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무서운 중급 시녀 (11/27)

5. 무서운 중급 시녀

시아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중급 시녀의 제복이었다.

‘확실히 하급 시녀 제복보다 예쁘네.’

색이 고운 진녹색 옷은 봄날의 새싹처럼 싱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재질이 훨씬 고급스러워 한층 더 우아해 보였다.

‘마음에 들어.’

시아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방을 나왔다.

방 밖에는 아리스와 니니, 나나가 시끌벅적 떠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시아나를 보더니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쁘다, 시아나!”

아리스의 칭찬에 니니와 나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 님은 얼굴이 뽀얘서 꼭 초록색 나뭇잎 사이에 탐스러운 복숭아 한 알이 다롱다롱 매달린 것 같아요.”

“콱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워.”

“…….”

니니와 나나는 중급 시녀로 승급이 결정된 이후, 시아나를 ‘시아나 님’ 이라고 부르며 목숨을 구해 준 은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시아나가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녀들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시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니니와 나나를 향해 말했다.

“니니와 나나도 새 제복이 무척 잘 어울려요.”

니니와 나나도 시아나와 같은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감동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시아나 님 덕분이죠!”

“거룩하신 시아나 님!”

시아나도 두 사람을 따라 웃었다.

‘하하하. 이젠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오늘은 정식으로 중급 시녀가 된 뜻깊은 날이었다.

그러나 시아나와 니니와 나나는 여유롭게 감흥에 취할 틈이 없었다.

승급 시험에 합격한 중급 시녀들은 3주 동안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세 사람도 교육에 참가해야 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루비궁의 세 시녀가 한꺼번에 교육을 받게 된 탓에 아리스는 혼자가 되어 버렸다.

시아나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달리 아리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니까.”

물론 아리스는 3주 동안 세 시녀와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싫다며 짜증을 부리진 않았다.

‘그러면 시아나가 곤란해하는 걸 아니까.’

그리고 혼자 루비궁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것도 아니었다.

세 시녀가 교육에 참가하는 동안 아리스는 황태후궁에서 지내기로 했다.

황태후의 제안이었다.

물론 아리스는 처음에 질색을 하며 거절했지만, 황태후가 재빠르게 내건 미끼는 강력했다.

[아리스, 네가 궁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파티를 열어 주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를 초대하여 매일 다른 과자와 케이크를 만들어 줄게.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도 불러 반짝이는 드레스도 맞추고 보석상도 불러 액세서리도 구입하자.]

어린 손녀에게 흔든 미끼라고 하기에는 꽤 세속적이었건만, 달콤한 것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아리스에게는 딱이었다.

아리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거야.”

이참에 할머니의 지갑을 싹 다 털어 버리겠다는 악마 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시아나는 그것을 탓하는 대신 쿡 하고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게 하세요.”

황태후는 기꺼워할 것이다.

어린 손녀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으니까.

시아나는 아리스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공주님.”

아리스는 시아나를 꽉 껴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돌아오면 다시는 내 품에서 떠나보내지 않겠어. 영원히.”

여전히 로맨스 소설에 심취해 있는 아리스다운 대사였다.

* * *

아리스를 황태후궁에 맡기고, 시아나, 니니와 나나가 향한 곳은 거대한 홀이었다.

올해 중급 시녀로 승급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니니와 나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여기도 중급 시녀, 저기도 중급 시녀야.”

“그리고 너랑 나도 중급 시녀고.”

“끝내준다.”

“동감이야.”

상기된 얼굴로 키득거리는 두 사람과 달리 시아나는 차분히 시녀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중급 시녀들은 분위기가 다르구나.’

하급 시녀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총명함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때, 진녹색 제복을 입은 엄한 얼굴의 여인이 등장했다.

모여 있던 시녀들은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중급 시녀들을 관리하는 중급 시녀장 메건이다.”

중급 시녀장 메건은 찬찬히 시녀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먼저 말해 둘 것이 있다. 착각하는 자가 있을까 봐 말해 두는데, 너희들은 아직 정식으로 중급 시녀가 된 것이 아니다.”

중급 시녀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일 뿐이었다.

최종 검증이 남아 있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3주 동안 중급 시녀로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급 시녀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점이 발견된다면 다시 하급 시녀로 강등될 것이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시녀들은 모두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중급 시녀장 메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시녀들의 업무는 철저하게 나누어져 있다.”

하급 시녀는 청소, 빨래 등과 같은 단순한 일들을 한다.

중급 시녀는 그런 하급 시녀를 관리하여 궁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한다.

상급 시녀는 주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중을 들었다.

‘나는 시녀가 한 명뿐인 루비궁에 있었기에 저 세 가지를 한꺼번에 했었지만. 특수한 경우였지.’

시녀들의 뒤쪽에 서 있는 시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어지는 메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중급 시녀에게 필요한 능력중 하나는 하급 시녀들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너희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새로 승급된 중급 시녀들은 황궁 곳곳으로 배치되었다.

세탁실, 조리실, 수선실, 물품 보관실 등등…….

그곳에서 수습 시녀들은 하급 시녀를 관리하며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3주 동안 큰 문제없이 일을 마치면 진짜 중급 시녀가 될 것이다.

* * *

“사실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지 큰 의미는 없대요.”

“맞아요. 애초에 시험에 통과했을 정도면 어느 정도 일을 잘한다고 검증이 된 것인 데다가, 하급 시녀들이 중급 시녀에게 대들 리도 없으니까요.”

“배정받은 곳에 가면 원래 일하고 있던 중급 시녀들도 도와주고요.”

“껌이에요, 껌.”

그렇게 각각 배치된 부서로 헤어지기 전 니니와 나나가 말했었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시아나는 앞으로가 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 네가 그 시아나냐? 패전국 출신 주제에 중급 시녀로 초고속으로 승진을 했다는 앙큼한 계집애?”

시아나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험악한 얼굴을 한 시녀는, 시아나가 배치된 제3주방을 맡고 있는 중급 시녀 옴이었다.(황궁에는 총 5개의 주방이 있다.)

옴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선 시아나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역시 소문이 났구나.’

괜찮은 가문 출신의 시녀도 하급 시녀에서 중급 시녀가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데, 시아나는 고작 몇 달 만에 그것을 해냈다.

흔치 않은 경우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옴은 10년 넘게 한 주방 일 덕분에 울퉁불퉁해진 팔뚝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출신도 안 좋은데 이렇게 빨리 중급 시녀가 되다니 뻔해. 온갖 더러운 술수를 썼겠지? 하지만 이곳에서도 그 따위 잔기술이 통할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 나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시녀는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시아나의 초고속 승진은 기존 시녀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듯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아나의 태연한 대답에 옴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제 막 승급한 중급 시녀는 사실 하급 시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연차가 더 된 중급 시녀를 보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긴장하곤 했다.

그런데 시아나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쥐콩만 한 게 건방지기는.’

역시 듣던 대로였다.

생긴 것은 맹하니 순하게 생겼지만 안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들어 있다고.

옴이 사납게 말했다.

“앞으로 너는 주방의 식재료 관리실에서 일하게 될 거야. 제대로 일을 못 하면 중급 시녀장님께 싹 다 말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시아나는 주방의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막 배치받은 곳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수월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옴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전혀 도와줄 기색이 아니네.’

시아나는 옴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식재료 관리실에서 일하는 하급 시녀들에게 물어보면 돼.’

그러나 잠시 후, 시아나는 그것도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부로 식재료 관리실에서 함께 일하게 된 시아나입니다.”

“…….”

그러나 시아나의 싹싹한 인사에 하급 시녀들 중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아나는 미소 띤 얼굴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시녀들의 서열은 엄격했다.

중급 시녀가 똥을 보고 잼이라고 하면 하급 시녀는 잼이 참 먹음직하네요, 라며 웃어야 할 정도였다.

‘그런 하급 시녀가 중급 시녀에게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다?’

아무리 시아나가 초고속 승진을 하여 미운털이 박힌 상태라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내 시아나는 이유를 알았다.

하급 시녀들 사이에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중얼거렸다.

“잔느?”

그 순간, 잔느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수습 시녀였던 시절, 시아나를 지겹게 괴롭혔던 때처럼.

* * *

잔느가 시아나에 대해 안 것은 며칠 전이었다.

“이번에 교육을 받으러 오는 중급 시녀의 이름이 시아나라고요?”

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애가 오면 눈치껏 챙겨줘. 다른 하급 시녀들이 네 말을 잘 듣잖아.”

잔느는 정식 시녀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선물 공세로 하급 시녀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주방의 많은 하급 시녀들이 잔느를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옴은 잔느에게 당부를 한 것이다.

평소라면 잔느는 알겠다고 힘차게 대답하면서 새로 온 중급 시녀의 환심을 어떻게 살지 고민했을 것이다.

제 편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그 중급 시녀가 시아나라니!’

몇 달 전 잔느보다 한발 먼저 정식 시녀가 된 시아나가 간 곳은 황녀 아리스의 궁이었다.

잔느는 그 사실을 알고 키득키득 웃었다.

‘어쩜. 너무 잘 어울린다.’

패전국 출신의 미천한 시녀와 아비에게 버림받은 공주라니.

잔느는 시아나가 어린 황녀와 함께 어두컴컴한 궁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상황이 변했다.

아리스 황녀가 황태후의 관심을 듬뿍 받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열이 받았는데!’

분노가 풀리기도 전에 시아나가 제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중급 시녀가 되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시아나가 정식 시녀가 된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중급 시녀가 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잔느는 옴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분명 야비한 술수를 써서 중급 시녀가 된 것이 분명해요. 그 애는 수습 시녀 시절에도 그렇게 정식 시녀가 되었으니까요!”

동료 시녀가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윗분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했다.

윗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수만 가지 뇌물을 바치며 아양을 떨었다.

잔느는 시아나에 대한 온갖 거짓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옴은 얼굴도 보지 못한 시아나를 싫어하게 되었다.

교육받으러 온 중급 시녀가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적당히 잘 대해 줘야 한다는 관례를 깨뜨릴 정도로.

그리고 그것은 주방의 하급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잔느한테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 밀가루로 만든 빵처럼 맹하게 생겼네. 거짓말 하나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지. 저런 얼굴을 하고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기에 벌써 중급 시녀가 되었느냔 말이야.”

