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어머, 배신이라도 당한 얼굴이구나.”
아, 공주는 저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
베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얼마나 어설프게 라프넬의 흉내를 냈는지를 떠올렸다.
라프넬은 자신이 겨눈 총구 앞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베스를 예사로운 얼굴로 바라봤다. 어디서 몸싸움이라도 한 듯 찢어진 가운에,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슬립 끈, 흠뻑 젖어 샛노란 물을 떨어뜨리는 머리카락.
“감히 내 후회를 막겠다고 건방을 떨 떼는 언제고, 고작 이런 꼴이라니.”
신랄한 말의 내용과 달리, 고요한 어투엔 빈정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으, 으윽! 비켜!”
“끄읍…!”
그때, 대치 중인 두 사람의 사이로 엉겨 붙은 데베르와 칼론의 몸뚱이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의 목을 겨누는 남자들의 팔뚝 위로 성난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베스는 간절하게 그들 너머에 서 있는 라프넬을 바라봤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의 공주는 서서히 승패가 판가름 나기 시작한 두 군대장의 난투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라프넬을, 넥서스 공주….”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칼론의 얼굴이 시뻘겠다. 기이한 행색이었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도 약 기운에 절어 벌건 입술을 헤벌린 채 킥킥거리고만 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데베르의 꼴이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어설프게 주먹을 쥔 탓에, 흰 손마디는 멀쩡한 살갗 하나 붙어 있지 못하고 모두 벗겨져 있었다.
“으아아…!”
그 순간, 갑자기 칼론이 폭발하듯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데베르는 악착스럽게 그의 등 위로 덮쳐들어, 제 다리를 상대의 어깨 위에 걸쳤다. 강한 악력이 칼론의 목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마치 목마라도 탄 듯한 모양새였지만, 풍겨대는 살벌한 기운은 전혀 다정스럽지 않았다.
칼론은 데베르를 떨어뜨리기 위해 거친 벽에 등을 마구잡이로 부딪혔다. 데베르의 약점인 등의 상처를 알았기 때문에 나온 짓이었다. 역시나. 채찍질이 아물지 못한 등에서 미지근한 핏물이 다시 배어 나왔고, 아물기 위해 그나마 맞붙은 살갗은 다시 처음처럼 벌어졌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베스는 밀실 깊숙이 나동그라진 또 다른 총을 건지기 위해 다시금 몸을 바르작거렸다.
“바보들.”
라프넬은 눈앞의 아연한 광경을 남인 것처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코앞으로 별안간 시커먼 인영이 들이닥쳤다.
“끄으윽…!”
라프넬은 태연한 얼굴로 제 앞을 가로막은 칼론을 올려다봤다. 데베르에게 숨통이 졸려 실핏줄이 다 터진 눈동자는 오로지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그의 턱 밑을 우악스럽게 옥죄는 데베르의 팔뚝은 일말의 동정도, 망설임도 없었다.
곧 끝이겠구나.
라프넬은 뒤늦게 입꼬리를 부드러이 휘었다. 꽤 예쁜 미소였다. 그저 탐낼 만한 꽃처럼만 굴던 연회장의 메이너 공주를 닮은.
“크윽.”
입술 새로 왈칵 핏물을 쏟아낸 칼론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히더니, 장대하던 남자의 몸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제 발치에 내리꽂듯 떨어진 칼론의 입술을 바라보던 라프넬은 가만히 무릎을 굽혀 쭈그리고 앉았다. 마치 난폭한 입맞춤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하, 베스.”
함께 바닥에 내던져진 데베르의 눈은 곧장 베스부터 찾았다.
밀실 구석에 바짝 붙어 손을 바들거리는 여자는 금방 보였다. 이제껏 만져본 것과 다른 총을 어떻게든 해 보려 달그락거리는 얼굴엔 감히 말론 형언하지 못 할 절박함이 비치고 있었다.
