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어린 황비 (2)(2권) (9/27)

4. 어린 황비 (2)

* * *

바삭.

시아나는 의자에 앉아 과자를 우물거렸다.

꿀꺽.

시아나는 과자를 삼키며 생각했다.

‘나한테 시킬 일이라는 게 오늘 만든 디저트를 먹어 달라는 거라니. ……역시 이 남자는 이상해.’

시아나의 앞에는 라시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더없이 기쁜 얼굴이었다.

라시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맛이 어때?”

“훌륭해요. 재료도 좋은 것을 쓴 것 같고, 아주 달지도 않아 편하게 먹을 수 있어요. 사이사이 박힌 과일향도 좋고요.”

과연 황태자궁의 요리사는 솜씨가 좋다고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구나.”

“푸훗!”

시아나는 너무 놀라 입 안에 있던 과자를 뱉을 뻔했다.

시아나가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 과자, 전하께서 만드신 건가요?”

라시드는 상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처럼 상큼한 얼굴로 ‘그렇구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황태자가 손수 과자를 만든다고? 대체 왜?’

라시드가 시아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내 품속의 아이들에게는 남이 만든 것을 먹이고 싶지 않아 간식과 먹이를 모두 직접 만들어 주고 있거든. 그러다 보니 재미가 붙었지.”

그제야 라시드의 품속에서 열심히 과자를 갉아 먹는 작은 동물들이 보였다.

갈갈갈갈.

제 몸만 한 과자를 두 손에 들고 과자를 먹던 흰 페럿과 다람쥐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왜용?’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닥을 열심히 쪼아 대던 새도 함께.

그 모습을 본 라시드가 눈초리를 휘었다.

깜찍해 죽겠다는 듯이.

“…….”

시아나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황태자 전하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동물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뒤에 덧붙여지는 말이 있었다.

변덕스러운 황태자는 어제 예뻐했던 동물도, 오늘 기분이 나쁘면 칼로 베어 버린대.

황태자 전하는 역시 무서운 분이야.

라며 시녀들은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모두 헛소문이었다.

라시드는 순수한 동물애호가였다.

‘그것도 엄청난 팔불출.’

두 볼이 불룩한 동물들을 바라보는 라시드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남이 그랬으면 좀 모자라 보였을 만도 한데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얼굴로 저러니까……,

‘보기 좋네.’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에고. 또 넋을 놓고 바라봤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나가 멋쩍어 입을 열었다.

“동물을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모든 동물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좋아하지.”

근데 왜 그렇게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시는 건데요, 전하.

긴장한 듯 눈썹을 모은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있으면 따뜻해서 좋아. 나는 추위를 많이 타거든.”

그렇게 말하며 라시드는 제 품속에 파고든 흰 페럿을 쓰다듬었다.

‘……의외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처럼, 비현실적으로 강인한 남자라 이런 약한 모습은 조금도 없을 줄 알았는데.

시아나는 라시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전하를 보니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무슨 이야기?”

라시드가 흥미로운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시아나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겨울 왕국에 살았던 한 공주님의 이야기예요. 공주님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추운 것을 조금도 견디지 못했어요. 평생 벽난로를 피워 둔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죠. 그런 공주님이 안쓰러워 한 작은 새가 나타났어요. 작은 새가 말했어요.”

“…….”

“공주님께 해님을 한 조각 베어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라시드가 다급히 물었다.

“그 이야기, 누구에게 들었지?”

라시드의 반응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특정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고향에서 전해져 오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랍니다.”

“아…….”

라시드는 맥이 풀린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라시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오래전 누군가 내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거든. 어째서인지 그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이야기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

“그래서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어.”

내리깐 라시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크게 실망한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아나는 맞잡은 두 손을 꼬물거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 * *

시아나는 디저트를 세 접시나 더 먹은 후에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라시드는 황태자궁 방문 기념 선물이라며 시아나에게 과자를 잔뜩 싸 주었다.

아기자기한 모양의 과자는 모두 라시드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부담스러워.’

시아나의 표정을 읽은 라시드가 말했다.

“아리스와 함께 먹으렴. 그 애가 무척 좋아할 거야.”

라시드의 말대로였다.

과자는 아리스의 취향에 딱 맞게 부드럽고 달콤했으니까.

결국 시아나는 얌전히 과자 더미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응.”

라시드가 빙긋이 웃었다.

시아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던 찰나, 라시드가 말했다.

“데려다줄까?”

시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시녀를 데려다주는 황태자라니. 세상에 그보다 부담스러운 일은 없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뇨. 괜찮습니다!”

“과자가 무거울 텐데.”

“과자가 무거워 봤자 과자죠!”

거대한 바구니에 가득 담긴 과자는 사실 묵직했다. 하지만 들고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아나는 재빠르게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꾸벅이고는 몸을 돌렸다.

마치 고양이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작은 쥐처럼.

등 뒤로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워라.”

“……!”

시아나는 애써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뽈뽈뽈 다리를 움직였다.

다행히 라시드는 더 이상 시아나를 곤란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사히 황태자궁에서 빠져 나온 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힘든 하루였어.”

차라리 노동을 시켰다면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리 천장 밑으로 쏟아지던 햇빛, 자신을 쳐다보던 라시드의 부드러운 눈빛, 달콤한 과자, 바스락거리는 작은 동물들.

모든 것이 어색하고 긴장되었다.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던 시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아는 거지?”

겨울 왕국에 사는 추위를 많이 타는 공주님.

작은 새가 해님 한 조각을 선물해 주어, 공주님은 드디어 아름다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는 이야기는 사실 고향의 오래된 동화 따위가 아니었다.

시아나가 어렸을 때 만든 이야기였다.

그래서 라시드가 그 이야기를 안다고 했을 때, 시아나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라시드를 속였다.

‘다시 생각해도 백번 잘한 선택이었어.’

어쩐지 라시드가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시아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일이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작은 동물처럼 예민한 시아나의 본능이었다.

‘황태자 전하가 더 캐묻지 않아 다행이야.’

그러나 시아나의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라시드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가 걸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해 준 건 오직 한 사람뿐인데…….’

시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시아나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시아나는 성을 떠나 남부에 있는 유명한 휴양지에 가 있었다.

발 딛는 모든 곳이 아름답다는 곳이었지만 시아나는 그곳을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었다.

“시아나 공주는 몸이 좋지 않아 별장에서 쉰다고 합니다, 전하.”

새 왕비의 말에 왕은 늘 그렇듯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기 때문에.

“혼자 있다고 말썽 피울 생각 말고 방에서 얌전히 있거라.”

“네.”

왕의 말에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새 왕비와 두 동생은 킥킥 웃으며 화려하게 꾸민 마차를 탔다.

이내 마차가 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 그들은 에메랄드빛 바닷가가 바로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고급 상점이 늘어져 있는 거리에서 사치스러운 쇼핑을 할 것이다.

해가 질 무렵에는 누군가가 여는 파티에 참석하여 신나게 웃고 떠들 테지.

고요한 별장에 시아나 홀로 남겨두고.

‘어린 공주가 얼마나 서글플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우는 건 아닐까 몰라.’

새 왕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키득거릴지 모르지만 시아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같이 나가 보았자 새 어머니와 두 동생들에게 괴롭힘이나 당할 텐데, 뭐. 혼자 있는 게 훨씬 좋아.’

게다가 매해 이곳에 왔던 시아나는 나름대로 휴가를 즐기는 방법이 있었다.

시종과 시녀의 눈을 피해 몰래 별장을 빠져나온 시아나가 향한 곳은 별장 뒤편에 있는 숲속이었다.

산책길을 벗어나 구석진 곳으로 조금 더 걸으니 이내 작은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시아나가 이곳을 발견한 것은 3년 전이었다.

별장에서 첫 탈출을 무사히 마치고 숲속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버려진 통나무집.

오랜 시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이곳저곳 거미줄투성이에, 문을 열 때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시아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

시아나는 화려한 왕궁이나 사치스럽게 꾸며진 별장보다 작은 통나무집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1년 만에 가는 것이니 먼지가 잔뜩 쌓였을 테니 일단 청소를 하자. 그리고 깨끗하게 치운 침대에 누워 책을 읽을 거야.’

시아나는 어린 공주답지 않은 조숙한 휴가를 계획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텅 비어 있어야 할 작은 오두막 안에 작은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흐트러진 은색 머리카락, 찢어진 옷, 온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거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맨발은 상처투성이.

눈을 부릅뜬 아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시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괜찮니?”

“…….”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도와줄 사람을 불러 올게.”

그 순간 아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 돼.”

“무슨 소리야! 이렇게 다쳐 놓고.”

“아, 안 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 분명 날 찾아올 거야. 그럼 이번에야말로 난 죽어.”

“……!”

끔찍한 말에 시아나는 입을 막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이는 누군가에게 쫒기는 모양이었다.

시아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내가 너를 도와줄게.”

“…….”

시아나는 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통나무집에 있는 침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나무판자였지만) 위를 깨끗이 털어 아이를 눕혔다.

그 후, 별장으로 달려가 물건을 챙겨 왔다.

붕대와 약, 담요와 부드러운 빵이었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자.”

시아나는 아이에게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얼굴이나 발에 난 상처는 단순한 찰과상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가는 목에 난 시퍼런 멍자국은 사람의 손모양을 띠고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목을 졸린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시아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다행히 곪은 상처도 없고 열도 나진 않아. 약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시아나는 아이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았다.

시아나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능숙해 보이네.”

“나도 자주 다치거든. 새어머니가 좀 엄하셔서.”

“…….”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의 표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시아나는 붕대의 끝을 단단히 묶었다.

그 후, 빵을 잘게 찢어 아이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너 배가 홀쭉한 걸 보니 식사도 제대로 못했지? 허겁지겁 먹었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안 되니 내가 먹여 줄게.”

“……응.”

다행히 아이는 음식을 달라고 보채지 않고 시아나가 주는 빵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제가 주는 빵을 먹으며 입을 우물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니 시아나는 묘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우와. 이래서 사람들이 동물들한테 먹이를 주는가 봐.’

심장 한편이 간질거렸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식사가 다 끝난 후 물까지 한 모금 마신 아이는 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시아나가 말했다.

“너 지금 엄청 피곤해 보여. 한숨 자.”

“……하지만.”

“혹시 누가 쫓아오면 내가 바로 말해 줄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푹 자.”

시아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의 가슴께까지 담요를 올려 주었다.

그 위를 작은 손으로 토닥여 주기까지 하니 별수 없었다.

경계심이 담겨 있던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죽은 듯 잠들었던 아이는 몇 시간 후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주황색 노을빛 사이로 시아나가 보였다.

“잘 잤어?”

시아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가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갔을 줄 알았어.”

“아까 나쁜 놈들이 오나 안 오나 봐 준다고 했잖아. 난 약속은 꼭 지켜.”

다행히 오늘 왕과 새 왕비는 해변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를 보느라 밤늦게야 돌아온다 했다.

그러나 마냥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 공주에게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 시녀들이라 해도, 저녁 시간에는 시아나를 찾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들어가 봐야 했다.

“이곳은 딱히 주인이 없는 곳이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쉬고 가. 그럼……”

인사를 하고 가려는 시아나의 치맛자락을 아이가 붙잡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내일도 와 줄 거야?”

사실 시아나가 감당하기에는 아이의 사정이 심하게 복잡해 보였다.

외모부터 범상치 않은 데다가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기까지.

괜히 엮였다가는 어떤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저를 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너무 절실해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 후, 시아나는 틈만 나면 별장을 몰래 나와 통나무집에 갔다.

두 손에는 먹을거리를 한가득 들고.

시아나는 아이와 있는 게 즐거웠다.

왜냐면 시아나가 아무리 시시한 말을 해도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기 때문이다.

제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가족들과는 전혀 달랐다.

시아나는 신이 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떠들었다.

개중에는 제가 만든 이야기도 있었다.

“작은 새는 드디어 해님 한 조각을 베어 오는 데 성공했어. 작은 새에게 해님을 선물받은 공주님은 크게 기뻐했지. 밖으로 나가도 더 이상 춥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시아나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아이가 설핏 웃었다.

“나도 추위를 많이 타는데. 공주님이 부러워.”

그 얼굴이 너무 예뻐 시아나는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그러나 두 아이의 오붓한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왕과 새 왕비가 시아나가 몰래 외출을 하고 다닌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새 왕비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폐하와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쥐새끼처럼 몰래 별장을 나가 놀다니 그게 공주로서 할 일이냐!”

“죄, 죄송합니다.”

버들버들 떠는 시아나를 향해 새 왕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휴가를 왔다고 내가 널 너무 풀어 준 모양이구나. 당장 치마를 걷어라.”

이어질 공포에 시아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왕은 새 왕비의 옆에서 한심스러운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두 동생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제 편은 아무도 없었다.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새 왕비의 앞에 섰다. 어느새 새 왕비의 손에는 가죽으로 만든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새 왕비가 눈을 부릅뜨고 회초리를 휘둘렀다.

철썩.

엄청난 고통에 시아나는 흡,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치맛자락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온전히 아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한번 회초리가 날아왔다.

그날 이후, 시아나는 더 이상 별장을 나갈 수 없었다.

매질을 당한 다리가 움직이기 힘들 만큼 아픈 데다, 새 왕비의 분노를 본 시녀들이 감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왕궁으로 돌아가는 날, 시아나는 시녀들의 감시를 피해 별장을 빠져나왔다.

시아나가 아직 낫지 않은 다리를 절뚝이며 향한 곳은 아이가 있는 통나무집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식사는 어떻게 했을까. 약을 바르지 못해 상처가 덧났으면 어떡해.’

……내내 나를 기다린 건 아닐까.

그러나 낡은 문을 연 시아나는 황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열여덟 살의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나 아이를 쫒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지.’

그러나 시아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아나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를 찾을 수도, 설령 그 아이를 찾는다 해도 도와줄 힘이 없는 무능한 공주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속상했던 시아나는 의식적으로 아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와서는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애는 은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데다가 얼굴도 눈에 띄게 아름다웠어. ……꼭 황태자 전하처럼.’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엇보다 시아나가 만든 겨울나라 공주님 이야기를 들려준 건 그 아이가 유일했다.

라시드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설마 그 애가 황태자 전하였다고?’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시아나의 가슴이 쿵쿵 뛰고, 피가 뜨거워졌다.

고조된 마음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아나는 순식간에 바늘로 콕 찍힌, 바람이 빠진 풍선 같은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라시드는 황제와 황후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고귀하게 자랐다.

그런 그가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쫓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차라리 시아나와 우연히 같은 이야기를 만든 누군가가 라시드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시아나는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파헤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쌓여 있는 일들을 하는 게 나았다.

‘황태자 전하도 더는 묻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시아나는 오늘의 일을 덮었다.

* * *

“츄츄!”

“시아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말이 포옹이지 커다란 곰이 작은 다람쥐를 껴안는 듯한 형상이었다.

시아나가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정식 시녀가 된 것 축하해, 츄츄!”

