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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04화 (에필로그 1화) (204/206)

204화(에필로그 1화)

<전쟁이 끝나면, 나는 당신의 곁으로.>

데베르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마치 남인 듯 생경하게 바라봤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동여맨 붕대 사이로 핏물이 새나와 있었다. 그는 문득, 조금 전 약품 창고에서 제 상처를 발견하곤 기함을 하며 물러나던 베스의 얼굴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딴엔 엄하게 굴려던 건지, 잔뜩 입술을 말아 넣은 채 그를 병동 근처로 끌고 들어가는 손길이 제법 매서웠었다.

‘노려본다고 빨리 낫지는 않아.’

붕대를 감다 말고 미약한 수긍을 담아, 금세 유순해지던 눈망울도 기억 속에 선연했다.

“무르긴.”

셔츠를 걸치려 걸음을 돌리던 데베르는 침대 발치에 떨어진 천 조각 하나를 무심히 들어 올렸다.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검붉은 천 조각은 군데군데가 연한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곧 끊어질 듯한 어깨끈이 그의 굵은 손마디를 타고 덫처럼 걸려들었다.

이 방을 들어서던 순간부터 눈치챈 사실이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거무죽죽한 벽면의 나뭇결 사이사이, 해진 매트리스의 시트 틈틈이 배어든 베스의 향을 모르기엔 자신은 너무도 집착적인 사내였다.

그간의 일이 어떠했을지는 뻔했다. 이 미련하고, 성실한 여자는 정신이 들자마자 간호복을 챙겨입고 뛰쳐나왔을 것이고, 그 고집을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걸.

그때, 투박한 노크 소리가 데베르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지만, 굳게 닫혀있던 문은 그런 그의 의사 따윈 중요치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풀거리는 금발이었다.

“안에 멀쩡히 있으면, 들어오라고 허락이 떨어져야 할 거 아니야.”

“애초에 허락 맡으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데베르는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던 슬립을 반듯이 접어, 의자 위에 놓인 제 군복 아래로 감췄다.

“하여간에 성질머리하고는.”

흘깃 돌아본 아더는 여전히 군복 차림이었다. 미미하게 풍기는 흙냄새에 데베르는 막연히 그가 숲을 헤맸거나, 혹은 브리틴 왕궁의 잔해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물음은 제 것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방치된 여관이라 걱정했는데, 그리 나쁘진 않네.”

아더는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아 자그마한 여관방을 둘러봤다. 당분간 웨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데베르 클리프 군대장의 병실이자, 임시 숙소가 될 곳이었다.

“데베르, 아직 남은 일이 많더라. 코바흐가 평화 협정 깬 보상도 받아내야 하고, 브리틴 통수권자마저 우리가 골라야 할 상황이야. 듣자 하니 왕가가 작살난 모양이더라고.”

“우리가 아니라, 폐하 아니십니까.”

능글맞게 비껴가는 데베르의 대답에 아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발 빼네. 치사하게.”

스르르 침대 위로 쓰러진 아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묻고 싶은 말을 눌러 내릴 때마다 심장이 턱턱 막혀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마지막은 어땠어.”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꺼낸 물음 하나는 소화되지 못할 응어리 하날 토해낸 것과도 비슷했다.

“네가 기억하는 그대로.”

차라리 데베르가 눈치 없게 굴어주길 바랐지만, 그러기엔 함께한 시절이 너무 길었다. 억지로 웃음을 뱉으려 하자, 턱이 잘게 떨렸다.

꼴사납게 굴긴.

“하하, 또 건방지게 굴었나 봐.”

“아니.”

아더는 더 감을 것도 없는 눈꺼풀에 질끈 힘을 줬다.

“메이너 공주님다웠어.”

그래, 이런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서.

“네가 어떤 황명을 내리더라도, 난 사면권을 썼을 거야. 그러면 아마 넥서스는 힘들더라도 아르젠 정도에선 평온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데베르는 창가에 놓인 시가 한 개비를 입술 끝에 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마지막조차 라프넬의 선택이지. 거긴 네 몫도, 네 탓도 없어. 그뿐이야.”

아더는 늘어진 팔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가렸다. 빛이라곤 창밖에서 한줄기 비쳐 드는 달빛이 전부였으나, 제겐 그조차 버거웠기에.

“요즘 따라 데베르 공작답지 않게 다정을 떨어뜨리는군.”

