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황태자 라시드는 같은 황족의 안위를 묻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안부를 묻는 이가 있었다.
“아리스는?”
호위 기사 솔은 대답했다.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다만 며칠 전 루비궁의 시녀가 또 궁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포악한 공주님의 시중은 더는 들 수 없다고요.”
솔의 말에 라시드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포악한 공주라서가 아니라 천한 피를 가진 공주라서 모시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아리스의 친모, 로즈마리가 황제의 정식 후궁이 되었을 때 황궁은 난리가 났다.
“거리를 떠도는 무희가 폐하의 후궁이 되었단 말인가!”
황궁 사람들은 한탄했다.
“아무리 폐하의 씨를 잉태했다고 한 들 무희 따위가 후궁이 되다니. 이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나.”
“그러게 말이야. 아이만 출산한 후, 성 밖으로 쫓아내 버리면 될 걸 후궁이라니. 너무 과해.”
“그냥 버리기 아까운 거지. 평범한 남자라면 눈을 못 뗄 만큼 요사스럽게 생겼다니까.”
온갖 더러운 말이 나돌았다.
고작 여덟 살이었던 어린 황자, 라시드의 귀에도 들어올 정도였다.
물론 라시드는 딱히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에게는 수십 명의 후궁이 있었고 그녀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
라시드가 로즈마리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황궁의 정원 중 가장 인적이 드문 곳. 그래서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는 그곳에 로즈마리가 있었다.
나무 의자에 앉은 여인은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매만지며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로즈마리는 누군가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수풀 사이에 서 있는 라시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로즈마리는 단숨에 라시드의 정체를 알아챘다.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선이 고운 아름다운 얼굴이 황제를 꼭 닮아 있었으니까.
황급히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는 로즈마리를 향해 라시드가 물었다.
“네가 마녀야?”
“……!”
라시드의 말에 로즈마리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로즈마리에 대한 숱한 소문들 중 하나였다.
비천한 계집이 마녀의 힘으로 폐하의 마음을 홀린 것이 분명하다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 로즈마리에게 라시드의 말이 이어졌다.
“마녀는 예쁘구나. 꼭 여름에 핀 새빨간 장미꽃 같아.”
“……!”
로즈마리는 멍하니 라시드를 쳐다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짧게 답례한 로즈마리는 몸을 추슬러 허리를 살짝 숙였다.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존엄하신 황자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불편한 몸이라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용서하셔요.”
라시드의 시선이 로즈마리의 배로 향했다.
로즈마리는 마치 아기를 지키듯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라시드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그건…….”
로즈마리는 황궁에 파란을 일으킨 존재였다. 황족은 모두 그녀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루비궁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가끔, 너무 답답할 때면 루비궁을 나와 인적이 드문 정원을 걷곤 했다.
‘아무리 어려도 황자는 황자. 천한 몸으로 감히 황궁의 정원을 돌아다니는 거냐며 화내면 어쩌지.’
로즈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산책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 배에 손을 얹고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잖아. 그걸 묻는 거야.”
“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로즈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즈마리가 배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배 속의 아기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햇살이 얼마나 따스한지 바람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요.”
“왜 그런 짓을 하지? 어차피 배 속의 아기는 듣지도 못하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비꼬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천진한 라시드의 얼굴을 보고 아무런 목적 없는 순진한 질문임을 알았다.
그제야 로즈마리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녀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배 속의 아기도 귀가 있어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엄마의 목소리는 아주 잘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말을 배우지 못한 상태니 뜻을 이해하지 못할 텐데.”
라시드의 심각한 얼굴에 로즈마리가 풋 웃었다.
“그것은 상관없어요.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배 속의 아기는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거든요. 자길 얼마나 사랑하는지도요.”
라시드는 아무 대답 없이 로즈마리의 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라시드가 물었다.
“어마마마께서도 내가 배 속에 있을 때 그런 말을 해 주었을까?”
“…….”
라시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간절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로즈마리는 당황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신 자애로운 분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그런 분의 아들이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마치 엄마의 사랑에 대해 조금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약 그런 것이라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생각하며 로즈마리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황후 폐하께서도 전하를 품고 있을 때 많은 말들을 해 주셨을 거예요. 엄마니까요.”
“…….”
“엄마는 누가 뭐래도 배 속의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법이랍니다.”
