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상한 수습 시녀
시아나는 작은 왕국의 공주였다.
그러나 시아나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어머니가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 새 왕비를 맞이했다.
젊고 아름다운 새 왕비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왕에게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폐하. 제가 가여운 시아나 공주를 친딸처럼 키우겠습니다. 돌아가신 왕비님을 대신하여 누구보다 기품 있고 아름다운 공주로 만들어 놓을게요.”
그날부터 시아나는 예법을 배우고, 차를 마시고, 춤을 추고, 자수를 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건 교육이란 이름의 학대였다.
새 왕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어린 시아나가 서 있었다.
시아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그도 그럴 게 새 왕비를 향해 벌써 100번 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숨이 막히는 코르셋과 제 몸만큼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그러나 새 왕비에게 그것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쩜. 아무리 연습을 해도 늘지가 않을까.”
새 왕비는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옆에 있던 시녀가 그녀의 손에 가는 회초리를 들려 주었다.
“지금부턴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할 때마다 혼을 낼 테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해 보거라.”
시아나는 바들바들 떨며 두 손으로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 시아나, 어마마마께 인사드립니다.”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우아한 인사였지만, 예법의 극에 달한 왕비의 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새 왕비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회초리를 든 손도 올라갔다.
철썩-!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왕이 었다.
갑작스런 왕의 등장에 왕비는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고, 시아나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저 너무 아파요. 새어머니를 좀 말려 주세요.’
“폐, 폐하. 이건…….”
새 왕비가 변명을 늘어놓기 전 왕이 말했다.
“잘하고 있군. 말로 해서 못 알아듣는 아이는 혼을 내어서라도 가르쳐야지.”
그러고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는 왕국의 공주다. 제대로 배워서 왕실에 누가 되는 일이 없게 하거라.”
그것이 끝이었다.
왕은 다시 방을 나갔고, 새 왕비는 마녀처럼 깔깔깔 웃었다.
다시 새 왕비는 회초리를 손에 들었다.
시아나는 생각했다.
‘정말 싫어. 이따위 가족, 차라리 없어졌으면!’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시아나가 열여덟 살 때 제국군이 쳐들어왔다.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되어 버렸다.
왕족은 모조리 끌려 나왔다.
왕과 새 왕비, 새 왕비가 낳은 왕자와 공주, 구석진 방에서 홀로 덜덜 떨고 있던 시아나까지도.
병사들의 손에 짓눌려 무릎을 꿇은 왕족들 앞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의 황태자’라 불리며 대륙을 제패한 제국의 황태자, 라시드였다.
눈을 내리깐 라시드가 말했다.
“항복을 권하는 서신에 답이 없어 여기까지 찾아왔다. 어때, 지금이라도 항복하겠느냐.”
살벌한 별명과 달리 가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시아나는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어쩌면 저 사람은 우리를 죽이지 않을지 몰라.’
그러나 이어진 왕의 목소리는 시아나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는 절대 침략자 따위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냥 죽여라!”
“알겠다.”
“뭐라?”
그 순간 라시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휘둘러졌다.
순식간에 왕의 목숨이 끊어졌다.
“꺄아아악!”
숨죽이고 있던 왕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라시드는 아비규환이 된 왕족들을 내려다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건 왕국을 침략한 자에게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기록이겠지. 그런 기록쯤이야 얼마든지 남겨 줄 테니 마음 편히 가거라.”
왕족들은 극한의 두려움에 찍소리도 못하고 차례차례 목이 날아갔다.
가족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시아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손톱만 한 애정도 나눈 적 없는 가족의 죽음이 새삼 슬퍼서는 아니었다.
철저한 생존 본능이었다.
‘그다지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고 싶진 않아!’
라시드가 그녀 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쿵!
시아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
작은 몸과 어울리지 않는 사자후에 처음으로 라시드의 검이 멈추었다.
시아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외쳤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가슴이 쿵쿵 뛰었다.
머리 위로 라시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라시드가 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든 하겠다니. 내 여자라도 되겠다는 건가?”
해괴망측한 말에 시아나는 속으로 펄쩍 뛰며 대답했다.
“설마요! 저는 요염한 미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기는커녕 만나는 사람마다 졸리냐는 말을 할 정도로 위기감 없게 생겼답니다. 나긋나긋한 애교도 없고 새침하게 웃지도 못해요. 확신하건대 전하께서는 제가 마음에 차지 않으실 겁니다.”
황당한 자기소개에 라시드의 입술이 살짝 실룩였다.
“그럼 너를 어디에 쓰라는 거지?”
시아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뭐라도 그를 납득시킬 만한 대답을 해야 했다.
“이래 봬도 저는 아주 건강하답니다. 자수도 놓을 줄 알고, 차도 잘 타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시녀로 부려 먹기 딱이지 않을까요?”
“…….”
그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너무 황당한 개소리를 내뱉었나.’
이제 정말 끝인가 싶어 시아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라시드의 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큭, 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
시아나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라시드의 웃음소리였다.
잠시 후 라시드가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을 보고 싶구나.”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시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아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헉. 이 미모는 뭐야?’
가까이서 마주 본 라시드의 얼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피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
그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대륙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는 검사라더니, 적들이 얼굴에 넋을 놓은 틈을 타서 댕강댕강 베고 다닌 것 아니냐고요.’
나름 타당한 잡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네 말대로구나. 꼭 밀가루만 넣어 만든 빵처럼 동그랗고 밍밍한 얼굴이야.”
그래서 이렇게 면접 탈락이라는 말인가요?
시아나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라시드가 눈초리를 사르르 휘었다.
누구라도 한눈에 매혹시킬 것 같은 야릇한 눈웃음이었다.
“좋아. 바라는 대로 황궁의 시녀가 되거라.”
“아……!”
시아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두 주먹을 꾹 쥔 시아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제게 이런 기회를 준 은인에게 제대로 인사를 해야 했다.
시아나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치맛자락의 양끝을 잡아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십수 년간 갈고닦은 완벽한 공주의 인사였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라시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시아나가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귀여운 걸 주웠네.”
* * *
그렇게 시아나는 신분을 숨기고 제국의 수습 시녀가 되었다.
일국의 공주에서 타국의 시녀가 되다니, 어쩜 이렇게 기구하냐며 절망할 법도 하지만 시아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빵이 만들어지고, 더러운 옷이 깨끗해지고,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걸.’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하루 종일 몸을 조이는 코르셋을 입은 채 차 마시고 춤추며 인형처럼 웃어야 했던 공주 시절보다 훨씬 편해. 시녀 최고!’
이대로 평생 황궁의 시녀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황궁 생활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지만.
쭈그려서 대리석을 닦고 있던 시아나의 머리 위로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또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네. 그렇게 시녀님들께 잘 보이고 싶니?”
시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 끝까지 콧대를 올린 채 시아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은 같은 수습 시녀인 잔느였다.
등 뒤로 금붕어 똥 같은 추종자들을 단 잔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너는 패전국에서 끌려온 노예야.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평생 정식 시녀가 되지 못한다고.”
수습 시녀의 리더 격인 잔느는 시아나를 처음부터 싫어했다.
텃세랄까, 무시랄까. 뭐 그런 거였다.
시아나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 쿵쿵쿵 하고 엄청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나타난 건 또 다른 수습 시녀인 츄츄였다.
“잔느, 너 또 얌전히 일하는 애 괴롭히고 있냐? 고만 좀 혀!”
츄츄의 외침에 잔느가 움찔했다.
무서울 것 없는 잔느에게도 츄츄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무식하게 덩치가 크고 힘이 아주 셌으니까.
그래서 잔느는 여기서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뭣도 없는 불쌍한 애들끼리 잘들 놀아 봐.”
잔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지나가며 시아나의 청소 도구를 발로 차는 것도 잊지 않으며.
다른 수습 시녀들이 키득거리며 잔느를 따라갔다.
“염병.”
츄츄는 어이없는 얼굴로 잔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아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확 박아 버려. 니가 얌전히 있으니까 저 못된 계집애가 더 괴롭히는 거 아니냐.”
시아나는 조금 충격받았다.
‘이게 괴롭히는 거였어?’
자라는 내내 새 왕비에게 구박받았던 시아나에게 괴롭힘이란 고작 이런 것이 아니었다.
더 끔찍하고 악랄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잔느의 심술은 귀여울 정도였다.
그런 시아나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츄츄는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저 계집애의 집안을 생각하면 맞서는 게 쉽지 않지만…….”
같은 수습 시녀이면서 잔느가 저렇게 기고만장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제국에서 제법 유명한 상인의 딸이기 때문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시녀의 진급에도 뒷배가 중요했다.
잔느가 수습 시녀 중 가장 빨리 정식 시녀가 되어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콩고물을 얻어먹을 게 있을까 하여, 다른 시녀들도 금붕어 똥처럼 달랑달랑 붙어 있는 거고.
츄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애가 뒷배만 믿고 위로 쭉쭉 올라간다니 빌어먹을 세상이여.”
남다른 덩치와 힘으로 일부 시녀들에게 촉망받는 인재로 꼽히는 츄츄지만, 그녀는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낱 광부의 딸이었으니까.
그리고 옆에 있는 작은 소녀는 자신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츄츄는 츳, 하고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런데 넌 정말 비빌 데가 한 군데도 없는겨? 그래도 외국인이 황궁의 수습 시녀로 들어올 정도면, 도와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여.”