츄츄는 수습 시녀의 잿빛 제복을 벗고 하급 시녀를 상징하는 갈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으하하. 고맙구먼!”

츄츄가 커다랗게 웃으며 친구의 축하에 화답했다.

이번에 정식 시녀로 진급한 수습 시녀는 다섯 명.

그중에서 츄츄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황궁의 수많은 곳에서 츄츄를 원했다.

[저 두터운 이두박근과 튼튼한 손목은 빨래를 위해 존재한다고. 츄츄가 있을 곳은 우리 세탁부야!]

[무슨 소리. 저 대퇴근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물건을 들어야 하는 물품관리소에 필요하지.]

[다들 닥쳐! 저 거대한 주먹은 우리 경호부서에 써먹어야 한다고!]

그러나 치열했던 그들의 전쟁은 한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끝나고 말았다.

‘츄츄,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으로 오거라.’

갓 진급한 하급 시녀들은 주로 몸을 쓰는 일을 맡기 마련이었다.

그런 상황에 황족이 콕, 찍어 하급 시녀를 데려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츄츄가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도 얼떨떨하구먼. 촌뜨기에 힘밖에 없는 나를 왜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궁에서 오라는지.”

“그만큼 츄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거지. 역시 내 친구야.”

어찌 되었건 시녀로서 첫 시작을 황녀의 곁에서 하게 된 것은 좋은 기회였다.

대우도 좋고, 앞으로의 승진도 훨씬 수월했다.

츄츄가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에 중급 시녀 진급 시험이 있지. 시아나, 니 시험 볼 거지?”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하급 시녀는 몇 년 이상 경험을 쌓은 후 중급 시녀 시험을 본다.

시아나가 하급 시녀가 된 것은 이제 고작 반년이었다.

“나는 중급 시녀가 되기에는 경력이 한참 부족하잖아.”

“경력이 뭐가 중요혀. 실력만 되면 되는 거지.”

츄츄의 말대로였다.

하급 시녀가 몇 년간 중급 시녀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은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능력 부족 때문이다.

중급 시녀로서 갖춰야 할 궁중 예법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시아나, 니는 웬만한 공주님들보다도 예법을 잘 알잖여. 시험만 봐 봐. 분명 1등으로 합격할 것이여.”

시아나는 위로 더 올라가고 싶은 야망 같은 건 없었다. 지금 상황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하급 시녀로 머무르는 것보다야 중급 시녀가 되는 편이 훨씬 낫겠지?’

무엇보다 급여가 오른다.

‘그럼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사서 츄츄랑 함께 먹을 수 있어. 공주님께 예쁜 선물도 하나 사 드릴 수 있고. 알뜰히 모으면 시녀 직을 그만둘 때쯤 자그마한 가게도 하나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알겠어. 시험 봐 볼게.”

사실 시아나는 자신 있었다.

청소, 빨래, 정원 가꾸기 등의 하급 기술부터 걷는 동작, 말투, 차 따르는 고급 기술까지.

시아나의 실력은 최고였으니까.

“뭐, 뭐야, 저 애?”

“어떻게 저렇게 몸짓이 우아해?”

“아직 나이도 어린 데다가 하급 시녀가 된 지도 얼마 안 된 아이잖아!”

그만큼 시아나는 완벽했다.

함께 시험을 보던 하급 시녀들, 그들을 평가하던 중급 시녀들마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볼 정도로.

그러나…….

중급 시녀 승급 명단에 시아나는 없었다.

* * *

니니가 말했다.

“출신 때문일 거예요.”

나나도 말했다.

“말해 무엇해. 100프로지.”

루비궁의 시녀 니니와 나나는 시아나의 등을 토닥이며 말해 주었다.

“원래 중급 시녀 승급 시험 때부터는 시녀들의 출신을 따져요.”

“대놓고 본다고는 안 하지만, 출신이 안 좋은 시녀들은 쉽게 합격시켜 주지 않죠.”

그 증거가 니니와 나나였다.

두 사람은 하급 시녀로서의 경력도 오래되었고, 능력치도 훌륭했지만 아직도 중급 시녀가 되지 못했다.

그녀들은 작은 시골 마을 출신에, 가난한 사냥꾼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니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물며 시아나는 패전국 출신의 외국인이잖아요.”

나나가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몇 년이 지나도 중급 시녀로 승급시켜 주지 않을 거예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고 하급 시녀로 악착같이 부려 먹기만 하겠죠.”

“썩을 놈들.”

분노가 어린 목소리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니니와 나나 사이에 끼어든 아리스였다.

아리스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팔을 걷어붙였다.

“감히 그딴 이유로 시아나를 시험에서 떨어뜨려? 내가 당장 따지고 오겠어!”

시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아리스를 잡았다.

“그만두세요, 공주님.”

“싫어!”

불처럼 타오르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와서 따져 보았자 바꿔 주지 않을 거예요. 이미 결과가 나왔으니까요.”

“…….”

아리스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황궁에 ‘절대’라는 게 없는 것도 알았다.

권력 앞에서는 더더욱.

아리스가 또렷한 눈으로 말했다.

“할마마마가 말하면?”

황태후는 완벽한 손녀 바보가 되어 있었다.

아리스가 원한다면 당장 눈을 부릅뜨고 소리칠 것이다.

[감히 내 손녀를 모시는 시녀를 떨어뜨려? 고얀 것들!]

황태후의 호령에 시녀들은 깨갱하겠지.

하지만 아리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다른 황족이라면 모를까 황태후 마마는 안 돼요.”

“왜!”

“황태후 마마가 아리스 공주님을 애지중지하는 걸 모르는 자가 없으니까요. 황태후 마마가 그런 말을 하시면 분명 아리스 공주님께 안 좋은 말이 나돌 거예요.”

“…….”

“어린 공주가 황태후 마마를 앞세워서 자격도 되지 않는 제 시녀를 챙긴다고요. 저는 그런 걸 원치 않아요.”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단호했다.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내렸다.

“……알겠어.”

시아나가 싫어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시아나 앞에서만큼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으니까.

그 마음을 아는 시아나가 싱긋 웃으며, 아리스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중급 시녀가 엄청나게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아.’

—라고 생각한 시아나의 앞에 한 시녀가 나타났다.

반질거리는 푸른색 제복은 시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최상급 시녀라는 것을 의미했다.

시녀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가 시아나냐?”

“……네, 그렇습니다.”

시아나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 중급 시험에서 떨어졌다지?”

시아나는 조금 놀랐다.

일개 하급 시녀 한 명이 승급 시험에서 떨어진 걸 어떻게 아는 것일까?

“그렇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시아나를 향해 시녀가 말했다.

“실력은 충분한데 떨어졌다 들었다. 많이 아쉽겠더구나. 그러니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한다.”

“제안이라면…….”

“황비마마의 부탁을 들어 다오. 일을 잘 해결하면 중급 시녀로 승급시켜 주마.”

황당한 말이었다.

* * *

제국 황궁에는 수많은 황제의 여인들이 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여인은 황후이고, 그 아래에 4명의 황비가 있다.

비록 황후는 아니지만 그녀들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가문, 외모, 기품.

거기에 황제의 핏줄을 이은 자식까지.

차기 황제의 어미, 즉 황태후가 될 수도 있는 여인이란 말이었다.

‘그런 높은 분이 내게 부탁할 게 도대체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나는 끌려오듯 황비의 궁에 도착했다.

확실히 황비는 황비였다.

‘일전에 가 보았던 황태자 전하의 궁보다는 작지만 여기도 엄청나게 화려하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부터 천장에 달려 있는 샹들리에,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상까지.

어느 것 하나 최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시아나를 데려온 상급 시녀가 말했다.

“황비 마마께서 곧 오실 터이니 기다리거라.”

응접실에 앉은 시아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말은 부탁이라 했지만 협박이겠지.’

위세 등등한 황비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하급 시녀. 애초에 동등한 거래가 될 리가 없다.

황비의 말을 거절한 순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감히 하급 시녀가 황비의 명을 거절하느냐며 매질을 당할지도.

‘으. 그런 상황은 정말 질색인데.’

심란한 얼굴로 치맛자락을 꾹 붙잡는데, 머리 위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구나. 네가 시아나니?”

시아나는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아나의 앞에 물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황비 안젤리나였다.

“…….”

시아나는 놀랐다.

황비가 너무 앳되고 여려 보여서.

색이 옅은 레몬색 머리카락과 연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안젤리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라기보다는 아직 세상의 때가 타지 않은 소녀 같았다.

‘……황제 폐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듣긴 했어. 무척 젊은 황비님이라고.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안젤리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썹을 내렸다.

“그 아리스 공주를 교육시킨 시녀라기에 얼마나 엄할까 했는데 무척 어려 보이는구나. 몇 살이니?”

“열여덟 살입니다.”

“어머.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네.”

안젤리나는 남 일 같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녀에게는 황비로서의 숨 막히는 위엄도, 닳고 닳은 황실 여인으로서의 교묘함도 보이지 않았다.

봄바람처럼 여리고 봄꽃처럼 따스하기만 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고귀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황비마마. 아리스 황녀 저하를 모시고 있는 시녀 시아나라고 합니다.”

치맛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인 시아나를 본 안젤리나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하급 시녀가 이렇게 우아하게 인사를 하다니 대단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잘난 척도 하지 않고. 역시 소문대로야.”

소문?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응. 정보망이 빠른 사람들은 알고 있거든. 아리스 공주가 짧은 시일 내에 바뀐 건 한 하급 시녀 덕분이라고. 그 시녀가 공주를 돌봐 주고 가르쳐서 천둥벌거숭이 같던 공주가 우아한 레이디가 됐다지. 황태후 마마께 예쁨받을 정도로 말이야.”

“…….”

놀랍지는 않았다.

황비씩이나 되는 여인이라면 황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시아나가 신경 쓰이는 것은 황비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것을 아느냐였다.

안젤리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널 불렀단다.”

“……?”

“나에겐 올해 열두 살이 되는 아들이 있어. 네게 그 아이의 교육을 부탁하고 싶구나.”

시아나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안젤리나는 황비다. 게다가 가문도 대단하다 들었다.

그런 그녀라면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정교사를 구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녀에게 저런 부탁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젤리나가 시아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말했다.

“보여 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렴. 대신 지금부터 본 것은 절대 비밀로 해 다오.”

시아나는 안젤리나를 따라 궁 깊숙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황자의 방이었다.

특수한 처리를 해 둔 방문은 여는 순간 조금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황자 저하께서 소리에 예민하니 조심하라고 했지.’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이내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촛불 하나 켜 두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한 소년이 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바닥에 누운 채, 장난감 말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탁, 탁, 탁.

고요한 방 안에 장난감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계속, 계속.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소년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색소가 옅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벌어진 입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소년이 고개를 올렸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아나는 입을 막았다.

분명 눈을 마주쳤음에도, 소년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감정을 모르는 곤충의 눈처럼.

* * *

잠시 후, 시아나는 방을 나섰다.

문 앞에는 안젤리나 황비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황자를 보았니?”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안젤리나는 그것으로 시아나의 감상을 알아챘다.

안젤리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황자를 아리스 공주처럼 확 바꾸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야. 그저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게 도움을 준다면 바랄 게 없단다.”

“…….”

“갑작스럽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너밖에 생각나지 않았어.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주렴.”

“그리하겠습니다.”

시아나는 어색한 얼굴로 황비궁을 나왔다.

시아나는 제국 황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작은 왕국의 공주였을 때, 그리고 제국의 시녀가 된 후 긁어모은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보에 안젤리나 황비의 아들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잠시 보았을 뿐이지만 황자는 정상이 아니었어.’

그 정도 상태라면 아무리 황비가 숨긴다고 한들 숨겨질 것이 아니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시아나가 그에 관해 아무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궁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루비궁으로 향하던 시아나는 결심한 듯 빙그르 방향을 틀었다.

이내 도착한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일개 하급 시녀가 황태자궁에 갑자기 찾아온 것은 큰 무례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

‘아리스 공주님께서 보내셨다고 둘러대야지.’

그러나 미리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할 만큼 황태자궁의 시녀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아나를 궁으로 들여보냈다.

‘황태자궁 보안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야?’

황당해하는 시아나를 향해 시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시아나 님이라면 언제든 들여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시아나는 일전에 갔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이내 라시드가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조금 얼굴이 상기된 라시드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어쩐 일이야, 시아나.”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응응? 무슨 일이야?’, ‘설마 날 보고 싶어서 온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시아나는 애써 라시드의 눈빛 공격을 무시하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전하. 궁금한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라시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이내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소생이신 레이시스 황자 저하에 대한 것이요.”

순간 라시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에 관한 것은 왜?”

시아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 내 앞에서는 아무리 꽃 꽂은 아가씨처럼 헤실헤실 웃어도 황태자였지.’

아리스에게는 호의적이라 잊고 있었지만 황족의 자손들은 서로 적이었다.

적에 대해 물어보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시아나는 서둘러 말했다.

“안젤리나 황비마마께 황자 저하의 교육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여 여쭤본 것뿐이에요.”

혹시 몰라 말을 덧붙였다.

“절대 어떤 사심도, 야망도, 꿍꿍이도 없답니다. 정말이에요.”

“…….”

가는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휴우.

시아나는 괜한 오해를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눈이 가늘어진 라시드는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를 곧장 내뱉었다.

“네 번째 황자, 레이시스 레비쥬앙 드 시아만. 안젤리나 황비의 아들. 나이 12세.”

시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라시드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라시드의 말은 허무하게 끝났다.

“내가 그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네?”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레이시스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을 나갔거든.”

“황궁을 나갔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황제의 피를 가진 황자는 신성하고 귀중한 존재다.

그것도 갓 태어난 황자가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바마마께서는 자식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으시니까.”

[폐하, 황자 저하의 몸이 유독 병약하여 할아비로서 송구스럽습니다. 빌헬름 후작가에서 극진히 돌본 후, 건강해지면 다시 폐하의 품에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젤리나 황비의 친정아버지인 빌헬름 후작이 고개를 조아렸을 때, 황제는 별말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눈으로 빌헬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러든가.]

그렇게 황자 레이시스는 황궁을 떠났다.

한 살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그 후 레이시스는 빌헬름 후작가에서 지냈어. 그 후 누구도 레이시스에 대한 것을 쉽게 알 수 없게 되었지. 빌헬름 후작가가 황자에 대한 것을 철저하게 숨겼거든.”

안젤리나 황비가 후작가와 황궁을 왔다 갔다 하며 황자에 대한 소식을 전할 뿐이었다.

[황자는 잘 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이 약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길어지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황자가 궁 밖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이 아니냐.

황제의 자손을 귀족 가문에서 맡고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

……혹, 황자에게 숨기고 싶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들은 안젤리나 황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 고귀한 황자에게 누가 그런 무엄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황자 저하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황자 저하께서 태어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황궁에 저하의 모습을 제대로 본 자가 없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궁의 사람들이 안젤리나 황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안젤리나 황비는 궁지에 몰렸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빌헬름 후작이 나섰다.

