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안내받은 곳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기던 작은 로켓을 잃어버렸을 때였던가. 물건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셸리에게 그것을 찾아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홀로 끙끙 앓았다. 어머니는 조금 이상해졌다.
“괜찮으세요, 어머니?”
“괜찮단다. 정말.”
“오늘은 기도를 안 해도 되나요?”
“응, 이제 안 해도 돼.”
새벽에 몰래 하던 기도를 멈추고 멍하니 바다를 보는 횟수가 줄었다. 늘 열어 두던 창문을 고집스레 닫았다.
바람이 창을 넘어오지 못하고 밖을 휭휭 맴돌다 사그라들었다.
셸리는 평범하게 느껴져야 할 그 모습이 어색했다.
길을 찾거나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셸리를 먼저 부르던 그녀였는데.
밤에는 잠을 푹 자고, 찬 바람도 쏘이지 않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갈수록 해쓱해졌다. 원래도 유약한 성정을 가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며칠 만에 팔랑거리는 종잇장처럼 말라 버릴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셸리에게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셸리가 잃어버린 물건을 간단히 찾아냈다. 나팔처럼 생긴 꽃을 황금으로 그려 장식한 아름다운 로켓이었다. 돌로 된 해안가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산책 중에 떨어뜨리기라도 했는지 목걸이 줄이 돌에 걸려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고 물결을 따라 흐느적대고 있었다.
돌에 부딪혀 상처가 난 건지 로켓에는 던져진 것처럼 움푹 팬 곳이 있었다.
셸리는 망가진 로켓을 조심스레 닦아 들고 왔다.
어머니가 기뻐해 주겠지.
열리지 않는 로켓이지만, 열려면 충분히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안에 들어 있는 듯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지와 검지로 로켓을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머니의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로켓의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양각되어 있는 글자가 익숙해서 셸리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었다.
“아르테스는 유르윈 님 가문이 아닌가?”
셸리는 로켓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테스. 유르윈의 성이 적힌 로켓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글자는 연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꽃일까? 예쁜데, 어머니한테 돌려드리면서 이름을 물어봐야지.
그렇게 찾아온 물건을 어머니에게 내민 셸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마주했다. 어머니가 눈을 홉뜨고 셸리를 다그쳤다.
“누가 이걸 찾아 달라고 했니!”
“죄, 죄송해요. 찾으시는 것 같아서….”
“안은, 셸리 너, 안에 있는 걸 본 거니?”
“안 봤어요, 정말이에요.”
“어떻게, 어떻게 찾아온 거야. 내가 이걸 어떤 마음으로 버렸는데….”
셸리가 전해 준 로켓을 받아 든 어머니는 무릎을 꿇었다. 아래로 쏟아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흰 이마에 로켓이 닿았다.
“이걸 왜, 찾아온 거니.”
책망하는 것 같기도, 기쁜 것 같기도 한 묘한 음성이었다.
물기 어린 신음이 흘렀다. 한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셸리는 왜인지 압도되었던 것 같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로켓을 잃어버리기 전의 모습으로.
“오늘부터 다시 기도를 하자, 셸리.”
낮은 울음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목에 건 로켓을 숨기듯 옷깃 안으로 집어넣고 속삭였다.
“나는 널 사랑하려고 했어.”
셸리는 자신의 손을 잡는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널 사랑하려고 했어, 셸리.”
그런데, 그날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었던가?
누군가를 향한 애정으로 빛나던 어머니의 눈동자. 그녀의 눈이 나를 올곧게 향했다.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 *. *. *. *. *.
셸리는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마주한 장소가 생소했다. 분명 크루즈선 내부는 맞는 것 같은데 전체적인 명도가 어두웠다. 티리안이 자신의 어둠으로 셸리를 끌어들인 것처럼.
셸리는 그림자가 드리운 주변을 살펴보다 눈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로켓에 새겨져 있던 황금으로 된 꽃문양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다시 되새겨 보려는데 발끝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시선을 내렸다.
“아.”
“숨는 건 잘한다면서?”
티리안이다.
“…지금 뭐 하세요?”
“하도 안 일어나서 깨우는 중이잖아.”
“누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깨워요?”
셸리는 발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떼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몹쓸 신에게 물었다.
피가 멎을 것 같다가도 그가 누르는 손길에 다시 상처가 터졌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묘한 짓을 하고 있다.
상처를 지혈하기는커녕 더 헤집고 있는 티리안을 본 셸리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픈데 손가락 좀 치워 주세요. 왜 남의 상처를 누르면서 놀고 있는 거야, 정말.”
