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맹목 (3/10)

02. 맹목

공포의 신의 이름은 티리안이다.

어머니가 모시는 신은 공포를 주재하는 신이었다. 그 ‘공포’가 이런 사내였다는 걸 알고도 숭배한 걸까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

티리안이 짜증스러운 음색으로 셸리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모신다는 것들이 난교를 의식이랍시고 하고 있는데, 내가 그걸 그냥 두고 봐야겠어?”

“아니죠.”

“그렇지, 그런 쓸데없는 생식기 자랑은 성교의 신이라도 만들어서 할 것이지. 감히 내 앞에서.”

“그래서 화가 나셨군요.”

“글쎄. 멍청한 짓을 해서 도시를 한 번 엎어 주기는 했지.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벌에 가깝잖아. 공포의 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일을 해 주니 새파랗게 질리던데….”

티리안은 신보다는 무료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침대 위를 뒹굴면서도 위협적이라는 점만 뺀다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날 ‘공포’라고 명명했으면, 계속 그에 맞는 제물을 바쳤어야지. 제물만 제대로 바치면 소원도 들어줄 텐데, 멍청하게.”

셸리는 그가 전혀 ‘공포’ 같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셸리가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말한 뒤로 흥미를 내보인 티리안이 셸리의 방의 침대에서 뒹군 것이 한참이다. 셸리는 해일이 도시를 덮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신의 변덕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더는 못 보게 된 이유가 단지 이 존재의 변덕 때문이었던 것이다.

티리안이 명확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투견장은 괜찮았어. 인간보다 짐승들의 감정이 더 명확하게 보이더군. 인간 투기장도 괜찮았지. 그런데 그 감정은 공포보다 야만에 가까워 보여서 아무래도 아쉬웠단 말이지.”

공포의 신은 자신이 보아 온 공포를 설명했다.

셸리의 대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인지 그녀의 대답이 없어도 그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티리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셸리는 그의 두서없는 불평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공포의 신이라고 숭배받는 이 남자는, ‘공포’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 남자는 공포에 대해 알고 싶은 거다.

자신을 모시는 존재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자비로운 신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셸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볼을 붙잡은 손은 시체의 것처럼 차고 단단했다. 남자는 인간의 표정은 흉내 내면서, 인간이 지닌 온기는 따라 할 생각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티리안이 그녀의 눈을 지척에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공포에 대해 알고 싶어서 내 눈을 가지고 있는 걸 눈감아 줬는데. 소득은 없었지. 내 눈 때문인가.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너는 감정이 많이 무딘 것 같아.”

티리안의 말대로였다. 셸리는 남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반대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많이 무딘 편이었다.

티리안은 볼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질문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셸리의 머리가 좌우로 가볍게 흔들렸다.

시야가 흔들거려서 어지럽다. 남자의 목소리로 좌우가 번갈아 가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너, 사실 지금 내가 무섭지도 않지?”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셸리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볼을 꾹 잡은 강한 악력도, 서늘한 손가락도.

셸리는 입술을 쭉 내민 우스운 몰골로 대답했다.

“네.”

“그럴 줄 알았어.”

그는 키득거리며 다시 거칠게 셸리의 볼을 좌우로 흔들었다. 눈빛은 여전히 무료해 보이지만 드러나는 태도는 고양되어 있었다.

무언가 상당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태도였다.

낄낄거리며 셸리의 볼을 주무르던 남자가 그녀의 눈을 다시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단 하나의 감정만 제외하고.

감정이 무딘 셸리는 ‘외로움’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남자 때문이었다.

내가 이 남자의 눈을 받아서 감정에 무딘 거라면, 내가 느끼는 이 외로움 또한 이 남자의 것이 아닐까.

깊은 물에 잠겨 있는 듯했던 지독한 고요함과 외로움은 이자의 것이다.

볼을 붙잡고 셸리의 눈을 살피던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결국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나.”

남자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셸리의 눈가였다. 그는 아이가 가지고 놀다 질린 유리구슬을 던지는 것처럼 무료한 몸짓으로 그녀의 눈가를 더듬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눈을 스스로 원한 적은 맹세코 한순간도 없었다.

