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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버려진 공주님 (4/27)

2. 버려진 공주님

다음 날, 시아나는 수습 시녀들이 입는 잿빛 제복을 벗고 갈색 제복을 입었다.

수많은 수습 시녀들이 그토록 입고 싶어 하는 하급 시녀의 옷이었다.

단정히 빗은 머리 위로는 츄츄에게 선물받은 머리핀을 꽂았다.

시아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좋아. 준비 끝.”

시아나는 아리스 공주님이 있는 루비궁으로 향했다.

루비궁.

실상 이름만 궁이지 소담한 정원과 방 세 개가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시아나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시녀가 뛰어나왔다.

“어서 와요, 시아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녀는 시아나와 같은 갈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같은 하급 시녀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의아했다.

보통 가장 직위가 높은 시녀가 신입을 맞아 주기 때문이다.

시아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시녀가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시녀예요.”

“예?”

“다른 시녀들은 다 도망가 버렸거든요.”

충격적인 말을 내뱉은 시녀는 우울한 얼굴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나도 기회만 됐다면 진작 도망갔을 텐데 말이죠.”

“…….”

그러고 보니 시녀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다크 써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었고 창백한 안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했다.

얼마나 힘겹게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시아나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말했다.

“혼자서 많이 힘드셨겠어요.”

시아나의 말에 시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공주님의 시중을 드는 게 제일이요.”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럽게 진급을 한 탓에 시아나는 궁의 주인인 아리스 공주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주님께서 많이 까다로우신가 봐요.”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에요. 공주님은…….”

시녀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황궁에서 제일 악독한 악마랍니다.”

* * *

아리스 공주.

황제의 막내딸이었으나, 그녀의 인생은 사랑받는 공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친모가 비천한 신분의 무희였기 때문이다.

천한 피가 섞인 반쪽짜리 공주.

설상가상 친모는 아리스 공주가 태어나던 날 죽어 버렸다.

상심한 황제는 다시는 루비궁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아리스 공주는 황실에서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주님께서는 무시무시하게 자랐답니다. 공주님을 모시던 시녀들이 죄다 도망갈 정도로 말이에요.”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시아나는 담담했다.

그렇겠지.

친어머니는 죽고, 아비란 작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데.

‘그런 상황에 씩씩하고 아름답게 자란다는 게 더 이상하다.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비틀어졌겠지.’

내가 그랬으니까.

그런 시아나의 생각도 모르고 시녀는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니 공주님이 어떤 행동을 해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시녀를 따라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공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아나는 복도를 거닐며 건물을 살폈다.

‘크기는 작아도 허투루 지은 곳은 아니야.’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 하나하나가 고급스럽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도 빛이 고왔다.

‘정원도 자세히 보면 예쁜 꽃이 많이 심어져 있고.’

잡초가 우거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에 핀 꽃들은 하나같이 화사하고 귀한 종류들이었다.

적어도 루비궁이 막 지어졌을 때에는 아주 멋진 곳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지금은 볼품없어 보이지만.’

시아나의 시선이 닿은 곳은 거미줄이 쳐진 천장이었다.

잠시 후 시녀와 시아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는 긴장한 얼굴로 큰 숨을 두어 번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아리스 공주님, 새 시녀가 인사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주님.”

잠시 후, 방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시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마치 공주의 방이 아니라, 흉악한 마왕의 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것이 무색하게 시녀는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꺄아아아아!”

시녀의 코앞에서 다리 8개 달린 징그러운 거미가 대롱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기는 어찌나 거대한지 어른 주먹보다 컸다.

거미를 긴 끈에 묶어 흔들던 아리스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놀라니 열심히 잡아 온 보람이 있네.”

공주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자르지 않아 산발이 된 붉은색 머리카락. 어깨 한쪽이 드러나는 헐렁한 잠옷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

‘세상에. 공주가 아니라 거지 같아.’

그것이 시아나의 아리스 공주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아리스는 시녀의 옆에 선 시아나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너는 왜 아무 반응도 없어?”

“아, 죄송합니다. 더 엄청난 것에 정신이 팔려서. 지금이라도 기대하신 반응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리는 찰나, 시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딱 듣기 좋은 소프라노였다.

시아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아리스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이것보단 우는 게 더 취향이신가요?”

“뭐, 뭐?”

해괴한 말에 아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스의 대답이 없자 시아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럼 이제 인사를 해도 될까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시아나는 한 발짝 다가갔다.

아리스의 앞에 선 시아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황족을 향한 인사였다.

“고귀하신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녀, 시아나 인사드립니다.”

“…….”

평범한 인사였다.

그러나 아리스는 시아나에게서 다른 시녀들에게서는 느껴 본 적 없는 느낌을 받았다.

오묘한 압박감이었다.

‘말도 안 돼. 시녀 따위에게 내가.’

아리스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시아나를 힘껏 노려보며 소리쳤다.

“인사했으면 당장 나가. 난 시녀 같은 건 질색이니까.”

“넵.”

빠르게 대답한 시아나는 아직까지 바닥에 앉아 떨고 있는 시녀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쿵.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아리스는 시아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괴생명체였다.

* *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아, 공주님이라는 분이 어떻게 저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죠? 아무리 사랑받지 못하고 컸다지만 저건 좀 심하잖아요! 하여간 천박한 핏줄은 어쩔 수 없어.”

시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시녀의 행동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시녀님, 주먹만 한 거미가 눈앞에 아롱거려서 놀란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도망가시면…….”

“도망 아니에요.”

“네?”

“아, 말 안 했던가요. 전 오늘부로 이 궁을 떠난답니다. 세탁실로 근무처를 옮기게 됐거든요.”

“…….”

“진~작에 이 끔찍한 곳을 나가고 싶었는데, 오는 시녀들이 없어서 못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시아나 시녀님이 오셨으니 전 이제 자유인 거죠.”

그녀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끔찍한 곳이에요. 하지만 다른 시녀가 배정되면 어찌어찌 빠져나올 기회가 생기니 그때까지 잘 참아 보세요.”

“자, 잠시만요.”

시아나는 시녀를 붙잡았다.

“그래도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셔야…….”

“별것 없어요. 공주님만 챙겨 주면 돼요.”

“다른 일은요?”

시녀의 업무는 주인의 시중을 드는 것만이 아니었다.

빨래, 청소, 정원 가꾸기 등의 일도 해야 했다.

“눈치껏 해요. 어차피 이 별채에는 당신과 저 어린 악마뿐이니까.”

보는 사람이 없으니 설렁설렁하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시녀는 사라졌다.

작은 궁에는 시아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뭘까.’

수습 시녀에서 대뜸 공주님을 모시는 정식 시녀가 된 것도 황당했지만, 이 상황은 더 황당했다.

‘나 혼자 공주님을 모시라고?’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라면 해야지, 뭐.’

그럼 일단 뭘 해야 할까.

시아나는 성을 둘러보았다.

궁은 공주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더러웠다.

얼룩이 찌들어 거뭇해진 바닥, 먼지가 소복하게 앉아 있는 창문틀, 때가 묻은 커튼.

잡초가 우거진 정원은 밀림에 가까웠다.

