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안내받는 자는 길을 잃지 않는다
셸리는 겨울의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청각이 먼저 끝을 알아차렸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거센 바람 소리. 작은 섬에 찾아드는 겨울의 바닷바람은 끝이 다가올수록 거세졌다.
겨울이 일주일 남짓 남은 지금과 같은 시기가 되면, 바람은 더욱 강해져서 누군가의 비명처럼 창문을 때려 제 존재를 알렸다. 사람들은 그 존재를 마주하면 공포에 질리기 일쑤다.
거센 바람과 함께 찾아왔던 해일이 섬을 허물고 지나간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일까. 이 섬의 사람들은 유독 겨울의 바람을 두려워했다.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셸리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보육원을 이어받았다. 이 섬에는 이상하리만치 고아가 많은 탓에, 빈 침대가 생길 틈 없이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이 보육원이 재정난에 휩싸이는 일은 없었다. 이곳의 후원자들은 보육원의 자금이 마를 일이 없도록 많은 후원금을 보냈다.
후원금의 대가를 지불하는 건 셸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목적지로 인도해 주는 것.
셸리는 자신의 침대를 차지한 두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한숨을 내뱉었다. 방문 아래로 스며든 그림자가 눈에 밟혀, 그녀는 오늘도 이들에게 문을 열어 주고야 말았다.
“…바람 소리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누군가의 비탄처럼 찾아드는 바람이다. 두려움만 불러일으키는 바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굳게 닫힌 창문을 넘지 못하고 애꿎은 창문틀만 덜거덕거리다 물러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결코 문을 넘지 못했지만, 바람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할 때부터 헥터와 라일라는 공포에 질려 셸리의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이제는 서로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잠에 빠진 아이들의 몸에는 훈기가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놓아둔 따뜻한 물을 채운 물주머니 역시 아직 온기가 가득한 것을 확인한 뒤에 셸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바람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지만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무색하리만큼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해졌지만 깨끗한 담요를 아이들의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방을 나왔다.
모두 새것으로 교체한 아이들의 침구와는 달리 셸리의 침구는 낡고 오래되었다. 그런 방이 뭐가 그리 편한지,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방에 들이닥쳤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셸리는 낡은 겉옷을 여미고 작게 읊조렸다. 옥상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겁다. 피로 때문은 아니었다.
“내일이 크루즈선, 시운전을 하는 날이지.”
옥상의 문을 열자마자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긴 오렌지색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 불길처럼 휘날린다. 셸리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내리고 하나로 모아 묶은 뒤에 찬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야 끝에 검은 바다가 보인다. 마력으로 정제한 가로등 아래로 육지로 밀려든 파도가 일으킨 흰 포말이 일었다 사라지는 광경이 선명했다.
바다는 저렇게 검은데, 파도로 만들어진 포말은 신기할 정도로 희었다.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배타적인 흰색이 다시 검은 바다로 흩어지는 것을 보던 셸리는 다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10년 전 거대한 해일이 셸리가 사는 섬을 덮친 뒤, 이곳은 엉망이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 해일이 만든 수많은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모든 일상이 뒤집혔지만, 그것은 섬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몰락해 가던 그들의 섬에, 부유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들의 동정심이 닿은 것이다.
섬이 망가진 후에 각지에서 몰려든 손길이 섬을 일으켰다. 10년간 진행된 도시 재건은 그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해일의 이름을 붙인 크루즈선의 건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후원자들은 공포를 다스리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공포의 이름을 딴 배를 타고 여행하고 싶어 하다니.
누가 저 이름을 가진 배에 오르고 싶어 할지 의문이기도 하고, 셸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발상이었지만.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의 발상이란 그녀에게 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 멀리 있는 것이다. 닿지 않는 걸 손에 쥐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때문에 셸리는 이해를 포기했다.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 바로 그 크루즈선의 시운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셸리는 옥상에서도 커다랗게 보이는 화려한 크루즈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루즈선은 바다 위에 뜬 거대한 무덤 같다. 셸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거대한 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셸리의 눈에는 아직 그곳이 비치지 않았다. 배의 목적지가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목적지를 알아차리는 시야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배에 오르면 알 수 있으려나.’
셸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탈 생각은 없지만.
