 비비가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저 양산은 네가 들게 될 거야.”
“……!”
츄츄는 눈을 크게 떴다.
황족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걷는 것을 우아함과 거리가 먼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산 담당 시녀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자리는 비록 고되긴 하지만 공주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물론 평범한 양산일 때의 일이지만.’
그레이스 황녀 전용 양산은 너무 무거웠다. 두 사람이 끙끙대며 들 정도로.
하지만 그마저도 힘들다며 시녀들은 다른 자리로 보내 달라고 찡찡거리거나, 아예 시녀직을 그만둬 버렸다.
그런 위기 속에 비비는 츄츄라는 희망을 발견하고 재빨리 데리고 온 것이다.
비비가 선심 쓰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하루 종일 혼자 이것을 드는 것은 힘들겠지. 그러니 교대할 수 있는 시녀를 한 명 붙여 줄게.”
물론 그래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거야. 시키면 해야지.
‘못 하겠다고 앵앵거리면 당장 시녀직에서 잘라 버린다고 해야지.’
하지만 비비는 그런 협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츄츄가 너무나 가뿐하게 양산을 들었기 때문이다.
양산을 든 츄츄가 말했다.
“생각보다 가볍구만요. 교대할 시녀는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시녀님.”
“…….”
비비도, 그녀 뒤로 모여 있던 시녀들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츄츄를 바라보았다.
‘안 무겁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 양산의 무게가 얼만데!
긴 나무 봉과 두꺼운 천이 덧대어진 양산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비비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한 허풍 떨지 마. 잠깐 들어서 그렇지, 계속 들고 있으면 무거울 걸?”
“글쎄유. 나무젓가락 하나를 하루 종일 들고 있다고 힘이 들지는 않을 것 같은디.”
한쪽 손으로 양산을 들고, 다른 한쪽 손으로 볼을 긁적이는 시녀를 보며 비비는 깨달았다.
츄츄의 힘이 진짜임을.
그렇게 츄츄는 그레이스 황녀의 유일한 양산 담당 시녀가 되었다.
츄츄가 공주를 만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공주가 정원 산책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비비가 츄츄에게 말했다.
“공주님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그러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조용히 양산만 들고 있어야 한다.”
츄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레이스 황녀가 나타났다.
츄츄는 눈을 크게 떴다.
백옥같이 뽀얀 얼굴,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그 아래 빛나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소문대로 그레이스 황녀는 아름다웠다.
* * *
“어떻게 그렇게 이쁠 수 있지?! 우리 공주님은 사람이 아니라 요정인 게 분명혀!”
츄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덕분에 테이블이 두 동강 나 버렸다.
시아나는 그것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츄츄가 그레이스 황녀의 성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츄츄가 모시는 그레이스 황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그러나 그것은 그레이스 황녀가 음식 도둑이라는 것과는 크게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츄츄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그 후로 내는 성심성의껏 공주님을 모셨구먼. 그레이스 공주님은 조용하고 우아하신 분이였어. 살뜰하게 시녀들을 챙겨 주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괜히 시녀를 괴롭히는 법도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츄츄는 잔디밭 위에 놓인 테이블 옆에서 거대한 양산을 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 그레이스 황녀가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레이스 황녀는 평소에는 궁 안에서 식사를 했지만 햇볕이 좋은 날 손님이 오면 이런 식으로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때가 있었다.
이내 테이블 위에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새빨간 토마토가 곁들어진 샐러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송아지 스테이크, 탱글탱글한 포도와 새콤한 레몬주스까지.
그레이스 황녀의 뒤에서 양산을 들고 있던 츄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겠다.’
하지만 츄츄는 일개 시녀. 저 모든 음식은 그레이스 황녀를 위한 것이다.
츄츄는 입맛을 다시며 양산을 든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끝난 후 츄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레이스 황녀가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남기는 개똥 같은 예의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여.’
지나가는 참새도 그레이스 황녀보다는 더 많이 먹을 것이다.
상을 치우던 츄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른 시녀들에게 말했다.
“혹시 공주님께서 어딘가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닐까유? 너무 적게 드셨어유.”
신입 시녀의 걱정에 시녀들은 놀라긴커녕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 공주님의 허리 봤지?”
“네.”
“어떻디?”
“개미만치 잘록했구먼요.”
“잘 봤네. 그럼 그 허리를 어떻게 유지하시겠니?”
