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두려움을 알다 (8/10)

07. 두려움을 알다

티리안은 잠든 셸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상기된 뺨, 살짝 붉어진 둥근 어깨, 불꽃 같은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뻐근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빈틈이 없도록 꼭 몸을 끌어안아도 셸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마셨다.

숨을 쉬는 법도 모르던 티리안이 타인의 향을 마시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너무 좋아….”

티리안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셸리의 어머니에게 시선이 닿았던 순간이 없었더라면, 외로움과 애정이 뒤섞인 부름에 답하지 않았더라면, 셸리를 만날 수 없었겠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만 봐도 웃음이 나왔다. 셸리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호흡에 맞추어 함께 숨을 내쉬는 것이 즐거웠다.

셸리를 안고 그녀의 호흡에 맞춰 숨을 내쉬던 티리안은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을 트는 셸리를 급히 품에 끌어당겼다.

“답, 답해….”

셸리가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셸리의 목소리에 티리안은 억세게 힘을 주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여전히 단단하게 셸리를 감싼 채였지만.

“으음….”

숨을 쉬기 편해졌는지 셸리가 찌푸렸던 눈가를 풀었다.

“답답해?”

티리안은 잠에 빠진 셸리에게 질문했다. 의미 없는 잠꼬대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쿵 떨어졌다. 답답하다고 웅얼거리는 셸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머리를 맴돌았다.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답답하다고 한 것만으로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그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셸리가 다정한 어조로 건넸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럼 티리안 님은 소중한 걸 먼저 만들어야겠네요.”

소중한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티리안은 두려움을 알고 싶어 했다. 셸리는 그에게 두려움에 대해 알려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티리안은 셸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을 가진 아이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티리안은 크루즈선에 셸리가 오르기 전부터 심드렁하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끊임없이 궁리했다.

직접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티리안을 스쳐 지나갔던 많은 신도처럼 그녀도 그 정도일 거라고 제멋대로 확신했다.

물론 다른 것보다 눈길을 끌기는 했었다.

셸리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향해 절을 하던 셸리의 어린 얼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녀.

생일마다 뚱하게 튀어나오는 입술. 열린 창문 너머로 먼바다를, 자신을 바라보던 셸리의 깊고 우울한 눈동자.

그리고 셸리의 어머니가 실종된 후로 열리지 않던 창문. 그녀의 창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바람을 가장한 손길이 창문을 잡고 거세게 흔들어도 셸리는 밤바다가 보이는 밤과 새벽에는 고집스레 창문을 열지 않았다. 생일마다 신도복을 입고 뚱해지는 얼굴도,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절을 하는 시늉을 하는 셸리도.

티리안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셸리의 벗은 몸 뒤로, 바닥에 떨어진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유르윈 아르테스가 셸리에게 준 외투. 셸리가 소중히 여기던 외투가 바닥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버려진 것처럼. 이제 더는 쓸모 따위 없다는 듯이 떨어져 있다.

티리안은 자신의 품이 답답한 듯 연신 몸을 뒤트는 셸리의 몸을 놓아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편안해지는 셸리의 숨소리가 불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티리안은 낡은 외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서 더는 입기 힘들어진 외투가 손에 닿았다.

거칠거칠한 옷감이 티리안의 손에 불편하게 닿았다.

셸리는 일어나면 이 옷을 버릴까?

그렇게 눈에 거슬리던 외투였는데도 왜인지 정말로 그녀가 그것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티리안은 외투를 내팽개치는 대신, 가지런히 개어서 셸리의 머리맡에 올렸다. 셸리의 곁에 외투가 있는 것을 보니 어수선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티리안이 셸리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셸리는 원하는 것이 그다지 없다.

셸리는 그녀의 어머니인 줄리아나와 유르윈 아르테스에게만 약간의 미련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를 지탱하던 이들이 모두 배신자로 밝혀진 상태였다.

그것을 깨닫자 머리가 차게 식었다.

셸리는 티리안이 두려움을 느낄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길 것이다.

그럼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티리안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생각했다.

티리안의 온기가 사라지자 몸을 떨던 셸리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신음했다.

침구에 얼굴을 묻고 잠시 끙끙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티리안 님은 쉴 필요 없으세요?”