얼마나 그것을 보고 있었을까, 나긋한 부름이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또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어, 셸리.”
“유르윈 님?”
“춥지 않아?”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대답 없는 질문만이 두 사람의 사이를 빠르게 오고 갔다.
보육원의 오래된 후원자 중 한 사람. 유르윈 아르테스의 다정한 미소가 셸리의 눈에 비쳤다. 다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려던 셸리는 자신의 상태를 떠올렸다.
낡은 겉옷이며,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묶은 머리카락이며, 꼴이 엉망일 텐데. 이거 후원자 앞에서 보일 모습은 아니지 않나?
어머니의 실종 이전부터 이어진 셸리와 유르윈 아르테스의 인연은 올해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훌쩍 지나고 있다. 단순히 후원자와 수혜자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이후로 그들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과거와는 달라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셸리의 차림과는 달리 유르윈의 옷차림은 오늘도 완벽에 가까웠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그의 검은 코트는 더러운 곳 없이 정돈되어 있을 걸 확신했다.
강하게 부는 바람으로 인해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진 금발이 완벽함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흩어진 머리카락 덕에 평소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이들 침구 바꾼 거 봤어. 그런데 네 옷은 이게 뭐야.”
머뭇거리는 셸리의 앞으로 유르윈이 성큼 다가섰다. 몇 걸음 만에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후원금이 부족하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장 후원을 그만두셔도 1년은 버틸 수 있는걸요.”
“그럼?”
답을 들은 유르윈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셸리를 내려다보았다. 보라색과 빛바랜 붉은색의 사이, 그 어딘가에 걸쳐 있을 법한 애매한 색의 유르윈의 눈동자가 셸리의 외투를 샅샅이 훑고 떨어졌다.
옷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쉬듯 웃고는 보푸라기가 일어난 셸리의 외투에 손을 올렸다. 관리를 한다고 해도 오래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거칠어진 옷감을 손가락으로 더듬던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몇 년 전에 사 준 옷인데 아직도 입고 있는 거야.”
“아직 5년밖에 안 됐어요.”
“내 선물을 아껴 주는 건 좋지만, 소모품은 소모품으로 쓰는 게 맞는 거야, 셸리.”
“아직 입을 수 있으니까 버릴 이유는 없어요.”
“이건 이미 쓸모를 다한 거야. 쓸모가 없어지면 버릴 줄도 알아야지.”
그가 두 눈을 휘며 말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말은 단호했다. 셸리는 그의 냉정한 어조에 고개를 숙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쓸 수 있어요. 깨끗하고.”
“그래, 그래. 내일 떠나기 전에 새 옷을 보내라고 말해 둘 테니까 이건 좀 버려.”
“이게 익숙해서 편해요.”
평소보다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하는 셸리에게 그가 웃는 어조로 제안했다. 고집스레 옷깃을 여미는 셸리의 모습을 보던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셸리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건을 유독 놓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버리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녀가 그러지 않을 걸 유르윈도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도록 작게 입술을 비죽이던 셸리는 그의 말을 되짚어 보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떠나다니요?”
“내일이 크루즈선, 시운전을 하는 날이잖아. 나도 그 배에 타기로 했거든.”
“유르윈 님이, 저 배에 탄다고요?”
셸리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문장을 겨우 이어 가며 되물었다.
“긴 항해라 당분간 돌아오지 못하니까. 떠나기 전에 잠시 얼굴을 보러 온 거야. 새벽 일찍 출발하니까 그때 보기는 힘들 것 같아서.”
“…왜요?”
“응? 너 아침잠 많잖아.”
“그게 아니라, 왜 유르윈 님이 시운전을 하는 배에 오르시는지 묻는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그에게 셸리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유르윈은 셸리의 겉옷을 매만지던 손을 떼어 내며 대답했다.
“내 의견이 필요한 건이 있어.”
“보고를 받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중요한 일이라 내가 직접 가야 해.”
담담하게 대답해 주던 유르윈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밖에서는 틈 하나 보이지 않게 귀족적으로 행동하면서 셸리와 둘만 있을 때면 그는 곧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셸리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래 못 본다니까 섭섭해?”
“그런 게 아니라…!”
“같이 갈래?”
“네?”