데베르는 상처 가득한 제 손으로 비슷하게 상처투성이가 된 여린 손을 감쌌다. 잡힌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베스의 시선이 드디어 그를 향해 올라갔다.
계속해서 헛돌던 손길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빈 탄창이야. 지금 당장 나가-”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밀실이 크게 진동했다.
“어서!”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칫했다. 밀실 문 앞엔 이미 장전을 마친 총을 쥐고 있는 라프넬이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묘하게 그들을 비껴갔다.
또다시 지하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왕궁 위층 어딘가에서 유리창이 터지는 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베스는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은 속을 애써 참으며 데베르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을 라프넬에게 뻗었다.
“가자… 라프….”
그 작고 파리한 손을 본 라프넬은 그제야 빈정거림이 가득한 헛웃음을 토해냈다.
“하, 하하.”
이 멍청한 계집애는 끝까지 이러는구나. 정말 끝까지.
“…난 네가 이래서 싫어.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대단한 척 구는 게.”
라프넬은 물감이 묻은 손가락으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칼론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제게 입 맞추던 입술은 죽음의 색채를 띠고 있었고, 저를 향해서 달아오르던 눈동자는 감긴 눈꺼풀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시 보지 못할 초상화를 그리듯, 그의 선명한 이목구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게, 결말이었다.
늘 예상해 왔던 새빨간 독배의 결말.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줬으니, 너도 내 부탁 한 가지쯤은 들어줘야지.”
라프넬의 붉은 입술이 잠시 다물렸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어렴풋이 지하 계단을 울렸다.
“아더에게 가서 전해. ‘넌 지켜야 할 걸 지켰다고.’”
착해빠진 아더 메이너의 죄책감을 빌미 삼아, 얼마나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가.
라프넬은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새파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엷게 웃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한번쯤은 널 자유롭게 해 줘야지.
“그리고 난 내 사람의 곁을 지킬 거야. 참, 이 말은 전하지 말렴.”
더러운 바닥에 닿아 있는 칼론의 머리통을 새하얀 제 무르팍에 올리자, 소름 끼치는 냉기가 전해졌다.
문득 라프넬은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만약 제 심장을 똑 반으로 쪼갤 수 있다면, 하나는 칼론의 입에 집어넣고 나머지 하나는 아더의 잇새에 구겨 넣고 싶다고.
그러면 또 아더는 엄한 목소리를 내겠지. 남들에겐 짓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라프넬’, 이렇게.
칼론은 어떻게 굴까. 전처럼 웃어줄까.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데베르 공작.”
평생을 질리도록 연기한 황족의 목소리로 데베르를 불렀다. 고고히 쏘아붙이는 제 말투에도, 건방진 공작의 표정은 의연하기만 했다.
“부인의 눈을 가려주세요.”
이 진창 속에서도 기어이 가장 반짝이는 걸 채간 걸 보면, 당신도 참 욕심 많은 남자야.
데베르는 아무 말 없이 열 기운에 들떠 할딱거리는 베스를 제게로 돌려세웠다.
라프넬의 총구가 천천히 제 턱밑으로 향했다.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들어 본 총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차가웠고, 또한 쓸쓸했다.
“아더 넌 매번 이 무게를 견뎠구나.”
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후회되었다.
어쩌면 다른 결말이 있었을지도 몰라.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굴곡 하나 없는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새 좀 더 차가워진 칼론의 뺨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자신은 시간을 되돌아가도 또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사랑-”
군홧발 소리가 모퉁이 끝까지 닥쳐왔음을 깨닫자마자, 라프넬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사랑해.
미처 뱉지 못한 말은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렸다.
“저기 있다!”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브리틴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진 칼론과 공주의 시체를 발견하곤, 목청을 높였다.
데베르는 베스의 손목을 잡아채 그대로 지하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손에 닿는 여자의 모든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아, 아무래도 나는….”
