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10/27)

외전 4

황태자 라시드의 하루는 조금 늦게 시작된다.

그가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으음.”

묵직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눈을 떴다.

이내 주인의 기상을 눈치챈 작은 동물들이 침대 위로 다가왔다.

“뀨!”

“찍!”

“짹!”

쭉쭉이(흰 페럿), 냠냠이(다람쥐), 짹짹이(아기 새)였다.

“잘 잤니?”

라시드는 나른하게 웃으며 저를 반기는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환한 햇빛 아래, 조각상처럼 탄탄한 몸매를 반쯤 드러낸 아름다운 남자. 그리고 사랑스러운 세 마리의 동물.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 솔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세안용 물이 담긴 접시와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솔은 수건을 물에 적셔 라시드에게 건넸다.

라시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간단히 닦았다.

본래 이런 시중은 시녀들이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라시드는 그런 것을 싫어했다.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지낸 탓에 그런 것이 귀찮아서이기도 했고, 암살의 위협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혼자 하는 편이 편했다.

옷을 걸치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솔이 말했다.

“오늘 낮에는 어전회의가 있습니다.”

어전회의란 말에 라시드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본래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귀족들과 실랑이하는 것은 황제의 일이었다.

그러나 몇 개월 전, 황제가 요양을 위해 황궁을 떠난 후부터 그 일은 황태자의 몫이 되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언제야 돌아오실 것 같으냐.”

솔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황후마마께서 보내오신 서신을 보면 한동안 더 요양을 취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달도 돌아오지 않으면 황제와 황후가 황궁을 비운 지 반년이 된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요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 그곳의 공기가 잘 맞는 모양입니다.”

요양 가기 전, 황제는 심한 두통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황궁을 떠난 후에 나날이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한마디를 중얼거린 라시드는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솔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주인을 바라보았다.

몸에 딱 맞는 남색 제복에 작은 보석이 수백 개 박힌 새빨간 망토를 두른 라시드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라시드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긴 책상이 나열되어 있는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그러나 황궁 밖에서는 두려울 것 없이 당당했던 이들은 한껏 긴장한 얼굴이었다.

회의실 중앙, 드높은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라시드 때문이다.

무슨 말만 하면 불같이 화를 내던 황제와 비교하면 황태자는 점잖은 편이었다.

큰소리를 내는 법도 없었고, 이상한 고집을 피우며 귀족들을 들들 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무, 무서워.’

대신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남자는 얼마 전까지 전쟁터를 잔혹하게 누볐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두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 황태자가 성에 돌아와 황제 대신 얼굴을 비춘 것이 반년째였다.

대신들은 도통 황태자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거슬리게 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목이 날아갈지도.’

—라고 생각하며 대신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빛을 교환했다.

황태자 전하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잘하자, 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귀족들은 의자에 앉은 황태자를 의식하며, 제국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작 라시드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시아나, 뭘 하고 있을까.’

이틀 전, 루비궁에 들러 시아나를 보고 왔다.

별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아나가 따라 준 차를 마시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뿐인데…….

‘즐거웠지.’

신기할 만큼.

‘오늘도 갈까?’

아리스가 왜 또 왔냐며 으르렁거릴 테지만, 거대한 초코케이크를 하나 들고 가면 조용해질 것이다.

시아나는 시녀용 미소를 지으며(그러나 눈빛으로는 작작 좀 와라, 라고 말하며) 맞이해 주겠지.

그리고 누구보다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타 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라시드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렀다.

‘좋아. 루비궁에 가자. 오늘은 아스티산의 다즐링을 들고.’

이제는 루비궁도 예전처럼 궁핍하지 않아 고급 찻잎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시아나를 만나러 가기 전에는 그날 마시고 싶은 찻잎을 챙겨 갔다. 라시드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대신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때였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서 정신이상자라지요.”

익숙한 이름에 라시드는 고개를 들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에 가 있었다.

빌헬름 후작이었다.

평소에는 황비의 아비라며 목에 힘을 뻣뻣하게 주었던 후작은, 그답지 않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귀족들이 날카로운 말을 쏟아 냈다.