“불편하지 않을 거야. 시운전이라고 해도 시설은 완성되어 있으니까 전부 쓸 수 있어. 그냥 휴가나 다름없어. 보육원 이어받은 후로 하루도 못 쉬었잖아. 이번 기회에 조금 쉬는 건 어때?”
셸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보육원 운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오래 못 보아서 섭섭하다거나, 아쉬움 같은 얄팍한 감정 때문에 물어본 것이 아니다.
저 크루즈선은 불길하다. 건조를 시작했을 때부터 셸리는 크루즈선이 거슬렸다.
알 수 없는 목적지로 향할 크루즈선. 그 불길한 배에 오를 상냥한 유르윈 아르테스.
그의 불운을 두고 볼 수 있는가?
고집스레 물가로 나서던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던 해묵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따라 유독 단정하던 어머니의 옷차림은 셸리의 눈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곱던 차림새, 단정한 그녀의 뒷모습, 어린 소녀처럼 해맑았던 미소.
셸리는 어머니의 그 마지막 모습을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오늘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셸리는 유르윈 아르테스가 고개를 숙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과 자신을 향했던 다정한 질문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영원히 곱씹게 될 순간을 두 가지로 늘리고 싶지 않다.
“그래도.”
셸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어지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유르윈 아르테스는 다정하다. 그 모습이 자꾸 어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그녀와 똑같은 금발이 유독 눈에 밟히는 순간이 많았다.
어릴 때는 그가 자신의 오빠이길 바랐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이었고, 셸리는 그가 후원하는 보육원 원장의 아이일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 관계다.
유르윈이 할 일이 있다면, 셸리는 막을 수 없다. 그는 귀족이고, 후원자이니까.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해도 셸리에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막을 수 없다. 셸리는 어머니의 걸음도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더라면? 그렇게 했었더라면.
깊은 후회가 여전히 셸리의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있었다.
“응. 왜 그래?”
유르윈이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셸리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바람 같다. 그의 손길은 언제나 나긋하고 힘이 없어서, 셸리가 그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는 그때의 어머니처럼….
남겨질 아이들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동요가 일었다. 보육원에서 자신을 기다릴 아이들. 미안하게도, 그 많은 아이들보다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셸리에게 유르윈이라는 존재였다. 그곳에서, 생각이 멈췄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
셸리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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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챙겨 와. 나머지는 전부 준비되어 있어.”
유르윈이 이야기한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기면서, 셸리는 자신이 한 번도 이 보육원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짐을 꾸리려고 하는 순간, 여행에는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머리가 텅 비었다.
자신의 방에서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주의하던 셸리는 한참을 고심하다 결국 옷가지만 조금 챙겨 나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더 챙길 것은 없어 보였으나, 이런 단출한 짐을 챙긴 걸로 정말 괜찮을까 하는 고민이 피어났다.
그녀가 짐을 챙기는 동안 유르윈은 보육원의 위임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보육원의 운영에 도움을 주는 유르윈인지라 셸리 역시 부담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을 처리하는 유르윈의 앞에는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아이, 미르켈이 서 있었다. 그의 말똥한 눈이 셸리를 향했다.
생기로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도 많은 애가 어쩐 일로 이 시간에 깨어 있지.’
잠버릇이 고약해 잠시라도 누워 있으면 난리가 나는 머리카락도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예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유르윈과 대화를 하고 있던 미르켈은 계단을 내려오는 셸리에게 반갑게 다가갔다. 작은 짐 가방을 대신 들어 준 미르켈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질문했다.
“오늘 떠나시는 거죠? 떠나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떠나다니, 그런 거 아니야. 유르윈 님을 따라서 잠깐 여행을 다녀오는 거지.”
“아아, 그렇죠.”
보육원에 입소한 지 가장 오래된 아이였다. 보육원을 나갈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보육원에 머무르며 셸리의 일 처리를 도와주었다.
성인이 되고도 이렇다 할 휴식 없이 일만 하는 셸리에게 곧잘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예상하지 못한 미르켈의 발랄한 태도에 셸리는 눈가를 좁혔다.
예고도 없이 이런 일을 결정하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보육원은 제가 잘 챙길 테니 걱정 마시고 가세요.”
미르켈이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며 장담했다.
