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두려움
“그래서 나를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공포를 알게 해 준다는 거야?”
티리안은 들뜬 어조로 말했다. 걷는 소리도 없이 따라오며 질문하는 티리안을 달고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셸리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셸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남는 외로움이다.
어머니가 실종되었을 때 느낀 무력감. 그 감각을 다시는 느끼기 싫을 뿐이다.
그녀가 사라진 후로 셸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유르윈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를 구하기 위해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진심으로 티리안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알려 줄 생각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숭배 받았는지 몰라도 자신보다 한참은 오래 살았을 존재이다.
그간 숱하게 치러졌을 의식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 공포라는 감정을 일개 보육원 원장으로 살아온 셸리가 일깨울 수 있을 리 없다.
공포를 알려 주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셸리는 눈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셸리는 유르윈이 탈출한 이후의 일은 관심이 없다.
요약하자면, 8할은 포기 상태라는 거다.
유르윈만 이 크루즈선에서 무사히 탈출한다면 눈이든 목숨이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셸리는 해진 겉옷을 당겨 여미며 생각을 마쳤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셸리의 눈에 미로처럼 펼쳐진 크루즈선의 복도가 보였다.
숨바꼭질을 하기 좋게 생긴 곳이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 앞에서 길을 고르느라 잠시 걸음을 멈춘 셸리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 저한테 숨는 건 잘하냐고 물었잖아요. 그거 왜 물어보신 거예요?”
“아, 그거. 의식에서 하는 것 중 그나마 흥미로운 게 그거거든. 한 명을 사냥감으로 지정하고 쫓아서 사냥하는 거. 잘 숨어야 오래 버티잖아.”
“그렇구나. 근데 그걸 보면서도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신 거잖아요? 이번에는 티리안 님이 숨어 보는 게 어떨까요? 사람은 쫓기는 상황이 되면 공포에 질리거든요.”
셸리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을 감추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제안을 해야 할까. 칼이라도 들어밀어 볼까. 신을 칼로 찌를 수는 있나? 그림자에서 스르륵 나타나고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지는 존재 같은데.
이 사람은 고통이라는 걸 알기는 할까?
아니 애초에, 공포란 무엇인가?
셸리가 쓰잘머리 없는 고민을 하는 동안 티리안이 흥미로운 탄성을 내뱉었다.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 티리안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그가 말했다.
“오, 그런 건 해 본 적 없지.”
“원래 구경만 하면 잘 몰라요. 직접 그 상황을 겪어 봐야 알지.”
“그래?”
“네, 다들 그래요.”
죽은 생선처럼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티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동안 보아 온 인간들의 감정을 흉내 내는 건지, 진심으로 마음이 동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무심코 내뱉은 궤변이 잠깐이나마 티리안의 관심을 잡아 둔 건 확실했다.
이 배에 있는 누구보다, 유르윈보다도 위압적인 남자이지만 티리안은 모순되게도 어린아이처럼 유별나지 않은 행동과 말에도 호기심을 보였다.
보육원에 들어와 적응을 막 마친 아이들이 보여 주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을 보며 셸리는 확신했다. 티리안이 몇 년을 살아왔든,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의 정신 연령, 혹은 사회성은 10세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몸을 붙여 오는 티리안은 인간과 접촉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셸리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는 이유도, 그녀의 어수룩한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티리안이 셸리의 얼굴에 바싹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날 쫓는 사람은 누군데, 너?”
“네, 필요하다면 제가 해야죠. 걱정 마요, 제가 찾는 건 잘하거든요. 눈이 좋아서.”
“그게 누구 건 줄 알고, 당연하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대답을 들은 셸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역시 이 남자의 정신 연령은 열 살 즈음에 멈춰 있는 것 같다. 과시하는 모습도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깨달음이 셸리의 머리를 스쳤다.
아, 그렇지. 이 눈은 저 사람이 갖고 있던 능력인 거지.
‘그럼 이 사람은 내가 뭘 보는지, 알고 있는 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걸, 티리안은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지금까지 누구도 자신과 같은 걸 보지 못했는데.