“충격인 것은 지금까지 그런 중대한 사실을 숨겼다는 겁니다. 감쪽같이 말입니다.”

귀족들의 말에 빌헬름 후작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 다들 너무하는군. 내가 한 명 한 명 찾아가 설명하지 않았는가!”

황제 폐하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 진실을 숨기고 황자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결국은 황자를 고치는 데 실패하여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돈까지 쥐여 줬건만……!’

몇몇 귀족에게는 통했지만 몇몇 귀족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돈 몇 푼이나, 같은 귀족으로서 의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 라시드에게 잘 보이는 것이다.

‘이 기회에 레이시스 황자를 황궁에서 쫓아내면, 황태자 전하의 황위 계승을 위협할 존재를 하나 없애 버리는 것이니 얼마나 기쁘시겠어.’

그래서 귀족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결코 이대로 지나가면 안 될 일입니다. 큰일을 숨긴 안젤리나 황비마마와 마마의 친정 가문인 빌헬름 후작가, 그리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도 마땅한 벌을 내려 황실의 안위와 명예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 저희는 전하의 편입니다. 딸랑딸랑.

그러나…….

“소식을 전해 들으신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지. 나도 마찬가지고.”

라시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들 말이 많을까.”

“……!”

라시드의 한마디에 떠들어 대던 귀족들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경악한 얼굴을 했다.

‘지,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레이시스 황자의 편을 들어 준 건가?’

‘도대체 왜?!’

그들이 아는 한 라시드는 형제 중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았다.

종종 권력을 잡기 위해 황족끼리 연합을 맺는 경우도 있었지만 라시드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나머지 형제들을 찍어 내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라시드가 레이시스의 편을 들어 주었다는 사실은 귀족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레이시스 황자 측과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면 정상치 못한 동생에 대한 동정인가?’

별별 의견들이 난무했으나 진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레이시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시아나가 속상해하겠지.’

솔직히 얼굴도 모르는 동생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시아나가 마음 아파하는 건 싫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파장은 컸다.

귀족들은 이제 대놓고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황자의 뒤에 황태자 라시드가 있기 때문이다.

굳은 얼굴의 귀족들 사이에 있던 빌헬름 후작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 쪼그만 시녀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시아나는 빌헬름 후작에게 말했다.

황태자가 안젤리나와 레이시스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도 당당히 말하기에 아예 없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믿을 수도 없었다.

황태자가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아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빌헬름 후작은 안도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급습했다.

‘도대체 어떻게 황태자를 제 편으로 만든 거지? ……아무튼 황궁에는 당분간 오지 말아야겠군.’

딸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빌헬름 후작은 비참한 결심을 했다.

* * *

“피곤하군.”

라시드의 한마디에 어전회의는 순식간에 끝났다.

회의장을 나온 라시드가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루비궁이었다.

라시드의 한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시아나에게 끓여 달라고 할 찻잎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호위 기사 솔이 커다란 초코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안녕.”

라시드의 등장에 루비궁에 있던 반가운 얼굴들이 라시드를 맞이했다.

“왜 또 온 거야?”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아리스와 양옆에 붙어 있는 똑같이 생긴 시녀 둘.

그리고…….

“오셨습니까, 전하.”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하는 시아나.

그러나 웃고 있는 입 모양과 달리 동그란 눈동자에는 ‘정말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귀여워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라시드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매일 보았던 루비궁 사총사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 황자였다.

“화, 황태자 전하.”

안젤리나는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황비마마야말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저, 저는 잠시 놀러 왔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라시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부드러운 대답이었지만 안젤리나의 얼굴은 풀어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에게 아홉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아들(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은 너무나 어색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자라는 소문 때문에 안젤리나는 라시드를 무서워했다.

‘그래도 만날 일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루비궁에서 마주칠 건 뭐람.’

눈을 꾹 감았던 안젤리나는 라시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옆에 선 레이시스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는 라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안젤리나가 레이시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야기를 들어 아시겠지만 레이시스는 황실의 예법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손짓 하나로 백 명의 사람을 죽인다는 황태자가, 인사도 하지 않는 동생이 거슬린다며 죽여 버릴까 봐.

