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최종화)
매서운 바람을 타고 열기에 겹친 싸한 탄내가 건너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도망치기 바빴지만, 베스의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침내 마주 본 연인의 사이로 짙은 빛깔의 잿가루가 쉬지 않고 휘날렸다. 전혀 낭만적이지도, 운명적이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베스는 알 수 있었다.
사랑이구나.
내가 찾으러 온 것은. 그리고 다시금 찾아낸 것은.
“난.”
만나야 할 이유보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럴지라도.
몇 번의 후회와 자책을 넘겨내고 나서야 선명히 보이는 것.
“난 사망금 증서 안 썼어요.”
멍멍한 포화 속에서 과연 저 남자가 듣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베스는 다시 소리쳤다.
“내 사망금 증서는 없어요. 당신 것도. 내가 불태웠거든.”
남자가 엷게 웃는 게 보였다. 팬 볼우물에 맑은 물이 찰랑이는 것 같았다.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전투기는 쉬지 않고 부둣가의 거대한 선박들을 폭파하고 있었다. 가장 커다란 선박에 찍혀 있던 클리프가의 문장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잘했어.”
데베르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여자를 바라봤다.
한때는 이름 없는 오두막의 소녀였고, 한때는 말 못할 첫사랑이었으며, 이젠 그의 세상의 마침표가 되어 나타난 여자.
나 하나를 불태워 저 여자의 온전한 세상을 위한 재 한 줌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리할 수만 있다면 데베르는 제 삶에 만족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무수히 많은 말들이 오갔다. 절절하게 굴려면 그럴 수 있었다. 살아서 돌아오라, 울며불며 매달릴 수도 있었다. 짧을지언정 당장 뛰어간다면 한번 안아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이 끝이 아니니까.
“대장님!”
“수간호사님!”
각자의 위치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둘은 작게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데베르는 더 깊은 전장으로, 베스는 또 다른 부상병에게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으면서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말하지 않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
“우린 어디로 가죠?”
노을이 깊어져 갔다.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시체에 베스의 몸이 맥없이 부딪혀 구덩이로 떨어졌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이네스가 엉금거리며 기어와 수통을 내밀었다.
“베스, 괜찮아?!”
베스는 겨우 수통을 기울여 그을음과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뺨을 문질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식은땀에 공연한 숨을 내쉬기도 했다.
“읏….”
그러다 쌓아 올린 흙더미에 지친 몸을 기대자, 여러 빛깔이 한데 섞인 어지러운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단 뜻이었다. 그 너머론 질긴 포탄이 여전히 터져대는 중인데도.
쿵. 묵직한 땅울림에 잠시 눈을 감은 베스는 습관처럼 상상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베스!”
돌연 아이네스가 비명을 지르며 베스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껴안은 두 사람의 몸이 구덩이 벽면으로 바짝 당겨 붙었다.
콰앙. 쾅. 쿠웅.
경험해보지 못한 진동이 지진처럼 온 땅을 울렸다.
“어떡하면 좋아. 함락됐나 봐.”
겁에 질린 아이네스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오는 한편, 베스는 고개를 급히 빼 들고 까치발을 들었다.
깊은 밤이 찾아온 듯 지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잿빛 돌풍이 빠르게 불어오고 있었다. 훅 비강에 끼쳐 들어오는 화약 냄새가 얼핏 매캐한 시가 냄새와도 닮았다면 제 착각일까.
강한 바람에 낡은 머리끈이 끊어지며, 흑단 같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공중에 휘날렸다.
“…다!”
베스의 동그랗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찌푸려졌다.
들리지 않아.
외침은 점점 더 선명히 돌풍 끝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이다!”
그때, 브리틴 전투기 한 대가 한쪽 날개에 불이 붙은 채로 창공을 기우뚱거리며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 꼬리에서 팔랑이는 건 분명 새하얀 깃발이었다.
항복을 선언하는 흰 깃발.
“드디어 …이다!”
그제야 베스를 둘러싼 모든 고요가 박살 났다.
“종전, 종전이다!”
“집에 가자!”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영광의 넥서스를…!”
쨍한 사이렌 종소리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달달 떨고 있을 때는 언제고, 금세 옆자리에 나란히 선 아이네스가 뛰어오는 넥서스 군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끝났나 봐.”
얼떨떨한 아이네스의 말에 베스는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청량한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섞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긴 했다. 기쁜데, 이렇게 눈물이 나다니.
이젠 미풍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베스는 손안에 얌전히 내려앉은 잿가루를 소중히 그러쥐었다.
“끝났어요.”
누군가는 죽음을 끌고 다니는 그 남자의 잿빛을 말 못 하는 짐승을 닮았다고 했지만, 아니. 베스에게 잿빛은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불태워야만 지닐 수 있는 색채였다.
그는 지금 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도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널 모른 척한 게 아니야. 살리려고 애썼어.’
‘한 번도 너를 내버려 둔 적 없어.’
기억 속의 겨울. 서로의 온기가 전부이던 전장의 그 밤처럼.
데베르 클리프는, 새카만 베스 제인스의 어둠에 한 줌의 빛을 더해 그의 색깔로 물들인 영원토록 이기적인 사내였다.
* * *
허름한 여관은 전에 없던 활기를 띠며 방마다 샛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빛을 토해내는 차창 너머론 부상병들의 군가와 헹가래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자, 주목! 다들 주목해요.”
들뜬 분위기 한가운데로 호기롭게 들어간 몰리 부인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수고가 너무 많았어요.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로요.”