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이곳을 맡은 시녀들이 얼마나 대충 일했는지 알 만하네. 내가 온 이상 더는 그 꼴 못 보지.’

“일단 청소부터 하자.”

시아나는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먼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 * *

시아나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바닥에 쌓여 있던 먼지가 엄청 났다.

“콜록, 콜록.”

그 후에는 브러시로 찌든 때를 없앴다.

브러시로 바닥을 벅벅 문지르자 회색이었던 바닥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묵은 때에 감춰져 있던 본래의 색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얼마나 청소를 안 했으면.’

덕분에 보람은 있었다.

손이 갈 때마다 확확 달라졌으니까.

바닥도 닦고, 창문도 닦고, 곳곳에 놓여 있는 장식품도 닦았다.

점점 깨끗해지는 성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

신발도 신지 않은 작은 발.

앙칼진 목소리.

물어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리스 공주였다.

시아나는 순식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모았다.

“공주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

아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야.’

너무 정중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시녀는 처음이었다.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뭘 모르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러니 청소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아리스가 황제에게 버림받은 공주라는 걸 알게 되면 분명 태도가 바뀔 것이다.

동정하거나.

무시하거나.

‘그러고는 내 곁을 떠날 테지. 난 다 알아.’

아리스가 시아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착한 척하지 마. 어차피 너도 다른 시녀들처럼 기회가 생기면 도망가 버릴 거잖아!”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막았다.

“세상에.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아셨지?”

예상과는 다른 시아나의 반응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는 이렇게 된 거 숨길 필요 없겠다는 듯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어쨌건 저는 봉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니까요. 더 좋은 근무처가 생기면 옮기는 게 당연하지요.”

“뭐?”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공주님을 모실 겁니다. 저는 공주님의 시녀니까요.”

“……!”

아리스의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가 그런 말은 난생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커졌다.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와다다다 정원 한편으로 달려가 두 손 가득 나뭇잎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바닥 위로 나뭇잎을 힘껏 뿌렸다.

“이래도?”

“네.”

아리스는 이번엔 창가로 달려가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꾹꾹 눌렀다.

투명한 유리창에는 작은 손 모양 얼룩이 덕지덕지 묻었다.

“이래도?”

“네.”

“……!”

그 후에도 아리스의 못된 짓은 이어졌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이불을 몽땅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모아 놓은 쓰레기를 발로 뻥 차기도 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리스를 주인으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정도 못된 짓은 귀여운 수준인걸.’

시아나는 새 왕비를 떠올렸다.

그녀는 시녀가 마음에 안 들면, 음식을 집어던지거나 분이 풀릴 때까지 괴롭혔다.

그런 것에 비하면 공주의 행동은 이해 범위 내였다.

―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 * *

큰 성에는 따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루비궁에는 요리할 공간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중앙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왔다.

오늘의 요리는 노릇노릇한 빵과 동글동글 빛깔 좋은 포도, 흰 우유와 두툼한 연어 구이였다.

‘공주님의 저녁 식사치고는 소박하지만, 시녀들이 먹는 것보다야 훨씬 훌륭하지. 맛있겠당.’

시아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아리스의 방에 들어섰다.

“공주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는 식사를 보는 순간 웩 하고 인상을 썼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만 있네. 됐으니까 과자나 가져와.”

“…….”

“빨리 가져오지 않고 뭐 해?”

모시는 주인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 말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

‘하지만…… 편식이 너무 심하잖아.’

시아나는 푸짐하게 차려진 식사와 아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결심한 듯 말했다.

“공주님, 과자로 끼니를 때우시는 건 좋지 않아요. 정 드시고 싶으시면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고 드시는 게 어떨까요.”

“왜?”

정말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에 시아나는 기가 찼다.

“그야 과자만 먹으면 건강하게 자랄 수 없으니까요. 공주님 같은 어린아이는 더더욱요.”

아리스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거짓말 마. 과자만 먹었어도 지금까지 잘만 자랐어.”

시아나는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시아나는 굳은 얼굴로 아리스를 훑어보았다.

살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깡말랐다.

키도 작았다.

시아나는 그것이 아리스가 어려서라고만 생각했다. 어린 나이치고 무척 말을 잘한다고도 생각했고.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다면…….

시아나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님,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열 살이다, 왜.”

누가 봐도 여덟 살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이는데!

시아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리스 공주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행색은 거지꼴에, 행동은 뒷골목 아이들처럼 거칠었다.

하루 종일 공부 비슷한 걸 하는 것도 못 봤다.

‘그래도 최소한의 것은 지켰어야지.’

어린아이가 제 나이대로 성장하지 못할 만큼 불규칙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시아나의 속에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시녀가 아닌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아리스 공주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낮은 목소리에, 아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해도 헤실거리며 넘어갔던 시아나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시아나가 아리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자는 식사를 다 하시면 드릴게요. 그러니까…….”

“…….”

“식사부터 하세요.”

이 빵을 당장 입에 넣지 않으면 무서운 꼴을 보게 될 거예요.

—라고 들리는 건 왜일까.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 * *

아리스는 보통 해가 뜬 지 한참 후에야 일어나곤 했다.

아리스를 깨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는 걸 깨우면 짐승처럼 포악해지니 당연했다.

그러나 요즘 아리스의 아침은 달라졌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해님도 새도 일어나는 아침이 왔답니다. 일어나세요.”

‘흥, 누가 일어날 줄 알고.’

아리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시아나가 움직이지 않는 이불고치를 향해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닭고기와 감자가 듬뿍 들어간 스튜와 바삭한 치즈 쿠키, 싱그러운 딸기 샐러드입니다만…….”

“…….”

“피곤해 보이시니 식사를 물려야겠네요.”

그 말에 아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며칠 전, 한껏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시아나가 가지고 온 것은 흰 우유와 수북한 샐러드가 다였다.

우유와 야채를 세상에서 최고로 싫어하는 아리스에게는 끔찍한 한 끼였다.

“이 끔찍한 건 뭐야?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와!”

“아침 식사는 이게 다입니다. 오늘 아침 식사였던 크림빵과 닭고기 구이는 제가 다 먹어 버렸거든요.”

황당한 말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아리스는 기가 찬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미쳤어? 네가 뭔데 내 고기를 먹어?”

분노하는 어린 주인을 향해 시아나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황실의 법도를 따른 것뿐입니다. 황족들께서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한 후 남은 음식은 모시는 시종들이 먹는 것이 관례니까요.”

“뭐?”

“공주님께서 아침을 전혀 드시지 않은 덕분에 포식했답니다.”

—라며 볼록 나온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이라니.

아리스는 분노에 찬 얼굴로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내 고기 내놔! 당장 내놓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패악질을 해 대면 시녀들은 벌벌 떨며 자신의 말을 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러십시오.”

말만 정중하지 ‘네가 날 어쩔 건데.’라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날, 정말로 시아나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다른 음식을 주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팠던 아리스는 끔찍한 얼굴로 샐러드와 우유를 먹어야 했다.

그때를 떠올린 아리스가 이불을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일어난다고! 다시 가져가기만 해 봐!”

“어머나.”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힐끗 힐끗 쳐다보며 아리스는 우적우적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빵가루 하나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아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아이를 밥 먹이는 방법은 간단하지.’