광채가 번뜩이는 두 눈동자가 셸리에게 향했다.
“야.”
“…네?”
“그런데 그건 쫓기는 쪽이 쫓아오는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전제가 틀렸어.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렵지 않죠. 소중한 게 있어야 두려워지는 거예요. 티리안 님도 잃고 싶지 않은 게 있을 거 아닌가요? 제가 티리안 님을 찾으면 그걸 제게 주는 내기를 하면 어떨까요.”
“아닌데, 전부 잃어도 상관없는데? 나는 두려운 게 없다고.”
티리안이 빈정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셸리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이의 무구한 질문과 치기 어린 태도를 마주하면 간혹 한숨이 새어 나오고는 한다.
의미 없는 선문답이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면 말꼬리를 잡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셸리는 눈을 꾹 감으며 반박을 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이 사람은 애다. 헥터랑 라일라 또래라고 생각하고 대하자.’
보육원에 두고 온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아이들이 바람 소리에 공포에 질려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오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들이 셸리의 방에 뛰어 들어오기 전의 과정까지.
보육원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의 행동거지는 대부분 비슷했다. 대개 주눅이 든 상태로 입소했다.
오랜 시간 보호자가 없었거나 학대를 당했던 아이들은 더욱 심각했다. 아무리 달래고 보듬어도 그들은 깨진 유리병처럼, 어떤 자극도 자신의 안에 남겨 두지 못하고 흘려보내고는 했다.
지금은 유독 어리광을 많이 부리는 헥터도 그러한 아이 중 하나였다.
바람 소리는 무슨, 아이는 날붙이에 손이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셸리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치료도 할 수 없을 만큼 곪은 손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셸리는 티리안의 눈동자를 피하려 감았던 눈을 떴다.
티리안은 그들과 다르다. 분명히 다를 텐데.
셸리는 자신의 방문 아래에서 일렁이는 아이들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못한다. 외로움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외로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뒷모습만을 덧그리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고 있어서.
셸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다정한 어조로 티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티리안 님은 소중한 걸 먼저 만들어야겠네요.”
연신 그린 듯 미소 짓던 티리안의 입술에 조소가 스쳤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사라지는 작은 편린이었다.
그가 비웃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별 같잖은 소리를.”
과연, 신처럼 오만한 어투였다. 셸리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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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스스로 공포에게 먹이를 주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해 빌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이름을 붙였다.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먹고 자라나 세상에 나타났다.
티리안은 그렇게 태어났다.
사고하는 순간부터 티리안은 권태에 침식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이 ‘공포’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숭배받았다.
찢어지는 비명과 물에 젖은 장작에 옮겨붙은 불꽃처럼 볼품없이 사그라드는 죽음.
이마를 찧고, 타인을 해하여 제물을 올리는 광적인 숭배는 그에게 어떠한 감흥도 전해 주지 못했다. 그는 그저 지루했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권태였다.
그를 숭배하지 않는 인간조차 그에게 먹이를 주었다. 티리안은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공포를 먹고 자랐다.
날이 갈수록 힘은 커져 갔다.
공허한 눈으로 숭배자를 바라보던 마음에 불쾌함이 일었던 건 그들이 티리안의 이름을 빌려 난교를 벌였을 당시였다.
관대하게 무시해 줄 수 있는 일과, 짜증이 치솟아 밟아 버릴 일이 있다. 난교 의식은 명백히 후자였다.
“저건 또 무슨 짓이야.”
공포라는 이름 위에 이번에는 성욕까지 덧씌울 셈인가?
드러낸 생식기와 비명에 가까운 신음, 헉헉대며 끊어지고 이어지는 숨소리가 시끄러웠다.
“의식으로 태어날 아이를 바치겠습니다.”
“아이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될 겁니다.”
하지만 어쩌면.
오래된 권태에 치솟는 짜증이 왜 돌연 사그라들었는지 몰랐다. 티리안은 얼마든지 멈출 수 있었던 난교 의식을 굳이 멈추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사내의 성기를 받아 내며 제단을 짚는 여자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과 기도가 들렸다.