“누굴 보고 남이래. 근데 이 꼴을 하고 더 도망갈 수는 있겠어?”
티리안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단단한 손가락에 묻은 피를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괴었다.
“이대로 다니면 잡으러 오라고 길을 알려 주는 걸 텐데?”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에 자신의 피가 묻는 것을 본 셸리가 눈가를 찌푸렸다.
“볼에 피 묻었어요.”
“어디.”
“여기, 이쪽에….”
셸리는 옷소매로 피를 닦으려고 남자에게 기대다가 몸을 굳혔다.
“안 닦고 뭐 해?”
“닦아요, 지금.”
피를 닦으려던 외투 자락을 다시 걷어 올리고 손가락으로 티리안의 볼을 매만졌다.
셸리를 빤히 바라보던 티리안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못마땅한 표정은 언제 저렇게 잘 짓게 되었는지, 셸리에게 한껏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인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서 계속할 거야? 나는 이제 재미없어.”
그게 이제 없어졌나요?
셸리는 처음부터 재미 같은 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자 티리안의 눈동자가 바짝 따라붙었다.
“저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티리안이 느릿하게 셸리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아픈 발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또 푹푹 내쉰 셸리는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숙였다. 이마가 차가운 무릎에 닿았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다.
시야가 조금 발갛게 변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빛이 피가 말라붙은 발등 위에 닿았다. 발등에 굳은 피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뭘 해야 하지?’
셸리는 멍하니 발등을 문지르며 둔한 머리로 생각했다.
‘구명정 근처는 안 돼.’
그곳에는 덫이 있었다. 셸리가 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감춰져 있던 덫이.
셸리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구어졌다. 힘을 잃은 목덜미가 줄기가 꺾인 꽃처럼 아래를 향한다.
그래, 계속 알고 있었다. 외면하려던 것뿐이지.
셸리는 흐린 달빛처럼 어룽거리던 누군가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애초에 탈출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지. 유르윈이 그걸 지적하지 않고 자신에게 동조했던 순간부터 모순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탈출을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유르윈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 크루즈는 전국 각지에서 부유하고 권력 있기로 유명한 자들이 자본을 모아 만든 것이다.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크루즈에서 탈출해도 갈 곳이 없었다. 특히 재건한 도시는 안에 있는 작은 가로등 하나, 벤치 하나까지 그들의 자금을 빌려 만들어진 것이다.
기절하고 눈을 떴던 직후에 보았던 제단이 떠오른다.
크루즈선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목적이 티리안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명정을 타고 도망친다면?
당장 위험은 피하더라도 유르윈의 가문이나 셸리의 보육원이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시하고 연고가 없는 곳에 가서 산다고 해도 얼굴이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유르윈이나 셸리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르윈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셸리는 시큰거리는 눈을 꾹 감았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후회하게 된다.
상처 입은 발보다 다른 곳이 더 아프다.
유르윈이 자신을 배신한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가 준 옷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다.
“…이걸 버리면, 난 정말 혼자잖아.”
외로운 건 싫다. 혼자 남는 건 싫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들산들 걸어가 버린 어머니가 밉다. 나 같은 건 마음에 두지 않고 무언가를 향해 가던 어머니가 밉다.
내 눈이 아닌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내 눈에 비치는 게 무엇인지 물어봐 주길 바랐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주길 바랐다.
그래. 그랬어.
그래서 당신이 아끼던 물건을 일부러 찾았던 건데.
셸리가 가진 공포는 그건 홀로 남는 외로움이다. 사랑을 주고 돌려받지 못하는 서글픔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외로웠다. 원래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외로웠다.
셸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꾹꾹 눌러둔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이 옷을 버리면, 셸리는 또 외로워질 것이다. 5년 전의 셸리까지, 이 옷을 받고 기뻐했던 그 과거의 셸리까지 외로워지게 된다.
유르윈이 하늘하늘 걷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멀어질 것이다.
나 같은 건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네가 왜 혼자야. 셸리.”
몰려오는 서러움에 고개를 숙인 셸리의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는 손길이 부드럽다.
누군가의 태도를 어설프게 흉내 내던 티리안이 셸리의 턱을 부드러운 손길로 잡아챘다.
마른 어깨를 타고 느슨하게 흘러내리는 외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도 티리안은 다정하게 옷깃을 추어올려 주었다.
유르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몸짓이 보였다.
“넌 혼자였던 적이 없어.”
“…네?”