한번 배고픔을 알게 해 주면 어떤 아이라도 밥을 잘 먹게 된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겪어 봤으니까.’

물론 지금처럼 식습관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단순한 벌이었다.

새 왕비는 식사 예법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아나를 종종 방에 가두곤 했다.

그럴 때면 시아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었다.

‘물론 공주님께 그 정도로 가혹한 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일단 제대로 된 영양소 섭취를 시키는 게 중요하니까.’

‘지금 안 먹으면 맛있는 음식은 시아나가 다 먹어 버리지롱~’ 작전은 잘 통했다.

아리스는 순식간에 음식을 깨끗하게 해치웠다. 그러나 시아나의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샐러드만 쏙 빼고 드셨네.’

채소는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중요한 요소다.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시아나는 두 번째 작전을 시행했다.

“꺄,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샐러드를 잔뜩 남기셨네요. 기뻐라!”

“……!”

그 말에 아리스는 접시에 놓인 샐러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시아나는 미소를 숨기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물어라, 물어.’

어린 물고기는 오늘도 훌륭하게 미끼를 물었다.

“아직 다 먹은 거 아니야!”

아리스는 남은 야채까지 싹 긁어 먹었다.

그러고는 시아나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다고 했지?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쩌니. 너는 오늘 쫄쫄 굶어야겠다.”

매일 아침 나를 귀찮게 하는 건방진 시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짜증을 낼까?

분노할까?

슬퍼할까?

그러나 시아나의 반응은 아리스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시아나는 환히 웃으며 아리스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정말 잘하셨어요. 역시 우리 공주님이 최고야.”

“…….”

시아나가 앗, 하고 놀란 얼굴로 아리스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저도 모르게 무엄한 짓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아리스 공주님?”

아리스의 얼굴이 방금 먹은 당근보다 새빨개졌다.

“밥 다 먹었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넵.”

이럴 때는 또 생쥐처럼 잽쌌다.

시아나는 빈 접시를 가지고 총총총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된 아리스는 시아나가 쓰다듬었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고 소리쳤다.

“뭐냐고, 도대체!”

하급 시녀 주제에 감히 공주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다니 너무 건방졌다.

그러나 시아나의 건방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 *

“공주님~.”

상냥하게 아리스를 부르는 시아나의 양손에 들린 건 뽀송뽀송한 스펀지와 비누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아리스가 뒷걸음질 쳤다.

“난 물에 닿는 거 질색이야. 거품 내는 건 더 싫고. 그러니 당장 그 끔찍한 것들 가지고 나가!”

시아나를 노려보는 아리스의 기세는 흉흉했다.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할퀴기라도 할 기세였다.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두 손에 목욕물품을 든 채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씻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신가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나는 내리깐 눈으로 말을 이었다.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작은 벌레가 몸에 알을 낳는답니다. 알에서 태어난 애벌레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사람의 머리카락과 피부를 와구와구 갉아 먹지요. 똥도 싸고요. 가끔 방구도 뿡.”

끔찍한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리스는 며칠째 감지 않아 떡진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그런 벌레 본 적 없어.”

“정말인데……. 공주님, 머리가 간지럽지 않으세요?”

“…….”

“사각사각사각, 하고 작은 무언가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으시냐고요. 벌레가 갉아 먹는 것이랍니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시아나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아리스의 머리통이 간질거렸다.

“으아악!”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어서 씻겨! 어서!”

그렇게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

욕조에 쪼그려 앉은 아리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아리스는 어렸을 때부터 목욕하는 것을 싫어했다. 시녀들도 애써 아리스를 씻기지 않았다.

그러나 황실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아니었다. 아무리 구박데기라도 공주는 공주.

공주를 더러운 몰골로 행사에 참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녀들은 아리스를 붙잡아 반강제로 씻겼다.

싫다고 바동거리는 작은 몸을 거칠게 억누른 채 머리통을 박박 문지르고 사정없이 물을 들이 부었다.

그럴 때면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 눈가가 찌릿찌릿 너무 아파서 아리스는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래도 벌레가 머리통을 다 먹어 버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참자.’

아리스는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꾹 감았다.

“…….”

그러나 시아나의 손길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시원해!’

가는 손가락으로 근질근질한 곳을 요리조리 긁어 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머리 감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리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헹구기가 남아 있었다.

비눗물이 들어갈까 봐 눈을 꾹 감은 아리스의 얼굴 위로 수건이 덮어졌다.

시아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하면 절대로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러니 겁먹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의 힘을 풀었다.

쪼르르.

따스한 물이 머리카락에 흘러들었다. 시아나의 말대로 비눗물은 눈 속으로 조금도 흘러들지 않았다.

머리를 감으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깨끗한 물로 몇 차례 머리카락을 헹군 후, 시아나는 아리스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을 천천히 떼어 냈다.

수건으로 가려져 있다가 열린 시야 속에는 시아나가 미소 짓고 있었다.

“씩씩하게 잘 감으시네요.”

“…….”

그러니까 왜 그렇게 대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냔 말이야.

시녀 주제에.

아리스는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됐지?”

“아직이요. 머리를 바짝 말리는 것까지 하셔야 해요. 벌레는 축축한 머리카락도 좋아하거든요.”

“그놈의 벌레!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게 많아?”

“그러게 말이에요. 나쁜 벌레. 맴매해 줘야겠어.”

진지한 얼굴로 대꾸한 시아나는 아리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토닥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이번에도 별말 하지 않고 얌전히 시아나에게 몸을 맡겼다.

가는 머리카락은 금세 말랐다.

시아나가 뽀송뽀송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세요, 공주님. 머리를 감으니까 벌레가 사라진 게 느껴지시나요?”

시아나의 말대로였다.

늘 간지럽던 머리가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것을 순순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아리스는 대답 대신 입술을 쭉 내밀었다.

* * *

해가 지고 새까만 밤이 찾아왔다.

시아나는 ‘니가 안 먹으면 내가 먹지롱’ 작전으로 아리스의 저녁을 챙겨 먹이고 양치질까지 시켰다.

“이를 제대로 닦지 않으면 이번에는 벌레가 이에 생길 텐데요?”

“…….”

“작고 고약한 벌레는 음식물이 달라붙은 이를 사각사각…….”

“아!”

아리스는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구석구석 양치를 시킨 시아나는 은근슬쩍 아리스를 꼬드겼다.

“식사도 하고 깨끗이 씻었으니 이제 침대에 누워 볼까요?

아리스는 시아나의 의도를 깨닫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달달 볶더니 자는 것까지 참견할 셈이야? 내가 자고 싶을 때 잘 거니까, 어서 나가!”

그럼 곤란하다.

혼자 두면 아리스는 이것저것 하다가 늦은 밤에야 잠이 들 테니까.

어린아이는 일찍 자야 한답니다. 그래야 키도 쑥쑥 크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좋은 사이클을 유지할 수 있어요.

그렇게 설득하는 대신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아쉽네요. 공주님이 침대에 누우면 잠자는 걸 도와드릴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했는데…….”

“……재밌는 이야기?”

아리스가 귀를 쫑긋했다.

아리스는 평범한 아이답게 이야기라면 환장을 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매정하게도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을 무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다 하니 이만 나가 보겠습…….”