작게 속삭이는 말들이 시아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시아나는 잔느가 하급 시녀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시아나에 대한 안 좋은 말 뒤에 이 말을 덧붙였겠지.

[시아나는 패전국에서 온 노예야. 원래는 황궁의 정식 시녀도 될 수 없는 하찮은 계집애라고!]

그랬으니 하급 시녀들이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감히 중급 시녀에게 말이다.

‘흐음.’

시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아나는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였던 시절에도 가장 궂은일을 하는 시종들에게까지 정중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호구라는 말은 아니었다.

시아나는 선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엄격했다.

바로 지금처럼.

“다들 시녀의 예법을 모르니?”

싸늘한 목소리에 속닥거리던 하급 시녀들은 말을 멈추고 천천히 시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급 시녀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시아나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방금 전까지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까마득하게 높은 상급 시녀나 이따금씩 마주쳤던 황족에게서나 느꼈던 위압감이었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당장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야지. 나는 중급 시녀, 너희들은 하급 시녀니 말이야.”

숨 막히는 분위기에 하급 시녀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들 사이에 있던 잔느도 마찬가지였다.

잔느는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으득거렸다.

‘또 저 괴상한 술수를 쓰네.’

수습 시녀였던 시절에도 그랬다.

시아나는 평소에는 맹한 주제에 이따금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상하게 분위기가 싸해지고 사람들은 시아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잔느는 이번에도 그렇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건 이 주방에 있는 시녀들은 모두 잔느의 편이었다. 몇 달간 달콤한 말들과 온갖 선물을 주어 마음을 꾀어낸.

‘고작 중급 시녀 한 명에게 휘둘릴 이유가 없어.’

잔느는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리는 네게 인사하지 않을 거야.”

“왜지?”

시아나가 조금도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물었다.

잔느는 시아나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정당한 방법으로 중급 시녀가 된 게 아니니까. 우리는 그런 분을 인정할 수가 없…… 꺄악!”

잔느는 소리를 질렀다.

시아나가 제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순간 본 시아나의 눈빛이 너무 섬뜩해서 때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잔느에게 손을 휘갈기지 않았다.

시아나는 잔느의 볼을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너만이 아니라 하급 시녀 모두의 생각이 그렇단 말이지?”

“그, 그래.”

“그렇다면 너희들은 모두 해고야.”

“……!”

잔느의 눈이 커졌다.

잔느의 뒤에 서 있던 다른 하급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잔느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리 시아나가 하급 시녀보다 윗사람이라지만 고작 중급 시녀일 뿐이다.

그것도 이제 갓 올라온.

그런 자에게 하급 시녀를 자를 권한은 없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잔느, 네가 말했잖아. 내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 중급 시녀가 되었다고.”

“……?!”

“그 말을 부정하지 않겠어.”

그런 게 아니라고 해 보았자 같잖은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욕할 터였다.

‘무엇보다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힘을 빌려 중급 시녀가 된 것이니 맞는 말이기도 하고.’

그래서 시아나는 결심했다.

어차피 소문이 그렇게 났다면 알뜰살뜰 이용해 먹기로.

“사실 나는 저 위에 계신 고귀한 분의 추천을 받아 중급 시녀가 되었단다. 그러니 그분께 찾아가 오늘 일을 말씀드릴 거야.”

“…….”

“큰일입니다, 하급 시녀들이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애로운 그분께서는 물으실 테지. 하급 시녀는 중급 시녀의 명을 듣는 게 당연한 일인데 왜 네 말을 듣지 않느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시아나는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말했다.

“그들은 하해와 같은 성은을 받아 중급 시녀가 된 제가 우스워 보이나 봅니다.”

“……!”

잔느와 하급 시녀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것은 곧 제 뒤를 봐준 사람에게 찾아가 고자질한다는 말이었다.

‘뻔뻔하게!’

잔느와 하급 시녀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곤란하겠지, 얘들아?”

시아나는 시녀들 사이에 암암리에 일어나는 폭력을 쓰지 않았다.

험한 말을 쏘아대며 기 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웃으며 몇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파장은 강력했다.

머뭇거리던 하급 시녀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시, 시아나 님께 인사드립니다.”

그 시녀를 시작으로 다른 하급 시녀들도 줄줄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잔느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 있었다.

‘이 배신자들!’

분명 자신과 같이 행동하기로 했으면서 저런 어설픈 협박 한마디를 들었다고 꼬리를 내리다니.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졌다.

잔느는 이를 으득거리며 생각했다.

‘시아나의 말은 다 허풍이야!’

아무리 자신이 승급시킨 시녀라 해도 어떤 권력자가 시녀 따위의 넋두리를 들어 준단 말인가.

듣는다 해도 별말을 다 한다며 짜증을 내거나,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것이다.

고작 시녀 한 명의 말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저런 말에 휘둘릴 필요 없어. 더 강하게 나가도 돼.’

—라고 생각했지만…….

시아나를 보는 순간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엔 동그란 얼굴에 어린 눈빛이 너무 서늘했으니까.

제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처럼.

‘얄미운 계집애!’

잔느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방 안에 있던 모든 하급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시아나는 만족스러운 듯 시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시아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협박이 통해서 다행이야.’

사실은 잔느의 생각이 맞았다.

시아나는 자신을 중급 시녀로 승급시켜 준 안젤리나 황비에게도, 모시는 아리스 공주에게도 오늘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사로운 일을 모시는 분께 말하는 것은 시녀의 본분을 벗어난 일이었다.

‘설령 말한다 해도 고작 이런 이유로 하급 시녀들을 대거 해고할 수 없어.’

아무리 낮은 직급이라 해도 시녀는 시녀.

그것도 열 명이 넘는 시녀를 한 번에 자르는 것은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을 텐데…….’

순순히 고개를 숙인 시녀들을 보니 제 연기가 꽤 뛰어났던 모양이다.

아마 시녀들에게는 시아나가 어마어마한 권력자를 뒤에 둔 뻔뻔하고 악랄한 중급 시녀로 보일 것이다.

잘못 보이면 피곤해지는.

‘뭐, 말 안 듣는 시녀를 부리기엔 그 정도 이미지가 괜찮겠지.’

시아나는 반달처럼 눈을 휘었다.

* * *

식재료 관리실은 이른 새벽부터 정신없었다.

“안나, 밀가루는?”

시아나의 말에 하급 시녀 안나가 대답했다.

“10kg씩 총 20포대 잘 도착했습니다.”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쪽을 쳐다보았다.

“소피, 당근은?”

“잘 도착했습니다.”

“안까지 살펴봤니? 어젯밤 비가 와서 속에 있는 당근은 상했을 수도 있어. 썩은 당근이 있으면 지금 바로 확인해서 교환해야 해. 아직 상인이 궁 안에 있으니까.”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소피는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며 상자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시아나는 한참 동안 물건을 확인하고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다행히 오늘 들어온 물건들은 모두 문제없네.’

하나같이 싱싱하고 깨끗했다.

하지만 식재료 관리실의 업무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오늘 사용할 재료들을 정리하여 황궁의 각 주방에 보내야 했다.

작업은 아침 해가 떠오른 후에야 끝이 났다.

“으아아. 밀가루 푸대를 20개나 날랐더니 팔이 빠질 것 같아.”

“나도. 감자 상자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거냐고.”

“나는 계란. 하나라도 깨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니.”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시아나가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쳤다.

짝.

시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시아나가 씩씩하게 말했다.

“모두들 수고 많았어. 아직 남은 일이 많지만…….”

잼이나 치즈 등 보관용 식품을 만드는 것도 식재료 관리실의 일이었다. 하급 시녀들은 시아나가 그 일들을 시키려나 싶어 긴장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시아나의 말에 다 죽어 가던 하급 시녀들의 눈이 번뜩였다.

* * *

“우와아.”

하급 시녀들은 상기된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나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우와, 이거 사과야. 그 유명한 애플턴의 사과!”

“빵도 엄청 커! 안에는 버터가 듬뿍 들었고.”

“꺅! 고기도 있어. 베이컨과 소시지가 잔뜩 있다고.”

조리가 거의 되지 않은 투박한 요리였지만 종류가 다양했다.

무엇보다 양이 어마어마했다.

고된 노동으로 배가 고팠던 하급 시녀들이 잔뜩 달려들어도 괜찮을 만큼.

입을 우물거리는 하급 시녀들은 행복한 얼굴을 했다.

“너무 맛있당.”

하급 시녀들의 식사는 얼마 전까지 딱딱한 빵과 우유, 약간의 고기뿐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이렇게 푸짐한 식사를 하게 된 것은 놀랍게도…….

“이게 다 시아나 님 덕분이야.”

양손에 고기를 들고 뜯던 하급 시녀 한 명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맞아, 맞아.”

다른 하급 시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은 부유했기에 식재료 관리실에는 늘 필요한 것보다 많은 식료품들이 보내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쓰지 않게 된 식료품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급 시녀들이 그것들을 볼 일은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관리자인 중급 시녀가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뭐랄까.

관례적으로 가지는 관리자의 특권이었다.

중급 시녀는 남은 식료품들을 제가 먹거나 성 밖에 팔거나 해서 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시아나는 달랐다.

[생각보다 남는 식료품이 많네. 우리 이걸로 음식을 해 먹자.]

시아나가 해고를 한다는 협박에 썩은 표정으로 일을 하던 하급 시녀들은, 당근으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표정을 했다.

그만치 놀라운 일이었다.

첫날이라 하급 시녀들에게 점수를 따려고 저러는 거겠지.

역시 영악한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시아나는 매일매일 남은 식료품을 모아 하급 시녀들과 요리를 해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식료품이 있으면, 그날 가장 열심히 일한 하급 시녀에게 주었다.

종이로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소피, 어제는 네가 선물을 받았지?”

“응.”

소피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는 가장 일찍 와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말린 과일을 선물로 받았다.

그런 칭찬이나 선물을 소피는 처음 받아 보았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아나는 일을 잘했다.

새벽 일찍 나와 모든 식료품을 꼼꼼히 확인했고, 하급 시녀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공정하게 일을 분배했다.

거기에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센스까지.

[내가 같이 있으면 편히 식사를 하지 못할 거 아니야. 나는 따로 먹도록 할게.]

