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독한 황태후
시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츄츄!”
츄츄가 울근불근한 팔 근육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시아나!”
두 사람은 격한 표정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시아나가 정식 시녀가 된 후 두 사람은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시아나가 대부분의 시간을 루비궁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츄츄가 제 품속에 파묻힌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째 더 쬐끄매진 것 같다.”
시아나가 고개를 한껏 들고 말했다.
“너는 더 커다래진 것 같네.”
“후후, 눈치챘구먼. 요즘 틈나는 대로 운동을 해서 몸을 키우고 있거든.”
츄츄는 위풍당당한 얼굴로 울룩불룩한 이두박근을 보여 주었다.
시아나는 친구의 우람한 팔뚝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대단해. 멋지다, 츄츄.”
“으히히.”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던 츄츄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의 머리에 에메랄드색 핀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시아나는 머리핀이 없었다. 시아나는 축 처진 어깨로 말했다.
‘실수로 머리핀을 연못에 떨어뜨려 버렸어. ……미안해, 츄츄.’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영영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핀을 찾은겨? 연못이 깊어서 찾기 힘들 거라고 했잖여.”
“그게…….”
시아나는 작디작은 머리핀이 제 머리 위로 돌아오기 위해 벌어진 소란을 떠올렸다.
* * *
얼마 전, 루비궁에 라시드가 찾아왔다.
썩은 표정을 짓는 아리스를 향해 라시드는 웃으며 말했다.
“전에 써 준 확인서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왔다.”
“…….”
동시에 라시드의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 솔이 설명을 덧붙였다.
“카아나 초콜릿을 듬뿍 얹은 케이크도 가지고 왔습니다, 공주님.”
솔의 손에는 거대한 초코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케이크는 반짝이는 진갈색 초콜릿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진한 초콜릿 향에 코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
아리스는 덩치 큰 두 남자와 케이크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절대 케이크 때문은 아니야. 오라버니가 좋아서는 더더욱 아니고. 남은 빚을 갚는 것뿐이라고.”
“그래.”
라시드는 조금의 서운한 기색 없이 빙긋이 웃으며 루비궁에 들어섰다.
케이크를 든 솔도 졸졸 그의 뒤를 따랐다.
정원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아리스와 라시드가 앉았다.
라시드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차 통을 시아나에게 내밀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차 따르는 시녀 따위에게 인사하는 황족은 없답니다, 황태자 전하.
시아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라시드는 이번에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으. 부담스러워.’
평범한 사람이 쳐다봐도 신경이 쓰이는데 황태자라는 자가, 그것도 저렇게 이목구비 주장이 강한 얼굴로 쳐다보니 정신이 사나웠다.
마음 같아서는 라시드의 얼굴을 저쪽으로 돌려 버리거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콕 찌르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아나는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차를 탔다.
이내 정원에 향긋한 캐모마일 향이 가득 찼다.
라시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완성된 차를 홀짝였다.
“맛있어.”
옆에 앉아 있던 아리스가 똑같은 얼굴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누가 따라 준 차인데.”
아리스는 차를 싫어했지만, 시아나가 타 준 차는 예외였다.
우유와 꿀을 넣은 시아나의 차는 초콜릿보다 맛있었다.
‘이 귀한 걸 오라버니와 나눠 마셔야 한다니.’
기분이 나빴지만 참았다.
오늘 아리스는 라시드에게 얻어 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시아나의 차는 최고야.”
“같은 생각이다.”
“그러니 고작 확인서 한 장의 값을 시아나의 차 두 잔으로 퉁치는 건 억울해. 그러니 내 요청을 하나 더 들어줘.”
라시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린 동생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봐.”
아리스가 정원 한편에 있는 드넓은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수에 떨어진 물건을 찾고 싶어.”
호수, 라는 말에 아리스의 옆에 서 있던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리스와 시아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라시드가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어떤 물건인데? 그걸 알아야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말해 줄 수 있어.”
“머리핀이야.”
라시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루비궁의 호수는 제법 크다. 깊이도 깊다.
한때 아리스의 친모를 총애했던 황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머리핀을 찾으라고?
불가능하다.
그리 말할 셈이었다.
이어진 아리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실수로 시아나의 머리핀을 빠뜨렸…….”
“찾아 주마.”
번개처럼 빠른 대답이었다.
* * *
츄츄는 송아지처럼 새까만 눈을 껌뻑였다.
츄츄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머리핀을 찾아 주셨다고?”
시아나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연못이 엄청 깊다고 했잖여.”
방법은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라시드는 100명의 하인들을 동원해 연못의 물을 다 빼 버렸으니까.
물이 쏙 빠진 흙 위에서 작은 머리핀은 금세 발견됐다.
이후에 라시드는 다시 100 명의 하인을 시켜 연못에 물을 채우게 했다.
물길을 내느라 엉망이 된 곳을 이전보다 화려하게 정비까지 해 주며.
시아나가 그때를 떠올리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물론 머리핀을 찾은 건 너무 기뻐. 황태자 전하께 감사하게도 생각하고. 하지만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너무 이상하잖아.”
고작 시녀 한 명의 머리핀 하나를 찾아 주기 위해 연못 물을 다 퍼내는 황태자라니.
츄츄도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태자 전하는…….”
시아나와 츄츄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정신에 좀 문제가 있으신 것 같아.”
“미친놈 같은디.”
츄츄는 진심으로 시아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하급 시녀의 목숨은 파리보다 못한 처지인데 상대가 황태자라니.’
그런 놈이 시아나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가까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놓일 텐디.”
시아나도 츄츄와 함께 루비궁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성인 남자 10명을 합친 것보다 힘이 센 츄츄는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곧 정식 시녀가 되는 츄츄를 노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널 데려가고 싶어 한다며. 그런 네가 루비궁에 배정될 리 없지.”
아리스 공주가 있는 루비궁은 서열 최하위였다. 인기 많은 시녀를 데려올 만한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이렇게 안 와! 너무 안 와서 찾으러 왔잖아.”
아리스가 허리에 손을 얹고 시아나와 츄츄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로 아리스의 정체를 안 츄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는 그런 츄츄를 향해 흥, 하고 못된 콧바람 소리를 내더니 시아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 나 배고프단 말이야.”
“나오기 전에 간식을 만들어 드렸잖아요.”
“쿠키 열 개 따위 바로 똥으로 나온다고. 엄청 배고파.”
“…….”
“가서 또 만들어 줘.”
꼭 엄마에게 칭얼대는 어린아이 같았다.
시아나는 난처한 얼굴로 츄츄를 바라보았다. 츄츄가 눈빛으로 말했다.
‘까탈스러운 공주님 모시느라 힘들겠구먼.’
그러고는 솥뚜껑 같은 주먹을 쥐었다.
쥐똥만 한 공주를 쥐어박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고생하는 친구를 향한 파이팅이었다.
그 뜻을 알아챈 시아나도 주먹을 쥐며 빙긋 웃었다.
두 사람만의 수신호에 아리스가 불쾌한 듯 이를 으르렁거렸다. 꼭 엄마 사자를 다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는 아기 사자처럼.
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루비궁에 다른 시녀를 데리고 올 엄두도 못 내지.’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푸욱 빠져 있었다.
* * *
루비궁으로 돌아가는 길, 시아나는 아리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크긴 했지만 아직 아리스는 작다.
열여덟 살 여인이 열 살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공주와 시녀가 손을 잡고 가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루비궁에서는 괜찮지만 밖에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루비궁은 황궁에서 외진 곳에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시아나는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아리스의 말대로 보는 사람이 없었고 설령 있대도 크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버려진 작은 공주님이 시녀 손을 잡든 말든,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그래서 시아나는 작은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아리스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아리스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쟤가 네가 말했던 친구지? 츕츕이었나.”
“……공주님,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아리스는 기억력이 좋았다.
정곡을 찔린 아리스가 입술을 내밀었다.
“쟤가 왜 그렇게 좋아? 커다랗고 근육질이라서?”
시아나는 키도 작고 마른 편이다. 그래서 크고 튼튼한 사람에게 동경 같은 것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밀가루 포대 하나 나르느라 끙끙거릴 때 츄츄는 밀가루 포대를 다섯 개씩 번쩍번쩍 들잖아. 멋있긴 하지.’
그런 의미로 츄츄는 시아나의 이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있죠.”
“……!”
시아나의 대답에 아리스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저녁부터 고기와 우유를 이만큼 더 많이 준비해 줘. 챱챱인지 츕츕인지 하는 애보다 훨씬 더 클 테니까.”
엄청난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아리스의 시아나에 대한 애정은 깊어 갔다.
시아나는 그 마음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웠다.
‘저건 하나도 안 귀엽지만…….’
시아나는 살짝 굳은 얼굴로 루비궁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환한 햇살 아래 서서 반짝이는 남자는 라시드였다. 그의 뒤에는 호위 기사 솔이 서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남자와 갑옷을 입은 근육질의 훤칠한 남자.
누가 봐도 훈훈한 투 샷이었지만 시아나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라시드를 향해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왜 또 왔는데.”
“연못이 잘 정비되었는지 보러 왔단다.”
“벌써 몇 번이나 와서 확인했잖아. 전혀 문제없어!”
“당장 완벽하게 끝난 것 같아도 시간을 두고 확인을 해야지. 일주일 후, 한 달 후, 부족한 것이 눈에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라시드의 뒤에 서 있던 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내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솔의 손에 들려 있는 케이크 때문이다.
새하얀 생크림 위에는 색이 선명하고 커다란 딸기와 오렌지, 포도, 과일이 듬뿍 얹혀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였다.
넋을 놓고 케이크를 바라보는 아리스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흰 우유를 듬뿍 넣어 만든 생크림 위에 꿀을 발라 졸인 과일을 얹은 케이크란다.”
“……!”
아리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라시드를 루비궁에 들어오라고 허락해 준 것이 벌써 여섯 번째다.
‘이번에는 안 돼! 저따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아리스는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연못만 보고 가.”
“그래.”
라시드는 기쁜 듯 빙그르 웃으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시아나에게 향했다.
고개를 숙인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는 차 통을 하나 내밀었다.
“오늘은 디라마산 아삼이야.”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
시아나는 이제 확실히 알고 있었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타 주는 차에 푹 빠져 있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들어 슬쩍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남자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꼭 뼈다귀를 던져 주길 바라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차 타 주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차라리 눈앞의 남자가 일개 시종이라면 편하게 차를 타 줬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고작 하급 시녀에게 이상할 만큼 과한 호의를 베푸는 황태자라니.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잖아.’
시아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철저한 시녀용 미소를 지으며 차 통을 받았다.
“궁으로 드시지요, 전하.”
라시드는 헤실헤실 웃으며 루비궁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케이크를 든 솔이 따랐다.
솔은 힐끗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루비궁 주변을 서성이던 그림자가 향한 곳은 검은 가시 꽃으로 휘감긴 궁이었다.
그림자는 한 소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여섯 번째 딸이며 올해 열세 살이 된 이베트였다.
이베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라시드 오라버니가 또 루비궁에 갔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림자, 즉 이베트가 보낸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의 대답에 이베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오라버니는 왜 자꾸 루비궁에 가시는 거야, 짜증 나게.”
황궁의 공주들은 모두 라시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라시드는 형제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황태자이면서, 신화 속에 나오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와 가깝게 지내는 공주는 아무도 없었다.
‘제국의 황실에 형제는 없다.’
—라는 금언처럼 라시드는 여동생들에게도 철저히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그런 라시드가 유일하게 챙기는 동생이 아리스였다.
가뭄에 콩 나듯 가끔이긴 했으나 챙기는 건 챙기는 거다.
이베트는 그 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옆에 있던 이베트의 친모인 후궁 블렌이 딸을 다독였다.
“이해하렴. 아리스가 워낙 불쌍한 아이잖니.”
“그래도요.”
동정이라 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최근 라시드가 아리스를 챙기는 일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잦았다.
아리스의 시녀가 물품 보급소에 라시드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를 가지고 왔다는 소식에 황궁이 얼마나 들썩였던가.
라시드의 보살핌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하인들을 데려가 루비궁의 연못을 화려하게 꾸며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베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라시드가 아리스 따위를 신경 쓰는 것에 대한 질투.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아리스에 대한 분노였다.
‘천한 태생이 주제도 모르고.’
여섯 번째 황녀인 이베트는 서열상 아리스와 가장 가까운 자매였다.
그러나 이베트는 단 한 번도 아리스를 동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박한 무희의 딸.
그런 주제에 저와 같은 공주랍시고 황궁에서 살고 있는 모습이 늘 거슬렸다.
그런 아리스가 오라버니의 호의를 받고 히죽히죽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거지한테 적선하듯 베푸는 동정인지도 모르고. 바보 같은 년.’
이베트가 눈을 추켜올렸다.
어린 소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표독스러운 눈빛이었다.
딸이 그런 얼굴을 할 때는 못된 생각을 할 때뿐이다.