“이 아이를 바칠 테니, 그러니 제발, 제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에 질식된 듯한 기도였다.
목을 조르는 듯한 외로움이다.
티리안의 시선은 아주 잠시, 여자에게 머물렀다.
찰나, 그가 이해하지 못한 외로움을 마주한 찰나가.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여자의 안에 티리안의 외로움이 깃들었다.
가지고 있던 수많은 능력 중, 눈의 능력이 사라진 걸 알아차린 건 여자의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었다.
“셸리. 나의 셸리.”
아이의 이름은 셸리.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여자가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한 제물이다.
티리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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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을 본떠 만든 것일까, 인간이 신을 본떠 만들어진 것일까.
셸리는 자신의 손길을 받으며 나태하게 늘어진 티리안을 보며 고민했다.
헥터와 라일라보다 이 남자가 더했다. 소중한 걸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같잖은 소리라며 일축하기에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당장 눈을 뽑아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수준의 헛소리를 내뱉은 셸리에게 티리안은 공포의 신답지 않은 관대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야. 손 멈췄어.”
“아, 네.”
안타깝게도 그 관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가 아닐까. 이건 관대함이라는 가면을 쓴 고문이었다.
소중한 것을 만들어 보자는 말을 생각 없이 내뱉은 대가는 혹독했다.
티리안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셸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형벌을 받는 중이었다.
다분히 강제성을 가진 행위였다.
그만하고 크루즈선을 돌아보고 싶은데 티리안은 셸리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아끼던 장난감을 되찾은 것처럼 내내 셸리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행동에 관심이 없는 거라면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뭐?”
티리안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한 돌도 한곳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패는 법이다.
수천 번을 넘게 티리안의 머리카락을 매만진 셸리의 손바닥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마찰로 인한 타는 듯한 통증이 이제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정말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셸리는 자신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티리안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너무 쓰다듬었더니 손바닥이 까졌어요. 이쯤 되면 티리안 님은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관심이 없는 걸 열 시간이 넘도록 강요할 리가 없다. 쓰다듬는 사람도, 쓰다듬을 받는 신도 지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관심이 없다면서 셸리의 손이 멈출 때마다 시뻘건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노려보던 티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직 모르겠는데. 그 오른손이 문제라면 왼손으로 하면 되잖아.”
공포의 신이 몹시 인간미 없는 말투로 제안했다.
셸리는 헥터와 라일라의 예의 있는 어리광을 떠올리며 먼 옛날 동양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초월한 인간처럼 미소 지었다.
그 아이들과 이 남자를 동일 선상에 두고 생각한 것이 죄스러웠다. 신의 어리광은 인간과 달리 비범했다.
그래서 신일지도 모른다.
셸리는 초연하게 웃는 낯으로 답했다.
“아니요. 티리안 님도 사실 알고 계실 거예요. 좋아하는 거 맞아요.”
압도적인 위압감이나 공포도 피로는 이기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셸리가 더는 손을 움직일 생각을 않고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자 티리안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누워 있었으니 부스스해질 법도 한데, 몸을 일으키는 티리안은 누워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한 상태였다. 셸리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조금도 인간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고 움직이는 동작이나 시간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처음과 같은 모습은 지극히 이질적이었다. 티리안은 사람의 미소나 오만한 어투는 곧잘 따라 하는 것 같았지만, 평범한 손짓이나 몸짓은 흉내 내지 않았다.
본 적이 없는 걸까?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일련의 동작 같은 것. 그런 사소하고 인간적인 몸짓을 티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런 사소한 장면에서 기인했다.
“왜.”
조각상처럼 선 티리안이 까칠한 말투로 말했다.
바닷물로 인한 부식을 막기 위해 크루즈의 외벽에 발라 놓은 새까만 타르가 떠올랐다. 티리안의 머리카락은 꼭 그것처럼 새까만 색이었다. 어쩌면 셸리가 본 적 없는 심해의 색일지도 모른다.
