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눈 먼 공포 (9/10)

08. 눈 먼 공포

티리안은 자신의 앞에서 하늘하늘 걸어가는 셸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보고 온 뒤로 셸리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바람을 타고 갈 것처럼 살랑거리는 움직임이다.

티리안은 셸리가 태어난 이후로 잃은 능력을 상기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고, 어둠을 제 것처럼 다루며, 두려움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보고 들을 수 있다. 그 눈을 잃은 것이다. 그 사실이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티리안은 셸리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셸리가 걷는 걸음마다 불꽃이 옮겨붙는 것 같다.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외투가 불길하다.

티리안의 눈에 셸리의 존재가 환상처럼 아른거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팔랑이며 미련 없이 걸었다.

뒤에 남아 있는 티리안은 돌아보지 않고.

셸리는 신도들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오랫동안 셸리를 찾지 못해 눈이 벌게진 신도들이 함정처럼 튀어나왔다.

차분하게 사냥을 즐기던 이들이 오래 굶주린 탓인지 시끄럽게 날뛰고 있었다. 그들의 예상보다 오랜 기간을 셸리가 도망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도 크루즈는 결국 단절된 공간이었다. 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신도들은 크루즈선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

당장이라도 셸리의 눈을 뽑아 제단에 바치고 육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드디어 찾았어!”

“내가 찾아낼 줄 알았다고!”

“내 거야, 눈은 내가 파낼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내 것이야.”

앞다투어 나타난 이들이 셸리를 사로잡으려 다가왔다. 하지만 눈을 탐내던 이들이 그녀의 눈길에 힘을 잃었다.

그것은 본디 신의 것이라, 허가 없이 탐하는 자는 벌을 받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이들이 공포에 질렸다.

티리안이 오래도록 품고 있던 고독이다. 그것을 감당할 여력도 없는 이들이 눈을 원하고 달려드는 꼴이 잡스럽다.

기분 좋게 유르윈과 줄리아나를 찾아 나선 셸리의 턱이 굳어졌다. 용서를 해 주면 그걸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고, 반대로 뒤에서 칼을 찌르는 이들이 있다.

눈을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후자였다. 고통스러워하던 이들은 몸부림치다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픽픽 쓰러지는 이들에게 닿은 그녀의 시선이 일그러졌다. 밟힌 벌레처럼 바르작바르작 더럽게도 꿈틀거린다.

셸리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그들을 지나쳤다. 대부분의 이들이 고통스러워 하며 쓰러졌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만이 셸리의 눈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전자의 사람들이다.

용서를 하면 앞으로 나아갈 사람들이다.

펴질 생각을 하지 않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눈이 뻑뻑하다.

“셸리, 그만해.”

셸리가 쓰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능력을 웃도는 힘이다. 셸리는 지금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능력을 남발하고 있었다.

티리안이 셸리의 어깨를 잡았다. 실핏줄이 터져 셸리의 눈은 멀리에서 보면 붉은색처럼 보였다. 흰자위 없이 붉어진 눈동자가 섬뜩했다.

“네가 쓸 만한 능력이 아니야. 여기에서 멈춰야 돼.”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셸리는 아픈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선 자신의 눈을 보고 거품을 물고 쓰러진 신도들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신도를 무감하게 바라봤다.

“견딜 만할 리가 없잖아.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라고.”

“티리안, 저는 정말 괜찮아요.”

붉어진 눈이 티리안을 향했다. 그녀가 올곧게도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흰자위가 온통 붉어진 눈은 망가지고 나서야 티리안과 비슷한 색이 되었다.

그런 색을 갖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티리안은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붉은색에 겁을 먹고 말았다.

셸리는 붉어진 눈가를 연신 쓸어 올리는 그를 안타까워했다. 티리안의 공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티리안은 공포의 신이었다.

티리안은 감정에서 태어난 신이다. 그의 신전은 무너졌고, 남아 있는 건 지금 이 크루즈선에 탄 추악한 신도들이 전부일 것이다. 공포를 빌미로 사람들을 꼬여 낸 천박한 신도들이다. 그런 것들이 티리안을 숭배한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전을 무너뜨리고, 신도를 박해해서 공포를 죽일 수 있다면 그는 죽은 신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셸리는 티리안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안다.