아리스가 시아나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알았어. 재우고 가.”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리스는 머릿속으로 악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흥, 얌전히 잘 줄 알고. 계속 잠들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할 거야.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아리스에게 이건 이야기도 듣고, 잠도 자지 않고, 시녀도 괴롭힐 수 있는 최고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눕는 순간 아리스는 위기를 맞이했다.

늘 눅눅했던 이불에서 햇볕에 말린 좋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름처럼 푹신하기까지 했다.

시아나가 힘찬 비누질과 방망이질로 뽀송하게 만든 이불이었다.

“…….”

게다가 여느 때보다 아침 일찍 일어났고, 배가 빵빵할 만큼 밥을 먹은 데다,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했다.

잠이 솔솔 밀려왔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아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자면 안 돼! 그럼 저 건방진 시녀에게 지는 거라고!’

그런 아리스의 귓가에 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이아몬드 공주님이 있었답니다. 다이아몬드 공주님은 이름처럼 다이아몬드를 좋아했어요. 공주님은 이곳저곳에서 다이아몬드를 모았고,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식하고 다녔죠. 공주님은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비록 황궁 구석에서 초라하게 지내긴 하지만 아리스는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 아리스에게 다이아몬드와 공주의 조합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공주님은 서쪽에 사는 사악한 드래곤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공주님은 그 다이아몬드를 너무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주님은 사악한 드래곤을 찾아갔답니다.”

시아나는 슬쩍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의 눈이 살짝 감겨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시아나는 자장가를 부르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주를 본 드래곤이 말했어요.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나랑 결혼을 한다면 다이아몬드를 주겠다.”

아리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눈썹을 추켜세웠다.

“도마뱀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그 말에 시아나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감히 시녀가 공주의 말을 비웃느냐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리스는 그새 잠들어 버렸으니까.

쌔액 쌔액.

어린아이 특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시아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목적을 이룬 시아나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가슴 위로 이불을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꿈나라로 간 어린 공주에게 인사했다.

“좋은 꿈 꾸세요, 공주님.”

* * *

아리스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 매달려 있었다.

아리스의 모습은 며칠 새에 부쩍 달라져 있었다.

창백하고 야위었던 얼굴은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뒤엉켜 있던 머리카락은 깨끗이 정리되어 윤기가 났으며, 구질구질했던 옷은 깨끗한 데다 비누 향까지 났다.

바뀐 것은 아리스만이 아니었다. 루비궁의 모습도 바뀌었다.

거미줄과 먼지가 수북하고, 쾌쾌한 냄새가 났던 루비궁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잡초가 무성했던 정원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모두 시아나 덕분이었다.

달라진 루비궁을 내려다보며 아리스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 시아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정원에 쭈구려 앉아 있었다.

아리스는 사냥감을 발견한 눈빛으로 시아나에게 다가갔다.

시아나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등 뒤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질러야지. 모아 놓은 잡초가 있으면 다 헤집어 놓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화도 낼 거야.

그럼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화를 내겠지?

그런데……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에 귀를 쫑긋거린 시아나가 번쩍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밟으면 안 돼요, 공주님!”

“……!”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걷던 자세로 멈춰 버렸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곁으로 다가와 설명했다.

“방금 꽃을 심었거든요. 밞으면 씨앗이 아파한답니다.”

“…….”

아리스는 그제야 시아나의 손에 들린 삽과 씨앗주머니를 보았다.

아리스는 루비궁에서 씨앗을 심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좀 신기했다.

“……무슨 꽃을 심었는데?”

“장미, 해바라기, 수국, 여러 가지 꽃을 심었어요. 햇빛도 잘 들어오고 흙도 고와서 물만 주면 잘 자랄 거예요.”

시아나는 아리스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꽃이 피면 예쁜 화관을 만들어 드릴게요.”

“…….”

햇볕에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시아나의 얼굴은 기뻐 보였다.

그 모습에 왜 그렇게 심장이 간지러운지.

결국 아리스는 계획했던 못된 짓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냐고, 그 시녀.”

아리스는 혼란스러웠다.

시아나는 정말 자신을 공주님으로 제대로 모실 생각인 걸까.

그래서 저렇게 쪼그만 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뽈뽈뽈뽈 움직이는 걸까.

이내 아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어.”

지금까지 루비궁을 거쳐 간 시녀들은 대부분 아리스를 무시했지만, 그중에는 이따금 시아나처럼 아리스에게 다정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었다.

그래도 황제의 핏줄인데, 공주인데, 잘 대해 주면 뭐라도 하나 나오지 않겠냐는 속셈이었을 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들은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곤 했다.

아리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시녀는 더더욱.

“분명 저 시녀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래서 아리스는 시아나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는 중이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등 뒤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청소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긁다 보면 누구든 본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아나는 아직까지 아리스에게 화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작은 개미가 지나간 것만큼이나 별일 아니라는 듯 웃기만 했다.

아리스는 그 점이 너무나 거슬렸다.

“뭘 해야 진짜 모습이 튀어나오려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민하던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반짝이는 것을 손에 들었다.

“이건…….”

에메랄드색 구슬이 달린 핀이었다.

건방진 시녀가 매일 머리 위에 꽂고 다녔던.

아리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작은 악마처럼 사악하게 빛났다.

* * *

시아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루비궁에 들어섰다.

시아나가 든 바구니에는 오늘 아리스가 먹을 음식이 듬뿍 담겨 있었다.

평소 아리스에게 지급되는 음식량은 턱없이 적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특별히 푸짐했다.

시아나가 음식을 배급해 주는 주방시녀에게 떤 아부가 먹힌 덕분이었다.

[으아앗, 눈부셔라. 시녀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버릴 뻔했어요.]

주방 시녀는 까르르 웃으며 고기와 빵을 몇 점 더 얹어 주었다.

시아나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화로에 구운 왕 닭다리가 무려 네 조각!”

공주님께 푸짐한 고기를 대접하게 되어 기뻤다.

남은 음식은 시아나의 것이니 더 기뻤다.

“기분 나쁘게 뭘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와. 몰래 과자라도 훔쳐 먹은 거 아냐?”

시아나의 앞에 팔짱을 낀 아리스가 나타났다.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려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리스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 꽂힌 에메랄드색 핀 때문이다.

‘저건…….’

분명 시아나의 핀이었다.

시아나는 당황한 얼굴로 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항상 꽂혀 있던 핀이 자리에 없었다.

시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일하느라 바빠도 그렇지 머리핀이 빠진 것도 몰랐다니.’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주님, 아뢰옵기 송구합니다만 머리에 꽂고 계신 핀은 제 것입니다. 제가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모양이에요.”

시아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리스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핀을 주워 꽂은 것이라고.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면 민망해하며 네 것인 줄 몰랐다고, 누굴 거지로 아냐며 돌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의 반응은 시아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런데?”

“…….”

아리스는 턱을 치켜들며 심술궂은 얼굴로 말했다.

“내 궁에서 내가 주웠으니 내 거야.”

“…….”

시아나는 깨달았다.

이 상황이 아리스의 숱한 괴롭힘 중 하나라는 것을.

