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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8화 (198/206)

198화

“네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니.”

축축한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왔다.

“응? 라프넬.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작은 초 하나 없는 욕실은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벽면에 창이 크게 나 있었지만, 빠르게 저물어가는 겨울 노을은 그새 감색으로 물들어, 안 그래도 어두운 실내를 더 컴컴하게 만들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베스는 등 뒤에 감춘 촛대를 꾹 움켜쥐곤, 눈동자만 설핏 들어 올렸다.

창을 등지고 선 칼론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인 걸까.

베스는 초조하게 등 뒤에 감춘 촛대를 고쳐 잡았다.

“예쁘게 입고 있네? 이리 와 봐.”

한 발을 떼던 칼론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빌어먹을. 나직이 욕설을 짓씹으며 고개를 젖힌 칼론의 눈동자가 돌연 살벌하게 번득였다.

“이리 오라니까!”

순식간에 코앞에 끼쳐 든 날짐승 같은 체향과 함께 베스의 팔뚝이 거세게 잡혔다. 베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반대 손에 쥔 촛대를 힘껏 휘둘렀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목이 아릿해졌다. 끈적한 액체가 손끝에 닿은 것도 같았다.

“아더에게 기어가봤자…!”

욕실 문고리를 지지대처럼 움켜쥐고 달아나려던 베스의 허리가 단숨에 칼론의 단단한 팔뚝에 휘감겼다. 쥐고 있던 촛대는 욕실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버려, 베스는 빈손을 허공에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윽.”

미친 듯이 반항하는 베스의 팔꿈치에 칼론의 콧대가 부딪혔고, 마구잡이로 휘젓는 발길질엔 욕실 문이 치였다.

“얌전히, 편지나 쓰라고 했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칼론이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 안으로 베스의 몸을 패대기쳤다. 온몸으로 끼쳐 드는 한기에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킨 베스는 악착스럽게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성인 서너 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욕조에 두 사람의 몸이 엉망으로 처박혔다.

진창이 있다면 바로 여기를 말하는 것일 테다.

“감히 네가 나를 우습게 취급해?!”

칼론의 무지막지한 손아귀가 베스의 목을 욕조 바닥까지 짓눌렀다. 그러다가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간헐적으로 힘이 빠질 때가 있었는데, 베스는 그럴 때마다 사력을 다해 욕조 바깥으로 손을 뻗어 놓인 모래시계며, 쓰러진 향유 병들을 집어 던졌다.

“크읍…!”

다시 소용돌이치는 욕조 안으로 처박힌 베스는 힘들게 눈을 치뜨고 수면 위로 일렁이는 시계를 노려봤다. 때아닌 물속 드잡이질에 염색물이 빠지는지, 처음엔 말갛기만 하던 욕조 물이 점점 샛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오 분.

오 분이 지났어.

애초에 이 환각제를 따로 빼놓았던 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거구의 사내더라도 단 오 분이면 약 기운에 휘청거리게 할 수 있는 독하고 더러운 약. 지금 칼론은 그 약 기운이 온몸으로 뻗쳐나가고 있을 것이다. 향뿐만 아니라, 약을 탄 술까지 직접 마셨으니.

그때, 커다란 욕조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베스의 몸이 느닷없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푸학, 터져 나오는 숨에 컥컥거리는 여린 여체는 남자의 어깨 위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이, 건방진, 라프….”

이내 베스의 몸이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던져졌다. 얼른 침대 밖으로 달아나려 허둥거리는 발목은 여지없이 남자의 뜨거운 손에 붙잡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마른 어깨를 잡아채 시트 깊숙이 눌렀다.

그 순간, 검붉은 칼론의 동공이 커졌다.

“너….”

거칠한 손가락이 부드러운 여자의 뺨을 그악스럽게 뭉갰다.

“베스…?”

“읏.”

소리를 내지 않으려 꽉 깨문 베스의 입술 새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절대 병사들이 와선 안 된다. 그랬다간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갈 테니.

“하, 하하. 어떻게 이럴 수가.”

칼론이 맥락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열기가 뻗치는 제 이마를 여자의 빗장뼈에 갖다 댔다. 그 뜨끈한 감각에 소름이 끼친 베스가 무릎을 세워 저를 짓누른 몸뚱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허사였다.