[황자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 황궁에 입성하여 모두에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것이 올해였다.

“며칠 후에 있을 생일 연회에서 레이시스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그래서 안젤리나 황비와 함께 황궁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런데 레이시스에게 문제가 있나 보군.”

라시드의 시선이 시아나를 향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시녀에게 교육을 부탁할 정도니 말이야.”

시아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라시드에게 괜한 말을 해 버린 것일까.

아니다. 라시드는 황태자였다.

그가 알아내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알아낼 것이다.

오늘 시아나가 받은 부탁이든.

레이시스의 현재 상태든.

‘전하께서 레이시스 황자에 대해 모른다면 그건 본인이 크게 관심이 없어서겠지.’

몸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황궁을 떠난 어린 동생은, 황위 계승권을 두고 싸울 라이벌도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새삼 시아나는 라시드의 위치를 떠올렸다.

황위를 가지기 위해 비정하게 싸우는 제국의 황태자.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참혹하여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것을 잠시 잊은 것은 그가 제 앞에서는 너무 바보처럼 헤실거려서.

늘 봄바람처럼 다정해서.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지?”

라시드의 목소리에 시아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귓가가 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야.’

황태자 앞에서 넋을 놓고 딴생각을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을 숨기려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시아나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말했다.

“아무튼 내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겠지?”

“네?”

“레이시스는 어미와 외조부의 품도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애송이야.”

“…….”

“네가 관심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존재란 말이지.”

어딘가 뾰족한 목소리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레이시스 황자의 교육을 맡는 것과, 레이시스 황자가 애송이라는 것에 도대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걸까.

시아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전하의 말처럼 나약한 분이라면 더더욱 생각을 해 봐야죠. 제 조그마한 힘이라도 필요한 분일지도 모르니까요.”

“…….”

라시드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볼이 불룩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은 것처럼.

‘또 왜 저런담.’

라시드가 이상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 일일이 이유를 따져 보았자 피곤하기만 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라시드가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철저한 업무용 미소였다.

“잘 들었습니다, 전하. 덕분에 충분한 정보를 얻게 되었어요.”

“…….”

“이야기 값은 무엇으로 드리면 될까요?”

라시드는 그답지 않게 뚱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하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백기를 든 패배자처럼 얌전하게 말했다.

“차를 타 줘.”

예상했던 것이다.

쪼르르…….

시아나는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따랐다. 이내 라시드의 앞에 놓인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향기에 라시드의 얼굴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라시드는 아름다운 예술품을 마주한 것처럼 황홀한 얼굴로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구나.”

“……아마도요.”

“하기 싫으면 거절해.”

“저는 일개 하급 시녀인걸요. 그럴 힘이 없어요.”

“그럼 내가 도와줄까?”

“전하께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널 귀찮게 하지 말라고 때찌 해 줄게.”

……황태자의 때찌라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때찌다.

황궁에 피바람이 불지도.

시아나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제 일이니까요.”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찻잔을 든 라시드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 * *

그날 밤, 루비궁으로 돌아온 시아나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레이시스 황자를 본 것은 잠시뿐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어.’

레이시스 황자는 정상이 아니다.

‘그 모습으로는 앞으로 다가오는 생신 연회를 제대로 치를 수 없어.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았겠지.’

그런데도 되지 않아 자신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아리스 공주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이름 모를 시녀에게 말이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야. 한낱 시녀에게 꽁꽁 숨겨 둔 비밀까지 보여 줄 만큼.’

전혀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다.

일개 하급 시녀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시아나는 눈을 감았다.

‘안젤리나 황비마마는 부탁이라 하셨지만, 이건 그냥 부탁이 아니야.’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다.

왜냐면 시아나는 그녀가 오랜 시간 숨겨 왔던 비밀, 레이시스 황자의 상태를 알아 버렸으니까.

힘이 있는 자는 제 비밀을 알게 된 자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바란다.

제 편이 되든가.

제 손에 죽든가.

‘이 일을 거절한다면 후자의 일을 당하겠지.’

물론 안젤리나 황비는 그렇게 냉혹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도 결국 황족이다.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녀의 뒤에는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빌헬름 후작이 버티고 있으니…….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보다 같은 편이 되는 게 훨~씬 낫지.’

게다가 안젤리나 황비는 가진 것이 많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면 시아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따를 것이다.

성공해도 죽음으로 입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아리스 공주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고.

잠시 후 시아나는 눈을 떴다.

에메랄드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늘 결정이 빨랐다.

하지만 그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주인인 아리스의 허락이었다.

시녀 니니와 나나 사이에서 머리를 땋고 있던 아리스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안젤리나 황비께서 제게 황자 저하의 교육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셨습니다. 황비마마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눈을 크게 뜬 아리스는 소리를 꽥 질렀다.

“절대 안 돼!”

아리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 시녀야! 나만 돌보기로 했잖아! 다른 궁에 가는 것도, 다른 황족을 모시는 것도 허락할 수 없어!”

흡사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불타오르는 아리스를 설득하기 위해 시아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공주님, 저는 중급 시녀가 되고 싶어요.”

“……!”

“안젤리나 황비마마께서 힘을 써 주신다면 확실히 될 수 있어요. 어린 주인을 조종하여 중급 시녀가 되었다는 더러운 소문 없이 말이에요.”

불꽃처럼 타오르던 아리스의 눈동자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한참 후, 아리스는 보라색 눈동자를 내리깔고 말했다.

“……알았어. 대신 하루 종일은 안 돼. 반나절만 다녀오는 거야.”

극적인 협상 성공이었다.

시아나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조용히 두 사람이 대화를 지켜보던 니니와 나나가 아리스의 양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공주님, 공주님 곁에는 시아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니니와 나나가 있어요.”

“맞아요. 저희랑 이것저것 하고 놀아요. 드레스 갈아입기 놀이도 하고, 손톱에 봉숭아꽃 물들이기도 하고…….”

“팔찌 만들기도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예쁜 돌을 구해 올게요.”

아리스는 시끌벅적한 두 사람에게 휩쓸려 더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니니와 나나는 시아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공주님은 걱정 말고 마음 편히 황비궁에 다녀오라는 듯이.

‘두 사람이 있어 정말 다행이야.’

시아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다음 날, 시아나는 안젤리나 황비를 찾아갔다.

“미약한 힘이나마 황비마마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나의 말에 안젤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곤란했을 텐데…… 이렇게 승낙해 주다니 정말 기뻐. 고마워, 시아나.”

시아나는 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짓는 여인을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시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이전에 부탁이라는 말을 썼을 때도 느꼈지만 안젤리나는 너무나 유순했다.

황비라는 직책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아나는 그것을 표내지 않고 말했다.

“다만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마.”

“무엇이니?”

시아나는 아리스의 말을 전했다.

하루 중 반나절씩만 황비궁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측근 시녀가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우면 불편하겠지. 잠시라도 나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다니 고마울 뿐이야.”

안젤리나 황비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아리스 공주에게 황자의 상태에 대해 말한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주인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을 텐데.”

“황비마마께서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녀의 입은 무거운 법입니다.”

“그렇구나.”

순진한 미소를 짓는 여인을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그런 의미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마. 지금부터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서면을 작성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안젤리나 황비의 눈이 커졌다.

“서면?”

“네. 제가 해야 할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언제까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 일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적혀 있는 계약서 말입니다.”

한낱 시녀가 황비에게 그런 것을 원하다니 기가 찬 이야기였다.

‘시키면 넙죽 엎드리고 해야지, 오냐오냐 해 주었더니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라며 손찌검이 날아 와도 할 말이 없는.

그럼에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황비의 성정을 믿어서였다.

시아나의 예상대로 안젤리나 황비는 분노 어린 얼굴로 화내는 대신, 맑은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어려울 것 없지. 네가 원하면 그리해 줄게. 부탁하는 입장은 나니까 말이야.”

순식간에 준비가 끝났다.

안젤리나는 종이 위에 유려하게 글씨를 썼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기간은 보름 후에 있을 레이시스 황자의 성인식 날까지.

시녀 시아나는 안젤리나 황비를 도와 레이시스 황자를 교육한다.

황자의 상태, 교육의 내용에 관해서는 절대 비밀을 엄수하며, 기간 내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시 시아나를 중급 시녀로 승급시킨다.

안젤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됐니?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시아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 ----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아나의 청에 안젤리나의 눈이 커졌다.

“기껏해야 보석 몇 개 더 바랄 줄 알았는데, 욕심이 많구나.”

“제가 좀 그렇습니다.”

시아나의 뻔뻔한 말에 안젤리나는 쿡쿡 웃었다.

그녀는 시아나의 청을 받아들였다.

안젤리나 황비는 시아나가 원한 것을 추가한 후, 종이 아래에 서명을 했다.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 든 시아나가 씩씩하게 말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마마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안젤리나는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나처럼 조그마한데 참으로 당차구나. ……부러워.”

“네?”

“아니야. 나야말로 잘 부탁해, 시아나.”

“네.”

동그란 얼굴에 순한 눈매가 닮은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 * *

시아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레이시스 황자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다.

레이시스는 제 방에 틀어박혀 멍한 얼굴로 장난감들을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나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황자 저하는 언제부터 저런 상태셨나요?”

너무나 직접적인 질문에 안젤리나는 당황했다.

“그건…….”

사실 안젤리나는 아들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레이시스를 제대로 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레이시스를 낳은 직후, 지친 안젤리나에게 빌헬름 후작이 찾아왔다.

“아들을 낳았다면서! 잘했다, 정말 잘했어, 안젤리나!”

빌헬름 후작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막내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아버지의 기쁜 얼굴에 안젤리나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요?”

그런 딸을 바라보며 빌헬름 후작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황자를 낳았으니 너는 위풍당당한 황비다. 빌헬름 후작가도 전에 없이 위세를 떨칠 테고.”

단순히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었다.

황자, 즉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빌헬름 후작은 제 야망을 실현시켜 줄 손주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직접 유모까지 선별하여 보낼 정도였다.

“4개 언어가 가능한 귀족 출신의 유모다. 앞으로 황자는 이자가 돌볼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하거라.”

안젤리나는 절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서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유모에게 아기를 맡겼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유모는 안젤리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 황자 저하가 이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안젤리나에게 유모가 말했다.

“눈맞춤을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조금도 반응이 없으시고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 소식은 곧 안젤리나의 친부인 빌헬름 후작에게 들어갔다.

“아직 어려서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

그 후, 빌헬름 후작은 매일같이 황궁을 찾아와 레이시스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마와 할아버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레이시스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누구와도 눈 맞추는 일이 없었고, ‘엄마’ 같은 간단한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거나, 똑같은 것을 계속 툭툭 치는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레이시스가 한 살이 되었을 때 빌헬름 후작은 결정했다.

“레이시스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가야겠다.”

안젤리나는 놀라 소리쳤다.

“하, 하지만 아버지. 레이시스는 황자입니다. 황궁을 떠나면 아니 되어요.”

후작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소리를 빽 찔렀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황궁의 모든 자들이 레이시스가 병신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 아니야!”

험한 단어에 놀라 안젤리나는 제 입을 막았다.

그런 딸의 반응을 무시하며 후작이 이를 으득거렸다.

“절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 돼. 그렇게 되면 레이시스에게 황제가 되는 미래는 없다!”

가뜩이나 다른 황자들과 나이 차가 나는데,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황좌로 가는 길은 꽉 막힐 것이 틀림없었다.

후작은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레이시스가 몸이 약해 성 밖에서 요양을 해야겠다고 하면 황제 폐하도 막지 않으실 거다. 자식에게 크게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까.”

“…….”

“저택에 데리고 가서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아이를 고쳐 놓으마.”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안젤리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요.”

“뭐?”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안젤리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레이시스는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 저도 같이 가는 게…….”

“이 미련한 것이!”

후작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안젤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안젤리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비가 된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늘 무서운 존재였다.

후작은 형형한 눈빛으로 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비가 된 지 고작 2년이야. 이제 막 황자를 낳고 황비로서 한창 입지를 다녀야 할 시기에 성을 나와서 어쩌자는 거냐!”

“하지만…….”

“황궁과 사교계에 계속 말을 흘려. 황궁을 나간 레이시스 황자에게 갈수록 건강하고 영민해지고 있다고. 황궁에 돌아올 때쯤이면 황자로서 부족함 없는 아이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알겠느냐?”

“…….”

한참 뒤에야 안젤리나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후작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에게 딸의 대답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며칠 후, 빌헬름 후작은 레이시스를 데리고 성을 떠났다.

안젤리나는 이 주일에 한 번씩 성을 나와 저택에 들를 때만 레이시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빌헬름 후작은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아 레이시스를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레이시스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마음 한편이 불안하기는 했으나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는 나 같은 것보다 더 똑똑하신 데다 손주 사랑도 대단하시잖아. 분명 나보다 레이시스를 잘 키워 내실 거야.’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안젤리나는 진실을 알아 버렸다.

아버지가 레이시스에게 하고 있는 교육의 실체를.

수많은 음식이 화려하게 차려진 긴 테이블. 그 가운데에 레이시스가 있었다.

또래보다 작은 편이라 더 여려 보이는 아이의 몸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양손에도 포크와 나이프가 동여매어 있었다. 그 상태로 레이시스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놀란 안젤리나는 입을 막고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뒤로 빌헬름 후작이 다가왔다.

“쯧. 그러니 왜 허락도 받지 않고 저택에 온 거냐. 괜히 보면 마음만 쓰일 것을…….”

침착한 후작과 달리 안젤리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지, 지금 레이시스가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보면 모르겠느냐. 교육을 받고 있지 않느냐.”

“……교육이요?”

“그래. 아무리 눈으로 보여 주고, 말을 하고, 과자로 얼러도 통하지 않더구나. 저렇게 하니 그나마 쥐똥만치 행동이 교정되었지.”

“…….”

그제야 안젤리나는 제 앞에서 식사를 하던 레이시스를 떠올렸다.

레이시스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움직여 접시 안의 음식을 입에 넣는 행위를 반복하기만 했다.

마치 줄에 묶여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그것이 저런 훈련으로 나온 행동이었다니……!’

그런 것도 모르고 레이시스가 얌전히 식사를 하게 된 것을 기뻐했던 제가 너무 바보 같았다.

아버지, 이건 너무 가혹해요. 레이시스를 풀어 주세요.

안젤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빌헬름 후작이 섬뜩한 눈으로 레이시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시스의 12살 생일 연회가 코앞이야. 이대로 가다간 레이시스가 병신이라는 게 온 천하에 까발려질 텐데. 그럼 빌헬름 후작가는 끝이야.”

“…….”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광기 어린 아버지의 얼굴에 안젤리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 *

안젤리나는 시체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시아나를 향해 말했다.

“한심하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버지께 한마디도 하지 못하다니.”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진심이었다.

