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칼론의 수하가 목표물이었다. 고개를 쭉 빼 지하 계단참을 얼씬거리다가 입술을 모로 비트는 남자의 꼴이 무언가를 발견했음이 틀림없었다.
가속이 붙은 군용차는 로비로 이어지는 낮은 계단을 우습게 넘어, 샹들리에가 떨어진 지점을 향해 돌진했다.
“뭐야, 으아악!”
지하로 한 발을 떼려던 사내가 돌연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갑작스레 달려드는 둔탁한 쇳덩어리를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보닛 위를 거칠게 뒹군 몸뚱이가 깨진 샹들리에 파편 위로 엎어졌다.
“으윽, 억…!”
뼈마디가 부서졌는지 가만히 누워 신음만 흘리는 남자에게 다가간 데베르는 그의 허리춤에 있는 탄창과 총을 챙겨 제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발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적군을 죽일 시간조차 지금 데베르에겐 사치였다.
지하 계단참엔 그새 정신을 거의 잃다시피 한 베스가 가느다란 숨만 쌕쌕 내쉬며 쓰러져 있었다. 데베르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허연 다리와 몸통을 단단히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이젠 그에게 가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차가운 여체는 이미 시체를 방불케 했다.
변덕이 밀려왔다. 차라리 조금 전처럼 저를 밀어내기라도 했으면. 그러나 조수석에 태울 때까지 미동조차 없는 여자에 데베르는 헛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찰나, 로비가 또다시 거하게 흔들렸다.
“제길.”
아직 미약할지언정 내쉬고 있는 베스의 숨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데베르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 천정을 한번 쳐다보곤 빠르게 운전석으로 옮겨갔다. 콰앙.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묵직한 진동이 왕궁 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동시에 전해졌다.
데베르의 발이 액셀을 누르자마자, 로비 저 뒤편에서부터 천장이 기다렸다는 듯 느릿하게 일렁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파도에 휩싸인 크리스털 조명들은 유성을 흉내 내며 바닥으로 쏟아져 산산조각이 났다.
이 지긋지긋한 진창에서 드디어 도망치려는 두 사람을 붕괴하는 잔재들이 섬뜩하게 뒤쫓는 풍경이었다.
“윽…!”
후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그대로 지나친 군용차가 허공에 잠시 떴다 잔디밭에 떨어지자, 차체를 타고 꽤 사나운 뇌동이 전해졌다.
저물어가는 하늘 위론 그나마 남아있던 저녁노을의 끝자락마저 모두 전멸해가고 있었으나, 연신 붉은 빛을 발하며 창공을 뒤덮는 전투기 무리가 새로운 채하를 만들어냈다.
“저기 데베르다!”
“저 차 잡아!”
“포로 여자도 있어, 당장 쫓아가!”
불현듯 들려온 외침에 데베르는 핸들을 한 손으로 쥔 채, 허리춤의 총을 꺼내 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온 적군의 총알이 운전석 창문을 깨곤 조수석 앞 유리창에 박혔다. 데베르는 속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한편, 바짝 옆으로 다가온 브리틴 군용차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서너 명이 올라타 기관총을 날리는 것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후원 저 너머 지평선에서부터 전투기 한 대가 날아왔다. 대장 격인 듯한 전투기는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몸집이 컸다.
데베르는 깨진 유리창 밖으로 잽싸게 손을 내밀어 올렸다. 적군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었으나, 고집스러운 손은 여전히 바깥으로 튀어나와 알 수 없는 수신호를 보냈다.
하나. 둘. 셋. 길쭉한 손가락은 선명한 뜻을 내포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읏.”
그중 손등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총알에 데베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뜨거운 선혈을 휘날리면서도 데베르는 하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뭐야?!”
브리틴 병사들이 저들끼리 하는 말도 얼핏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마주 보며 날아오는 전투기는 당장이라도 기관포를 발사할 것처럼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찰나, 전투기의 조종석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아아악!”
들려오는 비명에도 잔뜩 핏대선 눈으로 전투기를 노려보던 데베르가 핸들을 급하게 우측으로 꺾었다. 사나운 기세로 직진하던 전투기가 느닷없이 선회함과 동시였다. 너른 후원 잔디밭을 크게 반원을 그리며 돈 전투기가 데베르의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군용차를 빠르게 쫓아가, 기세 좋게 폭탄을 터트렸다.
그를 죽이려 했던 처형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김 없는 폭파 당하는 모습이 깨진 사이드미러에 언뜻 비쳤다.
더 이상 두 사람의 길을 방해할 것은 없었다.
“정신 차려!”
벌게진 데베르의 시선이 옆자리를 향했다.