도와준 사람. 있기야 하지.
바로 이 제국의 황태자, 라시드였다.
그는 원래는 죽거나 감옥에 갇혔어야 할 패전국의 공주를 황궁의 시녀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 행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공주의 체면도 잊고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살려 달라는 내가 불쌍하거나 웃겨서 그랬겠지.’
가진 것이 너무도 많은 자가 한순간 베푼 변덕과도 같은 동정.
그것에 큰 의미가 있을 리가.
어쩌면 황태자는 이미 시아나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아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어.”
* * *
“그 애는 어떻게 지내지?”
황태자의 호위 기사 솔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 라시드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은빛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
그러나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풀어헤친 새하얀 셔츠 아래로 설핏 보이는 몸은 단단하고 생명력이 넘쳤다.
그 간극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을 놓고 황태자를 바라보곤 했다.
‘젖 먹던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나는 아무 타격도 없었지만.’
솔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애’에 대해 서슴없이 대답했다.
요즘 라시드가 관심 갖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시아나 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노동을 한 경험이 없어서 조금 서툴기는 하지만 성실하고 영리하여 일을 빨리 배운다고 하더군요. 외국인 출신이라 정식 시녀가 되는 건 시간이 걸릴 테지만요.”
“그렇군.”
눈을 내리깐 라시드는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왜 그렇게 그분께 신경을 쓰십니까?”
“글쎄…… 미안함 때문일까. 그 애의 나라를 짓밟고 가족까지 죽여 버린 것은 나니까.”
솔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가 아는 한 라시드는 결코 그런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사람을 썩둑썩둑 썰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저따위 평범한 죄책감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엔 전하와 저밖에 없는데 솔직히 말씀하시죠.”
“뭐를?”
“전하는 원래 그런 것들에게 약하시잖아요. 조그맣고, 눈이 크고, 전투력이라고는 없는 생물체 말입니다.”
그렇다.
피의 황태자라 불리는 라시드는 사실 엄청난 동물 변태…… 아니, 동물 애호가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지금도 라시드의 곁에는 세 마리의 동물이 있었다.
“쭉쭉아.”
라시드의 목소리에 새하얀 털을 가진 페럿(허리가 긴 족제비)이 “뀨!” 하고 소리를 내며 주인의 몸 위로 타고 올랐다.
“냠냠이.”
양손에 알밤을 들고 열심히 우물거리던 통통한 다람쥐가 “찍?”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시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동물을 불렀다.
“짹짹이.”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털이 뽀송한 노란색 새 한 마리가 라시드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동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는 라시드를 보며 솔은 생각했다.
‘언제 봐도 기가 차는 장면이야.’
라시드의 동물에 대한 애정은 그냥 좀 귀여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손수 간식을 만들고, 똥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며 보살필 정도였다.
황태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보았다면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
라시드는 제 품속에 파고드는 페럿을 안으며 피식 웃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좀 닮았어.”
“…….”
“그래서 이런 마음이 드나 보다. 그 애가 정식 시녀가 되어 좋은 곳에 배정되면 좋겠어.”
솔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라시드가 바라는 바는 명확했다.
시아나의 뒤를 봐 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솔은 순순히 주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전하,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수습 시녀를 정식 시녀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무능한 이에게 존엄한 분의 보필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요. 전하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시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걸 떠나 용서하지 못했다.
그것은 한낱 시녀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그러니 정식 시녀가 될 재목인지 아닌지, 그 애의 능력을 시험해 보면 되지 않느냐.”
“……어떻게 말입니까?”
라시드가 빙그르 웃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은 미소였다.
* * *
일과를 마친 수습 시녀들이 허름한 부엌에 모여 있었다.
저녁 식사를 먹기 위해서였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만든 지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빵 쪼가리, 건더기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밍밍한 수프.
츄츄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고기가 없구먼. 이러다가 정말 팔뚝이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지겠어.”
그와 달리 시아나는 한껏 행복한 얼굴이었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도 고민하지 않아도 돼.’
그냥 마음껏 먹기만 하면 된다니, 이 얼마나 천국 같은 시간이야!
시아나는 행복한 얼굴로 딱딱한 빵을 앙 물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톡 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전국에서 와서 그런가, 이딴 쓰레기를 잘도 먹는구나?”
굳이 찾아와 재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볼 것도 없이 잔느였다.
시아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잔느를 바라보았다.
‘날 괴롭히는 거라고 했지?’
이게 끝인 건가. 아니면 뭐가 더 있나?
시아나를 본 잔느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아나의 얼굴이 마치 재롱 피우는 어린 손주를 보는 할머니 같았기 때문이다.
‘오구오구. 어디 한번 더 해 보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잔느는 시아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저런 점이 가장 싫었다.
기댈 곳도 없는 외국인 노예 주제에 뭐가 저렇게 여유로운지.
잔느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웃긴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면 멋진 줄 알아?”
시아나의 옆에 앉아 있던 츄츄가 포크를 빙빙 돌리며 대꾸했다.
“너야말로 참말로 웃기구먼. 얌전히 있는 애를 찔러 대면 재밌냐?”
대번에 잔느의 얼굴이 변했다. 잔느는 험악한 얼굴로 츄츄를 노려보았다.
“하. 몇 번 봐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끼어드는구나. 덩치만 믿고 분위기 파악 못하나 본데, 여기 대장은 나야!”
“대장은 개뿔. 맨날 하는 거라고는 약한 애들 괴롭히는 거밖에 없으면서.”
“뭐, 지금 말 다 했어?”
“그래, 말 다 했다!”
츄츄가 당장이라도 잔느에게 달려들 것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오랜 시간 노동으로 다져진 우람한 팔이 위협적으로 드러났다.
겉모습만 보면 근육덩어리인 츄츄의 압승이었지만, 등 뒤로 여러 명의 수습 시녀들을 거느린 잔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우와. 꼭 거대한 곰과 무리 지은 하이에나의 싸움 같아.’
시아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여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투는 거기까지였다.
문이 열리고 수습 시녀를 관리하는 시녀, 립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니, 이 분위기. 설마 지금 싸우는 거야?”
“아닙니다!”
잔느와 츄츄가 후다닥 번개 같은 속도로 떨어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꼬락서니였지만 립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늘 세상만사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을 또 꺼냈다.
“문제 일으키지 마.”
보이지 않는 곳에선 머리채를 쥐어 잡든 주먹질을 하든 상관없지만.
잔느는 여우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럼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츄츄는 얄밉다는 듯 잔느를 바라보다가 분을 삭이듯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분위기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립은 수습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두 손을 맞잡고 줄을 선 수습 시녀들을 바라보며 립이 말했다.
“위에서 갑작스러운 공문이 내려왔다. 며칠 후에 티 파티가 열리는데, 그때 오는 손님들을 수습 시녀가 맞이하라는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습 시녀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뜬금없이 저게 무슨 소리야?’
수습 시녀는 정말 많은 일을 하지만 손님의 시중을 드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건 구석진 곳에서 청소와 빨래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으니까.
엄격한 예법을 갖춰야 하고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손님맞이는 정식 시녀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시녀가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일을 수습 시녀 보고 하라고? 대체 왜?’
의아한 시아나와 달리 다른 수습 시녀들의 눈은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녀들이 꿈꿔 왔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잔느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손을 들고 물었다.
“티 파티에는 어떤 손님이 오시나요?”
우아한 귀족가의 귀부인?
아니면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님?
어느 쪽이든 좋았다.
그러나 이어진 립의 대답은 한껏 기대에 찬 잔느의 기분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황궁에 납품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아낙네들.”
“……예?”
“몇 년간 그녀들이 보내온 과일 맛이 극도로 훌륭하여 그것을 치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는구나.”
귀족도 아닌 평민. 그중에서도 밭을 일구는 농부.
얼마나 귀한 분을 모실지 기대했던 잔느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껏 시중을 들게 된 사람이 농사꾼들이라니. 내가 왜 그런 자들의 시중을 들어 줘야 하는 건데.’
그러더니 시아나를 힐끗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같은 애에게는 딱이겠다. 그런 사람들 아니면 네가 언제 시중 같은 걸 들어 보겠니.”
얄미운 잔느의 머리통에 꿀밤을 쥐어박는 상상을 하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손님이 농부들이라 수습 시녀들에게 시중을 들라는 거구나. 황궁에 초대된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이들이니 정식 시녀들이 살뜰히 대접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제야 납득이 갔다.
여전히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 * *
다음 날, 수습 시녀들을 모은 립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손님의 시중을 드는 법을 알려 줄 거야. 아무리 수습 시녀라 해도 황궁의 시녀. 제대로 익혀서 황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거라.”
책잡힐 일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수습 시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그녀들의 얼굴에는 전에 없는 생기가 어려 있었다.
매일 빗자루질만 열나게 하다가 이런 시녀다운 일을 배우게 되니 즐거울 수밖에.
하지만 열정과 실력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츄츄, 몇 번을 얘기하니. 손님의 찻잔에 차를 따를 때 찻방울이 튀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
립의 목소리에 츄츄의 드넓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본 잔느와 다른 수습 시녀들이 키득거렸다.
잔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근육 바보를 어쩜 좋아. 하긴, 차를 마셔 본 적이 있어야지. 평생 마셔 본 거라고는 광부들이 마시는 맥주밖에 없을 테니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잔느는 쿡쿡 웃더니 보란 듯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 모습이 제법 능숙했다.
