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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05화 (에필로그 2화) (205/206)

205화(에필로그 2화)

<또, 다시 겨울.>

“회의는 여기까지 할까요?”

몰리 부인이 부드럽게 서류철을 덮었다.

이전 코바흐전보다도 훨씬 열악해진 전장 병원 상황에 병원장실은 더욱 협소해졌다. 그 탓에 다닥다닥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앉아있는 의료진들의 조밀한 모양새는 누군가에겐 꽤 괜찮은 가림막이 된 터였다.

“불청객도 있으니까?”

물론, 그게 다이애나 몰리 부인에게 통할 리는 없었지만.

“딕시 콜먼 양이 어떻게 여기에, 그것도 이 병원장실 안에 있는 거죠?”

“그게, 전 간호사로서 책임감이랄까요….”

“여긴 현 간호사들만 있는 곳인데?”

“그렇다면, 제국 병원의 후원자로서 격려차….”

“오늘이 내가 모르는 후원자 접견 날도 아닐 테고?”

간호 학교 시절부터 말괄량이들이라면 이골이 난 부인은 살뜰한 물음표만으로도 손쉽게 천하의 딕시 콜먼을 무장해제 시켰다.

“딕시 콜먼 양을 이곳에 들인 사람은 지금 당장 자백하세요. 적어도 자백하면, 근신은 면해줄 테니.”

근엄한 부인의 목소리에 쥐 죽은 듯이 베스와 아이네스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딕시는 슬그머니 목을 뒤로 뺐다. 그런다고 숨겨질 리가 만무하건만, 적어도 민망한 척이라도 해야 덜 혼나지 않겠는가.

“공범은….”

금테 안경 속의 눈동자가 힐끗 베스를 먼저 향했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남은 사람은 뻔하지.

“아이네스. 나 좀 보고 가요. 다른 사람들은 이만, 해산.”

한숨을 푹 내쉰 아이네스가 옆자리에 앉은 딕시를 샐쭉이 흘겨봤다. 뭔지는 몰라도, 저들끼리 네가 하라며 아웅다웅하는 꼴을 얼마간 지켜보던 부인이 한껏 지친 표정으로 안경을 벗으려는 찰나. 카랑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굴러떨어졌다.

“저…! 안건이 있는데요. 다들 기운이 번쩍 날 만한 안건이요.”

순식간에 저를 향하는 수십 개의 눈동자에 힘을 얻은 딕시는 슬쩍 고개를 다시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미 수수한 간호복들 사이에 화려한 녹색 코트는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보다도 이상스런 열기로 달아오른 주홍색 눈동자가 더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곧 건국기념일인데, 이렇게 ‘칙칙’하고 ‘쿰쿰’하게 보내실 생각이신가요?”

건국기념일이라는 말에 다소 심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이른 아침의 분위기가 살며시 들뜨기 시작했다. 반응을 눈치챈 동그란 광대가 방긋 솟아올랐다. 마치 쏘아 올리기 직전의 신호탄처럼.

“에이, 진짜…?”

위험신호였다.

“존경하는 몰리 공작부인께서 이 젊은이들을, 이리 삭막하게 두실까요?”

딕시가 ‘이 젊은이들’에 한 팔을, ‘이리 삭막하게’에 나머지 팔을 활짝 벌리자 양옆에 앉은 애꿎은 그녀의 친구들만 몸을 사리느라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때만큼은 깜찍하리만치 영악한 그녀는 어느 부분에서 몰리 부인이 약해지는지를 잘 알았다. 어느새 되찾은 자신감은 덤이었다.

딕시, 제발.

부인은 미간을 짚었다.

“다들 종전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으시죠? 비록 이곳일지언정?”

몰리 부인은 진즉 깨달았어야 했다. 그녀가 물음표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이라면, 딕시 콜먼은 물음표를 보기 좋은 덫처럼 살랑거리는 이라는 걸.

* * *

그렇게 준비된 간소한 건국기념일 파티였다. 대단한 건 없었다. 그나마 빈 호텔을 빌려 쓴 예전 전장 병원에 비하면, 남루한 삼 층짜리 여관에 대단한 걸 기대하긴 어려웠으니까.

그저 창문에 새 커튼을 좀 덧대고, 복도 벽과 창가에 램프를 더 달아 얼추 샹들리에 흉내라도 내보려는 정도가 최대였음에도, 딕시는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재차 강조했었다. 부지런히 단장을 이어가다, 드디어 건국기념일의 전야제를 앞둔 해질녘쯤엔 몰리 부인마저도 “중요한 건?”이라 물으면, 곧바로 “마음”이라고 할 만큼 준비를 마쳐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터였다.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전야제의 설렘에 여관 곳곳이 들뜰 무렵, 웬 남자를 태운 차 한 대가 로비 앞에서 멈추었다.