티리안을 따라 몸을 일으킨 셸리는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어서 찌뿌둥한 몸을 길게 늘였다. 굳은 근육을 풀어 주는 셸리를 티리안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푼 셸리는 흐트러지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까지지 않은 손을 들어 정돈할 부분이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을 애써 다시 정돈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동안에도 티리안의 시선은 셸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타박도 거부도 하지 않고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관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셸리 역시 티리안을 관찰했다.
‘탈출을 하려면 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걸까.’
셸리의 눈에 비치는 탈출의 단서는 여전히 티리안의 주위에 있었다. 크루즈의 어떤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단서가 티리안의 곁에서만 나타났다.
셸리에게 눈의 능력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단순히 관심이 없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티리안은 탈출의 실마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관심이 있어 보이는 건, 기묘하게도 셸리의 행동과 생각 따위였다.
“왜 그렇게 보냐고 묻잖아.”
누가 할 말을. 당신은 날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셸리 역시 묻고 싶은 말을 티리안이 입에 담았다.
셸리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에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티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셸리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겨울바람처럼 요란하고 적막하게.
“넌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거란다.”
셸리는 눈에 비치는 광경과, 시야의 끝에 있는 티리안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시야에 비치던 수많은 목적지. 그 한가운데에 티리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도착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쏟아질 것 같은 애정을 담은 눈동자를 셸리는 본 적이 있다. 지금 티리안의 눈과 비슷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내 눈에 비치는 걸 본다면, 이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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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리안은 죽은 신이다.
신전을 무너뜨리고, 신도를 박해해서 공포를 죽일 수 있다면 그는 죽은 신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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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준비를 하는 거예요?”
“예, 아가씨.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뇨, 필요한 건 없어요. 그것보다 연회는 언제 시작되죠?”
“연회 시작에 대해서는 안내받은 바가 없어서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사흘 후 자정까지 준비를 마치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셸리는 웨이터의 옷처럼 보이도록 개량된 신도복을 입은 남자의 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즈의 내부는 며칠 사이에 달라진 모습이었다. 셸리가 홀로 크루즈에 올랐을 때 봉오리에 불과하던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흔히 보는 꽃들과 다르게 크루즈에 피어난 꽃은 땅을 향해 봉오리를 벌리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향기가 진해질수록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크루즈는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걸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아늑했다. 방 안에만 있어도 모든 것이 손안에 들어왔다.
포근한 침구와 반짝거리는 식기, 갓 만들어 올린 따뜻한 음식, 잔잔한 바다 위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거대한 크루즈선.
어깨에 지고 있던 위기의식이 날이 지날수록 바다에 깊이 가라앉는 듯했다. 긴장감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게 어쩐지 기껍다.
셸리는 그 감각이 낯설었다.
크루즈는 생각보다 편안했고, 티리안과 함께 있는 시간은 기묘하게도 완전하게 느껴졌다.
허벅지를 베고 누운 티리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그는 셸리를 바라보며 그녀의 숨에 맞추어 호흡했다.
조각상처럼 생기 없던 육체가 점점 인간미를 띠었다.
오르내리지 않던 가슴이 셸리의 호흡을 따라 동시에 움직였다. 숨을 내뱉고 눈을 깜빡인다. 피그말리온이 만들어 사랑에 빠졌고, 기어코 숨을 얻은 갈라테이아처럼.
셸리는 티리안이 숨을 얻는 순간을 지켜봤다.
티리안은 습득하는 속도가 빨랐다. 며칠 전만 해도 열 살 즈음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는데 벌써 사회화를 마친 성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셸리는 그런 티리안의 행동 뒤에 있는 존재를 안다.
“셸리.”
유르윈이다.
크루즈는 밝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존재했다.
그 축축한 기운을 좇다 보면 티리안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가 셸리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셸리를 지켜보던 어둠이 불쾌함을 드러내듯 일렁인다.
티리안은 유독 유르윈이 셸리의 곁에 오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구명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은 어렵지만, 사흘 정도 시간이 있다면 안전하게 출발할 수 있을 거야.”
연회장을 꾸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던 셸리에게 유르윈이 다가왔다. 그는 크루즈에 올랐을 당시보다 피곤해 보였다.