그것을 아는 블렌이 눈썹을 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 나서요. 아무래도 그 계집애를 밟아 줘야겠어요.”
강자는 약자를 짓밟아도 된다.
그것이 이 황궁의 법칙이다.
그래서 블렌은 딸의 악독함을 말리는 대신,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 말이 나온다.”
“알겠어요.”
이베트는 걱정 말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꼭 악어의 미소 같았다.
* * *
아리스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마주한 것 같았다.
아리스의 손에 들린 건 장미꽃이 그려진 초대장.
황녀 이베트에게서 온 편지였다.
<오랜만에 동생과 차 한잔 마시며 정을 다지고 싶구나.>
아리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은 개뿔. 실컷 괴롭히려는 속셈이면서.”
실상 성에서 아리스를 괴롭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괴롭히려면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일곱 번째 공주라는 직위밖에 없는 아리스는, 황족들에게 개미보다 못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황족은 그런 아리스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이베트는 아니었다.
이베트의 어머니인 블렌은 시녀 출신으로 대단한 가문이 아니었다. 황제의 총애 또한 한순간이었다.
수많은 품계 낮은 후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딸인 이베트의 서열도 바닥이었다.
그래서 이베트는 틈만 나면 아리스를 심하게 괴롭히곤 했다.
황궁에서 얼마 없는 만만한 상대였으니까.
아리스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기 싫어.”
하지만 티 파티에 가지 않으면, 왜 오지 않느냐며 루비궁에 찾아오겠지.
안타깝게도 친모도 없는 아리스에게는 그녀를 막을 힘이 없다.
그녀는 제멋대로 루비궁에 들어와 더러운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그 꼴을 보느니 내 발로 찾아가서 괴롭힘을 당하는 게 훨씬 낫지.’
눈을 꾹 감는 아리스에게 시아나가 물었다.
“공주님을 어떻게 괴롭히는데요?”
“…….”
아리스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무가내로 머리채를 휘어잡으면서 욕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아무리 만만하다고 해도 아리스는 공주, 이베트도 공주였다.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베트의 괴롭힘은 그보다 더 음습했다.
“티 파티 내내 깔깔 웃으며 날 놀려 대.”
아리스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을 이었다.
“……차림새나 행동 같은 거. 난 하나도 공주답지 않으니까.”
아리스의 말대로였다.
요 근래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아리스의 외모는 어여뻤다. 그러나 공주란 외모가 예쁘다고 해서 다가 아니었다.
부끄럽지 않을 만한 꾸밈새와 책잡히지 않을 만한 예법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아리스는 예법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황태자 전하께 위풍당당하게 꺼지라고 말을 하는 분이시니.’
시아나는 새삼 떠오른 장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는 공주님이 배우는 걸 원치 않아 해서 그냥 두었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최소한의 예법을 몸에 익혀야 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그래서 시아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티 파티 전에 예법을 익히면 되죠.”
아리스가 똥 씹은 얼굴이 됐다.
황궁에서는 공주에게 예법 선생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예법을 가르치는 것은 친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에게는 엄마가 없었고, 한 번도 제대로 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리스가 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황족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한테 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아니, 한 사람 있기는 했다.
빙긋 웃는 얼굴을 떠올린 아리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라시드 오라버니께 부탁해 보라는 말이라면 됐어.”
요즘 부쩍 얼굴을 자주 보긴 했지만 아리스에게 여전히 라시드는 타인보다 못한 존재였다.
더 이상 신세지는 건 질색이다.
시아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염려 마세요. 황태자 전하께도,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빌리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러더니 자신만만한 얼굴로 제 가슴을 톡톡 치며 말했다.
“제가 공주님께 궁중 예법을 가르쳐드릴게요.”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나는 하급 시녀였다.
하급 시녀는 대부분 평민 출신에 궁중 생활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궁중 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이내 시아나의 또 다른 모습을 떠올렸다.
‘시아나는 엄청나게 멋지게 차를 따를 줄 알지.’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아리스가 봐도 그 실력은 범상치 않은 것이다.
아리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칙칙한 갈색 시녀복을 입고 있는 시아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황족들에게나 느꼈던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시아나는 평범한 시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아리스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시아나는 귀여운 얼굴로 웃었다.
“패전국 출신의 하급 시녀요.”
그러고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차 따르는 것과 궁중 예법에는 자신이 있답니다. 그러니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공주님께 제대로 된 예법을 알려 드릴게요.”
* * *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실 황실의 예법이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세부터 손짓, 말투까지 복잡한 격식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아나는 일단 티 파티에서 필요한 간단한 예법만 알려 주기로 했다.
“주최자보다 먼저 차를 마시면 안 돼요. 주최자가 마시라고 차를 권한 후에 마셔야 해요.”
“차를 마실 때는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돼요.”
“한 모금 마신 후에 차를 내려놓으세요. 이때도 소리가 나서는 안 됩니다.”
아리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차 하나 마시는 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러나 아리스는 투정하는 대신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시아나를 따라 했다.
지금껏 제대로 예법을 배운 적 없었던 것치고 제법 능숙했다.
“잘하시네요.”
시아나의 칭찬에 아리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래 봬도 궁중에서 태어나 자랐으니까.”
정식으로 배우진 못했어도 이따금 열리는 황실 행사에서 본 것이 있다.
레이디의 우아한 몸짓이 대충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됐다.
아리스는 며칠 만에 티 파티에서의 예법을 익혔다.
빈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아리스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훌륭한 차를 대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정말 잘했어요, 공주님. 티 파티에 입장하는 것부터 마무리까지 완벽해요. 아무리 본 것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배우다니. 공주님은 천재 아닐까요? 아니, 천재가 분명해. 예법천재, 아리스 공주님!”
시아나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아리스가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재능이 있는지 몰랐네. 해 보니까 쉬워. 너~무 쉬워.”
콧대를 올리며 대답하는 아리스의 모습에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는 평범한 귀족과는 다르다.
적당한 겸손이 겸양인 귀족과 달리, 공주는 오만하리만큼 자신만만해야 한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시아나는 한껏 아리스를 추켜세웠다.
덕분에 예법에 자신 없어 하던 아리스는 한껏 자신감이 차 있었다.
‘공주님은 준비가 끝났어. 문제는 이제 다른 데 있지.’
황실의 티 파티는 단순히 예법만 훌륭하다고 해서 되는 곳이 아니었다. 차림새도 중요했다.
하지만 아리스에게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었다.
드레스 룸에는 몇 벌의 드레스가 전부.
그나마 있는 것들도 낡은 데다 사이즈도 맞지 않았다.
‘어쩐다.’
시아나는 고민했다.
드레스는 어마어마한 고가였다.
시아나에게도, 아리스에게도 드레스를 살 돈이 없었다.
순간 라시드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태자 전하께 도와 달라고 하면…….’
그에게 어린 공주의 드레스 한 벌쯤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 공주님은 그런 식으로 부탁하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겠지.’
라시드는 요즘도 종종 달콤한 음식을 하나씩 들고 루비궁을 찾아오곤 했다.
과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 새하얀 설탕이 뿌려진 도넛, 향기가 진한 초콜릿.
죄다 아리스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비싸서 쉽게 먹지 못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아리스는 마지못한 척 그것들을 받았다.
시아나가 라시드에게 차를 따라 주는 것으로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라시드에게 받는 것이 케이크 이상이 되면 아리스는 빚을 졌다는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시아나는 드레스 한 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아. 이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
* * *
시아나가 찾아간 곳은 황족의 의복을 제작하는 의상실이었다.
루비궁에서 왔다는 말에 의상실의 시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참새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얘, 괜한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 이곳은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 같은 황실의 고귀한 분들의 옷을 제작하는 곳이야.”
루비궁에 있는 버려진 공주 따위에게는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시아나도 물론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무리한 요청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쓰지 않는 천 조각이라도 받을 수 없을까요? 아리스 공주님께 예쁜 드레스를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
시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녀도 아리스 공주를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가장 어린 공주. 그러나 모두에게 버려진 불행한 소녀.
그런 공주를 위해 값비싼 드레스를 만들어 줄 순 없지만, 남은 천 쪼가리를 챙겨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시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시녀는 한쪽 구석에 모아 놓았던 천을 시아나에게 주었다.
“옷을 만들고 남은 것이라 모양은 제멋대로에 크기도 작아. 쓸 만할지 모르겠다.”
“충분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아나는 천 꾸러미를 안고 환하게 웃었다.
조그만 체구에 눈이 동그란 시녀가 웃는 모습을 보니 시녀는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웠다.
‘귀여운 애네.’
시녀는 손을 흔들었다.
“가 봐.”
허리를 숙여 인사한 시아나는 토끼처럼 총총거리며 루비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받아 온 천 조각들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시녀의 말대로 조각조각 난 천 쪼가리들은 얼핏 쓸모없어 보였다.
‘하지만 황족의 옷을 만든 옷이니 만큼 하나같이 최고급 재질이야. 패턴도 세련됐고.’
제대로 된 드레스 한 벌을 만드는 건 무리겠지만 낡은 드레스를 수선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다행히 시아나의 바느질 솜씨는 일류였다.
어렸을 때부터 다져진 자수 실력 덕분이었다.
“흐으음~.”
시아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 * *
티 파티 당일, 아리스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아리스는 시아나의 도움을 받아 깨끗이 몸도 씻고 머리카락도 수십 번 빗었다.
“잠시만요, 공주님. 드레스를 가지고 올게요.”
“응.”
아리스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기다렸다.
아리스에게는 드레스 입는 시간이 전혀 기대되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리스에게 있는 드레스는 하나같이 낡고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번에도 이베트가 내 꼴을 보고 비웃겠지.’
촌스럽고 품이 맞지 않는 드레스는 늘 공격당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리스는 시아나가 들고 온 드레스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자기 드레스가 맞는데 예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장식 없이 밋밋했던 가슴 부분과 치맛자락에는 앙증맞은 리본이 달려 있었고, 길이가 짧아 손목이 튀어나왔던 손목에는 살랑대는 소맷자락이 달려 있었다. 닳았던 치마 끝 부분에는 화사한 레이스가 붙어 있었다.
멍하니 드레스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수선을 좀 해 봤어요. 시간이 좀 부족해서 아슬아슬하게 완성을 했네요.”
시아나의 눈가는 거뭇해져 있었다. 며칠간 이어진 밤샘 작업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아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만드느라 요즘 계속 그런 얼굴이었던 거야?”
시아나는 웃음으로 대답하며 말했다.
“어서 입어 보세요.”
아리스는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는 처음 입어 봐.”
지금까지 아리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쓸모없어진 드레스만 지급받았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었던 드레스는 늘 아리스의 몸보다 크거나 작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드레스를 입는 것을 싫어했다. 입어 보았자 불편하고 볼품없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시아나가 수선해 준 드레스는 이전에 입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입은 느낌이 좋아. 드레스도 예쁘고. 너는 어떤 것 같아?”
아리스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 미모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늘 펑퍼짐한 실내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고 다녔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리스의 미모를 여실히 살려 주었다.
시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짝, 하고 손을 마주쳤다.
“정말 예뻐요, 공주님. 신화 속에 나오는 장미꽃의 요정 같아요.”
“헤헤, 정말?”
“네!”
시아나의 칭찬에 아리스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제가 봐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예뻤다.
아리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를 닮아서 내가 좀 예쁘지.”
아리스의 엄마, 로즈마리는 아리스가 태어난 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리스는 로즈마리의 얼굴을 알았다.
루비궁에 남아 있는 초상화 덕분이었다.
초상화 속의 로즈마리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황제에게서 받은 보라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아리스는 로즈마리를 꼭 빼닮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제 얼굴을 좋아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시아나는 빙긋이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시아나는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 티 파티에서 누구보다 잘할 수 있어요.”
“…….”
“오로지 매력만으로 황제 폐하의 마음을 얻으셨던 아름답고 당당한 로즈마리 님의 딸이니까요.”
아리스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리스가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엄마에 대한 말은 ‘미천한 신분으로 황제를 꾀어 낸 마녀 같은 여자’ 같은 것들이 다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시아나의 말 한마디에 아리스는 속에 있던 불안감이 사라지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아리스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응. 이베트 따위 박살 내 버리겠어!”
“훌륭한 마음가짐이에요.”
시아나가 웃었다.
* * *
잘 꾸며진 테이블에는 황녀 이베트가 앉아 있었다.
자매와 함께하는 소박한 티 파티라고하기엔 과할 정도로 차려입은 이베트는 아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베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그 계집애, 오늘도 거지 같은 꼴로 나타나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지적하며 짓밟을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연회장에 들어선 아리스를 보는 순간 이베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잡일을 하는 시녀보다도 볼품없던 아리스가 화려한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핼쑥했던 얼굴은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퍼석퍼석했던 붉은색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덫에 걸린 동물처럼 흉흉하기만 했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누구라도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베트에게 다가간 아리스는 드레스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파티에 초대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이베트 언니.”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당차고 흠잡을 데 없는 인사였다.
