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27)

프롤로그

시아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펄럭이는 뽀얀 수건이라니…….

‘좋다.’

그러나 시아나의 흐뭇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옆에서 들려온 험악한 목소리 때문이다.

“젠장, 이제야 끝났네. 뭔 빨래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 말이야. 팔 아파 뒤지는 줄.”

“난 요즘 근육도 엄청 생겼잖아. 대장장이 잭 아저씨보다 내 팔뚝이 더 굵을걸. 볼래?”

하여간, 다들 걸걸하다니까.

시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우람한 팔뚝을 드러내며 서로 자랑하고 있는 여인들은 시아나와 똑같은 우중충한 잿빛 제복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시아나와 여인들은 황궁의 온갖 자잘한 일을 하는 수습 시녀였다.

‘말이 시녀지 사실은 무임금으로 개처럼 부려 먹는 노예와 다를 바 없지만.’

황궁의 시녀는 크게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황족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며 살뜰하게 보살피는 상급 시녀.

황궁의 각종 부서를 관리하는 중급 시녀.

그 외 빨래나 청소같은 노동을 하는 하급 시녀.

상급 시녀는 귀족만 될 수 있었지만, 중급 시녀와 하급 시녀는 평민을 뽑았다.

그래서 대륙 곳곳에서 많은 소녀들이 황궁의 시녀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성의 정식 시녀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진즉에 도망쳤을 만큼.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일이 힘든 만큼 수습 시녀들끼리 죽이 잘 맞는다는 점이랄까.

“조금만 쉬고 돌아가자. 일찍 가 봤자 수습 시녀 따위가 농땡이나 부린다며 또 다른 데로 굴릴 게 뻔하잖아.”

“옳소!”

끄덕끄덕.

시녀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모종의 결의를 다졌다.

시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시아나도 한편에 앉아서 부르튼 손가락을 주물렀다.

‘빨래만 하면 손가락이 불어터진 소시지처럼 되어 버리네. 연약한 몸뚱이 같으니.’

조금만 일을 해도 티가 나는 몸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얘들아, 저기 봐. 그레이스 공주님이야.”

공주님!

그 한마디에 마른 오징어처럼 흐물거리던 시녀들이 벌떡 일어났다.

시아나도 얼떨결에 일어나 시녀들과 함께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공주의 모습에 시녀들의 눈빛이 황홀해졌다.

흑단같이 윤이 나는 검정색 머리카락, 수십 개의 보석이 박힌 화려한 드레스, 잘 관리된 얼굴은 도자기처럼 깨끗했다.

“와, 예쁘다.”

“그러게. 정말 예뻐.”

시녀들은 넋을 놓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태어나니까 아빠가 황제라니 얼마나 행복할까.”

“말해 무엇 하니. 입고 싶은 옷은 다 입을 수 있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수 있는데……. 사는 게 꼭 천국 같겠지.”

재잘거리던 시녀들 사이에 있던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그렇지도 않을걸.”

시녀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턱을 괸 채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저 드레스, 엄청 무거워. 못해도 20㎏은 될 거야. 하루 종일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업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거지.”

“2, 20㎏?!”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드레스 안에 입은 코르셋은 얼마나 괴로운데. 거인이 내 몸통을 잡고 언제 숨을 끊어 줄까, 하는 느낌이랄까.”

시아나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저런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야 한다는 거지. 어떨 땐 화사하게 웃어 주기까지 해야 하고 말이야. 이래도 공주가 행복해 보이니?”

시녀들은 한 방 맞은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일개 평민의 딸인 그녀들에게 공주는 동화 속에 나오는것처럼 완전무결하고 아름다운 존재일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주의 현실적인 괴로움을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을 깜빡이던 시녀 중 한 명이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시아나는빙그르웃으며속으로대답했다.

‘그야 나도 몇 개월 전까진 공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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