자신과 다르게 쌩쌩한 티리안의 모습을 보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질문했다. 타박하는 것 같지만 친밀한 태도에 티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티리안은 셸리가 너무 소중했다. 그의 소원으로 태어난 셸리 같은 존재가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외로움에서 생긴 존재다.

티리안을 공포로 대하지도 않고, 신으로 대하지도 않고, 사람으로 대하는 셸리.

티리안처럼 무언가 큰 결핍이 있는 셸리는 그의 외로움을 가볍게 알아차렸다.

셸리의 결핍은 티리안이 만들어 낸 결핍일 것이다. 그걸 알게 된다면 셸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작은 불씨처럼 떨어진 두려움이 순식간에 번졌다. 불꽃 같은 셸리의 머리카락, 들불처럼 번진 두려움.

티리안에게 두려움은 셸리 그 자체였다.

“티리안 님?”

셸리는 말이 없는 티리안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리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기어이 티리안의 앞에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는 울컥 치미는 사랑스러움을 삼켰다. 사랑스럽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지. 셸리.

그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게 무서워.

“티리안 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셸리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손끝을 잡았다.

“왜 이렇게 떨어요? 뭘 무서워하는 것처럼….”

차게 식은 손끝을 따뜻한 손으로 마주 잡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손가락 끝도 엄청 차가워요. 요즘 계속 따뜻했잖아요, 갑자기 왜 그래요?”

셸리가 당황하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온기가 돌지 않는 손가락을 두 손으로 누르며 그에게 온기를 나눠 주었다.

열심히 온기를 나눠 주려는 셸리에게서 티리안은 도망치듯 손을 빼내고 말았다.

“옷 입어.”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방금의 행위가 그저 신도가 그에게 올린 의식인 것처럼.

“알고 싶다고 한 걸 알게 해 줄 테니.”

몸을 맞댔을 때와 다르게 티리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셸리의 곁에서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티리안 님,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셸리가 창백한 뺨을 하고 되물었다. 온몸이 아프지만 분명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분명 티리안이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는데,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어머니의 로켓처럼 빛이 났는데.

“아.”

잠깐이었구나. 정말 찰나였다.

셸리가 그 애정을 손에 넣은 순간은 파도처럼 잠시 왔다가 사라졌다. 파도가 지나간 바다는 파문 하나 일지 않고 잔잔했다. 셸리가 그 위로 떨어지더라도 작은 파문만을 일으키고 금세 조용해질 것이다.

셸리는 어느새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티리안의 시선을 피하듯 몸을 굽혔다.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가지런히 침대 위에 놓인 외투도 걸쳤다.

온몸이 싸늘해서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잠깐 얻었던 애정의 조각을 몸을 섞는 동안 가슴에 품었던 모양이었다.

티리안이 다시 조각을 꺼내 가면서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다. 어머니와 유르윈이 남긴 것보다 큰 상처였다.

셸리가 외투를 여미는 모습을 보던 티리안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심한 듯한 고요한 한숨이었다.

셸리는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티리안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의 조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람 소리랑 착각한 건가?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둘만 존재했던 이면에서 떨구어지듯 튀어나왔다. 셸리는 어둡고 축축했던 티리안의 공간에서 추방당했음을 알았다.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겠지.

이미 쫓겨났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셸리가 걸음을 옮기지 않고 우물쭈물하자 티리안이 그녀를 돌아봤다.

뒤에서 셸리를 지켜보던 티리안의 눈동자가 정면에 있었다. 옆에서 걷는 동안에는 셸리가 고개만 돌리면 바라볼 수 있던 그의 눈을 이제는 티리안이 적선하듯 시선을 내어 주어야만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멀어지면 이 거대한 크루즈선과 함께 바다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심해로 가라앉는 것처럼.

처음에는 시선을 마주하는 게 어색했는데, 이제는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게 서러운 것이 신기했다.

서러워하던 셸리는 저릿한 가슴을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충분해.’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셸리는 이제 다정함을 떠올리면 유르윈이 아닌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어떻게 할래, 정말 알고 싶어?”

티리안이 질문했다.

알고 싶었다. 하지만 셸리는 망설였다.

이걸 알게 되면 방금 했던 행위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의식이 되는 것이다.

신에게 인신 공양 하고 소원을 이루는 행위.

티리안의 부드러운 입술과 끈질긴 애무, 다정하게 밀려 들어오던 통증과 쾌감을 떠올리며 망설임을 멈추었다.