립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제법이구나.”
립의 칭찬에 잔느의 콧대가 한껏 올라갔다.
“호호, 이 정도야 뭐.”
잔느는 성에 들어오기 전 수도의 유명한 예법 선생을 불러 과외를 받았다.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였지. 난 수습 시녀 따위로 있을 사람이 아니야. 시녀장이 되어 황후 폐하를 모실 몸이라고.’
잔느는 한껏 어깨를 올린 채 나머지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능숙한 모습에 다른 수습 시녀들이 박수를 쳤다.
“대단하다, 잔느.”
“오늘 처음 배운 사람 같지 않아.”
시아나가 보기에도 잔느의 차 따르는 동작은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평민의 수준에서는 말이야.’
시아나는 과거, 매일 오후 왕실에서 열리던 티 파티를 떠올렸다.
까탈스러운 새 왕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시녀들은 신중하게 차 시중을 들었다.
그 어느 귀부인보다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공기처럼 고요하게.
그때의 시녀들과 비교하면 지금 잔느의 몸짓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수습 시녀들을 가르치는 시녀들의 몸놀림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시아나는 딱히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상대는 왕족이 아닌 농부들이니까 저 정도로 충분하겠지.’
무엇보다 괜한 행동을 해서 튀고 싶지 않았다.
가늘고 길게, 황궁에서 지내는 것이 시아나의 목표였으니까.
그래서 시아나는 배운 만큼만 차를 따랐다.
조금은 어설프고 투박하게.
* * *
교육은 오전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수업만 받을 만큼 수습 시녀들의 일과는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습 시녀들은 교육이 끝나자마자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불려 갔다.
시아나는 츄츄와 함께 주방 업무를 도왔다.
천장에 닿을 만큼 쌓인 그릇들을 씻고, 바구니에 가득 담긴 감자 껍질을 벗기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주방 시녀는 주방을 나서는 시아나와 츄츄에게 바삭하게 구운 빵 쪼가리를 챙겨 주었다.
남은 빵으로 만든 간식이었는데, 매일 허기진 수습 시녀들에게는 별미였다.
‘이 맛에 주방 일을 하지.’
시아나는 히히 웃으며 빵 쪼가리를 깨물었다.
그런데 츄츄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오메 맛있는 것!’ 하고 온갖 추임새를 넣어 가며 먹을 텐데 오늘은 아주 조용했다.
잠시 후 츄츄가 풀죽은 얼굴로 입을 뗐다.
“시아나, 니는 시녀님들께 배운 거 제대로 할 수 있제? 손님 시중 드는 것 말이여.”
“응. 크게 혼나지는 않았어.”
“부럽구먼.”
그제야 시아나는 츄츄가 왜 이런 상태인지 깨달았다.
츄츄는 배운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여러 번 혼이 났다.
지금까지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던 츄츄에게는 처음으로 닥친 고난인 셈이었다.
츄츄가 거대한 어깨를 웅크리며 말했다.
“분하지만 잔느의 말대로여. 나는 차 같은 건 제대로 마셔 본 적도 없어. 잠깐 배운다고 좋아질 만한 센스도 없고. 농사짓는 아낙네들이라고 해도 내가 서툰 것을 다 눈치챌 텐데…… 손님들을 기분 나쁘게 할까 봐 걱정이구먼.”
반으로 쪼그라든 츄츄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고민했다.
츄츄가 시아나를 신경 써 주긴 했지만,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이 많은 츄츄가 친구 한 명 없는 불쌍한 수습 시녀를 감싸 준 것뿐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나를 도와준 건 이 애뿐이니까.’
시아나가 츄츄의 단단한 어깨를 콕 찌르며 말했다.
“나랑 특훈을 해 볼래?”
“특훈?”
눈을 동그랗게 뜬 츄츄에게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이 다 끝난 후에 만나서 매일 연습을 하는 거야. 그러면 분명 실력이 늘 거야.”
“……그러니까 시방 니가 날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여?”
시아나 고개를 끄덕인 순간, 츄츄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노곤한 몸을 쉴 수 있는 귀한 휴식 시간을 쪼개어 자신을 도와준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일 수 있는 존재에게.
“너, 너…….”
츄츄는 시아나의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으헉.’
단단한 근육 속에 파묻힌 시아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 고통을 알 리 없는 츄츄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세상 걱정 없는 얼굴로 빗자루질만 하고 있기에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니구먼. 무지하게 착한 애였어!”
그건 칭찬이니, 욕이니?
시아나의 의문 속에 두 사람의 특훈이 시작되었다.
* * *
모든 일과가 끝나면 츄츄가 시아나의 방에 찾아왔다.
츄츄는 가방에서 녹슨 주전자와 나무 컵을 꺼냈다.
특훈을 위해 주방 시녀에게 파워 안마를 해 주고 받은 물건이었다.
츄츄는 호랑이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근엄한 얼굴로 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이내 쪼르르르 하고 주전자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물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 컵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아나가 박수를 쳤다.
“잘했어, 츄츄. 정말 많이 좋아졌어.”
“그렇지……?”
시아나의 칭찬에 츄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적어도 순서를 헷갈리거나 차를 흘리지는 않으니, 손님을 우롱한다며 혼나지는 않을 것이다.
츄츄는 코밑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니 덕분이여. 시녀님들보다 훨씬 더 잘 가르쳐 줬으니까.”
“뭘. 네가 열심히 한 덕분이지. 츄츄는 누구보다 성실한 학생이니까.”
눈을 마주친 츄츄와 시아나는 짝, 하고 경쾌하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훈련을 마친 후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츄츄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내 고향은 동쪽에 있는 작은 광산 마을이여. 아부지는 광부신데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셔.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이 나까지 모두 13명이나 되거든.”
“13명이나?”
시아나의 놀란 얼굴을 보며 츄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집안은 벅적하니 화목한데 영 먹고살기가 힘들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여. 정식 시녀가 되면 임금이 짭짤하다고 들었거든. 동생들은 원 없이 고기 먹여 키우고 싶구먼.”
“그렇구나. 착한 언니네.”
시아나의 칭찬에 츄츄가 부끄러운 듯 콧잔등을 긁었다.
“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여? 외국에서 올 정도면 니도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 아니여.”
사실 말이지, 난 얼마 전까지 작은 왕국의 공주였어.
따위의 말을 해 버리면 이야기가 복잡해지겠지.
시아나는 과거의 신분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내가 불쌍하다며 수습 시녀가 되게 해 주셨어.”
눈을 크게 뜬 츄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라, 라시드 황태자 전하 말이여?”
“응.”
“너 그럼 그분을 직접 본 적이 있는겨?”
“응.”
“우와아!”
츄츄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당근 더미를 발견한 망아지처럼 흥분한 츄츄의 모습에 시아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지나가며 시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
츄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조각상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시다는데 그게 정말이여?”
시아나가 라시드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불과 몇 초였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가는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와아. 소문이 정말이었구먼! 내도 꼭 한번 보고 싶다.”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꼰 츄츄가 이어 물었다.
“은하수처럼 고운 외모와는 달리 잔혹한 성품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사실이려나.”
시아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도 맞아. 내 가족들의 목숨을 다 앗아가 버렸거든.”
“……!”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츄츄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츄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미, 미안! 내가 눈치도 없이 괜한 얘기를 꺼냈구먼.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
상관없는데.
왜냐면 내 가족이라는 작자들, 평생 날 괴롭히기만 했거든. 죽는 걸 봐도 아무 감정 안 들었어.
……라고 말하면 츄츄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럴 리가 없잖여! 내 가족을 죽였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몹쓸 말을 한 내가 죽일 놈이여. 으허엉!’
이라며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그런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서 이젠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츄츄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시아나를 덥석 껴안았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그렇게 말하는 거지? 착해. 너무 착해……!”
진실이야 어쨌건 그날 이후 시아나를 대하는 츄츄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
잔느가 시아나의 ‘시’ 자를 입에서 내뱉자마자 츄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아나를 지키듯 선 츄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시아나한테 한마디라도 못된 말 해 봐. 그 못된 주둥이를 치즈처럼 쫙 늘려서 기둥에 묶어 줄 테니까.”
“…….”
평소와는 다른 박력에 잔느는 뒷걸음치며 말을 더듬었다.
“몇 시인지 물어보려고 한 거거든? 너 진짜 웃긴다.”
그뿐이 아니었다.
츄츄는 시도 때도 시아나에게 먹을 걸 챙겨 줬다.
“주방 시녀님이 하나 챙겨 줬구먼. 먹어.”
츄츄가 시아나에게 준 건 동그란 막대 사탕이었다.
“네가 먹지.”
“내는 크잖여. 도토리만 한 네가 먹어야지. 먹고 무럭무럭 크거라.”
시아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 다 컸거든? 그리고 사탕 먹는다고 키 안 커.”
꿍얼거리면서도 시아나는 입 속으로 사탕을 쏙 넣었다.
‘달콤해……!’
매일 굳은 빵만 먹었던 터라 오랜만에 맛보는 사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사탕을 오물거리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츄츄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착한 애의 가족을 죽이다니. 황태자, 이 XX놈.”
며칠 새에 달라진 건 시아나를 대하는 행동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에 대한 것을 물어보며 소녀처럼 흥분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츄츄는 황태자의 열혈 안티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부강해지면 좋다고 해도 가만히 있는 다른 나라를 왜 짓밟는 건데. 하여간 못된 놈이여. 방귀인 줄 알고 뀌다가 설사나 싸라지.”