거짓이라고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한참 후에 라시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숲의 인형처럼 어여쁜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것이 귀여워 로즈마리는 입을 막았다.
‘황궁의 사람들은 다 무서운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그때였다.
“아……!”
로즈마리가 작은 소리를 내뱉으며 배를 매만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라시드를 향해 로즈마리가 말했다.
“아기가 배를 차네요.”
“배를 찬다고?”
아기가 배를? 그게 가능해?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라시드를 보며 로즈마리가 쿡쿡 웃었다.
그녀는 라시드의 손을 잡아 동그란 배 위에 올려놓았다.
감히 허락도 없이 제 손을 잡은 것을 탓할 새도 없었다.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배 속에서 뭔가 꿈틀거려.”
“그렇죠? 저를 닮았는지 아기가 엄청나게 씩씩해요.”
“…….”
“오늘은 유난히 더 그러네요. 오라버니가 있는 것을 아나 봐요.”
오라버니.
라시드는 신기한 말을 들은 것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로즈마리는 그제야 제 실수를 눈치채고 입을 막았다.
황제의 자식들에게는 형제와 자매라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하나뿐인 황위를 놓고 싸우는 라이벌일 뿐이니까.
거기에 라시드는 황후의 아들. 차기 황좌에 가장 가까운 자다.
그에 반해 제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천한 어미를 둔 존재였다.
‘그런 이에게 오라버니를 운운하다니.’
불쾌할 법했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것을 탓하는 대신 신기하단 얼굴로 물었다.
“내가 오라버니야?”
“……사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배 속의 아기가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딸이 낳고 싶어 여자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만 오라버니라는 말이 나갔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라시드가 빙그르 눈을 휘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라. 나쁘지 않네.”
심하게 예쁜 미소였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볼 만큼.
‘황제 폐하도 대단한 미남인데 황자 저하는 그보다 더 미모가 대단하잖아!’
콩알만 한 지금도 이렇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인데, 다 자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할까.
어린 황자의 미래를 떠올리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그때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라시드 황자 저하, 어디 계십니까.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 순간 라시드의 얼굴이 바뀌었다.
천진한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만이 남았다.
“이만 가 봐야겠어.”
라시드는 짧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등을 바라보던 로즈마리가 소리쳤다.
“아기가 태어나면 루비궁에 놀러 오셔요, 황자님!”
“…….”
“아기는 볼이 말랑하고 따뜻하고 좋은 냄새도 난답니다. 황자님께서는 분명 동생을 예뻐하실 거예요.”
라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즈마리는 응, 이라는 작은 대답을 들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황궁 가장 안쪽에 사는 라시드와 구석진 곳에 사는 로즈마리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종종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아기는 잘 있을까?’
그녀를 만나러 가 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황후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로즈마리 님께서 출산 중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
“다행히 아기님은 무사히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라시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소문이 좋지 않은 후궁이야. 그런 사람까지 신경 쓸 것 없단다, 라시드.”
황후의 말 때문이다.
황후는 라시드가 천박한 여인과 얽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황후가 자리를 비운 어느 날, 라시드는 몰래 황자궁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루비궁이었다.
주인을 잃은 궁은 적막했다. 어찌 된 일인지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라시드는 주저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
환한 햇빛 아래, 작은 침대 위에 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라시드는 천천히 아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로즈마리의 말은 진짜였다.
“……예쁘다.”
아이는 작고 뽀얗고 귀여웠다.
특히 터질 것 같은 볼살이 제일.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게 웃기지만.”
제 험담을 한 것을 알아챈 것일까. 타이밍 좋게 아기가 눈을 떴다.
아기는 커다란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어린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까르르 웃었다.
해사한 미소에 라시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그런 기분.
라시드는 힘차게 버둥거리는 아기의 손에 손가락 하나를 쥐여 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올 수 없을 거야. 내가 이곳을 왔다는 걸 알면 어마마마께서 속상해 하실 테니까.”
너를 살뜰히 챙길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너와 황좌를 놓고 겨루어야 하는 존재니.
하지만…….
“내가 어른이 돼서 힘이 생기면 너를 도와줄게.”
“뿌아?”
헤실거리는 어린 동생을 향해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의 오라버니니까, 아리스.”
외전 2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