“윽!”

트렁크에서 끙끙거리며 전축을 들고 들어온 남자는 로비 입구 협탁 위에 시커먼 그것을 턱, 내려놓았다. 거친 숨을 들썩이며 땀방울을 훔쳐내는 남자는 군복 차림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직 주근깨가 가시지 않은 얼굴엔 묘하게 어린 기색까지 비쳤다.

“수고했어, 레오!”

딕시의 시선은 전축에 고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오라는 청년은 연신 그녀를 힐끗거렸다. 이를 의뭉스럽게 지켜보는 이는 꼿꼿한 경관처럼 벽에 붙어선 아이네스였다. 그리고, 덩달아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일이었고.

“분명 같은 얼굴이야.”

아이네스는 기억을 곱씹었다. 딕시가 코바흐전 이후 외국을 돌다 귀국하던 그날의 선박, 한밤중에 굳이 딕시에게 영양제를 맞고 싶다고 제국 병원을 찾아온 야간학교 학생, 그리고 저 전축까지. 아, 그때 베스가 코바흐전의 이병 아니냐고 물었었지. 그럼, 이번 브리틴전엔 참전 안 한 건가.

“설마 성인도 안 된 건 아니겠지…!”

팔짱을 낀 아이네스는 슬며시 제 친구에게 다가가,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딕시, 우리 얘기할 게 많지 않니. 베스가 통신병으로 온 것부터, 아직도 문가에서 쭈뼛거리는 저기 저분까지?”

약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근사근한 음성에 딕시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니, 어?! 베스! 일은 끝났어? 어유, 어떡해. 얼굴 상처만 아니면 내가 화장도 해줄 텐데.”

어울리지 않게 진땀을 빼던 딕시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베스의 손을 능청스럽게 잡아당겼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가 눈을 깜빡이자, 딕시는 아이네스가 무슨 말이라도 할세라 얼른 전축부터 틀었다.

곧 모두를 들뜨게 할 만한 익숙한 선율이 작은 여관의 설렘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돌아온 건국기념일의 전야제였다.

“그래서 제가 ‘이런 청혼은 승낙할 수 없습니다!’ 이러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죠.”

발그스름한 얼굴로 목청을 높이는 이는 발렌티나였다. 그래, 그 아르젠의 공주 발렌티나 캐리엇.

‘파티라고 해서요.’

양손에 야무지게 술병을 들고 들어온 발렌티나는 어색하게 미소 짓다가, 결국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만 이 꼴이네요?’

그녀는 종전 이후, 아더와 정략 회의를 이어가다 인사치레로 초대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기회가 또 흔치 않잖아요.’라고 첨언 또한 덧붙였다. 대체 어디서 구해왔는지 철 지난 드레스 한 벌을 꾸역꾸역 입고 온 아르젠의 공주는 저 빼곤 모두 허름한 간호복, 아니면 군복인 걸 보고 배를 잡고 쓰러졌다.

“아무리 그때 당시 아르젠의 세력이 약했다지만, 제 아버지뻘 되는 왕자의 다섯 번째 부인은 심하지 않나요? 심지어 저는 그때 데뷔탕트도 안 했었다고요.”

“미친 거죠.”

“끔찍한 일이에요.”

딕시가 거들자, 아이네스 또한 비슷하게 불그스름한 뺨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임도 없는 매트리스 위에 모여앉은 네 명의 아가씨들은 각자 샴페인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잔이 가득 채워진 건 베스뿐이었다. 고로, 유일하게 멀쩡한 이도 베스 한 명뿐이란 소리였다. 연회장도, 무도회도 존재치 않는 파티였지만 부상병들이 드러누운 매트리스 한편을 의자 삼아 삼삼오오 보내는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복도에 소리 없이 서 있던 몰리 부인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파티라는 명목하에 잊었던 웃음을 지어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긴 겨울을 견뎌낼 작은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비록 말 안 듣는 제자의 등쌀에 떠밀린 파티이기는 했으나, 후회치는 않았으니.

“두 분의 연인은 이미 제가 알고 있고… 딕시 양은요? 엇!”

그중에서도 가장 파티를 즐기는듯한 발렌티나는 쉼 없이 재잘거리다, 복도 너머의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다른 아가씨들이 돌아봤을 땐, 텅 빈 복도는 노란 등불이 남긴 그림자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공주님, 저는….”