큼, 몇 번의 헛기침 속에 아더는 희미한 울음을 숨겼다.

“혹시-”

그 순간, 정갈한 발걸음이 복도를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아더는 미처 노크 소리가 울리기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마주친 데베르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다. 이 정도면. 이미 들어야 할 대답은 다 들은 것이리라.

“됐어. 네 옆구리만 얼추 붙으면, 황명을 내려서라도 협정에 끌고 갈 거니까 몸조리나 잘해.”

똑똑. 적당한 때에 끼어드는 노크 소리에 태연하게 문가를 턱짓했다.

“괜히 애먼 곳에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불이 붙지 않은 시가를 손에 쥐며 데베르가 경멸에 찬 표정을 짓자, 아더는 더없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유유히 걸어가 문을 연 아더는 역시나, 그의 예상 속에 있던 얼굴을 보곤 짤막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클리프 부인을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폐하를 뵙습니다.”

예의 그 단정한 태도로 시선을 내리뜨는 클리프 부인을 보자, 저도 모르게 라프넬의 얼굴이 그 위로 스쳤다. 우스운 일이었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하지만, 어쩌면….

“감사합니다.”

“네…?”

나 또한 라프넬과 같은 시선으로 이 여자를 보지 않았을까.

“넥서스엔 베스 제인스, 아니. 베스 클리프 간호사님 같은 분이 늘 필요하니까요.”

처음엔 데베르의 시선이 향한 곳이어서. 그다음은, 속절없이 풍겨오는 맑은 향에 자꾸만 눈길이 가서. 그리고.

“닮고 싶은 부분이 많은 분이에요, 클리프 부인은.”

아더는 얼른 제 두 손을 활짝 펴서 손사래를 쳤다.

“앗, 칭찬입니다. 칭송이라고 해야 하려나. 혹시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세요.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지라….”

차마 라프넬 너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을 투명한 속마음.

“그럼, 갓 재회한 부부의 시간을 방해할 순 없으니 저는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텅 빈 복도를 홀로 걸어가는 아더의 눈썹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애써 참아보려 할수록 미간이 보기 싫게 구겨졌고,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계단 밑에선 아직도 병사들의 군가와 환호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그를 둘러싼 공간은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하기만 했다.

끝내 아무도 없는 계단참에 주저앉은 아더는 그 고요 속에 무너졌다.

그건 쓸쓸함이었다.

외로움이었고.

죄책감이었으며.

“미안해….”

못내 밀려드는 홀가분함이었다.

“으읏… 윽.”

미안해, 라프넬.

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으흑….”

가는 울음이 장정들의 헹가래 속에 묻혀들어갔다.

단 한 번도 눈물 흘리지 않은 라프넬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제 눈동자는 라프넬과 아주 많이 닮았으니까.

마치, 가족처럼.

* * *

“베스, 노려본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래도 이번엔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건지, 설핏 접힌 눈가는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데베르는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을 꾹 누른 채, 제법 그녀의 장단에 합을 맞춰주었다.

“병실에서 시가라니. 내가 아주 불순한 짓을 했군.”

결국 탄식을 참지 못한 베스가 손에 쥐고 있던 시가갑을 매트리스 위로 툭 던지자,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데베르는 재주 좋게도 날아드는 걸 잡아챘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아더가 나가고, 수면제 몇 알과 물을 챙겨 들어온 베스는 컴컴한 방 안을 밝히기 위해 벽면에 걸린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내 사위가 어렴풋이 밝아 들자 보인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미끈한 시가가.

“이쯤하고 와.”

여전히 창가에 서 있던 베스는 그의 달래는 듯한 말투에 눈살을 더 찌푸렸다. 호선을 그리던 눈썹까지 덩달아 비스듬해지자, 이번엔 데베르가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내게만 가혹하시지. 클리프 부인은.”

기울어지는 그의 고개를 따라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이 눈 위로 흘러내렸다. 전쟁이 시작된 사이, 약간 길어진 머리칼은 그의 속눈썹 근처까지 내려와 시야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눈 아파.”

베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득한 숲길 저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되지도 않은 어리광이었다. 붕대에 가려졌을지언정 반쯤 헐벗은 셔츠 사이의 근육이 저리도 선명한데.

“어깨도 아파서 도저히 내 힘으론.”