이베트는 당황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얼음처럼 굳어 있던 이베트를 향해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언니?”
네년이 예뻐진 꼴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베트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 말에 아리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반갑기는 개뿔.
아리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다.
시아나의 가르침 때문이다.
‘웃음을 잃지 마세요, 공주님. 궁중에서는 웃지 않는 자가 패배한 것이랍니다.’
아리스는 불쾌감을 숨기고 더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언니가 정말 보고 싶었답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이 또한 시아나에게 배운 것이다.
웃으면서 상대방이 제일 듣기 싫은 말하기.
효과가 있었다.
이베트가 일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으니까.
이베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서 자리에 앉으렴. 차 한잔 마시며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네.”
아리스는 다소곳이 이베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아리스의 뒤에 시아나가 섰다.
황족은 시종을 한 명 이상 데리고 다니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한눈에도 선연한 적의가 느껴지는 이베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만만치 않아 보이네.’
아리스의 곁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혼자인 것과 둘인 것은 다른 법이니까.
‘내가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 아리스 공주님께는 큰 힘이 될 거야.’
시아나의 예상대로였다.
아리스는 예전에는 괴물처럼 느껴졌던 이베트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리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앉았다.
화사한 얼굴에는 오늘 티 파티를 훌륭하게 마칠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 * *
또르르르.
아리스의 찻잔 위에 뜨거운 차가 채워졌다.
찻잔을 든 아리스는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빙긋이 웃었다.
“차 맛이 정말 훌륭해요, 언니.”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이베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혼란에 가득 차 있었다.
아리스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외모까지라면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차 예법까지도 완벽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베트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아리스, 너 전에는 차 마시는 모습이 노예보다 형편없었잖아. 그런 애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제 시녀에게 배웠답니다. 어려운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 엄청나게 쉽더라고요.”
파지직.
분명 웃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리스를 향해 이베트가 말했다.
“고작 시녀에게 예법 좀 배웠다고 으스대는 꼴이 참 너답다. 얼마나 실력을 쌓았는지 궁금하네. 나한테 차 한잔 따라 보렴.”
갑작스러운 요청에 아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차를 따라 주는 것은 얌전히 차를 마시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순서가 정해져 있어 조금만 실수를 해도 흠을 잡기 쉬웠다.
‘어디 한번 해 봐.’
이베트의 얼굴이 대번에 의기양양 해졌다.
아리스는 뒤에 서 있는 시아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아나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공주님은 잘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리스는 차 시중을 들던 시녀에게서 찻주전자를 받아 차를 타기 시작했다.
동작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으나 순서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베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왜 저렇게 잘해? 왜 그딴 식으로 차를 따르냐고 꼬투리 잡을 게 없잖아!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시아나는 이베트의 작은 머릿속에 있는 악독한 생각을 다 꿰뚫고 있었다.
시아나는 틈만 나면 저를 괴롭히려고 혈안이었던 계모의 밑에서 십수 년을 자랐다.
그녀가 택한 방법은 대부분 저런 식이었다.
무언가를 해 보라고 한 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것을 빌미로 공격하는 것.
그래서 시아나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아리스에게 차 따르는 법까지 완벽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시아나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계모는 어른이었지만 이베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녀보다 훨씬 유치한.
아리스가 완성된 차를 따르는 순간이었다. 이베트가 찻잔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찻잔에 들어갔어야 할 뜨거운 찻물이 빈 테이블 위로 쏟아지며 이베트의 손등에 튀었다.
“아얏!”
뜨거운 물이 닿은 이베트의 하얀 손등이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베트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아리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리스는 당황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언니가 갑자기 찻잔을 치워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남의 탓을 하다니!”
그간의 경험으로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아리스가 눈을 감았다.
‘맞는다……!’
하지만 손찌검이 날아오지 않았다.
아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아리스의 앞에 서서 이베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시아나가 이베트와 눈을 마주치며 향해 말했다.
“멈추십시오, 황녀 저하.”
“뭐?”
이베트가 기가 찬 얼굴로 자신을 막은 시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빛에 서슬 퍼런 감정이 일렁였다.
“감히 시녀 따위가 나를 막은 거야?”
어린 공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이었지만 시아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이베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황녀 저하. 하지만 황녀 저하께서 황실의 규율을 어기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황실의 규율?”
“네. 그 누구라도 황제 폐하의 핏줄께 사사로운 감정으로 손을 대실 수는 없습니다.”
“……!”
시아나의 말에 이베트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의 말대로였다.
제국 황실에서 황제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그런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없이 고귀한 존재.
황제를 제외한 자는 설령 같은 황족이라 해도 그들을 함부로 벌할 수 없었다.
벌을 줘야 한다면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을 지적당한 이베트가 이를 악물었다.
‘시녀 따위가 해묵은 황실의 규율 따위를 입에 담다니.’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규율일 뿐.
실상 황제는 수많은 자식들에게 하나하나 관심을 가질 만큼 애정이 없었고, 황손들은 저마다 가진 권력의 크기대로 대우받았다.
그래서 이베트는 과거에 몇 번 아리스를 때린 적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황제의 눈 밖에 난 아리스는 황족 중 누군가 키우는 애완동물보다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건드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규율을 운운하면 상황이 달라져.’
아리스가 제게 손을 댄 것을 문제 삼아 여기저기 떠벌리기라도 하면, 혹시나 누군가 그것을 이용하여 이베트를 공격할 수도 있다.
이베트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약한 자는 짓밟아도 돼. 하지만 그건 내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때야.’
그래서 이베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에 힘을 뺐다.
그것을 눈치챈 시아나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이베트의 손목에 시아나가 잡았던 손자국이 빨갛게 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이베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리 친모의 신분이 비천해도 공주는 공주.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함부로 혼낼 수는 없지. 하지만…….”
이베트의 새까만 눈동자가 향한 곳은 시아나였다.
“일개 시녀 따위가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댄 짓은 따끔히 혼낼 수 있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시아나의 대답에 아리스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야! 시아나는 잘못한 것 없어. 다, 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찻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이딴 웃기지도 않은 티 파티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시아나는 눈물이 고인 아리스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공주님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타이르듯 엄한 목소리였다. 간절한 부탁 같기도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시아나의 마음을 깨달은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한 시아나가 이베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저하, 벌을 내려 주십시오.”
“흥, 말 안 해도 그럴 셈이거든?”
이베트의 손에는 어느덧 가죽으로 만든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어느새 이베트의 시녀들이 시아나 앞에 단상을 가져왔다.
시아나는 어떤 불만도 내비치지 않고 단상에 올라가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하얗고 가는 다리가 드러났다.
이베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베트가 회초리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아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스를 향해 눈으로 말했다.
‘눈을 감으세요, 공주님.’
마법에 걸리듯 아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
동시에 철썩,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철썩.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철썩.
세 번째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베트의 손을 붙잡고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아나가 그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 보았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아니까.
아리스가 할 수 있는 건, 울음소리를 참으며 주먹을 꾹 쥐는 것뿐이었다.
철썩.
잔혹한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울려 퍼졌다.
* * *
이베트의 앞에는 두 다리가 상처투성이가 된 시아나가 서 있었다.
이베트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리 한번 내지 않다니. 맹한 얼굴과 달리 독한 구석이 있구나.”
칭찬 아닌 칭찬에 시아나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 사람 덕분이지.’
시아나는 어린 시절 계모에게 수없이 혼이 났다.
시아나가 한 번이라도 소리를 내면, 그녀는 괴롭힘의 강도를 더 높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소리 내지 않고 참는 법을 익혔다.
고통을 숨기고 정신을 가다듬는 방법도 알았다.
치마를 내린 시아나는 이베트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저를 교육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저하.”
“…….”
조금의 원망도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은 공손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점이 거슬려서 한 번 더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열심히 때려서 그런지 배고파.’
이베트는 배고픈 건 못 참았다.
“다음에도 또 이런 일 생긴다면 그때는 회초리질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
이베트의 목소리가 향한 곳은 시아나가 아니었다.
저쪽에서 바들바들 떨며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리스였다.
매를 맞은 시녀보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지가 맞았을 때보다 더 처울고 있네.’
그제야 이베트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어렸다.
이베트가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 봐.”
시아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아팠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아픔을 꾹 참고 걸어가 아리스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아리스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시아나는 그런 아리스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끝났어요, 공주님.”
“…….”
아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새까만 시야가 밝아지고 시아나가 보였다.
시아나는 평소처럼 빙긋 웃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아리스를 괴롭혔던 회초리 소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시아나의 긴 치맛자락 아래에는 끔찍한 상처가 나 있다는 걸. 사실은 눈물이 새어 나올 만큼 아프리라는 걸.
괜찮아?
—라고 묻기도 전에 시아나가 먼저 말했다.
“정말 잘 참으셨어요, 공주님. 이제 우리 돌아가요.”
“……!”
다정한 목소리에 아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새어 나왔다.
아리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이 끔찍한 곳을 빠져나가서 시아나의 다리를 치료해야 해.’
아리스는 시아나를 부축하듯 손을 잡고 궁을 나갔다.
두 사람의 등 뒤로 깔깔깔, 하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베트가 비아냥대듯 말했다.
“아리스, 제발 나대지 말고 조용히 살렴. 안 그러면 또 너를 티 파티에 초대할 테니까.”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 * *
시아나와 아리스는 루비궁에 도착했다.
괜찮다는 시아나를 아리스가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앉아 있으라니까!”
“하지만 공주님이 앞에 계신데 제가 어떻게…….”
“나 때문에 다쳤잖아!”
“…….”
시아나는 다시 한번 아니라고 말해 주려 했다. 하지만 아리스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에 젖은 아리스의 얼굴이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약 받아 올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명령이야.”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루비궁을 나가 버렸다.
혼자가 된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새 왕비에게 이보다 심하게 맞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고통은 아무리 겪어도 언제나 끔찍한 법이다.
다리가 칼로 베인 것처럼 시렸다.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내가 막지 않았더라면 이 고통은 아리스 공주님께 갔겠지.”
이베트의 손은 아리스의 작은 얼굴을 향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철없는 동생을 가르치는 것뿐이라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겠지.
새 왕비가 시아나에게 그러했듯 말이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평소에 아리스는 딱 그 나이답게 솔직하고 쾌활했다. 매일 유치한 장난을 치며 깔깔거렸다.
그래서 시아나는 생각했다.
‘황족 누구도 버림받은 공주님에게 관심이 없어. 그러니 한동안은 이대로도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안일한 판단이었다.
황궁은 힘없는 어린 공주가 평화롭게 지낼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아리스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적어도 이런 유치한 장난에 휘둘리지 않을 힘이.
하지만 어떻게?
누가 공주님을 도와주지?
그때, 시아나의 앞에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라시드였다.
시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당신이 여기에’라는 말보다, 라시드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괜찮아?”
“…….”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시아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은 아까 어딘가 잘못 맞아서 기절해 버린 거 아닐까. 그래서 이런 황당한 꿈을 꾸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라시드의 옆에 아리스의 얼굴이 보였으니까.
아리스가 상황을 설명했다.
“황실 의원을 부르려다가 오라버니를 찾아갔어. 어차피 내가 불러 보았자 의원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시아나는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라시드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아리스가 주저 없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고작 시녀 한 명의 상처 때문에 황태자가 직접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라시드가 다독이듯 말했다.
“나는 일생의 반을 전쟁터에서 보냈어. 웬만한 의사들보다 솜씨가 좋지. 그러니 걱정 말고 상처를 보여 다오.”
라시드에게 상처를 보여 주려면 치마를 걷어 다리를 보여 줘야 했다.
망측한 일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시아나는 이내 생각을 바꾼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치마를 살짝 올렸다.
“…….”
“…….”
아리스와 라시드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깡마른 종아리에 새빨간 상처 자국이 무참히 나 있었기 때문이다.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베트.”
라시드는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감히.”
새파란 불꽃같은 서늘한 분노가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시아나가 예상한 대로였다.
시아나는 자신을 향한 라시드의 관심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제가 데려온 패전국 공주에 대한 호기심이든, 제 동생의 곁에 있는 시녀에게 주는 호의이든, 아니면 그냥 미친 황태자의 변덕이든 상관없었다.
그의 사나운 분노가 필요할 뿐이다.
라시드가 이 일을 가지고 이베트를 공격하면 분명 소문이 날 것이다.
아리스 공주의 시녀를 건드렸더니 라시드 황태자 전하께서 화를 내셨다.
그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아리스 공주의 뒤에 라시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쉽게 아리스를 건들 수 없다.
비록 잠깐일지언정 라시드의 비호 아래 아리스는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무리 어리다 해도 아리스는 황제의 자식이다.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다.
마음을 연 시녀에게 제가 당한 부조리함과 폭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만큼.