“…….”
시녀는 손가락으로 츄츄의 이마를 콕 찍으며 말했다.
“그레이스 황녀님은 원래 체형이 작은 분이 아니셔. 뼈대도 있고 키도 큰 편이시지. 그래서 평소에 음식 양을 엄격하게 조절하고 계신 거야. 그래야 불면 날아갈 듯한 저 가녀린 몸매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
“게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공주님이 음식을 마구 먹으면 보기에 어떻겠어. 솔직히 좀 별로잖아.”
츄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츄츄가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시녀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빵을 잡았다.
“덕분에 잘됐지, 뭐. 공주님이 남기신 음식이 많은 덕에 우리 같은 하급 시녀들도 엄청나게 포식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먹기나 해.”
시녀는 츄츄의 입 속으로 빵을 넣어 주었다.
츄츄는 입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사를 적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저 정도로 식사량을 제한하면 건강에 좋지 않을 터인디.’
전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츄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츄츄는 이제 막 하급 시녀가 된 풋내기였을 뿐이니까.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였다.
황궁 안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식들이 없어졌다고요?”
츄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식사 담당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침 식사에 내가려고 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빵이 몽땅 없어져 버렸어.”
“허어.”
“그뿐이 아니야. 간식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말려 두었던 고기도 싹 사라졌다니까.”
츄츄가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감찰부에 신고라도 해야 되는 것 아녀유?”
시녀는 질색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런 데에 신고했다가 괜히 일이 커지면 어쩌려고.”
“…….”
“종종 시녀들이나 시종들이 음식을 훔쳐 먹는 일이 있어.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그러나 시녀의 바람과 달리 범행은 멈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다행히 황궁의 재정이 풍족했기에 사라진 만큼의 식재료를 새로 요청하면 바로 메울 수 있었다.
그래서 시녀들도 당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츄츄는 아니었다.
‘제멋대로 황궁의 음식을 먹는 도둑놈을 그냥 두면 쓰나!’
츄츄의 정의감에 불이 붙었다.
츄츄는 범인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밤, 츄츄는 주방 구석에 몸을 숨기고 범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범인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잠복한 지 5일째 되던 날, 드디어 범인이 나타났다.
저벅.
고요한 주방에 울려 퍼진 발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츄츄는 눈을 번뜩 떴다.
범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빵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츄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범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 츄츄는 범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황궁의 음식을 야금야금 훔쳐 먹다니 그러면 안 되는겨. 배고프면 차라리 대놓고 말하고 먹어! 그럼 시녀님들이나 공주님도 이해를 해 주실…….”
츄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츄츄에게 손을 붙들린 여인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기 때문이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도자기 같은 새하얀 얼굴.
펄럭이는 잠옷을 입어 더더욱 가녀려 보이는 여인은…… 그레이스 황녀였다.
* * *
시아나는 동그란 눈을 깜짝였다.
“……세상에. 황녀 저하께서 음식 도둑이라니.”
“그려. 충격적인 일이지.”
츄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가 물었다.
“오해가 있던 것은 아니고?”
츄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여. 내도 처음에는 공주님이 우연치 않게 그곳에 온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니더라고.”
그날 밤 그레이스 황녀는 부릅뜬 눈으로 츄츄에게 말했다.
[오늘 본 것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선 안 돼. 조금이라도 입을 벙긋한다면 대대손손 후회를 하게 만들어줄 테다.]
저주라도 거는 듯 스산한 목소리였다.
그때를 떠올리며 츄츄가 말했다.
“그러고는 주방에 있는 음식을 싹 쓸어 가시더라고.”
음식 도둑은 그레이스 황녀인 것이 확실했다.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그럼 더는 조사를 할 필요가 없겠구나.”
사실 시아나가 재빨리 조사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그레이스였다.
나중에라도 그레이스 황녀가 제 황궁에서 도둑질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크게 분노할까 봐.
그렇게 되면 이상한 점을 감지하고도 안일하게 넘어갔던 시녀들, 즉 애꿎은 시아나까지도 분노에 휩쓸려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먹을거리를 훔친 범인이 시종이나 시녀가 아니라 황녀 저하라면 앞으로도 별말 하지 않으시겠지.’