시아나는 식사 시간마다 자리를 피해 주었다.

여러모로 이상적인 관리자였다.

첫날, 비열한 수를 쓰는 악한 중급 시녀라고 비난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하급 시녀들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시아나 님을 오해한 것 같아.”

“맞아. 일도 열심히 하시고 친절하신데.”

“얼굴도 귀여우시고 말이야.”

하급 시녀들은 빵빵해진 볼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 님이 계속 이곳을 맡아 주면 좋겠다.”

“그러게 말이야. 그럼 이 지긋지긋한 곳도 일할 만할 텐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이곳은 중급 시녀 교육 기간 동안 임시로 있는 것뿐이니까.

교육 기간이 끝나면 시아나는 원래 일하던 궁으로 돌아갈 터였다.

소피가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시아나 님께 여쭈어보려고. 궂은일을 해도 좋으니 시아나 님이 있는 궁으로 갈 수 없냐고 말이야.”

“헉, 그런 수가 있었구나. 나도 여쭤봐야겠다.”

나도 나도.

모든 하급 시녀들이 시아나를 따라갈 기세였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두 눈을 이글거리고 있던 잔느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들 정신 차려!”

잔느의 외침에 시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느는 소리쳤다.

“그거 다 연기하는 거야. 시아나가 얼마나 영악하고 악랄한데. 너희들도 속고 있는 거라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급 시녀들은 잔느와 함께 시아나를 욕했다.

우리를 해고한다고 협박하다니 정말 못됐다고, 어쩔 수 없이 명령은 듣지만 절대 순순히 따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어느새 과거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남은 빵을 우물거리며 소피가 말했다.

“속는 거라도 상관없어. 이렇게 잘해 주시는걸, 뭐.”

“……!”

잔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야. 시아나 그 계집애가 또 사람들을 홀려 버렸어!

* * *

잔느가 생각했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시아나는 어쩔 줄 몰라 한다.

하급 시녀들이 모두 제 말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아나는 잔느에게 찾아와 고개를 숙인다.

자신을 도와 달라고.

잔느는 코웃음을 치며 그 말을 거절한다.

시아나는 결국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중급 시녀로서 부적격 판단을 받게 된다.

잔느는 깔깔깔 웃으며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는 시아나에게 말한다.

[시아나 주제에 나보다 먼저 중급 시녀가 되려고 하다니. 어림없지!]

그렇게 잔느는 시아나의 승급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수습 시녀였던 시절에 느꼈던 분함과 억울함을 갚아 주고 싶었다.

잔느는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시아나는 문제없이 중급 시녀가 될 거야.’

하급 시녀들은 며칠 만에 시아나에게 세뇌당해 버렸다.

그깟 빵과 고기가 뭐라고.

“하여간 없는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잔느는 험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그것도 권력이라곤 쥐꼬랑지만큼도 없는 하급 시녀들과 다르게, 시아나에게 중급 시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주방의 총관리를 맡고 있는 중급 시녀, 옴이었다.

‘옴 님이라면 내 말을 들어 주실 거야.’

잔느는 옴을 찾아갔다.

물론 빈 몸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머리핀을 하나 챙겨 갔다.

예상대로 옴은 환하게 웃으며 잔느를 맞이했다.

“너도 참. 뭘 이런 걸 자꾸 가지고와.”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거예요. 저를 돌봐 주는 분께 잘 하라고요.”

“하여간. 잘나가는 상인의 딸은 다르다니까.”

옴은 웃으면서 잔느가 준 머리핀을 챙겨 품속에 넣었다.

그녀의 얼굴이 부쩍 상기되어 있었다.

‘자, 분위기는 만들었고…….’

이제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잔느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옴 님, 저 요즘 너무 힘들어요.”

“왜?”

“뭘 물어보세요. 당연히 시아나 때문이지요.”

“…….”

옴도 잔느의 말 때문에 시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아나가 온 날부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혼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아나라는 애,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일을 꽤 열심히 하던데? 주방에 도착하는 식료품들 상태가 훨씬 좋아졌어. 수량을 실수하는 법도 없고.”

잔느는 순간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소리를 빽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잘해야 해. 이 사람을 움직여야 시아나 고 계집애를 짓밟을 수 있다고.’

잔느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옴 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시아나가 얼마나 일을 대충하는데요. 하는 둥 마는 둥이에요.”

“그래?”

“네. 작업을 제대로 안 끝내면 큰 문제가 될까 봐 저랑 다른 하급 시녀들이 부단히 애를 써서 표가 안 나는 것뿐이라고요.”

잔느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옴은 잔느를 빤히 쳐다보다가 턱을 긁었다.

“그런 것치고 다른 하급 시녀들의 평도 좋던데? 하나같이 시아나가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고.”

“아유, 그거야 시아나가 하급 시녀들의 비위를 맞추기 때문이죠.”

“비위를 맞추다니?”

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잔느는 이 틈을 타 신나게 떠들었다.

시아나가 남은 식료품을 이용하여 하급 시녀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쓰지 않게 된 남은 식료품들을 어떻게 할지는 그곳을 관리하는 시녀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옴은 불쾌감을 느꼈다.

중급 시녀는 하급 시녀에게 선을 긋고 엄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급 시녀의 비위를 맞춰 주면 위계질서가 엉망이 되어 버릴 게 뻔하잖아!’

그뿐이 아니었다.

시아나의 행동은 다른 부서에 있는 시녀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게 뻔했다.

저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른 하급 시녀들이 애꿎은 것을 바라게 될 테니까.

우리를 관리하는 시녀님도 저런 걸 베풀지 않으시려나, 하는.

“이제 갓 중급 시녀가 된 애가 골 때리는 짓을 하네.”

옴의 중얼거림에 잔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

“실력은 없고, 일을 하기 싫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사람들 비위를 살살 맞추는 것밖에 없으니 그렇겠죠.”

옴은 이제 시아나를 두둔하지 않았다.

옴의 얼굴은 잔뜩 험해졌다.

‘됐어. 다 넘어왔어.’

잔느는 속으로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옴 님께서 날을 잡아 시아나에게 한 소리를 하셔요. 잘하면 시아나의 중급 시녀 승급이 취소될 수도 있잖아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시아나는 중급 시녀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 일 없이 무던하게 지내면 상관없지만, 큰 실수라도 저질러 문제가 커지면 중급 시녀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옴이 말했다.

“……하지만 시아나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잖아.”

하급 시녀를 잘 챙겨 먹인다는 것은 괘씸한 일이었지만 시아나를 혼낼 이유가 되지 못했다.

예상했다는 듯 잔느가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잘못이야 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을.

잔느의 눈동자가 하이에나처럼 악독하게 빛났다.

* * *

잔느의 계획은 이러했다.

‘시아나는 식재료 관리실을 맡고 있지. 그런 시아나가 빠져나갈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가 뭐겠어?’

제대로 식재료를 관리하지 못하는 거지!

어두운 밤, 잔느는 슬금슬금 창고로 들어왔다.

창고 안의 찬장에는 온갖 식료품들이 가득했다. 당장 내일 쓸 것들이었다.

잔느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처음에는 불을 질러 버릴까 했지만…….’

이곳이 다 불타 버리면 시아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큰 벌을 받을 터였다.

혹은 목이 잘릴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잔느는 그 계획을 멈추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못됐잖아. 일이 너무 커지는 것도 무섭고.’

이러나저러나 잔느는 아직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였다.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지를 만한 담력은 없었다.

대신 잔느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잔느는 품속에 든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찍.

주머니 속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 징그러워.’

잔느는 끔찍하다는 얼굴로 주머니의 끈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내 주머니 속에서 작은 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잔느는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쿡쿡. 며칠 굶긴 놈들이라 엄청나게 먹어 댈 거야.’

밀가루든 치즈든 과일이든 말이다.

내일 아침,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는 식료품의 반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모두 이곳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시아나의 탓이다.

* * *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시아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흐아아. 졸려.’

식재료 관리실에서 일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건만 엄청나게 피곤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

모든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는 평소보다 늦게 잠을 잤더니 더 힘들어.’

식재료 관리실의 특성상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해야 해서 시아나는 최대한 일찍 잠을 자곤 했다.

그런데 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주방을 관리하는 시녀 옴이 자신을 불렀기 때문이다.

옴은 처음부터 시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도 일절 주지 않을 만큼.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날 부르는거지?’

시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옴에게 갔다.

옴은 싸늘한 얼굴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너, 남은 식료품을 하급 시녀들과 나누어 먹는다며?”

“그렇습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눈치 좀 챙겨. 너는 하급 시녀들에게 착한 척하고 싶어서 그런 짓을 하는 거겠지. 그런데 너의 그 행동이 다른 중급 시녀들에게는 엄청나게 거슬린다고.”

시아나는 대번에 옴의 말을 알아들었다.

괜한 짓을 해서 논란을 일으키지 말란 것이다.

그러나 옴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시아나는 착한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제가 한 행동이 다른 중급 시녀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모를 만큼 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시아나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있었다.

시아나에게는 확고한 신념 하나가 있었다.

윗사람에게는 깍듯하게.

아랫사람에게는 확실하게.

제대로 일을 시키고 제대로 챙겨 주자.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제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시녀들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을 줄 뿐이에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옴은 당황했다.

제가 한마디 하면 시아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잘못했다고 말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옴은 더듬으며 말했다.

“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그렇게 잘해 주면 하급 시녀들이 중급 시녀를 만만하게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다 보면 일도 열심히 하지 않게 되고.”

“그렇지 않아요. 제가 음식을 챙겨 준 후부터 하급 시녀들의 능률이 올라갔습니다. 확인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너무 단호한 대답에 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이 콩만 한 애한테 질 수는 없다고!’

옴은 이글이글 눈을 빛냈다.

‘그 후로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지. 덕분에 어제는 4시간밖에 자지 못했어.’

시아나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정리한 후 진녹색 제복을 입고 그 위에는 앞치마를 둘렀다.

“준비 끝!”

시아나는 방을 나왔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쪽에서 오고 있는 하급 시녀 몇 명이 보였다.

하급 시녀들이 시아나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아나 님.”

시아나도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았다.

“다들 근무 시간보다 일찍 왔네.”