시아나도 매정한 부모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안젤리나는 죄를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지내다 며칠 전에 레이시스를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왔어. ……아버지께서 생일 연회 때까지 레이시스를 바꿀 확실한 방법을 찾으신다며 저택을 떠나셨거든.”

자신을 막는 저택의 하인들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생일 연회 전에 레이시스가 황궁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버지도 허락하신 일이라고.

하인들은 꿈에도 안젤리나가 거짓말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시아나가 물었다.

“그럼 후작님께서는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서 황궁에 돌아온 걸 모르는 상태인가요?”

“지금은 수도를 떠나 있으시니 모르셔.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그때야 아시겠지.”

그리고 제멋대로 행동한 딸에게 엄청난 분노를 쏟아 낼 것이다.

안젤리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급하게 너를 부른 거야. 네가 레이시스를 잘 교육시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성과가 나온다면 아버지도 나를 용서해 주실 테니까.”

안젤리나는 시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내게는 너뿐이야, 시아나.”

시아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안젤리나 황비는 절박했고, 레이시스 황자의 상태는 심각했으며, 빌헬름 후작이라는 변수까지 있었다.

‘어쩌겠어. 이미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계약서까지 쓴 걸.’

할 수 있는 선까지는 해 봐야 했다.

* * *

그날, 시아나는 레이시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레이시스의 현 상태를 보다 확실히 알기 위해서였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는 모든 것에 엄청 예민해.’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버들버들 떨곤 했다.

그에 반해 보이는 것에는 둔감했다.

‘아니, 둔감하다기보다는 시야가 좁다고 해야 하나.’

레이시스는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봤다.

장난감이면 장난감, 나비면 나비.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예민한 귀, 너무 둔한 눈.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

시아나는 레이시스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황자 저하.”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황해하거나, 불쾌해하거나 어떤 감정적인 반응을 해야 했다.

그러나 레이시스의 반응은 놀랄 만큼 무감각했다.

레이시스는 시아나의 목소리에만 잠시 움찔했을 뿐, 허공을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황자는 타인과 교감이 전혀 되지 않았다.

‘꼭 그 아이처럼.’

시아나는 병명을 진단하는 의사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서 저러시는 것은 병이 아니에요.”

“……뭐라고?”

놀란 안젤리나를 향해 시아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냥 원래 저렇게 태어난 것뿐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다리 하나가 없거나, 눈이 보이지 않거나 하는 사람들처럼요.”

안젤리나는 숨을 멈추고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시아나의 말은 레이시스가 병신이라며,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고 소리 질렀던 아버지의 말보다 훨씬 잔인했다.

잔혹한 말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안젤리나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고칠 수 없다는 거니?”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병이 아니니 약도 없었다. 치료 방법도 없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좋아지실 수는 있습니다. 황비마마께서 제게 부탁하신 교육을 통해서 말이죠.”

“……!”

칠흑 같던 황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감돌았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너무 기대를 하시면 곤란한데.’

물론 시아나는 의사가 아니고 전문 교육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아나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레이시스와 똑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레이시스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빠른 속도로 좋아졌다.

이 방법을 통해서.

* * *

시아나의 말에 안젤리나가 팔짝 뛰었다.

“시종들을 다 물리고 나 혼자 레이시스를 돌보라고?”

“네.”

안젤리나는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난 못해!”

부끄럽지만 안젤리나는 한 번도 어린 아들을 직접 보살핀 적이 없었다.

귀찮고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겁이 나서였다.

예전에는 레이시스가 너무 작아서, 지금은 레이시스가 평범하지 않아서. 안젤리나는 레이시스를 돌볼 자신이 없었다.

안젤리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니? 교육을 부탁한 건 네가 아니라 나잖아. 그러니 네가…….”

“저는 황자 저하를 곧 떠날 사람이니까요.”

“……!”

“황자 저하를 바꾸는 건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황자 전하의 곁에 있는 시간은 고작 한 달이죠. 애매하게 끊기는 교육은 안 하느니만 못 해요.”

“…….”

“그래서 저는 오랜 시간 황자 저하의 곁에서 가르치고 도와줄 분에게 제가 아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해요.”

“그럼 지금 레이시스를 돌보는 시종들도 괜찮잖니.”

현재 레이시스는 두 명의 시녀와 한 명의 시종이 돌보고 있었다.

모두 안젤리나가 신뢰하는 이들이었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들도 남이잖아요.”

“……!”

“아무리 지금 황자 저하께 잘한다고 해도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도움은 받되 가장 소중한 것을 통째로 건네주시면 안 돼요. 황비마마께서 직접 돌보셔야 해요.”

“하지만…….”

“황비마마께서는 황자 저하의 어머니잖아요.”

“……!”

안젤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안젤리나는 떨리는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해 볼게.”

눈을 반짝이는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가 말을 주절거렸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할지도 몰라. 레이시스가 싫어할지도 모르고. 그럼 난…….”

시아나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하세요. 그럼 분명 좋은 결과를 얻게 되실 거예요.”

안젤리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웃고 있는데. 여전히 나처럼 작고.’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그녀가 엄격해 보이는 것일까.

꼭 저를 가르치던 아버지처럼.

* * *

굳게 닫힌 방문 앞, 안젤리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열아홉 번째 한숨을 쉬셨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안젤리나는 한 번만 더,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아나에게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젤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방문을 열었다. 시아나도 슬며시 함께 들어갔다.

방 안에는 레이시스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레이시스는 인기척에 어깨를 움찔거렸을 뿐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무관심이 안젤리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하지.’

안젤리나는 레이시스에게 말을 건 게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했다.

말을 걸 때마다 레이시스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극한의 두려움을 느꼈던 안젤리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들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어 버렸다.

시종들에게 맡기고 늘 한 발짝 떨어져 지켜봤을 뿐이었다.

주저하는 안젤리나를 향해 시아나가 눈짓했다.

‘할 수 있어요!’

안젤리나는 주저하다가 레이시스의 곁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레이시스, 뭘 하고 있니?”

“…….”

예상했던 대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조금의 반응도 없는 레이시스를 쳐다보니 온갖 물건들이 일렬로 늘여져 있었다.

레이시스를 위해 준비한 작은 장난감부터 방 안에 있던 베게, 촛대, 시계까지.

수많은 물건이 칼같이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어색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던 안젤리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인형이 삐뚤어져 있네.’

인형을 향해 손을 뻗던 안젤리나는 아차 하고 손을 멈추었다.

이렇게 놀고 있을 때 누군가 그 물건을 건들면 레이시스는 난리가 났다.

평소에는 감정이 없는 걸까, 싶을 만큼 순한 아이가 포악한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안젤리나는 눈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이렇게 열심히 만든 건데. 허락도 받지 않고 만지면 기분 나쁠 만해.”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물건 늘어뜨리기를 끝낸 레이시스가 어느 순간부터 손톱으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한번 열중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같은 행동을 하는 아이라 그런 것이겠거니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바닥을 긁었다가.

뒹굴 굴러서 저 바닥을 긁었다가.

또 저 바닥을 긁었다가.

안젤리나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혹시 심심한 걸까?”

한 번도 레이시스가 심심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레이시스는 끊임없이 이해 못할 행동을 했기에 그런 평범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젤리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닥에 길게 늘어진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레이시스도 저것만 계속하기엔 질리겠지.’

안젤리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심심해할 때는 뭘 해 주면 좋지?’

달달한 음식 먹기?

하지만 레이시스는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수다 떨기?

레이시스와? 말도 안 되는 소리.

동물은?

레이시스는 동물에게도 아무 관심 없어.

음악 감상은?

소리에 예민한 레이시스에게 악기 소리는 고문이다.

초조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떠올리던 안젤리나가 아, 하고 소리쳤다.

안젤리나는 구석에 서 있던 시아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

시아나는 안젤리나가 말한 것을 재빨리 가지고 왔다.

이내 방 안에는 새하얀 캔버스와 알록달록한 물감들이 준비되었다.

물론 레이시스는 그러건 말건 조금도 관심 없어 보였다. 여전히 바닥을 손톱으로 긁고 있을 뿐이었다.

안젤리나는 아들의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팔레트에 물감을 짜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어. 아버지께서 귀족 영애가 붓을 드는 건 체통머리 없는 행동이라며 혼내셔서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 친구의 집에 놀러 가 운 좋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안젤리나는 붓에 물감을 묻히며 말을 이었다.

“크면 그림 정도는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황궁에는 눈이 많았다.

그들은 앳된 황비에게 꼬투리 잡을 게 없는지 늘 눈을 번뜩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그래서 안젤리나는 여전히 붓을 들 수 없었다.

그래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울 때, 눈물이 멈추지 않을 만큼 슬플 때면, 방 안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안젤리나의 손이 우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새하얀 캔버스에 샛노란 물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창가에 놓여 있는 노란 튤립을 그린 것이다.

안젤리나는 노란빛을 띤 캔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은 건 체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력 때문이기도 할 거야.’

겸손이 아니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좋은 말로라도 훌륭하다고 감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삐뚤빼뚤한 게 꼭 어린아이가 휘갈겨 그린 낙서 같았다.

‘아니, 어린아이가 나보다 더 잘 그릴지도.’

새삼 민망해져서 시선을 슬쩍 돌리니 놀랍게도 레이시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아닌 캔버스의 그림을.

“……!”

안젤리나는 두 번째 큰 충격을 받았다.

늘 멍한 표정을 짓고 있어 감정을 알 수 없었던 레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따위 걸 그림이라고 그렸냐며 경멸하는 것처럼.

안젤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소리쳤다.

“워, 원래 좋아하는 것과 재능은 별개인 거야. 그리고 난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고, 유화는 원래 보기보다 어려운…….”

안젤리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레이시스가 제 손에 있던 붓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레이시스가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레이시스.”

안젤리나가 뭐라고 하기 전에 레이시스가 손을 움직였다.

휙-!

캔버스 위를 시원하게 가로지른 붓이 선명한 자국을 냈다.

휙- 휙-!

레이시스는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엉망진창이던 그림이 변했다.

시들했던 꽃잎은 화사하게 만개하기 시작했고, 싱그러운 색상은 꼭 달콤한 꽃향기가 날 것 같았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안젤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 * *

창가에 놓인 튤립, 색이 선명한 노란 꽃잎 위로 부서지는 햇빛.

아름답게 완성된 그림을 보며 안젤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시스는 천재야. 그냥 천재도 아니고 세기의 천재!”

결코 아들 사랑이 극진한 엄마의 호들갑이 아니었다.

시아나도 공주였던 시절 수많은 명화를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붓 터치나 묘사가 투박하긴 하지만 그것마저 예술적으로 느껴져.’

극히 일부만이 타고난다는 재능이 분명했다.

시아나는 문득 ‘그 애’가 떠올랐다.

레이시스와 같은 양상을 가졌던 그 애에게도 이런 재능이 있었다.

‘다른 건 무척이나 미숙한데 피아노 연주만큼은 훌륭했지.’

레이시스처럼 어마어마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 없이 일상생활도 힘든 그가 그럴듯하게 피아노 연주를 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말했지. 다른 사람과 감정을 나눌 수 없는 존재를 불쌍히 여겨 신이 주신 선물 같아요, 라고.’

그런 시아나를 향해 그 아이의 모친은 따귀를 날렸다.

감히 너 따위가 내 아들을 불쌍하게 여기냐고. 내 아들은 동정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갑자기 뺨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아나는 그때의 생각을 떨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엄청난 재능이에요.”

“응.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니 믿어지질 않아. 게다가 반나절을 내리 쉬지도 않고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더구나.”

자식이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 안젤리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이 있어도 레이시스는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더라.”

안젤리나는 내내 레이시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엔 두려웠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엔 익숙해졌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살짝 기대가 됐다.

조금이라도 레이시스가 제게 관심을 줄까 하고.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시스는 안젤리나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풀 죽은 안젤리나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속상해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무척 긍정적인 상황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황자 저하께서는 평소엔 얌전하시지만 싫은 건 확실히 표현한다고 하셨잖아요. 황비마마가 싫었다면 저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이불 안으로 숨으셨을 거예요.”

“…….”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황비마마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안젤리나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요.”

빙긋이 웃은 시아나는 두 주먹을 쥐며 상큼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로 오늘도 힘내세요, 황비마마!”

“응!”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레이시스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어제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 * *

요즘 안젤리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레이시스의 방에서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시스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안젤리나는 레이시스를 구경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지만)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굿나잇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물론 모든 날이 순탄치는 않았다.

“으아악! 아아악!”

레이시스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나이프로 그림을 그리던 캔버스를 박박 찢기 시작했다.

“레이!”

섬뜩한 광경에 안젤리나는 입을 막았다.

이런 아들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자주 가끔, 후작가의 저택에서도 레이시스는 종종 이런 식으로 흥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인 빌헬름 후작은 불같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그럼에도 레이시스가 행동을 멈추지 않자 하인을 불러 레이시스를 붙잡았다.

그 후에는 엄하게 혼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안젤리나에게 후작은 말했다.

[철없는 소리 마라. 저런 되바라진 짓을 할 때는 바로 혼을 내야 한다. 그래야 제가 잘못한 것을 알고 다시는 저런 짓을 하지 않지.]

설마 자신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건가 싶어 안젤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시아나가 다가왔다.

시아나가 방의 구석진 곳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를 위해서였다.

시아나가 안젤리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마마. 그리고 황자 저하를 자세히 보세요.”

“……!”

안젤리나는 시아나의 말을 따라 두 손을 움켜쥐고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기괴하고 무서워서 안젤리나는 레이시스가 화내는 모습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아나의 목소리가 안젤리나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황자 저하는 지금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이에요. 누군가를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상처 주려고 것도 아니에요.”

“…….”

정말이었다.

캔버스를 찢고, 물감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레이시스의 행동은 광폭했지만, 그 분노는 결코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짜증이 난 것뿐이다.

안젤리나는 그것을 처음 알았다.

시아나가 말했다.

“황자 저하께 다가가세요. 꼭 안아 주세요.”

“…….”

“안아 주며 말해 주세요. 괜찮다고, 진정하라고.”

“하지만…….”

레이시스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의 뜻은 알지만 그 말을 수용하지 못했다. 특히 명확한 지시어가 아닌 감정 표현은 더더욱 그랬다.

레이시스는 괜찮다, 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시아나는 안젤리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라는 말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실지라도 분명 느끼실 거예요.”

“…….”

“누군가 나를 이렇게 안아 주는구나. 따뜻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해 주는구나. ……내 편이 있구나.”

안젤리나는 허를 찔린 얼굴로 시아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짝, 안젤리나가 레이시스를 향했다.

그때까지도 레이시스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이프로 캔버스를 찢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용기를 내어 레이시스를 안았다.

“지, 진정해, 레이.”

그러나 레이시스에게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 조금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갑자기 자신을 옭아맨 힘이 불쾌한 듯 더욱 격렬하게 반응했다.

“으아아악! 아아악!”

흰자가 번뜩이는 눈빛은 섬뜩했고, 울부짖는 소리는 짐승 소리처럼 무서웠다.