“혼자 할 수 있겠어? 방금 결정한 일이라 위임도 못 해 줬는데,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곧장 나한테 연락을…. 유르윈, 혹시 크루즈선에 연락 장치가 있을까요?”
미르켈에게 말을 건네던 셸리는 자신들을 지켜보는 유르윈에게 질문했다.
“음, 있긴 있지.”
그는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급한 일이 있다면 연락해.”
유르윈의 우유부단한 말투가 낯설어서 미간을 모으는 셸리의 앞에서 미르켈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전부 할 줄 알아요.”
셸리의 시선이 다시 미르켈에게 옮겨 갔다.
그가 웃으며 어서 떠나라는 듯이 셸리의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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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선에 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셸리는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바뀌는 상황을 관망했다.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 새벽임에도 크루즈선의 시운전이 시작되는 순간을 보기 위해 나온 인파가 상당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자 크루즈선의 전등이 하나씩 점등되기 시작한다.
“와아.”
“예쁘다.”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두른 아이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폴폴 피어올랐다. 부모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들이 크루즈선의 불빛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민다.
몇몇 아이들이 난리 통에 부모의 손을 놓쳤는지,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란이 함께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입김이 파도의 포말처럼 보인다. 예쁘다는 감탄과 아이를 부르는 소음 사이에서 셸리는 홀로 열의 없이 서 있었다.
건조한 시선이 크루즈선에 닿았다.
셸리는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학습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내뱉고 있는 감탄사의 의미도 와닿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내뱉는 나직한 탄식, 눈이 마주치면 올라가는 입꼬리, 타인과 단단히 맞잡은 손이 보이면.
그 때문에, 셸리는 이따금 외로워졌다.
자신과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르윈 역시 결국 타인이다. 그는 영원히 셸리가 보는 시야에 무엇이 담기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다정한 표정과 말투는 좋아했다. 오르고 싶지 않은 크루즈선에 타기로 결정할 만큼은, 그가 5년 전에 준 낡은 외투를 여전히 입고 싶을 만큼은.
옷소매의 보풀을 손가락으로 굴리던 셸리는 감흥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직 점등되지 않은 크루즈선의 어두운 선체에 눈이 닿은 순간에, 셸리는 짧은 환상을 목도했다.
“…아.”
셸리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둠 속에 있는 듯, 깜깜한 시야 앞에 아른거리는 사람의 형체들이 보였다.
익숙한 형체를 확인한 셸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그녀의 눈에 비치던 형체 역시 손을 들어 눈으로 가져간다.
움직임을 멈춘 셸리의 어깨를 어느새 다가온 유르윈이 잡았다.
“왜 그래, 셸리. 눈에 뭐 들어갔어? 어디 봐.”
“아니, 아니에요. 유르윈 님.”
“눈은 다치면 큰일 나. 이리 와, 확인해 보게. 먼지라도 들어간 건가?”
기묘한 시야가 그녀의 시야를 온통 뒤덮은 상태였다. 유르윈의 목소리로 그가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는 걸 알아차린 셸리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셸리.”
빛 아래로 셸리를 끌어당긴 유르윈은 셸리의 눈동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네 눈, 지금 초점이 안 잡히잖아. 왜 이래? 날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아?”
“아뇨, 잠시만.”
유르윈은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셸리는 자신의 눈가를 더듬는 그의 손가락을 잡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까맣게 변해야 할 시야가 환하다.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치는 장면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걸까 생각하며 눈을 뜨지 않고 있자 유르윈이 잡힌 손을 빼내고 다시 눈가를 만져 왔다.
다행스럽게도 이내 셸리의 감은 눈 안으로 어둠이 돌아왔다. 셸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유르윈에게 이끌려 두 사람은 밝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눈동자를 굴렸다.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것을 확인한 셸리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어지러워서요.”
“어지러워서?”
“네.”
유르윈은 삐딱하게 되물었다. 의심스러운 어조였지만, 셸리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풍경에 대해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 어머니가 당부한 것이기도 하고, 그녀 역시도 타인의 기묘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기도 해서였다.
유르윈은 미심쩍은 듯이 짧은 비음을 흘렸지만, 곧 납득했는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바로 세웠다. 눈가에 닿은 손가락도 멀어졌다.