라시드가 레이시스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길어지자 불안함은 더더욱 커졌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열두 살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잖아.’

라시드는 열두 살 때 이미 어른의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얼굴, 검술을 배워 또래보다 단단한 체격, 어린 나이부터 훈련받은 기품 있는 몸짓.

나이 차이 나는 여인들도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지만 레이시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진 않았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과 풀어진 눈, 뼈대가 여린 몸.

‘볼품없는 꼬맹이로군.’

열여덟 살 여인이 남자로 볼 일 따윈 전혀 없을 만큼.

그것을 확신한 라시드의 눈동자가 한결 온화해졌다.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안젤리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안젤리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라시드는 빈말이라도 그러지 말고 더 있다 가시죠,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라는 듯 웃었다.

라시드가 가지고 온 케이크를 세팅하고 있던 아리스만이 울상을 지었다.

“벌써요? 조금 더 놀다가지.”

안젤리나는 빠른 속도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공주님. 충분히 오래 있었어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안젤리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아무리 웃고 있다 해도, 라시드는 안젤리나에게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안젤리나는 레이시스의 손을 잡았다.

“레이, 가자.”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별말 없이 저를 따라 왔을 레이시스가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서 있었다.

“레이?”

안젤리나는 당황한 얼굴로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안젤리나는 헙, 하고 입을 막았다.

늘 초점이 나가 있던 레이시스의 눈이 무서울 만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시드를 향해서.

‘이것 봐라.’

라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투력도 없는 어린아이의 시선 따위 무섭지도 않지만(사실 평소엔 신경도 안 쓴다. 누가 개미가 노려본다고 신경 쓰겠는가.), 웬만한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자신을 빤히 보는 동생이 신기했다.

라시드가 물었다.

“레이시스가 지금 내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은 겁니까?”

“아니요!”

끔찍한 말에 안젤리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파래져 소리쳤다.

“그럼 왜 이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죠?”

라시드의 천진한 물음에 안젤리나는 왕실 여인의 체면 따위 잊고 빠른 속도로 답했다.

“그, 그게 아무래도, 레이시스가 전하를 그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싶다고요?”

“네, 레이시스는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리고 싶어 하거든요. 아무래도 전하가 마음에 쏙 든 모양입니다. 순수한 마음에 벌인 행동이니 부디 자비롭게 넘어가 주십시오.”

고귀한 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더더욱 그랬다.

예상대로 라시드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어떡해. 화가 나셨나 봐.’

안젤리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라시드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건 감히 제 모습을 그리겠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루비궁에 놀러 왔을 때, 아리스가 흥분한 얼굴로 떠들어 대었던 말이 기억나서였다.

[레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지?]

라시드는 일말의 반응 없이 찻잔을 홀짝였다.

얼굴도 모르는 동생이 어떤 재주를 가졌든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의 옆에 있던 시아나가 입을 떼는 순간, 라시드의 찻잔을 든 손이 멈추었다.

[맞아요, 레이시스 황자 저하의 실력은 정말 대단해요.]

라며 시아나는 웃었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고 자그만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너무 귀엽게.

그 순간을 떠올린 라시드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잘 그리기에?’

은근히 칭찬에 인색한 시아나가 그런 표정을 한 것일까.

보기에는 그냥 얼빠진 꼬맹이 같은데.

“…….”

라시드는 레이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보통은 얼굴이 창백해져 시선을 피하기 마련인데 레이시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

입을 헤 벌리고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열렬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라시드와 레이시스의 눈싸움이 길어지자 루비궁에는 미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사이에 낀 안젤리나는 얼굴이 점점 더 새파래졌다.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시아나가 그 마음을 읽었다.

‘아이고.’

이대로 두었다간 안젤리나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순간이 오지 않게 시아나가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라시드가 말했다.

“그려 보거라.”

“네?”

레이시스 대신 안젤리나가 팔짝 뛰며 대답했다.