자신을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둔 오라버니에게 원망 한 톨, 부탁 하나 하지 않을 만큼.
‘그런 분이 과연 그런 것을 원할까?’
시아나는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울어 빨갛게 물든 눈에 어린 감정은 시아나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녀 한 명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함이었다.
그 순간 시아나는 확신했다.
‘황태자 전하의 힘을 빌린 어설픈 복수 따위, 공주님은 바라지 않아.’
공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을 짓밟고 싶어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시아나는 제 가슴속에서 들끓던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시아나는 약병을 가지고 온 라시드에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멈춰 주세요.”
“……뭐?”
눈썹을 찡그린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리스 공주님께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
라시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보던 아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 난 다른 사람 상처 같은 거 치료 해 본 적 없어.”
시아나가 대답했다.
“제가 알려 드릴게요.”
“……잘 못할 거야.”
“괜찮아요.”
“…….”
공주님이 직접 저를 치료해 주고 싶으시잖아요.
시아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리스는 멈추었던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리스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리스가 라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아나는 내가 치료할게. 기껏 여기까지 와 줬는데 미안.”
“…….”
순식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버린 라시드였다.
그러나 라시드는 화내지 않았다.
하,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눈썹을 내리며 웃을 뿐이었다.
“시아나가 그러길 바라니 어쩔 수 없지.”
“오늘 일에 대한 대가는…….”
“됐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
그러더니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가지고 온 약상자를 건넸다.
“필요한 것 같으니 이건 주마. 나중에 시아나의 차 한 잔으로 값을 치뤄.”
“응.”
아리스의 대답을 들은 라시드는 고개를 돌렸다.
옷을 추스른 시아나가 라시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리스를 진심으로 모시고 있구나.’
앞으로 시아나는 어린 주인을 변화시키겠지.
라시드가 기대했던 대로.
하지만 이상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데도 왜 전혀 기분이 좋지 않지?’
라시드는 이내 그 이유를 알았다.
시아나가 자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치료해 주고 싶어.’
상처 입은 네게 약을 발라 주고, 누가 그랬냐며 어리광을 들어 주고 싶어.
하지만 안 되겠지.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니까.
처음으로 시아나를 아리스에게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제 와서 무슨.’
라시드는 제 마음을 부정하며 시아나를 향해 웃었다.
“아리스가 엉망으로 치료하는 것 같으면 언제든 찾아오렴.”
“네.”
시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시드는 루비궁을 나왔다.
어느새 그의 곁에 따라붙은 호위 기사 솔이 약 올리듯 말했다.
“시아나 님이 다쳤다고 해서 쪼르르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시게 됐으니 어쩝니까.”
라시드가 빙그르 웃으며 말했다.
“주인이 개고생을 하게 되어 기쁜 모양이야. 괘씸한 호위 기사 같으니.”
그제야 솔은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시드는 평소엔 물처럼 여유로웠다. 고작 이런 말 가지고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니 정말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솔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전하. 방금 한 말은 농이었습니다. 전하의 상심이 얼마나 크실지 헤아리지 못하여 죄송…….”
라시드가 솔의 말을 자르며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밤은 잘 생각 하지 말거라.”
밤새 벌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솔은 히익 하고 창백한 얼굴이 됐다.
‘싫어!”
라시드가 주는 벌은 최고의 기사조차 견디지 못할 만큼 끔찍했다.
솔은 두 팔로 라시드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자존심 따위 잊은 모양새였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구슬픈 비명 소리에도 라시드의 눈빛은 풀어지지 않았다.
* * *
“아얏.”
시아나의 신음에 아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아파? 나 뭔가 잘못한 거야?”
“약이 상처에 닿아 따끔한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아리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시아나의 다리 위로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작은 손가락이 꼬물거리는 게 느껴져 시아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공주님이 조심스럽게 저를 치료해 주신다니 감격스러워서요.”
“……그따위 걸로 감격하지 마. 애초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아리스의 목소리에는 짙은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시아나가 물었다.
“공주님, 강해지고 싶으세요?”
“응.”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빠른 대답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요?”
“응.”
“어린 공주님이 가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길일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치료를 마친 아리스가 어느새 시아나의 앞에 있었다.
아리스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알려 줘. 뭐든 좋으니까.”
“…….”
보라색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어린아이의 변덕스러운 고집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없이 진지하고 치열했다.
시아나가 말했다.
“공주님이 힘이 없는 건 그저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에요. 실제로 공주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이베트 공주님은 힘이 있으니까요.”
갑자기 튀어나온 이베트란 이름에 아리스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못된 년. 가만 안 둘 거야.”
한마디 말을 중얼거린 아리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그럼 여기서 문제. 아리스 공주님은 없고 이베트 공주님은 있는 것이 뭘까요?”
아리스는 고민했다.
외모?
솔직히 외모는 아리스가 백배는 낫다. 오만한 게 아니라 사실이다.
예법?
예법은 이베트가 더 뛰어나지만 크게 특출난 것도 아니다.
아리스는 바로 답을 찾았다.
“그 계집애는 엄마가 있고 나는 없어.”
“맞아요. 이베트 공주님은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어른이 있지만, 아리스 공주님은 그런 존재가 없죠. 이 차이가 두 공주님 사이에 힘의 차이를 만드는 거예요.”
“…….”
“즉, 아리스 공주님이 강해지고 싶다면, 힘을 가진 어른을 공주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것이 어린 공주가 힘을 가지는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렇구나, 하고 박수를 치는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내 편이 되어 주겠어.”
“라시드…….”
“싫어.”
비록 아리스가 황위 서열에서 가장 먼 존재라지만 그녀도 황손이었다.
그녀에게 라시드는 경쟁자일 뿐, 절대 제 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아나는 그 감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라시드를 제외하면 이 거대한 황궁에서 버림받은 어린 공주에게 힘을 나눠 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니, 딱 한 명 있다.
“바로 -----예요.”
“……!”
“그분이라면 공주님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있어요.”
시아나가 말한 이름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 * *
드넓은 황궁의 깊숙한 곳에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궁이 하나 있었다.
적막하고 고요한 궁의 주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 현 황제의 친모인 골드리아 황태후였다.
그녀는 수십 년 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권력을 내려놓고 작은 궁에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황궁에서 잊힌 사람이 되었다.
황태후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이른 새벽 눈을 뜬 황태후는 외모를 단장하고 홀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 후로는 궁을 거닐었다.
황태후가 허락한 소수의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궁은 한없이 조용했다.
산책을 마친 황태후는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보통은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전용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하곤 했다.
한 달 전과, 일주일 전과, 삼 일 전과 똑같은 일상이었다.
측근 시녀가 종이봉투 한 장을 가지고 오기 전까지는.
“누가 이 편지를 보냈다고?”
시녀가 황태후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일곱 번째 황녀이신 아리스 공주님이십니다.”
“…….”
황태후가 황궁의 일에 관여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전이다.
그 후 태어난 손주들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현 황태자인 라시드의 이름도 겨우 알 뿐이니, 막내 황녀인 아리스 따위 알 리가 없었다.
황태후는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려.”
“네.”
시녀는 주저 없이 주인의 말을 따랐다.
아리스가 아니라 누가 쓴 편지라도 황태후는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일주일 후, 편지가 또 도착했다.
“버려.”
일주일 후, 편지가 또 도착했다.
“버려.”
이후에도 황태후는 편지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버렸다.
그런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어느 날, 황태후가 말했다.
“어디 한번 줘 보거라.”
버려도, 버려도 계속 오는 편지에 감동 같은 걸 한 건 아니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무료했던 황태후의 작은 변덕일 뿐.
황태후는 시녀에게서 받은 편지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의 편지지를 꺼내자 복숭아 향이 훅 코끝을 간질였다.
달콤한 향기에 황태후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황족이나 귀족 여인들은 편지를 쓸 때 종이에 자신을 상징하는 향기를 입히곤 한다.
보통은 고급스러운 꽃향기가 일반적이었다.
‘복숭아 향 같은 건 어린아이나 쓰는 것이잖아.’
유치한 마음과 동시에 조금 귀엽기도 했다.
황태후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쓴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어설픈 글씨체. 하지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할마마마.
아리스예요.
갑자기 제가 편지를 써서 놀라셨죠?
실은 제가 요즘 글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글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게 가장 빨리 글을 익히는 방법이라고 하셨어요.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고민을 하다가 할마마마께 편지를 쓰기로 했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제 편지가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 주세요.
할마마마가 건강해지시길 달님께 기도하며,
손녀 아리스 올림>
별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태후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손녀지만 이토록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니 으쓱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 후로도 계속 아리스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황태후는 이제 아리스의 편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아리스의 편지를 읽곤 했다.
편지의 내용은 늘 소소했다.
오늘 햇볕이 무척 따사롭다느니,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먹어 행복하다느니, 아기 새를 키우게 되었다느니, 그런 이야기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할마마마, 제 글씨체가 어떤가요.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많이 서툴지요?
제가 글씨 쓰는 연습하는 모습을 본 시녀가 말하길, 할마마마께서는 황궁에서 제일 멋진 글씨체를 가지고 계시대요.
문득 할마마마의 글씨체가 어떤지 궁금해졌어요.
레이디의 드레스에 달린 장미꽃처럼 화려한가요? 아니면 멋진 기사님의 검처럼 올곧은가요? 그것도 아니면 딸기를 얹은 생크림처럼 부드러울까요?
할마마마의 글씨체를 상상해 보며 즐겁게 편지를 써 봅니다. >
황태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씨라…….’
아리스가 편지에 쓴 말처럼 황태후는 훌륭한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명문가의 귀족 영애였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으며, 황태후까지 이른 여인이었으니 당연했다.
‘어린 나이부터 가정교사에게 얇은 회초리로 손가락을 맞아 가면서 글씨 쓰는 것을 익혔지.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최근 몇 년 동안 글씨 한 자 쓸 일이 없었는데.’
황태후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칩거를 시작했을 무렵엔 그녀의 걱정과 안위를 묻는 편지와 문안을 오고 싶다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무시하고 몇 년이 흐르자 황태후는 아예 잊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글씨를 쓸 일도 없었다.
잠시 편지지를 바라보던 황태후가 말했다.
“펜과 종이를 가져오거라.”
오랜 시간 황태후를 모셨던 시녀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잽싸게 그녀가 말한 것을 준비했다.
황태후는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오랜만에 쥐는 펜촉의 감각이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사삭, 사삭.
황태후는 종이 위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듯 유려한 손동작이었다.
글씨를 쓰는 건, 아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황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군.’
아직 찌들지 않았던,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편지 한 장이 금세 채워졌다.
“이것을 아리스에게 보내거라.”
“네.”
시녀는 황태후가 쓴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 사라졌다.
황태후는 생각했다.
‘어린 손녀는 내가 쓴 편지를 보고 어떤 얼굴을 할까.’
무척 놀라겠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손녀의 반응을 상상하자 가슴이 조금 뛰었다.
다음 날, 아리스의 답장이 도착했다.
황태후는 평소보다 조급하게 편지봉투를 열었다.
<할마마마, 할마마마의 편지를 받고 정말 너무나 기뻤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을 정도랍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할마마마의 글씨체는 더 멋지고 아름다워요. 매일매일 보면서 따라 연습하고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할마마마께 받은 소중한 편지가 상하고 말겠죠? 그건 싫어요.
그래서 편지지는 접어서 소중한 보물을 넣어 두는 유리 상자 속에 넣었답니다.
평생 간직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할마마마.>
황태후는 길지 않은 편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잠시 후 황태후가 중얼거렸다.
“아이 따위 정말이지 질색인데…… 이 아이는 좀 다르네.”
하는 말들이 아이답게 순진하면서도 공주답게 우아한 구석이 있었다.
황태후는 점점 아리스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 * *
황태후의 시녀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보내신 편지이옵니다.”
아리스는 상기된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가슴에 품은 아리스가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편지를 전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시녀님.”
시녀는 저도 모르게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명령받은 일을 행한 것뿐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황태후의 시녀는 고개를 꾸벅이며 루비궁을 나섰다.
아리스는 아쉬운 얼굴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아리스의 얼굴이 바뀌었다.
아리스가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우웩, 귀여운 척하는 거 진짜 못해먹겠어. 아침에 먹은 고기가 올라올 것 같다니까.”
곁에 있던 시아나가 웃었다.
“잘하시던 걸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공주님 같았어요.”
시아나의 칭찬에 아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정말요.”
시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스가 고양이처럼 갸릉거리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황태후의 편지를 받은 것이 어느덧 세 번째.
아리스가 다섯 번 편지를 보내면 한 번 정도 답장이 온다.
편지를 제대로 읽는지 안 읽는지도 몰랐던 처음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답장이라고 해 봐야 별 내용 없지만.’
황태후의 글씨체는 훌륭했지만 글 쓰는 재주는 영 별로였다.