그러면 시아나 님이 또 무슨 선물을 주실지 모르잖아요.

말린 과일이라든가, 쫄깃한 육포 같은 것들.

하급 시녀들은 달콤한 보상을 기대하며 히죽 웃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오면 좋잖아요.”

“아침엔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녀들의 말대로였다.

식재료 관리실은 새벽이 가장 바빴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전에 성에 있는 각 주방에 식료품을 보내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가지는 어젯밤에 미리 정리해 두었으니까 일이 좀 수월할 거야.”

시아나의 말에 하급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에 미리 작업을 해 두니까 확실히 좋은 것 같아요. 아침에 힘도 덜 들고, 물건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으니 실수도 안 하게 되고요.”

“맞아요. 재료를 조금이라도 잘못 보내면 주방 시녀님들께 된통 혼났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없어 좋아요.”

시시콜콜한 말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식재료 관리실 앞에 도착했다.

끼이익.

문을 연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깔깔거리던 하급 시녀들도 말을 멈추었다.

하급 시녀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던 식료품들이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밀가루, 껍질이 깨진 계란, 엉망으로 뒤섞인 과일들.

하급 시녀들이 놀란 얼굴로 창고 안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꺅!”

소리를 내지른 시녀가 창백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쳤다.

“쥐, 쥐야! 쥐가 있어요!”

그제야 시녀들은 창고를 이렇게 만든 범인의 정체를 눈치챘다.

털이 빳빳한 쥐들이 음식 사이사이를 헤집고 있었던 것이다.

“쥐새끼 놈들!”

하급 시녀들이 몽둥이를 하나씩 손에 들었다.

* * *

‘대단하다.’

시아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시아나가 끼어들 틈도 없이 하급 시녀들은 빠른 속도로 쥐를 잡았다.

가히 경이로운 사냥 실력이었다.

“이제 쥐를 다 잡은 것 같아요.”

그러나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쥐들이 헤집은 식료품들은 이미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이걸 어쩌지,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시녀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고가 소란스럽기에 와 봤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중급 시녀 옴이었다.

갑작스러운 옴의 등장에 놀란 하급 시녀들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거렸다.

그때 한 시녀가 앞으로 나왔다.

어느새 와 있던 잔느였다.

잔느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옴 님, 큰일이 났습니다. 밤사이에 창고 안에 쥐가 들어와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 모두 상했어요.”

옴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황궁 안은 고귀한 분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녀들은 쥐나 벌레가 나오지 않게 철저하게 관리했다.

식료품이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갑자기 쥐가 나온다?

“도대체 창고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옴은 그렇게 소리치며 시아나를 노려보았다.

명백한 힐난의 눈빛이었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너의 책임이라는.

“…….”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옴이 말했다.

“왜 아무 말 안 하니?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말했잖아. 남은 식료품을 까먹든 말든 예전보다 훨씬 일을 잘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이야.”

“…….”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대더니 봐. 결국은 내 말이 맞지? 하급 시녀들을 풀어 주고 낄낄거리니 금세 이 꼬락서니잖아!”

옴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중급 시녀장님께 보고하겠어.”

중급 시녀장은 귀찮은 일을 싫어했다.

그녀는 큰 잡음 없이 중급 시녀 교육이 끝나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작은 실수 정도는 넘어가 주곤 했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이라면 그녀도 그냥 넘길 순 없을 것이다.

‘내가 그간의 태도도 문제가 많았다고 하면 별수 없이 시아나의 중급 시녀 직을 박탈하시겠지.’

그만큼 옴의 발언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잔느는 입꼬리를 실룩였다.

‘키키키. 꼬시다.’

모든 것이 잔느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이제 시아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옴에게 무릎 꿇고 한 번만 못 본 척해 달라고 비는 것뿐이다.

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아나는 두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말을 했다.

“그렇게 하세요.”

“……?!”

“제가 창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각 주방에 식료품을 보내는 일이었다.

당장 식료품을 보내지 않으면 황궁 전체의 아침 식사 준비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이었다.

옴도 거기까지 상황이 꼬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쥐가 다 먹어치운 것은 아니니 쓸 수 있는 식료품을 정리해 봐.”

깨끗한 것을 고르고 오염된 부분을 자르면 먹을 만할 것이다.

양이 좀 적긴 하겠지만.

그러나 시아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창고 안의 재료들은 이제 쓸 수 없어요.”

“뭐?”

시아나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쥐는 온몸에 수많은 병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쥐가 창궐하는 곳에는 전염병이 도는 것이고요. 지금 창고에 있는 식료품들도 마찬가지예요. 눈으로 보기에 괜찮다고 썼다가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

옴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옴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유난 떨지 마. 그런 식으로 따지면 평민들은 먹을 게 하나도 없게?”

깔끔한 황궁과 달리 평민들의 집에서는 쥐가 흔했다.

그러나 쥐가 조금 갉아 먹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평민 출신인 옴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시아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옴 님의 말씀대로예요. 이 식료품으로 만든 음식을 먹어도 큰일이 나는 경우는 극히 일부겠죠. 하지만 그 일부가 황족이라면요?”

“……!”

그제야 시아나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옴의 얼굴이 굳었다.

이 식료품으로 만든 음식을 먹은 황족이 배탈이라도 난다면 일이 커졌다.

제대로 식료품을 관리하지 못한 시아나의 책임으로만 끝나지 않을 만큼.

“저는 그런 식으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시아나의 말에 옴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네 말은 이해했어. 하지만 이대로 식료품을 하나도 보내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시아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식료품은 차질 없이 보내도록 할 테니까요.”

“뭐?”

옴이 황당하단 얼굴을 했지만, 시아나는 더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고 창고를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 * *

“전하.”

라시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라시드는 아침잠이 많았다. 몸이 원할 때까지 잠을 잔 후 일어나야 했다.

“전하.”

한 번 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라시드는 살의를 느꼈다.

‘감히 나의 단잠을 깨우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솔.’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잠은 달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이불을 둘둘 말고 누에고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절대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하지만…….

“전하, 시아나 님이 찾아왔습니다.”

벌떡, 라시드가 일어났다.

이제 갓 탈피한 나비처럼 반짝이는 얼굴로.

호위 기사 솔은 그 모습을 기가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아나 님이 전하께 다급히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라시드는 그것이 뭔지 묻지도 않고 솔이 건넨 가운을 걸쳤다.

아직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 시아나가 자신을 찾아오다니.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다.

‘중급 시녀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잘은 몰라도 시녀들 사이에 기 싸움이 굉장하다고 들었다. 어쩌면 시아나는 그런 싸움에 휘말려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건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라시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늘 여유롭던 그에게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아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라시드는 제가 엄청난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시아나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화가 났구나.”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시아나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너무도 이른 시간에 멋대로 찾아와 송구하옵니다, 전하.”

라시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나를 찾아온 이유를 말해 보거라.”

이 시간에 이렇게 다급히 찾아왔을 정도면 이런저런 말을 할 여유가 없음이 분명했다.

시아나는 주저 없이 상황을 말했다.

“제가 관리하던 창고에 쥐가 들어와 오늘 아침에 필요한 식료품들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아나는 이곳을 찾아왔다.

식료품 보관소는 시아나가 관리하는 곳만이 아니었다.

서열이 높은 황족은 저마다 개인 궁의 창고에 식료품들을 모아 놓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라시드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구나.

‘내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라시드의 기분이 상기되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황태자궁의 창고에 있는 물건을 탈탈 털어서라도 시아나에게 줄 셈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라시드의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전하, 황태자궁에 있는 식료품들을 제게 팔아 주세요.”

라시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팔라고?”

“예.”

라시드는 시아나가 필요한 식료품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양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건 눈치챘다.

게다가 황궁의 식료품들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그것을 산다니.

라시드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물었다.

“물건의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비싸겠지요.”

시아나가 중급 시녀로서 꼬박 일해 받은 급료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몇 년을 모아야 겨우 값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괜찮으시면 값은 후불로 천천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아나는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중급 시녀의 옷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작고 가녀렸다.

동그란 얼굴은 여인보다는 소녀라는 말이 잘 어울릴 만큼 앳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강했다.

‘그냥 도와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러면 주저 없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라시드는 그만큼 시아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시아나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이런 이른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일 터였다.

그럼에도 시아나가 라시드에게 기대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런 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서운해.’

라시드는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 보았다.

아니, 제 손길을 거부하는 작은 동물들에게는 느껴 본 적이 있지만 사람에게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라시드는 제 마음이 어이가 없어 하, 하고 웃었다.

시아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뭐지, 저 뜻 모를 미소는?’

식료품을 주기 싫다는 건가? 역시 내가 너무 무리수를 둔 걸까.

지금이라도 큰 실례를 범해 죄송하다며 황태자궁을 떠나야 할까.

그러나 시아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잠시 후, 라시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가. 네가 원하는 만큼.”

시아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시아나는 라시드가 부른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갔다.

큰 수레 몇 개가 가득 찰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시아나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식재료 관리실의 시녀들은 입을 쩍 벌렸다.

특히 시아나가 이대로 도망가 버린 것 아니냐며 호들갑 떨던 잔느는 더더욱 기함한 얼굴을 했다.

잔느가 수레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그게 다 뭐야?”

“오늘 쓸 식료품들이야.”

“그걸 몰라 묻는 게 아니잖아! 그걸 다 어디에서 났냐고!”

시아나는 그 말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대신 시녀들을 불렀다.

“다들 어서 짐을 내리도록 해. 한시라도 빨리 정리해서 각 주방에 보내야 하니까.”

시아나의 우렁찬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하급 시녀들은 ‘네!’ 하고 대답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느는 도저히 이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일개 중급 시녀 한 명이 최고급 식료품을, 그것도 저만한 양을 단숨에 구해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시아나 저 계집애 마법사인 거 아니야? 아니면…….’

그때 한 시녀가 다가왔다.

같은 하급 시녀인 소피였다.

“뭐 하니, 잔느. 어서 움직이지 않고.”

그녀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잔느를 쏘아보더니, 이내 잔느의 손 위에 밀가루가 담긴 자루를 올렸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엄청난 무게였다.

“이걸 어떻게 혼자 들어!”

잔느는 소리쳤지만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으아아, 드디어 끝났다!”

하급 시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이마에는 땀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었다.