눈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유르윈이 멀어지자 셸리는 다시 크루즈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루즈선은 어느새 모든 구역의 점등이 완료되어 있었다. 어두운 구역은 보이지 않았고, 잠깐 보았던 짧은 환상 역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셸리는 유르윈의 손이 닿았던 뺨과 눈가를 느리게 더듬었다.
곧 돌아온 유르윈이 평소처럼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갈 시간이라 데리러 왔어.”
느리게 걸어가는 유르윈의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걷던 셸리는 자신의 눈에 잠시 비쳤던 환상을 떠올렸다.
환상 속에서 본 사람들은 자신과 유르윈이었다.
눈을 비비는 셸리와 그녀의 뒤로 다가오던 유르윈.
멀리에서, 아니. 어두운 크루즈선 선내에서 밖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잠시 공유한 것이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셸리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셸리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민했다.
방금 나는 누구의 시선을 훔쳐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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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먼저 오르라고요?”
“진수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나랑 다른 사람들은 조금 늦게 오를 거야. 너는 먼저 올라가 있어.”
유르윈에게 이끌려 크루즈선 앞에 도착한 셸리는 눈을 깜빡이며 질문했다. 셸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높은 계단을 보며 의문을 삼켰다.
계단은 아무도 오르지 않은 듯이 깨끗했다.
“진수식은 이미 마친 줄 알았는데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건 익숙한 일이다. 모두가 셸리에게 그것을 기대했으니까.
“맞아, 진짜는 오래전에 끝냈지. 뭐, 이번 건 보여 주기식. 이런 거 필요한 거 알잖아?”
“그럼 저도 진수식이 끝난 뒤에….”
“그때는 많이 바빠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유르윈은 평이한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셸리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촉박한 모양이었다. 그의 모양 좋은 손가락이 손목시계의 유리 면에 연신 닿는 것을 본 셸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급한 것 같은데 어서 가 봐요.”
“미안, 선내 안내도는 여기. A구역으로 가 있으면 돼. 너라면 안내도는 없어도 되겠지만.”
유르윈은 눈가를 찡그리고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있는 게 편해요. 고마워요.”
“지도를 보다가 오히려 길을 잃는 건 아니겠지?”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꺼낸 안내도를 셸리에게 건네주며 가벼운 어조로 덧붙이며 재차 웃었다.
어릴 때부터 셸리를 보아 온 유르윈은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향할 때 결코 길을 잃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길잡이가 주어지면 더욱 길을 헤매고는 했다.
자신이 지도나 설계도를 잘 읽지 못하는 걸 인지하고 있던 셸리는 다소 거친 태도로 유르윈의 손에서 안내도를 채어 갔다.
“안 그래요.”
“그럼 난 가 볼게. 나중에 보자.”
인사를 마친 유르윈은 조금 심통이 난 듯한 셸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간다면서, 안 가고 왜 그렇게 봐요?”
“아, 올라가는 거 보고 가야지.”
셸리는 자신이 배에 오르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다정한 사람이다.
“지금 올라갈게요.”
“…셸리.”
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유르윈은 잠긴 목소리로 셸리를 멈춰 세웠다. 이미 계단에 발을 디딘 셸리는 난간을 잡은 채 유르윈을 돌아보았다.
강한 바닷바람에 젖혀진 셸리의 두꺼운 외투 아래로, 그가 선물했던 오래된 외투가 얼핏 보인다.
그것을 보는 유르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르윈의 눈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셸리는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몸을 돌렸다.
“무슨 당부할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유르윈 님? 선내에 있는 건 함부로 만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정도 예의는 갖추고 있는걸요.”
셸리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가 자신을 멈춰 세운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묻는 대신 말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셸리는 몸에 밴 습관대로, 자신의 시야가 가리키는 것을 선택했다.
유르윈은 옷깃을 만지는 셸리의 손길을 좇다가 그린 듯이 웃으며 말했다.
“엉망으로 만들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텐데 뭘. 편하게 있어. 금방 따라갈게.”
“네.”
조금 전에 보였던 미약한 고뇌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도 모를 만큼 작은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간을 쥐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셸리는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안내를 따라가면 끝에는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목적지가 자신이 바라는 곳이 아닐까 두려울 뿐이다.
‘이 길이 정말 맞나요? 제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 걸까요.’