그건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감각이었다.

셸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모아 잡았다.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셸리는 이미 가진 게 있지 않나.

티리안의 눈. 셸리는 이미 티리안의 일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쥐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티리안과 연결되어 있었던 거야.

셸리는 가벼운 깨달음을 얻으며 미소 지었다.

내내 냉소적이던 얼굴에 초탈한 웃음이 걸렸다. 소박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그녀는 자신의 안으로 불어 드는 바람을 받아들였다.

티리안이 자신의 안을 온통 헤집고 사라져도 괜찮다. 셸리가 연 문이었다.

흔적이 남는 게 되레 좋았다.

얼마든지 나를 헤집고 엉망으로 만들어 줘.

그녀는 그렇게 소망했다.

“셸리, 뭘 하려는 거야?”

한 발자국 앞서 걷던 티리안이 이변을 감지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셸리가 쓰는 눈은 티리안의 것이다. 티리안은 그녀가 자신의 눈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대로 사용했다면 그에게 어머니와 유르윈에 대해서 알려 달라고 매달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했던 것 같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자신의 아래에 가라앉은 공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멈춰!”

그런데, 지금.

왜 하필 지금.

셸리가 눈의 사용 방법을 제대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두 눈에 비치는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것은 셸리를 그녀가 원하는 순간으로 인도해 줄 것이었다.

티리안이 손을 뻗었다. 셸리를 다시 자신의 어둠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셸리가 다른 시야를 응시하는 것이 빨랐다.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 *. *.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셸리의 눈은 바른길을 열어 주었다.

이건 안내받은 곳일까, 내가 찾아낸 곳일까.

셸리는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정원에 서서 손을 들었다. 따뜻한 빛이 정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훈풍이 불었다.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주변을 살폈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마치 누군가 안내하는 것처럼 펼쳐진 꽃이 만발한 정원을 자연스럽게 가로질렀다.

사랑스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길은 온통 어둡고 음침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셸리는 하늘하늘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어머, 유르윈. 벌써 걸어 보려고?”

“마아.”

“아직 어려울 텐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셸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맑고 높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줄리아나가 작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이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연한 금발의 짧은 고수머리를 한 아이가 줄리아나의 손을 잡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린 움직임이다.

유르윈이구나.

“줄리, 유르윈이 어리광을 부린다고 전부 받아 주면 네 몸이 상하잖아.”

꼭 닮은 모자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줄리아나의 손을 잡은 유르윈의 작은 손을 남자는 단단히 부여잡았다.

“유르윈이 어리광을 부린다고요? 너무 조용해서 걱정인걸요.”

유르윈의 손을 빼어 가는 남자를 보며 줄리아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르테스는 다들 점잖은 게 특징이에요? 그런 것도 유전이 되나?”

햇빛에 눈이 부신지 줄리아나는 옆에 내려 두었던 챙이 큰 모자를 쓰며 말했다. 바람이 온화하게 불어 모자는 날아가지 않고 보기 좋을 정도로만 가볍게 흔들렸다.

셸리는 그 다정한 풍경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니, 유르윈, 그리고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아르테스 가문의 남자.

유르윈과 남매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바라지 않았어도 그는 이미 셸리와 남매 사이였던 것이다.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다정한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그들은 이렇게 완전했다. 셸리가 없더라도.

작은 유르윈이 활짝 웃으며 줄리아나의 품에 폭 파묻히자, 그녀는 아이의 부드러운 고수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그녀의 어깨 위로 아르테스가 모포를 포근하게 둘러 주며 그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그런 풍경이었다. 이상적인 가족의 그림을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

“그런데 저쪽 정원에 새로 심은 꽃은 뭐예요? 처음 보는 종류던데….”

“아, 그 꽃.”

“꽃이 아래를 향해 피어서, 저는 왠지 조금 어색해 보여요.”

“브루그만시아. 천사의 나팔이라는 별명을 가진 꽃이라고 하더군. 지난번에 종교 때문에 탄압당했다는 사람들을 변호했던 적이 있잖아. 그들이 감사하다고 꽃을 전해 줬어.”

아르테스는 줄리아나의 품에 잠든 유르윈을 넘겨받으며 설명했다. 조금 불안한 기색이던 줄리아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의미 있는 꽃이네요. 천사의 나팔이라니.”