“아, 뭔가 있구나, 그렇죠? 왜요? 비밀이에요?”

발렌티나는 부지런히 독촉을 날리면서도, 눈동자는 계속해서 여관 복도며 창밖 어딘가를 힐끔거렸다. 기다리는 이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비죽 내려오던 입매가 무언가를 보곤 돌연 활짝 벌어졌다.

“자, 잠시만 실례를.”

성격 급한 공주는 벌써 반쯤 비워낸 술병을 서둘러 손에 쥐고 후문으로 뛰쳐나갔다. 너울거리는 금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여관 뜰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곧 목표물을 발견하곤 주저 없이 몸을 틀었다. 그래도 여인으로서 약간의 체면은 지키기 위해 구겨진 치맛단을 퍽퍽 치며 걸어가자, 앙상한 나무 그늘에 기대앉아 있던 아더의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돌아갔다.

“아, 공주님.”

그의 손끝에서 점멸하던 붉은 불빛이 이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전 시가 상관없어요. 하도 아르젠군 틈바구니에 끼여 살다시피 해서.”

자연스레 그의 옆자리를 꿰찬 발렌티나는 대뜸 술병을 내밀었다.

“종전 기념.”

묵묵히 술병을 받아 든 아더가 피식 웃었다.

“종전 기념.”

발렌티나의 말을 따라 하며 한 모금을 들이켜자, 그의 옆모습에 티 없는 시선이 꽂혔다.

“왜 나오셨습니까. 날이 추운걸요.”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치렁치렁한 금발이 눈앞을 어른거릴 때마다 아더는 속이 탔다. 어쩔 수 없었다. 라프넬보다 엷은 금발이고, 그보다 훨씬 옅은 푸른 눈동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 속에서 자꾸만 마지막 라프넬의 모습을 상상했으니까.

위선적인 새끼. 이제야.

신랄한 조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데베르 공작님의 전언을 들었어요. 라프넬 공주님께서 칼론에게 납치당하셨다고.”

사실과 다른 소식에 아더는 저도 모르게 그토록 피하던 발렌티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좀 전의 까불거리던 모습과 달리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처 듣지 못하셨나 봐요. 게일 백작님을 통해 전하셨어요. 당연히 폐하께 제일 먼저 말씀드린 줄 알았는데…. 데베르 공작님께서 ‘실패’ 작전 당시 칼론 그 새끼, 앗. 죄송해요. 칼론이 공주님을 죽이는 걸 목격하셨다고 전군에게 알리셨어요….”

“하.”

아더는 갑자기 올라오는 술기운에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작 샴페인 한 모금에 취할 리가 없는데, 왜 이리도 목울대는 뜨끈거리는지. 하릴없이 달아오르는 눈가를 감추기 위해 무릎 위에 걸친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자, 낯선 온기가 굽어진 등에 살며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착각, 이겠지.

하지만 그 온기는 네 몫이라고 말하듯 다시금 찾아온 온기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담담한 손길은 그렇게 천천히, 누구도 위로해 준 적 없는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무슨….”

“아르젠은 넥서스보다 봄이 빨리 찾아와요. 큰 차이는 아니지만, 한 달 정도 꽃봉오리가 일찍 움트거든요. 모르셨죠?”

고개를 든 아더는 그제야 발렌티나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그저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닌. 찬찬히. 뜯어 보듯이.

푸른 하늘에 우유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은 눈동자였다. 그 속엔 그녀의 말마따나 때 이른 아르젠의 꽃봉오리를 닮은 연한 녹빛도 얼핏 비치고 있었고.

“오세요. 아르젠으로. 그땐 저도 지금처럼 엉망인 꼴이 아니라-”

“그래요.”

이 지루한 겨울이 대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고개를 튼 아더는 거칠한 나무에 뒤통수를 기댔다. 숨을 뱉을 때마다 허연 연기가 펄펄 올라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금방 사라져야 할 연기가 끈질기게도 눈가에 들러붙었다.

“봄이 일찍 도착한다니. 아르젠이 그렇게 낭만적인 곳인 줄은 몰랐네요.”

라프넬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아르젠을 가고 싶어 한 걸까. 너도 나처럼 이 겨울이 지겨워서?

“낭만….”

제가 아닌 아르젠을 향한 칭찬이었지만, 괜스레 쑥스러워진 발렌티나는 공연히 하늘을 올려보다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눈이다! 눈이에요!”