티리안은 공포를 알았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죽고 그를 숭배할 존재가 남지 않아도 영원히 죽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셸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셸리가 그것을 가볍게 간파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곧 돌아갈 테니까.”

셸리는 티리안의 손을 떼어 내며 다정하게 웃었다. 어머니와 유르윈을 만나고 나면 셸리는 티리안에게 다시 눈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금방 돌려줄게요.”

“셸리!”

티리안이 손을 뻗었다. 셸리는 그것을 마주 잡지 않았다.

눈이 다시 셸리가 원하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티리안을 어떻게 떼어 내고 무슨 정신으로 움직인 건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셸리는 불이 켜지지 않은 선실에 휑뎅그렁하게 남겨져 있었다.

눈이, 아파.

실핏줄이 붉게 올라온 눈이 뻐근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대부분의 신도를 마주친 것 같다.

어머니와 유르윈. 그들만 찾아내면 되는데….

이 눈이 좀처럼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단번에 가는 길을 알려 주지 않고 꼬이고 꼬여 한참을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뭘 원하는 건지.”

셸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두운 선실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검은 바다가 보여야 할 창문 너머로 가로등이 보였다.

잠시 육지에 도착한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 새벽 거리를 밝히고 있는 환한 가로등. 그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

‘아, 이건.’

셸리는 아픈 눈을 비비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유심히 응시했다.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유르윈이 선물한 외투를 입고, 무감하고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흥 없는 눈으로 크루즈선을 힐긋 보고, 춤을 추듯 거리를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아이들의 뒤를 따르며 손을 잡아 주는 부모를 보는 시선이 유독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불쌍한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셸리는 어두운 크루즈선의 객실에서 배를 타기 전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외로움에 침식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었나 몰라.

얼마 전의 자신을 보며 웃던 그녀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셸리가 보고 있는 시야가 뒤집어졌다.

과거의 셸리가 자신의 시야를, 자신이 과거의 셸리의 시야를 보고 있었다.

셸리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광경을 기억에 담았다. 거대한 크루즈선, 뛰어다니는 아이들, 부모. 셸리가 바라는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시야는 금방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가로등이 사라졌다.

검은 바다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눈이 마주친 게 티리안이 아니었구나.’

기세 좋게 내뱉은 말을 들은 티리안이 그녀를 비웃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셸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가만히 감았다. 욱신거리던 눈이 어둠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셸리.”

끊임없이 그리워하던 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 예전보다 조금 나이가 든 줄리아나가 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보다 조금 더 늘어난 주름, 세월에 혼탁해진 눈동자.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꿈을 꾸는 소녀처럼 희망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로켓이 걸려 있었다. 줄리아나의 옆에는 유르윈이 서 있다.

나란히 두고 보니 두 사람은 똑 닮아 있었다.

셸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달리 물어야 할 말이 있었다.

셸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티리안 님에게 돌아가면 당신들이 웃을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아도 스스로 깊이 빠져들 것이다. 검은 물 밑으로 향하는 것은 온전히 제 의지였다.

아무도, 티리안도 모르지만 셸리가 스스로 그의 외로움을 줄여 주기 위해 줄리아나의 태를 빌어 태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이며 웃는 사이, 무리를 거듭하던 눈에서 기어이 피가 터졌다. 셸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감각에 손을 들었다.

붉은 것이 손등에 축축하게 묻어나는 것을 보고 외투의 소매를 길게 빼냈다.

셸리가 피가 지나간 길을 닦아 내는 것을 줄리아나와 유르윈은 보고만 있다. 뺨을 전부 닦은 셸리는 피로 축축하게 젖은 외투의 소매를 바라봤다.

더러워진 소매뿐만이 아니라 외투 전체가 엉망이었다. 쓸모를 다한 것을 버릴 시간이었다.

유르윈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가 후회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셸리가 외투를 벗는 모습을 주먹을 쥐고 바라본다. 셸리는 유르윈의 금발을 겨우 몇 분 전에 본 그의 머리카락과 비교했다. 어렸을 때와 달리 이제 곱슬거리지도 않고, 연하게 반짝거리지도 않지만, 여전히 다정한 금빛이었다.

