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수습 시녀의 하루는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시아나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몸단장이었다.
황궁은 무엇보다 ‘우아함’이 중요한 곳이다. 그것은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하는 수습 시녀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나는 긴 밀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고 잿빛 제복을 입었다.
‘그래도 이 옷은 꽤 마음에 들어.’
시녀용 제복은 장식이 일절 없는 심플한 드레스였는데, 주머니도 많아서 일하기에는 딱이었다.
황궁의 품위와 연결되어 있기에 제법 신경을 써 준 제복과는 달리 아침 식사는 초라했다.
보통은 어제 남은 빵과 수프가 지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끝낸 후 일터로 향했다.
오늘 시아나가 배정받은 곳은 빨래방이었다.
‘우와, 많다.’
산처럼 쌓여 있는 빨래 더미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멍하니 구경할 여유는 길지 않았다.
“뭣 하고 있니. 어서 와서 일 시작하렴. 얼룩 하나 남김없이 빨아야 한다.”
“네!”
힘찬 대답 소리와 함께 빨래 지옥이 시작되었다.
쭈그려 앉아 물에 적신 옷감을 방망이질 하는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달에도 입궁하지 않으신대.”
이곳저곳에서 일하다 보면 지금처럼 시종들이나 시녀들이 황궁의 자잘한 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마다 시아나는 일에 몰두하는 척하며 귀를 쫑긋했다.
황궁 생활에서 정보는 곧 힘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성으로 돌아오지 않으신다는 걸 보면 옥체가 많이 안 좋으신 것 아니야?”
“설마.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수습 시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아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현재 부재중이었다.
몇 달 전, 몸이 좋지 않다며 따뜻한 남부로 요양을 갔기 때문이다.
혼자 간 것은 아니었다.
황후와 함께였다.
“황후 폐하께서 살뜰하게 보살펴 주고 계시잖아. 그러니 금방 나으실 거야.”
“그래야 될 텐데.”
“그나저나 황후 폐하 정말 대단하시지 않니? 아무리 두 분 금슬이 좋다지만 황후의 신분으로 궁을 떠나는 게 쉽지가 않았을 텐데 주저 없이 함께 길을 떠나시고 말이야.”
“워낙에 자애로운 성품으로 유명하시잖아.”
“외모도 고우시고.”
존경심 깃든 목소리로 황후에 대해 말하던 이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래서 신께서 황후 폐하께 선물을 주셨나 보다. 라시드 황태자 전하라는 완벽한 존재를 말이야.”
그 순간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빨랫감을 쪼물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시아나는 미간을 모았다.
‘또 시작이네.’
시녀들의 수다에는 큰 특징이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꼭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시녀들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메리, 너 며칠 전에 세탁물을 옮기는 길에 우연히 황태자 전하를 보았다고 했잖아. 자세히 좀 말해 봐.”
시녀들의 시선 속에 한 시녀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머리카락이 은빛인데 우리가 아는 칙칙한 회색과는 차원이 달라. 은을 가는 실로 만든 것처럼 반짝거린다니까.”
“또, 또?”
“얼굴은 더 기가 막혀. 눈, 코, 입, 귀까지 모든 부분이 완벽한데 그중에서 가장 정신을 쏙 빼놓는 부분은 눈이야. 긴 속눈썹 아래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면 진짜…….”
시녀는 더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만할래. 이따위 허접한 묘사력으로는 황태자 전하의 용안을 설명할 수 없어. 너희들 눈으로 직접 봐.”
시녀들이 울부짖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허구한 날 이런 곳에서 짱박혀 빨래만 하는데 황태자 전하를 볼 일이 어디 있냔 말이야!”
“으어어! 하루 웬 종일 잡초만 뜯어도 좋으니 제발 날 황태자궁에 배정시켜 달라고!”
시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들 진심이야?’
황태자 라시드는 아름다운 외모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의 잔혹함이었다.
그는 고작 열세 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아무리 제국의 황족이 치열한 황위 계승권 싸움으로 일찍 철이 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이른 나이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 나이에도 전쟁터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소년은 제 앞을 막아선 이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베고 또 베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얼마 후, 그에게는 ‘피의 황태자’ 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라시드와 눈이 마주쳤던 날, 너무 놀랐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그리고 너무 맑은 그의 눈빛 때문에.’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기 직전까지 라시드는 사람을 죽였다.
방금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떤 식으로든 표가 나기 마련이었다.
살기로 눈빛이 번뜩이거나, 죄책감에 짓눌려 눈이 죽어 있거나.
그러나 라시드의 선연한 보라색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시아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래서 시아나는 어떤 식으로든 라시드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은 수습 시녀로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미친 사람 곁에서 일하느니 이곳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는 편이 낫지, 암.
수습 시녀 시아나의 작은 바람이었다.
외전 1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