차가운 기운이 기어이 셸리의 눈가에 닿았다. 무심코 닫은 눈꺼풀 위를 덮은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인간의 형상을 한 공포의 손가락이 셸리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눈을 파고들 것처럼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에, 셸리는 두려움 없이 입을 열었다.

“공포에 대해 알고 싶나요?”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바른길을 고르는 셸리.

눈을 감고 있음에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순간보다 더욱 명확하게.

셸리는 눈을 감은 채로 이야기했다. 티리안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감은 눈 위를 누르고 있었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공포가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눈꺼풀을 누르던 손가락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검게 가려졌던 시야에 빛이 새어 들어오고, 셸리는 눈을 떴다.

지척에 남자의 눈이 있었다.

그의 눈에 마주한 이후로 처음 보는 감정의 조각이 어려 있었다.

“네가? 어떻게?”

오만하고 단순한 물음이 셸리를 향했다. 농락의 목적이 아니었다. 호기심이다.

“알고 싶으시면, 이 눈을 제가 더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맹세코 이 눈을 원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이곳은 크루즈선 위. 배는 이미 육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왔다.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곧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곳에 오른 사람 중, 셸리 자신과 유르윈만이 신도복을 입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유르윈 역시 자신처럼 이곳에 잘못 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다소 이상한 점이 있긴 했지만, 유르윈은 셸리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부터 그녀를 돌봐 준 사람이다. 그가 함정에 빠진 거라면, 셸리는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를 무사히 배에서 내보내기 위해서 셸리는 아직 이 눈이 필요했다.

셸리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남자가 과장된 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맑은 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간지러운 웃음이었다. 공포의 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한참을 웃던 그가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셸리를 바라봤다.

“좋아.”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기다리는 건 지루하니 제한을 걸어 두지. 기다려 주는 건, 이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야.”

목적지가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셸리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사소한 의문은 아랑곳하지 않은 티리안이 눈꼬리를 깊이 접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두려움을 알게 해 봐.”

공포의 대상으로 숭배받는 남자가 말했다.

“그럼 네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지.”

“어떤 소원이든지요?”

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공포의 신이라니, 지나치게 자신에게 관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티리안은 불쾌한 기색 없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어떤 소원이든.”

웃음기 섞인 가벼운 속삭임 뒤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만, 배가 도착한 뒤에도 내가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 *. *. *. *. *.

티리안은 원래 자리에 없었던 듯이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머리카락 하나, 온기 한 점 남지 않았다.

티리안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이 배의 어느 곳에나 있을 것이다. 셸리는 곧장 유르윈의 방을 찾았다.

셸리에게 주어진 방은 유독 외지고 동떨어진 곳에 있어서 유르윈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셸리는 신도복을 입은 탐욕스러운 인상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이나 벽에 등을 붙여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신을 위한 연회장에 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러나 화려한 전등이며, 따뜻하게 준비된 음식, 비싼 술 등은 어떤 각도로 보아도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술에 취한 채로 커다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제물은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오래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분명 괜찮을 겁니다.”

“그때의 의식을 제외한 건 신자의 입장에서 아쉽긴 합니다만….”

“허허, 아쉽지요.”

준비된 샴페인을 들이켜던 남자들이 음습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두툼한 손가락에 맺힌 물기를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음흉하게 미소 짓던 남자가 작고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의식이 끝나고 빈 몸은 가져도 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렇지요, 그분께 바치는 건 눈이니까.”

대화에 정신이 팔린 그들을 지나쳤다.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들었다.

셸리는 만취한 남자들 사이에서 유르윈의 얼굴을 찾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단정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런 술판을 지나쳤다. 그들은 같은 배에 있는 셸리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배가 출발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는 건가.’

겨우 유르윈의 방 앞에 도착한 셸리는 그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유르윈 님.”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르윈이 문을 열었다. 그는 평소보다 곤혹스러운 낯이었다. 셸리의 얼굴을 확인한 유르윈은 주변을 둘러보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와.”