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셸리는 손을 흔드는 대신 더러워진 외투를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유르윈의 시선이 외투를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겨우 외투가 바닥에 떨어진 것뿐인데.

“유르윈 님, 발은 많이 아팠어요. 그건 정말 아팠어요.”

셸리는 마지막으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발치에 대충 던져 두어 발끝에 차이는 외투를 밟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버리고 갔지만,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줄리아나의 얼굴을 살폈다.

“아픈 곳은 없어 보이네요. 다행이에요.”

아픈 곳 없이 건강해서 다행이다. 혹시나 해일을 피하지 못하고 다친 곳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셸리는 줄리아나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보며 눈을 접었다.

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셸리는 줄리아나의 가슴 위로 늘어진 로켓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로켓은 줄리아나의 체온을 머금어 금속 같지 않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이걸 버리려고 한 거죠. 기도도 안 하고 저한테 신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던 시기가 있었잖아요.”

“알고 있었니?”

“아니요, 지금 알았어요.”

“이걸 버리고 너만 사랑하려고 했었어, 셸리. 전부 잊고 너랑 같이 그곳에서….”

“고마워요.”

셸리는 손을 뻗어 줄리아나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셸리의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 말이면 충분해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담담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흔들리는 듯한 유약한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조금도 울고 있지 않았는데도.

“유르윈 님.”

셸리는 줄리아나의 몸을 밀어내고 바로 섰다. 줄리아나의 손이 셸리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의 손등이 떨리고 있었다.

“보육원은 계속 후원해 주세요.”

줄리아나의 손길에 시선이 닿지 않았다. 그녀의 손짓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괴리된 듯하다.

분명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데 인형극에 사용하는 인형처럼 몸이 뻣뻣했다. 누군가 조종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셸리는 이따금 외로워지고는 했었다. 그녀를 찾는 사람은 많았는데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들이 자신을 두고 떠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이끌던 시야의 목적지가 티리안의 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르윈의 눈이 일그러졌다.

셸리의 능력을 질투하고, 그러면서도 셸리를 깊이 아껴 주던 그가.

그가 셸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리하게 질린 창백한 얼굴과 새빨갛게 변한 흰자위를 응시했다.

그녀가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외투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짓밟혔다.

셸리는 지금, 그들에게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서 미움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를 속였는데. 왜 원망도 하지 않아?”

아주 오래 그녀를 속이고 이곳에 끌어들였는데도. 그것이 이상했다.

자기도 모르면서 외로움을 타는 아이였는데.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니기 바쁜 유르윈의 소매를 잡던 아이였다. 투정도 부리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안내해 주던 착한 아이.

혼자 남으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자신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폭 덮어 보던 아이다.

내내 모른 척했다.

그녀의 능력이 부러워서, 어머니의 손길을 받는 그녀가 원망스러워서. 그리고 아버지를 깨워 줄 수 있는 존재가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괜찮으니까요.”

셸리는 유르윈과의 과거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유르윈은 그 순간 자신이 몹시 보잘것없어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버려진 외투같이 쓸모를 다한 것처럼.

셸리는 언제나 그의 뒤를 따라왔는데. 어머니가 그를 보지 않아도, 셸리만은 유르윈의 뒤를 졸졸 따랐는데.

훌쩍 커 버린 아이가 그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배에 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쓸모를 다하게 될 사람은 셸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에게 미련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쓸모가 다한 건 누구지?

유르윈은 원망 없이 웃는 셸리를 보며 생각했다.

유르윈을 가만히 바라보던 셸리가 줄리아나에게 했던 것처럼 유르윈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멀어졌다.

“늘 이렇게 안아 보고 싶었어요.”

셸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말간 미소였다. 무언가를 벗어던진 듯 후련해진 미소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멀어지는 셸리의 몸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허공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덩그러니 남은 유르윈과 줄리아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셸리가 바다 아래로 잠긴 것처럼 사라졌다.

“셰, 셸리. 내 아이….”

줄리아나가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바닥에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유르윈 역시 뺨을 적시는 눈물에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심정으로 읊조렸다.

“그 애는 내 동생인데, 가족인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 *. *. *. *.

티리안은 다시 손에 잡히지 않고 사라진 셸리의 빈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공포에 질렸다.