시아나는 황태자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살려 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굳이 츄츄의 욕을 말리지 않았다.
‘내 편이 되어 준다는 느낌이라 그런지, 듣기 좋네.’
시아나는 히죽 웃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황태자 정도 되는 사람이면 이런 욕쯤은 하루에도 수십만 번씩 듣고 있을 테니까. 츄츄의 욕 정도는 티 안 날 거야.’
* * *
“아앗.”
야릇한 신음 소리(?)에 황태자의 호위 기사 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어딘가 몸이 불편하기라도 하십니까?”
“아니.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라시드는 한쪽 귀를 만지며 말했다.
“누군가 열심히 내 욕이라도 하고 있나 봐.”
타인이 자기 욕을 하면 귀가 간지럽다는 제국의 미신을 말하는 것이다.
솔은 빙긋이 웃었다.
‘에이. 그 미신 때문이라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죠. 일 년 내내 귀가 간지럽다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셨을 겁니다.’
그만큼 라시드는 적이 많았다.
나라 안에서도, 나라 밖에서도.
황태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라시드의 모습은 그런 끔찍한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라시드의 곁에는 작은 동물 세 마리가 있었다.
흰 페럿과 통통한 다람쥐는 자그마한 두 손에 사과를 들고 쉴 새 없이 볼을 우물거리고 있었고, 작은 새도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열심히 사과를 쪼아 대고 있었다.
“맛있나 보구나.”
라시드는 작은 동물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바구니에 든 사과를 잡았다.
아름다운 남자가 색이 선명한 새빨간 사과를 든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근사했다.
라시드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사과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역시 애플턴의 사과는 최고야.”
라시드의 건너편에 앉아 사과를 우물거리던 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하지만 아무리 사과 맛이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을 치하한다며 농부들을 황궁에 초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도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말입니다.”
솔은 가늘게 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애플턴의 사과를 빌미로 시아나 님을 시험해 보시려는 거죠?”
라시드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정답.”
“오예. 상품은 뭡니까.”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반나절 동안 놀 수 있는 영광을 주마.”
“황송합니다만 거절합니다. 제게는 안 주느니만 못한 선물이라서…….”
“안타깝구나. 이 아이들의 귀여움을 모르는 네가 불쌍해.”
눼이 눼이.
솔은 껄렁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라시드는 그것을 탓하는 대신 물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에게 답신은 왔느냐?”
“네. 내일 티 파티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군. 내일이 기대되는구나.”
라시드는 두 눈을 반짝이며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수습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 있을 티 파티 때문이다.
티 파티의 손님은 성에 과일을 납품하는 농부들.
귀부인들을 접대할 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황실의 격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은 준비해야 했다.
수습 시녀들은 잔디밭을 가지런히 깎고, 그 위에 동그랗고 하얀 테이블을 놓았다.
테이블 위를 장식한 건 푸른빛 수국이었다.
탐스러운 수국을 화분에 꽂으며 시아나는 황홀한 얼굴을 했다.
‘역시 꽃은 예뻐.’
헤실거리며 웃는데 테이블을 번쩍 든 츄츄가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3명이 모여 드는 테이블이었지만 츄츄는 혼자서도 가뿐했다.
쿵.
테이블을 바닥에 내려놓은 츄츄가 시아나에게 다가갔다.
“근디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츄츄가 시아나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농부들만 오는 게 아니라는구먼. 과수원의 주인인 애플턴 남작 부인도 오신대.”
그제야 시아나는 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분위기가 이렇구나.’
수습 시녀들은 처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쁨과는 별개로 손님 자체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손님들이 일개 농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하나같이 눈빛이 또랑또랑하고 의욕이 넘쳤다.
특히 잔느는 화장에 화려한 머리핀까지 했다.
‘귀족인 남작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어.’
물론 시아나의 눈에는 그냥 바보로만 보였지만.
‘과한 것은 덜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을 굳이 해 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말해 봤자 제대로 듣지도 않을 테고.’
시아나는 잔느에게서 시선을 돌려 츄츄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츄츄의 머리에는 알록달록한 꽃모양 핀이 꽂혀 있었다.
시아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도 이렇게 곱게 꾸민 거야? 남작 부인께 잘 보이고 싶어서?”
“에이, 그런 거 아녀.”
츄츄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남작 부인이든 농부든, 시녀로서 처음 맞는 손님이잖아.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 꽂았구먼.”
시아나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시중도 훌륭하게 들어야 할 텐데.”
“잘할 거야. 훌륭한 스승이 가르쳐 줬으니까.”
“그려. 내도 훌륭한 제자니까.”
시아나와 츄츄는 푸핫 하고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쳤다.
“잘하자.”
* * *
시아나와 수습 시녀들은 연회장 입구에 쪼르르 서 있었다.
잠시 후, 오늘의 손님인 농부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확실히 시아나가 티 파티에서 보았던 귀부인들과는 달랐다.
나름대로 열심히 꾸미긴 했지만, 매일 뜨거운 햇볕을 쐰 피부는 거칠었고 드레스는 촌스러웠다.
무엇보다 커다랗게 뜬 눈과 움츠린 어깨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황실에서 초대한 티 파티니 그럴 만하지.’
반면 수습 시녀들은 처음 손님을 맞는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풍당당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들이 귀족이 아닌 농부들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만만하니까.
그것을 알 리 없는 농부들은 수군거렸다.
“우와. 역시 황궁의 시녀님들은 다르네. 우아하고 당차.”
“그러게. 꼭 귀족 같다.”
“서, 성대하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지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사가 끝난 후에는 수습 시녀 한 명이 몇 명의 부인을 모아 테이블로 에스코트 했다.
시아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평소 같으면 가장 먼저 나섰을 잔느는 저 끝에 서서, 누군가를 찾듯 들어서는 손님들을 훑고 있었다.
의도가 빤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의 시중을 들고 싶다 이거지?’
늘 야망 가득한 애였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그때, 한 여인이 연회장에 들어섰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잔느도, 다른 수습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평균보다 키가 훌쩍 큰 여인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드레스도 고급스럽고, 걸음걸이도 우아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농부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여인의 등장에 모두가 생각했다.
이 사람이구나.
오늘의 VIP.
‘애플턴 남작 부인!’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잔느가 튀어 나갔다.
잔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실 티 파티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고는 다른 수습 시녀들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분은 내가 맡을 거야. 누구든 가까이 오면 뒈진다.’
몇몇 수습 시녀들은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잔느와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손쉽게 경쟁자들을 제압한 잔느는 다시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따라오시지요, 부인.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느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시아나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진한 장미꽃 향기. 에즐랑에서 나온 로즈와인인가?’
로즈와인은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향수였다. 그만큼 가격도 어마어마했다.
‘애플턴 남작가는 소박한 귀족가라고 들었는데. 이런 것을 뿌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부유한…….’
그 순간 시아나와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사르르. 여인이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어머머머.’
시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 미소가 너무 황홀해서.
여인은 그런 시아나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더니 이내 멀어졌다.
멍하니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습 시녀들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세상에, 뭐가 저렇게 예뻐?”
“그러니까, 그러니까. 수도 외곽에 과수원 하나를 가진 남작가 부인이라기에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는데. 확실히 귀족은 달라!”
“저런 아름다운 귀부인을 모시다니. 잔느가 부러워!”
수습 시녀들의 반응에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잔느가 제일 어려운 손님을 맡은 건데 그걸 부러워하다니.’
어찌 보면 귀엽고, 어찌 보면 철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다음 손님이 연회장 안에 들어섰다.
조잘거리던 시녀들은 손님을 보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여인은 등이 곱은 꼽추였기 때문이다.
수습 시녀들은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남작 부인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을 시중 들고 싶지, 저런 흉측한 사람을 모시고 싶지는 않아.’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여인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아나였다.
여인의 앞에 선 시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며칠간 배운 시녀의 인사법이었다.
아니, 배운 것보다 더 공손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모실 분이니까.’
시아나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테이블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티 파티가 시작되었다.
하얀 테이블에는 여인들이 서너 명씩 모여 앉았고, 테이블마다 시녀가 한 명씩 붙어 시중을 들었다.
시아나가 맡은 테이블에는 등이 굽은 여인과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여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내 생에 이런 연회에 참석할 수 있을 줄 몰랐어요. 그냥 티 파티도 아니고 황궁의 티 파티라니요.”
“저도요. 평생 사과만 따다가 늙어 죽나 했더니 이런 호사도 누리네요.”
“집에 가자마자 옆집 여편네한테 자랑할 거예요. 내가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걸요.”
여인들의 말에 시아나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확실히 귀부인들과 다르긴 하네.’
우아하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상대의 뒤통수를 어떻게 후려칠까, 머리를 굴리는 귀부인과 달리 그녀들의 대화는 담백하기만 했다.
첫 손님 맞이에 긴장했던 시아나의 마음이 편안해질 만큼.
‘물론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시중을 허술하게 들 생각은 전혀 없지만.’
시아나는 정중한 손짓으로 여인들 앞에 작은 접시를 놓았다.
“오늘의 디저트입니다.”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덩어리를 보며 여인들은 눈을 끔뻑거렸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차마 이것이 뭐냐고 묻지 못했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그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덧붙였다.
“카아나산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이랍니다. 입에 넣고 살살 녹여 드시면 된답니다.”