짧은 편지에 있는 건 황태후, 스스로에 대한 자랑뿐이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 레이디로 통했는지, 요즘 마시는 차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인지, 그런 것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편지를 읽어 내리던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아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왁! 할마마마가 날 궁으로 초대하셨어!”
그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다.
황태후가 칩거한 이후, 제 궁에 누군가를 초대한 것은 손에 꼽힐 만큼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얼굴도 모르는 손녀를 초대하다니.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이 일을 주도한 시아나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리스는 시아나가 황태후의 이름을 꺼냈을 때를 떠올렸다.
* * *
“바로 황태후 마마예요. 그분이라면 공주님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있어요.”
시아나의 말에 아리스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할마마마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궁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어. 황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눈썹 하나 까닥 안 한다고. 그런 분이 나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손녀의 편이 되어 줄 리 없잖아!”
시아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
“공주님께서는 황태후 마마의 슬하에 현 황제 폐하 말고 자녀가 한 분 더 있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어여쁜 공주님이요.”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렇겠죠. 왜냐면 그 공주님을 기억하는 분은 많지 않거든요.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죽어 버렸으니까요.”
“……!”
사고사도, 병사도 아니었다.
사인은 독살.
“원래는 지금의 황제 폐하께 보냈던 독이라고 해요. 그 독을 어린 공주님이 대신 먹고 목숨을 잃으신 거죠.”
그러나 황태후는 딸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감히 제 아들을 죽이려고 한 자들, 그러나 멍청하게 실패해 버린 이들을 처단할 수 있는 기회.
황태후는 딸의 죽음을 무기 삼아 적들을 몰아쳤다.
수많은 이들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죽었다.
그렇게 황태후는 어린 아들의 직위를 굳건히 다지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기반 삼아 아들은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었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황태후 마마는 그렇게 하나뿐인 딸의 죽음을 철저히 이용만 하셨어요. 이후로 한 번도 딸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황궁 사람들은 모두 황태후 마마께서 딸에 대한 조금의 모정도 없으신 냉정한 분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시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차가운 피를 가지고 있어도, 어미는 어미다.
어미는 제 배로 낳은 자식을 절대 잊지 못한다.
분명 지독히 그리울 것이다.
그토록 정성을 쏟아부었던 아들과 멀어지고, 늙고 병들어 버린 지금이라면 더더욱.
시아나가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니 황태후 마마는 분명 공주님께 관심을 보일 거예요. 이제 거의 잊힌 오래전 이야기지만 황태후 마마의 가슴속엔 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평소의 순한 모습이 사라진 시아나의 얼굴에는 묘한 박력이 넘쳤다.
‘이럴 때는 꼭 다른 사람 같아.’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그 뒤로 아리스는 얌전히 시아나의 말을 따랐다.
가장 먼저 황태후에게 편지를 썼다.
최근 시아나에게 글을 배워 쓰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형편없는 작문 실력이 문제였다.
아리스가 쓴 편지를 보고 시아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이건 황태후 마마께 싸우자고 보내는 결투문이죠?”
“……아닌데.”
결국 아무리 써도 제대로 쓸 수 없어 시아나의 도움을 받았다.
시아나가 쓴 편지는 끔찍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한 아리스에게 시아나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편지 한 장으로 황태후 마마의 호감을 얻어야 하니 이 정도는 써야 해요.”
남은 시간에는 갖가지 것들을 배웠다.
칼같이 완벽한 궁중 예법, 다소곳이 말하는 법, 시를 읊는 법, 수줍으면서도 우아하게 웃는 법.
모든 것이 이날을 위해서였다.
살랑대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가 황태후의 궁에 들어섰다.
* * *
시녀의 안내를 받아 아리스는 정원으로 향했다.
잘 가꾸어진 고요한 정원에는 백발의 여인이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아리스는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할마마마께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황녀 아리스입니다.”
“……고개를 들거라.”
아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태후와 눈을 마주친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워.’
오늘 처음 본 할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 매서운 눈매와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겁먹은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어.’
아리스는 시아나의 말을 떠올리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두 눈을 곱게 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천사 같은 미소였다.
무표정한 황태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할 만큼.
‘시녀에게 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곱구나.’
게다가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때문일까.
오래전 잃은 딸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생각을.’
황태후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쌀쌀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오거라.”
차가운 말투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아리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마마마. 너무 기뻐 며칠이나 잠을 설쳤답니다.”
—라며 헤실헤실 웃는 얼굴은 너무나 무해해 보였다.
하지만 황태후의 경계심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황태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거라. 차 한잔이나 하자꾸나.”
“네.”
아리스는 수줍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레이스 달린 치맛자락이 살랑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모은 아리스가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할마마마, 실은 할마마마께 드리기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답니다. 받아 주시겠어요?”
선물이라는 말에 황태후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엇이냐?”
아리스가 꺼낸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병 안에는 바짝 말린 아카시아 꽃잎이 들어 있었다.
“아카시아 꽃으로 만든 찻잎이어요. 할마마마께서 차를 좋아하신다고 하여 만들어 보았답니다.”
“…….”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황태후는 확실히 차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차는 이름난 장인이 만든 최상급 차였다.
어린 소녀가 만든 찻잎은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품질도 인증되지 않은 찻잎 따위를 내게 주려는 거냐며 호통을 쳤을 텐데.’
리본이 묶인 차병을 두 손에 들고 눈을 반짝이는 어린 공주를 보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사라졌다.
황태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독특한 선물을 가지고 왔구나. 그럼 그것으로 차 한잔 타 보거라.”
아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모두 시아나가 예상했던 대로였기 때문이다.
아리스는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시아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아나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는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리스는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던 긴장이 풀렸다.
아리스는 빙긋이 웃으며 찻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예, 부족한 실력이지만 차를 한잔 따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리스는 능숙하게 차를 따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훈련했던 시아나나 오랜 시간 황궁에서 생활했던 황태후의 비하면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설픔마저 사랑스러워 보일 때지. 공주님의 나이는.’
시아나는 황태후가 아리스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확신하고 있었다.
시아나의 예상대로 아리스를 보는 황태후의 눈빛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또르르르…….
뜨거운 물이 찻잔에 가득 차자 방 안에 진한 아카시아 향이 가득 찼다.
잔에는 아리스가 요령 좋게 담은 아카시아 꽃송이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황태후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럭저럭 마실 만하구나.”
칭찬에 인색한 그녀로서는 후한 평가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리스는 실망하는 대신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할마마마께서 제가 만든 차를 마셔 주시니 정말 기뻐요.”
“…….”
황태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건네진 않았다.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는 숨 막힐 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리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원에 있는 꽃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아름다워요. 꼭 할마마마처럼요.”
사랑스러운 소녀의 꿀 같은 말은 메마른 노인에게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왔다.
황태후는 저도 모르게 아리스의 말에 빠져들었다.
황태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다.
황태후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까지 오래 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는데…….’
황태후에게는 확고한 선이 있었다. 그녀는 그 선 안에 누구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천사 같은 모습의 어린 손녀라 해도.
황태후의 얼굴이 다시 얼음처럼 서늘해졌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이제 가 보거라.”
그 순간 조잘거리던 아리스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작은 어깨가 쳐지며 울상을 지었다.
꼭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
그러나 아리스는 떼를 쓰거나 울먹이지는 않았다.
눈썹을 내리며 애써 웃을 뿐이었다.
“제가 할마마마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네요. 죄송해요.”
“…….”
황태후는 멍하니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순간, 그 애가 생각날까.
오래전 황태후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딸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시간에 쫓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태후를 향해 어린 딸은 늘 저런 얼굴을 했다.
[바쁘신데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어마마마. 어서 가 보세요.]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상냥하게 웃어 주었던 딸.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고약하고, 안타까운 내 딸.
그러나 황태후는 딸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새도 없었다.
딸을 그리워하며 울 만큼 황궁은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릴 시간에, 폭풍같이 몰아쳐 정적들을 제거해야 했다.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아들이 황제가 된 후에도 울지 못했다.
그녀는 철혈의 황태후였으니까.
이제 와 그런 약한 모습 따위 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딸을 가슴속에 묻었다.
그랬는데…….
“……!”
아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황태후의 곁에 있던 시녀도, 아리스의 곁에 있던 시아나도 놀랐다.
내내 무표정했던 황태후의 얼굴에 서글픈 웃음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이지, 걱정하는 모습이 그 애를 꼭 닮았어.”
그 순간만큼은 그녀는 얼음 같은 황태후가 아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어미일 뿐이었다.
* * *
아리스와 시아나는 황태후궁을 나왔다.
떠나는 아리스를 향해 황태후가 말했다.
‘다음에 또 오거라.’
쌀쌀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장난도 변덕도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빨리, 더 깊게, 황태후가 아리스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그것도 단 한차례의 만남으로.
그러나 아리스의 얼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냥 좀 신기해서. 난 지금까지 할마마마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는 얼굴을 굳혔다.
사실 시아나는 수십 번이나 이 계획을 진행할지 말지 고민했다.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고, 웃는 얼굴로 환심을 사, 사람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얻는 방법.
어린 공주가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비굴했다.
그러나 아리스는 주저 없이 하겠다고 했고, 놀라울 만치 훌륭하게 해냈다.
꼿꼿한 자존심도, 어린아이 특유의 솔직함도 누르고 황태후를 대했다.
황태후의 냉담한 반응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하나 남아 있어.’
죄책감이었다.
비굴함을 견디는 것과 죄책감을 견디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황태후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 아리스의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는 이 계획을 진행하면 안 돼.’
아리스의 마음이 다친다.
시아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시아나가 아리스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공주님, 혹시 황태후 마마를 속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셨나요?”
그러나 아리스의 답은 시아나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니, 전혀.”
“…….”
“그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에 대해 물어보지 않더라.”
엄마도 없고, 황제에게도 버림받은 어린 손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뭐를 좋아하고, 뭐를 싫어하는지 황태후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본 손녀딸이 얼마나 인형처럼 예쁜지, 제 맘에 찰 만큼 예법을 갖추었는지 평가할 뿐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 딸을 닮았다며 웃기까지 했다.
합격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리스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내 모습을 보여 줬다면 절대 그런 식으론 웃지 않았겠지. 지금까지처럼 나 같은 손녀는 신경도 안 썼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할마마마께 느끼는 기분은 하나뿐이야.”
“…….”
“빌어먹을 할망구!”
시아나는 복잡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아리스는 정말이지 어린아이 같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특별히 영악해서는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는 황궁 생활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겠지.
아리스는 시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나 잘했지?”
“…….”
아리스에게는 힘이 필요했고, 이것이 아리스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아리스는 더할 나위 없이 잘하고 있다.
그것은 대단하다고 칭찬할 일이지 슬픈 표정으로 안쓰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아나는 아리스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네, 정말 잘하셨어요. 대견한 공주님.”
그제야 아리스는 제 나이로 돌아가 웃었다.
화도 잘 내고 웃기도 잘하는 평범한 열 살의 아이로.
* * *
그날 밤, 아리스가 잠든 것을 확인한 시아나는 루비궁을 나왔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시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아나를 보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시아나.”
놀랍게도 남자의 정체는 라시드였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덕분에 원하는 바를 이뤘습니다.”
그 말에 라시드가 놀랍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얼마 전, 라시드에게 시아나가 찾아왔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황태후 마마의 죽은 따님에 대해 알고 싶어요.]
라시드는 왜냐고 묻지 않고 시아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태자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시아나는 그가 보내 준 서신으로 황태후의 죽은 딸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아나는 그것을 철저히 활용해 계획을 꾸몄다.
황태후의 죽은 딸이 즐겨 썼던 향수를 아리스의 편지지에 입히고, 죽은 딸이 자주 입었다는 드레스와 같은 색상의 드레스를 아리스에게 입혀 황태후를 찾아갔다.
아리스가 황태후를 위해 만든 아카시아 차 또한 죽은 딸이 황태후와 종종 마셨다는 차였다.
‘아마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황태후는 기억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황태후는 무의식중에 딸을 계속 떠올리게 될 테니까.
시아나의 생각대로였다.
황태후는 아리스에게서 죽은 딸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제 빚을 갚을 차례였다.
시아나가 라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황태자 전하의 부탁을 들어드릴 차례예요.”
어떤 부탁이라도 능력이 되는 한 들어줄 셈이었다.
이것은 라시드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대등한 거래였으니까.
라시드가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궁의 수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할마마마를 꼬드길 생각을 했는지 알려 줘.”
“……!”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정보를 요구했을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일개 시녀가 황태후를 농락하냐며 혼낼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 그저 네가 할마마마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야.”
황태후는 황궁에서 잊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다른 누구도 아닌 타국의 여인이 떠올린 것이 라시드는 너무 신기했다. 더군다나 오래전 죽은 그녀의 딸에 대한 존재도.
시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어차피 이 사람이 정말 마음을 먹으면 못 알아낼 게 없어. 숨길 일도 아니고.’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작은 왕국의 공주였어요.”