각 주방에 필요한 식료품을 모두 납품한 것이다.

“와, 정말 늦는 줄 알고 쫄렸네.”

“늦는 거면 다행이지. 물건들을 못 가져다줬어 봐.”

주방 시녀들은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한 시녀들을 달달 볶았을 것이다.

일 똑바로 못 하냐며 따귀를 맞았을지도.

“거기에서 끝이겠어? 감봉을 당하거나 재수 없으면 해고당할 수도 있었어.”

그만큼 큰일이었다.

한 시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시아나 님께서 잘 해결해 주셔서 다행이야.”

“응응, 정말.”

다른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녀들의 시선을 눈치챈 시아나가 빙긋이 웃었다.

“다들 수고했어.”

“…….”

시녀들은 새삼 놀라웠다.

아니, 신기했다.

시아나의 외양은 평범했다.

아니, 동그란 눈을 가진 유순한 얼굴은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아나는 엄청난 능력자였다.

한 시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아나 님, 도대체 어떻게 식료품을 구해 오신 거예요?”

시아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귀한 분의 도움을 받았어.”

“……!”

그 말에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드넓은 황궁에 이만한 식료품을 바로 보내 줄 수 있을 만한 개인 창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후, 황비 같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만한 존재들뿐이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시아나의 뒤에는 엄청난 뒷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게다가 선뜻 도움을 주시는 걸 보면 시아나 님이 엄청나게 예쁨받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이야!”

상기된 얼굴의 시녀들 틈 사이로 한 명만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느였다.

시아나를 이끌어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잔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패전국 출신의 시녀 따위에게 진짜 애정을 줄 황족은 없다.

시아나에게 주는 것은 중급 시녀 직급까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시아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고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잔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태에서 내가 시아나를 괴롭히려고 쥐를 푼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을 시아나가 저를 예뻐하는 분께 이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왔다.

잔느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절대 들킬 리 없어!’

어젯밤, 잔느가 벌인 짓을 누군가 보았다면 진즉 말이 나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입을 꾹 닫고 지내면 된다.

‘그러면 아무도 내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를 거야!’

그러나 그것은 잔느의 바람일 뿐이었다.

어느새 잔느의 앞에 다가온 시아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랬지, 잔느?”

“……!”

잔느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 무슨 소리야! 나, 난 어젯밤에 일찍 잠이 들었어! 창고 근처에도 온 적 없…….”

한 박자 뒤에 잔느는 헉 하고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 실수를 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아나가 역시, 라는 눈빛으로 잔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창고’의 ‘창’ 자도 말한 적이 없는데…….”

“……!”

“역시 네가 어젯밤 창고에 쥐를 풀었구나, 잔느.”

잔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사실 시아나는 이 모든 일이 잔느가 벌인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증거나 증인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정황이 그랬다.

‘옴이 난데없이 날 불러 밤늦도록 잔소리를 했지.’

갑자기 왜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 이유가 명확했다.

시아나를 붙잡아 둔 것이다.

잔느가 일을 벌일 수 있게.

혹시나 그 타이밍에 시아나가 창고를 둘러보러 간다면, 잔느의 계획은 실패할 테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시녀들이 창고로 몰려들었을 때…….’

시녀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쥐 떼를 보고 황당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잔느만이 평온했다.

아니, 애써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실룩이기까지 했다.

그 얼굴에서는 계획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모략자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시아나는 그것을 캐물을 수도 탓할 수도 없었다.

당장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그럼 이제 범인을 찾을 차례지.’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에는 강아지처럼 순했던 얼굴이 오만한 왕비처럼 위압적이었다.

잔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니야! 난 정말 아니야. 증거도 없잖아!”

그러나 시아나는 그 말에 휩쓸리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증거야 찾으면 그만이지.”

“뭐?”

“감찰부에 신고해서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 달라고 할 거야.”

“……!”

잔느는 눈을 크게 떴다.

감찰부는 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조사하는 부서였다.

그들이 마음먹고 조사하면, 황궁의 시녀 한 명이 특정한 시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금세 밝혀지겠지. 어젯밤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던 이들 중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으며, 남몰래 쥐를 구한 이력이 있는 시녀가 누구인지 말이야.”

잔느는 입술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이내 잔느는 주먹을 꽉 쥐었다.

‘흐, 흔들릴 것 없어. 시아나의 말은 허풍이야.’

황궁은 시녀에게 엄격했다.

시녀가 큰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시녀 한 명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시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관리 시녀까지 징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넌 절대 감찰부에 신고할 수 없어. 괜히 일을 키웠다가 함께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을 테니까!”

잔느는 눈을 부릅떴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귓가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잔느는 방금 전 말을 내뱉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시아나라는 것을 알았다.

시아나는 잔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니, 잔느?”

“……!”

시아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잔느, 그건 너의 착각이야. 자꾸 잊어버리나 본데, 내 뒤에는 고귀한 분이 계시단다.”

“……!”

“그분은 내가 이런 추잡한 상황에 휩쓸리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시아나가 잔느의 귓가에 속삭였다.

“식료품에 온갖 병을 가진 쥐를 풀어, 황족의 몸을 해하려고 한 천인공노한 죗값을 받는 것은 너뿐이란 말이야.”

잔느는 소리를 꿱 질렀다.

“내, 내가 언제 황족의 몸을 해하려고 했다고 그래! 나는 단지 너를 골탕 먹이려고……!”

“…….”

시아나는 차가운 눈으로 잔느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잔느와 시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급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의 눈빛에는 명백한 경멸과 적의가 어려 있었다.

그제야 잔느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아챘다.

풀썩.

잔느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잔느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저, 정말 신고할 건 아니지?”

“…….”

시아나의 대답 없는 모습이 잔느의 불안함을 고조시켰다.

잔느에게는 남아 있던 일말의 자존심도 챙길 여유가 사라졌다.

잔느는 두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그러지 마, 시아나. 내가 잘못했어. 우, 우리 동기잖아. 한 번은 용서해 줄 수 있잖아.”

잔느에게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시아나는 착하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면 분명 용서해 줄 거야.

예상대로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그 순간 잔느의 얼굴에 환해졌다.

‘그것 봐! 이 애는 역시…….’

그러나 시아나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시아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회초리를 가져와.”

“……!”

그 말에 잔느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요,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신고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뿐이야.”

사실 시아나는 애초에 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다.

잔느의 말대로 일이 커지면 여러모로 상황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잔느만이 아니라 시아나,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서 일하는 하급 시녀들 모두 징계를 당할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다 함께 해고를 당하는 끔찍한 상태가 벌어질지도.’

황궁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시녀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되도록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한 시녀가 가져다준 긴 회초리를 손에 든 시아나가 잔느를 향해 말했다.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한 하급 시녀에게 엄벌을 내리겠다.”

가시 돋친 장미처럼 뾰족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 * *

황태자의 응접실.

잘 가꾸어진 나무와 꽃 위로 진홍색 석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시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가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나.”

시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작은 동물 세 마리(흰 페럿, 다람쥐, 새)를 몸에 올린 아름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응접실의 주인, 라시드였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해가 뜬 아침엔 잔뜩 화가 나 있더니, 해가 진 지금은 잔뜩 기분이 가라앉아 있구나.”

“……!”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는 무표정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타인에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다.

궁에서 오랜 시간 지내며 자연스럽게 감정을 숨기는 법을 익힌 덕분이었다.

그런데 라시드는 제 감정을 너무 잘 읽었다.

시아나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제 기분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거예요?”

사실 라시드는 사람의 감정을 읽는 법을 모른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라시드가 제 품을 파고드는 흰 페럿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작고 귀여운 생명체들이 어떤 상태인지는 쉽게 알 수가 있더군.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시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내가 저 쪼꼬미들이랑 동급이라는 거야?’

농담인가 싶었지만, 라시드의 얼굴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하여간. 진지하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시아나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시드가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된 건가?”

“……네, 전하의 도움 덕분에요.”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준 식료품으로 깔끔하게 일이 해결되었다.

쥐가 파먹은 식료품들은 필요한 하급 시녀들이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잔느는…… 시아나에게 종아리 100대를 맞았다.

잔느는 처음에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다가 나중에는 시아나에게 너무하다며 비난을 내뱉다가, 또 나중에는 다시 잘못했다고 빌었다.

[제발, 제발 그만 때려요, 시아나 님. 너무 아파요. 흑흑.]

잔느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그러나 시아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100대를 다 때렸을 때, 잔느는 제 힘으로 설 힘도 없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급 시녀들 몇 명이 다가와 그런 잔느를 부축했다.

그녀들의 눈빛에서 잔느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은 잔느에 대한 동정심 조금, 그리고 시아나에 대한 선연한 두려움이 전부였다.

시아나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보았지? 황궁의 시녀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는 결코 용서치 않을 거야.]

서슬 퍼런 협박 같은 말에 하급 시녀들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일이 끝날 때까지 하급 시녀들은 시아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그녀들에게 시아나는 더 이상 다정한 상사가 아닌 공포의 대상일 테니까.

새삼 그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아나는 아직도 회초리를 쥔 자국이 남아 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분이 무척 더럽더군요. 제 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일은.”

“…….”

라시드는 짧은 말로 시아나가 오늘 겪었던 일을 짐작했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후회해?”

“아뇨. 전혀 그렇진 않아요. 저는 중급 시녀니까요.”

중급 시녀는 아랫사람들을 다뤄야 했다.

그리고 사람을 다룬다는 것은 당근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황궁처럼 엄격한 곳은 더더욱.

잘못했을 때는 제대로 혼을 내야 했다.

‘다시는 그런 짓을 벌이지 않게.’

그래서 일부러 다른 하급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잔느를 때렸다.

잔느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엄격한 경고였다.

라시드가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와, 무섭다.”

그 말을 들은 시아나가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당연히 너지.”

시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제가 무섭다고요?”

“응. 방금 전 표정이 정말…… 하급 시녀들이 덜덜 떨었겠는데.”

맞는 말이었지만 시아나는 도저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죽인 사람의 숫자가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거든요.’

시아나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라시드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하하 웃었다.

“정말인데.”

진심이었다.

방금 전 시아나의 얼굴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서웠다.

그래서 좋았다.