여인들은 이곳이 황궁이란 것도 잊고 소리쳤다.
“이, 이게 그 유명한 초콜릿!”
“왕비님과 공주님이 먹는다는 그 초콜릿!”
“너무 맛있어서 투정 부리는 왕자님도 눈물을 뚝 그친다는 그 초콜릿!”
그녀들은 잔뜩 흥분했다.
그럴 것이 평민에게 초콜릿은 평생 이름만 들어 볼 수 있는 환상의 디저트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이다.
여인들은 감히 내가 이런 것을 먹어도 되냐는 얼굴로 초콜릿을 집었다.
그러고는 바들바들 떨며 입 속에 넣었다.
여인들은 눈을 부릅떴다.
파도가 밀려왔다.
달콤함이란 이름의 거대한 파도가.
“이거 엄청 달아요!”
“그러게요! 너무 달아서 혀까지 없어질 것 같아!”
“어쩌죠.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안 돼! 없어지지 마!”
아이 같은 반응에 시아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애 처음 먹는 초콜릿이면 저럴만하지, 암.’
그러다 등이 굽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쪽쪽 빨던 여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아나는 여인을 놀리거나 경멸 어린 표정을 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던 손수건을 여인에게 건넸다.
“손에 초콜릿이 묻어 불편하시지요? 닦으셔요.”
“아…….”
예상 못한 행동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닦아 드릴까요?”
“아, 아니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손수건을 받아 손가락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여인들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시녀님, 저도 손수건을 좀.”
“저도요.”
흥분해서 먹은 탓에 여인들의 입과 손에는 초콜릿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시아나는 미소 띤 얼굴로 여인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여인들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부끄러워라. 너무 맛있어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고는 시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우아한 귀부인이나 공주님을 모시다가 우리 같은 촌뜨기들 시중을 드니 당황스러우시죠?”
시아나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셔요. 제게는 귀한 손님들이신걸요. 부디 마음 편히 티 파티를 즐겨 주세요.”
그 말에 여인들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시아나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럼 이제 차를 따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한 차는 잉그리드산 얼그레이랍니다. 다른 차를 원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괜찮아요.”
“저도 좋아요.”
시아나는 여인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차를 홀짝인 여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황실에서 마시는 홍차라 그런지 확실히 향이 좋지 않아요?”
“그래요? 나는 집에서 마시던 차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그냥 홍차 맛이에요.”
여인들이 공감한다는 듯 키득거렸다.
“좋은 것도 자주 먹어 봐야 아는 법이라잖아요. 우리가 뭘 알겠어요.”
“그러니까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걸 아는 분은 저분뿐이겠죠?”
여인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입장부터 유독 눈에 띄었던 아름다운 귀부인이 있는 곳이었다.
여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테이블과 달리 그곳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더더욱 고고해 보였다.
여인들이 시아나에게 물었다.
“시녀님, 저분이 우리 농장의 주인이신 애플턴 남작 부인 맞죠?”
“죄송합니다만 신원 확인은 시녀들이 한 것이 아닌지라 저도 모릅니다. ……부인들께서는 남작 부인의 얼굴을 모르시나요?”
“실은 애플턴 남작님께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아직 남작 부인께서 농장에 오신 적이 없어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애플턴 남작님께서 한눈에 반해 청혼했다기에 얼마나 고운 분일까 했는데 그럴 만하네요.”
“그러게요. 정말 아름다워요.”
여인들은 모두 그녀가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시아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귀족의 예법을 배운 분이야. 그렇다면 저분이 애플턴 남작 부인이 맞겠지.’
그러나 시아나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시아나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여인들을 오늘 하루 잘 보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간절히 바랐다.
‘잔느가 실수 없이 시중을 잘 들어야 할 텐데. 남작 부인을 화나게 하면 연회 자체가 엉망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러나 늘 그랬듯 시아나의 바람은 순순히 이루어지는 법이 없었다.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까지 나를 무시할 셈이지.”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서린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연회장 전체가 조용해질 정도였다.
시아나는 굳은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 추정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시아나는 저런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만하고 엄격한, 귀족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눈빛이 향한 곳은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잔느였다.
잔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 * *
조금 전까지 잔느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에 잔느는 한껏 콧대를 올렸다.
‘그래, 다들 쳐다볼 만하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다른 손님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잔느의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미모와 우아함을 갖춘 귀부인이었다.
그래서 잔느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다이아 상단의 딸, 잔느야. 내가 시중을 들 사람이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잔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여인의 앞에 초콜릿을 내밀었다.
“황궁에서 만든 초콜릿이랍니다. 쉽게 맛볼 수 없는 최고급 제품이죠. 드셔 보세요.”
말을 마친 잔느는 여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말없이 잔느를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나를 무시할 셈이지.”
지금껏 얌전히 있던 여인의 말에 잔느는 당황했다.
“예?”
“그대의 그 오만한 인사도, 나를 품평하는 듯한 시선도, 디저트를 적선하듯 주는 모습도 참았는데…….”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서늘하게 말했다.
“차까지 이렇게 형편없이 따르다니…… 내가 언제까지 이 무례를 용납해야 할까.”
잔느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섬뜩했다.
그제야 잔느는 무언가 제대로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잔느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제대로 다시 차를 따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잔느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차를 따랐다.
‘방금은 좀 대충해서 그래. 난 귀족에게 직접 차 따르는 법을 배웠어. 시녀님들께도 잘한다고 칭찬받았고.’
과수원 하나 가진 남작 부인 정도야 만족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평가는 냉혹했다.
“황궁의 시녀라는 자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니 이를 어쩔까.”
작게 한숨을 내쉰 여인이 말을 이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녀는 크게 혼이 난다지. 밤새도록 회초리를 맞거나, 다시는 실수하지 않게 혀를 잘라 버린다든가. ……그대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
끔찍한 말에 잔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란 것을.
그녀의 말 한마디면 잔느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어, 어떻게 해.’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나가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잔느가 저대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연회는 정말 엉망이 되어 버린다.
수습할 수 있을 때 해결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들려온 목소리에 아름다운 여인과 잔느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시아나가 허리를 깊이 수그리고 있었다.
“저희의 실력이 아직 부족하여 부인의 품격을 따라가지 못한 모양입니다. 모쪼록 자애로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인은 쉽게 마음을 풀지 않았다.
“고개 숙여 사과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면 세상이 얼마나 쉬울까.”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부인께 어울리는 차를 끓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보고 또 그런 우스운 꼴을 보라고? 내가 왜?”
시아나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황실에서 주최한 연회니까요.”
“…….”
“초대한 손님들이 불쾌한 마음을 가진 채 연회가 끝났다는 걸 아시면 주최하신 분의 마음이 상하시지 않겠습니까. 부인께서도 그것을 원치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인이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어찌 감히 귀한 분께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시녀로서 손님의 기분을 풀어 드리고 싶어 드리는 부탁일 뿐입니다.”
“…….”
여인은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좋아. 하지만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저자가 받아야 할 분노가 그대를 향하게 될 거야.”
“물론입니다.”
* * *
시아나가 공주였던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정원에서는 티 파티가 열렸다.
왕족의 티 파티였다.
왕과 새 왕비, 그녀가 낳은 왕자와 공주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시아나도 있었다.
왕족의 티 파티에서는 시녀들이 차를 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다.
새 왕비의 말 때문이다.
“폐하, 오랜만에 시아나 공주의 차를 마셔 보고 싶습니다. 시아나 공주의 차 맛이 무척 훌륭하지 않습니까.”
왕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시아나, 차를 타거라.”
시아나는 왕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를 향해 수많은 눈빛이 몰렸다.
특히 새 왕비의 눈빛은 섬뜩했다. 그것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시아나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순간, 여린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형편없냐며 맹렬한 비난과 경멸이 날아올 테지.
그래서 시아나에게는 이 행위가 단순히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시아나는 손의 떨림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찻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왜 그때가 생각나는 건지.’
시아나는 속으로 숨을 내쉬며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시아나에게 그런 빌어먹을 과거 회상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고고한 여인에게 완벽한 예법으로 차를 따르는 것이다.
시아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된 차는 잉그리드산 얼그레이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트레이에 담겨 있던 찻잔을 꺼냈다.
찻잔 안에 뜨거운 물을 반 정도 담아 부드럽게 흔들었다.
찻잔에 있던 물은 버린 후, 뜨겁게 데워진 찻잔을 여인의 앞에 놓았다.
그 후, 차 통을 열었다. 차 통 안에는 잘 말린 검녹색 잎사귀가 들어 있었다.
홍차의 맛에 있어 중요한 것이 찻잎의 양이다.
정말 맛있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차 전용 저울을 사용해 찻잎 무게를 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시아나는 눈으로 양을 가늠하여 티스푼으로 찻잎을 푼 후,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찻주전자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찻물이 우러나오길 기다리며 속으로 숫자를 샜다.
‘1, 2, 3, 4…….’
어느새 찻주전자의 물은 맑은 갈빛으로 물들었다.
시아나는 그 물을 미리 준비해 둔 다른 찻주전자에 옮겼다.
거름망을 이용해서 찻잎을 걸러내니, 맑은 찻물이 찻주전자를 가득 채웠다.
시아나는 찻주전자를 들고 여인의 앞에 다가가 방긋이 웃었다.
“차를 따라 드리겠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가장 중요했다.
‘찻주전자를 높게 들어서 따라야 해. 그래야 차가 공기를 품으면서 맛과 향이 더 풍부해지니까.’