그의 안색을 본 셸리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셸리가 티리안과 소꿉놀이를 하듯 지내는 동안 유르윈은 이전에 논의했던 대로 구명정으로 탈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피곤한 낯을 하고도 여전히 다정한 태도를 고수하는 유르윈.
티리안은 최근에 그런 유르윈의 다정함을 학습하고 있었다.
유르윈의 일관적인 다정함보다 티리안의 피어나는 다정함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인가.
셸리는 이제는 습관처럼 입고 있는 오래된 외투의 밑단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유르윈에게는 아직 깔끔하다고 말한 외투지만 까슬하게 손끝에 걸리는 보푸라기의 감촉이 뚜렷했다.
손가락에 걸린 보풀을 굴리며 셸리는 티리안에게 지나치게 집중하는 자신의 생각을 환기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유르윈을 무사히 이곳에서 내보내는 거지, 유르윈을 흉내 내기 시작한 공포가 아니다.
“조금 더 일정을 당길 수는 없을까요? 연회 준비가 사흘 후에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일정을 앞당기는 건 힘들어. 앞으로 사흘은 특히 더.”
손가락에 걸리는 보풀을 하나 떼어 냈다.
“날씨가 문제인가요?”
“비구름이 오고 있다고 하더라고.”
“시기가 안 좋네요.”
“날이 궂으면 크루즈 안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몰라.”
“글쎄요. 그건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보풀을 떼어 냈지만 여전히 가슬가슬한 옷감이 계속 손가락 사이를 맴돌고 있다. 불편하다.
“무슨 연회를 진행하는지 알고 계세요?”
티리안은 지난 연회에 대해 알려 주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오래도록 불평하던 난교 의식과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고 짤막하게 평한 투기장.
이번에도 비슷하다면 셸리는 자신이 그 연회를 버텨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연회가 아니라 의식이겠지만요.”
“…확실하지는 않아.”
“제가 중심이 되는 연회죠?”
“그렇겠지.”
“그럼 확실하지 않아도 좋아요, 알려 주세요.”
불편해.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유르윈에게 셸리는 딱 잘라 말했다.
개미굴처럼 복잡한 크루즈의 내부를 바라본다. 복도는 여전히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셸리의 시선에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대개 좋지 않은 징조였다.
셸리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간단히 말할게.”
“네.”
“술래잡기야.”
자신의 피가 사방으로 튀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던 셸리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셸리에게는 능력에서 비롯된 특기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주변인들이 가장 치를 떠는 게 바로 ‘숨기’였다.
딸이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행복해하던 어머니조차 셸리의 숨기 능력에 치를 떨었다. 셸리가 자신의 품을 떠나 숨으면, 엄마인 자신조차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보육원에서도 술래잡기를 제안한 아이들이 울면서 나와 달라고 할 때까지 모습을 감추는 게 가능했는데, 이렇게 넓은 크루즈선이 배경이라면 자신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물론, 제한 시간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보육원 아이들이랑 가끔 해 주는 술래잡기라면 자신 있는데요.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을지도…. 저 엄청 잘 도망가는 거 아시죠?”
“알지, 내가 어릴 때 널 잡으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한 번도 못 잡으셨어요.”
“잡을 뻔한 적은 있고.”
“결국 못 잡으셨잖아요.”
“그랬지.”
유르윈이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 슬쩍 웃었다.
“한 번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말이야.”
흘리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한 번 정도는 잡혀 줄 걸 그랬나. 셸리는 가만히 생각했다. 유르윈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셸리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에 파고든 손가락이 유독 하얗게 반짝인다. 깔끔한 손톱과 거친 곳 하나 없이 정리된 손끝이 섬세하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태도나 표정에서 성격이 드러나는 사람은 많지만, 유르윈처럼 손가락 끝에서 성격이 드러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르윈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 손이다.
어릴 때는 곧잘 유르윈과 손을 잡고 다니던 기억이 있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소년의 미숙한 손은 그보다 더 어린 셸리의 손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면 손가락 마디에 붉은 흔적이 남을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점차 힘이 빠지더니 지금에 와서는 더는 마주 잡지도 않는 형태가 되었다.