볼을 조금 적신 눈물을 티리안은 그의 깨끗한 손등으로 벅벅 닦아 냈다.
그가 직전의 셸리처럼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너희?’
정말이지 성가셔 죽겠다는 태도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묻는다.
“말해.”
셸리는 멍청하게 눈을 껌뻑였다.
“뭘 하고 싶어?”
“어, 소원을 들어주시는 거라면 전 아직 티리안 님이랑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요.”
서러움도 잊고 멍청하게 고하자 티리안이 단정한 미간에 험악하게 주름을 잡았다.
“소원 들어주는 거 아니야.”
“그, 그럼요?”
어, 위협한다, 위협해.
이제는 정말 인간처럼 표정 변화가 자연스러웠다. 경이로운 속도로 인간의 생태를 학습하는 티리안을 보며 셸리가 희미하게 감탄했다.
그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웃으며 손을 치든다.
셸리의 볼을 꽉 붙잡아 언젠가처럼 흔들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말하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사설이 길어. 이제 내가 만만하지?”
“말하면 들어주실 거예요?”
“그렇다고 하잖아, 지금.”
“소원도 아닌데?”
“당장 안 말할래?”
셸리는 그런 티리안을 보며 옅게 웃는다. 어쩔 수 없다.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니까.
공포의 신에게 위로받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티리안 님.”
꽉 잡힌 볼을 겨우 움직여 웅얼거렸다. 뭉개진 발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티리안이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만한 몸짓을 보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셸리는 그제야 티리안의 관심을 깨닫는다.
서슴없이 닿아 오는 몸, 제 것처럼 셸리를 끌어안는 손. 티리안은 계속 그의 선 안에 셸리를 들여놓고 있었다.
왜?
‘왜 나를?’
셸리는 티리안의 붉은 눈이 지척에서 반짝이는 것을 본다.
그의 눈에 가득한 애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눈에 비치던 그 작은 로켓 같아서.
그 작은 로켓처럼 사랑스러워서.
“뭘 하고 싶어, 셸리.”
“전해야 하는 게 있어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입을 열고야 만다.
티리안은 볼을 잡은 손에 힘을 풀며 바람처럼 웃었다. 거센 겨울바람처럼 마음을 건드리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조금 홀렸던 것 같기도 하다.
창문을 막고 있는 빗장을 열고,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 줄 만큼.
셸리는 언제나 죽음에 초연했다. 자신에게 닿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애정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으로 자라난 것 같기도 하고,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될 운명인 것 같기도 했다.
홀로 남는 외로움보다는 영원한 무의식이 나았다. 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르켈한테…. 아, 미르켈은 지금 보육원을 저 대신 관리하고 있는 아이예요.”
“보육원?”
“아, 보육원부터 설명을 해 드려야 하는구나. 보육원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을 돌봐 주는 곳이에요. 원래 어머니가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돌아가신 후부터 제가 운영을 이어받아서 하고 있어요.”
흐음, 하고 티리안이 짧고 의아한 소리를 냈다.
이해하지 못했나? 보호자나 보육원의 정의가 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를 바라봤다.
셸리가 티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보호자면 부모를 말하는 거잖아.”
“네, 맞아요.”
“그게 없는 애들을 모아 둔 게 보육원이라는 거고.”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이들이 더 많이 늘어서 제가 없어지면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러니까 연락을 해 두고 싶어요.”
절뚝절뚝, 근처에 있던 방에서 적당히 붕대 대용으로 쓸 만한 천을 가져와 감은 발로 걸어가며 셸리가 말했다.
멀쩡했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느린 걸음이었다. 티리안이 걸음을 뚝 멈추더니 셸리의 앞을 막아섰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늘었다는 거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댐을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댐의 끝까지 고요하게 차오른 물이 넘실거린다.
높이 쌓은 댐도 견디지 못할 만큼 커다란 압력이 느껴졌다.
티리안이 꾹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들이 또 내 이름을 걸고 난교 의식이라도 벌인 모양인데.”
“그게 왜요?”
“그 의식에서 태어난 것들을 보육원에 던져 넣은 거겠지. 뻔하잖아.”
“아.”
셸리가 낮게 탄식했다.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이 늘어난 것도 제가 좀 크고 난 뒤인걸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어요, 화내지 마요.”
“누가 화를 낸다고 그래.”
“티리안 님이요. 감정이 이렇게 다양한 분이 왜 공포만 모르는지 모르겠어. 사실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정말 몰라. 그리고 생식기만 비벼 대는 게 뭐가 좋다고. 너도 그 꼴을 보면 질색하게 될 거야.”