시아나는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츄츄, 진실을 말해 주어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잉? 그게 뭔 말이여?”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내내 음식 도둑을 찾는다며 이곳을 얼쩡거렸을 거 아니야. 그 사실을 그레이스 황녀 저하께서 아시면 내가 무척 거슬렸을 테지. 황녀 저하의 범행을 내가 알아챌까 봐 말이야.”
“아…….”
“황녀 저하께서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시는 비밀이니 나를 이렇게 처리해 버리셨을지도 몰라.”
시아나는 한 손으로 목을 휙 그었다.
츄츄가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유,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여! 황녀 저하는 그런 분 아니여. 얼마나 천사 같은 분이신데.”
그런 분이 아니기도 했다가 그런 분이 되기도 해.
황궁에서 사는 황족은 그런 법이야.
시아나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츄츄도 시녀 기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지.’
그러나 지금 말해 주어야 할 것도 있었다.
“황녀 저하가 범인이라니 그 부분은 해결됐어. 다만 궁의 몇몇 시녀들이 츄츄 너를 음식 도둑이라고 의심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츄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씨익 웃었다.
“괜찮어. 아름다운 공주님이 음식을 훔쳐 먹는다는 말이 도는 것보다야 근육 빵빵한 하급 시녀가 그런다는 소문이 훨씬 낫잖어.”
“그래도…….”
“그리고 진짜 나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여. 공주님의 비밀을 안 이후로 내가 편하신지, 공주님께서 부쩍 나를 찾으시는 날이 많으시거든. 그래서 시녀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구먼. 내가 고까워서 말이여.”
그제야 시아나는 ‘츄츄가 범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시녀들이 하나같이 감정이 과하게 격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녀 저하에게 신임받는 신입 시녀를 향한 질투였던 것이다.
‘저런 말을 듣고도 괜찮다고 웃다니.’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너는 너무 착해, 츄츄.”
츄츄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착하긴 뭘 착혀! 애꿎은 소리 말어!”
그런 점이 착하다는 거야.
시아나는 제 친구가 귀여워 쿡쿡 웃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츄츄가 물었다.
“시아나,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여.”
“뭔데?”
“궁에서 사라지는 음식들을 공주님께서 다 먹는 거라고 하면 양이 어마어마하거든. 그걸 한 사람이 다 먹을 수 있나?”
츄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게 또 있구먼. 아무리 마른 체형의 사람이라도 그만치 과하게 먹으면 살이 찌기 마련이잖어. 그런데 그 많은 음식을 다 먹고도 그레이스 공주님은 손대면 부러질 것처럼 여리기만 혀.”
츄츄는 그게 늘 의아했다.
“귀하신 분들은 음식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신기한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츄츄의 순박한 눈동자를 마주 보던 시아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들도 사람인걸. 먹으면 살이 쪄. 하지만 황족이나 귀족들에게는 몸매를 관리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그 방법을 이용하면 한 사람이 많은 양의 식사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 살이 찌지 않을 수도 있어.”
시아나의 말에 츄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허. 그것참 신통하구먼. 나는 만날 땀 흘려 운동을 해서 겨우 이 몸매를 유지하는데…… 윗분들은 역시 대단혀.”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방법은 아니야, 츄츄.’
시아나는 씁쓸한 마음을 숨기며 몸을 일으켰다.
“조사도 마무리됐으니 이만 가 봐야겠어.”
츄츄는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아나와 츄츄는 눈치 볼 사람이 많은 초짜 중급 시녀와 하급 시녀였다.
한가롭게 수다를 떨 여유가 없었다.
시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 시간이 나면 식재료 관리실로 놀러 와, 츄츄. 네가 좋아하는 고기를 잔뜩 먹여 줄게.”
“오메. 친구가 중급 시녀가 되니 좋구먼.”
츄츄가 씩 웃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두 사람은 콩, 하고 주먹을 마주쳤다.
* * *
다음 날,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서 요청한 식재료의 양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시아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음식을 훔쳐 먹은 범인이 궁의 주인인 그레이스 황녀니 일을 크게 키울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며칠 후 하급 시녀 소피가 시아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시아나 님,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에서 큰일이 일어났대요.”
“큰일이라니?”
“글쎄, 궁의 음식을 훔쳐 먹던 사람이 있었다지 뭐예요. 보다 못한 시녀들이 합심해서 범인을 잡았대요.”
“…….”
시아나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소피가 말을 이었다.
“츄츄라고, 황녀 저하의 궁에 갓 들어온 신입 시녀라네요.”
“……!”