시아나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찻잔이 채워지며 향긋한 얼그레이 향이 솔솔 퍼지기 시작했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잔느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아나의 모습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시아나는 칙칙한 잿빛 제복을 입고 있었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아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느껴졌다.
마치 우아한 공주님처럼.
‘마, 말도 안 돼!’
잔느는 자기가 시아나에게 이런 감상을 느낀 걸 인정할 수 없어 눈을 비볐다.
찻잔을 다 채운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고 여인에게 말했다.
“드셔 보시고 농도가 입에 맞지 않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여인은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 위로 가져갔다.
시아나는 긴장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물의 온도도, 찻잎의 양도 완벽했어.’
그러나 차의 맛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아무리 찻잎이 좋고, 차를 훌륭하게 끓였다고 해도, 여인이 작정하고 흠을 잡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꼴깍.
여인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아나도 침을 삼켰다.
잠시 후, 여인이 빙그르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잔느에게 보여 주었던 냉혹한 미소가 아닌 봄 햇살처럼 온화한 미소였다.
“훌륭해.”
‘해냈다!’
시아나는 속으로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거리며 춤도 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아나의 마음속 이야기.
자신은 지금 시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시아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 * *
티 파티가 끝났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파티를 즐긴 여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들은 연회장 입구에 서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열심히 인사를 하는 시아나에게 여인들이 다가왔다. 시아나가 처음 시중을 들었던 여인들이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시아나는 결국 그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애플턴 남작 부인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시아나는 중간에 그녀들을 떠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시아나는 여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시중을 들어 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여인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러고는 시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녀님 덕분에 남작 부인께서 조용히 계셨잖아요. 어우, 남작 부인께서 계속 화내셨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해요.”
“그러니까요. 만약 그랬으면 난 너무 무서워서 초콜릿 맛도 못 느꼈을지도 몰라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에요.”
그제야 시아나의 얼굴이 풀어졌다.
여인들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쪼록 조심히 가세요.”
“네, 시녀님도 건강하세요.”
여인들은 까르르 웃으며 사라졌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등이 굽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처음 연회장에 들어올 때처럼 손가락을 쭈물거리고 있었다.
시아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여인은 주저하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곳에 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보시다시피 모습이 이래서요.”
“…….”
“나 같은 게 괜히 황궁에 갔다가 안 좋은 말만 듣는 건 아닐까 겁이 났어요. 그래도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기회라 용기를 내서 왔답니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황궁의 시녀들은 입구에 선 자신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아.’
도망치듯 돌아가려 했을 때 시아나가 다가왔다.
저를 귀부인처럼 정중하게 대하는 시아나의 모습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시녀님 덕분에 향기로운 차와 달콤한 초콜릿도 먹고, 사람들과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저는 오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여인은 수줍게 웃었다.
“제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시녀님.”
“…….”
시아나는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요 며칠, 오늘 벌어질 수도 있는 수많은 상황을 생각했다.
개중에는 까탈스런 손님의 진상 짓도 있었고, 다른 수습 시녀가 실수를 해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아까의 소동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예상 범위 안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인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떡해. 기뻐.’
손님들 앞에서만큼은 시녀답게 행동하려고 했다.
소소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한없이 정중하게.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익힌 것이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아나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진중한 시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복숭아처럼 발그레 물든 소녀만 남았다.
“저야말로 어여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사랑스러운 소녀의 인사에 등이 굽은 여인이 웃었다.
행복한 미소였다.
저 멀리서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모두가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예상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와.”
* * *
손님들이 갔다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연회장을 깨끗이 치워야 했다.
연회장 정리를 끝냈을 무렵 수습 시녀들은 진이 다 빠졌다.
‘쉬고 싶다.’
‘쉬고 싶어.’
이른 아침부터 연회를 준비하고, 몇 시간 동안 뙤약볕에서 손님을 대접한 후, 해가 질 때까지 청소를 했더니 몸이 여간 고된 게 아니었다.
관리 시녀 립이 말끔해진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오늘은 이만 쉬거라.”
드디어 휴식이다!
수습 시녀들은 환호하며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아나도 츄츄와 자리를 잡았다.
“아-.”
츄츄의 말에 시아나는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아-.”
츄츄가 시아나의 입 속에 탈탈 넣어 준 것은, 연회가 끝나고 남은 초콜릿 부스러기였다.
수습 시녀들도 이 정도는 요령껏 챙길 수 있었다.
시아나는 입 속 가득한 달콤함에 헤실헤실 웃었다.
‘역시 황궁의 초콜릿이야. 쌉싸래한 카카오와 부드러운 버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시아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츄츄, 넌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난 이런 설탕덩어리 안 먹는다니께. 괜히 근육만 빠져. 니나 먹고 기운 내. 어려운 손님을 상대하느라 고생했자녀.”
“너야말로 힘들어 보이던데.”
츄츄가 시중든 손님은 유난히 덩치가 좋은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연회 내내 츄츄의 우람한 팔뚝을 만지며 소리쳤다.
[탐나, 너무 탐나. 우리 농장에 꼭 필요한 인재야. 황궁 시녀를 관두고 농부가 될 생각은 없나요, 시녀님?]
츄츄는 자신을 스카우트하는 데 여념이 없던 여인들을 생각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막상 시중을 들려니까 긴장해서 방법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났거든. 손님들이 내 시중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어서 살았지, 뭐.”
그 말에 시아나는 푸하하 웃었다.
그때 몇몇 수습 시녀들이 시아나에게 다가왔다.
“시아나, 아까는 정말 대단하더라. 차 따르는 모습이 멋졌어.”
“……고마워.”
솔직한 칭찬에 시아나는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배운 것과는 좀 다르던데 혹시 어디서 따로 배운 거야?”
“황궁에 오기 전에 조금 배웠어.”
시녀들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눈을 반짝였다.
“역시!”
그러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게 차 시중드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나도!”
“내가 먼저 말했잖아. 넌 왜 껴들고 그러니?”
수습 시녀들이 시아나에게 이런 관심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관심이 뭐야. 패전국 출신이라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태도에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다니 이 애들 대단하네. 하긴 이 정도 뻔뻔함이 있어야 시녀를 하지.’
그러나 상황이 달라져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너희, 지금 제정신이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잔느였다.
잔느는 티 파티 내내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연회 도중 남작 부인에게 망신을 당한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저 꼴은 못 봐주겠다.’
잔느는 시아나와 그녀의 곁에 있는 시녀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까짓 차를 조금 잘 따랐다고 패전국의 노예 따위에게 굽실거리다니.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어?”
잔느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수습 시녀들은 슬슬 눈치를 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시아나의 옆에 있던 수습 시녀 하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잔느, 너야말로 부끄러운 것도 모르니?”
“뭐?”
“네가 손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연회가 엉망이 되어 버릴 뻔했잖아. 시아나가 수습을 해 주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벌을 받았을 거야. 최악의 경우에는 수습 시녀직에서 잘렸을지도 모르고. 그런 상황을 만든 주제에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큰소리라니…….”
그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여왕벌 짓도 상황 봐 가면서 해.”
“뭐, 뭐어?!”
잔느는 기가 찬 얼굴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내게 대드냐, 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금붕어 똥처럼 붙어 있던 수습 시녀들도 눈을 내리깔며 잔느의 시선을 피했다.
“이, 이, 이…….”
잔느는 눈을 부릅뜨며 말을 더듬더니 휙, 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츄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꼴좋구먼.”
“그러게.”
시아나의 말에 킥킥 웃은 츄츄가 말했다.
“그런데 애플턴 남작 부인은 확실히 다른 손님들이랑 차원이 다르더라. 앉아 있는 모양부터 엄청나게 우아하시더라고.”
시아나는 애플턴 남작 부인을 떠올렸다.
앉아 있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걸음걸이, 차를 마시는 몸짓, 모든 몸짓에 엄격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작은 과수원을 가지고 있는 일개 남작 부인이 아니라, 살을 깎아 내듯 엄한 예법을 배운 황실의 공주님 같은…….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시아나는 제 생각이 어이없어 고개를 저었다.
* * *
황태자궁.
황태자의 호위 기사 솔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달칵 하고 방문이 열렸다.
인기척에 솔은 눈을 번뜩 떴다.
언제 졸았냐는 듯, 솔은 엄청난 속도로 검을 빼 들었다.
“지엄하신 황태자 전하의 방에 들어온 자가 누구냐!”
솔의 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시아나에게 시중을 받은 애플턴 남작 부인이었다.
“어머나, 무서워라.”
여인을 본 솔은 눈을 크게 떴다.
솔은 이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부인, 자꾸 이런 식으로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면 정말 곤란합니다.”
“하지만 전하를 잊을 수 없었는걸요.”
“잊으세요. 겉모습만 멀쩡하고 머릿속엔 말랑말랑한 다람쥐 발바닥 생각뿐인 변태 같은 남자.”
“…….”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제야 솔은 정신을 차린 듯 검을 거두고, 차렷 자세를 했다.
눈을 내리깐 여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더해 보지. 이 연극이 꽤 재미있나 본데.”
“아닙니다. 전혀 재밌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아쉽네. 조금만 더 했으면 제국 최고의 기사 솔네이트가 잘못했다며 엉엉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하, 무서운 말씀을.”
솔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비켜섰다.