아들뻘 되는 병사들의 혈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그들을 구슬리는 중년의 부인은 때아닌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병원이에요. 파티장이 아니라고요. 지금도 부상이 깊어-”
“괜찮습니다! 넥서스군에게 이 정도는 거뜬하다고요!”
붕대로 둘둘 싸맨 다리를 천장에 매단 병사 하나가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성을 유도했다.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장정들의 굵직한 노랫소리에 결국 부인은 두손 두발 다 들고 병동을 나가는 걸 택했다. 잔뜩 피곤에 찌든 그녀는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간호사들을 향해서도 “해후는 나중에.”라는 말만 남긴 채, 병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네스!”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베스와 아이네스의 고개가 동시에 로비로 향했다.
“아, 부인께서도 있으셨군요.”
게일은 군모를 벗으며 정중하게 다가와, 베스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베스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게일의 뒤편을 몇 번 확인했다. 그러다 아이네스와 실수로 눈이 마주치자, 마음 약한 백작가의 영애는 또다시 눈시울을 적시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흑, 흡. 베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제 약혼자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던 베스는 손에 들고 있던 약품 바구니를 살짝 들썩였다. 그러자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이네스보다 눈치가 빠른 게일이 제 약혼녀의 손을 붙잡고 눈짓을 했다. 작은 미소로 답을 대신한 베스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여관 뜰로 나왔다.
임시 약품 창고인 허름한 독채로 향할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눈이 구둣발에 밟혔다. 습관처럼 주위를 한 번 둘러봤지만 더는 하늘을 수놓던 전투기도, 숲길 너머로 쉼 없이 들어오던 군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새삼 서로를 기다리던 시간이 서로를 마주한 시간보다 길었음을 깨달았다.
아이에서 소년이 될 때까지, 소년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 그리하여 서로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하고 견뎌내어 이룬 마지막에,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직 상처가 남은 손끝에서부터 피어났다.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약품을 분류하고, 펜을 들어 정갈하게 이름과 용법을 붙이며, 빈 캐비닛을 차근히 채워가던 베스는 찰나의 방심을 틈탄 인영 하나가 저 컴컴한 숲길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열린 문가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베스는 제 할 일에만 골몰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느긋하게 한 발을 창고 안으로 내디뎠다.
“겁이 없네.”
갑작스런 기척에 화들짝 놀란 베스가 본능적으로 바구니 속에 담겨 있던 총을 들어 올렸다. 그새 꽤나 능숙해진 손길이었다.
“나 같은 새끼 만나면 어쩌려고.”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든 채 항복 표시를 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베스는 총을 툭 떨어뜨렸다.
“당신 같은 남자를 기다렸는데.”
밤을 닮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좀 더 극적으로 반겨줄 거라 생각한 건 내 오만인가.”
한 걸음씩 다가오는 남자를 고스란히 눈에 담기 위해 물기 어린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내 상관이 좀 엄하시고, 나는 꽤 충성스런 부하병이라.”
동그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올을 넘겨주던 데베르는 그 아래에 난 붉은 상처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후회하지 말라는 어려운 명령을 내리셨길래 따르느라 고생 좀 했지.”
“그래서, 지켰어요?”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베스는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남자의 손이 이번엔 멍 자국이 남은 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흉터로 가득한 데베르의 손은 느리지만 정확하게 여자의 몸에 새로이 난 상처에만 닿고 있었다.
“방금 완수했어.”
“방금?”
“상관이 무사하시더라고. 이렇게 할 일도 놓치지 않으시고.”
잔잔한 그의 웃음소리가 허름한 바닥 위로 소복이 쌓였다.
베스는 결국 더 볼멘소리하지 못하고, 두 팔을 벌려 그의 품에 온몸을 던졌다. 그러자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을 울리는 웃음이 더 선명하게 귓가에 와닿았다.
“너답지 않네.”
데베르가 그런 베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등을 젖히자, 작은 몸이 바짝 따라붙었다. 이에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짐짓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너, 누구야.”
이 질문에 그녀가 질색하리란 걸 알면서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괴롭혀보고 싶었다. 잔뜩 투정 부리면서 토라지는 것도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하지만 매번 그의 사랑스런 예외를 자청하는 이 여자는 이번에도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널찍한 등 위를 천천히 유영했다.
[베스 클리프]
베스는 조금씩 빨라지는 그의 심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보다도 먼저.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데베르.”
일순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그러자 베스는 고개를 한껏 뒤로 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질거리는 투명한 눈동자에 늘 그렇듯 흔들리는 그의 모습이 담겼다.
“좀 더 다정하게 말해야죠. 다시.”
부드러운 타박과 함께 베스는 나직하게 목소리를 죽였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렸다.
“이름이, 뭐야…?”
너무도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었기에.
“데베르 클리프. 넌 이름이 뭐야.”
그의 목소리도 조금 더 낮아졌다. 반면 깊어진 시선 속에 서로가 온전히 드러났다.
“…베스 클리프.”
전해주지 못한 편지 속 담겨 있던 ‘아가’ 대신.
“난 베스 클리프야.”
당신이 내게 준 이름.
“다시 만나서 기뻐. 데베르.”
베스 클리프.
비쳐 드는 달빛을 머금은 입맞춤이 이름과 함께 전해졌다.
긴 시간을 지나 비로소 서로의 이름을 나눠 가진, 다시 시작된 겨울밤이었다.
<구원자가 도망친 밤_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