“베….”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던 데베르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여자의 얼굴 어딘가를 헤맸다.
차체의 흔들림을 따라 맥없이 팔랑거리는 고개를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핏방울은 베스의 귓불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얌전히 눈꺼풀을 내리 깐 얼굴은 쏟아지는 포탄 세례에도 평온하기만 했다.
“베스!”
숫제 울음 같은 고함이었다.
차마 세게 흔들 수도 없어, 데베르는 똑같이 피로 축축한 제 손으로 여자의 뺨을 더듬었다. 그 사이, 차는 브리틴 왕궁 후원을 지나쳐 넥서스 국경선 가장 끄트머리를 향하는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이 디데이였다.
작전명 ‘실패’가 ‘완수’가 될 바로 그 디데이.
계속해서 머리맡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 날개엔 클리프가의 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일어나. 일어날 수 있잖아.”
앙상한 나뭇가지로 뒤덮인 숲 한복판에서 차를 멈춘 데베르는 조급하게 베스의 얼굴을 제게로 틀었다.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자, 참으로 오랜만에 전해지는 이 여자만의 온기가 그를 안달 나게 했다. 온몸이 차가운 와중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마지막 구석이 그를 더 간절하게 만들었다.
꺼져가는 숨결에 제 숨결을 욱여넣었다.
언젠가 이 여자가 저를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놔두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꼴사나웠다. 이만큼이나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적어도 이 여자에게만큼은 변함없이 이기적인 사내란 것을.
“넌 살아야 해. 넌…!”
얼음장 같은 몸을 끌어와 제 품에 안았다.
운전석 틈을 너르게 벌리고 휘청거리는 여자의 등을 단단히 받친 채, 재차 입술을 겹쳤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거대한 엔진음이 사위를 빼곡히 채웠지만, 이 여자가 내뱉는 숨에만 집요한 감각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했다.
돌이켜보니 그에겐 모든 순간이 베스 제인스에게 다가가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지금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하잘것없는 제 숨을 이 여자에게 전해 보려는 그런 발악.
제발. 제발.
나를 위해 살아달라는 이기적인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이러지 마…. 베스, 제발 이러지 마.”
아무리 쑤셔 넣으려 해도 전해지지 않는 숨결에 데베르는 베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 너머로 끔찍한 침음이 기어 나왔다. 하지만 감히 입술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여자의 죽음도, 그리고 그로 인한 제 후회도 인정하는 것이었으니까.
힘없는 여체를 제멋대로 깊이 끌어안자, 늘어져 있던 두 팔이 그의 어깨를 얼추 감쌌다. 꼭 마주 안아주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거기에 베스의 의지는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한참을 숨을 헐떡이던 데베르는 겨우 핸들을 다시 쥐었다.
“돌아가자, 우리.”
그게 웨인이든 번트든, 혹은 네가 말한 메르딘이든. 어디든 함께.
꺼져버린 시동을 다시 걸고, 컴컴한 길을 밝힐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쩌면 저 때문에 더 숨이 막혔을 여자를 제게서 떼려는 순간. 그의 목덜미를 타고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톡.
자칫 느끼지 못할 만큼 미약한 손길이었으나, 데베르에게는 온 세상이 흔들린 것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함부로 몸을 들썩일 수조차 없었다. 혹시 제 착각일까 두려워 제 가슴팍에 닿은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내게 조금만 더 확신을 준다면….
톡. 톡.
“아….”
까만 눈송이처럼 보드라이 감겨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 * *
“엇, 저기!”
비밀리에 감춰져 있던 숲길 끝자락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브리틴 군용차에 보초병들이 빠르게 공격 태세를 갖추고, 총구를 겨누었다. 퍽, 빗나간 총알 하나가 차의 사이드미러를 맞추자마자 뒤쪽에서 짤막한 고함이 들려왔다.
“일동 사격 중지. 아군이다!”
넥서스군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잿빛 머리칼을 망원경으로 발견한 보초 대장의 외침이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공포에 질려 창밖을 쳐다보던 아이네스는 조수석에서 안겨나오는 인영 하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들것, 들것 가져오세요!”
극비밀리에 옮겨진 전장 병원은 소위 버려진 브리틴 땅에 위치해 있었다.
명목상은 선황제의 베스티아 선황후를 향한 결혼 선물이었으나, 쓸모없는 넥서스 국경 끄트머리의 땅은 잠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가 오랜 시간 무관심 속에 방치됐었다. 아더의 말에 따르면 ‘겁대가리를 상실한 군대장’이 이곳을 요충지로 가리키기 전까진 말이다. 법률상은 브리틴의 영토였기에, 지도상의 넥서스 영토만을 샅샅이 뒤지던 브리틴군의 눈을 피하기도 꽤 용이하다는 것이 데베르의 지론이었다.
