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데베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데베르의 가슴팍을 가로막은 건 아더였다. 우악스럽게 부딪쳐오는 데베르의 몸을 어떻게든 막아선 채 재차 이름을 불렀지만, 넋이 나간 잿빛 동공은 그의 어깨너머의 베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한 꺼풀 벽이 되어준 아더의 뒤편으로 몰리 부인이 나타났다. 그새 머리카락이 센 중년 부인의 얼굴은 파리했으나, 예전과는 또 다른 단단함이 내비치고 있었다. 함께 온 아이네스가 재빨리 청진기를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은 큰 소리로 허드렛일하는 병사를 불렀다.
“여기까지예요.”
들것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데베르의 걸음을 이번엔 몰리 부인이 제지했다.
온기 어린 시선이 제국의 젊은 공작이자 군대장의 흐트러진 행색을 훑었다. 그러다 열린 문밖을 일별하자, 캄캄해진 하늘 위로 붉은빛을 발하는 전투기들이 밤잠을 모르는 새처럼 쏘다니는 장관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저들이 별을 대신할 모양이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신음성이 끼어들었다.
잠들지 못하는 고통에 모두가 몸부림치는 이곳은 전장이었다.
다시 데베르에게 시선을 옮긴 몰리 부인은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이렇게 살아 돌아온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으며, 이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꼴이 시리게 아프기도 했다. 비슷한 운명을 손에 쥔 채 만난 두 아이가 악연 같기도 필연 같기도 하였으나, 그걸 재단하는 건 제 몫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데베르 공작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여기서부턴 우리의 몫이니 믿고, 떠나요.”
간결한 말이었다.
부인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 떨리는 눈꺼풀을 슬며시 내리떴다.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때론 감정이 눈을 가리기도 하죠. 지금은 데베르 공작도 그걸 알리라 생각하는데.”
안다.
데베르는 이젠 절감할 수 있었다. 베스 제인스가 수없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으니까.
부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벽면의 등불에 비쳐 따스하게 빛났다.
“데베르, 베스를 믿잖니. 그렇다면 이 순간부턴 자네의 일을 해. 자네만이 해낼 수 있는 일.”
데베르는 어느새 핏물이 굳어버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만이, 고작 나 따위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긴 했던가.
베스를 조금이라도 깨우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정작 답을 알지 못하는 건 자신이었다. 내쉬는 뜨거운 숨이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데일 것처럼 심장이 화끈거렸다.
“구해주렴. 베스가 그랬듯이.”
널찍한 어깨가 느릿하게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베스가 그랬듯이 다른 이들을 살려주렴.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도록.”
튀어나온 목울대가 몇 번이나 울렁거렸을까.
눈가를 덮은 손을 천천히 내리자 드러난 데베르의 얼굴은 하염없이 휘청거리기만 하던 한 명의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베스가 사라져버린 계단 끄트머리를 마지막으로 올려다봤다.
“…메이너 사령관.”
그게 전부였다.
“지휘소로 가지.”
네가 그랬듯이.
베스, 네가 그랬듯이.
데베르는 홀로 하는 고백처럼 그 말을 되뇌며 등을 돌렸다.
* * *
멀끔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지휘소로 들어서는 데베르의 안색은 다소 창백하긴 했으나, 예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아직 깔끔하게 지워내진 못한 목덜미의 핏자국이 작전명 ‘실패’가 실재했으며 여전히 진행형임을 증명하는 중이었다.
“데베르 군대장님!”
둥근 테이블에 앉아있던 발렌티나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공작님을 이리 오랜만에 뵙게 되어 기쁩니다.”
펄럭거리는 군복 바지를 드레스인 양 붙잡고 고개를 까딱이자, 데베르도 얼추 묵례를 하며 장단을 맞췄다.
“말씀하신 대로 브리틴 왕궁 공습은 아주 성공적이었는데….”
눈치껏 아더와 데베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씩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얼른 굳히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작전지를 가리켰다.