이제 아이가 아닌 어른이니,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가끔은 자신의 것처럼 손을 잡아 오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유르윈은 더 이상 셸리의 손을 잡지 않는다. 셸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손가락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섬세한 손길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지만,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그의 손가락에 얽히지 않고 옆으로 떨어졌다.
셸리는 그 짧은 과정에서 이루어진 섬세한 포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진 걸까 가늠하는 것을 멈췄다.
“사흘 후에는 구명정을 쓸 수 있는 거라는 말이죠?”
“응.”
“오히려 잘됐어요. 사람들은 연회 때문에 정신이 팔릴 테니 그 틈에 나가면 되잖아요.”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너를 쫓을 거야. 어릴 때 하던 소꿉장난이랑은 달라.”
“괜찮아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어요.”
단호하기까지 한 대답을 들은 유르윈의 미간이 설핏 굳었다.
셸리는 눈에 보이는 모순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티리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외면한다.
“제가 유르윈 님을 찾아갈게요. 그날 같이 가는 거예요.”
“구명정은 2층에 있어. 정말 안 잡히고 올 수 있겠어?”
언뜻 들으면 걱정보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가령 말하자면, 잡히기를 원하는 느낌이랄까.
셸리는 귀에 들리는 모순 역시 눈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연회가 시작되고 세 시간 뒤에 표시해 둔 구명정 앞으로 갈게요. 거기에서 만나요.”
.*. *. *. *. *. *.
‘속아 주려고?’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선명하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덮쳐 오는 온기 없는 신체에 그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왜 속아 주는 건지 모르겠어.”
해일처럼 몸을 덮친 티리안이 셸리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무릎을 차지하더니 이제 티리안은 셸리의 온몸을 끌어안고 나서야 말을 시작한다.
이게 셸리와 티리안의 원래 거리라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다. 셸리는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이번 연회는 티리안 님 마음에 드시겠네요. 술래잡기래요.”
“알고 있었는데?”
“언질이라도 해 주시지.”
며칠 사이에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진 티리안이 웃으며 속살거렸다. 셸리는 그에게는 이런 다정한 미소보다, 오만함과 비웃음이 맺힌 미소가 더 어울린다고 언뜻 생각한다.
“내가 왜?”
티리안은 몹시 다정한 어투로 질문했다.
말투나 표정만 유르윈처럼 변하면 다인 줄 아나.
인간사에 무지한 공포가 아무래도 잘못 배우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인지 몰라 조언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저 이질적인 다정함이 꽤 공포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셸리는 공포를 등에 지고 미로처럼 꼬인 복도를 살폈다. 처음 내던져진 장소에서도 지도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술래잡기의 배경이 이 크루즈라면 사흘 동안 최대한 배의 구조를 익히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유르윈에게는 위세 좋게 답을 했지만, 숨는 건 몰라도 도망가는 건 셸리에게 달린 일이었다.
체력이 없거나, 마주한 벽을 넘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도망갈 수 없다.
어릴 적 유르윈에게 잡힐 뻔한 것도 그러한 문제 때문이다.
“언질을 하든, 안 하든 네게는 문제가 없지 않나? 그 눈이 있는데.”
“그건 그래요.”
티리안은 당연한 사실을 읊조렸다. 신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존재를 감히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셸리는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며 동의했다. 문 너머에는 벽이 있었다. 구조 자체가 기이했다. 유령이 사는 집이 이럴까 싶었다.
문을 열면 벽이 보이고, 방이 있을 장소에 복도가 있다. 계단의 끝은 막힌 천장으로 이어진다.
이 크루즈 전체가 전부 이 연회의 순간을 위해서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셸리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역시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 신을 위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이런 낭비를 하다니, 제정신일까?
제정신이 아니기에 이런 짓을 하게 된 거겠지만.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셸리는 공포심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리의 어깨와 목을 감고 있던 티리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티리안은 공포심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지가 찢겨 죽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