셸리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물음을 마음에 담았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셸리가 받은 것은 언제나 눈을 가리는 안내뿐이었으니.
.*. *. *. *. *. *.
“겨우 시운전인데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을 하나?”
높은 계단을 올라 선내로 들어간 셸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가 들어선 문 너머에는 정원처럼 꾸며진 작은 아치형의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아치형의 통로를 장식한 꽃들은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인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통로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아직 꽃을 틔우지 않은 식물이 셸리의 눈에는 가장 인상적으로 비쳤다. 커다란 꽃봉오리는 다른 꽃들과 달리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다.
“나중에 유르윈 님한테 무슨 꽃인지 물어봐야지.”
어떤 형태로 피어날지, 궁금해지는 꽃이다. 연한 향기에 셸리는 코끝을 문지르며 통로를 지났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되레 답답하게 느껴지는 통로를 지나고 난 뒤에야 크루즈선의 내부가 제대로 보였다.
다른 배들과는 달리 중앙이 훤히 뚫린 구조가 신기하다. 셸리는 높은 천장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
밖에서 진수식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내부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셸리는 남자와 마주친 눈을 급히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안에 누가 있는지 언질을 해 줬다면 좋았을걸.
유르윈을 향한 작은 원망이 피어올랐다.
‘누구지?’
얼핏 보아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밝은 전등 아래임에도 검은 머리카락에는 빛 한 점 담기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 적절한 예의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셸리는 머리를 굴리며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적어도 3층 정도의 위치는 되어 보였으니, 셸리 자신이 있는 곳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방금 한 행동이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그가 혹여나 예법에 예민한 귀족이라도 트집을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셸리는 자신이 내뱉는 호흡의 수를 되뇌었다. 열두 번의 호흡을 내뱉고, 셸리는 사위가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그러고는 자신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형형한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광택 없이 붉은 눈동자였다.
언제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바로 귀족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위압감은,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더욱 위협적이었다.
유독 새까만 머리카락과 귀족치고는 다소 어두운 피부색.
공포나 그림자를 형상화한 것 같은 불길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그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셸리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움츠러든 어깨, 공손히 모은 두 손과 볼품없는 옷차림을 샅샅이 훑는 눈에 일었던 작은 흥미가 그녀를 살필수록 천천히 꺼져 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서 흥미가 꺼져 갈수록 셸리는 왜인지 몸이 달았다. 저 시선이 자신에게서 떠나면 안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크루즈선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시선을 붙잡아야 한다는 이해 못 할 예감만이 셸리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셸리가 남자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할 때, 남자가 지루함이 가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재밌는 게 왔나 했더니. 이것도 다를 게 없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의 어조는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방만하고, 평민이라고 하기에는 오만했다.
귀족의 표본과 같은 유르윈을 10여 년간 보아 온 셸리다. 그가 귀족이라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지금까지 귀족들을 상대하면서 셸리가 그들의 흥미를 끄는 방식은 한 가지였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이 순간.
셸리는 그의 관심을 단숨에 자신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을 알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아차린 사실이다.
단 한마디만 꺼내면 된다.
“계속 날 보고 있었죠.”
흥미를 잃고 숙였던 허리를 펴던 남자가 다시 아래로 눈동자를 굴렸다. 빛 하나 투과되지 않는 것처럼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에 금방 사그라질 듯 연약한 흥미가 맴도는 것이 보였다.
그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시간 기다렸다.
자신의 흥미를 끌 말을 더 해 보라는 듯이. 거만하게.
“불 꺼진 선실에서 저를 보고 있던 거, 당신이잖아요.”
무료하던 그의 얼굴에 드디어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흥미를 가진 건 확실했다.
그가 얼굴 가득 웃음을 건 채로 말했다.
“너, 숨는 건 잘해?”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장난스러워 보인다. 셸리는 자신의 발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고개를 젓는 선택지는 셸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셸리는 꼬마 유령처럼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
“셸리, 셸리!”
“하아….”
셸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식은땀이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셸리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유르윈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가씨, 괜찮은 거예요? 배에 의사는 없는데 많이 아픈 거면 어쩌나.”
“약제 전문가는 있는데….”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셸리에게 닿아 있었다. 셸리는 자신의 등을 받쳐 주는 유르윈의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잠시 기절했던 동안 진수식이 끝난 모양인지, 남자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선내가 떠들썩했다.
