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린 황비 (1)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오후, 루비궁은 복작거렸다.
새로 들어온 시녀, 니니와 나나 때문이다.
갈색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은 콧등의 주근깨까지 똑 닮아 있는 쌍둥이였다.
니니가 수십 개의 레이스와 리본이 붙은 분홍색 드레스를 펄럭이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아리스 공주님께는 이런 깜찍한 드레스가 잘 어울리시지. 눈도 크고 속눈썹도 길고 입술도 앵두처럼 빨갛고 인형처럼 어여쁘시니까. 알겠니, 나나……?”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은 나나는, 꽃장식이 달린 물색 드레스를 내밀며 말했다.
“너야말로 너무 모른다, 니니. 아리스 공주님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우아함과 영특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그런 공주님께는 이렇게 청초한 드레스가 딱이야……!”
“분홍색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린다니까.”
“아니라고. 물색 드레스가 더 찰떡이라고……!”
치지지직.
니니와 나나,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제아무리 한 배에서 나온 자매일지라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치열함이 느껴졌다.
이내 두 사람은 고개를 홱 돌려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시아나의 의견은 어때요?”
“…….”
가만히 있다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시아나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니니와 나나, 똑같이 생긴 얼굴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시아나를 구해 준 것은 아리스였다.
“너희들, 시아나를 곤란하게 하지 마.”
아리스의 등장에 니니와 나나가 눈을 반짝였다.
“공주님……!”
니니와 나나가 무릎을 굽히고는 아리스에게 잘 보이도록 드레스를 펼쳤다.
“며칠 동안 바느질하여 완성한 드레스랍니다.”
“어떤 드레스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아리스는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드레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둘 다 괜찮네.”
“……!”
“……!”
“원래 나 정도 미모면 뭘 걸쳐도 예쁘잖아. 안 그래?”
자신만만한 말에 니니와 나나는 충격받은 얼굴을 지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아아, 저희가 어리석었어요. 공주님께 안 어울리는 드레스가 어디 있다고.”
“어쩜, 어린 나이에 이렇게 총명하실까.”
“아름다우신 데다가 영특하기까지 하시다니. 정말 멋져요, 공주님.”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격한 칭찬에 아리스의 광대가 올라갔다.
“둘 다 입어 볼게. 가지고 와.”
니니와 나나는 꺄, 하고 소리치며 아리스를 쫓아갔다. 아리스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아나는 키득 웃었다.
‘다른 시녀는 싫다고 하시더니.’
아리스는 새 시녀가 오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다. 시녀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그래서 시아나는 심사숙고하여 시녀를 골랐다.
니니와 나나는 비루한 출신 탓에 오랜 시간 하급 시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싹싹하고 일을 잘했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공주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아리스를 본 첫날, 그녀들은 황홀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흥.]
‘그래 봤자 니들 따위 눈길이나 줄 것 같아?’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아리스를 향해 두 사람은 눈물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어떡해, 너무 예쁘셔.]
[황궁의 시녀가 되길 잘했어.]
칭찬은 사악한 드래곤도 춤을 추게 만든다 했던가.
아리스는 점점 저를 찬양하는 두 명의 시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로써 시아나는 부담감이 줄어들게 되었다.
아리스를 두고 편히 루비궁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 * *
시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리스의 양옆에 날개처럼 달라붙어 있던 니니와 나나가 씩씩하게 말했다.
“오늘은 공주님과 함께 황태후 마마께서 보내 주신 보석과 드레스로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할 거랍니다.”
“그러니 공주님은 걱정 말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시아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아리스도 말을 덧붙였다.
“그 인간이 이상한 짓 하면 참지 말고 당장 돌아와서 일러.”
시아나는 그 말에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궁을 나온 시아나가 향한 곳은 그 인간, 그러니까 아리스의 오라버니이자 이 황궁의 계급 최상위층에 있는 황태자 라시드의 궁이었다.
일전에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아리스의 친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이야기 값을 치르면 되겠냐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제 궁에 오라고 했다.
시아나는 그 말을 ‘궁에 와서 일 좀 해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밥도 잔뜩 먹고 직접 만든 청소용품도 챙겨 왔지.’
매번 차 한 잔 타 주는 것으로 값을 치렀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값을 치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궁에 도착한 시아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는 주방도, 잡초가 수북한 정원도, 청소할 것투성이인 복도도 아닌, 궁 깊은 곳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되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때까지 편히 기다리십시오.”
시녀는 상급 시녀의 상징인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상급 시녀가 일개 하급 시녀를 이토록 깍듯하게 대하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시아나를 향해 시녀가 말했다.
“오늘 오시는 분은 황태자 전하의 귀한 손님이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뿐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시녀는 시아나 앞에 알록달록한 다과와 차까지 내주었다.
라시드가 올 때까지 차 시중까지 들어 준다는 것을 시아나가 다급히 거절했다.
“괘, 괜찮습니다!”
까마득한 상사가 따라 주는 차라니. 코로 들어가도 모를 거예요.
다행히 시녀는 더 권하지 않고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볼 터이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넵.”
시아나는 시녀가 응접실을 나갈 때까지 경직된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문이 닫히고 겨우 혼자가 된 시아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시아나는 끔찍한 일을 겪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황태자 전하의 귀한 손님이라고?”
일개 하급 시녀에게 하는 장난치고 너무 과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했고.
‘……너무 복잡하게 파고들지 말자.’
시아나는 ‘역시 황태자 전하는 제정신이 아니야’로 결론을 지었다.
그러는 게 편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른 시아나는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아까는 상급 시녀를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이곳은 평범한 응접실이 아니었다.
드높은 천장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파란 하늘이 다 보였고, 그 아래에는 울창한 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가득했다.
‘응접실이라기보다는 잘 가꾸어진 실내 정원 같아.’
—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라시드가 응접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가는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으시네요.”
라시드의 품속에는 허리가 긴 새하얀 페럿이 안겨 있었고, 어깨에는 작은 다람쥐가, 머리 위에는 작은 새가 뺙뺙거리고 있었다.
라시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아이들과 산책을 하던 중이었거든. 네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지.”
라시드는 시아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서 와, 시아나.”
“…….”
그 순간 시아나는 심장이 콩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미소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렸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들떠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시아나는 속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흔들리지 마, 시아나. 저분이 제정신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잖아.’
재빨리 감정을 정리한 시아나가 말했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황태자 전하께 이야기 값을 치르러 왔습니다. 저는 오늘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전하.”
‘저는 결코 전하의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랍니다. 놀러 온 것도 아니고요’라고 선을 단호하게 긋는 말이었다.
“…….”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순간 풀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은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성격이 급하구나. 천천히 본론으로 돌아가도 될걸.”
“송구하옵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라시드는 제 앞에서 바쁘다고 으스대는 시녀를 탓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알겠어. 그럼 바로 이야기하마. 오늘 네가 할 일은…….”
“…….”
라시드의 이어진 말에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