그러나 평범한 공주가 아니었다.
악독한 계모와 그녀에게 푹 빠진 못난 아비를 둔, 위태로운 공주였다.
특히 계모의 괴롭힘은 날로 심해져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시아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타국의 힘을 빌리는 것도 있었다.
“제국의 황실에 대해서도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황태후가 어린 딸을 잃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그때 계획이 하나 떠올랐어요. 황태후의 죽은 딸을 흉내 내어 가까워진다면 그녀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 계획을 짰을 때 시아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충분히 그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시아나가 민망한 듯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무맹랑한 계획이었죠. 저는 황태후의 죽은 딸을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까요. 보나마나 실패했을 거예요. 결정적으로 머나먼 제국에 있을 황태후에게 접근할 방법도 없었고요.”
아, 하고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 덕분에 결국 제국에 오긴 했지만요.”
“……!”
평온하게 시아나의 말을 듣던 라시드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라시드는 지금까지 수많은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가진 적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결과였을 뿐이니까.
시아나의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콩콩 뛰는 거야.’
마치 간식을 빼앗아 먹고 눈치를 보는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느낌이었다.
라시드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나를 원망해?”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그녀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제 이야기 들으셨잖아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 고민하던 공주였다고요.”
“…….”
“가족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없어요. 그러니 그들의 죽음 또한 조금도 슬프지 않답니다.”
왕국이 멸망한 건 아쉽지만 그 또한 큰 괴로움은 아니었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썩어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런 생각 마세요. 저는 황태자 전하께 아~ 무 감정도 없으니까요. 정말이랍니다.”
“…….”
라시드에게 먼지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것이 또 서운해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쭉 내밀었다.
“너는 귀여운 얼굴로 잔인한 구석이 있어.”
다른 의미로 그 말을 해석한 시아나가 웃었다.
‘내 가족을 죽인 상대한테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평범하진 않지.’
—라고 생각하며.
* * *
그 후, 시아나는 아리스와 함께 황태후의 궁을 종종 찾아가기 시작했다.
살랑대는 드레스, 햇살 같은 미소, 나비 같은 몸짓.
아리스는 늘 황태후가 꿈꾸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황태후의 아리스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이제는 아리스만 보면 환하게 웃을 정도였다.
“아리스, 오늘도 정말 곱구나.”
아리스의 곁에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시아나는 시기가 됐음을 깨달았다.
아리스가 황태후의 비위를 맞추며 사이를 돈독히 만들었던 이유.
복수를 할 때다.
시아나와 아리스는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한 장 썼다.
완성된 편지를 본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아. 내 생애 처음 쓰는 초대장이 재수 없는 이베트에게 보내는 것이라니.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시아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너무 아쉬워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초대장이 될 테니까요.”
완성된 초대장 위에 문양을 찍었다.
장미꽃에 둘러싸인 루비.
이날을 위해 시아나가 만든 아리스의 인장이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초대장이 팔랑팔랑 날아 도착한 곳은 황녀 이베트의 궁이었다.
<아리스가 처음 여는 티 파티에 초대합니다. 루비궁에 오셔서 따뜻한 차 드시고 가셔요.
-사랑스러운 동생 아리스가♥>
초대장을 읽은 이베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얘 정말 미친 거 아냐?”
공주들은 밥 먹듯 티 파티를 열어 노닥거리는 게 일상이긴 했지만 아리스는 예외였다.
티 파티를 열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찻잎 하나 없는 계집애가 티 파티는 무슨.
그런 아리스가 티 파티를 연단다. 그리고 자신을 초대한단다.
이베트는 아리스가 왜 갑자기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곳곳에 심어 놓은 이들을 통해 들어온 황궁의 크고 작은 소식 중에 아리스에 대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집애 요즘 할마마마의 궁에 드나든다지.’
수십 년간 황궁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황태후가 궁의 문을 연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베트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할마마마를 몇 번 만났다고 쓰레기 같은 공주의 위치는 변하지 않아. 그런 것도 모르고 기고만장해서 설치다니, 천하의 멍청한 계집.”
미약하게 생긴 연줄을 믿고 꿈틀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가지 않으면 제가 무서워서 피한 줄 알고 으스댈 테지.
그 꼴은 못 본다.
‘지 분수를 잘 알 수 있도록 밟아 주고 와야겠어.’
그것이 언니의 본분이니까.
* * *
며칠 후, 이베트는 루비궁으로 향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가 이베트를 맞이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베트 언니. 아리스의 첫 번째 티 파티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
아리스를 본 이베트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잖아?!’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작 세 달 전이다.
그런데 그사이 아리스는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지고 키도 부쩍 컸다.
‘게다가 인사하는 법도 더 우아해지고.’
짜증이 훅 올라왔다.
하지만 여기서 대뜸 심술을 낼 만큼 이베트는 어수룩하지 않다.
이베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동생이 처음 여는 티 파티인데 당연히 와야지. 그게 자매의 정 아니겠니.”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이베트가 이곳에 온 것은 아리스가 다시는 꿈틀거리지 못하게 짓밟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베트는 일전의 일로 아리스를 괴롭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의 하나뿐인 시녀를 건드리는 것.
이베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리스의 옆에 서 있는 시아나였다.
이베트가 시아나를 향해 말했다.
“어서 차를 따라 보렴.”
황궁에서 열리는 티 파티는 주인이 연회를 준비하고, 시녀가 주인을 대신하여 차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을 위해 각 궁에는 고도의 예법을 익힌 차 시중 전담 시녀가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아리스 따위에게 붙어 있는 시녀에게, 그것도 하급 시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
‘형편없이 차를 따르겠지.’
이베트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베트는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섬뜩한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허술한 동작을 보이는 순간 시아나를 물어뜯을 셈이었다.
“…….”
그러나 잠시 후, 이베트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시아나의 차 타는 모습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개 하급 시녀의 수준이 아니었다.
이베트는 입술을 악물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렇게 차를 잘 따라?’
이대로라면 차 시중을 빌미로 책잡기는 틀렸다.
하지만 시녀에게 꼬투리를 잡는 방법은 그런 정석적인 방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찻잔에 차를 따르는 시아나를 향해 이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너,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예?”
“나를 째려보고 있잖아.”
시아나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입을 열기 전 이베트가 쏘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게 벌을 받았던 시녀구나. 설마 그때 일을 마음에 담고 그러는 거니?”
“설마요. 결코 그런 불손한 생각을 한 적 없습니다.”
시아나는 필사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시아나를 몰아붙이려고 작정한 이베트는 제 곁에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뭘 하니. 저 되바라진 시녀를 혼낼 회초리를 가지고 오지 않고.”
“준비하겠습니다.”
시녀는 재빠르게 대답하고 사라졌다.
아리스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언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베트가 눈썹을 내리며 차갑게 말했다.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니? 네가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되바라진 시녀 년을 내가 교육시켜 줄 셈이야.”
“그만둬요! 이번에도 내 시녀에게 손을 댄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리스의 말에 이베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버림받은 공주 따위가 제게 용서 따위를 논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스, 너 설마 할마마마를 믿고 이렇게 뵈는 것도 없이 행동하는 거니?”
“……!”
눈을 크게 뜬 아리스를 향해 이베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뭘 놀란 표정을 지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런 거지 같은 궁에 처박혀 있는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다 알고 있거든. 하나 더 알려 줄까?”
이베트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바마마의 친어머니이긴 하지만 할마마마는 아무런 힘도 없어. 왜냐면 아바마마께서는 할마마마께 조금의 애정도 없으시니까!”
황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황태후는 사랑이 아닌 야망으로 아들을 키웠다. 그녀의 목표는 아들의 행복이 아닌 황좌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황태후에게 아무런 정이 없었다. 겹겹이 쌓인 미움만 있을 뿐이었다.
황제로 즉위한 직후 황제는 황태후에게 말했다.
더는 나를 휘두를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사시라고.
장성한 아들에게 버림받은 늙은 어미.
황태후는 빈껍데기 권력을 가진 썩은 패였다.
이베트는 창백하게 굳은 아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저 계집애를 짓밟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어.’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베트는 아리스가 믿는 구석을 철저하게 박살 내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뿐이니? 할마마마는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 그런 분을 아부 떨 상대로 택하다니 너도 참 멍청하…….”
“어린 것이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노기가 어린 목소리에 이베트는 고개를 돌렸다.
제 앞에 보이는 얼굴에 이베트는 헉, 하고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머리가 흰 노부인이 서 있었다.
주름진 얼굴, 바짝 마른 몸. 쇠약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걸친 드레스와 보석은 최고급이었다.
무엇보다 풍기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이베트는 처음 보는 여인의 정체를 쉽게 유추했다.
골드리아 황태후였다.
이베트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마, 말도 안 돼! 할마마마는 절대 황태후궁을 떠나지 않는 분이시잖아! 그런 분이 왜 이런 곳에 있냐고!’
* * *
티 파티가 열리기 며칠 전.
아리스는 이베트에게 초대장을 보낸 후 황태후궁을 찾아갔다.
황태후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어린 손녀를 맞이했다.
그런데 아리스의 얼굴이 이상했다.
늘 밝았던 어린 소녀의 얼굴이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어두웠던 것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황태후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그게…….”
아리스는 머뭇머뭇하다가 고민을 털어놓듯 말했다.
“실은 제가 며칠 후에 첫 티 파티를 열거든요. 언니를 초대했는데 혹시나 실수를 하면 어쩌나 마음이 무거워요. 아시다시피 제 궁에는 저를 가르쳐 줄 만한 어른이 없으니까요.”
아직 어린 소녀가 티 파티를 열 때는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며 조언을 해 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리스에게는 엄마도, 엄마를 대신해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리스는 눈썹을 내리며 쓰게 웃었다.
“할마마마께서라도 곁에 계셔 주시면 안심이 될 텐데요. ……이럴 때는 할마마마와 떨어져 사는 것이 아쉬워요.”
평소 어여쁜 꽃처럼 해사하기만 한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황태후를 곤란하게 하는 말을 내뱉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아무리 얼음 같은 황태후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도와주마.”
“정말요?”
황태후의 말에 아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이베트가 오기로 한 날, 황태후는 아침 일찍 루비궁을 찾아왔다.
황태후는 시아나와 아리스가 꾸민 테이블 세팅을 꼼꼼히 봐주었다.
“황궁의 티 파티라고 하기엔 조촐하긴 하지만 예법에 어긋난 것 없이 준비했구나. 이만하면 됐다.”
황태후의 말에 아리스는 후아, 하고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후는 그런 아리스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후, 황태후는 티 파티가 열릴 응접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어린 딸이 티 파티를 열 때, 아이들끼리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피해 주려는 어른의 배려였다.
원래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야 했지만 그것은 생략하기로 했다.
낯선 이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도 하지 않고 손님의 말을 엿듣는 것이 되는 셈이지만 괜찮겠지. 기껏해야 어린애들의 수다 자리니.’
황태후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아리스에게 말했다.
“네가 혹여 손님께 실수라도 하지 않는지 듣고 있을 테니 잘 하거라.”
“예!”
아리스가 두 손을 모으고 힘차게 대답했다.
잠시 후, 손님이 도착하고 아리스가 응접실로 나갔다.
“어서 오세요, 이베트 언니.”
문밖에서 들리는 아리스의 목소리에 황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앞에서는 딱 사랑스럽게 어설프고, 딱 보기 좋게 우아했던 손녀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떨지 기대가 됐다.
그러나 지금 황태후의 얼굴은 분노에 차 있었다.
이베트라 하는, 이름도 모르는 손녀가 내뱉은 말은 가관이었다.
황제와의 사이에 애정이 없다느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느니, 그런 말을 떠들어 대다니…….
“이 황태후가 정녕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고얀 것!”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이베트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 무서워.’
이베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황태후는 죽을 일만 남은 뒷방 늙은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태후였다.
죽고 죽이는 황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제 아들을 황좌에 올린 여인.
비록 오랜 세월 황궁 한구석으로 떠난 탓에 가지고 있던 권력이 빛바랬다고 해도, 서슬 퍼런 기운은 여전했다.
적어도 버릇없는 손녀 한 명 손봐 줄 기력쯤은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황태후의 시선이 닿은 곳은 막 응접실에 들어선 시녀였다.
조금 전 이베트의 명령을 받고 나갔던 시녀의 손에는 가죽으로 만든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내놓거라.”
기세에 눌린 시녀는 제대로 된 말도 못하고 황태후에게 회초리를 빼앗겼다.
회초리를 손에 든 황태후가 이베트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내 앞으로 와서 치마를 걷거라.”
그 의미를 깨달은 이베트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지, 지금 저걸로 날 때리려는 거야?’
일개 후궁의 딸이었지만 이베트는 공주였다.
친모가 금이야 옥이야 예뻐한 덕분에 태어나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이베트에게는 이 상황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싫어. 맞고 싶지 않아!’