시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수습 시녀였던 시절부터 츄츄 걔가 엄청 무식하고 식탐이 많았거든. 분명 황궁에 있는 음식을 보니 정신이 나가서 이거저거 주워 먹었을…… 웁!”
시아나는 하급 시녀들 앞에서 신난 얼굴로 말을 늘어놓는 잔느의 입에 마른 빵을 쑤셔 넣으며 창고를 나섰다.
“시아나 님, 어디 가세요.”
따라 나오는 소피를 향해 시아나가 소리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갔다 올게. 나 대신 작업을 진행해 줘.”
원래 시아나는 이런 식으로 제 일을 아랫사람에게 미룬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츄츄가 도둑이라니 말도 안 돼!’
며칠 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시아나는 서둘러 그레이스 황녀의 궁으로 향했다.
시아나를 맞은 이는 시녀 비비였다.
비비는 시아나를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또 무슨 일로 온 거죠? 음식 도둑이라면 잡혔어요. 더 이상 우리 궁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요.”
퉁명스러운 비비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츄츄는 범인이 아니에요.”
생각지 못한 말에 비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잠시 후, 비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시아나를 쏘아보았다.
“그건 시녀님 생각이고요!”
비비가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시녀님과 츄츄가 수습 시녀 시절 동무라면서요. 그래서 며칠 전에도 조사를 어영부영 끝낸 거죠? 츄츄를 감싸려고 말이에요.”
“…….”
“그 때문에 사건이 또 일어났어요. 공주님께 내가기 위해 만든 음식에 손을 댔다고요. 더는 좌시할 수가 없어서 저희가 범인을 찾아냈어요. 츄츄, 그 고약한 계집애를 말이에요.”
“츄츄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시아나의 말에 비비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눈에 힘을 줬다.
“증거는 없지만 심증이 있어요. 궁의 시녀 절반이 츄츄를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시아나는 속으로 신음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츄츄는 시녀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안일하게 조사를 끝내지 않았을 텐데.’
어쨌건 일은 벌어졌다.
지금이라도 츄츄를 도와줘야 했다.
“츄츄를 만나게 해 주세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요.”
그러나 비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왜죠?”
“츄츄는 지금 방에 가두어진 상태니까요.”
그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범인으로 확정이 된 것도 아니고 그저 의심만 있는 상황에서 방에 가두었다고요?”
“그럼 어떡해요. 그 애를 그냥 놔두었다가는 또 사방팔방 훔쳐 먹을 텐데.”
비비는 시아나의 얼굴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만 이 일에 관심 끄세요. 궁내에서 츄츄를 더 심문해 보고,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감찰부에 신고할 생각이니까요. 조사를 받다 보면 증거도 나오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
감찰부는 절대 이런 하찮은 일을 상세히 조사하지 않는다.
게다가 범인으로 신고된 이는 뒷배하나 없는 하급 시녀 한 명.
대충 츄츄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쫓아낼 게 뻔했다.
감찰부에게 중요한 것은 시녀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황궁의 시끄러운 잡음을 없애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레이스 황녀궁의 시녀들이 바라는 것일 터였다.
‘하급 시녀 한 명을 치우기 위해 참으로 치졸한 수를 쓰는구나.’
시아나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 뭐야.’
시아나와 마주 보고 있던 비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시아나는 저보다 키가 작았다. 동그란 얼굴은 앳되어 보였고 살짝 처진 눈은 순했다.
그런데 왜일까.
저를 올려다보는 시아나가 무서웠다.
꼭 분노한 황족처럼.
비비가 느낀 대로 시아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감정을 절제했다.
‘지금은 저 사람을 상대할 때가 아니야.’
감찰부에 신고를 한 순간부터는 정말로 일이 복잡해진다.
그전에 츄츄에 대한 누명을 벗겨야 했다.
‘그러려면 그레이스 황녀 저하를 만나야 해.’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레이스 황녀였다.
황녀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황녀가 시녀들에게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한다면, 츄츄를 범인으로 몰고 가던 시녀들도 입을 꾹 다물 것이다.
시아나가 말했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를 뵙고 싶습니다. 황녀 저하께 방문 요청을 넣어 주세요.”
비비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일개 중급 시녀에게 공주님을 만나게 해 줄 리 없잖아요!”
“역시 그렇지요?”
“뭐?”
시아나는 더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비비의 저런 반응은 예상했다.