안젤리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그럼 늘 그래 왔듯 시종들이 다가와 상황을 수습해 줄 것이다.

혹은 시간의 힘을 빌려 레이시스가 스스로를 진정시킬 것이다.

안젤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계속 그런다면 자신은 영원히 레이시스의 곁에 다가갈 수 없고, 레이시스는 홀로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한다.

가녀린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힘이 나왔다.

안젤리나는 레이시스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만하라니까, 레이. 그러다 다쳐.”

“으아아아!”

바둥거리던 레이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안젤리나의 얼굴을 스쳤다.

새하얀 얼굴에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레이시스가 멈칫했다.

저쪽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시아나도 놀라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안젤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안젤리나가 레이시스를 꽉 껴안으며 한 번 더 말했다.

“괜찮아.”

“…….”

“괜찮아, 레이.”

많은 뜻을 담은 말이었다.

괜찮아, 레이. 엄마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괜찮아, 레이. 엄마가 옆에 있어.

괜찮아, 레이. 이제부터는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을게.

“…….”

그렇게 얼마나 괜찮다고 속삭였을까…….

울부짖던 레이시스의 소리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레이시스는 더는 악을 쓰지 않았다. 안젤리나의 품속을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리지도 않았다.

레이시스는 얌전히 안젤리나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꼭 갓 태어난 아기처럼.

쉬익, 쉬익.

숨을 진정시키는 레이시스를 바라보며 안젤리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렇게 안아 주면 되는 걸. 그럼 이렇게 금방 순해지는 아이인데…… 내가 널 너무 몰랐어.’

그동안 방치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 제 품속에 들어와 준 아들에 대한 고마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가슴이 아파 왔다.

* * *

레이시스를 진정시킨 안젤리나는 그날 아들이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색색.

안젤리나는 내리깐 눈으로 잠이 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흰색 머리카락, 색소가 옅은 긴 속눈썹,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열두 살 된 아들은 어느새 많이 자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아기 같았다.

조용히 곁으로 다가온 시아나가 말했다.

“황자 저하께서 오늘은 일찍 잠이 드셨네요.”

레이시스는 늘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아침이 가까워진 새벽이 다 돼서야 잠이 들곤 했다.

안젤리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응, 많이 피곤했나 봐. 몇 시간을 내리 투정을 부렸으니까.”

안젤리나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레이시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던 거니…….”

대답 없는 아들을 바라보며 안젤리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난 아까 안 될 거라 생각했어. 레이가 그런 식으로 화낼 때는 어떻게 해도 진정이 되질 않았으니까.”

제 토닥임과 목소리에 레이시스가 화를 풀 줄은 몰랐다. 정말로.

복잡한 얼굴로 레이시스를 바라보는 안젤리나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황자 저하께서 보통의 사람과 다르다 해도, 두 분이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어도, 분명 알고 계신 거예요.”

“…….”

“이 사람이 내 엄마라는 사실을요.”

“……그럴까?”

안젤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에는 그러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 * *

시아나는 몸을 단장했다. 안젤리나 황비궁에 가기 위해서였다.

방을 나선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팔랑이는 모자를 쓴 아리스, 니니와 나나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콧대를 올리며 말했다.

“궁내에 있는 장미 정원으로 피크닉을 다녀올 거야.”

아리스의 양옆에 선 니니와 나나가 거대한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말했다.

“샌드위치와 과일, 쿠키를 듬뿍 담은 피크닉 도시락을 만들었답니다.”

“잔디밭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알록달록 돗자리도.”

“햇빛 아래에서 읽으면 딱인 그림책도 챙겼고요.”

“정말 즐거울 거예요!”

시아나는 노래하듯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처음 황비궁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시아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제 몫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니니와 나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시아나가 바쁜 덕분에 공주님이 우리 차지가 되었으니까 말이죠.]

두 사람의 말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아나 대신 아리스에게 착 달라붙어 모든 것을 함께하는 니니와 나나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살랑대는 피크닉용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 공주님이라니. 정말 예뻐.”

“샌드위치를 앙 하고 무는 모습도 작은 토끼처럼 귀여우시겠지.”

황홀한 얼굴을 한 니니와 나나를 바라보며 아리스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둘 다 주책이야. 내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시아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눈을 흘겼다.

“그렇다고 내가 잘 지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면 오산이야. 나 지금 엄청나게 참고 있는 거거든. 황비를 도와주는 일만 끝내면 나랑 하루 종일 놀아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럼요.”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는 그제야 만족한 듯 얼굴을 풀었다.

“그럼 됐어. 어서 다녀와.”

“네, 공주님도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루비궁을 나왔다.

걱정은 조금도 되지 않았다.

아리스는 진심으로 니니와 나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시아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다행이야.’

시아나는 아리스가 강하게 크길 바랐으니까.

적어도 황족이라면 일개 시녀 한 명에게 휘둘려서는 안 될 일이다.

‘……라고 생각하는데요.’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빛에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아름다운 남자는 황태자 라시드였다.

라시드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나, 시아나.’

“…….”

라시드의 궁은 루비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라시드가 루비궁 앞에 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말이었다.

라시드는 그 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루비궁에 놀러 갔는데도 네가 보이지 않더구나.”

“…….”

시아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주 동안 무려 세 번, 라시드는 루비궁에 찾아왔다.

니니와 나나가 시아나에게 홀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용안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멀 뻔했어요. 역시 우리 공주님의 오라버니더군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분이 오시자마자 하신 말이 ‘시아나는 어디 갔지’였답니다. 꺄아악!]

[설레, 너무 설레.]

[나나도 찾아 주세요, 전하.]

[미쳤다고 너 같은 걸 찾니? 찾는다면 나를 찾겠지.]

[애호박에 콩 두 개 박힌 얼굴로 뭐라는 거야.]

똑같이 생긴 얼굴로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어쨌건 내게 따로 찾아오라는 말씀은 남기지 않으셨기에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라시드에게 물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아니.”

“그럼 왜…….”

라시드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

한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봄빛처럼 웃는 라시드와 얼음처럼 굳어 버린 시아나.

상반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든 것은 황태자의 호위 기사 솔이었다.

솔은 어떻게든 이 황망한 상황을 정리해 보려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그런 몹쓸 장난을 치시면 순진한 시녀님께서 곤란해하십니다.”

장난 아닌데…….

—라고 대답하려는 라시드보다 솔이 한 박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하셔야죠. 며칠 전에 도착한 새 찻잎을 시아나 님께서 끓여 주었으면 해서 찾아오신 거라고요.”

“그런 건가요?”

시아나의 물음에 라시드는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음, 그것도 있지.”

“…….”

시아나는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가 타 준 차가 마시고 싶어서 날 보고 싶어 했단 말이지?’

그나마 그편이 말이 됐다.

황태자가 고작 시녀 한 명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 것보다는, 훨씬.

‘이대로 헤어지면 다음에 또 찾아오겠지?’

또 이런 식으로 길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시간 여유가 조금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면 지금 차를 한 잔 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냐?”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꼭 며칠간 노리고 있던 뼈다귀를 받아 낸 개 같다.

‘……좀 많이 예쁜 개.’

—라고 생각하며 시아나는 시녀용 미소를 지었다.

* * *

나무와 꽃으로 채워진 황태자궁의 응접실. 동그란 테이블에는 시아나와 라시드가 앉아 있었다.

호위 기사 솔은 함께하지 못했다.

황태자궁에 들어오자마자 라시드가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쭉쭉이와 냠냠이 짹짹이가 답답한 모양이다. 산책을 시켜 주고 오거라, 솔.]

[네?]

솔은 울상을 지었지만 라시드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결국 솔은 하얀 페럿과 작은 다람쥐, 노란 새를 데리고 터덜터덜 궁을 떠났다.

씁쓸한 뒷모습을 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도 먹고살기 힘들구나.’

어쨌건 그렇게 솔이 나가고 시아나가 타 준 차를 마실 사람은 라시드뿐이었다.

차를 홀짝인 라시드는 여느 때처럼 황홀한 얼굴을 했다.

“맛있어. 역시 네 차는 최고야, 시아나.”

“…….”

시아나에게 라시드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는 황태자였으니까.(그것도 높은 확률로 제정신이 아닌.)

그래도…….

‘헉 소리가 날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탄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저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는 때였다.

“레이시스의 교육은 잘되어 가고 있느냐?”

라시드의 질문에 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기 황제로 지위를 탄탄히 한 황태자가 어린 동생에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에 내가 레이시스 황자 저하에 대해 물었을 때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잖아.’

그런 분이 왜 저런 것을 물으시는 걸까.

의아해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큰 의미가 있어 물어보는 것은 아니야. 그저 조금 궁금해져서 그런다.”

“무엇이 말입니까?”

“고작 2주 만에 레이시스의 상태가 나아질 수 있나 해서.”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레이시스의 상태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라시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황태자야. 신도 못 알아챌 만큼 완벽하게 숨긴 비밀이 아니고서야 내가 궁에서 모르는 일은 없단다.”

며칠 전까지는 몰랐지만, 그것은 레이시스가 황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라시드는 이제 레이시스의 상태를 제 앞에서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레이시스는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하는 상태라지. 그뿐이 아니야. 어떤 때는 광인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기도 한다던데.”

시아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안젤리나 황비는 최선을 다해 레이시스에 관한 말들이 나가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토록 큰 비밀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는 눈이 많은 황궁에서는 더더욱.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잖아.’

작게 숨을 내쉰 시아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알고 계신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는 아직 불안정한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점점 좋아지고 계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웃게 되실 거예요.”

“…….”

작은 목소리에는 믿음이 있었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하는.

그래서 라시드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는 시녀잖아. 그전에는 공주였지. 그런 네가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지?”

라시드는 시아나가 영특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는 것과 일반적이지 않은 자를 교육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레이시스의 상태는 어떤가.

그의 외조부 빌헬름 후작이 상태를 좋게 만들겠다고 십 년 넘게 데리고 있었는데도 차도가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다.

시아나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제 눈으로 봤으니까요.”

“…….”

“그 애도 레이시스 황자 저하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아니, 더 심각했죠. 그 애는 사람의 말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애는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좋아졌다.

친모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덕분이었다.

“그 애가 누군데?”

라시드의 물음에 시아나가 대답했다.

“제 동생이요.”

“……!”

의외의 대답에 라시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시아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히는 배다른 동생이죠. 새어 머니가 낳은 자식이었으니까요.”

* * *

새 왕비는 마녀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채찍질을 했다. 조금이라도 저를 귀찮게 하는 자들은 용서치 않았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모두가 그녀가 아이를 귀찮아하리라 생각했다.

수많은 귀부인이 그러하듯, 유모에게 맡기고 이따금 얼굴만 볼 거라고.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새 왕비는 자식에게 푹 빠졌다.

그녀는 직접 아기의 똥을 치우고, 젖을 물리고, 품속에서 아기를 재웠다.

대단한 모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한없이 잔혹했던 그녀에 대한 벌이었을까.

아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고 울기만 했다.

세 살이 지나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왕자를 살피러 온 의사와 학자들이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왕비님. 왕자님께서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상태가 좋아지시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시겠지요.”

그들은 왕비에게 왕자를 조용한 수도원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새 왕비는 진노했다.

“고얀 놈들, 내 아들을 버리라는 말이냐!”

“그, 그게 아니오라…….”

새 왕비는 아들을 안고 소리쳤다.

“이 아이는 내 아이야. 내 곁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고 풍요롭게 자랄 것이다!”

형형한 눈동자는 오싹할 만큼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 후 새 왕비는 제 말을 지켰다.

그녀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매해 성대한 생일 연회를 열고, 중요한 행사 때면 팔짱을 끼고 함께 참석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왕자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왕자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왕비가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시아나가 말했다.

“이래저래 분위기가 험악하긴 했지만, 어쨌건 그 애는 편안해 보였어요. 웃는 날도 많았고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덕분일 터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거기에서 느낀 것을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 황자에게 적용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안젤리나가 아들에게 쏟는 애정만큼, 레이시스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맴돌기 시작했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새어머니가 도움이 된 셈이지.’

착잡한 심정에 고개를 든 시아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실거리고 있던 라시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또 저런담.’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찡그리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동생은 지금 이 세상에 없겠구나.”

“……!”

그제야 시아나는 라시드가 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깨달았다.

시아나의 가족은 모두 죽어 버렸다. 라시드의 손에 의해.

시아나는 아직도 라시드가 그들을 죽였던 순간을 기억했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지만…….’

시아나는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죽였던 남자와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만큼 라시드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책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꼭 나한테 혼날까 봐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시아나는 속으로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말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어요.”

그러기에 동생은 너무 포악했다.

툭하면 시종들을 끔찍하게 괴롭혔다.

정상이 아니라 넘어가기엔 그 죄가 너무 컸다.

“그런 자를 동정하거나 애도할 만큼 저는 자비롭지 않답니다.”

눈을 내리깐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에는 작고 귀여운 동물 같은데.’

이따금 그녀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라시드조차 움찔할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가 났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잠깐이었다.

시아나는 금세 평소의 맑은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것은 레이시스 황자 저하의 상태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곧 있을 황자의 생일 연회 때 의젓한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을 만큼?”

“…….”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그 말에는 차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 * *

레이시스가 이전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소리 지르거나 울부짖는 횟수가 줄었고, 제 이름을 부르면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 생일 연회를 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생일 연회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건강하고 영특한 황자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안젤리나 황비는 시아나의 조언을 받아 끈질기게 레이시스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레이, 엄마를 따라 해 봐. 잘해 내면 엄마가 뽀뽀해 줄게.”

“…….”

일말의 반응이 없는 아들을 향해 안젤리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야. 새로운 물감을 선물해 줄게.”

“……!”

일명 ‘미끼로 홀려 홀려’ 대작전이었다.

성과는 있었다.

“4황자 레이시스, 입니다. 저의 생일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레이시스는 어색하게나마 외운 인사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식사 예법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는 레이시스를 바라보며 안젤리나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식사 예법만큼은 몇 년 동안 엄격하게 가르치셨으니까…….”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학대에 가까웠던 훈련 탓에 레이시스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힘겨워했다.

얼핏 보면 표 나지 않았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두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그때마다 어린 아들의 손 위에 손을 얹고 말해 주었다.

“괜찮아, 레이. 그냥 밥을 먹는 것뿐이야.”

“…….”

“네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수프, 말랑말랑한 빵, 달콤한 과일을 먹는 즐거운 식사 시간 말이야.”

부드럽게 웃는 안젤리나의 얼굴을 본 레이시스는 잠시 후 떨림을 멈추었다.

시아나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가 열리기 삼 일 전, 시아나가 말했다.

“황비마마, 지금까지 정말 잘 따라와 주셨어요. 황자 저하께서도 열심히 해 주셨고요.”

“정말?”

눈을 반짝이는 안젤리나에게 시아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예요.”