다소 다급한 손짓이었다. 손목을 억세게 잡아당겨 셸리를 방으로 들인 유르윈은 셸리가 그랬던 것처럼 문의 잠금장치를 단단히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던 중이었어. 뭔가 이상해.”

셸리는 초조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셸리?”

셸리는 유르윈의 제안을 받고 배에 올랐다. 진수식을 한다면서 굳이 셸리가 먼저 배에 오르게 한 것 역시 유르윈이다.

그가 이 사태와 전혀 연관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믿고 싶은 것이다.

유르윈도 셸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몰랐을 거라고.

그의 상태를 확인한 셸리는 방을 나서면서부터 고민한 것을 묻기로 결심했다.

“유르윈 님은 이 크루즈선이 무슨 목적으로 출발하는지 알고 있었죠?”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헤아리기 힘든 괴로움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손목을 잡고 있던 유르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어.”

“제가 제물이 될 거라는 것도.”

“그래. 하지만 그들이 약속했어. 네 눈이 가진 능력을 옮기는 것뿐이라고. 네 안전은 보장한다고, 그렇게 계약했어.”

그가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분한 듯 강하게 다물린 입술에 기어이 핏물이 비쳤다.

셸리는 그의 입술을 보며 질문했다.

“…왜 받아들인 거예요. 제가 어떻게 돼도 유르윈 님한테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거예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책망하는 듯한 어조가 튀어나왔다. 유르윈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는 셸리와 눈을 맞췄다.

“아니, 그 반대야.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하루라도 다른 시야로 세상을 보고 싶다고.”

셸리가 지닌 눈은 사람의 마음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니 셸리는 신중하게 고민한 후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유르윈이 하는 이야기를 믿어, 그와 함께 크루즈선을 벗어날지. 그를 믿지 않고, 홀로 이 상황을 타개할지.

“의식이 끝나면 네게 그런 세상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셸리.”

사람은 때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진실을 외면한다. 괴롭게 일그러지는 섬세한 눈가, 물기 어린 유르윈의 눈동자 같은 것들.

그의 얼굴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모두 찾아낸 셸리는 유르윈의 손등에 손을 겹치며 말했다.

“여기에서 나가야 해요. 같이 방법을 찾아요. 그럴 시간은 충분한 거죠?”

셸리는 그를 믿고 싶었다. 유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식은 해일의 진원지에 도착한 뒤에 시작될 거야. 탈출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배의 목적지가 거기였군요.”

목적지를 알려 준 유르윈이 자신의 손등에 겹쳐져 있는 셸리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그는 방 안의 서랍을 뒤적여 무언가를 찾아 손에 쥐었다. 셸리에게 전해 줬던 것과 같은 선내 안내도였다.

책상 앞에 선 그가 셸리에게 이리로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책상을 사이에 둔 셸리와 유르윈은 어린 시절처럼 이마를 맞대고 지도를 펼쳤다. 셸리는 자신의 능력을 좀처럼 믿지 못하던 유르윈과 어릴 때 자주 의견 다툼을 벌이곤 했다.

“그게 정말 맞는 길일까? 가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선택한 길이 맞을 수도 있잖아.”

어린애 주제에 점잖은 척 타박을 하는 꼴을 보자면, 감정이 무딘 셸리도 헛웃음을 치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네가 맞았네.”

번번이 셸리의 선택이 옳다는 걸 확인하고도 유르윈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고집도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이번에도 셸리가 한 말이 맞았네.”

안내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구명정의 위치였다. 셸리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짚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구명정이 있네요.”

“좋아. 구명정을 타고 이 크루즈선에서 내리자는 거지? 아직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네 말을 들어서 잘못된 적도 없고.”

어느 순간부터 유르윈은 셸리에게 반박하는 대신, 그녀의 의견에 맞추어 주는 것을 택하게 되었다.

셸리는 간혹 번번이 시비를 걸던 과거의 유르윈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유르윈이 구명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느리게 귓가에 박혀 들었다.

셸리는 유르윈에게 티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릴 때도 셸리의 능력을 한참 믿지 않았던 유르윈이 신을 대면했다는 말을 믿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셸리조차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존재였다.