아마도 몇 번을 부탁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쓸데없는 데 시간 빼앗기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자.’
그레이스 황녀를 만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황녀가 솔깃해할 사람의 힘을 빌려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리스 공주님께 도와 달라고 한다면…….’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 공주님께 황태후라는 뒷배가 생기긴 했지만 아직 미약해.’
아리스가 만나자고 한들 그레이스 황녀가 바로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럼 안젤리나 황비 마마께 도움을 구하면…….’
이번에도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시스 황자의 일로 안젤리나 황비와 가까워지긴 했으나, 지금처럼 사소한 부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께 부탁을 하면…….”
사실은 아리스 공주님보다, 안젤리나 황비마마보다 라시드가 먼저 떠올랐었다.
하지만 쉽게 그에게 갈 수 없었다.
‘전하께서 아무리 내게 호의적이라지만 이건 너무 과하잖아.’
잔느가 벌인 일을 해결할 때도 도움을 받았는데 며칠이 지났다고 또 그를 찾아가다니.
시아나도 염치가 있었다.
‘어쩐다.’
시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민하다가 눈을 떴다.
‘그분들께 부탁하지 않고 그레이스 황녀 저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 * *
흑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정색 머리카락, 백옥같이 뽀얀 피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가장 아름다운 공주, 라는 별명처럼 그레이스 황녀의 미모는 대단했다.
그레이스 황녀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 음식들이 놓여졌다.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 구운 연어와 닭고기 튀김.
황족의 식사답게 가녀린 여인 한 명이 먹기에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의 극히 일부밖에 먹지 않았으니까.
그레이스 황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먼저 유리잔을 잡았다.
샛노란 레몬으로 만든 차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이내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유리잔 아래에 작은 종잇조각이 숨겨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종이를 폈다.
작은 종이에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궁의 음식을 몰래 훔쳐 먹은 진짜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
범인의 힌트는 꽃으로 만든 왕관.]
“……!”
그레이스 황녀의 얼굴이 굳었다.
* * *
시아나는 초조한 얼굴로 식재료 관리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잠시 후 매서운 얼굴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레이스 황녀 궁의 시녀, 비비였다.
비비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레이스 공주님께서 널 만나고 싶어 하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아나가 눈을 반짝였다.
‘성공이다!’
오늘 아침,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서 나온 시아나가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옴이었다.
그녀는 제3주방을 관리하는 시녀였고 제3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먹는 황족 중에는 그레이스 황녀도 있었다.
시아나는 옴에게 그레이스 황녀가 볼 수 있게 작은 쪽지를 넣어 달라고 말했다.
당연히 옴은 질색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옴은 시아나를 거역할 수 없었다.
잔느가 벌인 사건 때문에 시아나의 눈치를 살살 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오호호.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 줘야지!]
옴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시아나가 준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부탁한 일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시아나는 비비를 따라 그레이스 황녀의 궁을 향했다.
문 앞에 선 비비가 말했다.
“황녀 저하, 시녀 시아나가 도착했습니다.”
방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시아나는 문을 열었다.
화사한 꽃으로 꾸며진 방에,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레이스 황녀였다.
황녀에게 다가간 시아나는 허리를 숙였다.
“고귀한 황녀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시녀 시아나입니다.”
“…….”
그레이스 황녀는 시아나의 인사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황족에게 인사를 한 후에는 대답을 들은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궁중의 예법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레이스 황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보낸 쪽지를 봤어. 내 궁에 있던 도둑이 츄츄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쓰여 있더구나.”
그제야 고개를 든 시아나가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네 궁의 일도 아닌데 이런 쪽지까지 보낸 경황이 궁금해 널 오라고 했다.”
그레이스 황녀는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말해 보렴. 진짜 범인이 누구니?”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십니다.”
“……!”
그레이스 황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되바라진 말을 한다며 소리 지르진 않았다.
그레이스 황녀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무서운 말을 하는구나. 츄츄가 너의 친한 동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서 츄츄의 편이 되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서. ……하지만 이러면 곤란해. 감히 황녀를 음해하려 하다니.”
“…….”
“아무리 작고 귀여운 시녀라도 황녀를 모욕한 죄는 크단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그레이스 황녀의 목소리는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고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서슬 퍼런 분노였다.
시아나는 황녀의 분노를 여실히 느끼며 답했다.
“음해가 아닙니다. 황녀 저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구나.”