입술이 떨리고 손끝이 저미는 듯한 공포였다.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온기가 빠져나간 손가락이 차가웠다.

셸리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녀는 그에게 눈을 돌려주러 오는 것이다.

모든 감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돌려받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눈이 먼 채로 있어도 좋다. 셸리만 그의 곁에 있다면 괜찮다.

그 눈을 돌려준다면 셸리는 죽는다. 셸리를 이 세상에 발붙이게 한 것이 그 눈이었으니 그것을 돌려주면, 셸리는 원래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이곳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싫어, 셸리.”

크루즈선이 크게 철렁거렸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그의 공포에 바다 위에 만들어진 작은 세계가 잠식되기 시작했다.

크루즈선이 빠른 속도로 부식되기 시작했다.

셸리가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렸다.

“…티리안?”

배 곳곳이 부식되어 가는 것이 평범한 눈으로도 보였다. 울고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셸리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깨워 구명정으로 보냈다.

“배가 가라앉을 거예요. 정신을 차리는 사람만 챙겨서 피하세요.”

“배가 가라앉는다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보이잖아요.”

고통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은 깨우지 않았다. 그들은 티리안을 공포로 명명하고, 줄리아나와 유르윈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다.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이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크루즈선에서 죽는다면 그것이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광이 될 것이었다.

“셸리, 너도 타야지!”

“어딜 가려는 거야?”

줄리아나와 유르윈이 셸리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구명정에 태우고 크루즈선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몸을 돌리는 셸리를.

셸리는 그들을 향해 눈을 휘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타라고 한 건 자기들이면서. 놓아주니 손에 들어온다. 그토록 원했던 자신을 향한 애정이.

셸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어머니와 유르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등을 돌렸다.

.*. *. *. *. *. *.

티리안이 있는 곳으로 향할수록 공포가 손에 잡힐 듯 지척에 다가왔다. 셸리는 줄곧 자신을 인도하던 시야의 끝에 섰다.

아무도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칼끝을 걸어가듯 외로움 위에서 휘청였다.

인도하던 시야의 끝에 있는 것은, 웅크린 공포다.

“정말 부러워.”

“셸리, 네 눈에는 대체 뭐가 보이는 거니?”

“나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언젠가 비수처럼 박혔던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끝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는 것들이 있다.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게 되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다.

“티리안.”

사랑이 외로움을 알게 했고, 외로움이 공포를 알게 하니, 공포의 본질은 결국 사랑이 아닐까.

“티리안.”

셸리가 마침내 찾아낸 공포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티리안의 눈에 담긴 선명한 두려움이 보였다. 그가 자신을 외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셸리가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셸리.”

그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섬세하다.

“이제 알았어, 두려운 게 뭔지 알았다고.”

티리안은 서럽게 말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서 잡아 달라는 듯이 애처롭게.

셸리가 잡아 주지 않을까 길게 뻗지 못하고 작게 내민 손이 소극적이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손을 내밀지 못한다.

“뭐든 줄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게. 죽이라면 죽이고, 해일을 일으켜 달라면 그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티리안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공포를 셸리에게 쥐여 주려 애썼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런 것들뿐이었다.

티리안은 볼품없는 공포를 하나하나 늘어놓다가 고개를 떨궜다. 신도들이 붙인 이름으로는 셸리를 이곳에 잡아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장이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의 심정에 동조해 부식되는 크루즈선을 자신의 힘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볼품없는 공포를 그러모아 셸리의 발치에 내밀었다.

이걸 받아 줘.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게.

밑바닥까지 다각다각 긁어모아도 볼품없다.

인간들이 선호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만이 건져 올려졌다.

티리안은 몹시 비참해졌다.

이런 걸 줘도, 셸리가 기뻐할 리가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눈을 돌려주고 사라질 것이다. 그에게 비참함과 외로움만을 남겨 두고.

자박, 자박. 한쪽 다리를 다친 셸리가 절뚝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티리안은 그 소리에도 무너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자꾸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앞을 볼 수 없다.

셸리는 절뚝거리며 그의 앞에 다가왔다. 어깨를 웅크린 티리안의 아래에 깔려 있는 카펫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다.

“울어요?”

“미안해. 미안해, 셸리.”