제 소매를 흔드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고개를 젖힌 아더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별다른 것 없는 눈이었다. 넌더리 나게 봐온, 그저 또다시 찾아온 겨울을 알리는 권태로운 눈.

“아르젠에서 제일 먼저 피는 꽃이 뭡니까.”

“네?”

눈송이에 젖어 가닥 진 발렌티나의 속눈썹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약간의 놀라움이 깃든 눈동자에도 내리는 눈이 담겼다. 아더는 그 모습이 꼭, 호수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닮았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제일 먼저 피는 꽃이요. 그걸 보러 갈 테니까.”

“매그놀리아요.”

매그놀리아.

아더는 낯선 이름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그놀리아. 매그놀리아.

“어… 그것 말고도 예쁜 꽃들이 많아요. 나무들도요.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아버지가 왕궁 후원에 분홍색 튤립 정원을 만드셨는데, 혹시 궁금하시면.”

재잘거리며 이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더는 쏟아지는 흰 눈을 바라봤다. 어느새 시야를 가리던 질긴 연기는 사라진 뒤였다.

만약, 한 번도 보지 못한 매그놀리아 꽃잎이 떨어진다면 저런 꽃눈을 내리지 않을까. 그런 우스운 상상을 해볼 만큼 예쁘게도 설화가 세상을 뒤덮었다.

또다시 온 겨울이었다.

또,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아직도 잠들지 않고 전야제를 즐기는 병사들이 있는지, 계단을 타고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사이로 잔잔히 깔린 가사 없는 음악을 배경 삼아, 하얀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선율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에서도 데베르는 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그랬다.

“다 됐어요.”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그에게 눈길을 주기는커녕, 군대장의 상처 소독이라는 제 의무에만 집중해 있던 눈동자가 드디어 다른 곳을 향했지만, 그곳은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 있는 데베르가 아닌, 창밖의 날리는 눈송이였다.

새로운 것도 없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여자를 향해 다소 불손한 시선이 꽂혔다.

“기껏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

베스는 잠잠히 오늘 밤의 계획을 떠올렸다.

잠깐만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아이네스에게 돌아가서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끝을 휘감는 남자의 손장난은 당장은 순수했으나, 언제든 뜻을 바꾸리란 건, 요 며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체득했다.

“베스.”

아마 마음이 많이 다쳤을 테니 다독여 주기도 하고, 취한 발렌티나 공주님께 따뜻한 물 한 잔도 가져다 드려야겠어. 그리고.

“베스 클리프.”

그리고 또 뭘 해야 하더라….

“클리프 부인.”

결국 채근을 견디지 못한 베스가 비스듬히 그를 노려보자, 남자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자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웃음 속에서 미묘하게 서늘한 향이 풍겼다. 바짝 마른 겨울 잎사귀 향 같기도 했다. 당장 맡아지는 건 아릿한 소독약 냄새뿐인데도, 적어도 베스에겐 그랬다.

“올라와.”

방금 새로 감아놓은 뱃가죽의 붕대를 툭툭 치는 뻔뻔한 손길에 베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을 살살 휘감던 남자의 손가락은 홈이 팬 그녀의 미간을 가볍게 두드리곤,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향해 올라갔다. 애초에 손끝의 종착지는 처음부터 눈에 거슬린 그 상처였다.

“상처가 왜 이렇게 많지.”

혼잣말인 듯 물음인 듯 애매한 어조에 베스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단단한 손등이 작은 턱을 받쳐 들었다. 고개 들어, 베스. 습관 같은 명령과 달리, 매끈한 반창고의 가장자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흉터가 남을까.”

그가 반쯤 눈을 내리깔자, 잔뜩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던 베스는 마주친 시선에 지레 놀라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젠 비키라는 뜻을 담아 그를 밀었지만, 그는 밀려날 생각이 없었다.

“응? 알려줘야지.”

“흉터가 남으면 싫나요?”

데베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쪽만 치켜 올라간 눈썹에선 희미하지만, 짜증스러운 기색마저 스쳤다. 베스는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얼굴에 흉터가 남으면… 예쁘지 않을까 봐?”

‘예쁘지 않을까 봐’라니. 기어코 제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속마음에 베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다고 이미 나가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얼굴 곳곳에 남겨진 상처들을 보고 기함을 한 누군가가, ‘공작님이 보시고 기겁 안 하셨어?’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옆에 있던 딕시가 넌 상처가 있어도 예쁘다며 두둔해주었지만, 눈치 없는 상대는 ‘얼굴에 흉 있는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라고 쐐기를 박았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담아둔 걱정은 결국엔 이 한겨울에도 싹을 틔워냈다.