“……!”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해도 남은 삼 일 만에 황자 저하의 상태가 지금보다 급격하게 좋아지시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생일 연회 때 황자 저하를 본 사람들은 확신하시겠지요.”

레이시스 황자가 영특하기는커녕 평범함과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그렇구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침울해하는 안젤리나의 모습이 시아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저토록 마음 약한 황비마마께서 그날 쏟아질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녀뿐 아니라 레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소리에 예민한 어린 황자는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시아나가 결심한 듯 물었다.

“감히 의견을 올립니다, 마마. 레이시스 황자 저하의 올해 생일 연회는 취소하면 어떨까요.”

계속 레이시스를 보이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레이시스에게도, 황비에게도.

“시간은 많습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 황자 저하께서 더 건강해지셨을 때 연회를 여는 편이 훨씬 경과가 좋을 겁니다.”

“…….”

안젤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젤리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시스는 지난 십일 년을 황궁 밖에서 지냈어. 이번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거야.”

어쩌면 황자의 위치마저 위험해질지 모른다.

황자를 치마폭에 싸고 보여 주지 않는 황비에게도 비난이 쇄도할 테고.

‘아버지께서는 내 맘대로 해서 일을 망쳤다며 크게 혼을 내시겠지.’

안젤리나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안젤리나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중얼거렸다.

“난 왜 이렇게 약한 걸까…….”

“…….”

시아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황비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 황비마마, 빌헬름 후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안젤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 *

빌헬름 후작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한 달 전, 그는 레이시스의 상태를 좋아지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가까스로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내어 저택으로 돌아왔건만, 레이시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인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 안젤리나 황비마마께서 황자 저하를 모시고 가셨습니다. 후작님의 명령이셨다고…….’

어이가 없었다.

다급하게 이동하느라 저택의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던 동안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다니.

‘쥐죽은 듯 얌전히 있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딸에 대한 배신감과 손주에 대한 걱정에 빌헬름 후작은 한달음에 황궁으로 달려왔다.

“황궁에 입성하시려면 미리 발급받으신 허가증이 있어야 합니다.”

후작은 곤란한 얼굴로 제 앞을 막아선 근위병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감히 황비의 아비를 막아서느냐!”

불처럼 진노하는 후작을 근위병은 차마 잡을 수 없었다.

그만큼 황자를 낳은 황비의 입지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궁에 입장한 빌헬름 후작은 곧바로 안젤리나 황비의 궁으로 향했다.

황비궁의 시종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손님을 막는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모두 빌헬름 후작이 선별하여 보내 준 이들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들의 주인은 안젤리나 황비가 아니라 빌헬름 후작이었다.

“레이시스는?”

어디선가 잽싸게 튀어나온 시종이 빌헬름 후작을 황궁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빌헬름 후작이 문을 열려던 차,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만요, 아버지.”

후작의 입궁 소식을 듣고 다급히 달려온 안젤리나였다.

후작의 사나운 눈빛에 안젤리나는 어깨를 흠칫했지만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안젤리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신지 알아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셔요.”

레이시스를 저택에 두고 올 수 없었어요. 그대로 두면 그 애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았거든요.

대신 황궁에 데리고 와서 노력했어요. 덕분에 레이시스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요.

분명 보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그것은 빌헬름 후작을 마주치면 말하려고 수없이 연습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안젤리나가 입을 떼기도 전에, 빌헬름 후작이 섬뜩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이런 일을 벌여!”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오는 중이었다.

12년 동안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어린 황자에게 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사람들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곧 있을 생일 연회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빌헬름 후작은 마치 사형 날짜가 다가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빌헬름 후작은 최후의 방법을 찾아 수도를 떠나기까지 한 것이다.

빌헬름 후작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길을 떠난 동안 별생각을 다 했다. 끝까지 레이시스를 정상으로 만들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레이시스를 열병에 걸리게 하여 생일 연회를 미룰까.

아니면…… 그냥 레이시스를 죽여 버릴까.

“……!”

끔찍한 말에 안젤리나가 제 입을 막았다.

얼굴을 굳힌 딸을 바라보며 빌헬름 후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진짜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내 손주인데.”

“…….”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못 하는 딸을 바라보며 빌헬름 후작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레이시스가 정상이 되는 방법을 찾아왔으니까.”

안젤리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빌헬름 후작이 섬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 바로 마법사다. 그자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구나.”

“……!”

그 순간 안젤리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빌헬름 후작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마법 따위는 질색이야. 그것은 불길하고 천박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더구나.”

손자를 낫게 할 방법을 찾아 온 세상을 뒤졌지만, 생일 연회에 맞추어 레이시스를 정상처럼 만들 방법은 그뿐이었다.

평생 의뢰할 생각도 아니었다. 생일 연회 때만 해 주면 된다.

그날만 지나가면 한 고비 넘긴 셈이니까.

‘그 후에 다시 레이시스의 교육을 시작하면 돼. 그 뒤로는 피치 못하게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을 때만 마법사의 힘을 이용하면 되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레이시스 황자가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레이시스의 황자로서의 위치가 지켜짐과 동시에 빌헬름 가문과 안젤리나 황비의 명예도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안젤리나의 생각은 달랐다.

안젤리나는 버들버들 떠는 손으로 빌헬름 후작을 붙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레, 레이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하면 안 돼요. 그, 그러다가 레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울먹이는 딸의 얼굴에 빌헬름 후작은 짜증이 치밀었다.

황비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딸은 아직도 너무 여리고, 멍청했다.

평소에는 그 멍청함이 귀여웠지만 지금처럼 제게 반기를 들 때는 아니었다.

빌헬름 후작은 흥, 하고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아버지, 제발!”

안젤리나가 무릎을 꿇다시피 하여 아버지의 다리를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빌헬름 후작은 거칠게 몸을 움직여 딸을 떼어 내고는 방문을 열었다.

쾅.

방 안을 본 빌헬름 후작은 하, 하고 기가 차다는 듯 소리를 냈다.

시큼한 물감 냄새로 가득찬 방. 레이시스는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안 그래도 한계까지 차 있던 분노가 튀어 올랐다.

“생일 연회가 코앞인데 지금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레이시스가 뒤돌아보았다.

붓을 든 레이시스의 얼굴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초점이 어긋나 있었고, 입은 머저리처럼 벌어져 있었다.

빌헬름 후작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레이시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붓을 들고 있는 어린 손주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따라 와, 레이시스!”

“아…….”

천천히 눈을 깜빡인 레이시스는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

그러나 후작은 손주의 미약한 반항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린 소년에게는 그것을 멈출 힘이 없었다.

질질 끌려가던 레이시스가 문 앞에 주저앉아 있던 안젤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레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마.”

“……!”

“엄마!”

가는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지는 순간 안젤리나의 얼굴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아이처럼 울먹이던 소녀는 사라지고, 매서운 눈빛을 한 여인만 남았다.

* * *

안젤리나에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후작이 저택에 들어설 때면 모두가 숨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고고한 후작 부인인 어머니조차 그랬으니, 유난히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린 막내딸이 아버지를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절대 아버지를 거스르지 말자.’

그것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안젤리나의 철칙으로 자리 잡았다.

안젤리나는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숙녀가 되기 위해하루도 빼먹지 않고 교육을 받았고,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물론 그렇게 노력해도 까탈스러운 아버지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다른 형제들이 회초리를 10대씩 맞을 때 5대를 맞았으니 그럭저럭 노력의 대가는 있는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빌헬름 후작이 평소와 달리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최고의 혼처를 받아 왔다, 안젤리나. 황제 폐하의 네 번째 황비가 되는 거야!”

빌헬름 후작은 크게 기뻐했다.

제가 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막내딸에게 그런 기회가 왔다는 것이 기적 같았다.

그러나 안젤리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왜냐면 안젤리나는 그때 고작 열네 살이었기 때문이다. 초경을 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난.

‘싫어요, 아버지. 저는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요.’

얼굴도 모르는 황제 폐하와 결혼하는 것도, 혼자 황궁에 가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안젤리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했다가 벼락처럼 내릴 아버지의 분노가 무서워서.

그래서 안젤리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열네 살의 안젤리나는 황제의 아내가 되어, 제국에 네 명뿐인 황비가 되었다. 첫날밤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기까지 가졌다.

다음 해인 열다섯 살엔 아기를 낳았다.

그다음해인 열여섯 살에는 아버지에게 아기를 보냈다.

그 후로도 계속, 계속.

십여 년이 흘러 27살이 될 때까지, 안젤리나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여린 소녀로 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 아들을 건드리는 것을 보는 순간 안젤리나의 무언가가 깨졌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아버지는 여전히 괴물처럼 크고 무서웠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큰 감정이 그녀를 감쌌다.

모정이었다.

‘더 이상 당신이 내 아들을 건들 게 두지 않을 거야!’

안젤리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레이시스를 껴안았다. 그러고는 빌헬름 후작을 노려보았다.

“레이에게서 당장 손 떼세요! 그리고 데려갈 생각도 마세요. 앞으로 레이는 제 곁에 있을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로도 또박또박 말하는 딸을 보며 빌헬름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늘 제 말에 ‘네, 네’ 하고 순종하던 딸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반항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기가 찬 것은 잠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네가 황비가 된 후로 내가 너를 너무 정중하게 대했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아무리 황비의 왕관을 쓰고 있다 해도, 황자를 낳았다 해도 제 딸이었다.

회초리를 들기만 해도 벌벌 떨면서 뭐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던 나약한 딸.

빌헬름 후작이 손을 들어 올렸다.

“……!”

안젤리나는 곧 일어날 일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손이 무참히 제 뺨을 휘갈길 것이다.

당장 피하거나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용기는 여기까지였다. 오랜 시간 축적된 두려움이 그녀를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레이시스를 꼭 안고 눈을 꾹 감았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딸의 미약한 반응에 섬뜩하게 입꼬리를 올린 빌헬름 후작이 손을 휘갈겼다.

쫘악-!

안젤리나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이것으론 부족하지.’

한 번 더 딸의 뺨을 휘갈기려는 순간이었다.

“여기입니다! 침입자가 황비마마와 황자 저하를 습격하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빌헬름 후작이 소리 질렀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손을 대!”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 말도 없이 후작의 몸을 포박했다.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자들은 정말 자신을 끌고 갈 모양이다.

황비의 부친이자 빌헬름 후작가의 가주인 자신을 말이다.

안젤리나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황비마마, 괜찮으셔요?”

한 시녀가 눈물 어린 목소리와 함께 빌헬름 후작과 안젤리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후작이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얼굴에 상처가 엄청나요. 대체 저 흉악한 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안젤리나는 놀란 얼굴로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아나?’

어떻게 이 순간 시아나가, 그것도 병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울먹이는 얼굴로 안젤리나를 바라보던 시아나가 고개를 휙 돌려 빌헬름 후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비마마와 황자 저하께서 두려움에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서 저 극악무도한 놈을 끌고 가세요!”

자그마한 시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빌헬름 후작을 방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빌헬름 후작이 질질 끌려가며 소리쳤다.

“아, 안젤리나, 멍청하게 앉아 뭘 보고만 있느냐! 아비가 끌려가고 있잖아!”

“…….”

그러나 안젤리나는 버들버들 떨면서도 병사들을 말리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안젤리나가 말했다.

“죄인을 감옥에 가두거라.”

“……!”

빌헬름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가 잘했다는 듯, 안젤리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쾅. 문이 닫혔다.

여린 딸을 괴롭히던 악마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 * *

빌헬름 후작이 사라진 후, 시아나는 고개를 돌려 안젤리나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나보다는 레이가 놀랐을 거야.”

안젤리나는 아직까지 품에 안고 있던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레이시스는 평소의 멍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 느껴졌던 불안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안젤리나가 시아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보신 대로예요. 후작님의 기세가 심상치 않기에 서둘러 나가 경비병을 데리고 왔어요.”

“병사들이 순순히 오지 않았을 텐데…….”

황궁 안에 빌헬름 후작과 안젤리나 황비의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나약한 딸과 기세등등한 아비.

힘의 추는 여실히 빌헬름 후작에게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빌헬름 후작이 그토록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도, 황비궁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실 경비병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시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병사들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웬 미친놈이 황비궁에 쳐들어와서, 황비마마와 황자 저하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빌헬름 후작이라는 이름을 뺀 것이 정답이었다.

병사들은 ‘미친놈’이라는 말에 검을 챙겨 황비궁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빌헬름 후작이 그곳에 있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시녀가 말한 미친놈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이제 와 못 본 척하고 나갈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직접 목격했어요. 후작이 마마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요.”

거기에 안젤리나는 어린 황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무리 빌헬름 후작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렇구나. 부끄러운 꼴을 보였어.”

한쪽 뺨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 안젤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마.”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네 덕에 더 큰일을 당하지 않았는걸. 나야말로 그런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너도 내 아버지가 무서웠을 텐데…….”

맑은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마냥 여유롭게 그녀의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시아나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마?”

“……무엇을?”

“마마께서 후작님께 무언가를 요구하실 생각이라면 지금이 기회예요. 후작님이 황비와 황자를 위협했다는 명목으로 끌려간 지금 말이에요.”

“……!”

시아나의 말을 이해한 안젤리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잠시였다.

안젤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이제 아버지가 나를 제멋대로 흔들 게 두진 않을 거야. ……레이시스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의지와 능력이 비례한 것은 아니었다.

안젤리나에게 있는 것은 황비라는 이름뿐. 그녀에게는 아버지와 대적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자신의 무능함이 분해 입술을 꽉 깨무는데,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마마의 의지를 확인했으니 이제부턴 제게 맡겨 주세요.”

“뭐?”

눈을 동그랗게 뜬 안젤리나를 향해 시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게 황자 저하의 교육을 부탁하셨잖아요. 그 일환이라고 생각하세요.”

수업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엉덩이를 흠뻑 때려서라도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게, 교육자의 기본이니까요.

* * *

빌헬름 후작은 이를 갈았다.

‘이 나를, 빌헬름 후작가의 가주를 이따위 감옥에 가두다니.’

정확히 말하면 감옥이 아니라 죄를 지은 황족이나 귀족을 임시로 가두는 방이었다.

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안락했다.

그럼에도 빌헬름 후작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고얀 놈들! 나를 이딴 곳에 가두고 그냥 넘어갈 줄 알고?’

곧 저택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후작이 성에 갇혀 있다는 말에 난리가 났을 테고, 이내 가문 전체가 들고 일어날 테지.

그렇게 되면 빌헬름 후작은 곧 풀려날 터였다.

‘그때가 되면 용서치 않을 거다.’

나를 이곳에 가둔 병사 놈들도.

감히 아비에게 이런 망신을 준 딸도!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빌헬름 후작은 흉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 그는 들어온 이가 안젤리나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이곳에 들어올 사람은 그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딸이 아니었다.

동그란 얼굴에 조그마한 체구, 장식 없는 갈색 제복.

“너는…….”

빌헬름 후작은 앳된 얼굴의 시녀를 알아보았다.