가는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지만, 데베르는 못 들은 척 이를 꽉 깨물었다. 쫓아오는 병사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서 우수수 건물 잔재가 쏟아지더니 밀실 복도 끄트머리가 폭삭 주저앉았다. 난데없는 붕괴에 몸이 깔린 브리틴병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데베르는 베스를 품에 안아 들었다.
쾅, 콰앙. 거대한 폭음이 사방에서 압도해왔지만, 데베르는 기민하게 주변을 살피며 눈에 보이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오랜 세월 넥서스의 연합국이었던 브리틴 왕궁의 구조는 행여 그 장소가 지하 밀실일지언정 데베르에겐 뻔했다.
“여기 썩은, 으악!”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병사 하나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제 눈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 찰나에 총을 빼앗은 데베르는 단숨에 방아쇠를 당겼다. 어느덧 매캐한 연기가 기어들어 오는 로비 입구가 바로 위에서 보였다.
“베스, 잠시만 여기에.”
계단참에 베스를 내려놓던 데베르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난, 안 될 것… 흐읍.”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코피가 여자의 얼굴을 적시며 가슴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뚝, 뚜욱. 굵직하게 떨어지는 핏방울은 그녀가 입술을 열기 위해 뻐끔거릴 때마다, 잇새마저 파고들어 갔다.
한계야.
베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제 허약한 몸은 그 환각제를 견디지 못할 것이란 걸.
“…먼저 가요, 먼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에도 피가 묻어 질척했다. 이미 상처로 피범벅인 맨발은 시커먼 탄재까지 묻어 새하얀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전투기 무리가 굉음을 내며 왕궁을 덮치자, 로비 천장에 달려있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끊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시커먼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지는 왕궁에 정신이 팔린 병사들은 지하 계단참의 포로를 발견하기는커녕 도망을 치느라 바빴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데베르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는 베스를 아득히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현실이 아닌, 제 나름의 환각을 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겁에 질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뭐에 쫓기는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헉헉거리는 여자의 입술을 데베르가 급히 제 손으로 덮었다.
베스의 습한 날숨과 뜨거운 핏물이 그의 손을 적셨다. 절망스럽게도.
“내 눈 봐! 할 수 있어, 천천히 숨 쉬면 돼. 넌 괜찮아. 다 괜찮아.”
저답지 않게 빠르게 속삭이며 데베르는 여자의 눈을 제게로 고정했다. 서서히 풀려가는 동공 속엔 그가 없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먼저 가라고 읊조리는 목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데베르는 근처에 엎어진 브리틴 병사의 시체에서 군복 재킷을 벗겨, 넝마나 다름없는 슬립 한 장이 입고 있는 옷의 전부인 베스의 몸을 덮었다. 그러곤 로비로 뛰쳐나가, 근처 군용차에 올라타려는 운전병 하나를 조준했다.
터져대는 공습기의 폭격 속에서 날아가는 총알 하나쯤은 기척도 나지 않았다.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운전병의 머리통이 왕궁 앞에 커다랗게 세워진 처형대를 향해 꺾였다.
칼론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밤, 데베르 클리프는 공개 처형될 예정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만 해도 왕궁 곳곳을 돌아다니던 병사의 인력이 전부 바깥으로 향했던 것 또한, 저 거대한 처형장을 세우고 불길을 지피기 위함이란 걸 베스는 알지 못했다.
“제기랄!”
운전석 문을 열자마자, 차에 숨어 있던 또 다른 브리틴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데베르는 우악스럽게 상대의 멱살을 잡아채, 탄환이 동난 총의 개머리판으로 목 뒤를 세게 가격했다.
“헉, 흐….”
시체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린 데베르는 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액셀을 꽉 짓밟았다. 이 광경을 멀찍이서 발견한 다른 병사들이 저들끼리 뭐라 외치며 군용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지만, 이채가 번뜩이는 잿빛 눈동자는 오로지 왕궁 지하 계단에만 온전히 제 초점을 맞췄다.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그를 태운 군용차가 살기 어린 포효를 울리며 왕궁 로비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