티리안은 자신이 건네주려던 공포를 품에 안고 울먹였다.

셸리가 무너진 그의 몸을 따라 주저앉았다.

새빨갛게 터진 실핏줄 사이로도 맑은 녹색 눈동자가 보인다. 셸리는 티리안의 턱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셸리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정도로 그녀를 잡아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늘어놓는 것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뭐든 줄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게. 죽이라면 죽이고, 해일을 일으켜 달라면 그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아, 이 사람을 누가 공포라고 이름 붙인 걸까.

셸리가 안타깝게 탄식했다.

티리안이 셸리에게 건네주려고 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다.

티리안조차 공포로 인식했지만, 이 다정함에 누가 감히 공포의 이름을 씌울 수 있단 말인가.

셸리는 축축하게 젖은 티리안의 뺨을 따뜻하게 닦아 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셸리는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보이는 길의 끝에 있었다.

검은 물 밑으로, 티리안에게 향하는 외길이 또렷하다.

부식하는 크루즈선이 내지르는 비통함과 바다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선명하게 닿아 오는 것들이 있다.

모두 티리안의 소리였다.

그의 공포다. 하지만 티리안.

당신이 가진 건 그보다 더 다정한 것들이라.

겨울에 끝에서 밀려오는 미약한 훈풍, 작게 움트기 시작한 꽃봉오리, 흰 포말과 함께 밀려오는 부드러운 파도도 모두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라서.

셸리는 무너지는 크루즈선 위에서 겨울의 끝을 맞이했다. 끝을 보아도, 이것으로 괜찮았다.

당신의 애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전부 괜찮았다.

“티리안.”

“내가 두려움을 알게 해 봐.”

공포의 대상으로 숭배받는 그가 말했었다.

“그럼 네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지.”

“어떤 소원이든지요?”

말에 담긴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견고하다. 인간은 스스로 공포에게 먹이를 주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해 빌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생겨나는 존재도 있다면,

말에서 태어나는 존재도 있는 것이다.

“어떤 소원이든.”

셸리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크루즈선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검은 물 밑으로, 티리안이 가진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거대한 배에서 유일하게 제 의지로 이곳에 남았다.

어머니의 비탄과 유르윈의 질투.

비로소 이해하게 된 애정과 공포의 자락을 쥐고 티리안의 곁에 남았다.

사람이 씌운 공포의 이름에 질려 스스로 가라앉는 티리안을 건지기 위해.

마침내 그와 마주했다.

“두려움을 모르면 어떻게 외로움을 알겠어요?”

셸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티리안이 망연하게 눈을 깜빡인다.

눈물을 닦아 주는 손에서 피어오르는 온기. 셸리는 그의 볼을 붙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영원히 가라앉을 공포를 꺼낸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티리안의 입에 입술을 맞댄다. 티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저 입술만 맞닿은 단순한 행동에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티리안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셸리의 입술에 더욱 가까이 닿기 위해서.

티리안의 눈동자가 물기로 일렁이는 것이 보여서 셸리는 기어이 웃고야 말았다.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에 대고, 작은 속삭임을 밀어 넣어 주듯이 말했다.

“사랑해요.”

티리안의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처음 받아 본 애정의 자락을 입에 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것이 사랑스러워 셸리는 다시 눈을 휘었다.

입술을 떼어 내고 멀어지자 티리안의 몸이 셸리의 몸짓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조금 더 입을 맞추려는 듯이 입술을 붙이는 것을 밀어냈다.

일그러지는 눈가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풀어 주며 입을 열었다.

“소원을 빌게요.”

셸리는 그가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가 완전해지기를 바랐다.

다시는 그가 볼품없는 공포를 손에 쥐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바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했죠?”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단정적인 어조였다. 그가 다시금 제 밑바닥을 꺼내 보여 줄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

셸리는 그의 붉은 눈가를 매만지며 소원했다.

“당신이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걸 인정해요.”

티리안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의 것처럼.

.*. *. *. *. *. *.

검은 물 밑으로 들어가려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이름 붙이길,

당신의 이름은 사랑이라.

그러니 홀로 외로워하지 말라고. 손에 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내게 보여 주라고.

영원히 곁에 남아 달라고 소원했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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