“날 보러 왔구나.”

짐승 같은 안광과 달리 새하얗기만 한 이가 이질적이었다.

“제길, 거기 라프넬 너는 조용히 하고! 내가 지금 바쁘다고 했잖아.”

환각과 현실을 오가는 칼론의 시선을 직면한 베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은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뱀 같은 눈동자를 공포에 질린 채 마주 봤다.

그가 욕정하고 있다.

그것도 제게.

“끔찍한 표정이네. 왜? 내가 데베르가 아니라서 싫은 건가?”

음욕으로 점철된 눈빛은 상대의 공포에 더 신이 난 듯, 번들거리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킥킥거리던 칼론은 허우적대며 협탁을 향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려 도망치려는 여자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몸짓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윽, 놔…!”

“너도 이걸 마시면 내가 그 새끼처럼 보일 거야.”

칼론이 손에 든 건 마개가 열린 술병이었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베스의 몸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올가미처럼 그녀의 몫을 옥죄는 남자 때문에 결국엔 침대 위로 엎어졌다.

“마셔. 어서.”

이젠 완전히 동공이 풀린 칼론은 여자의 얼굴에 술을 들이부었다. 어떻게든 입을 다물려는 여자의 턱을 움켜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허옇게 질린 얼굴 위로 염색약을 닮은 황금빛 액체가 떨어졌다.

“으읍. 컥….”

숨을 더는 참지 못해 저도 모르게 연 목구멍 사이로 차가운 액체가 들어가는 느낌이 선연했다. 바르작거리는 여체가 점점 침대 가로 밀려났다.

어느새 상체가 거의 허공에 들린 베스가 손을 등 뒤로 휘저어대자, 매끈한 유리병 목이 언뜻 손에 잡혔다. 칼론이 도착하기 직전, 급히 침대 아래에 집어넣었던 술병 중 하나가 굴러 나온 모양이었다. 베스는 제 입안을 헤집는 두툼한 엄지를 그대로 깨물었다.

“아악!”

그와 동시에 손에 쥔 묵직한 위스키병이 공중으로 들렸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나기라도 맞은 듯 온 얼굴로 쏟아지는 술, 깨진 유리 조각이 드러난 목이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찔한 쓰라림, 갑작스레 훅 밀려드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

“허, 허억.”

밭은 숨을 토해내던 베스는 제 가슴팍에 쓰러진 칼론의 머리통을 떨리는 손으로 밀어냈다. 목덜미가 아직 팔딱거리는 걸로 봐선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데베르.”

베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칼론의 허리춤에서 커터칼과 권총을 꺼내 침실을 뛰쳐나갔다. 군대장이 제 여자와 긴 밤을 보낼 것을 예상했는지, 복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헉, 으흑.”

맨발로 복도를 뛰어가던 베스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반듯하던 복도가 울렁이며 베스의 몸도 함께 기우뚱했다.

어쩌지 못할 약 기운은 이미 베스의 몸에도 퍼져가는 중이었다.

“가, 가야 해….”

내딛는 걸음마다 발자국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거의 굴러떨어지다시피 로비까지 도착했지만, 따라붙는 군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실내가 고요해도, 그 이유 따윈 궁금치 않았다.

오직 데베르.

오로지 데베르 클리프 그 남자 하나만을 여기서 구해내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지하로 도착한 베스는 좀 전, 제가 공주 흉내를 내며 직접 걸음한 밀실 앞까지 단번에 찾아갔다. 익숙한 문 앞에 서자마자 곧장 눈을 감고, 매일 밤 곱씹던 길을 떠올리기 위해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를 더 세게 흔들었다.

“왼쪽으로 스무 걸음. 그다음 계단을 내려가고.”

혀끝을 맴도는 속삭임을 이정표 삼아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서 열 걸음 가다가, 또다시 계단이 나오면 둥근 손잡이가….

얼마나 어두운 지하를 헤맸을까. 묵직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흐릿해진 베스의 정신을 번쩍 깨웠다.

“무슨 놈의 처형을 해 다 졌는데 한다고 지랄이야. 귀찮은 건 꼭 날 시키지.”

모퉁이 구석에 조심스레 숨은 채 동정을 살피자, 복도를 채운 빼곡한 밀실 중 하나로 잔뜩 구시렁대는 병사가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기다.