파르르 떨던 이베트는 제 몸을 지킬 방법을 기적처럼 떠올렸다.
이베트가 용기를 겨우 짜내어 말했다.
“저, 저는 황제 폐하의 핏줄입니다. 그, 그런 제게 손대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일전에 시아나가 아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내뱉었던 말이었다.
이 황궁에서 황제는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황태후라도, 아니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황태후니 더더욱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베트의 예상은 틀렸다.
황태후가 움찔하기는커녕, 더욱 분노에 찬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감히 지금 내 아들을 들먹이며 나를 협박하는 거냐?!”
“……!”
“어디 한번 황제에게 말해 보거라.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아무리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지 오래라고 해도 황태후는 황제의 엄마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황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냉혈한 놈이 네까짓 관심도 없는 딸의 말을 들어 주기나 할 것 같으냐.’
황태후의 눈빛에서 이베트는 냉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이베트는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황태후의 앞에 서서 치마를 걷었다.
바들바들 떠는 가는 다리를 향해 회초리가 매섭게 날아갔다.
철썩!
그 순간 이베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ㅆ발.”
황태후는 귀가 밝았다.
그녀는 황녀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저속한 말을 내뱉은 이베트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회초리를 든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매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강하게.
철썩!
두 번째 회초리를 맞았을 때 이베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아앙!”
그러나 황태후는 그런 울음소리 하나로 분노를 풀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황태후는 몇 번 더 회초리를 휘갈겼다.
철썩!
서럽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베트는 한자락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흑, 이 사실을 어머니가 안다면 두고 보지 않으실 거야. 날 위해 화내 주실 거라고!’
그러나 이베트의 바람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던가.
이베트의 친모가 루비궁에 달려와 한 일은,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모자란 아이를 친히 가르쳐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태후 마마.”
그러고는 피 묻은 다리를 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이베트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내리눌렀다.
그녀가 다그치듯 말했다.
“뭘 하니, 이베트. 너도 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지.”
“……!”
그제야 이베트는 확실히 깨달았다.
황태후와 제 어미의 격차를.
아무리 황제와 척을 졌다 해도, 십수 년을 제 궁에 틀어박혔다고 해도 황태후는 황태후였다.
일개 후궁 한 명과 황녀 한 명 정도는 쥐죽은 듯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이베트는 절망 어린 얼굴로 바닥에 몸을 조아렸다.
“가…… 감사합니다, 흐윽.”
그 순간 이베트는 보았다.
황태후의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리스의 얼굴을.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것은 원하는 것을 이룬 승리자의 눈빛이었다.
이베트는 확실하게 알아챘다.
‘재수가 없어 벌어진 일이 아니었구나. 모든 게 네년이 계획한 일이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아리스의 시녀, 시아나가 계획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베트가 평생 그것을 알아챌 일은 없을 터였다.
* * *
루비궁에서의 사건은 황궁에 널리널리 퍼졌다.
황궁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들을 놀라게 한 것은 후궁과 황녀가 비참하게 고개를 조아린 것이 아니었다.
“황태후 마마께서 궁을 나오셨단 말입니까.”
“그래요. 십수 년간 황궁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던 분인데, 믿기지가 않네요.”
게다가 황태후가 궁을 나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 아리스 때문이다.
비록 황제와 사이도 좋지 않고, 황실의 흐름을 바꿔 놓을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황태후는 황실의 큰 어른이었다.
그런 이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사소하게 지나가도 될 만큼 작은 일이 아니었다.
“……전처럼 아리스 황녀를 대했다가는 곤란하겠군요.”
그것이 황실 사람들의 결론이었다.
“그게 다 뭐야?”
아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끌고 온 수레에는 온갖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물품보급소에서 보내 준 물건이랍니다.”
최고급 종이와 펜, 형형색색의 천, 반짝이는 다기, 화려한 보석이 달린 액세서리까지.
아리스가 생전 본 적 없는 호사스러운 물건들이었다.
“예전에는 종이 한 장만 달라고 해도 깐깐하게 굴더니, 이런 걸 갑자기 왜 보내 줘?”
시아나가 빙긋이 웃었다.
“황녀 저하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가 황태후 마마께 혼이라도 날까 봐 눈치를 보는 거죠.”
“와, 할마마마가 무섭긴 한가 보네.”
바뀐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루비궁에 시녀를 보내 준다고?”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비궁만 한 곳에 시녀 한 명은 너무 적다며 증원을 해 준다고 하네요. 공주님께서 원하는 인원수를 말씀해 달래요.”
아리스는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쓸데없는 짓 하기는. 난 다른 시녀 필요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라는 열렬한 눈빛이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그래도 시녀는 한두 명 더 충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혼자 궁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어?”
궁을 관리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럭저럭 할 만했다.
그러나 시아나가 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리스의 시중까지 들어야 했다. 거기에 아리스의 교육까지.
“솔직히 말하면 몸이 두 개, 아니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랍니다.”
시아나의 말에 아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리스는 시아나와 단둘뿐인 게 좋다. 하지만 시아나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다.
아리스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네가 필요한 만큼 시녀를 더 충원해.”
“알겠습니다.”
아리스가 동그란 눈을 굴리면서 말했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와도, 나는 네가 돌봐 줘야 해.”
“알겠습니다.”
“다른 시녀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도 말고.”
“……공주님, 꼭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아요.”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요.”
아리스는 오리처럼 입을 내밀더니 말했다.
“어쨌건 약속해.”
아리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루비궁에서 잘 지내자는 협정을 맺은 후로, 아리스는 이런 식으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곤 했다.
“힛.”
그제야 뚱했던 아리스의 얼굴이 풀렸다.
* * *
환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시아나는 아리스를 치장하고 있었다.
시아나의 손에 몸을 맡긴 아리스는 작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시인 레브람스의 시였다.
“내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는 나의 봄꽃. 그대는 나의…… 우웩.”
아리스는 참지 못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짜 못해 먹겠어. 그냥 눈으로 읽으면 되지, 가뜩이나 오글거리는 글귀를 왜 노래하듯 읽으라는 거야.”
시아나가 아리스의 머리를 땋으며 코끝을 찡긋거렸다.
“어쩌겠어요. 황태후 마마께서 그런 것을 좋아하시니까요.”
아리스는 요즘 시를 외우고 있다.
시낭송을 좋아하는 황태후의 앞에서 낭독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황태후에게 예쁨받기 위한 수많은 방법 중 하나였다.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노인네들 취향은 이해를 못하겠어.”
그 말에 시아나는 쿡쿡 웃었다.
이내 아리스의 치장이 끝났다.
오늘은 리본이 여러 개 달린 푸른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았다.
시아나가 아리스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마주쳤다.
“오늘도 예뻐요, 우리 공주님.”
“나도 알아.”
“그럼 가실까요?”
루비궁을 나온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궁 앞에 황녀 이베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이베트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흉흉해졌다.
눈 밑은 거뭇하고, 볼 살도 빠져 있었다.
‘황태후에게 크게 체벌을 당한 데다가, 온 궁 안에 황태후에게 단단히 찍혔다는 말이 나돌았으니 그럴 만하지.’
궁의 모든 이들이 이베트를 비웃고, 피했다.
예전의 아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시아나는 이베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나 이베트가 아리스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였다.
이베트가 시아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또 얘네.’
마음 같아선 당장 시아나를 크게 혼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리스가 얼마나 이 시녀를 끔찍이 여기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짓을 했다간 아리스가 할망구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겠지.’
이베트는 이제 황태후가 얼마나 무서운 노인네인 줄 알고 있다.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이베트는 분노를 삼키며 이를 으득였다.
“네 주인에게 할 말이 있으니 비켜.”
시아나는 그녀의 손에 위협이 되는 물건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 발짝 물러났다.
“차려입은 걸 보니 또 할마마마께 가나 보지?”
아리스는 이베트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네, 할마마마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으셔서요.”
그 말에 이베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래. 할마마마도 네 편이 되어 주고, 너를 먼지만큼도 취급하지 않았던 황궁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으니 요즘 살 만하겠다. 그런데 너 그건 알고 있니?”
이베트가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할마마마가 네 엄마의 죽음에 관여되었다는 사실 말이야.”
예상 못한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리스의 엄마 로즈마리는 아리스를 낳던 날 죽었다.
예정보다 빨리 태어난 아리스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는 늘 자신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며 자책해야 했다.
굳은 아리스를 바라보며 이베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네 어미가 죽은 건 네 탓이 제일 커. 하지만 재수도 좀 없었지. 하필 그때 황궁의 의사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아리스의 온몸을 차갑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날 딱 한 명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가 있었지. 바로 황태후궁에 있는 할마마마의 주치의였어. 하지만 할마마마는 의사를 보내지 않으셨어. 천한 무희 따위가 죽든 말든 상관할 게 아니라며 말이야!”
이베트가 아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겠니? 할마마마께서 의사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네 어미가 죽은 거야!”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엄마에게 들은 확실한 사실이야. 믿지 못하겠으면 당장 널 그렇게 좋아하는 할마마마께 가서 여쭤보든가.”
물론 아리스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제 목숨 줄을 쥔 늙은이에게 꼬리를 흔들며 알랑거려야 할 테니까.
“지 엄마를 죽인 자에게 실실 웃으며 비위를 맞추다니. 역겨운 년이야.”
이베트의 경멸 어린 목소리가 아리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베트가 사라진 후에도 아리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린 아리스를 바라보며 시아나 말했다.
“공주님, 그냥 루비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아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할마마마가 날 기다리고 있잖아.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간 걸 아시면 분명 화내실 거야.”
“하지만…….”
“괜찮아. 난 이베트의 말 따위 신경 안 써. 가자.”
시아나는 불안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태후궁에 도착했다.
“어서 오거라, 아리스.”
아리스에게 푹 빠진 황태후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조금의 적의도, 의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황태후 마마께서 아리스 님을 많이 아끼게 되었지만,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셔야 해요. 아직까지는 노인의 변덕스러운 애정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니 아리스는 오늘도 웃어야 했다.
인형처럼 고운 모습만 보여 줘야 했다.
그런데…….
“할마마마, 혹시 제 어머니를 기억하세요?”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 나갔다.
옆에 서 있던 시아나의 눈이 커진 것이 보였다.
아리스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황태후가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황태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서 요양을 취한 후로 황궁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잘 모른다.”
“…….”
“하지만 그건 알아. 네 어미는 천한 무희였다지? 황제가 그런 여인에게 빠진 것은 처음이라 황궁이 워낙 시끄러웠던 것이 기억난다.”
쿵, 하고 아리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황태후는 일그러진 아리스의 얼굴을 보고는 저런, 하고 중얼거리며 눈썹을 내렸다.
그녀는 손녀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와서 그런 것을 가지고 너에 대한 애정을 거둘 생각은 없으니까. 게다가 넌 이렇게 곱게 크지 않았니. 네 어미의 천박함은 조금도 닮지 않았어.”
……그것은 황태후 나름의 위로이며 칭찬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세 치 혀로 만들어진 채찍으로 맞은 것 같았다.
당장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리고 어깨를 붙잡고 따지듯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에게 의사를 보내 주지 않은 게 사실인가요?’
아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베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면전에서 제 엄마를 이렇게 벌레처럼 말하는 사람이, 도와줬을 리가 없다.
분명 죽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내팽개쳤을 것이다.
태어난지도 몰랐던 어린 손녀에게 그랬듯이.
새삼 황태후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역시 나는 이 사람이 싫어.’
저 주름진 얼굴에 찻물을 쏟아붓고 싶어.
내가 아는 세상의 가장 나쁜 저주의 말들을 하고 싶어.
아리스의 눈빛을 읽은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까지인가.’
아리스는 지금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해 냈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엄마’를 건들인 이상, 더는 가면을 쓸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아나의 예상과 달리 아리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리스는 황태후를 향해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할마마마께서 그리 저를 예뻐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
시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할마마마를 위해 레브람스의 시를 한 편 외워 왔어요. 낭독해 드려도 될까요?”
“세상에, 레브람스라니. 어린아이가 나와 취향이 똑같구나.”
황태후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두 손을 모으고 아름다운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봄날의 햇살을, 싱그러운 여름 꽃을, 추운 겨울날 마시는 뜨거운 차 한 잔을 사랑한다는…….
세상의 모든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였다.
그러나 시아나에게는 아리스의 맑은 목소리가 너무나 서글프게 들렸다.
아리스와 시아나는 황태후궁을 나왔다.
몇 발짝 걸었을까.
걸음을 멈춘 아리스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아까 할마마마한테 우리 엄마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었어.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지금 와서 예뻐하는 게 밉다고 말하고도 싶었어. ……하지만 참았어.”
그런 말을 했다가는 겨우 손에 잡은 힘이 사라지고 예전으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아무런 힘도 없는, 시녀 한 명도 지켜 주지 못하는 볼품없는 공주로.
그건 싫었다.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잘했지?”