유르윈을 제외하면 온통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셸리는 그 안에서 자신이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찾아 눈을 굴렸다.
“셸리,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기운을 가진 남자였다. 단숨에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셸리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유르윈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그 남자분은 누구예요? 제가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화가 나셨을 수도 있으니 사죄를 드려야 할 텐데….”
“남자?”
유르윈이 눈가를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배 안에 너 말고 누가 있었어?”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네가 타기 전에 배에 오른 사람은 없어. 전력 시설도 외부에서 작동시켰으니까 인부도 없었을 테고.”
“분명히, 있었는데요.”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몸을 일으킨 유르윈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셸리의 말에 배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누구?”
“우리 말고 먼저 탄 사람이 있었다고?”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진수식의 의미가….”
“쉿!”
“헉.”
누군가를 날카롭게 질책하는 숨소리, 아직 정신이 제대로 깨어나지 않아 이마를 매만지던 셸리는 그 예민한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남자에게 셸리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시선이 박혀 있었다. 몹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셸리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뒷걸음질 치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선명한 공포가 뇌리에 남았다. 무엇에 대한 공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명백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왜? 방금 한 말 때문에 겁에 질린 건가? 뭐라고 했더라.’
다른 사람이 타 있었다면, 진수식에 의미가 있냐고….
“셸리,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기억하냐고 묻고 있잖아.”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셸리의 정신을 다시 돌려놓은 것은 유르윈이었다. 그는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어. 크루즈선은 이미 출발했으니까, 어서 찾아내야 해.”
셸리는 그제야 배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한 사람으로는 안 보였어요, 귀족 같았는데.”
독특한 능력을 가진 탓에 귀족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셸리가 보기에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오만해 보이는 사내였다.
하지만 위압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귀족?”
“네, 무척 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였어요, 키는 유르윈 님보다 컸던 것 같고, 조금 진한 피부색에….”
“…아.”
셸리가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손짓을 곁들여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던 유르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주변에 포진해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옅은 희열이 떠올랐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 불쑥 물었다. 정중한 어조였다.
셸리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공기가 선내를 떠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얼굴, 반들거리는 텅 빈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보였다.
“너, 숨는 건 잘해?”
그가 자신에게 건넸던 물음이 떠올랐다. 그것을 말할까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었다.
“아니요.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그렇군요….”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알려 주세요.”
“제게도!”
“역시 그분의 눈을 받은 분이라, 그동안 들였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지만 그들은 기쁜 얼굴로 셸리에게 앞다투어 다가왔다.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휘둘리던 셸리의 몸을 곁에 있던 유르윈이 부축해 주었다.
“첫날이라 다들 흥분하신 것 같군요.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셸리도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유르윈의 제지에 그녀를 향해 뻗어지던 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아쉬운 얼굴로 손을 거두고 멀어졌다. 유르윈이 한숨을 돌리며 셸리의 손을 이끌었다.
“자, 셸리. 방으로 안내해 줄게.”
.*. *. *. *. *. *.
‘이상해.’
유르윈이 안내해 준 방에 도착한 셸리는 우선 잠금장치부터 꼼꼼하게 걸었다. 손잡이를 움직여 보고 제대로 잠겼다는 걸 확인한 뒤에 숨을 골랐다.
방에 난 창문으로 까만 바다가 보였다. 해가 제대로 뜨지 않아 어두운 바다가. 보육원의 옥상에서 보던 바다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창문에 이마를 대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셸리는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을 떠올렸다.
‘나한테 바라는 게 많아 보였어.’
어릴 적부터 남의 눈치를 보고 자란 셸리는 타인의 미묘한 심리를 쉽게 파악했다.
독특한 능력 때문에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는 자들의 시선은 열망에 차 있었다.
‘내가 배에 오르기로 결정한 건 겨우 몇 시간 전이었는데. 다들 내가 배에 탈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창문에 닿아 있는 이마가 언 듯이 차가워질수록 머리는 명료해졌다.
유르윈을 제외한 사람들이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점도 이상했다.
셸리가 사는 섬은 아주 작았고, 그 때문에 주민 대부분의 얼굴이 익숙했다. 크루즈선 시운전에 참가하기로 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셸리는 꽤 알고 있는 편이었다.