베스는 확신했다.

저기에 그 남자가 있어.

발소리를 죽인 채, 한 발짝씩 걸음을 떼는데 갑자기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베스가 얼른 밀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벌건 핏물을 손가락에서 흥건하게 흘리고 있는 병사였다. 그다음은, 짐승처럼 그 손가락을 물고 놓지 않는.

“데베르…!”

“으아악!”

괴성을 지르던 병사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자마자, 베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보다 한참은 큰 덩치에게로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인영의 등장에 당황한 남자가 놓친 총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야!”

질겁을 한 병사의 외침과 동시에 데베르 또한 물고 있던 손을 뱉어냈다. 아직 그는 묶여 있었다. 베스는 칼론에게서 훔친 총을 곧장 발포했으나, 또다시 흔들린 시야에 탄창은 남자의 종아리로 빗나갔다. 하지만 고통에 익숙지 못한 병사는 그때부터 정신없이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내 다리, 흐으윽!”

“베스?”

데베르의 눈을 가린 안대부터 빠르게 풀어낸 베스는 의자 뒤편으로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서둘러 커터칼을 꺼냈다. 그러나 이미 탈력감이 밀려온 여자의 손힘으로 두껍디두꺼운 밧줄은 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윽, 이 포로 새끼들이!”

그 와중에도 불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데베르가 성급하게 묶인 손을 흔들었다. 잔뜩 핏대가 선 목이 베스의 이름을 재차 불렀지만, 베스는 귀라도 먹은 듯 고집스레 밧줄에만 골몰했다. 얼핏 그토록 보고 싶던 잿빛 눈동자가 저를 돌아보는 것도 같았다.

그때, 음산한 목소리가 밀실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저 계집애는 여기로 왔군….”

칼론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비틀린 적색 눈동자는 의자에 묶인 데베르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제 부하를 먼저 발견했다.

“크큭. 불쌍한 늑대 새끼. 바닥에서 빌빌거리고 있다니.”

“억!”

베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병사의 몸이 푹, 앞으로 꺾였다. 병사의 가슴팍에서부터 동그랗게 번지는 핏물을 본 베스는 경악에 차, 소총을 든 칼론을 올려다봤다. 그제야 칼론의 고개가 그들을 향해 온전히 돌아갔다.

빨리. 더 빨리.

마구잡이로 그어대는 커터칼이 제 손까지 벴지만, 베스의 시선은 조금씩 매듭이 끊어지는 밧줄에만 가 있었다.

“두 연놈을 동시에 처형장에-”

성큼성큼 다가온 칼론의 손아귀가 데베르의 얼굴을 향하려는 찰나, 한발 먼저 밧줄이 풀렸다. 앉은 상태 그대로 데베르가 칼론의 무릎을 군홧발로 찍자, 아주 잠깐 비틀거리던 칼론은 대번에 상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한 몸처럼 엉겨 붙은 두 사람이 밀실 곳곳을 뒹굴며 만신창이인 꼴로 맞붙었다. 뼈가 비틀리고, 어딘가 부러지는 듣기 싫은 둔탁음이 계속해서 적막한 밀실 안을 울렸다.

“흐윽, 흑.”

빈 의자에 고개를 처박은 베스의 머릿속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봤던 장면이 몇 번이나 눈앞에서 반복됐고, 귓가엔 이상한 바람 소리며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들려왔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가라니까!”

저 남자가 날 부르는 소리겠지. 아마도 도망가라는 뜻일 거야.

베스는 어렴풋이 알아챘으면서도, 후들거리는 사지에 애써 힘을 주고 떨어진 총을 향해 기어갔다.

할 수 있어. 장전하고, 조준하고, 발사. 해봤잖아.

“내가, 해야만….”

영겁 같은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비로소 까만 그립에 손이 닿으려는데, 분명 손끝에 닿아야 할 서늘한 촉감이 불현듯 제 이마로 전해졌다.

“….”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찬란한 황금빛이 들어왔다.

당신이, 어째서.

“그동안 내 흉내는 잘 냈니?”

총구 너머로 그토록 간지러운 웃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라프넬 공주뿐이었다.

“어머, 배신이라도 당한 얼굴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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