솔을 지나친 여인은 시원한 걸음걸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흰색 페럿과 볼이 통통한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와 여인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털이 뽀송한 새도 날개를 파닥거리며 여인의 주변을 돌았다.
그녀는 저를 반기는 작은 동물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니?”
작은 동물들이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뀨!”
“찍!”
“삐!”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
그 모습을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전하?”
“그래.”
애플턴 남작 부인, 아니, 황태자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시드는 편안한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은빛 머리카락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는 얼굴은, 열여덟 살의 성인 남자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또렷한 턱선과 다부진 체격은 분명 남자였다.
그런 라시드가 완벽한 여인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마력석 덕분이었다.
마법사가 신비한 힘을 불어 넣어 만든 마력석에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다.
그중 라시드는 신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마력석을 구했다.
이 모든 것을 본 호위 기사 솔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고작 반나절 동안 여장을 하려고 대저택 하나 값보다 비싼 마력석을 사시다니.’
일개 기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 패턴이었다.
그러나 주군이 제 돈을 쓴다는데 일개 부하가 어쩌겠는가.
솔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물었다.
“그래서, 오늘 다녀오신 결과는 어떠셨습니까. 시아나님은 전하의 기대에 부합했나요?”
라시드는 오늘 보았던 시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연회장 입구에서 마주친 시아나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잿빛 제복 위에 새하얀 앞치마를 입고 두 손을 모은 시아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평범한 수습 시녀 같았다.
외모만 수수한 것이 아니었다.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시아나는 일개 농부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정중히 말을 건넸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라시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공주였던 자가 저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라시드의 앞에 선 순간 시아나는 달라졌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부인께 어울리는 차를 끓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로서 예법을 배웠을 테니, 어느 정도 잘하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시아나의 솜씨는 예상을 벗어났다.
팔의 위치, 찻주전자를 쥔 손의 모양과 눈을 내리깐 얼굴까지.
차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마치 예법 서적에 적힌 활자를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평범한 외모에 초라한 시녀복을 입고 있는데도 과거의 신분이 티 나다니. ……재미있네.’
그때를 떠올린 라시드는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애는 황족을 옆에서 모셔도 될 만큼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더구나.”
그 말에 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라시드는 이상적인 황태자의 모습을 한 것과 달리 뿌리 깊은 변태였다.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어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하기도 하고, 다람쥐 발톱을 깎아야 한다며 중요한 연회에 나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가 저렇게 말한다면 시아나는 제대로 능력을 보여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솔은 ‘와, 공주님이 적성을 찾아 다행이네요!’ 따위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설마 황태자궁으로 데리고 올 생각은 아니시겠지?’
황태자는 황궁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지만, 그만큼 적이 많았다.
패전국 출신의 시녀를 라시드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솔은 다급한 얼굴로 긴 말을 늘어놓았다.
“전하,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시아나님의 나라와 가족을 짓밟은 것은 전하십니다. 지금은 얌전해 보여도 언젠간 저하께 복수를 한다며 간악한 짓을 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설령 공주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 공주를 꼬드겨 사주를 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저는 시아나님을 이 궁에 들이는 것을 반대합…….”
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시드가 말을 내뱉었다.
“시아나를 정식 시녀로 승급시켜 아리스 공주의 궁에 보내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솔의 눈이 커졌다.
아리스는 황실의 막내 공주로, 라시드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그러나 그 위용과 달리 공주의 성에는 늘 시녀가 부족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니, 이런 걸 지금 생각할 때가 아니지.’
라시드는 변덕스럽다.
이래 놓고 조금 뒤에 ‘역시 그 애가 내 궁으로 오는 게 좋겠어.’라고 말이 바뀔지 모른다.
그러기 전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야 했다.
“시녀장에게 명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솔은 번개 같은 속도로 방을 나갔다.
드넓은 방에는 라시드만 남았다.
라시드는 제 무릎 위에 있는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았다.
라시드의 품이 편안한지 어느덧 작은 동물들(페럿, 다람쥐, 새)이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티 파티가 끝날 무렵, 시아나는 등이 굽은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무슨 말인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아나의 얼굴은 선명히 보였다.
등이 굽은 여인이 말을 끝내는 순간 시아나의 얼굴이 바뀌었다.
마치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처럼.
그녀는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라시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라시드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중얼거렸다.
“웃는 얼굴이 귀엽더라. 엄청.”
* * *
수습 시녀들은 오늘도 바빴다.
성에 있는 커튼을 대대적으로 수선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습 시녀들은 수십 개의 커튼에 옹기종기 달라붙었다.
시아나도 작은 바늘을 들고 커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수선해야 할 곳이 있나 싶을 만큼 깨끗해 보이지만…….’
시아나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여기다!’
시아나는 커튼 끝자락의 꽃문양 실밥이 삐져나온 것을 발견했다.
슉슉슉슉.
시아나는 번개 같은 바느질 솜씨로 실밥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감쪽같이 정리된 커튼을 바라보며 시아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다섯 살 때부터 배운 자수를 이렇게 써먹네. 역시 기술은 배우고 볼 일이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른 곳을 바느질하려는데, 관리 시녀인 립이 나타났다.
립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아나였다.
“시아나, 손님이 왔다.”
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작은 왕국의 공주였던 시아나가 황실의 시녀가 된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국 사람 중 시아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요컨대,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내게 손님이라고?’
의아해하는 시아나를 향해 립이 말을 덧붙였다.
“며칠 전 티 파티에 참석하셨던 애플턴 남작 부인이시다. 네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오셨다는구나.”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수습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애플턴 남작 부인이 시아나를 왜 찾아오셨지?”
“그날 시아나가 부인을 잘 모셔서 그렇겠지.”
“그렇다고 황궁까지 찾아오냐. 귀족이 그렇게 심심하냐고.”
“그럼 심심하지. 힘든 일은 하녀들이 다 해 주는데.”
작은 소란 속에 시아나는 몸을 일으켜 립을 따라나섰다.
립의 뒤를 걷는 시아나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이 왜 나를 찾아온 걸까?’
다른 시녀들이 말한 것처럼 티 파티 때 시중을 잘 들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귀족이 그런 이유로 일개 수습 시녀를 찾아온담.
‘그럼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주할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 더더욱.
그녀는 아름답지만, 숨 막힐 정도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일대일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시아나는 애플턴 남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립이 시아나에게 말했다.
“혹시나 불쾌하실 일 없게 조심하거라.”
“예.”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선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잔느를 쥐 잡듯 잡고, 시아나를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아니었다.
시아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던 등이 굽은 여인이었다.
시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
시아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분이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그럼 그때 본 아름다운 귀부인은?
“아…….”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녀는 자신이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한 적이 없다.
시녀들과 자신이 멋대로 착각한 것뿐.
시아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귀한 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은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시녀님. 제가 일부러 신분을 숨긴걸요. ……사실은 말이죠.”
티 파티 초대장을 받은 애플턴 남작 부인은 고민했다.
갈까, 말까.
물론 그녀도 황실에서 주최하는 티 파티에 가 보고 싶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겁이 났다.
등이 굽고, 미인도 아닌 데다, 몰락한 귀족가에서 태어나 제대로 예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집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내가 황궁에 가 봤자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뻔해.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는 자가 어쩜 저렇게 못났냐며 무시당하겠지.’
그것도 처음 마주하는 과수원의 농부들 앞에서 말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궁에서 편지가 한 장 더 도착했다.
티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되면 신분을 숨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불쾌감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플턴 남작 부인에게는 잘 익은 사과의 유혹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내 정체를 숨겨도 된다면 다녀와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가게 된 티 파티였다.
“그 후부터는 시녀님도 아는 이야기예요. 잔뜩 겁먹은 저를 시녀님께서 신경 써 주셨죠. 덕분에 티 파티를 즐겁게 보냈고요.”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시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그날,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오해받으신 분은 누구신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농장에서 일하는 분이 아닌 건 확실한데……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입장하신 걸 보면 황실의 높은 분이 아닐까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여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몸짓은 평범한 귀족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녀도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 꼭 황태자처럼.’
수많은 공주 중 한 명이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정말 어이가 없다.
‘수습 시녀들 일하는 데까지 와서 그런 짓을 하다니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네. 놀아 줄 친구가 없든가.’
생각에 빠진 시아나를 향해 애플턴 남작 부인이 말했다.
“아무튼 그날, 시녀님께 큰 감명을 받았어요.”
초라한 잿빛 제복을 입고 있어도,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걸 처음 알았다.
“저도 시녀님처럼 우아한 몸짓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티 파티 다음 날부터 예법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셨군요.”
애플턴 남작 부인이 시아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의미로 다시 한번 제 인사를 받아 주시겠어요? 격식을 갖추어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어요.”
시아나는 당황스러웠다.
세상 어느 남작 부인이 일개 수습 시녀에게 인사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남작 부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은 안도한 듯 웃으며 한쪽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날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시녀님.”
냉정히 평가하자면 그녀의 인사는 엉망이었다.
팔의 각도, 손의 위치, 모든 것이 어설픈 데다 결정적으로 중심이 되는 등이 굽어 이상적인 형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아나는 그녀를 감히 평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따스한 성품이 그대로 느껴졌기에.
애플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아나였지만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과수원의 농부들에게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시아나는 존경을 담아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역시나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 후,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은 떠나기 전 시아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넉넉히 챙겨 왔으니 다른 시녀님들과 함께 드세요.”