“말씀하신 대로 브리틴 왕궁 공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군 전투기 3대가 손실되었기는 하지만, 브리틴에 비할 바는 아니죠.”
넉살 좋게 말을 이어가던 발렌티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다만, 칼론의 시체를 찾기가 어렵네요. 현재로선 왕궁 잔재를 뒤진다는 것도 무리가 있고요. 아니면 벌써 도망이라도-”
“제가 죽였습니다.”
짤막한 한숨을 쉰 데베르는 담담한 얼굴로 작전지를 꼼꼼히 훑었다. 그가 브리틴에 잡혀 있는 동안 되찾은 전선과 잃은 전선, 혹은 보급지가 표시된 작전지 위로 날카로운 펜촉이 그어졌다.
“제가 직접 죽였으니 시체는 찾지 않아도 됩니다.”
묵묵히 작전지 위에서 펜대를 놀리던 데베르는 곁에 앉은 아더를 힐긋 돌아봤다. 아더 또한 묵묵히 작전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나, 그 머릿속을 메운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신은 찾지 않을 예정입니다.”
부러 시신이라고 높여주는 표현은 칼론을 위함이 아니었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곧장 알아들은 아더는 싱겁게 웃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제기랄. 턱 근육을 몇 번 움찔거리다가 장난스레 제 미간을 꾹 짓누르자, 절로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발렌티나는 그런 아더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군대장님, 이젠 정말… 절절하게 이 전쟁이 지겨운데 끝낼 방도를 알려주시죠?”
부러 잔뜩 가벼운 음성을 연기했으나, 갈수록 무거워지는 침묵에 아더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톡. 톡.
데베르의 상처 난 손가락이 간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못내 긴장감을 자아내는 울림에 다들 입을 다문 채 상념에 빠질 무렵, 그가 마침내 입을 뗐다.
“끝냅니다. 아더 사령관.”
테이블에 이마가 닿을 만큼 고개를 처박고 있던 아더의 눈썹이 들썩였다. 피식, 헛웃음을 뱉는 금발의 청년은 이 엉망인 겨울 속에서도 못 견디게 싱그러운 자태가 났다.
“이왕이면 건국기념일이 오기 전에요.”
“무조건 건국기념일이 오기 전에.”
응? 게슴츠레한 푸른 눈동자가 비스듬히 제 친우를 향하자, 데베르는 가볍게 웃었다. 그 얼굴 속에 설핏 소년 시절 클리프 소공작의 모습이 겹쳤다. 아무도 없는 제국 도서관에서 뻔뻔히 늘어져 있던 그 반반한 얼굴이.
“나도 지겹거든.”
* * *
여관 가장 위층 복도의 맨 끝방에선 연신 토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을 쉴새 없이 오가는 아이네스의 얼굴엔 한겨울임에도 미끈한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베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희미한 의식조차 없는 베스를 붙들어 앉은 채, 그녀의 등을 두드리던 아이네스는 옷소매로 제 눈가를 훔쳤다.
“내, 내가, 놓쳐서, 말을 했던 게….”
토막 난 말을 두서없이 이어가던 베스가 온몸을 바르르 떨더니 침대로 쓰러졌다. 여전히 입고 있는 라프넬 공주의 슬립은 누군가 보기엔 처음부터 검붉은 것이 아니냐 할 만큼 본래의 연노랑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아이네스는 하얀 몸에 굳어버린 핏자국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부지런히 닦아냈다.
“베스, 난 널 살릴 거야.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기적적으로 재회한 게일을 붙잡고 끊임없이 되풀이했던 말은 베스를 찾아달란 말뿐이었다. 죄책감을 못 이겨 몰리 부인을 찾아갔던 어느 날 밤, 그간의 일을 모두 들은 부인은 딱 한 마디를 했더랬다.
‘그 아인 너를 지켜 기뻤을 테니, 함부로 그 기쁨을 앗아가려 하지 말렴.’
“나도 널 지킬 수 있게 해줘. 부탁이야.”