평소에는 봄꽃처럼 순한 여인이, 필요할 때는 겨울철 가시덩굴처럼 강인해지는 점이.

“……!”

라시드의 얼굴을 본 시아나는 미간을 모았다.

라시드는 가끔 저렇게 자신을 보곤 했다.

마치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석을 발견한 듯한 황홀한 눈빛으로.

예전에는 저럴 때마다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 달랐다.

얼굴에 열이 조금 올랐다. 가슴이 조금 간지럽기도 하고.

‘하여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잘생겨서는.’

시아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송구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시시콜콜한 넋두리를 늘어놓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라시드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아나는 종이 한 장을 라시드에게 건넸다.

“오늘 아침, 전하께 구입한 식료품의 목록과 가격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총 가격을 계산해 보니 총 9980골드더군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주당 50골드인 중급 시녀의 급여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도 꼬박 4년이 걸릴 만큼.

꼼짝없이 빚만 갚다 끝날 처지였지만, 다행히 잔느를 설득(이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하는 데 성공했다.

시아나가 회초리 100대로 이 일을 묻어 주는 대신 잔느가 비용을 모두 내기로 한 것이다.

시아나가 말했다.

“일이 잘 풀려 돈을 바로 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3일 뒤에 대금을 모두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몇 년에 걸쳐 갚았어야 할 돈을 일시불로 갚겠노라고 선언했건만, 라시드의 얼굴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정리한 종이를 바라보다가, 턱을 괸 채 말했다.

“나는 물건 값을 돈으로 받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

시아나는 한 방 맞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돈으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껏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주었던 무형의 것들(황궁의 이야기 등)과 달리 식료품은 형태가 있고 값이 분명한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생각일 뿐이었나 보다.

시아나가 난감한 듯 눈썹을 모았다.

‘언제나 그랬듯 차를 따라 주는 것으로 값을 치르길 바라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따라 주어야 하는지 계산이 되질 않았다.

9980골드만치의 차라니.

만 잔을 따라도 모자랄지도.

그렇게 나름 열심히 계산을 하는데 라시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나랑 --- 해 줘.”

시아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시아나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정말 이래도 될까요?”

라시드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그래. 그렇겠지.

당신은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황태자니까!

‘하지만 나는 일개 시녀라고요.’

이런 식으로 한밤중에 제멋대로 황궁을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시아나는 현재 라시드와 함께 마차를 타고 궁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시녀가 아예 궁을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복잡한 절차를 밟아 정식 외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지금은 중급 시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중이지.’

몰래 궁을 나간 것을 들키면 중급 시녀 승급이 취소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와 함께 마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라시드가 받고 싶은 대가가 이것이었기 때문에.

[나랑 데이트 해 줘.]

데이트라니.

너무 해괴한 단어였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무섭게 인상을 찌푸린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는 말을 바꾸었다.

[오늘 궁을 나갈 일이 있거든. 함께 가 주었으면 좋겠어.]

[……왜요?]

눈썹을 모으며 묻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는 고민 없이 말했다.

[혼자 가기 무서워서.]

하~~~나도 납득이 안 가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값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을 나가게 되었다.

불안해하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절대 오늘의 외출이 문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시아나는 그런 라시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전하는 제정신이 좀 아니시긴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고작 시녀 한 명이 황궁을 나간 것을 숨기는 것쯤, 그에게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시아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후 마차가 선 곳은 놀랍게도 수도 내 번화가였다.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에 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죠?”

“오늘 마을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열린다더군.”

“……설마 그걸 보려고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웃었다.

“나는 작고 귀여운 것도 좋아하지만, 반짝반짝하고 예쁜 것도 좋아하거든.”

“……그렇군요.”

영 의심스러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실 그의 의도나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시아나는 아침에 구입한 식료품 값을 치르기 위해 함께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나오시지요.”

문밖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시드가 먼저 마차를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시아나가 그를 막았다.

“잠시만요. 설마 그렇게 가시려고요?”

“그런데?”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그러고는 라시드의 앞에 다가가, 스카프로 그의 얼굴을 둘둘 감았다.

“……?”

순식간에 스카프로 얼굴이 감싸인 라시드가 ‘이게 뭐야?’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가 스카프를 한 바퀴 더 감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는 너무 눈에 띈다고요.”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황태자.

제국에 널리 퍼진 이름만큼 거리에는 그를 알아보는 이 또한 많을 터였다.

단순히 사람들이 몰려들까 봐 걱정인 것이 아니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암살자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가능한 이야기였다.

라시드는 가지고 있는 권력만큼 적이 많은 남자였다.

게다가 현재 황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황태자.

‘황위를 놓고 경쟁하는 다른 황족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시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올렸다.

시아나가 감은 스카프 덕분에 눈만 빼꼼 나온 라시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그제야 시아나는 라시드와 심하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빨리 그에게서 멀어지려던 찰나, 라시드가 스카프 끝을 잡고 있는 시아나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

펑, 하고 얼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시아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라시드가 잡은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저는 황궁의 시녀예요. 황태자 전하의 안전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건만 라시드의 얼굴에 깃든 미소는 풀어지지 않았다.

시아나는 그의 미소에서 도망치듯 눈을 질끈 감았다.

* * *

거리의 모습은 화려했다.

곧게 뻗은 길. 그 옆에 늘어선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 줄에는 작은 등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갖가지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다양했다.

알록달록한 꽃, 반짝이는 반지, 달콤한 과자.

그리고 그 물건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우와.’

시아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시아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궁에서 지냈다.

공주였던 시절에도, 시녀가 된 후에도.

궁 밖에 나와 이렇게 활기찬 거리를 돌아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거리도 무척 멋지고요. 재미있는 것들도 엄청 많아 보이네요.”

얼굴에 스카프를 둘둘 말고 있는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들끼리 여는 축제라 초라할 줄 알았더니 전혀 그렇지 않구나. 쓸데없는 장식물을 세워 두기만 하는 황실 행사보다 나아.”

시아나는 힐끗 라시드를 보았다.

둘둘 만 스카프 사이로 보이는 라시드의 눈이 평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꼭 어린아이처럼.

“……전하도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으신가요?”

“아주 어렸을 때는 궁에서만 지냈고, 조금 커서는 내내 전쟁터만 돌아다녔으니까.”

시아나는 라시드가 13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가 긴 전쟁을 끝내고 제국에 온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지금까지 전하와 나는 하늘과 땅만큼, 아니 저 위의 태양과 땅속에 박힌 흙 알갱이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왕가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게 살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시아나의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감정에 눈썹을 찌푸린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불꽃놀이가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남는군. 기다리는 동안 뭔가 먹도록 할까?”

“전하께서 값을 지불하시는 건가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내가 데리고 왔으니까. 먹고 싶은 게 있어?”

시아나는 타인에게 대가 없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이 먼저 준다는 것은 주저 없이 잘 얻어먹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사냥감을 물색하는 매의 눈으로 길게 늘어선 가게들을 보았다.

알록달록한 설탕이 뿌려진 동그란 도넛, 형형색색의 과일과 고기를 꽂은 꼬치.

가게 앞에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리스 공주님이 보면 엄청 좋아하셨겠다.’

하지만 시아나는 아리스가 아니었다.

평범한 여인답게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한 것을 먹고 싶었다.

시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저쪽에 있는 가게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게 좋겠어요.”

“…….”

라시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놀랍게도 시아나가 가리킨 곳은 맥주를 파는 가게였다.

“저건 과일과 설탕으로 만든 주스가 아니야. 술이란다.”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말하는 라시드를 보며 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저는 18살이랍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제국에서도, 시아나의 고향에서도 18살이면 어엿한 성인이었다.

라시드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아나가 술을 마신다니 어색했다.

저렇게 자그마한데.

라시드가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술을 좋아해?”

사실 좋아하고 말 것도 없다.

시아나는 제대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공주였던 시절에는 술이 허락되지 않아서.

시녀가 된 후에는 술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하지만 술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시녀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에 마시는 한 잔이 그렇게 시원하대요. 힘들었던 것이 다 날아간다고요. 오늘 제게는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답니다.”

시아나는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라시드는 그런 시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맥주는 평민들이나 마시는 술이었다. 아니, 그전에 황태자에게 술을 사 달라는 시녀라니.

역시 무리가 있었나 싶어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안 되나요?”

빛보다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리가.”

시아나가 원하는 것이라면 라시드는 사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 * *

맥주 가게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가게 안에 들어간 라시드가 주인에게 금화 한 개를 내밀며 말했기 때문이다.

“불꽃놀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주게.”

사장은 단번에 깨달았다.

스카프를 둘둘 감아 얼굴도 보이지 않는 수상한 남자가 오늘밤 손님 중 최고의 돈줄임을!

“그럽지요.”

사장은 단숨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2층 테라스였다.

하늘이 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흠흠. 역시 권력이란 좋네.’

시아나는 속으로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라시드가 자리했다.

이내 맥주가 도착했다.

“이 제국에서 가장 시원하고 깊은 맛을 가진 맥주라고 자부합니다!”

사장은 씩씩하게 맥주를 어필하며 사라졌다.

두근두근.

시아나는 상기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라시드가 물었다.

“정말 마실 거야?”

“그럼요. 마시지 않을 거라면 왜 여기까지 왔겠어요.”

시아나는 나무 잔을 들었다. 잔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찰랑거렸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맥주잔을 들이켰다.

꿀꺽.

시아나의 목구멍 안으로 맥주 한 모금이 넘어갔다.

맥주잔을 내린 시아나가 썩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거짓말쟁이들! 도대체 이게 뭐가 맛있다는 거야?!”

난생처음 술을 마신 후 지을 법한 표정에 라시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아직은 네게 무리야.

—라는 듯이.

* * *

“사장님, 여기 한잔 더.”

“예입.”

사장은 신바람 난 목소리로 대답하며 맥주 한 잔을 시아나 앞에 가져다주었다.

시아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잘 마시는구나.”

“그러게요. 분명 첫맛이 끔찍했는데 이상하게 마시면 마실수록 맛있네요.”

시아나는 신기하다는 듯 말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라시드가 말했다.

“맛있는 것은 원하는 만큼 먹는 게 좋지. 하지만 그러다가 취할 수도 있어.”

“에이. 아직 멀쩡한걸요.”