그레이스 황녀의 얼굴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천진했다.
시아나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레이스 황녀가 궁 안의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 따위 하나도 없었다. 범인으로 몰린 츄츄의 증언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츄츄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츄츄가 생각을 바꿔 황녀 저하가 범인이라고 말해 보았자 아무도 믿어 주지도 않을 테지만.’
그러니 그레이스 황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순순히 인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그레이스 황녀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며칠 전 조사를 하면서 황녀 저하를 모시는 시녀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황녀 저하께서는 평소에 극소량의 음식만 드신다고요.”
“……그런데?”
귀족이나 황족 중에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사량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그레이스 황녀가 먹는 양은 너무 적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양실조로 진작 쓰러졌을 만큼.
하지만 그레이스 황녀는 쓰러진 적이 없다. 몸무게가 더 이상 빠지지도 않았다.
마치 다른 곳에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처럼.
그 말에 그레이스 황녀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었다.
“맙소사.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만큼 빈약한 논리구나.”
그레이스 황녀는 팔을 쭉 내밀었다.
황녀의 팔은 어린아이만큼 가늘었다.
“네 말대로 내가 그 많은 음식들을 다 먹어치운 범인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느냐. 진작 돼지처럼 살이 쪘어야지.”
그러나 시아나에게는 그 현상을 납득시킬 만한 지식이 있었다.
“귀족이나 황족 중에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그레이스 황녀가 눈썹을 치켜떴다.
“몇 개의 방법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음식을 먹고…….”
시아나는 입을 벌려 손가락을 넣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토하는 겁니다.”
“……!”
“이 방법을 쓰면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절대 살이 찌지 않지요.”
평온했던 그레이스 황녀의 눈빛에 혼란이 가득했다.
마치 정곡을 찔린 것처럼.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몸에 무리를 주게 되지요.”
“…….”
“반복되는 구토로 목이 상해 음식을 삼키기만 해도 고통이 오고, 토의 잔재가 입 안에 남아 이가 썩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점점 정신이 피폐해진다는 거지요.”
“……!”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살이 찔 것이라는 두려움에 구토를 하죠. 그 순간은 기쁘지만 이후부터는 배가 고파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음식을 먹게 되고 그것을 다시 토하죠.”
그런 것이 무한 반복되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레이스 황녀의 얼굴에는 아까 같은 평정심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레이스 황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제가 그랬으니까요.”
“……!”
“그러니 저는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그 지옥을 빠져나온 경험이 있으니까요.”
시아나가 그레이스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요청합니다, 황녀 저하. 황녀 저하께서 범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억울하게 갇힌 츄츄를 풀어 주세요.”
“…….”
“그리해 주시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애달픈 부탁이 아니었다. 건방진 요청도 아니었다.
이것은 거래였다.
너를 도와줄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내 요청을 들어 달라는.
그레이스 황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 * *
그레이스 황녀가 시녀들을 불러 말했다.
“어젯밤부터 궁이 시끄럽구나. 괜한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질색이야.”
그레이스 황녀가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소란 떨지 말고 츄츄를 풀어 주도록 해.”
시녀들이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공주님, 지금 제대로 범인을 잡아 뿌리 뽑지 않으면 또 그런 추잡한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면 좀 어떠니. 음식 조금 사라지는 것뿐인데. 내게도 그 정도 아량은 있어.”
너그러운 황녀의 말에도 시녀들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황녀가 궁의 기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들의 노고를 몰라주는 것도, 범인인 것이 확실한 츄츄를 쉽게 용서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황녀의 말을 거역할 순 없었다.
주인의 말은 절대적이었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시녀들은 애써 속상한 감정을 숨기며 허리를 숙였다.
* * *
츄츄의 방문 앞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풀렸다.
음식 도둑으로 몰린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풀려 난 것이다.
“너에 대한 의심이 풀린 것은 아니야. 너그러운 공주님께서 너를 풀어 주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놔주는 거지.”
“또 한 번 음식을 훔쳐 먹기만 해 봐. 그때는 이번처럼 조사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로 감찰부에 신고해 버릴 테니까.”
방문을 열어 준 시녀들의 눈빛은 여전히 험악했다.
하지만 츄츄는 그녀들의 반응을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그레이스 황녀의 호출 때문이었다.