셸리도 그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한 사람이 무언가를 격렬하게 싫어하는 걸 보면 남은 한 사람은 그것을 왜인지 두둔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치를 떨며 난교 의식을 상기하는 티리안에게 셸리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티리안 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도 난교 의식은 자주 진행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저도 어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의식이라고 하셨던가? 아, 이게 아니었는데.”
셸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더라. 분명히 말씀해 주셨던 것 같은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며 고민하는 셸리를 본 티리안이 분노가 빠진 태도로 말했다.
댐 끝에서 넘실거리던 물이 싸악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이다.
“넌 그걸 믿어?”
“믿는 건 아니지만…. 티리안 님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데 난교 의식을 좋아하는 신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티리안이 질린 얼굴을 했다.
셸리는 구역감도 모르면서 구역질이 난다는 얼굴을 하는 티리안을 보며 슬며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사람들은 간혹,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다.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선호의 감정을 거부하기 위해서인데, 어쩐지 티리안의 격렬한 거부가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리안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만.
며칠 새 인간의 표정을 다양하게 습득한 티리안을 보면 그를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된다.
셸리가 입가를 가리고 눈을 휘었다. 셸리보다 키가 훌쩍 큰 티리안의 눈에 그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 것은 당연했다.
붉은 입술이 위를 향해 샐쭉 휘어진다. 상기된 두 뺨이 보기 좋게 솟고, 눈 아래에 작은 살점이 애교스럽게 톡 튀어나왔다.
마른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너저분한 외투. 하얗게 드러난 목과 그 밑으로 얼핏 보이는 연한 살결이 티리안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티리안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훑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갈증을 느낀 티리안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려다 눈에 들어온 자국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손가락 끝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붉은 입술, 붉은 피. 그리고 의식 중에 가득 차던 붉은 숨결들.
티리안이 손가락 끝에 묻은 셸리의 흔적을 느끼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하긴, 좋아하는 신이 있을지도 모르지.”
혀끝에 닿은 피의 맛이 유난히 달다. 다른 것도 궁금해지는 맛이다.
***[S.D]
신도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셸리를 찾고 있었다. 셸리는 티리안의 품에서 나온 뒤로 쉴 틈 없이 마주치는 신도들을 피해 숨을 죽였다.
“저쪽에 있는 거 아닐까요?”
“핏자국을 봤는데, 도무지 잡히지를 않아요.”
“중간중간 끊어지고 이어지지 않아서, 이건 뭐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셸리는 여전히 자신을 찾아 크루즈를 헤매는 사람들을 피하며 길을 따라갔다.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미르켈에게 연락을 남겨야 한다.
셸리가 없으면 보육원에 들어오던 후원은 곧 끊길 테고, 지금까지처럼 비용을 아낌없이 쓰다가는 금방 아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많다. 바람 소리에 벌벌 떠는 아이들이다. 기껏 다시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는데,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터지게 되면 그 아이들은 앞으로 결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자금을 모아 둘걸. 아이들이 클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돈을 마련해 둘걸.
약간의 미련이 셸리를 붙잡았다.
절뚝절뚝, 셸리는 어설픈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가 없더라도, 유르윈이 없더라도 셸리에게는 보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티리안이 가져가지 않은 눈이 도움이 됐다.
가야 할 곳이 있다.
“연락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어요. 유르윈 님이 한 말이었으니까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래 크루즈에 머무르고 있는데 외부랑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진짜일 거예요.”
셸리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티리안에게 말했다. 그가 뒤에 있는 것이 든든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로켓을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셸리는 대답 없는 티리안의 얼굴을 힐긋 돌아보며 생각했다.
난교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로 말이 없어진 티리안이었지만, 평소처럼 자신의 뒤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그의 특이성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존재가 느껴지지 않아서 약간 불안해졌다.
옆에서 같이 걸으면 좋을 텐데, 왜 뒤에서 따라오는 걸까?
“티리안 님, 옆에서 걸으면 안 돼요?”
셸리가 투정을 부리듯 물었다.
셸리의 뒤에서 그녀의 목덜미만 뚫어지도록 노려보고 있던 티리안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옆에서 걸으라고?”
조금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셸리의 옆으로 다가섰다.
“안 될 건 없지.”
과시하는 듯한 어조로 티리안이 말했다.
닿고 싶다. 티리안의 선 안에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면, 티리안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더 가까워지고, 더 닿는다면, 나를 어떻게 바라봐 줄까.