얼굴에 열이 조금 오르고 심장이 조금 콩콩거리긴 했지만 괜찮았다.

전혀 문제없어.

시아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맥주를 홀짝였다.

“전하는 왜 마시지 않으세요?”

라시드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의외로 라시드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네가 술 취해 쓰러지기라도 하면 챙겨 주어야 하니까.”

다정한 말에 시아나는 미간을 모았다.

이제는 안다.

라시드는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변덕도 아니었다.

순수한 호의였다.

그것이 시아나는 너무나 이상했다.

시아나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제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의외의 질문을 들은 듯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귀여워서 라고.”

“……!”

시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시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일개 시녀에게 잘해 주신다고요?”

“고작 그런 이유라니. 귀엽다는 것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어. 어떤 적의도, 악의도 사라지고 그저 잘해 주고 싶은 마음만 남지.”

“…….”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시아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 진심이구나.

나를 그가 키우는 동물과 같은 급으로 보고 있어.

‘동그란 눈으로 뽈뽈뽈뽈 열심히 움직이는 그 자그마한 녀석들 말이야.’

얼핏 눈치채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새삼 기분이 나빴다.

시아나가 팔을 뻗어 라시드의 두 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새초롬한 눈빛으로 라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저는 동물이 아니거든요?”

“…….”

“어느 동물이 전하께 이런 짓을 하겠어요.”

“……!”

라시드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시아나가 두 손에 힘을 주어 라시드의 볼을 쫘--악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얼굴에 살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피부에 탄력이 있었다.

말랑한 밀가루 반죽처럼 볼이 늘어난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깔깔 웃었다.

“어머. 전하도 이제 귀여워졌네요.”

“…….”

“나랑 똑같아.”

라시드는 기가 찬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취했구나.”

물론 시아나는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닌데요. 멀쩡한데요. 진짠데요.”

그러면서도 시아나는 라시드의 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볼이 이만치 늘어났는데도 잘생겼다니.”

“…….”

시아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미인을 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는 그런 평범한 사람.

그래서일 것이다.

이따금 라시드를 볼 때마다 이렇게 묘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시아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나 되는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며 순진한 시녀를 희롱하고 말이야.

“열 받아.”

“……!”

라시드는 이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의 얼굴이 그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쪽.

시아나의 입술이 라시드의 오뚝한 콧대 위에 닿았다.

“…….”

라시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아나가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렸다.

“어때요. 당황스럽죠? 어찌할 바를 모르겠죠? 전하가 눈을 반짝이면서 날 바라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었다고요.”

그러니까 이건 복수예요.

그 말과 동시에 시아나의 머리 위로 팡! 하고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 * *

“……!”

시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창문 하나가 달린 작은 방.

중급 시녀 교육 기간 동안 묵게 된 시아나의 방이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어스름하게 뜬 해를 보고 시아나는 벌떡 일어났다.

“꺅! 지각이잖아!”

아침 식사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시아나는 절대 지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어제처럼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시아나가 오지 않아도 하급 시녀들은 문제없이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하급 시녀들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책임자는 자리에 있어야 했다.

시아나는 황급히 제복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어제는 정말 어떻게 되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술을 너무 얕봤다.

몇 잔째 맥주를 홀짝이면서도 멀쩡한 줄 알았다.

풋내기의 착각이었다.

시아나는 거하게 취해 있었다.

어젯밤 일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옷을 다 입은 시아나는 서둘러 식재료 관리실로 향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숙취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했다.

침대에 누워 푹 쉬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시녀에게 그런 느긋한 여유가 허락될 리 없었다.

식재료 관리실에 도착한 시아나는 문을 쾅 열었다.

“늦어서 미안!”

그러나 한창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녀들은 아무도 일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무언가를 냠냠 먹고 있었다.

그들은 시아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시아나 님.”

시아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다들 뭘 하고 있는 거야? 일 안 해?”

하급 시녀들 사이에 있던 소피가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 휴식일이잖아요. 그래서 시아나 님도 늦으시나 했는데 혹시 모르셨나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특별 휴식일이 뭔데?”

“아침에 급하게 명이 도착했어요. 매일 쉬지 않고 일하는 황궁의 시녀들이 너무 고단해 보이니 오늘 하루는 모두 푹 쉬라고요.”

“……누가 그런 황당한 명령을 내려?”

소피가 대답했다.

“라시드 황태자 전하요.”

그 말과 동시에 소피의 뒤편에 앉아 있던 시녀들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 때문에 황태자 전하가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우리 같은 아랫것들을 이렇게 챙겨 주시다니 다정해.”

“흑흑, 맞아요.”

“거기에 잘생겼지, 몸 좋지, 싸움 잘하지, 돈도 많지.”

“황태자 전하, 사랑합니다!”

뜻밖에 받은 휴일에 시녀들은 라시드에 대한 격한 찬양 모드에 빠져 있었다.

“…….”

시아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아나에게 소피가 다가왔다.

“어서 앉으셔요, 시아나 님. 아침 식사를 하셔야지요.”

소피는 시아나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내 식사가 나왔다.

바삭바삭하게 튀긴 식빵과 뜨끈한 꿀차,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는 뜨끈한 토마토 수프였다.

매일 아침 시녀들에게 지급되던 빵과 우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이건 또 뭐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음식을 노려보는 시아나를 향해 소피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음식들도 보내오셨어요. 시녀들의 아침 식사가 부실하니 잘 챙겨 먹으라고요.”

옆에 있던 다른 시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챙겨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조금 아쉽긴 해요. 이왕 힘내라고 보내 주시는 거면 고기를 보내 주시지. 이건 영양식이 아니라 딱, 숙취해소용 음식이잖아요.”

시녀들의 말대로 차려진 음식은 하나같이 숙취를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는 메뉴들이었다.

시녀들이 사뭇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어젯밤 황태자 전하께서 거하게 술을 드신 거 아닐까? 전하께서 술 한잔하고 생각해 보니 쉴 새 없이 일하는 우리들이 너무 짠한 거야. 그래서 휴일도 주시고, 음식도 보내 주신 거지.”

아니, 어젯밤 거하게 술을 마신 것은 전하가 아니라 나야.

‘그리고 이런 음식을 보내 주신 것도 나 때문일 테고.’

믿기지 않지만 높은 확률로 시아나의 생각이 맞을 터였다.

시아나는 눈을 꾹 감았다.

‘창피해!’

이번만큼은 고작 시녀 한 명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라시드가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라시드가 이렇게 챙겨 줄 만큼 술을 마신 제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아나 님, 안 드시고 뭐 하세요. 따뜻할 때 드세요.”

소피의 목소리에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한 것은 창피한 것이고,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이다.

‘일단 먹고 다시 창피해하자.’

시아나는 살짝 빨개진 얼굴로 수프를 한 스푼 떴다.

꿀꺽 삼키는 순간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뜨끈한 토마토가 뱃속에 남아 있는 알코올을 싹 씻겨 주는 느낌이 들었다.

대번에 울렁거렸던 속이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와. 이래서 해장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알코올 초보 시아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시아나가 입을 우물거리며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하는 시녀들은 대화를 나누며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

시아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시아나는 잔느에게 회초리를 휘둘렀다.

그것도 무려 100대나.

마지막에 가서 잔느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놓기까지 했다.

그 순간의 하급 시녀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시아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나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예상대로였다.

시아나가 등장하는 순간 하급 시녀 들은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전과는 달리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시녀들은 여전히 밝았고,조잘조잘 말도 많았다.

“……다들 내가 무섭지 않은 거야?”

시아나의 작은 중얼거림은 시녀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시녀들은 말을 멈추고 시아나를 쳐다보았다. 묘한 정적 속에서 소피가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시아나 님께서 잔느를 혼내는 모습을 보고 조금 놀라긴 했어요. 시아나 님께서는 늘 저희에게 친절하셨으니까요.”

“…….”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요.”

잔느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냥 넘어가기엔 심각한 중죄였다.

“시아나 님께서 왜 감찰부에 신고를 하지 않고 직접 벌을 주신지도 알고 있고요.”

사건이 커지면 잔느만이 아니라 그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시아나, 그리고 그녀의 죄를 막지 못한 죄로 다른 하급 시녀들까지 싸잡아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명확한 이유가 있어 그토록 엄하게 혼내신 것을 아니까요. 무작정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는답니다.”

시아나가 멍하니 소피와 하급 시녀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들 똑똑하구나.”

시아나의 칭찬에 소피와 하급 시녀들이 웃었다.

“이래 봬도 황궁의 시녀니까요.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급 시녀이긴 하지만요.”

씩씩한 말에 시아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사건이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잔느의 상태는 어때?”

“다리의 상처가 심해요. 피는 멎었지만 다 나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소피가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오늘 쉬게 되어 다행이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뚝거리는 다리로 일을 나왔어야 할 테니까요.”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회초리 100대를 자비 없이 내리쳤다.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을 만큼 상처가 클 거야.’

하지만 시아나는 잔느에게 쉬라고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잔느는 착각을 하게 될 테니까.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도 금방 용서를 받는구나. ……그럼 또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벌을 줄 때는 확실히 해야지.’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상처가 아무는 동안 제대로 반성을 해야 할 텐데. 안 그러면 더한 벌을 받게 될 테니까.”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말에 소피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시아나는 토마토 수프 한 접시를 다 먹었다.

함께 나온 튀긴 빵과 꿀차는 영 당기지가 않아 먹지 않았다.

‘숙취해소용 음식에도 취향이 있구나.’

시아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아나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하급 시녀들에게 말했다.

“난 먼저 가 볼게. 다들 편히 쉬도록 해. 모처럼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특별 휴무일이니까.”

“네!”

우렁찬 시녀들의 목소리에 골이 울렸다.

‘아이고, 머리야.’

토마토 수프를 먹었더니 울렁이던 속은 그럭저럭 괜찮아졌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숙취라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 어서 방에 들어가서 누워야겠어.’

힘없는 말미잘처럼 흐물흐물 걷던 시아나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주방 시녀 옴이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틀 전 밤, 잔느가 창고에 한창 쥐를 풀고 있을 때 옴이 나를 불렀지. 마치 내가 창고에라도 갈까 봐 붙잡아 두는 것처럼.’

그뿐인가.

어제 아침에는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시아나에게 소리쳤다.