라시드는 레이시스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토록 대단하다는 실력이 어떤지 구경하고 싶구나.”

순수한 호기심 따위가 아니었다.

감히 시아나에게 자신보다 높은 평가를 받은 남자에 대한 치졸한 질투였다.

* * *

살랑대는 바람과 따스한 햇볕 속, 라시드는 나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레이시스의 모델이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있는 것이 불편할 법도 한데 그의 얼굴은 편안했다.

아니, 은은한 미소까지 맴돌고 있었다.

라시드의 옆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시아나 덕분이었다.

저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치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모델 일이 무척 즐거우신가 봅니다, 전하.”

“덕분에.”

“…….”

시아나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찡그렸지만, 라시드는 진심이었다.

모델을 하기 앞서 라시드는 한 가지 조건(?)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곁에서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겠어. 황태자 전하만 보면 흥분되어 뜨거운 콧김이 마구 나온다는 니니와 나나에게 그 일을 부탁할 수도 없고.’

호위 기사 솔이 ‘그럼 제가…….’라고 나섰다가 라시드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손을 내렸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시아나는 라시드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시중이라고 해 봐야 차를 따라 주는 것이 다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데도 라시드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모델 일을 하는 게 재미있어서 저러나.’

하긴 저렇게 아름답게 생겼으니까. 누군가 자신을 그려 주는 것을 즐길지도 모르겠다, 라고 시아나는 생각했지만 라시드가 한껏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라시드의 맞은편에 앉은 레이시스 쪽에 가 있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우와아. 손을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눈동자가 완성됐어!”

“아앗. 잠깐 놀란 사이에 속눈썹이 생겼다!”

어린 소년의 마법 같은 그림 실력에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번 라시드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호위 기사 솔조차, 그 틈에 끼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라시드는 제 의무를 잃은 호위 기사에게 독설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아나가 신경 써 주는 사람이 나뿐이라니.’

라시드는 시아나의 시중을 온전히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궁에 놀러 왔던 두 번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늘 시아나에게 ‘시중받는 사람2’(‘시중받는 사람1’은 아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동그란 테이블이 놓인 작은 공간에는 시아나와 자신만이 있었다.

그 점이 너무나 기뻤다.

어린 동생을 향한 치졸한 질투도 잊어버릴 만큼.

라시드는 시아나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빙그르 웃었다.

“오늘의 차는 더 맛있구나, 시아나.”

평소보다 과한 반짝거림에 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래, 정말.’

모시는 자의 감정을 헤아려야 하는 시녀에게 라시드는 늘 모시기 어려운 존재였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때였다.

레이시스 쪽에서 구경꾼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얼굴이다. 황태자 전하의 얼굴이야!”

호위 기사 솔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이름난 화가도 황태자 전하의 용모를 다 담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그것을 담아내다니.”

솔의 곁에 있던 안젤리나 황비도 황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워요.”

라시드와 눈만 마주치면 우웩 하고 토하는 표정을 짓던 아리스조차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 정도로 반응하자 라시드도 레이시스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러나 라시드는 레이시스를 마주 보고 있기에 그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이시스의 솜씨가 그렇게 대단해?”

라시드의 물음에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린 나이시지만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계신답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그리는 게 아니에요.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까지 찾아 그려 주신다고 할까요?”

시아나는 마치 제 솜씨라도 자랑하는 것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그 점이 라시드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라시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흥. 고작 그림 따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과 펜을 건넸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라시드는 말없이 종이를 쳐다보다가 펜을 휙휙 움직였다.

사실 라시드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제국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품위가 떨어지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라시드는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림도 마찬가지일 테지. 검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베는 것만큼 쉬울 거야.’

잠시 후, 종이 위에 나타난 그림을 보고 시아나가 물었다.

“괴물인가요?”

“……시아나, 너란다.”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시아나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라시드가 백기를 들었다.

“그림은 어렵군. 나랑은 안 맞아.”

눈썹을 모으고 심각한 얼굴이 된 라시드의 모습에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승자의 미소였다.

“그걸 이제 아셨어요?”