여름의 끝 무렵, 줄리아나가 아르테스와 함께 꽃가지의 끝을 잘라 다른 장소에 옮겨 심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꽃은 내년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봄에 다시 꽃을 보러 와요. 정원을 가득 채우면 분명 유르윈도 좋아할 거예요. 그때는 손을 잡아 주지 않아도 유르윈이 마음껏 뛰어다니겠죠?”

줄리아나가 기쁜 음색으로 말했다. 노래하듯 이어지는 목소리를 따라 정원의 꽃들이 흔들렸다.

브루그만시아가 아르테스의 정원에 만개했다. 봄이 온통 천사의 나팔로 뒤덮였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채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아르테스가 쓰러졌다.

“안 돼, 안 돼….”

“부인, 부인이 아르테스 님을 구해야 합니다.”

여전히 작은 유르윈과 혼자 남은 귀부인. 그녀의 여린 심성을 낯선 이들이 파고들었다. 종교 때문에 박해받았다는 신도들이었다.

아르테스의 정원에 꽃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티리안의 신도였다.

어머니의 절망과 그녀를 꼬여 내는 신도들을 보던 셸리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줄리아나가 두려움에 말라 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어린 유르윈을 사용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을 회유하는 신도들에게 휘말렸다.

그들은 아르테스의 막대한 재산을 입맛대로 끌어 쓰며 그들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정신이 무너진 줄리아나는 대항하지 못하고 그들의 손길에 휘둘렸다.

그녀는 꺾인 꽃자루처럼 생기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를 지탱하는 뿌리가 금방이라도 땅에서 뽑혀 나올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그녀를 겨우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혼수상태에 빠진 아르테스와 어린 유르윈이었다.

줄리아나는 유르윈을 마주하면 간혹 제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듬었다.

그러는 사이 신도들은 물밑에서 은밀하게 신도를 늘려 가며 세력을 키웠다. 줄리아나는 훌륭한 선전물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미망인을 내세워 세를 불렸다.

“부인, 이번 제의에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신도들은 의식을 빌미로 줄리아나의 몸을 탐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그 길을 바라보던 셸리가 탄식했다. 줄리아나가 제단을 잡고 비탄으로 가득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울음이 귀에 박힌다. 비명보다 서러운 신음이었다.

“이게 바른길이 맞나.”

줄리아나가 의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눈을 피하지 않고 지켜보던 셸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난잡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줄리아나, 어머니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고.

그녀가 자신을 속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셸리는 줄리아나의 인생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사내의 성기를 받아 내는 그녀에게서 애달픈 기원의 소리가 들렸다.

“의식으로 태어날 아이를 바치겠습니다.”

“아이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될 겁니다.”

줄리아나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셸리는 그럴 수만 있다면 혼수상태에 빠진 아르테스를 깨우고 싶었다.

“이 아이를 바칠 테니 그러니 제발, 제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아, 그렇구나.

셸리는 그녀를 지켜보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의식을 지켜보는 티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지독한 권태로움, 난잡한 의식을 향한 짜증이 담긴 눈동자.

셸리는 그 안에서 그의 공포를 발견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외로움이 줄리아나의 기도로 인해 미약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티리안은 늘 겁에 질려 있던 것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셸리는 제단에 이마를 찧으며 사내를 받아 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셸리의 의식을 파고든다.

“제발, 나한테 그 사람을 돌려줘.”

어머니, 아르테스, 유르윈.

셸리는 그들의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에 잠식된 티리안의 곁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었다.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고 사그라들 불꽃이라도, 불을 붙여 보고 싶었다. 작은 온기라도 남기면 그걸로 좋았다.

그 소망이 티리안의 능력을 가져왔다.

줄리아나는 그날 임신했다. 티리안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 셸리를.

셸리의 의지였다.

.*. *. *. *. *. *.

셸리는 눈을 떼지 않았다. 줄리아나가 아르테스의 영지가 있는 도시를 떠나 작은 해안 도시로 옮겨 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곳에서 자신이 태어나는 모습도, 유르윈이 찾아와 어린 셸리에게 참견하는 모습도.

다른 이들과 달리 셸리의 능력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이유는 질투였다.

어머니를 빼앗긴 유르윈이 셸리의 능력을 질투한 것이다.

“어머니.”

“부인이라고 불러 주셔야죠, 유르윈.”

“…예, 부인.”