다른 때라면 아리스에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츄츄가 준 소중한 핀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아리스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제게 소중한 물건입니다. 돌려주세요.”

“…….”

시아나에게서 새어 나오는 오묘한 압박감에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눈에 힘을 줬다.

‘시녀 따위가 뭐라고 겁을 먹어. 나는 공주야!’

아리스는 최대한 못돼 보이는 얼굴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돌려받고 싶으면 뺏어 보든가.”

아리스는 메롱, 하고 혀를 내밀더니 저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발이 빨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녀들과 쫓고 쫓기는 수많은 추격전에서 늘 승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시녀, 왜 저렇게 빨라?’

두다다다다.

시아나는 엄청난 속도로 아리스를 쫓아오고 있었다.

달리기에 집중해서인지 평소와 달리 올라간 눈초리가 매서웠다.

꼭 사냥감을 쫓아오는 성난 고양이 같았다.

‘무, 무서워.’

아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쫓기는 자의 본능이었다. 절대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는 오래 도망가지 못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인공 연못 때문이다.

루비궁 구석에 만들어진 인공 연못은 크기는 작지만 수심이 깊어서 어린아이가 두 다리로 건널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씨!’

아리스는 연못을 등지고 멈췄다. 이내 다가온 시아나가 퇴로를 막듯 아리스의 앞에 섰다.

시아나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도 주인이 명확한 타인의 물건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제 핀을 돌려주세요.”

엄한 목소리에 아리스는 화가 났다.

이것 봐. 언제는 날 주인님으로 최선을 다해 모신다느니 떠들어 대더니, 결국은 말뿐이잖아.

‘이까짓 핀이 뭐라고.’

아리스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싫어!”

아리스는 머리 위에 있던 핀을 빼더니 힘껏 던져 버렸다.

퐁-.

머리핀은 맑은 소리를 내며 연못 안으로 빠져 버렸다.

“…….”

“…….”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정적이 맴돌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한 박자 늦게 아리스는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아리스는 굳은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래진 눈으로 연못을 바라보던 시아나의 눈빛이 일순 사납게 변했다.

선연한 분노였다.

아리스는 저런 눈빛을 아주 잘 알았다.

아리스가 어느 선을 넘었을 때, 시녀들은 저런 눈빛을 하고는 했다.

그러고는 여지없이 폭력이 날아왔다.

‘맞는다.’

아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등을 돌려 돌아왔던 길로 걸어가는 시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리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냥 가?”

왜 나를 때리지 않고 그냥 가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대답했다.

“저는 수영을 하지 못해요. 연못에 들어간다 해도 워낙 작은 핀이니 찾기 힘들 테고요.”

“…….”

“무엇보다 업무 시간에 그런 개인적인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시아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아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시아나의 지독한 상실감을.

“저기…….”

아리스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시아나는 사라지고, 연못 앞에는 아리스 홀로 남았다.

* * *

그날 시아나는 아리스의 저녁 식사를 챙기고, 씻기고, 잠자리를 봐 주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편안히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시아나가 한 번도 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농담도 없었고 머리를 쓰다듬지도 않았다.

잠자기 전 들려 주던 이야기도 없었다.

시아나는 한없이 정중한 얼굴로 아리스를 대할 뿐이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쿵.

방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아리스만 혼자 남았다.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떡해. 진짜 화가 났나 봐.’

어쩌면 이건 아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상황이었다.

시아나의 가면을 벗기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 웃는 가면을 쓰며 위선을 떨어 대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았다.

“…….”

그럼에도 아리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아리스는 결국 그날 밤 잠을 설쳤다.

해가 뜰 무렵에야 잠이 든 아리스는 꿈을 꿨다.

갈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얼굴을 가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아리스의 친모를 모셨던 시녀였다.

그녀는 아리스의 친모가 죽은 후에도 루비궁을 떠나지 않고 오랜 시간 아리스를 돌봤다.

포근한 그녀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아리스는 스르르 잠이 왔다.

‘꼭 엄마 같아.’

아리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아리스에게 그녀는 세상의 전부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루비궁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병사들은 그녀를 포박했다.

“네년이 루비궁의 물건을 훔쳐 팔았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리스를 향해 소리 질렀다.

“공주님, 공주님, 살려 주세요!”

아리스의 나이는 고작 네 살이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은 어린아이에게 그저 공포 그 자체였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리스는 몸을 움직여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아리스는 파들파들 떨면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그만해. 명령이야.”

황족의 말은 그 자체로 힘이 있었다. 황족이 명령하면 일개 병사들은 그 즉시 행동을 멈춰야 했다.

그러나 버려진 공주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병사들은 흥, 하고 아리스를 무시하며 시녀를 끌고 나갔다.

“공주님!”

시녀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스는 쪼그려 앉아 시녀를 기다렸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계속 나왔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시녀가 돌아왔다.

핼쑥해진 얼굴에는 시퍼런 멍 자국과 새빨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체벌의 흔적이었다.

아리스는 눈물을 왈칵 흘리며 시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시녀가 루비궁의 물건을 훔쳤다는 건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아리스는 그녀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돌아오면 잘해 줄 거야. 줄 수 있는 건 다 줄 거야.

그러나 시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아리스는 심장이 차갑게 굳는 기분을 느꼈다.

시녀의 눈빛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공주니까 곁에 있으면 조금은 쓸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쓸모없는 년.”

그것이 시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시녀는 짐을 싸서 궁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 수많은 시녀가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금방 루비궁을 떠났다.

누군가는 아리스가 쓸모없어서, 아리스가 미워서, 아리스가 귀찮아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아리스도 변했다.

아리스는 시녀들에게 심술 맞게 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도 떠나갈 사람들이잖아. 그렇다면 이편이 더 나아.

버림받는 것보다, 내가 못된 아이라서 떠나가는 편이 훨씬…….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공주님을 모시는 것은 이제 질렸어요.”

마지막에 보인 시녀의 얼굴은 시아나였다.

* * *

“……!”

아리스는 눈을 번쩍 떴다.

제대로 자지 못해 초췌해진 얼굴로 아리스는 고개를 휙 돌렸다.

창문에는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요 며칠, 시아나가 똑똑 문을 두들기던 아침이 온 것이다.

그러나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리스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짓을 했는데 올 리가 없잖아.”

어쩌면 시아나는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루비궁을 떠나겠지.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될 거야.’

아리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커다란 눈에 맺힌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찰나…….

똑똑.

참새가 두들기는 것처럼 경쾌한 노크 소리.

“공주님, 해님도 새도 일어나는 아침이 왔답니다. 일어나세요.”

“…….”

시아나의 목소리였다.

아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시아나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선 시아나는 아리스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시아나는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침대 옆에 놓은 후, 아리스에게 다가왔다.

“아니면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신 건가요? 얼굴색이 좋지 않으세요.”

“…….”

아무 대답 없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주무신 후 식사를 하시겠어요? 너무 졸린 상태로는 입맛도 없으실 테고, 억지로 먹으면 소화도 잘되지 않을 테니까요.”

시아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건 특수한 상황이니까요. 공주님의 식사에 조금도 손대지 않을게요.”

순한 얼굴로 밉살스런 말을 하는 시아나는 평소와 똑같았다.