신에게 두려움을 알려 주겠다고 제안해 시간을 벌었다고 말한다면, 더 믿지 않겠지.

셸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르윈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구명정의 위치가 안내도에 있는 정보랑 일치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내가 살펴볼게. 지도를 보는 건 내가 낫잖아.”

유르윈의 말대로였다. 셸리는 그가 건네준 선내 구조도를 지금까지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유르윈의 객실을 찾을 때조차도.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가는 게 편하니 셸리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네, 그건 부탁할게요. 저는 그동안 다른 방법도 찾아볼게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해.”

유르윈은 언제나처럼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구명정이 있을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셸리는 평소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목적지로 자신을 향하게 했던 시야에는 아직 아무런 방법이 비치지 않았다.

.*. *. *. *. *. *.

셸리는 유르윈의 걱정을 뒤로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길을 찾으려고 애쓴 탓인지 눈과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아 주려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고 있는 셸리의 옆에서 티리안이 속살거리듯 말을 걸었다. 공포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셸리가 혼자 남자마자 티리안은 계속 그녀를 지켜보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나 옆자리를 차지했다.

“눈을 조금 더 쓰게 해 달라고 한 이유가 저것 때문이야? 저 남자랑 같이 이 배에서 나가고 싶어서?”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속살거리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도발하듯 경쾌한 어조였다.

셸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웠다.

시선을 돌린 셸리의 눈에 티리안의 말끔한 얼굴이 들어왔다.

인간이 호감을 느끼는 형상을 꾸며 낸 것인지, 원래 그러한 형상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섬세하게 조형된 티리안의 외형은 아름다웠다.

단단하고 군살 없는 신체와 온기는 없지만 부드러운 피부. 아름다움의 극치를 옮겨 놓은 듯한 얼굴을 가진 티리안이 셸리와 눈이 마주치자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꼬리만 샐쭉 올리는 기묘한 미소를 보인 남자가 조롱하듯 말했다.

“왜 속아 주는 건데?”

“속다니요.”

“거짓을 말하는 것들은 동정으로 상대의 눈을 가리려 애쓰지. 저것도 지금 같은 짓을 하잖아.”

셸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귓가를 한 번 더듬고, 이어서 눈꺼풀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아, 당해 주는 척하면서 계략을 꾸미는 건가?”

다시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아도 남자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 중 일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혹시 이 남자의 존재도 자신의 눈에만 비치는 환상 따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의 손이 셸리의 볼을 쥐고 흔들었던 순간부터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을 티리안이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를 알려 주겠다 선언한 후로 그는 셸리의 모든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듯 그녀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못 본 척 외면한 셸리는 다시 손을 아래로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르윈 님은 저를 속인 적 없어요.”

셸리의 작은 목소리에 약간의 불쾌함이 실렸지만, 티리안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고개만 까딱까딱했다.

질문만 하고 답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혼자 무슨 판단을 내린 건지 소리도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던 티리안은 곧 유르윈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듯 더 묻지 않고 셸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허공에서 움직이듯 가벼운 몸짓으로 몸을 빙글 돌리며 다가오더니 셸리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목을 휘어 감은 티리안은 셸리의 몸을 제 것처럼 끌어당겼다. 졸지에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목이 졸려 그에게 끌려갔다.

티리안의 팔에 목이 졸린 셸리는 켁, 하고 숨을 들이켜며 그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목이 졸려 팔뚝을 밀어내려 했지만 남자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아 작게 숨만 몰아쉬었다.

저항하지 못하고 가쁘게 숨만 내쉬니 목을 조이던 팔에서 힘이 조금 풀어졌다.

셸리는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의 것인 양 감겨 있는 팔이 셸리의 어깨에 얹어졌다. 연인 사이에서나 취할 법한 자세를 한 채로 티리안이 키득거렸다.

“엄청 약하네.”

비웃는 목소리에 즐거움이 잔뜩 섞여 있어서, 셸리는 의아한 심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티리안은 몹시 기묘하게도, 셸리의 존재가 기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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