분명 아까 전, 병사들을 이끌고 방 안에 쳐들어와 저를 향해 극악무도한 놈이니 뭐니 떠들던 시녀였다.

순식간에 빌헬름 후작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흥, 여기까진 왜 왔느냐. 뒤늦게 내가 누군지 알고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라면 소용없다! 일개 시녀 따위가 후작도 알아보지 못하고 일을 크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를 꼭 받아 낼 터이니.”

아무리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두 손을 싹싹 빌어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빌헬름 후작이 예상하는 대로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의 앞에 마주섰다.

“용서를 빌러 온 것이 아닙니다, 후작님.”

“……뭐?”

“제가 찾아온 것은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말씀을 대신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

빌헬름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시아나는 후작이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 제가 허락할 때까지 황궁에 찾아오지 마십시오. 또한 앞으로 레이시스도 제가 기를 터이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그간 감사했습니다.”

“…….”

멍하니 말을 듣던 빌헬름 후작은 이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딸이 너무나, 너무나 괘씸해서 참을 수 없었다.

빌헬름 후작이 소리 질렀다.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안젤리나를 데려와. 내 눈앞에서도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잔 말이야!”

시아나가 대답했다.

“황비마마께서는 지금 후작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오늘 무슨 일을 벌이셨는지 알고 계실 텐데요, 라는 힐난의 눈빛에 빌헬름 후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게 뭐 큰일이라고. 그 애는 내 딸이야! 딸을 교육시키는 것은 아버지의 권리다!”

시아나의 눈빛이 변했다.

“아니요, 딸이 아니라 황비마마입니다.”

“……뭐?”

“후작님께서 오늘 손을 대신 분은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황제 폐하의 아내이시며, 황자 저하의 어머니이십니다.”

“…….”

“그런 분께 손을 댔다는 것은 곧 황권에 검을 들이댄 것과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귀여운 얼굴의 시녀가 내뱉는 섬뜩한 말에 빌헬름 후작은 당황했다.

황제는 잔혹했고, 황태자는 전쟁의 신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감히 맞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빌헬름 후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시아나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빌헬름 후작가는 반역을 꾀하는 겁니까?”

빌헬름 후작은 소리를 빽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빌헬름 후작을 말없이 바라보던 시아나가 얼굴을 풀고 말했다.

“이렇게 몰아갈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후작님께서 황비마마의 뺨을 때리신 작은 사건이 말입니다.”

“…….”

“그러니 모쪼록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말에 동의해 주십시오. 일이 조용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황비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 * *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빌헬름 후작은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안젤리나의 말을 받아들이겠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전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순종적이었던 딸이 제게 반기를 드는 것, 저를 겁주는 것 모두.

어떡해서든 딸을 꺾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일이 복잡해지겠지.’

아무리 나약한 딸이라도 황비는 황비였다. 황제의 보호 아래 있는 여인이란 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휘하에 자식까지 있다.

그런 그녀와 맞부딪친다면 빌헬름 후작에게도 타격이 컸다.

‘거기에 온갖 추잡한 말들이 나돌겠지. 빌헬름 후작이 딸 하나 간수하지 못하여 싸우고 있다는 말들이 말이야.’

생각만 해도 등 뒤가 서늘해질 만큼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빌헬름 후작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시아나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시아나는 빙긋이 웃으며 종이 한 장과 펜을 가져왔다.

빌헬름 후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뭐냐.”

“앞으로 후작님께서 황비마마께 함부로 찾아오지 않으시고, 황자 저하께 과도한 관심을 두지 않으시겠다는 내용을 문서로 적어 주십시오.”

빌헬름 후작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나는 빌헬름 후작이야. 내가 한 말도 지키지 않을 줄 알아?!”

귓가가 아릿할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지만, 시아나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후작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간의 신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빌헬름 후작은 혀를 찼다.

곧 빌헬름 후작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종이를 가져가 글씨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시아나는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빌헬름 후작이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안젤리나는 나약한 데다 영특하지도 못해. 감히 아비를 몰아붙일 만한 깜냥이 되지 않는단 말이지.”

빌헬름 후작이 글씨 쓰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그 애를 조종하는 자가 누구냐.”

안젤리나의 곁에 분명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시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접니다.’

정확히 말하면 안젤리나 황비를 조종한다기보다는, 돕는 중이었지만.

어쨌건 후작을 몰아붙인 판을 짠 존재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저 무시무시한 후작님께 찍히겠지.’

그것은 사양이었다.

일개 하급 시녀에게는 너무 과한 관심이다.

그래서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안젤리나 황비마마께서는 누구의 조종도 받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시아나는 빌헬름 후작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비궁을 주시하고 계신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

충격적인 말에 빌헬름 후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안젤리나의 뒤에 있는 자가 황태자라는 것이냐?’

—라는 얼굴이었다.

물론 아니었다.

라시드는 황태자였지만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황족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냥…….

‘뻥이랍니다, 후작님.’

아니지.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것을 물어본 적이 있으니 관심은 있다.

……개미 똥만큼이겠지만.

어쨌건 협박 같은 뻥은 확실히 먹혔다.

빌헬름 후작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는 듯이.

그리고 아마 이곳을 나가서도 안젤리나 황비에게 보복할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 ‘황태자’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종이 하단에 사인까지 마친 빌헬름 후작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시아나에게 종이를 던졌다.

“이제 됐느냐?”

시아나가 빠른 속도로 종이를 훑어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됐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후작님.”

“…….”

후작은 찌푸린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후작이 써 준 종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흥!”

빌헬름 후작은 시아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을 나오자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나가 미리 조치를 취해 둔 것이었다.

고요한 복도를 걸으며 빌헬름 후작이 물었다.

“안젤리나에게 꼭 전하거라.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 오늘 일을 절대 누구에게도 입도 뻥긋 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목격자들은 어떻게 처리할 셈이냐.”

안젤리나만 조용히 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빌헬름 후작이 안젤리나를 때린 것을 본 자들이 있었다. 시아나와 그녀가 데리고 왔던 황실의 근위병이었다.

시아나가 염려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근위병에게는 제가 상황을 오해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할 것입니다. 안젤리나 황비마마께서도 입을 맞추실 테고요. 후작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

빌헬름 후작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한참 시아나를 바라보던 후작이 물었다.

“한 가지만 묻자.”

“말씀하십시오.”

“너 설마…… 내가 안젤리나를 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으로 들어온 것이냐?”

“…….”

시아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 대답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빌헬름 후작이 기가 찬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안젤리나가 황궁에 와서 헛짓만 하진 않았구나. 너 같은 시녀를 구하다니.”

“…….”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하게나마 기쁨이 어려 있었다.

잠시뿐이었지만.

빌헬름 후작의 얼굴은 다시 신경질적인 귀족의 얼굴이 되어 말했다.

“곧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지. 안젤리나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레이시스를 선보일지 기대가 되는구나.”

“…….”

“그때 가서 나보고 도와 달라고 빌어도 늦었다. 일을 망친 건 그 애야.”

불신과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 * *

“빌헬름 후작님께서 황궁을 떠나셨습니다.”

안젤리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버지는 이렇게 순순히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협박 한 그릇에 황태자 전하 한 스푼을 넣었지요.

시아나는 속으로 대답하며 빌헬름 후작이 주고 간 종이를 건넸다.

“어쨌건 빌헬름 후작님께서 이렇게 자필로 서류까지 남기셨으니 두말은 안 하실 거예요.”

안젤리나는 복잡한 얼굴로 종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 아버지께서는 이런 부분은 확실하시니까.”

불처럼 타오르고 얼음처럼 서늘한 아버지였지만, 제가 한 말은 꼭 지켰다.

한동안 빌헬름 후작은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야.’

더 중요한 일이 남았다.

며칠 후에 있을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였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십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황자를 보러 온 사람들은 경악을 하겠지.

황자가 이상하다고.

레이시스는 레이시스대로 몰려든 사람을 보고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레이시스가 패닉 상태에 빠져 울부짖으면 연회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터였다.

‘이제 후작의 힘은 기대할 수 없어. 어떻게든 안젤리나 황비마마 선에서 일을 수습할 수 있게 대책을 세워야 해.’

쉽지 않은 상황에 눈썹을 찡그리는데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 말인데…….”

시아나는 고개를 들어 저를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시아나와 달리 안젤리나의 얼굴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안젤리나가 말했다.

“그냥 취소할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아침 시아나가 연회를 열지 말자고 했을 때 안젤리나는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생일 연회를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안젤리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지. 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분노도 버텨 낼 수 없을 거라고.”

안젤리나는 고개를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레이시스가 입을 작게 벌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그런 것쯤 이겨 낼 수 있어. ……아니, 이겨 내야 만 해.”

나는 레이시스의 엄마니까.

내 아이가 가장 중요하니까.

“…….”

시아나는 안젤리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제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고 가늘었다.

하지만 봄꽃처럼 여려 날아갈 것만 같았던 이전과 달리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소녀는 비로소 엄마가 된 것이다.

시아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기쁜 듯하기도, 슬픈 듯하기도 한 미소였다.

시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시아나의 목소리에는 황비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 * *

며칠 후, 황궁은 난리가 났다.

황자 레이시스에 관한 일 때문이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의 생일 연회가 취소됐다며?”

십여 년 만에 궁에 들어온 황자가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연회이니 만큼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연회가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니 말이 나올 만했다.

“대체 왜 취소가 된 거래?”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황궁 밖에서 자라셨잖아. 다시 몸이 안 좋아지시기라도 한 것 아닐까?”

안젤리나 황비는 레이시스 황자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의 눈과 귀는 밝은 법이라 금세 소문이 퍼져 나갔다.

“실은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서는 몸이 조금 약한 정도가 아니래.”

“그럼?”

“사람이랑 제대로 말도 못 하시고, 하루 종일 방에서 뜻 모를 말을 웅얼거리기만 하신대.”

“뭐?”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실 레이시스 황자는 바보천치로 태어났다,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 오랜 병에 시달리다 미쳐 버렸다.

끔찍한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안젤리나를 찾아왔다.

첫 번째 황비 요한나였다.

그녀는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비운 동안 황후를 대신해 황궁을 관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젤리나가 부드러운 얼굴로 요한나를 맞이했다.

요한나는 그와 대비되는 서늘한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안젤리나 황비,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불온한 소문이 나돌고 있어 찾아왔습니다.”

“…….”

“감히 고귀한 황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을 엄하게 혼내는 것이 당연하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황비인 나조차 레이시스 황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요.”

“…….”

“황족 중 황자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레이시스 황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안젤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안젤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를 약속해 주십시오.”

“무엇입니까.”

“그 애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말아 주세요.”

“…….”

요한나는 안젤리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문 너머로 레이시스를 보고는 그 뜻을 헤아렸다.

‘정상이 아니군.’

레이시스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장면으로도 그가 평범한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 초점을 벗어난 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쉴 새 없이 내뱉는 혼잣말.

안젤리나의 말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황자의 상태가 왜 저러는 것이냐는 무례한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요한나의 옆에 있던 안젤리나가 말했다.

“보시니 아시겠지요? 제 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주를 받지도 않았고요. 그저 조금…….”

정신이 무너진 것인가.

—라고 생각했던 요한나에게 안젤리나가 말을 이었다.

“특별한 것뿐입니다.”

“…….”

여린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는 목소리였다.

요한나는 기묘한 눈으로 안젤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일 연회를 굳이 취소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말이 많습니다.”

안젤리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황족들은 황자의 모습을 이대로 보여 주지 않을 셈이냐며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연회를 열 수는 없었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예상했기에.

그리고 그 시선에 레이시스가 상처 받을 것을 알기에.

요한나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 계속 황자를 숨길 생각입니까?”

안젤리나가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절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레이시스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으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레이시스가 원한다면 함께 갈 생각이었다.

황궁 안의 잘 꾸며진 정원이든, 황궁 밖의 울창한 숲 속이든, 저 먼 외국의 아름다운 휴양지든.

레이시스를 잔혹하게 평가하는 이들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요한나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행동하겠다는 거군요. 황자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무시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젤리나는 치맛자락을 쥐고 대답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요한나가 말을 이었다.

“분명 말이 나올 텐데요. 황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황자의 자질이 없다.”

레이시스는 차기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황자였다. 그런 그에게 그런 평가가 내려지는 건 치명적이었다.

충격적인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안젤리나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안젤리나가 말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

“저는 그저 레이시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니까요. 그 아이에게 황제로 가는 길은 끔찍한 지옥길일 뿐이에요. 저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아요.”

그것은 곧 황좌로 가는 길을 포기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무표정한 요한나조차 눈이 조금 커질 만큼.

잠시 후, 요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나 황비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

“최대한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내뱉은 요한나의 말에 안젤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젤리나는 요한나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부탁드립니다, 요한나 황비.”

* * *

요한나 황비는 황족들을 만나 레이시스의 상태를 사실대로 전했다.

크게 놀라는 황족들을 향해 요한나가 말했다.

“그럼에도 레이시스 황자는 폐하의 고귀한 핏줄입니다. 누구도 황자를 비웃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요한나의 말에 따라 황족들은 레이시스 황자에 대한 말을 단속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뒤에서 레이시스 황자가 천치라며 깔깔거렸다.

“흥. 몸이 좋지 않다며 황자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부터 알아봤지. 어쩜 그렇게 큰일을 숨길 수가 있어?”

“그러게 말이야. 분명 황제 폐하께서도 황궁에 돌아오시면 분노하실 거야.”

“안젤리나 황비의 자리가 위험할지도 모르지.”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시아나는 안젤리나를 찾았다.

안젤리나를 만나는 것은 레이시스의 생일 연회가 취소된 후 처음이었다.

“황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시아나는 안젤리나가 기운 없이 자신을 맞아 주리라 생각했다.

레이시스 황자에 대해 밝힌 후로 그녀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여린 성품이라 많은 이들에게 쉽게 보였는데, 하나뿐인 아들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어서 와, 시아나. 오랜만이구나.”

안젤리나는 웃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가 눈썹을 내렸다.

“놀란 얼굴이네. 내가 풀죽어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구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럴 틈이 없어. 레이시스와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거든.”

시아나가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안젤리나는 직접 레이시스를 돌보고 있었다.

몇몇 부분은 시종의 도움을 받았지만, 레이시스의 식사를 챙겨 주고 노는 시간도 함께한 후 잠자리까지 도와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덕에 며칠 사이 얼굴이 초췌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전에는 없던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참, 시아나. 보여 줄 것이 있어.”

안젤리나는 시아나를 궁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벽에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이건…….”

“레이시스가 그린 나야.”

“……와. 정말 아름답네요.”

일부 화가들이 그러하듯, 외모를 인위적으로 다듬어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안젤리나의 외형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 봄볕 같은 빛이 났다.

보는 이의 마음이 따스해질 만큼.

안젤리나가 부끄럽다는 듯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나도 보고 놀랐어. 레이시스에게는 내가 이렇게 보이나 봐.”

“…….”