어제 느꼈던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는 왈칵 눈물이 솟아났다.

아리스는 바들거리는 두 손으로 시아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 미안해.”

“……!”

아리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어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 정말이야.”

“…….”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아리스는 공주였고 시아나는 일개 시녀였다.

그러니 그녀는 시아나의 감정이 어떨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스는 진심으로 시아나에게 잘못을 빌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

아리스를 빤히 바라보던 시아나는 허리를 숙여 어린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안 미워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그럼 어제는 왜 그랬는데!”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는 어제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좀 차가웠나.’

하지만 그건 핀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속상함이었을 뿐 아리스에 대한 미움은 아니었다.

“어제 일은 공주님께서 너무하시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어린아이가 종종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다는 걸 알아요.”

“…….”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시니 더더욱요.”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따스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아리스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심장을 억누르던 무게감이 조금 사라졌다.

그래서 아리스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네가 루비궁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시녀는 너 하나뿐이고 할 일은 너무 많고…… 하나 있는 황족은 쓸모없고.”

“…….”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시아나는 도대체 이 어린 공주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눈썹을 찡그렸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아리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내가 널 도울게. 청소도 빨래도 같이할게. 말도 잘 들을게. 음식도 나눠 먹을게. 착한 아이가 될 게. 그러니까…….”

“…….”

“계속 루비궁에 있어 주면 안 돼?”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시아나의 가슴을 후려졌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지금까지 시아나는 아리스를 철저히 공주로 대했다.

서로 아옹다옹하긴 했으나, 아리스는 일국의 공주고 자신은 일개 시녀일 뿐이라고.

아리스를 돌보는 것은 시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그 선이 깨졌다.

처음으로 아리스가 공주가 아닌 어린아이로 보였다.

고집이 세고, 솔직하지 못하고, 눈물이 많고, 안쓰럽고, 귀여운 그런 아이.

그래서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고 말았다.

“그럴게요.”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아리스의 눈동자에 의심이 머물렀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대충 대답하는 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원래 저는 루비궁에서 일하는 게 만족스러웠어요. 시녀는 저뿐이라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아 재미도 있거든요. 딱 하나 힘든 게 있었다면 못된 공주님이었는데…….”

“…….”

“공주님이 먼저 말을 잘 듣겠다 하셨으니 그 문제도 해결됐어요. 이제 이곳은 제게 최고의 일터인 셈이죠.”

시아나는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잘 지내 봐요, 공주님.”

아리스가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응!”

맞잡은 시아나의 손은 조금 거칠 긴 했으나 따뜻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사람의 온기에 아리스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 * *

그날 이후 아리스는 완전히 변했다.

아리스는 더 이상 시아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병아리처럼 쫄쫄쫄 따라다니며 시아나를 도왔다.

아리스는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데다 센스도 좋았다.

홀로 궁을 관리하던 시아나에게 아리스의 작은 두 손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아리스가 하루 종일 그런 노동을 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시아나는 정원에 물을 주는 아리스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공주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도움을 받을게요.”

“무슨 소리야. 아직 할 일이 많잖아. 빨래도 널어야 하고, 걸레질도 해야 하고…….”

“그런 건 저 혼자 해도 돼요.”

“하지만……!”

“공주님은 어린이잖아요.”

“…….”

“어린이에게는 청소나 빨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뭔데.”

시아나가 빙긋 웃었다.

“공부요.”

아리스가 으헥, 하고 똥 씹은 얼굴을 했지만 시아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는 것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하시지만 공부는 아니잖아요. 공주님께선 공부를 하실 필요가 있어요.”

원래 황족은 어릴 때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 아리스는 아니었다.

아리스는 열 살이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려운 교양 지식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글자는 제대로 익혀야지.’

시녀들에게 대충 배운 탓에 아리스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글자는 몇 자 읽었지만 쓰는 것은 거의 못했다.

다행히 시아나는 제국어에도 능통했다. 아리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루비궁에는 종이와 펜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인데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글을 써 가며 배울 수는 없잖아.’

시아나는 성의 물품 보급소를 찾아갔다.

황족은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급소를 관리하는 시종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종이와 펜은 고급품이다. 그런 것을 함부로 줄 수는 없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러나 시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절대 허툰 데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의 공부를 위한 것이에요.”

“흥,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느냐. 루비궁의 시녀들이 공주님께 필요하다며 이것저것 받아 간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

“도둑들에게 황궁의 물자를 함부로 내주었다며 벌을 받고 파직한 이들이 수두룩해. 나는 그런 더러운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물건이 정 필요하면 다른 황족의 확인서를 받아 와. 그럼 내주지.”

“…….”

다른 황족의 확인서라니.

누가 아리스 공주를 위해 그런 것을 써 준단 말인가.

‘그런 것을 써 줄 사람이 있었다면 애초에 저렇게 버려진 아이처럼 자라지도 않았겠지!’

심란해하는 시아나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고민 끝에 말했다.

“라시드 오라버니께 말해 볼까?”

익숙한 이름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 전하요?”

“응. 그나마 이 황궁에서 내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은 오라버니뿐이니까.”

“…….”

시아나는 황태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달의 신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고 사람을 베는 잔혹한 자라는 것.

비록 자신을 구해 주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지나가는 변덕이었을 터였다.

‘그런 사람이 과연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이복동생을 도와줄까?’

게다가 황태자는 드넓은 황궁에서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존재.

그런 자에게 아리스 공주의 이름이 적힌 서신이 제대로 도착하기나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보자. 공주님 말대로 딱히 도움받을 곳도 없으니까.’

시아나는 일말의 기대감 없이 황태자의 궁에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안녕.”

“…….”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비궁에 들어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섬세한 선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황태자, 라시드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아나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라시드가 두 눈을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시아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을 느꼈다.

‘날 기억해?’

시아나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해 주리라고도.

예상과 다른 라시드의 모습에 어떻게 대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아리스가 나타났다.

아리스는 아름다운 오라버니를 환한 미소로 맞는 대신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라버니가 여기까진 웬일이야?”

“소중한 동생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서신을 받고 찾아왔지.”

우웩.

아리스는 토하는 표정을 지었다.

“종이와 펜을 주라는 확인서만 보내 주면 됐는데.”

“물론 확인서도 가져왔어.”

라시드는 황태자의 인장이 찍힌 종이를 살랑거렸다.

아리스는 눈을 번뜩이며 종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흡사 생선에게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잽싼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유려하게 아리스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여전히 성격이 급하구나, 어린 동생아. 손님이 왔으면 원하는 것을 빼앗기 전에 일단 차를 대접해야지.”

라시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아나였다.

보라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시아나를 달래듯 라시드는 두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차 한잔 타 주겠니?”

원칙적으로 시아나는 주인인 아리스의 명령만 들어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그런 것 따윈 상관 않고 황궁의 모든 시녀를 부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 명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황태자 전하. 루비궁에는 전하께 대접할 만한 찻잎이 없습니다.”

식사도 겨우 받아 오는 처지인데 찻잎 같은 고급품이 있을 리가.

시녀들이 마시는 싸구려 찻잎이 다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공주가 사는 궁에 제대로 된 찻잎이 없냐며 황당해하려나.’