그의 부답이 길어질수록 베스는 입술 끝을 잘근거렸다.

“그럴 리가.”

덧붙여진 그의 짤막한 헛숨이 하릴없이 이어질 것 같던 정적을 허무하게 깨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담긴 눈초리는 그의 시선을 아이처럼 쫓았다.

“감히, 내가.”

너를.

데베르는 맹랑한 걱정을 하느라 쥐어뜯긴 제 여자의 입술 언저리에 가볍게 입 맞췄다. 코끝에 닿는 말랑한 뺨의 감촉에 자연스레 아래가 달았다.

“흉터는 네가 아팠다는 뜻이니까. 네가 아픈 걸, 어떻게 내가 좋아하지?”

그는 이번엔 정말로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한 손은 흐릿한 멍 자국이 남은 눈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늘상 해대던 입맞춤도 정염이 실린 손길도 아니었건만, 베스는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쑥스러웠다.

“아.”

그 낯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공연한 탄식에도, 거짓을 의심하지 않고 얼굴을 살피는 남자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에 마음이 울렁였다.

“이상해요.”

“아프단 뜻이야?”

“그냥, 이상해서….”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

괜히 아픈 척을 해, 이 남자의 이런 표정을 계속 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라니.

“가, 가야겠어요.”

냉큼 일어나 달아나려는 베스의 손을 데베르는 여유롭게 붙잡았다. 어느덧 걱정은 무슨, 제 아내를 놀려먹겠다는 의지로 점철된 사내는 무용한 실랑이에 기꺼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불편하게 앉아 있으니까 그렇지. 올라오라니까?”

그의 힘에 못 이겨 이미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베스가 더 올라갈 곳은 유일했다.

“상처가 찢어질 텐데.”

“참아야지, 뭐.”

일부러 무심하게 답하니, 돌아온 대답은 더 무감했다.

“별수 있겠어. 네가 올라온다는데.”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말투에 베스의 입술이 더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데베르는 알았다. 베스 제인스는 놀림당하는 걸 못내 부끄러워한다는 걸. 그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보는 걸 못 견디게 즐거워한다는 걸.

꽤나 잔악한 그만의 취미였다.

“지금 공작님, 꼭 코바흐전 때 같은 거 아세요?”

잔뜩 퉁명스런 목소리를 내는 여자의 목덜미에도 생채기가 나 있었다. 아플세라 손끝으로 스치듯이 매만지자, 까칠한 촉감이 전해졌다.

“너도 그때 같아. 맨날 심통만 나서 눈에 힘주는 게. 데베르, 데베르거릴 땐 언제고.”

“그건 아주 어릴 때잖아요.”

바짝 약이 올라 그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 속에 오직 한 사람만이 담겼다. 데베르는 그 기꺼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젠 그가 침묵을 지켜도 그 고요를 깰 목소리가 존재했다.

“기억도 별로 못하면서….”

베스는 데베르가 번트에서의 어린 나날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삶이 난도질당한 기억을 낱낱이 간직한 채 입을 다물어버린 자신과 달리, 그는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직접 토막 냄으로써 지금까지 견뎌왔다.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 남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순간까지도.

“말해주면 기억해 낼지도 몰라.”

“거짓말.”

어느새 아래층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데베르의 세상은 이 여자가 만들어내는 고저 없는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한때 그의 시선의 끝에 있던 여자는, 이젠 그를 시선의 끝에 놓고 있었다. 그 사실 속에서 피어나는 미미한 승리감과 도취감, 그리고 적절한 안도감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말해주면 기억해 낼게, 베스.”

데베르는 앉아 있는 여자의 팔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닳아빠진 자신은 서리는 잠기운 속에서도 이 여자를 시험한 것이었다.

고작 이까짓 미약한 손짓에도 넘어와 달라고. 그리하여 나를, 더는 애쓰지 않아도 네 품에 잠길 수 있게 해달라고.

부드러운 살결에 고개를 묻으며 손에 닿는 여자의 허리를 깊이 끌어안자, 마침내 그의 세상에 밤이 찾아왔다.

“정말.”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비로소. 기어이.

“네가 말해주면 기억할 수 있어.”

베스는 대답 대신, 한층 더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창밖의 눈송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얌전히 눈을 감은, 이젠 소년이라기엔 너무 커버린 남자를 따라 눈을 감았다.

“다음에요.”

지금은 긴 꿈을 꿀 것만 같으니까.

“다음에 말해줄게요.”

오로지 두 사람을 향한 따스한 기억들만이 사뿐히 내려앉는 고요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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