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202화 (202/206)

202화

얇은 천막 너머로 들려오던 전투기 엔진 소리가 잠잠해지고, 깊은 고요가 주변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며, 이른 새벽을 알리는 새의 날갯짓이 다시금 그 고요를 깨울 때까지 지휘소 안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이상.”

데베르의 낮은 음성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홀가분하면서도 못내 무거운 분위기를 깬 건 발렌티나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다시 뵐 땐 종전을 맞이한 후겠네요.”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아더에게 손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떠냐는 눈빛에, 아더도 대충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맞잡았다. 담백한 악수를 끝낸 아르젠의 공주는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는 데베르와 게일을 돌아보곤 어쭙잖은 변명을 했다.

“제가 부인이 있으신 분과는 악수하지 않는 주의라서.”

이건 데베르를 향한 것이었고,

“약혼자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게일을 향한 것이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천막을 가린 문 앞에서 쭈뼛거리던 발렌티나는 곧 입술을 꾹 다물곤 바깥으로 나갔다. 건조한 새벽 공기에 보드랍던 뺨이 순식간에 얼얼해졌다.

“많은 수를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데베르 군대장님 말씀이시죠?”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라오던 게일의 대답이었다.

전투기가 놓인 임시 격납고로 걸어가는 두 사람은 진창이 될 곳을 직접 뒹굴 데베르, 아더와는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네. 조금 놀랐어요.”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으셔서 탈이죠.”

“너무 많다고요?”

“본인은 부정하시겠지만, 지나치게 자기희생적이시거든요. 넥서스는 클리프가에 많은 목숨을 빚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넥서스가 부강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발렌티나는 ‘훌륭한 분’들을 얘기하며 각자의 자리로 부지런히 돌아가는 장교와 그 산하의 군사들, 그리고 저 멀리 동이 터오는 하늘을 마주 본 채 전열을 정비하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완벽히 수행하시길 바랄게요.”

먼저 전투기에 올라탄 그녀는 아더를 대할 때와는 달리 미련 없이 마지막 인사를 날렸다.

“성격도 급하시지.”

가장 먼저 비행로를 나르기 시작한 전투기의 주인을 알아챈 아더의 감상이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지?”

별안간 티끌만 하게 멀어지는 전투기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그는 담담히 물었다.

오늘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맺는 날이 될 수도, 지리멸렬한 나날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는 날이었다.

“우리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겠다는 거잖아.”

데베르가 말한 작전명 ‘실패’의 마지막 과업은 자멸이었다. 정확히는 자멸을 흉내 낸 사력.

그는 으레 그렇듯 여상한 얼굴로 제가 딱, 죽기 직전의 얘기들을 밤새 늘어놓았었다.

‘브리틴과 연결이 끊긴 코바흐는 머릿수만 넘쳐나는 개미 떼에 불과해. 기관포로 공중에서 연사한다면 서부 전선을 탈취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지. 아마도 이건… 발렌티나 캐리엇 공주님께서 협력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군대장님 표정을 보면 안 했다간 큰일 날 것 같은데요?’

‘게일 대령은 공주님과 같은 전선을 날아가다가, 브리틴 서부 국경 끄트머리에 놓인 정유소를 폭파하고 아르젠 왕궁 후원으로 착륙하도록. 브리틴 공군은 제법 강하니, 시야부터 가리고 쳐야 할 거야.’

‘그래도 동부 항만 쪽에서 치고 들어올 텐데요.’

게일은 작전지 가장 끝의 바다를 가리켰다. 넥서스, 브리틴, 아르젠이 함께 끼고 있는 바다는 세 국가의 가장 큰 무역로였다.

‘태워야지.’

‘네? 뭐를 말씀입니까?’

‘아르젠 무역선을.’

‘네?!’

마지막 외침은 발렌티나의 것이었다.

‘아르젠의 가장 큰 수출품을 알지 않으십니까.’

‘그, 그야 목재죠. 숲이 많으니까요….’

의연한 데베르의 얼굴에 발렌티나는 어버버 거리며 답했다.

‘승전을 위한 좋은 땔감이 될 겁니다.’