아이네스는 바로 그 버려진 시가지의 낡은 여관 하나에서 뛰어나오는 중이었다.
“베스!”
들것에 실린 여체는 지체 없이 병동 가장 깊숙한 곳으로 옮겨졌다.
아이네스는 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베스의 맥박을 확인하더니 약제실로 뛰어갔다. 복도 너머에서 우연히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든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에 바든은 욕설을 지껄이며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베스, 내 말 들릴 거야. 듣고 있는 거 알아. 잠깐 잊었나 본데 넌 여전히 내 부하병이고, 그러니 상관인 내 말을 들어야 해. 살아. 숨 쉬어. 그게 네 임무이자 의무야.”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 혹은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가 정신줄을 흔들어댔지만, 데베르는 고요히 베스의 귓가에 대고 말을 이어갔다. 설령 그게 헛소리일지언정 계속해서 뭐라 지껄여댔다. 듣고 있노라고 숲에서 그를 부르던 손끝이 새파랗게 시들어 있어도, 깊이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는 더는 동요치 않았다.
“넌 약하지 않아.”
비록, 언제 끊길지 모를 미미한 날숨에 의지한 치기일지언정.
“난, 단 한 번도…”
핏물이 엉겨 붙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겁쟁이 같은 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들것 아래로 고개를 처박았다.
“…너만큼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수없이 이 여자 앞에서 약한 척을 해댔는데, 막상 정말 약한 제 모습을 보이려니 두려웠다.
주인 없이 나뒹구는 붉은 십자 완장을 급히 주워, 맥없이 흐늘거리는 여자의 팔뚝을 감쌌다. 남아도는 완장 끈을 꽉 조이며 볼우물이 팰 만큼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이 여자를 알 것 같았다.
“봐.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베스 제인스는 누구든 살려내고, 구해내고….”
뻣뻣한 완장을 찬 손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경련하던 손이 얼떨결에 스친 것일 수도 있지만, 데베르는 이 여자가 자신을 또다시 부른다고 믿고 싶었다.
“날 구해낸 책임을 져야지….”
끝까지 떠들어대리라 자신했는데, 더 이상 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결국은, 이 말밖에 남은 게 없었다.
“데베르 군대장!”
막 병원에 도착한 아더가 여전히 차에 올라탄 채 그를 불렀다. 데베르는 베스에게 잡히지 않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젠 제국의 군대장이 되어야 할 순간이었다. 수많은 목숨을 등에 업고, 그들을 살려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닌 데베르 클리프 군대장.
그러나 아직 저를 붙잡고 있는 여린 손을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흣, 으….”
베스는 끝없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애썼다. 꿈도, 현실도 아닌 어딘가에서 의식이 자꾸만 부유했다.
손에 잡히는 데베르의 존재만을 의식하기 위해 매초 발버둥을 쳤다. 그 고전이 길어질수록 새카만 눈동자의 빛은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다. 베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제 시선 속에 무너져가는 남자의 모습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살, 아….”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자 탁한 목구멍 새로 걸쭉한 핏물이 튀어나왔다.
반드시 살아남아 줘, 나를 위해.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다. 쉽사리 당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입에 올릴 때마다, 얼마나 내가 속상했는지 아느냐고. 하지만 투정을 부리기엔 숨이 너무 가빴고, 심장이 못 견디게 뜨거웠다.
말해야 하는데.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전할 것 같은데.
“데베르 클리프!”
야속한 시간은 마침내 눈을 마주친 연인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베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입꼬리를 올렸다. 이보다 더 엉망일 순 없겠지만. 어쩌면 웃는 모습이 아니라 고통에 찬 일그러진 얼굴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마지막이라면 조금이라도 그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첫 연인이자 부인일 테니.
“…후회, 하지 마요.”
다시 볼 수 있어 기뻤다. 당신을 너무 오래 의심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서로를 원망한 시간이 아깝다. 하고픈 말들이 많았지만, 고르고 골라 끝내 선택한 말은 이 말이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한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니, 당신도 후회하지 말길.
내 세상에서 날 구하러 와 준 유일한 당신을, 나 또한 구해낼 수 있어 기뻤음을 알아주길.
“…베스.”
베스 제인스는 그에게 문신처럼 새겨진 군대장의 임무를 벗겨내고, 고고한 공작의 껍데기를 치워내 보잘것없는 사내 한 명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베스!”
당신은 최선을 다했으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사랑스럽고도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데베르 클리프의 유일한 상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