그만한 키에, 그만한 어깨에, 그만한 손아귀를 가지고서 데베르는 오직 제 부인의 새초롬한 표정을 풀기 위해 부지런히도 거짓말을 했다.

“어서.”

애초에 성실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 알면서도 못이기는 척 넘어와 주길 바란 것이었으니. 이 여자가 제게만 무르게 구는 게 좋았다. 한편으론, 지금처럼 제게만 혹독하게 구는 것도 좋았다. 남들에겐 짓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투정을 부리는.

마침내, 패자로 위장한 사랑스러운 승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말간 물음에 데베르는 키득거리며 가까이 온 베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밋밋한 뱃가죽에 뺨을 기대자, 이내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면 정리하기 힘든데.”

“상관없어.”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 못한 대답에 데베르는 허밍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알면서도 속은 네 잘못이지.”

깊어진 새벽을 따라 한결 낮아진 음성이 듣기 좋게 방 안을 채웠다.

데베르의 손가락이 여자의 등허리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얇은 간호복 아래에 숨겨진 하얀 뼈마디와 따스한 살결이 손끝을 스칠 때마다, 전해 받은 온기보다 뜨거운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약쟁이한테 약을 가져오면 어떡해.”

일부러 말머리를 돌리며 데베르는 베스의 등줄기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약을 살펴보는지, 하나로 묶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데베르의 손등을 쓸고 지나갔다.

“저 정도는 괜찮은데… 걱정돼요?”

“싫어.”

약이라면 지긋지긋해. 흐릿한 한 마디를 입맞춤처럼 속삭인 데베르는 여린 여체를 더욱 바짝 제게로 끌어왔다. 중심을 잃은 여자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지자, 데베르는 나른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안 아픈데.”

축축하게 젖은 시선을 마주한 베스는 불현듯 가슴께가 저릿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모든 걸 가진 남자가 꼭 제 품이 세상 전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매달리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리도 간절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걸까. 그것도 고작 내 품에.

“베스.”

그 흔들림을 눈치챈 데베르는 조금 더 처연한 기색을 띠었다.

“안아줘.”

저는 언제나 이 여자 앞에선 위약하게 굴어댔으니, 구태여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었다.

베스의 손가락이 이젠 잘 정리된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지나, 때때로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는 눈매를 매만졌다. 잠깐이라도 멀어질라치면 따라붙는 그의 입술이 손목 언저리를 지분거릴 때마다, 적당한 열기가 살갗을 타고 넘어왔다.

거절하지 못할 부탁이란 걸 그도, 그녀도 알았다.

“아파도 몰라요.”

“얼마든지.”

나직한 그의 웃음소리 어딘가가 떨리는 것 같았으나, 베스는 알은척하는 것보단 있는 힘껏 그를 안아내는 걸 택했다. 그런다고 저보다 한참은 큰 이 남자의 모든 걸 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품을 벌렸다.

데베르는 그때부터 그 안에 자리를 잡는 건 제 몫이란 걸 잘 알았다. 욕심껏 이 여자를 베어 물고, 탐닉하는. 어쩌면 이 여자가 허락한 것보다도 더.

“다시 말해줘. 네 이름이 뭐라고.”

오로지 데베르 클리프만이 가질 수 있는 몫.

“베스 클-”

베스는 기꺼이 제가 전해주는 이름을 삼켜내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흉터 가득한 등을 그러안은 손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저 또한 이 남자가 세상의 전부이기에.

못 견디게 간절하기만 해서.

“다시.”

긴 입맞춤의 끝에, 데베르는 기어이 다정한 재촉을 덧붙였다.

“말하면 입 맞출 거면서.”

“맞아.”

담백하게 승복한 그는 자잘한 입맞춤을 고집스런 입술 끄트머리에 흩뿌렸다.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베스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질수록 그에겐 좋은 일이었다. 여기까지만 해야지, 하는 제 다짐을 이어갈 수 있는 핑계가 돼 주었으니까.

“그래도 말해줘. 베스 클리프.”

베스는 또다시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한겨울에 맺히는 이리 달콤한 애원을 거절할 여자는 없을 테지만, 그 애원을 삼킬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저 하나뿐일 테니.

“네 목소리로 듣고 싶어.”

달빛을 닮은 등불 아래에서 맞닿은 연인의 마음이 깊어졌다.

전장의 이른 저녁노을보다도 붉고, 그곳을 가득 메우던 총성보다도 선명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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