거대한 피크닉 바구니에는 색이 선명한 사과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 * *
수습 시녀들의 식당.
늘 딱딱한 빵 한 조각이 다였던 테이블이 오늘은 휘황찬란했다.
껍질이 반질반질한 사과와 둥그런 사과 파이, 유리병에 담긴 노란색 사과잼, 샛노란 사과 주스까지.
그야말로 사과 파티였다!
수습 시녀들은 한껏 눈물을 흘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흑흑, 어떻게 사과가 이렇게 달콤하냐고. 사과에 꿀 바른 것 아니냐고.”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왜 백설 공주가 사과를 먹다 죽은 줄 알겠다니까. 이 정도 사과면 독이 들어 있다고 해도 먹겠다.”
“나는 두 개도 먹을 수 있어.”
“나는 세 개.”
“다들 닥쳐. 다 내 거니까.”
어쨌건 결론은 애플턴 남작 부인 만세라는 것!
“애플턴 남작 부인, 사랑합니다. 다음 생에는 부인께서 가꾸시는 사과나무로 태어나고 싶어요.”
“부인께 무슨 민폐니. 사과나무에 줄 비료로나 태어나렴.”
“그래야겠다.”
애플턴 남작 부인을 향한 애정이 폭발하는 자리에 시아나도 앉아 있었다.
음식을 한가득 받아 와 오늘의 영웅이 된 시아나의 손에는, 가장 예쁘고 알이 큰 사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선물을 받은 자에 대한 예우였다.
시아나는 설레는 얼굴로 사과 하나를 깨물었다.
그 순간 입 속에 상큼한 사과 향이 가득 퍼졌다.
‘우와, 진짜 맛있어.’
잘 익은 사과 하나가 다이아몬드 안 부러운 순간이었다.
고기 아니면 상대 안 하던 츄츄조차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먹어 대고 있었다.
한편에 서 있던 관리 시녀 립이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내일 세상이 멸망한대도 마지막 남은 사과나무 한 그루까지 뽑아먹을 애들이야.”
립이 말했다.
“먹으면서 들으렴.”
찹찹.
냠냠냠.
와구와구.
시녀들은 립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귀를 열었다.
“오늘부로 시아나가 수습 시녀에서 정식 시녀로 진급을 하게 됐다.”
“……!”
충격적인 소식에 수습 시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나는 사과를 입에 문 채 굳어 버렸다.
‘내가 정식 시녀가 됐다고요? 왜요?’
급작스러운 소식에 의문을 품은 것은 시아나뿐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시녀님.”
티 파티 이후 조용히 찌그려져 있었던 잔느였다.
잔느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출신도 신분도 미천한 애가 어떻게 황궁의 정식 시녀가 될 수 있나요? 그것도 먼저 들어온 다른 수습 시녀들을 모두 제치고요!”
수습 시녀가 정식 시녀가 되기 위해선 충족해야 할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일정 이상의 수습 기간, 그리고 다른 정식 시녀들의 평가.
그래서 잔느는 제가 가장 빨리 정식 시녀가 될 거라 자신했다.
정식 시녀들에게 손수건이며 머리핀 같은 것들을 열심히 갖다 바쳤으니까.
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립 또한 제가 준 선물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저런 미천한 계집애가 나보다 먼저 진급을 하냐고.’
잔느는 순순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 이 결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른 수습 시녀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세요.”
내가 왜?
—라고 립은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수습 시녀들이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으니까.
“며칠 전 열린 티 파티는 사실 평범한 연회가 아니었다. 수습 시녀들의 역량을 확인해 보는 자리였지.”
“……!”
“그날 티 파티에서 누가 가장 두드러졌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지?”
“…….”
대답 대신 적막이 흘렀다.
립은 아랑곳 않고 시아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시아나, 내일 해가 밝으면 루비궁으로 가렴. 그곳에서 황녀 저하를 모시게 될 거야.”
한 박자 늦게 시아나가 대답했다.
“……네.”
“그럼 공지 사항 끝.”
그렇게 립은 식당을 떠났다.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잔느를 스쳐 지나가며.
“…….”
시아나는 도저히 아까처럼 마음 편히 사과를 먹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수습 시녀들의 시선 때문이다.
수습 시녀들에게 정식 시녀가 된다는 것은 꿈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늦게 들어온 시아나가 가장 먼저 해냈으니 고까울 수밖에.
얄밉고, 원망스럽겠지.
‘미움받는 게 익숙하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라고.’
시아나는 그녀들의 적의를 온몸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몸이 시아나를 덮쳤다.
“축하혀, 시아나!”
“헉!”
츄츄는 시아나를 품에 안고 말을 이었다.
“나는 니가 제일 먼저 정식 시녀가 될 줄 알았어.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까.”
시아나는 엄청난 근육의 압박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츄츄의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꼭 자기가 정식 시녀가 된 것처럼.
츄츄만이 아니었다.
“축하해.”
“잘됐다, 시아나.”
다른 시녀들도 웃으며 시아나에게 인사했다.
그녀들의 눈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시아나를 향한 원망이나 미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물었다.
“……괜찮아?”
그 의미를 깨달은 한 수습 시녀가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조금 분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솔직히 티 파티 때 네가 잘하긴 했잖아.”
“맞아. 그 덕에 오늘 맛있는 음식도 잔뜩 얻어먹고.”
“나, 먼저 승진한 동료 질투하는 그런 치졸한 사람 아니다.”
“웃기네. 아까 수습 시녀님이 시아나 이름 말하자마자 욕부터 했으면서.”
“그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튀어 나간 거지. 나도 사람인데 마냥 좋기만 하냐.”
티격태격하는 수습 시녀들을 바라보며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잊고 있었네. 이 사람들, 내가 공주였던 시절 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아직 황궁의 음습함에 물들지 않은 그녀들은 솔직했다.
시아나가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고마워. 정식 시녀가 돼서 첫 급료를 받으면 너희들에게 맛있는 걸 쏠게.”
그 말에 수습 시녀들이 오오오,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잘생겼다, 시아나!”
“돈 잘 쓴다, 시아나!”
한껏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단 한 사람만 표정이 흉흉했다.
잔느였다.
“뭐야, 이 분위기. 다들 돈 거 아냐?”
그러나 잔느의 말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느는 더 이상 수습 시녀들의 대장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을 납득하지 못한 잔느는 소리를 빽 질렀다.
“두고 봐, 너희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츄츄가 경멸이 담긴 얼굴로 대답했다.
“뭔 개똥 같은 소리여.”
* * *
그날 밤, 시아나는 짐을 챙겼다.
정식 시녀가 된 후에는 배정받은 궁의 숙소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짐이라고 해도 별것 없지만.’
왕국을 떠날 때는 이것저것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외출할 때 입을 평상복 한 벌과 속옷 몇 벌, 작은 보석 상자 하나가 전부였다.
시아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들지 않는 작은 방.
퀴퀴한 곰팡이가 나고, 갈라진 벽 사이로는 다리 많은 벌레들이 왔다 갔다 하기 일쑤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천장에서 비가 새어 들어와 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래도 공주였던 시절 지냈던 방보다는 훨씬 좋았어.’
적어도 이곳에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지 않았다.
회초리를 맞아 퉁퉁 부은 다리의 아픔을 참는 일도 없었다.
언제 자신을 부르는 노크 소리가 들릴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한 몸을 널브러뜨리고 잠만 잤을 뿐.
‘고단했지만 즐거웠어.’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츄츄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츄츄가 시아나에게 말했다.
“손.”
자연스럽게 내민 시아나의 손 위에 츄츄가 무언가를 건넸다.
“정식 시녀가 된 기념 선물이여. 관리 시녀님께 애걸복걸해서 성 밖으로 나가 겨우 사 왔구먼.”
시아나의 손 위에 놓인 물건은, 시아나의 눈동자 색과 같은 에메랄드색 머리핀이었다.
츄츄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수습 시녀들과 다르게 정식 시녀들은 조금씩 꾸미잖여. 머리핀도 하나씩 달고 다니고. 그래서 하나 사 봤어. 꿇리지 말라고.”
“…….”
시아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습 시녀로 일하는 동안은 급료가 나오지 않는다.
조그마한 침대 하나와 겨우 배를 채울 수 있는 식사를 제공받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습 시녀들은 집에서 가지고 온 비상금을 아끼고 아껴 생활을 하곤 했다.
그건 츄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머리핀이라니.’
한눈에 보아도 귀족들이 쓰는 것처럼 값비싼 제품은 아니었다.
가짜 보석이 하나 박힌 투박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 머리핀 하나를 사기 위해 츄츄는 비상금을 몽땅 털어야 했을 것이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가 심장을 잡아서 꼬집는 것 같아.’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처럼 눈물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시아나의 얼굴을 보고 츄츄가 당황했다.
“왜, 왜 그려. 머리핀이 마음에 안 드는겨? 사장님한테 젤 예쁜 걸로 골라 달라고 한 건디.”
“…….”
“으이구. 역시 옆에 있는 핀으로 고를 걸 그랬나.”
츄츄의 탄탄한 복부에 시아나의 가는 팔이 휘감겼다.
시아나가 눈을 꾹 감고 말했다.
“고마워, 츄츄. 정말 예뻐.”
떨리는 목소리에 어린 감정을 느낀 츄츄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츄츄는 히죽 웃으며, 자기보다 한참 작은 시아나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친구끼리, 뭘.”
그 말이 시아나의 가슴을 따스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