“…….”
시아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네, 라고 대답하는 대신 아리스의 작은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 작고 동그란 귀에 속삭였다.
“이제 울어도 괜찮아요.”
“……!”
그 순간 아리스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리스가 시아나의 허리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흐아앙! 짜증 나! 미워!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시아나는 아리스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시아나는 괴로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 계획은 실패야.’
* * *
잔잔한 바람이 부는 어두운 밤.
시아나는 낯선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라시드가 서 있었다.
라시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시아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태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만난 후 처음 만난 것이니, 약 세 달 만이었다.
라시드가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할마마마의 마음을 얻어 냈다지.”
“영특한 공주님의 노력 덕분이죠.”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리스의 능력은 물론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은 시아나였다.
‘아리스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지만.’
라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보자고 했지?”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예전처럼 라시드에게 정보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라시드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거라.”
시아나가 라시드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님의 친모이신 로즈마리 님이 돌아가신 것에 황태후 마마가 관계되어 있는 게 사실인가요?”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아리스 공주님이 황태후 마마께 예쁨 받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분께요. 그래서 그 말이 정말인지 확인을 하고 싶었어요.”
잠시 후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그 말은 맞고도 틀리단다. 왜냐하면…… 그날, 로즈마리를 죽인 것은 할마마마뿐이 아니니까.”
* * *
아리스의 친모, 로즈마리.
그녀는 구불거리는 장밋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미녀였다.
늘씬한 그녀의 배가 볼록 솟아 있었다.
황제의 아이였다.
로즈마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괴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가야, 어서 보고 싶어.”
미천한 무희의 신분으로 황제를 사로잡은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그녀의 입지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의 애정은 신기루보다 덧없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기 시작했다.
‘이제 곧 꺼져 불씨조차 남지 않을 테지.’
그래서 로즈마리에게는 배 속의 아이가 더 소중했다.
그녀가 다시 황제의 마음을 잡을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존재이자, 그녀가 이 황궁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는 줄이었으니까.
로즈마리는 극도로 몸을 조심하며 아기를 지켰다.
그러나 황제가 황궁을 비웠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진통이 찾아온 것이다.
예정되어 있던 것보다 2달이나 이르게 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악!”
로즈마리가 괴로운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온몸이 차갑게 식고, 팔다리도 버들버들 떨렸다.
그녀를 모시는 시녀가 소리쳤다.
“로즈마리 님의 상태가 심각해요. 어서 의사를 불러 오세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의사는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때, 로즈마리를 진료하던 주치의를 포함한 황궁의 모든 의사들이 제각각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일 뿐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누구든 오려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 않았다.
황제의 여인들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들은 부채를 휘날리며 말했다.
“천박한 몸뚱이로 황제 폐하를 유혹해 하룻밤 은혜를 입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어야지. 감히 제 피로 더럽혀진 아기를 황족이랍시고 낳으려고 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죠. 우리가 그 일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손을 마주잡고 안절부절 서 있는 의사들이었다.
“그러니 그 계집애에게는 절대 가지 말거라. 이건 폐하의 핏줄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오명을 태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니.”
황제가 없는 지금, 그녀들은 황실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이들이었다.
게다가 의사들은 각각 그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떤 의사도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로즈마리는 눈물을 흘렸다.
‘잔혹한 사람들.’
그래도 폐하의 아기이니 손대지 않을 줄 알았다.
얼마나 순진한 착각이었던가.
하지만 이렇게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로즈마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생각났다.
‘황태후 마마!’
황태후는 황실의 모든 연을 끊고 궁에 틀어박힌 지 오래였다.
그래서 로즈마리는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황제의 수많은 여인 중 하나인 로즈마리의 존재 따위, 황태후는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폐하의 어머니잖아.’
아무리 매정한 어미라도, 제 자식의 아이에게까지 냉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아이를 살리고 싶어서라도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로즈마리는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황태후에게 시녀를 보냈다.
황태후궁의 의사를 보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시녀는 혼자였다.
시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황궁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황제 폐하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로즈마리는 절망했다.
결국 반나절이 지나도록 의사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즈마리가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끝까지 아기를 포기하지 않은 집념 때문이다.
“로, 로즈마리 님! 드디어 아기님이 나왔습니다. 어여쁜 공주님이옵니다!”
시녀가 쉬어 버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시체처럼 퀭한 얼굴로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아가야…… 미안해…….”
오랜 고통에 눈물도 말라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후궁 로즈마리의 마지막이었다.
* * *
“…….”
시아나의 얼굴이 어두웠다.
라시드는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잔혹한 이야기를 해서 놀랐니?”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럴 리가.
시아나는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랐다. 그녀가 자란 궁도 이곳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이들이 가득한 궁은, 결코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터였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는 놀랍지도 않았다.
시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공주님께 너무 가혹한 일을 시켜 버렸어요.”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아리스의 뒷배가 되어 줄 사람으로 황태후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실 사람들이 모두 작당하여 일어난 일이라 해도, 황태후가 로즈마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람의 사랑을 얻으라고 했다.
그것이 너무 미안했다.
라시드가 시아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겨우 만든 연결고리를 끊고, 황태후와 멀어질 수도 있다.
물론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어린 손녀에게 황태후는 분노를 느끼겠지.
아리스를 달리 보기 시작한 황궁의 사람들도 황태후에게 버림받은 공주라며 짓밟을 것이다.
시아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또렷한 눈동자로 대답했다.
“황태후와 아리스 공주님의 힘을 역전시킬 거예요.”
“…….”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후가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아리스는 고개를 바짝 조아리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형편이었다.
시아나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로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말에 라시드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시아나가 둥그런 눈을 살짝 휘었다.
“황태후 마마께 다가갔던 방법과 다를 건 없어요. ……물론 예전보다는 훨씬 악랄하고 교묘할 테지만요.”
라시드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꼭 다른 사람 같아.’
햇빛 아래에서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청소할 때는 순진한 소녀 같은데, 달빛 아래에서 교묘한 술책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세상을 손에 쥐고 굴리는 요염한 여인 같았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네.’
그때 시아나의 시선이 라시드를 향했다.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이야기 값은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
이야기 값이라.
음산한 이야기라 황궁 사람들이 쉬쉬하긴 해도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라시드가 아니어도, 연륜이 있는 시종이나 시녀를 꼬드겼으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라시드는 이야기 값을 받고 싶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받아 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라시드가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궁에 놀러 와 주겠니?”
생뚱맞은 말에 시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황태자의 궁이니 시녀쯤 차고 넘칠 텐데 저런 말을 하다니…….
“황태자궁에 일이 엄청 많은가 보네요.”
“…….”
“알겠습니다. 시간을 나는 날, 전하의 궁으로 가서 온몸을 바쳐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해사한 얼굴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시녀 한 명의 인력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않고 써먹으다니 전하께서는 참 악랄, 아니 알뜰하신 것 같아요.”
그런 거 아닌데.
라시드는 좀 억울해졌다.
* * *
“황태후 마마, 아리스 공주님께서 바쁜 일이 있으셔서 오늘도 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에 황태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황태후의 명령에 아리스가 오지 않았을 때, 처음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것이 두 번, 세 번 계속 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저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황태후도 요 근래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황태후 덕에 황궁에서 아리스의 입지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그랬더니 바로 이 모양이다.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이용하고 버리는 황궁의 모든 것에 환멸이 나 궁에 틀어박혔던 황태후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만큼은 순수하게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역시 너도 단물을 노리고 날 찾아왔던 것이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황태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궁으로 가자.”
황태후의 시녀들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여 루비궁으로 향했다.
일부러 방문하리라는 전갈은 보내지 않았다.
온갖 이유를 들며 황태후궁에 오지 않았던 아리스의 실체를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신나게 놀고 있거나, 팔자 좋게 뒹굴고 있겠지.’
그러고는 갑자기 나타난 황태후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져서, 잘못했다고 엉엉 울겠지.
물론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
루비궁에 들어선 황태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리스가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꼭 죽은 사람 같았다.
황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얘 얼굴이 왜 이래.”
아리스의 곁에 있던 시아나가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공주님께서 겨우 잠드셨는지라 제가 대신 답을 드리겠습니다.”
“…….”
“실은 일주일 전부터 공주님께서 몸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래서 마마를 찾아뵙지도 못하였고요.”
“어디가 아픈 건데!”
시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독을 드셨습니다.”
“……!”
황태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황태후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보아라.”
“식사 후 드셨던 디저트에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사 말로는 치명적인 독은 아니니, 따뜻한 물을 마시고 며칠 쉬어 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이곳에서 독은 물보다 흔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저 정도의 미약한 독은 거의 효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족은 어렸을 때부터 독에 몸을 적응시키는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리스 공주님께서는 그런 훈련을 받지 못하셔서 그런지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황태후의 주름진 손이 버들버들 떨리기 시작했다.
죽은 딸이 떠올랐다.
그녀의 딸도 저렇게 죽었다.
찻잔에 있던 독을 마시고, 하루하루 말라 가더니 어느 날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황태후가 휙 고개를 올렸다.
눈을 반쯤 뜬 아리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후가 황급히 아리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몸은 괜찮느냐고, 많이 아프냐고, 왜 내게 말하지 않고 숨겼느냐고.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체면도 잊고 울어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황태후를 바라보며 아리스가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송해요.”
“…….”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아픈걸 아시면 걱정하실까 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황태후는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황태후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토록 착한 아이를 의심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동시에 오랜 시간 묵혀 두었던 딸에 대한 죄책감이 튀어 올랐다.
황태후가 울먹이는 얼굴로 아리스의 두 손을 잡았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다 이 할미의 잘못이지.”
“…….”
“그런 생각 말고 어서 건강해지기만 해 다오.”
그래만 주면, 내 모든 것을 바쳐 너를 지킬 것이니.
* * *
황태후는 그날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매일 루비궁에 찾아와 지극정성으로 아리스를 돌봤다.
“아리스,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만든 수프란다. 어서 먹어 보렴.”
“아리스, 약재를 넣어 끓인 차야. 한 모금만 마시렴.”
아리스가 나은 후에도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매일 루비궁을 찾아오는 황태후를 향해 아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
아리스가 황태후에게 낸 첫 짜증이었다.
“저 이제 다 나았어요. 그만 오셔도 된다고요!”
황태후는 감히 제게 화를 내냐며 혼내는 대신,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말했다.
“나, 나는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몰라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단 말이에요.”
황태후는 머뭇머뭇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마. 대신 이건 꼭 챙겨 먹거라.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란다.”
아리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윽, 써.”
황태후가 주고 간 주스였다.
시아나도 함께 마시며 똑같은 표정을 했다.
“정말 쓰네요.”
이렇게 쓰다니, 과일만 갈아 만든 주스가 아니다. 분명 황태후가 고이 아껴 둔 약초를 넣은 게 분명했다.
결국 다 마시지 못한 아리스가 말했다.
“요즘 보면 마치 내가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군다니까. 맨날 찾아와서 몸은 어떤지 묻고, 자꾸 이런 걸 먹이려고 하고.”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며칠 전 그런 모습을 보았으니 공주님이 걱정이 되셔서 그러죠.”
아리스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 일은, 아리스와 시아나가 작정하고 꾸민 일이다.
아리스는 일부러 미약한 독을 먹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미~약한 독이었다.
너무 미약해서 상한 음식을 먹은 것 정도의 독.
실제로 아리스가 아팠던 곳은 배뿐이었다. 설사를 엄청 했다.
황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찾아온 의사도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루 이틀 쉬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럼에도 황태후는 마치 아리스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시아나가 말했다.
“트라우마란 무서운 거니까요.”
황태후는 딸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건 그녀의 영혼 한구석에 깊은 상처로 남았을 터였다.
그것을 건드렸으니, 황태후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아리스를 지켜야겠다는 열망만이 가득할 것이다.
“황태후 마마는 이제 절대 공주님께 함부로 대하실 수 없을 거예요. 톡 하고 건드렸다가 사라져 버릴까 두려울 테니까요.”
그건 황태후와의 관계에서 아리스가 우위를 점했다는 뜻이었다.
아리스가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했다.
“잘됐네. 딱히 기쁘진 않지만.”
당연했다.
아무리 황태후의 마음이 애절한들, 그것은 딸을 비춰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황태후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아리스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이용해 먹을 거야. 그리고 더 이상 할마마마의 힘이 필요 없어졌을 때 말할 거야. 왜 그때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냐고. 왜 나를 내팽개쳐 뒀냐고. ……나는 당신이 밉다고.”
물론 마냥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에 죽은 딸을 생각하는 나이 든 여인을 속인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아리스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정말 못됐지?”
시아나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착한 아이는 아니죠.”
“…….”
시아나가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전 공주님이 좋아요. 황궁은 착해서만은 살 수 없는 곳이니까.”
그제야 아리스가 웃었다.
슬픔이 조금 묻어 있는, 안쓰러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