셸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뻗어지던 티리안의 손과, 허벅지에 올라오던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티리안의 단단한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얽어 보았다.
티리안은 눈썹을 한쪽으로 치켜올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펼쳐 다른 손가락도 잡으라는 듯이 내어 주었다.
셸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신의 것보다 큰 손바닥 안으로 손을 겹쳐 보았다. 티리안이 손가락을 얽으며 단단하게 손을 마주 잡아 준다.
셸리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손을 마주 잡아 준 건, 티리안이 처음이다.
.*. *. *. *. *. *.
사람의 시선이 지나치게 많은 탓에 셸리는 그 후로도 며칠이나 크루즈를 헤매야 했다.
티리안은 도움을 줄 것처럼 말했으면서 샐쭉거리기만 할 뿐, 당장 연락 기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람이 다가오면 손을 잡아끌어 모습을 감추도록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정도의 도움이었지만, 그의 능력은 신도들을 피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가 손을 뻗으면, 셸리는 그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는 셸리를 안고 그녀가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품을 내주었다.
셸리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면서 티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지켜봤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처럼 어둠에 몸을 숨기고 셸리를 응시하고 있던 것이다.
그의 능력이라면 이 의식을 멈추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셸리는 그에게 그것을 소원할 수 없었다.
두려움을 알려 주겠다는 말이 흐지부지 잊히고 있기 때문이다. 티리안도 그 일을 상기시키지 않아서 셸리와 티리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대체 우리는 어떤 관계지?
그렇게 애매하게 시간이 흐른 탓에 셸리가 연락 기기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발견했다.
오래전 긴 명단에 이름을 싣고 사라진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찾을 수 있어요, 크루즈 안이잖아요. 내릴 곳도 없는 곳이에요, 그 아이가 어딜 갈 수 있겠어요?”
술렁이는 신도들을 다독여 주는 다정한 말투와 목소리가 익숙했다.
멀리서 보아도 결코 모를 수 없는 존재였다.
셸리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목소리가 제어할 수 없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
왜 어머니가 여기에 있어요?
멀리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인다. 어머니의 목에 걸린 귀퉁이가 찌그러진 로켓. 나팔 모양의 꽃이 섬세하게 그려진 작은 목걸이.
배에 오를 때부터 계속 눈에 밟히던 꽃의 모양이 떠오른다.
셸리는 배에 가득 피어난 꽃을 기억했다. 이상하게 눈에 밟히던 꽃.
아, 그러고 보니….
그 꽃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머니에게도 유르윈에게도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어머니는 품에 로켓을 감춰서 묻지 못했고, 유르윈은 계속 엇갈려서 물을 틈이 없었다.
크루즈에 탔을 때 발견했던 꽃봉오리는 이제 완전히 만개했다. 그 꽃은, 어머니의 로켓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꽃이었다!
몸이 비틀거렸다.
셸리는 배에 탄 이후로 언제나 자신의 뒤에서 해일처럼 다가오던 티리안을 찾아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고?
그런데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보육원의 운영을 맡기고, 나를 죽이려고 드는 의식에 숨어들어 있었다고.
계속 옆에 있던 티리안의 몸이 손에 닿았다. 그가 무너지는 셸리의 팔을 힘주어 잡고 지탱했다.
“셸리.”
그의 당황이 전해졌다. 셸리는 그의 반응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야를 가진 채 계속 참아 왔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제 가져가요. 필요 없어요.”
셸리는 자신을 지탱해 주는 티리안의 팔에 매달려 쏟아 내듯 말했다.
“가져가 줘요, 티리안 님. 제발.”
눈앞이 너무 흐려서 티리안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셸리, 5년 전에 유르윈에게 외투를 선물받았던 셸리,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발을 흔들거리던 셸리, 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해 주던 어머니와 함께 있던 셸리.
모든 과거의 기억이 외로움으로 변했다.
어머니, 유르윈. 언제부터 날 속인 거예요? 내가 당신들한테 조금이라도 소중하긴 했었던 건가요?
셸리는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런 곳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안내받은 곳은 언제나 셸리의 의지로 선택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항상 그곳에 도착하길 원했던 것은 아니다.
셸리는 허물어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곳에 도착할 바엔 차라리 헤매는 게 좋았을 거야.”
폐허처럼 허물어지는 셸리의 몸을 붙잡은 티리안의 손에 억센 힘이 들어갔다.
그는 공포에 질린 사람의 얼굴을 안다. 야만에 가까운 감정을 안다.
셸리의 공포는 그에게 조금도 기껍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