‘타기로 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유르윈 님만 빼고.’
그리고 셸리가 기묘함을 느낀 또 한 가지의 이유.
‘옷차림.’
어릴 적에 어머니가 한 해에 한 번. 셸리의 생일이 될 때마다 입히고 어머니 자신도 입었던 옷이 있다.
셸리의 생일이 되는 날 자정,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연 어머니는 먼 바다를 향해 몇 시간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는 어머니를 따라 셸리 역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죽은 듯이 숨을 내뱉어야 했다.
그 기묘한 행위는 동이 트기 전에 끝났다.
무엇을 위한 의식인지 설명도 없이 어머니는 밤사이 입었던 옷을 개어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래서 셸리는 자신의 생일이 싫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입히는 옷도. 누구를 향한 숭배인지도 모르고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어머니가 입었던 옷이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
다들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어머니가 해일에 휘말려 실종된 이후로 생일마다 입던 옷은 사라졌지만, 셸리는 그 옷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했다.
셸리에게 입혔던 옷과는 다른 부분이 있지만, 어머니가 입었던 것과 완전히 같은 옷이다. 옷깃을 여미는 방식까지.
“그분을 모시던 신자는 모두 죽었으니까.”
어머니는 셸리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럼 어머니. 당신과 같은 신자의 옷을 입고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질문을 건네고 싶은 사람이 실종되었기에 돌아오는 답은 없다. 셸리는 홀로 침잠해 고민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셸리는 홀로 고민하는 것이 익숙했다.
유르윈에게 이끌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지나쳤던 사람들도 모두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유르윈과 셸리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그들은 시운전을 위해 탑승한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셸리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어두운 바다를 보며 탄식을 뱉었다.
바른길을 고르는 셸리.
헤매지 않는 셸리.
그 명칭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릴 어떠한 방법도 눈에 비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건 알겠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확실했다.
그런데 이 위험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다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위험한 사람으로는 안 보였어요, 귀족 같았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셸리는 불에 덴 듯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남자가 눈가를 휘고 웃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셸리가 했던 말을 똑같이 읊으며 그가 셸리와 눈을 마주했다.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웃던 남자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맞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
침대에 앉은 남자를 본 셸리는 문을 확인했다. 자신이 닫아 둔 문은 그대로였다. 그 문 외에 사람이 들어올 만한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을 그렇게 쓰면 안 되지. 혹시 쓰는 법을 모르는 거야? 제대로 쓰고 있는 것 같더니.”
서늘하게 생긴 남자는 꽤 상냥한 목소리로 웃으며 타박했다.
웃고 있는데도 무료하게 보이는 남자를 돌아보며, 셸리는 그의 주변에서 ‘바른길’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건 저 남자에게서 찾아야 했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셸리는 긴장으로 틀어진 호흡을 골랐다.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 지금껏 긴장이라는 걸 좀처럼 해 본 적 없던 몸이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이고 긴장으로 굳었다.
저 기묘한 남자 탓이다.
그녀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며 남자에게 도전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가 자신에게 미묘한 흥미를 보이고 있다면 그걸 놓쳐선 안 되었다.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데요?”
흐음, 무언가를 가늠하듯 무감정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는 제일 마음에 들긴 해.”
남자는 셸리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과장된 몸짓으로 고민하는 척을 한다.
남자의 행동에는 조금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본 행동을 상황에 따라 기계적으로 출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눈을 계속 넘겨줄 만큼 흥미로운 건 아니란 말이지.”
건조한 시선이 셸리의 얼굴을 훑었다.
감정이 비치지 않는 그의 시선에, 어릴 적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너진 신의 잔재가 네게 깃들었단다.”
어머니는 내가 지닌 능력이 신의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신이 다시 그 눈을 돌려받으러 올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설마 그게 진짜일 줄이야.
“우리는 늘 그분을 위한 연회를 열었단다.”
이 남자는 어머니가 말했던 그 존재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이 크루즈선의 건조 목적도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그 연회를 열게 될 거야. 너도 그곳에 있겠지.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에.”
배의 이름은 도시를 휩쓴 해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해일의 이름은 사라진 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러니 남자의 이름 역시 그와 같다.
“티리안.”
이 배는 그를 위한 연회를 여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