쭉 뻗은 손가락이 작전지의 파란 부분을 기다랗게 훑었다.

‘갑작스런 개전에 아르젠, 브리틴, 넥서스 이 순서로 무역선들이 바닷길을 장벽처럼 막고 있습니다. 여기에 눈독이 오른 브리틴은 쉽사리 폭파할 생각을 못 하고 있고요. 아르젠과 넥서스의 선박들이 불바다가 되면 적군은 처음엔 자기네들의 실수라고 생각할 겁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동부 전선의 넥서스군이 웨인으로 향하는 가장 좋은 통로이자 탈출구인 항만에 불을 지르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그 말을 하며 데베르는 답지 않게 싱긋 웃었다.

‘넥서스의 무역선 대부분은 클리프가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사유재산을 소각하는 것까지 폐하의 명을 따라야 하진 않겠죠.’

그에 아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야 말았다.

“하여간에 미친 새끼.”

“그런 내 곁에 이리 오래 있는 걸 보면, 너도 꽤 정신 나간 놈이지.”

벨트를 탄탄하게 조인 데베르는 완벽한 군인의 모습을 한 채였다. 그는 얼어붙은 강 너머에서부터 어렴풋이 밝아오는 여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고 싶어.”

“뭐?”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이 모양으로라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어서.

“감히 아더 네가 듣기엔 분에 넘치는 고백이지. 타.”

영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더의 가슴팍을 커다란 손이 두드렸다.

뒤늦게 걸린 군용차의 엔진음이 그들의 심장 고동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급하게 옮겨진 전장 병원도 분주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제 겨우 푸르스름한 빛깔이 숲길 너머를 물들이는 게 전부였지만, 뜰 주변을 뛰어다니는 발걸음들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탈탈거리는 군용차의 짐칸엔 각자 의료 가방을 하나씩 멘 간호사들과 몇몇 의사들이 올라탔다.

“다들 준비됐죠?”

모두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타기 위해 치맛단을 올리던 아이네스는 불안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은 맨 위층 끝자락, 베스가 잠들어 있는 방을 향해 있었다.

혹시나. 오늘이 마지막이면.

침을 꿀꺽 삼킨 아이네스는 결국 여관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저, 아무래도 베스를-”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베스.”

어둑한 여관의 로비 사이로 저와 똑같은 간호복을 입은 흰 얼굴이 보였으니까.

“베스?!”

짐칸 가장 구석에 앉아있던 바든도 벌떡 일어나 여관의 활짝 열린 정문을 응시했다. 곧 그의 허연 이빨이 시원스레 드러났다.

“역시! 난 이럴 줄 알았다고!”

쾌재를 부르는 바든과 달리, 아이네스는 눈만 깜빡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족한 병원 인력에 베스를 홀로 두고 병동을 돌면서 얼마나 불안에 떨었던가.

평소보다 훨씬 희게 질린 베스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이도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쌕쌕 숨을 내쉬며 바퀴 앞에 놓인 의료 가방을 어깨에 메는 친구를 아이네스가 얼른 막았다. 하지만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인걸.”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몰리 부인과 눈을 마주쳐봐도, 그녀마저 베스를 따라 고개를 살며시 저을 뿐이었다.

“몰리 부인까지 네 편으로 만들다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어쩔 수 없는 울음기가 묻어났다.

“울지 마.”

아이네스의 눈가를 닦아주기 위해 들어 올린 베스의 팔뚝엔 붉은 십자 완장이 단단히 매여 있었다.

“같이 가면 더는 무섭지 않을 거야.”

“둘 다 빨리 내 손 잡아!”

바든이 허둥거리며 다가와 베스와 아이네스의 몸을 짐칸 위로 단숨에 끌어올렸다.

몰리 부인은 더없이 완벽한 제자들을 향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그들이 휘날리는 흙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새하얀 심연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렵지 않았다.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엘 듯이 살갗을 스쳐도, 포화가 번뜩이는 풍경이 점점 가까워져도 마음은 잠잠하기만 했다.

“괜찮아.”