“그래.”

“다행이네요.”

“무슨 의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시드에게 시아나가 말했다.

“내가 어떤 것에 재능이 없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잖아요. 노력을 해도 결과가 좋지 않은 일을 지지부진하게 붙잡지 않고 포기할 수 있지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재능이든, 권력이든.

그러나 시아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도 부족한데 못하는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어요.”

그 말에 라시드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답이 너무 그녀다워서.

라시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 나라의 공주에서 한순간 시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제 운명을 조금도 비참해하지 않았다.

씩씩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아나, 중급 시녀가 된 것을 축하한다.”

“…….”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일개 하급 시녀 한 명이 중급 시녀가 되었을 뿐이다.

황태자에게 저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시아나는 정식 시험을 통해 중급 시녀가 된 것이 아니었다.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힘을 이용해 얻어 낸 자리야. 떳떳하게 얻어 낸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라시드는 더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패전국 출신의 외국인이 중급 시녀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지. 그것을 해내다니…….”

“…….”

“정말 멋져.”

라시드의 눈빛은 저쪽에서 레이시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는 이들과 같았다.

순수하고 진심 어린 감탄.

멍하니 라시드를 바라보던 시아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늘 짓는 시녀용 미소가 아닌, 시아나의 진짜 미소였다.

시아나는 한여름의 복숭아 같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

라시드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저런 미소를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애플턴 남작 부인인 척하고 티 파티를 갔을 때.

등이 굽은 여인을 향해 시아나는 저렇게 웃었다.

이미 알고 있는 미소였음에도 타격은 컸다.

‘귀여워. 품에 안아 쓰다듬어 주고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갈 만큼.

그러나 라시드의 손은 시아나의 동그란 머리통에 닿지 못했다.

저 멀리서 와다다 달려온 아리스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데!”

라시드는 억울해졌다.

너무하구나, 동생아.

나는 그저 시아나의 보슬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을 뿐이야.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그러나 라시드의 마음과 달리 아리스는 경계 어린 얼굴로 쏘아붙였다.

“사람을 보고 잡아먹고 싶다는 눈을 하다니. 하여간 방심 못할 오라버니야.”

“…….”

그 순간 심장이 덜컹거린 것은 왜였을까.

마치 정곡이 찔린 것처럼.

라시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 * *

몇 시간 후, 라시드를 그린 그림이 완성되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린 초상화라면 며칠이 걸렸을 테지만, 레이시스는 밑작업 없이 휙휙 그리는 스타일이기에 금세 끝이 났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도는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었다.

캔버스에 담긴 라시드는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은빛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그럼에도 그 아름다움에 마음 놓고 취할 수 없는 것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이다.

황홀할 만큼 아름답지만, 숨이 막힐 만큼 위압적이었다. 한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이지만,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만큼 두려웠다.

전혀 다른 두 가지 감정을 끌어내는 작품이었다.

긴 제국 역사 내에도 이런 초상화는 없었다.

“그럭저럭 닮았군.”

정작 모델인 라시드의 반응은 이 모양이었지만.

레이시스는 이 그림을 라시드에게 선물했다.(정확히는 안젤리나의 생각이었다. 레이시스는 완성한 그림에는 큰 관심이 없다.)

황태자의 호위 기사 솔은 황궁 중앙에 그것을 걸었다. 대대로 황태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자리였다.

가장 최근 그린 초상화로 교체했을 뿐인데 파장은 엄청났다.

“세상에. 어, 어떻게 이런 그림이.”

“한 터치 한 터치가 이토록 경이로울 수 있다니. 이건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야.”

신이 그린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동시에 이 그림을 그린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 본 적도 없는 어린 소년의 재능은 사람들에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내 레이시스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악마에게 평범함을 빼앗긴 대신 신의 선물을 받은 천재 화가.

이전에 암암리에 불리었던 ‘모지리’나 ‘천치’와는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이 후, 레이시스 황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화가로 이름을 남긴다.

그가 남긴 수백 점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이 <황태자 라시드의 초상화>였다.

외전 4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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