‘공주님께서 왜 나를 부르시지. 음식 도둑으로 몰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혹시나 그것을 이유로 시녀직을 그만두라는 말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츄츄가 긴장한 얼굴로 문을 두들겼다.
“그레이스 공주님, 츄츄입니다.”
“들어오거라.”
츄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내 츄츄의 눈이 커졌다.
그레이스 황녀의 옆에 시아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츄츄는 황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해야 하는 것도 잊고 말을 더듬었다.
“시, 시아나. 네가 여긴 어쩐 일이여?”
시아나가 대답하기 전, 그레이스 황녀가 말했다.
“좋은 친구를 뒀더구나. 이 애가 날 찾아와서 부탁을 했어.”
사실상 거래였지만 그레이스 황녀는 부탁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일개 시녀와 공주 사이에 거래라는 말을 쓴다면 황녀의 체통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레이스 황녀가 말을 이었다.
“도둑으로 몰려 갇혀 있는 널 구해 달라고 하더구나.”
“……!”
그제야 츄츄는 며칠이 걸려도 범인인 것을 밝혀낸다며 으름장을 놓던 시녀들이 왜 그렇게 빨리 방문을 열어 줬는지 깨달았다.
시아나가 노력한 덕분이었다.
“……!
츄츄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츄츄는 한달음에 달려가 시아나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말로 고맙구먼.”
“뭘. 어디 다치거나 한 곳은 없어?”
시아나가 츄츄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시녀들이 조사를 핑계로 험한 짓을 했을까 봐 걱정이 됐다.
“멀쩡해. 오히려 오랜만에 쉴 수 있어 좋았구먼. 방에 갇혀 있던 덕분에 아침 늦게까지 푹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츄츄의 개운한 얼굴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좋았다.
다급했던 제 걱정이 민망해질 만큼.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야. 그럼 괜히 서둘렀네. 더 쉬게 해 줄걸.”
“에이. 그건 또 아니지. 휴식은 하루면 충분해. 더 쉬면 근육 빠진다고. 얼마나 소중하게 키운 근육인디.”
그 말에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츄츄도 헤벌쭉 웃었다.
‘사이가 아-주 좋네.’
제 앞에서 시시덕거리는 두 시녀를 바라보며 그레이스 황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앳된 시녀들이 우정을 나누는 훈훈한 광경이었건만 그레이스 황녀는 이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를 아끼는 착한 시녀들. 그런 시녀들을 괴롭히는 못된 공주님.’
자신이 딱 그 역할이라서.
어젯밤, 그레이스 황녀는 시녀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공주님, 하급 시녀 츄츄가 그간 궁의 음식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 발각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것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황녀는 왜 그런 것을 신경 쓰느냐고 시녀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음식을 훔쳐 먹은 진범이기 때문에.
그레이스 황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비겁한 회피였다.
그만큼 그레이스 황녀는 제가 저지른 일이 수면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결단코 츄츄를 계속 그런 식으로 갇히게 둘 생각은 없었어.’
시녀들을 납득시킬 말을 생각하여 최대한 빨리 츄츄를 빼내 줄 생각이었다.
자신 때문에 괜한 의심을 받은 것에 대한 위로금으로 금화도 두둑이 챙겨 주려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말을 구구절절하게 해 보았자 츄츄에게 난 시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비겁한 황족일 뿐일 텐데.’
그때였다.
츄츄의 시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 그레이스 공주님께도 감사 인사 드립니더!”
“……?!”
어느새 그레이스 황녀의 앞에 다가온 츄츄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바로 나왔구만유.”
그레이스 황녀는 눈을 부릅뜨고 츄츄를 바라보았다.
츄츄는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도둑으로 몰렸다. 그레이스는 그런 츄츄를 감싸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감사라니.
그레이스 황녀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 필요 없어. 방에 갇혀 나를 원망했을 거 아니야.”
츄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유. 시녀님들이 오해해서 저를 범인으로 의심한 것이지, 공주님께서 저를 범인으로 몬 것도 아닌디.”
“……하지만 내가 몰래 음식을 먹어서 생긴 일이잖아.”
이러나저러나 원흉은 그레이스 황녀였다.
그러나 츄츄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애초에 이 궁에 있는 음식들은 모두 공주님의 것이잖아유. 공주님 것을 공주님이 드신 것뿐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구만유.”
“……!”
그레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츄츄에게 음식을 몰래 먹는 것을 들켰을 때가 떠올랐다.
―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