아니, 그 정도면 다행이지.

잽싸게 찻잎을 구해 오지 않고 뭐 하냐며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시드는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 솔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라시드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라시드는 솔에게서 받은 물건을 다시 시아나에게 건넸다.

물건을 확인한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아스티산의 다즐링이었다.

워낙에 재배하기가 힘들어 금보다 비싸다는 말이 나도는 최고급 찻잎.

라시드는 나 잘했지, 라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됐지?”

“……네.”

“그럼 이제 차를 끓여 주렴.”

꼭 어서 쿠키를 구워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 같았다.

* * *

이곳은 제국의 황족들이 모여 사는 황궁이다.

그러니 한번쯤 황태자를 마주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라시드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엄청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고작 차를 따르는 건데 왜 저런담.’

시아나는 라시드의 눈빛이 불편했지만 그 말을 솔직히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시녀, 저쪽은 황태자.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야지.’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차를 따르는 데 집중했다.

달칵, 차 뚜껑을 열고.

바스락, 찻잎을 푸고.

또르르, 뜨거운 물이 찻잔을 채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건만 라시드와 아리스는 시아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마법 같았다.

평범한 시녀가 우아한 귀부인으로 변신하는 마법.

라시드와 아리스의 찻잔에 차를 따른 시아나가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아리스가 먼저 반응했다.

“대단해!”

아리스는 차에 대해 잘 몰랐지만, 굵직한 연회에 참석하여 본 짬이 있었다.

아리스가 보아도 시아나의 차 따르는 실력이 엄청 났다.

황제 폐하의 곁에서 차 시중을 들던 시녀들보다 더.

“어떻게 하급 시녀가 이렇게 차를 잘 따라? 너 사실 굉장한 사람이었던 거 아냐? 알고 보니 이웃나라 공주님이었다든가!”

어쩜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하나같이 진실만 건드릴까.

시아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공주님은 뜨거운 물을 잘 마시지 못하니 물을 좀 식혔어요. 벌꿀과 우유를 넣어 쓴맛도 줄였고요. 한번 드셔 보세요.”

차를 싫어하는 아리스는 심각한 얼굴로 찻잔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한 모금 들이켰다.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우와, 맛있어!”

지극히 아이다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아이이기 전에 공주였다.

시아나와 단둘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지금은 라시드가 옆에 있었다.

라시드는 예의 없는 어린 동생을 혼낼 수도 있다.

시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힐끗 라시드를 보았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라시드는 아리스를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황홀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

시아나가 라시드를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

갑옷을 입고 피범벅이 된 그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엔 너무 섬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나른한 고양이처럼 편안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시는 아름다운 남자라니.

비현실적이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빠져들 만큼.

찻잔에서 입을 뗀 라시드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말했다.

“여전히 훌륭한 맛이야.”

“……!”

반짝이는 얼굴에 시아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기분을 느꼈다.

겨우 표정을 가다듬은 시아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여전히라고? 마치 내가 끓인 차 맛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네?’

아리스도 그렇게 느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두 사람. 설마 아는 사이야?”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가 얘기하지 않았느냐?”

“전혀.”

“…….”

“오라버니 이야기는 개미 똥만큼도 한 적 없는데.”

“…….”

그 순간 시아나는 라시드의 볼이 살짝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

라시드가 차를 홀짝이며, 뽐내듯 말했다.

“시아나를 황궁의 시녀로 받아 준 것이 나다.”

아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리스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웬일로 그런 짓을 했어?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귀여워서.”

“그렇긴 하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매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기가 찼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가 몇 차례 이어졌다.

라시드의 등 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솔이 다가와 속삭였다.

“전하, 어전회의가 열릴 시간입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차를 아직 덜 마셨는데.”

“벌써 네 잔이나 마시지 않으셨습니까. 배가 볼록하십니다.”

라시드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더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라시드가 일어섰다.

함께 일어선 아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줄 건 주고 가야지.”

“그렇지, 참.”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황태자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였다.

아리스가 라시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확인서의 값은 뭐로 주면 돼?”

“훌륭한 차를 마셨으니 이걸로 됐다.”

아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인간이 내 오라버니가 맞느냐는 얼굴이었다. 라시드는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다음에 한 번 더 초대해 줘.”

“……생각해 볼게.”

“부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라시드는 저보다 한참 작은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스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라시드의 손을 쳤다.

“징그러운 짓 하지 말고 어서 가.”

“그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아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라시드가 아리스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그 피의 황태자가.’

그때, 라시드와 눈이 마주쳤다.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덕분에 맛있는 차를 마셨어. 고맙다.”

그러니까,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일개 시녀에게 하는 인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근하다고요.

시아나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감정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옆에 있던 아리스가 이를 으르렁거렸다.

“남의 시녀한테 치근거리지 말고 어서 꺼지라고!”

* * *

라시드가 떠난 후, 시아나가 말했다.

“공주님이 황태자 전하와 이 정도로 돈독한 사이이신 줄은 몰랐어요.”

남은 차를 훌쩍이던 아리스가 풋 하고 내뿜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공주님의 서신을 받고 선뜻 찾아와 주셨잖아요. 인장이 찍힌 확인서도 주셨고요.”

그것은 여동생을 향한 명백한 호의로 보였다. 그러나 아리스는 시아나의 생각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거래를 한 것뿐이야.”

“…….”

“오라버니는 내게 이 종이 쪼가리 한 장을 주는 대신 빚을 달아 둔 거야. 아니다. 차 마신 걸로 땡 친다고 했으니 그걸로 된 건가.”

눈썹을 찡그리는 아리스의 얼굴은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받은 어린 여동생의 얼굴이 아니라,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빚쟁이 같았다.

“…….”

시아나는 책에서 읽은 제국의 문화에 대해 떠올렸다.

제국 황실은 일부다처제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는 수십 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고, 자식을 본다.

그리고 수많은 자식들은 나이와 서열에 상관없이 동등한 황위 계승권을 갖는다.

그 말은 즉, 모두가 황위를 둔 경쟁자라는 것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황태자는 수도 없이 바뀐다.

황좌를 욕심낸 형제들끼리 죽고 죽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압도적인 권력을 쥔 황태자 라시드와 가장 어린 공주인 아리스에게도 해당됐다.

두 사람은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결코 사이좋은 오누이 같은 건 될 수 없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하긴. 그런 사이라면 애초에 아리스 공주님을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지.’

아리스 또한 자신을 방치한 오라버니에게 조금의 서운함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라시드와 아리스의 관계는 조금 특별해 보였다.

적어도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스는 라시드가 가지고 온 과자를 하나 우물거리며 말했다.

“난 만만하잖아. 어리고, 어머니도 없고, 지지해 주는 가문도 없고.”

왕좌에서 가장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마음 편히 베풀 수 있다.

그것이 동정이든 사랑이든.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실은 이런 거 따위 받고 싶지 않았어. 괜히 빚만 지는 거니까.”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저런 생각을 하다니…….’

시아나의 공주로서의 삶도 순탄치 못했다.

물론 아리스와 상황은 달랐다.

친모는 죽었지만 외가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시아나가 왕국의 공주로서 권력의 일부라도 쟁취하길 바랐다.