베스는 제 곁에 앉은 아이네스의 발갛게 얼은 손을 꽉 잡아주며 속삭였다.

우린 살아서 돌아갈 거야.

가장 죽음과 가까운 곳을 향해가면서, 가장 삶과 가까운 온기만을 전했다.

그때, 거대한 차체가 금방이라도 엎어질 듯이 흔들렸다. 가까워진 전선을 증명하듯 군용차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투하된 폭탄의 여파였다.

“억!”

“꺄악, 어머나!”

사람들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운전병은 더욱 속력을 높여 전선을 향한 질주를 감행했다. 베스는 기침이 절로 나오는 매운 연기를 견디기 위해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회복하지 못한 목구멍에서 아직 핏물이 찝찔하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저곳에 그 남자가 있을 테니.

“내려! 다들 내려!”

차가 멈추자마자, 타고 있던 의료진들이 가축처럼 참호 속으로 떨어졌다.

“읏….”

베스의 가벼운 몸도 찰나에 떨어져 참호 가장 깊은 곳으로 굴러가 처박혔다. 머리맡 위로 우다다 쏟아지는 기관총 소리가 드디어 그들이 전장에 도착했음을 알려줬다.

“베스!”

아이네스는 냉큼 베스의 몸을 일으켜 세워 개미굴 같은 참호진의 끝자락을 향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여, 여기요!”

“아, 잠시.”

부상병에게 치맛자락이 붙들린 아이네스가 다급하게 베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직 발간 기운이 지워지지 못한 눈망울을 보자마자, 베스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줬다.

“다시 만나, 아이네스. 반드시 살아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네스에게 마지막으로 웃어준 베스는 그들을 찾는 어느 소령의 장갑차 뒤편을 향해 뛰어갔다.

“간호사! 아무나 빨리, 윽!”

펑, 펑. 눈이 얼은 바닥이 폭죽놀이라도 하듯 터져댔지만, 새카만 눈동자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몸을 던져 장갑차 뒤로 엎어지자마자 제 발치에 총알이 스쳤는데도 고집스런 눈빛은 부상병의 상처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노련하게 다루는 손길에,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남자의 얼굴 위로 얼핏 안도감이 맴돌았다.

“베스!”

한 명을 치료하기가 무섭게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언제 또다시 군용차 짐칸에 올라탔는지, 그녀의 맞은편에서 바든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여기 타!”

베스가 망설임 없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병의 핸들은 더 깊은 전장을 향해 굽어졌다. 어느새 맑은 아침 햇살이 기다란 전선 위로 새하얗게 드리워진 게 보였다.

그때부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전투기가 쏟아내는 굉음에 귀는 먹먹해진 지 오래였고, 한 걸음을 떼기도 어려울 만큼 무르팍 아래론 부상병들의 몸뚱이가 쉬지 않고 던져졌다. 그러다 누군가의 고함에 맞춰 도망을 치고 있노라면, 뜨거운 무언가가 이마를 타고 흐르기도 했다.

“불이야!”

불? 뱃가죽에서 피를 쏟아내는 병사를 지혈하던 베스는 그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코끝에 맡아지던 짠 기운은 피비린내가 아니었다.

“…바다.”

눈앞엔 아득하리만치 새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꿈처럼. 그리고, 그 가운데 부두에서부터 치켜 올라가는 거대한 불기둥이 겨울 바다의 평온을 깼다.

“데려가겠습니다!”

수송 차량에서 내린 운전병이 베스의 손 아래에 있던 병사를 재빠르게 들것에 옮겨 사라졌다.

베스는 텅 빈 손 위로 날아드는 탄재를 우두커니 바라봤다. 주위의 비명마저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신경을 빼앗긴 채, 타오르는 불길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쩌면 저 불길 때문인가 싶어질 정도로 새빨갛게.

빛무리처럼 점멸하는 잿가루를 쫓던 시선이 불현듯 옆으로 향하는 순간. 베스를 향한 세상이 완벽한 잿빛으로 휩싸였다.

데베르 클리프.

모든 것이 타오르는 진창 속, 고고히 제 색을 지키는 유일한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기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