아이네스는 마지막까지 생기가 사그라들어가는 제 친구에게 짐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 울컥 눈물이 비져나왔다. 훌쩍거리는 그녀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몰리 부인이 살며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뜻을 알아챈 아이네스는 끝내 참아내지 못한 울음을 엉엉 토해냈다.
“흐, 흑. 오늘, 밤만 견디자. 제발, 너 없인 너무 무서워. 가지 마.”
얌전하던 백작 영애의 모습을 간데없이 치워버린 아이네스는 삐걱거리는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범벅이 되어 소리쳤다. 겨우 감정을 눌러 내리던 몰리 부인도 결국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고리를 붙잡고 눈시울을 적셨다.
환각의 힘을 빌린 악몽은 질기게도 이어졌다.
베스는 오래도록 같은 보호구역을 돌고 돌았다.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 달음박질을 쳐도, 매캐한 향내가 풍기는 골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가고 싶어.
제 발치에 시체처럼 턱, 턱 던져지는 약쟁이들의 멀건 눈동자가 무서웠다. 덜컥 제 멱살을 붙잡아 할멈에게 말 안 듣는 꼬맹이는 갖다버리라고 윽박지르는 남자들의 억센 손길도 두려웠다. 언제라도 자신을 찾을 것 같은 하워드의 충혈된 흰자 또한 끔찍했다.
나갈래.
골목을 돌던 걸음이 갑자기 툭 멈췄다. 어둑한 길 끄트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검정 머리 여자의 모습이 스쳤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진 손등 위로는 멍 자국이 낭자했다.
아냐.
얼른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그 끝에 낮잠을 자는 것처럼 쭈그려 앉은 노파의 옆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려는데, 노파의 주름진 볼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싫어.
고개를 돌리자마자, 거대한 벽에 낙인처럼 찍힌 클리프가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벽이 아니었다. 거대한 선박 틈에 끼여 으스러진 루카의 등이었지.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공포에 질려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제 발목을 어느 뜨거운 손이 붙잡았다.
‘날 보러 왔구나.’
달아오른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온몸이 차가운 물에 처박혔다. 우읍. 목을 옥죄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젓자, 일렁이는 수면 위로 벌건 눈동자가 보였다.
‘너도 이걸 마시면 내가 그 새끼처럼 보일 거야.’
황금빛 액체가 꼴꼴거리며 쏟아졌다.
숨 막혀.
입술 새로 피어오르던 하얀 기포조차 조금씩 사라져갔다.
난 아무래도….
점차 탁해지는 물을 멍하니 관망하던 베스의 눈동자가 불현듯 얕게 흔들렸다.
어렴풋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면 너머로 정말 아득히.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 무엇보다 선명히 보였다.
‘넌 약하지 않아.’
한 줌의 잿빛.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흉터 가득한 손이 점점 다가오더니, 물속에 잠긴 허리를 강하게 안아 올렸다.
“헉, 하아… 흡….”
막힌 숨을 들이마시려는 베스의 가슴팍이 한참을 헐떡였다. 컴컴한 방 안에서 들려오는 건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낯선 방을 차분히 둘러보던 시선이 세면대 위에 놓인 거울에서 멈췄다. 반질한 거울은 금빛과 검은빛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머리통을 얼핏 비추고 있었다.
“아.”
벽면에 있는 세면대로 걸어가던 무릎이 풀썩 무너졌다. 하지만 독하게 기어가, 기어이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그러곤 쫄쫄거리며 흐르는 물에 제 것이 아닌 황금빛을 급하게 씻어내리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차가운 물에 오랫동안 머리를 헹궈냈다. 마침내 손끝에서 맑은 물만이 흘러내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후들거리는 사지를 모질게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물기가 튄 거울 속에 다시금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곳엔 더 이상 공주를 흉내 내던 어설픈 포로는 없었다.
보호구역 약쟁이들 사이에 갇혀 있던 소녀도, 죄책감에 바들거리며 입술을 꾹 깨문 간호사도, 사랑하는 이를 속여야만 하는 첩자도 아닌. 그저 베스 제인스만이 새카만 머리칼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베스 제인스만이.
“수고했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