“보육원에는 급한 일이 아니면 찾아오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 어리시다 해도 유르윈은 아르테스의 차기 가주십니다. 이렇게 오래 가문을 비우는 건 옳지 않아요.”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줄리아나의 입에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유르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서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갈무리한 유르윈이 줄리아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물건입니다. 쓰러지시기 전에 부인께 선물하려고 했던 물건이에요.”

“…이건.”

유르윈의 작은 손에 담긴 목걸이가 줄리아나에게 넘어갔다. 그녀의 손끝이 요동쳤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목걸이를 받아 든 손이 흔들렸다.

줄리아나는 만개한 브루그만시아가 그려진 로켓을 받아 들고 몸을 떨었다.

유르윈은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등을 돌리며 말했다.

“버리셔도 좋아요.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담담하게 돌아서는 유르윈의 눈이 축축했다.

“유르윈 님, 어머니랑 대화는 끝나셨나요?”

“…그래, 셸리.”

“그럼 저랑 같이….”

“미안하지만 이제 돌아가야 해.”

“네에….”

문을 나와 눈을 거칠게 슥슥 닦는 유르윈에게 셸리가 다가갔다. 그를 한참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왔는지 어린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유르윈은 그런 셸리의 기대를 모른 척하고 서늘하게 선을 그었다.

셸리가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같이 놀아요. 시간이 되실 때 꼭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돼요!”

어린 셸리는 유르윈을 배웅하고 손을 흔들었다. 섬을 나가는 배에 오르며 유르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르윈은 배가 출발하고 난 뒤에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를 돌았다. 셸리에게 지나치게 거리를 둔 것이 마음이 쓰였다.

이미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한 셸리가 선착장에 그대로 서서 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의 것을 선물 받았다는 그 좋은 눈이, 유르윈이 바라본 것을 알아차렸는지 셸리는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유르윈은 입술을 깨물고 붉어진 얼굴로 셸리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신의 질투가 부끄러운 아이처럼.

그러고 보니 저런 일도 있었다.

어린 유르윈과 어린 셸리를 바라보며 셸리가 엷게 웃었다.

셸리는 유르윈이 마냥 좋았는데, 그는 셸리가 몹시 싫었던 거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그런 티를 안 내다니 줄리아나의 말대로 점잖은 아이였다.

“아르테스.”

어머니가 손에 쥔 로켓은 셸리가 바위 해변에서 주워 온 그 목걸이였다.

유르윈이 전해 준 거구나.

줄리아나는 로켓을 들고 이마를 대었다. 작은 로켓에 입을 맞추고 소중하게 목에 걸었다.

“어머니, 유르윈 님이 영지로 돌아가셨어요.”

줄리아나가 로켓을 품에 넣는 동시에 셸리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줄리아나는 웃으며 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셸리. 네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게.”

셸리를 품에 안은 줄리아나는 셸리의 눈을 더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넌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거란다. 그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거든.”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셸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줄리아나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가 날 그이의 곁으로 인도해 줄 거야.”

줄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유르윈과 아르테스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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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티리안이 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물어볼 만했다.

셸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눈이 가진 능력을 1할도 쓰지 못했으면서 모든 걸 아는 체했던 것이다.

셸리는 긴 꿈을 헤매고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숨을 내뱉었다.

티리안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 냈으니, 셸리와 티리안이 몸을 겹쳤던 행위는 애정으로 남을 수 있다.

셸리가 만족스러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눈을 뜨니 티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셸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무슨 의미가 담긴 시선인지 모르지만, 셸리는 티리안과 눈이 마주친 것이 기뻐서 헤실헤실 웃었다.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것이 기쁜지 고양감이 느껴졌다. 셸리는 무엇이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려받는 것이 없어도 말이다.

“방금 그 능력을 쓴 거야? 내가 쓸 때는 모습이 사라지는 경우가 없었는데, 너 뭐야. 뭘 보고 왔는지 말해.”

티리안이 조급하게 질문하며 셸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셸리는 고양감에 빠진 채로 감상에 잠겼다.

어머니를, 줄리아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유르윈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괜찮았다.

자신의 눈은 티리안에게 빌린 것이니, 결국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외롭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제 됐어요. 가도 될 것 같아요.”

보고 싶은 건 모두 보았다.

보육원은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단번에 아이들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셸리는 티리안을 마주 보며 눈을 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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