그래서 시아나는 어린 나이에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아야 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공주님은 그렇게 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음식에 섞여 있는 피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라든가, 어떻게 하면 늦게 잘 수 있을까 정도가 고민인 평범한 아이처럼 자랐으면.

시아나의 작은 욕심이었다.

* * *

황태자의 인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의 힘은 엄청났다.

시아나가 그것을 내민 순간 물품 보급소는 난리가 났다. 담당 시종은 확 바뀐 얼굴로 말했다.

“원하는 것은 다 가져가.”

“다요?”

시아나는 처음 목표했던 대로 펜과 종이를 챙겼다. 그러고는 슬쩍 눈치를 봤다.

시종은 그것만 가지고 가냐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대담하게 물건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주기만 한다면 가져갈 것은 많았다. 루비궁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으니까.

‘비누와 초는 많을수록 좋으니 잔뜩 가져가자. 천도 두둑하게 챙겨 가서 공주님 옷 좀 만들어 드려야지. 어머나, 다기도 많잖아. 이참에 그릇들을 다 바꾸자. 루비궁에 있는 그릇은 너무 낡았어.’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에 시종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다 가져갈 수 있느냐.”

“그럼요!”

다행히 시종이 나무수레를 빌려 주었다.

시아나는 짐을 가득 채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윽, 무거워.’

시녀 생활을 하며 근육이 제법 붙었다 해도 괴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제 몸보다 큰 짐을 싣고 가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 와중에 황궁 구석에 있는 루비궁은 거리가 멀었다.

‘시녀는 근성!’

이를 악물며 발을 내딛던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수레가 가벼워진 것이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 주고 있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짐 때문에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수레를 멈추고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시아나는 타인의 호의에 우호적이었다.

호의는 받아먹을 수 있을 때 받아먹어야지.

그래서 시아나는 뒤쪽에 들릴 만큼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과묵한 천사님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수레를 밀어 주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시아나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누구인지 몰라도 최고야, 천사님.’

어느새 시아나는 루비궁 앞에 도착했다.

시아나는 수레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쪼르르 수레 뒤편으로 달려갔다.

천사님께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천사님을 보는 순간 시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녕.”

해사한 얼굴로 웃는 사람은 라시드였다.

제국의 황태자. 이 황궁에서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쥔 존재.

그런 사람에게 수레를 밀게 했다고?

신이시여.

시아나는 엄청난 속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고귀한 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마를 땅에 박으며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이 인간이 왜 날 도와준 거지?

심심해서? 내가 힘들어 보여서? 넘쳐나는 힘 좀 쓰고 싶어서?

그 어떤 것도 황태자가 시녀가 끌던 수레를 밀어 준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아니다. 한 가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전에 없던 독특한 방식으로 시녀를 괴롭히려는 속셈이라면 성공이에요, 황태자 전하.’

그만큼 시아나에게 이 상황은 끔찍했다.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거라. 너는 내게 그럴 필요가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왜, 전하께서 내 수레를 밀어 주고 싶냐고요!

시아나의 마음속이 들린 것처럼 라시드가 말했다.

“너는 너무 작고 수레는 너무 크더구나.”

“…….”

“그래서 널 도왔어. 그뿐이야.”

“…….”

어째서인지 조금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어떤 계략도, 괴롭히려는 악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아나의 얼굴을 본 라시드가 방긋 웃었다.

아이처럼 무해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정신이 아닐지도.’

그게 아니면 황태자라는 자가 일개 시녀한테(과거에는 공주였지만) 저런 식으로 자꾸 미소를 날릴 리가 없다.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

시아나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리스 공주님께서 최대한 빨리 궁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라시드는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잡지도 않았다.

다만 정말, 정말 아쉬운 얼굴을 했을 뿐.(여기서 시아나는 한 번 더 그가 미친 황태자라고 확신했다.)

“……알았다. 어서 가 보렴.”

시아나는 번개처럼 대답했다.

“넵.”

혹시나 또 밀어 줄까 봐, 시아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엄청난 속도로 수레를 끌고 루비궁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틈에 호위 기사 솔이 다가왔다.

“어쩐 일로 그냥 보내셨습니까.”

“잡으면 싫어할 테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감정을 신경 썼다고요.

솔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라시드의 얼굴에 아쉬움이 한껏 묻어 있었으니까.

사람을 잔뜩 경계하는 다람쥐를 꼬드기다가 실패했을 때 보았던 얼굴이었다.

‘시아나님이 정말 마음에 드나 보네.’

아리스 공주에게 시아나를 보낸 후, 라시드는 시아나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서 관심이 잠잠해졌나 싶었다.

그러나 어제, 아리스 공주가 보낸 서신을 받는 순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라시드는 서신을 읽자마자 벌떡 일어나 루비궁으로 향했던 것이다.

마치 루비궁에 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시아나님이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솔의 말에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그란 눈이 보고 싶었지. 직접 끓여 준 차도 마시고 싶었고. 그녀는 여전히 귀엽고 차도 잘 끓이더구나.”

“…….”

“그냥 내 궁으로 데리고 올까?”

솔이 눈을 부릅떴다.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집적거리는 것 까진 허용할 수 있다.

어차피 진지한 감정이 아니라, 마음에 든 길고양이를 예뻐하는 정도의 감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시드의 궁에 데려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적이 많은 황태자의 궁에는 능력과 신용이 철저하게 검증된 이들만 입성이 허용됐다.

그러니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기 전에 라시드가 말했다.

“걱정 마라. 정말 시아나를 데리고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솔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눈빛을 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멍청하고 솔직한 기사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어제 루비궁을 보고 느낀 것이 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솔은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궁이 무척 깨끗해졌더군요. 시아나 님은 청소에 재능이 있나 봅니다.”

“그리고?”

“아리스 공주님께서도 상태가 좋아지셨더군요. 시아나 님은 애 보기에도 재능이 있나 봅니다.”

솔의 말에 라시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솔네이트. 아무리 검 한 자루만 있으면 되는 기사라 해도 너는 너무 둔해.”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며 아리스를 떠올렸다.

사람만 보면 야생에 사는 새끼 여우처럼 으르렁거리던 소녀는 놀랄 만큼 평온해 보였다.

사나운 안광을 띠던 눈동자도 초롱초롱 빛났다. 흰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기도 했다.

아리스의 변화를 누가 이끌었는지는 확실했다.

“아리스가 시아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

솔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그녀를 아리스 공주님께 보내신 겁니까?”

라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시아나가 수습 시녀였던 시절 열린 티 파티를 통해 라시드는 깨달은 게 있다.

시아나는 평민에게도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모셨다. 그러면서도 귀족에게는 할 말을 다했다.

그것은 즉, 시아나는 신분이나 힘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비천한 무희를 친모로 두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공주에게도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아리스의 마음을 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요?”

“내 어린 동생은 나와 취향이 똑같아. 내가 귀여워하는 동물들은 그 애도 귀여워했지.”

“…….”

결론은 시아나가 귀엽다는 말이다.

끝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시아나 찬양에 솔은 질린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시드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아나가 타 준 차, 또 마시고 싶다.”

시아나가 또 보고 싶다.

……라는 말로 들려서 솔은 아예 귓구멍을 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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