“그래서 나는 요즘 정말 행복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물론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아. 황제 폐하께서 황궁에 돌아오시면 중대한 사실을 숨겼던 내게 벌을 내리시겠지. 황비의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떻게든 레이시스와 잘 살아 볼 것이라고 말하려는 안젤리나에게 시아나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황비마마. 높은 확률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분명 요양 중이신 황제 폐하께도 소식이 전해졌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을 보면 폐하께서 이 사실에 대해 크게 분노하시지 않는다는 거죠.”

그만큼 황제가 자식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만, 애초에 그런 것에 기대감이 없는 안젤리나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런 것이라면 다행인데…….”

“그리고 또 하나.”

시아나가 화려한 궁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궁은 여전히 화려했고, 수십 명의 시종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비마마의 궁에 있던 시종과 시녀의 숫자는 전혀 줄지 않았죠?”

“응.”

“매달 친정 가문에서 황비마마께 보내오는 금화와 보석도 줄지 않았고요.”

이번에도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그건 곧 황비마마의 뒤에는 아직도 친정인 빌헬름 후작가가 버티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입조심을 하겠지요. 빌헬름 후작가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요.”

안젤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라요.”

“……!”

“그리고 빌헬름 후작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시고요.”

그러니 안젤리나를 향한 후원을 멈추지 않은 것일 터였다.

안젤리나는 혼란에 빠졌다.

“아버지가 왜? 분명 나를 미워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아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빌헬름 후작은 망신당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자였다.

그가 최악으로 생각했던 손주의 치부는 이미 드러나 버렸다.

이 상황에서 딸과의 관계까지 틀어졌다는 말이 나오면 그런 창피가 없을 것이다.

그보다야 겉으로나마 딸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여러모로 체면을 차리기 좋을 테지.

‘그리고 또…….’

비록 딸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폭력까지 행사하긴 했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결국 딸의 편이 될 수밖에 없는.

시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이런다고 해서 지난날 저지른 짓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다행이었다.

황비의 가장 큰 보호막이 버티어 주는 셈이니까.

“황제 폐하께 황자 저하에 대한 중대한 사실을 숨긴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후작님이 해 주실 테지요.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라도요. 그러니 황비마마는 마음 놓으시고 황자 저하와 지내셔요.”

시아나의 이야기에 안젤리나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총명한 네가 그리 말해 주니까 안심이 된다.”

잠시 후 안젤리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이런. 내 문제에 대해 도움을 받으려고 너를 부른 것이 아닌데. 또 이리되어 버렸구나.”

안젤리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정식으로 인사를 할게, 시아나. 나를 도와주어서 고맙다. 네 덕분에 기대 이상의 것들을 이루게 되었어.”

“…….”

“약속했던 대로 네가 요구했던 것을 모두 들어줄게.”

시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며칠 후, 황비의 권한으로 하급 시녀가 중급 시녀로 승급했다.

시아나.

그리고……

니니와 나나였다.

* * *

니니와 나나는 갑작스러운 중급 시녀 승급 소식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껴안았다.

“세상에. 우리가 중급 시녀라니. 중급 시녀라니!”

“이거 꿈 아니야?”

콕.

“미쳤냐. 왜 내 눈을 찔러!”

“그럼 내 눈을 찌르니?”

서로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다시 감격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 준 시아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시아나를 와락 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시아나!”

“시아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승진을 했어요!”

“얘는. 시아나가 뭐니. 앞으로 시아나 님이라고 부르자.”

“그래, 그게 좋겠다. 시아나 님. 앞으로 영원한 시아나 님의 발닦개가 되겠습니다. 충성.”

정열적인 감사 인사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시아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말아요. 제가 없는 동안 두 분이 최선을 다해 아리스 공주님을 모셔 주었잖아요. 그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인걸요.”

니니와 나나 덕분에 시아나는 안젤리나 황비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리스의 일상도 한결 행복해졌다.

시아나는 그 답례를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안젤리나 황비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니니와 나나는 중급 시녀가 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진작 올라갔어야 할 자리에 간 것뿐이에요.”

진심이었다.

그만큼 니니와 나나의 시녀로서의 능력은 훌륭했다.

단지 사냥꾼의 딸 출신이라 승진이 가로막혀 있었을 뿐이었다.

니니와 나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어찌 되었건 시아나 님이 힘을 써 주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호호 할매가 될 때까지 하급 시녀로 살았을 거 아니에요.”

“평생 쥐꼬리 같은 급여를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병들어 쫓겨나겠죠.”

“끔찍해.”

“이젠 아니지만.”

니니와 나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시아나가 흐뭇해질 정도였다.

시아나는 헤실거리며 말했다.

“어쨌건 감사 인사는 고맙다는 말로 충분해요. 시아나 님이라는 존칭도, 제 발닦개가 되실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모두 아리스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일 뿐이니까요.”

니니와 나나가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시아나 님!”

“아무렴요. 누구의 말씀인데요.”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걸까.

시아나는 잠시 그런 걱정이 들었다.

어쨌건 니니와 나나에게 선물을 주었으니 다음은 아리스 차례였다.

아리스는 시아나를 꽉 껴안고 말했다.

“드디어 내 품으로 돌아왔구나, 시아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 다시는 놔주지 않을 거야.”

“…….”

공주님, 도대체 그런 해괴망측한 말투는 어디에서 배운 거예요.

시아나가 없는 사이 니니와 나나가 열심히 읽어 준 로맨스 소설 덕분이었지만, 시아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다려 주셔서 고마워요, 공주님. 그럼 오늘은 무엇을 할까요?”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약속을 하나 했다.

안젤리나 황비를 도와주고 난 후에는, 아리스가 원하는 것을 함께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아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소풍 가자!”

* * *

아리스는 니니와 나나가 미리 준비해 놓은 피크닉용 드레스를 입었다.

보석은 빼고 리본으로만 멋을 내어 공주님보다는 귀족가의 영애 같은 느낌이 나는 가벼운 드레스였다.

“어때?”

빙그르 도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니니와 나나가 열광했다.

“너무너무 깜찍해요!”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니야!”

“너무 귀여워서 누가 낚아채 가면 어쩌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몽둥이를 하나씩 꼭 챙겨 가자.”

니니와 나나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아리스의 콧대가 올라갔다.

시아나는 정말로 빨랫방망이를 챙기는 두 사람을 보며 기함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말리지 못했다.

‘시녀가 왜 저런 것을 들고 다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으면 빨래터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지, 뭐.’

그렇게 네 사람은 루비궁을 나왔다.

이내 도착한 곳은 황궁 안에 있는 흰나무 숲이었다.

니니와 나나가 시아나에게 설명했다.

“저희가 찾아낸 장소예요. 다른 정원은 사람들이 오가서 편하게 놀기 힘들잖아요.”

“이곳은 황궁 구석진 곳에 있어서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관리가 좀 소홀하긴 하지만요.”

니니와 나나의 말대로였다.

숲은 고요하고 조용했다.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예뻤다.

‘정원사가 다듬지 않아 흰나무의 나뭇잎이 풍성하고 들판에는 잡초와 들꽃이 제멋대로 피어 있네.’

꼭 황궁 밖의 어딘가로 나온 것 같았다.

이곳이 마음에 든 것은 시아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꺄하하!”

이곳에 오자마자 아리스는 구두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맨발로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꼭 시아나와 만나기 전의 아리스로 돌아간 것 같았다.

원숭이처럼 제멋대로 살던 천방지축 공주님으로.

“나 잡아 봐라~!”

아리스의 외침에 니니와 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 눈앞에 보이는 저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누구지?”

“숲의 요정인가 봐.”

잡는 둥 마는 둥 하는 두 사람과 달리 시아나는 진지하게 임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시아나를 보며 아리스는 흐에엑, 하고 발을 움직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잡혀 버렸다.

시아나의 두 손에 갇힌 아리스가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 난 어린아이에 공주님이라고. 봐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이런 건 최선을 다해야죠.”

“…….”

아리스는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잡을 생각이 1도 없는 니니와 나나보다는 시아나 쪽이 긴박감 넘쳤기 때문이다.

‘내 스타일이야!’

아리스가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아리스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더 하자.”

오늘은 하루 종일 아리스가 원하는 대로 놀아 주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아리스가 땅바닥을 박차는 순간, 누군가가 나타났다.

낯선 이의 등장에 아리스는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니니와 나나도 누군가 싶어 저쪽에 내려 둔 몽둥이, 아니 빨랫방망이를 잡고 가까이 다가왔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아, 안녕. 시아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는 사람은 안젤리나 황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에게 안젤리나가 말했다.

“햇빛이 좋은 날에는 레이와 함께 산책을 하기 시작했거든. 다른 정원은 사람이 많아서 이곳을 이용하고 있단다.”

“아…….”

그제야 시아나는 안젤리나의 옆에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레이시스 황자를 발견했다.

안젤리나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시아나 네가 보이기에 인사를 하고 싶어서.”

“…….”

시아나는 안젤리나의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시스가 혹여 상처받을까 봐 다른 사람들 앞에 보이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도 제게 인사를 하려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러셨군요.”

“응.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언제 한번 시간이 되면 궁에 놀러 오렴.”

시아나가 네, 라고 대답하기 전에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아나는 내 시녀예요.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무슨 무례한 말을 하는 거예요?”

날 선 목소리에 안젤리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나운 얼굴로 팔짱을 낀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장미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안젤리나는 한눈에 소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7황녀 아리스였다.

황제에게 버림받아 제대로 된 공주 취급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에 황태후의 지지를 얻어 힘을 갖게 된 공주.

‘어린데도 기세가 대단하네.’

안젤리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안젤리나는 이런 기 싸움에는 약했다. 그것은 어린 소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젤리나는 말을 왜 그렇게 하냐며 사납게 반응하는 대신,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러네요. 내가 큰 실례를 했어요. 공주에게 먼저 여쭤보았어야 했는데…….”

“……!”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보통 이 타이밍에서는 눈을 부릅뜨며 어린 공주가 시건방지다고 화를 내야 정상인데?’

그러나 안젤리나는 그러는 대신 허리를 숙여 아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죠?”

안젤리나는 황비, 아리스는 황녀.

같은 황족이었으나 두 사람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리스는 황족의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간이 참석했을 때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었던 터라, 중앙에 앉아 있던 안젤리나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리스 공주, 시아나의 힘을 빌리는 것을 허락해 주어서 고마워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

아리스의 얼굴이 못 먹을 채소를 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리스는 싸움에 강했다. 어떤 황족이 와도 기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자신을 대하는 황족은 처음이었다.

아리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우물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황비마마도 내 시녀들을 중급 시녀로 승급시켜 주었잖아요. 주고받은 거니 그런 인사는 할 필요는 없어요.”

그 말에 안젤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시아나가 모시는 공주님이구나 싶었다.

쿡쿡 웃던 안젤리나는 몸을 일으켰다.

시아나와 아리스에게 인사를 했으니 가 볼 생각이었다.

‘레이는 낯선 사람을 싫어하니까. 아리스 공주도 레이시스가 불편할 테고.’

이러나저러나 떠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오라버니라더니 나보다 별로 크지도 않네.”

어느새 레이시스에게 시선을 돌린 아리스가 말했다.

최근 키가 부쩍 큰 아리스는 두 살이나 많은 오빠의 키가 저만 하다는 사실에 우쭐거렸다.

안젤리나는 놀랐다.

아리스의 눈빛에 레이시스를 향한 경멸이나 놀람이 전혀 없어서.

아리스는 레이시스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이건 뭐야?”

놀랍게도 레이시스가 반응을 했다.

“그림.”

짧은 대답을 아리스가 기똥차게 알아들었다.

“그림 잘 그려?”

레이시스가 대답하기 전, 안젤리나가 말했다.

“잘 그린답니다. 무척이요.”

“…….”

“본인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긴 하지만요.”

“그리고 싶은 게 뭔데요?”

아리스의 질문에 안젤리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쁜 것이요.”

“…….”

“사람이든, 풍경이든, 사물이든, 레이시스는 예쁜 것만 그리고 싶어 한답니다.”

그 말에 아리스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아리스가 레이시스를 향해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리고 싶겠네? 그렇지, 오라버니?”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안젤리나는 당황했다.

레이시스가 어린 동생의 청을 무참하게 거절할까 봐서였다. 그럼 공주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레이시스는 아리스를 빤히 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엄청난 속도로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이시스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레이시스의 실력을 알고 있던 안젤리나와 시아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아리스는 아니었다.

아리스는 그림을 보고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미술 작품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아리스의 눈에도 그림은 너무나 훌륭했다.

장미꽃이 만개한 것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 고집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눈동자.

아리스는 본인이 예쁜 것을 알고 있었다.

“하,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아?”

아리스의 작아진 목소리에 양옆에 있던 니니와 나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리스 공주님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깜찍한 매력이 그대로 그림에 담겼는데요.”

“맞아요. 저는 공주님이 종이 안으로 쏙 들어가신 줄 알았다니까요.”

아리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정말?”

니니와 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암요.”

이내 아리스의 콧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내가 예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구나.

하, 나란 공주.

……라는 얼굴이었다.

시아나는 그 모습을 보며 풋 하고 웃었다.

‘하여간. 갈수록 오만해지고 계시다니까.’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공주였으니까.

정도를 지킨다면, 공주는 저런 뻔뻔함과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리스는 레이시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정말 최고다. 다른 황족들은 재수 없는 말만 늘어놓을 줄 알지 이런 재주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 놈들보다 백배는 훌륭해!”

레이시스는 그 말에 그래, 라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리스는 ‘뭐라는 거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안젤리나가 말했다.

“공주님이 좋아하셔서 기쁜 모양이에요.”

“그래요?”

“네. 기분이 좋으면 혼잣말이 많아지거든요.”

별생각 없이 하는 말이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기 전, 아리스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꼭 노래하는 것 같네.”

“…….”

안젤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내 안젤리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안젤리나를 쳐다보았다.

괜찮냐는 듯이.

안젤리나가 눈 위를 꾹 누르며 애써 웃었다.

“나도 참 주책이지 뭐야.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나올 것 같다니.”

시아나는 안젤리나의 마음을 알았다.

안젤리나는 오늘 처음으로, 레이시스가 또래의 아이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같은 피가 절반 섞인 여동생과.

그녀가 생각했던 수많은 끔찍한 상황들과 달리, 레이시스는 아리스와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있었다.

안젤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스 공주 덕분이야.”

아리스는 태어나자마자 황제에게 버림받았다. 긴 세월을 홀로 지냈다.

그러나 지금 어린 공주에게는 그런 구김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밝고, 당차기만 했다.

저와 조금 다른 이에 대한 편견도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 공주는 어리지만 훌륭하구나. 시아나 네가 잘 보살핀 덕분이겠지.”

시아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황자 저하도 그렇습니다. 마마께서 잘 보살피신 덕분이겠지요.”

장난스러운 말에 안젤리나도 눈을 휘었다.

더할 바 없이 기쁜 말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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