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어둠이 드리워진 궁, 이베트의 얼굴은 험악했다. 작은 손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늘 또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궁을 거닐다가 마주친 공주 한 명이 이베트를 보더니 어머,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니, 이베트.’
황태후에게 찍혀 입지가 좁아진 자매를 향한 동정이 아니었다.
철저한 비웃음이었다.
이베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궁으로 돌아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젠장!”
더 비참한 건, 이 순간까지도 방에 있는 물건 하나 마음대로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황태후에게 찍힌 이후, 성에서 나누어 주던 물품 보급이 뚝 끊기고 말았다.
친모에게 간간이 들어오던 뇌물들도.
이베트는 완전히 밑바닥으로 처박혀 버렸다.
이베트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아리스 때문이야.”
그 계집애가 더러운 수작을 부린 탓에 황태후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황태후가 아리스를 애지중지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책맞아 보일 정도로 손녀를 아낀다고.
이 상태에서 아리스를 건들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황태후에게 가루가 되도록 짓밟힐 것이다.
잠시 후, 이베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럼 아리스가 아니라 그 옆에 달라붙어 있는 시녀를 건들면 되잖아.”
이베트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 건방진 시녀를 때렸을 때, 아리스가 엉엉 울던 모습이.
아리스에게 그 시녀가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베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베트의 머릿속으로 악랄한 방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몇 시간 후, 이베트의 생각이 정리되었다.
‘루비궁을 찾아가 그 시녀를 꾀어내자.’
제아무리 아리스의 예쁨을 받는다 해도 하급 시녀이니 공주의 명을 거역할 순 없을 것이다.
시녀를 만난 뒤, 제 뺨을 때리고 소리 지를 것이다.
‘하급 시녀가 공주인 나를 때렸어요! 모시는 주인이 요즘 황태후 마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아무리 이베트를 무시하던 이들도, 감히 일개 시녀가 황족을 건드렸다는 사실에는 꿈틀할 것이다.
그것도 황태후의 기세를 등에 업어 거슬리기 시작한 아리스의 시녀라면 더더욱.
시녀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성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고.
‘잘하면 목이 잘릴 수도 있지.’
물론 아리스가 그러지 말라고 울부짖겠만 어쩌겠어.
황족들이 들고 일어나면 황태후는 쇠약한 늙은이일 뿐인데.
고작 그 정도의 힘이었다.
이베트는 키득키득 웃었다.
이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흐으음~.”
이베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궁 밖으로 나갔다.
루비궁으로 가 시아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시아나를 꾀어낼 말도 준비해 두었다.
‘이전에 때린 것을 사과하고 싶다고 하자.’
그럼 그 멍청한 시녀는 공주님의 사과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뛰쳐나오겠지.
그게 제 명줄을 끊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베트는 루비궁에 도착하지 못했다.
제 앞에 선 커다란 인영 때문이다.
이베트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라시드였다.
‘세상에.’
이베트와 라시드는 같은 황제의 핏줄을 가진 남매였지만 위치는 전혀 달랐다.
라시드는 가장 높은 곳에, 이베트는 가장 밑바닥에.
그래서 이베트는 라시드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멀리서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라시드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치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에게 손을 댔더구나.”
새벽바람처럼 맑으면서 어딘가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베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애라고?’
이베트는 도대체 누굴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여동생을 향해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그 애의 상처를 본 날, 당장 쫓아오지 않았던 것은 너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다. 기다린 거지. 그 애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때까지.”
“…….”
“그 애의 복수는 끝났다.”
라시드는 눈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황태후의 매질 한 번으로.”
“……!”
이베트는 눈을 부릅떴다.
라시드의 말이 퍼즐처럼 짜 맞추어지며 ‘그 애’가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지금 아리스의 시녀 년에 대해 말하는 거야……?’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그 애는 너무 착해서 이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만족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아니란다, 이베트.”
“…….”
“나는 전혀 착하지 않아.”
“…….”
“내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어.”
아름다운 얼굴은 온화해 보였다. 목소리도 다정했다.
그럼에도 이베트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공포를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손끝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이베트는 창백해진 얼굴로 넙죽 엎드렸다.
“자, 잘못했어요!”
“…….”
“제가 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시, 시녀에게 빌라고 하면 빌게요. 제발, 오라버니…….”
어린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얼굴로 동생을 내려다보던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싫어.”
“……!”
이베트가 눈을 부릅떴다.
라시드가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기 때문이다.
차앙-!
라시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애의 다리를 때렸으니, 너도 두 다리를 내놓거라.”
번뜩이는 검날을 바라보며 이베트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악!”
솔이 다가왔다.
솔은 바닥에 쓰러진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은 이베트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두 다리도 멀쩡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로 두 다리가 잘리는 공포를 느꼈겠지.’
솔은 눈물범벅이 된 이베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전하답지 않게 봐주셨네요.”
라시드는 말로만 협박하는 이가 아니었다.
적으로 분류하는 자는 무조건 죽였다.
그것이 아직 어린 아이든 아름다운 여인이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든.
‘그런 분이 피를 보지 않고 끝내다니. 아무리 접점이 없어도 피가 이어진 동생이니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야.’
그러나 솔의 생각은 틀렸다.
라시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시아나는 눈치가 빠르잖아. 아무리 열심히 숨겨도 그 애는 내가 이베트를 죽인 걸 알아챌지도 몰라.”
“……!”
“……그럼 날 무서워할 거 아니야. 그건 싫어.”
그렇게 말하는 라시드는, 방금 전 이베트를 위협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패전국 출신인 하급 시녀의 반응 따위를 말이다.
솔은 기가 찼다.
‘하여간 저분께 평범한 감정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내가 모시는 분이지만 정말 미친 분이야.’
솔은 혀를 쯧쯧 차며 이베트를 안아 들었다.
“그럼 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조금 아쉽긴 했으나 이 정도로 충분했다.
이베트는 이제 시아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할 테니.
그래서 라시드는 두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악랄한 악마에게서 제 소중한 인형을 지킨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었다.
* * *
며칠 후, 황궁에 소문이 돌았다.
이베트 공주가 미쳤다고.
“두 다리가 멀쩡히 잘 있는데도 자꾸만 다리가 잘렸다고 울부짖는대.”
“황태후 마마께 회초리를 맞은 것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그런가 봐. 웃긴 일이지. 시도 때도 없이 시녀들을 때렸으면서 정작 본인은 회초리 몇 대에 정신을 놓다니.”
누구도 어린 공주를 동정하지 않았다.
이베트의 친모는 결국 딸과 함께 황궁을 떠났다.
실성한 딸의 요양을 위한 것이었다.
마차에 탄 이베트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자르지 말아요.”
그것이 여섯 번째 공주 이베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외전 3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