시아나가 창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으니 중급 시녀장에게 말하겠다고

시아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옴은 잔느의 조력자야. 즉, 공범이란 셈이지.’

하지만 죄가 명확한 잔느와 달리 옴에게는 몰아붙일 만한 증거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한 행동은 시아나를 쏘아붙인 것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잔느가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졌어도 딱히 걸릴 게 없으니 굳이 날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아니지. 반대로 그런 식으로 시아나의 선에서 사건을 무마시킨 것을 책잡으려는 셈일까.

가능한 일이었다.

시아나가 한 행동은 시녀들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암암리에 선택하는 방법이었지만, 제대로 따지면 궁의 규율을 어긴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옴이 나타난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고민하는데, 옴이 시아나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

“……?”

예상과 전혀 다른 태도에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옴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제 하급 시녀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어. 잔느가 너를 괴롭히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면서.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

“…….”

“난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너를 다그쳤어. 좀 더 제대로 알아봤어야 하는데.”

시아나는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데요.’

이내 시아나는 그녀의 행동이 하루 만에 변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렇게 사과할게. 그러니까 네 뒤에 있다는 분께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이거였구나.

‘내 뒤에 있다고 소문난 수수께끼의 권력자 때문에.’

그분께 쪼르르 달려가서 ‘옴이 날 괴롭혀쪄요!’라고 이를 것이 겁나서!

‘사실 그 말은 반쯤 허풍이었는데.’

물론 시아나는 일개 중급 시녀 치고는 친분이 있는 황족이 많았다.

늘 자기 곁에 있으라고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아리스 공주, 친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연이 있는 황태후, 만날 때마다 고맙다고 웃는 안젤리나 황비.

그리고 또…….

‘결정적으로 이 황궁에서 가장 큰 권력자 중 한 명인 황태자 전하는 나를 귀여워하시지. 본인이 키우는 작은 동물들만큼.’

하지만 시아나는 시녀 생활 중에 그들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은 없었다.

시아나는 권력자의 총애를 믿고 으스대며 나대는 사람이 얼마나 꼴불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던 사람에게 써먹는 것은 괜찮겠지.’

시아나가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순진했던 소녀의 얼굴이 짜증이 잔뜩 난 여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를 느낀 옴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옴은 포기하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요, 용서해 주는 거지?

“글쎄요. 제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저를 아끼시는 분께서 워낙 걱정이 많으셔서요. 제 표정을 보고 누가 널 괴롭히냐고 물어보실지도 몰라요. 그럼 뭐 어쩌겠어요. 순순히 대답해야지.”

“……!”

옴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옴이 시아나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시, 시아나. 내가 정말 잘못했어.”

시아나는 쌀쌀맞은 얼굴로 옴의 손을 내치며 말했다.

“알겠다니까요.”

“서, 설마 진짜 나에 대해서 말할 건 아니지? 네? 시아나 님.”

옴이 울먹이며 시아나를 쫓아왔다.

시아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얼굴로 갈 길을 갔다.

속이 다 시원했다.

* * *

진드기처럼 들러붙던 옴을 겨우 떼어 내고 시아나는 방에 도착했다.

시아나는 사막을 횡단하다가 오아시스에 도착한 사람처럼 행복한 얼굴로 침대 위로 푹 쓰러졌다.

평소엔 딱딱하기만 했던 침대가 거위털이 잔뜩 들어간 침대처럼 포근했다.

‘헤헤. 드디어 쉰다!’

알콜에 찌든 몸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시아나는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시아나는 눈을 번뜩 떴다.

잠시 묻어 두었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시아나는 벌벌 떨며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라시드의 볼을 잡았다.

그리고 말랑한 밀가루 반죽을 늘리는 것처럼 잡아 당겼다.

쭈--------욱.

“미쳤어. 미쳤어, 시아나!”

시아나는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발로 찼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일개 시녀가 황태자를 그런 식으로 만지는 것은 엄벌에 처해질 만한 죄였다.

아니, 애초에 황태자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인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어제는 정말 내가 어떻게 되었나 봐.’

잔느가 일으킨 사건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복작이는 마을 축제 분위기가 설레서, 처음 마셔 본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정신 놓기 딱 좋은 이유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잠시 후 시아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 변명이야.”

그 어떤 것도 일개 시녀가 황태자에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진 못했다.

시아나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그저…… 라시드가 편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전하가 다 받아 줄 것이라는 걸.’

예상대로였다.

라시드는 제 볼을 붙잡고 치즈처럼 늘린 시녀에게 조금도 화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숙취에 시달릴 시아나를 위해 황궁 전체에 휴무일을 주었다.

거기에 숙취 해소용 식사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배려였다.

시아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하. 전하께 귀여움받아서 다행이네.”

진심이었다.

안 그러면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 있기는커녕, 황족 기만죄로 감옥에 끌려가 채찍질을 당했을 테니까.

‘다시는 전하께 나를 동물 취급하지 말라는 말 따위 하지 않을 거야!’

귀여워하는 게 어때서?

좋지, 뭐.

‘권력자의 애정은 늘 옳다!’

그렇게 시아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더 실수한 것이 없나 기억을 더듬었다.

다행히도 그 외에는 별일이 없었다.

두 발로 씩씩하게 걸었고, 헤어지기 직전에는 라시드를 향해 우아하게 인사까지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아마도.”

애초에 시아나는 땅을 깊게 파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도,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긴장이 풀리니 잠시 사라졌던 수마가 밀려들었다.

아직 알코올이 남아 있는 몸은 너무나 간절하게 수면을 원하고 있었다.

“……일단은 자자.”

퀭한 얼굴보다는 한숨 자고 일어나 멀쩡한 정신으로 전하께 찾아가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쿠울—.

이내, 시아나는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잠이 들어 버렸다.

어젯밤, 라시드의 볼을 쭉 늘어뜨린 후 그의 콧등 위에 입을 맞춘 일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 * *

같은 시각, 라시드는 작은 동물 세 마리를 품에 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시드는 흰 페럿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시아나는 지금쯤 잠들어 있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어젯밤, 시아나는 잔뜩 취했으니까.

물론 시아나는 내내 그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요, 전하. 저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라면서 같은 쪽 팔과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게다가 헤어질 때는 라시드가 없는 허공을 향해 꾸벅 인사까지.

그 정도였으니 시아나는 어젯밤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뺨을 잡아 늘린 것도…… 내 콧등에 입을 맞춘 것도.’

사실 그것은 남녀의 스킨십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스한 봄날 날아다니던 나비가 잠시 코끝에 올라간 것처럼, 혹은 바람에 나부끼던 벚꽃 잎이 머리카락 위에 붙은 것처럼, 지극히 소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쩐지 라시드는 그 찰나의 순간이 잊히질 않았다.

밤새 생각이 나서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할 정도로.

라시드가 아름다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귀여워, 시아나.”

당장이라도 데리고 와 제 품속에 안아 소중하고 소중하게 키우고 싶을 만큼.

하지만 라시드는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시아나가 도망가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달콤한 먹이와 안락한 보금자리로 조금씩, 조금씩 유혹해야 한다.

앙증맞은 발로 스스로 다가올 때까지.

“그러니까 참겠어.”

하지만 말과는 달리 라시드의 얼굴은 난감해 보였다.

제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참는 게 힘든 것처럼.

* * *

시아나는 기지개를 쭉 펴며 상쾌한 얼굴로 일어났다.

“와, 두통이 싹 사라졌어. 몸도 가벼워졌고.”

저녁도 안 먹고 푹 잔 보람이 있었다.

숙취가 사라진 시아나는 씩씩하게 식재료 관리실로 향했다.

‘어제 하루 동안 쉬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일이 끝나는 대로 황태자 전하께도 찾아가자.’

너무 송구하고 민망하고 창피했지만, 제멋대로 두 볼을 치즈처럼 늘린 것에 대한 사과를 분명히 해야 했다.

결심한 대로 시아나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

예상치 못했던 휴식 덕분에 기를 잔뜩 모은 하급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잔느도 있었다.

시아나에게 맞아 상처가 난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잔느는 쉬지 않고 일했다.

내내 시아나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은 정신을 차렸나.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시아나는 평소보다 일을 빨리 끝낸 후, 황태자궁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시아나 님.”

황태자궁의 시녀는 시아나를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안내했다.

시녀는 시아나가 황태자 전하와 미리 약속을 했는지 확인하거나 어떤 용무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라며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나가기까지 했다.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처럼.

‘올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단 말이야. 도대체 전하가 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해 놨기에 저러는 거지.’

시아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라시드가 나타났다.

“어서 와, 시아나.”

시아나가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임에도, 라시드는 조금도 놀라거나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생글생글 웃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전하, 이틀 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술에 취해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라시드가 쿡쿡 웃었다.

“어떤 실례를 저질렀는지는 기억해?”

“물론입니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하의 볼을 잡고 쭈-욱 늘렸었죠. 요즘 식재료 관리실에서 일하면서 밀가루 반죽을 여러 번 했더니 무의식중에 몹쓸 손동작이 나왔나 봅니다.”

라시드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또?”

시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잘못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것 외에 제가 또 저지른 짓이 있나요?”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저런. 설마 기억을 못 하는 거야?”

“…….”

시아나는 전에 없던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볼 쭉쭉이 공격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설마 내가 전하의 이마에 딱밤이라도 때렸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큰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자신을 놀리는 듯한 그의 행동에 작은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썹을 모으고 아무 말 못 하는 시아나를 보며, 라시드가 ‘하—’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은 죄를 사과하러 왔다면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영 기억나지 않으면 내가 알려 주마.”

“……?!”

라시드의 두 손이 시아나의 두 볼에 닿았다.

“저, 전하?!”

시아나는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라시드는 멈추지 않고 시아나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나 싶더니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동그란 콧방울 위에 입을 맞춘 것이다.

시아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 지, 지,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라시드가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틀 전, 너는 내게 이런 짓을 했어.”

“……!”

“나는 너무 놀라 잠도 자지 못했지.”

“…….”

“하지만 사과는 할 필요 없단다. 나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라시드가 고개를 숙여 시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았어, 아주.”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아나는 황궁이 떠나가라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궁을 나왔다.

시아나는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결심했다.

‘다시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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