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베스는 눈을 크게 떴다.
바깥을 지나다니는 보초병들은 갑작스런 사냥총 소리에도 여상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잠시 숨을 죽인 채, 들려오는 대화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부지런히 들려오던 발소리가 멀어진 찰나, 재빠르게 문을 밀었다.
왕족들의 비밀 통로란 공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휑하니 후원이 펼쳐지면 어쩌나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통로 문은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낮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풀로 가려진 수로 입구는 꽤 괜찮은 은신처임이 분명했다.
“뭐 없지?”
“예. 쥐새끼 하나도요. 아무래도 그날 밤에 도망친 거 같습니다.”
척척한 바닥을 밟고 까치발을 들자, 왕궁 주위를 오가는 이들의 군화가 머리맡에서 보였다. 어느새 불그레한 어스름이 드리워진 하늘은 왕궁 주변은 물론, 후원 뒤편의 숲까지 비슷한 색으로 물들여 바닥에서 빠끔거리는 베스의 금발을 잘 감춰주었다.
“나 원. 머리 시커먼 건 여자뿐 아니라 짐승 새끼까지 잡아두라 난리니. 어디 검은 머리 토끼라도 없나?”
모퉁이에 선 두 보초병이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틈을 타, 베스는 얼른 수로 위로 올라왔다.
“엇?! 저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베스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불어온 바람이 아직 염색약이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나부끼고 지나갔다.
다가온 병사는 이 날씨에 얇은 가운 차림의 여자를 의문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후원으로 가신 줄 알았는데… 홀로 어디를 가십니까.”
최대한 태연히. 아무렇지 않게. 라프넬 공주답게.
베스는 눈을 내리뜬 채, 고고히 답했다.
“내 행방까지 네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미미하게 목소리 끝이 떨렸지만, 병사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의연한 여자의 대답에 제가 더 진땀을 빼며 쭈뼛거렸다.
“그게 아니라, 칼론 대장님께서 공주님의 호위를 항상 엄히 단속하셔서…. 신발은 또 어쩐-”
군화를 벗어 던지는 것에만 신경을 써, 저도 모르게 맨발로 뛰쳐나온 게 그제야 눈에 띄었다.
“내가… 후원 연못에서 발가벗고 수영이라도 했다고 고해야 네가 길을 비킬 건가 보구나.”
“앗.”
머리카락을 적신 물이 노을을 머금은 붉은 잔디 위로 뚝뚝 떨어졌다. 얇은 가운 아래의 젖은 슬립 끈을 뒤늦게 발견한 병사가 급히 고개를 처박았다.
항간에서 왕궁 침실 안의 넥서스 공주를 뭐라 칭하건, 어쨌건 지금은 칼론의 여자였다. 성질머리 안 좋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굳이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지금처럼 삼엄하게 왕궁 주변을 지키는 상황에 공주의 도망을 염려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비켜.”
베스는 멀리서 자신을 힐끗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왕궁 로비로 들어섰다. 그곳에도 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칼론의 패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최측근인 몇 명을 제외하곤 정확히 라프넬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왕궁 주변을 지키는 말단병들이 지금껏 침실 인형처럼 고립돼 있던 공주의 세세한 이목구비나 키 따위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제 소유물에 과하게 집착하는 칼론이 라프넬을 밖으로 내돌리지 않은 탓이었다.
더군다나 공주의 첫 외출인 오늘의 후원행도 지켜본 자는 소수에 불과했기에, 멀찍이서 걸어가는 금발 머리의 가녀린 여자를 감히 그 까만 머리칼의 포로 간호사라 생각할 자도 없었다.
“안내해. 넥서스 포로들을 봐야겠어.”
로비에서부터 저를 조용히 뒤따르는 남자 하나에게 베스가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어차피 라프넬 공주를 제대로 아는 이들은 아직 후원에 있을 테니, 제 뒤의 남자도 그저 공주려니 하고 따라오는 것일 거다.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넥서스 포로들 말씀이십니까.”
“왜, 내가 그들을 풀어주기라도 할 거 같아서?”
“그게 아니라….”
“칼론의 명령이었더라도 이리 굼떴을지 궁금하네.”
새초롬하고 도도한 라프넬의 목소리와 달리, 차분하고 고요한 음색의 베스는 그 나름의 무게가 있었다. 약간 의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던 병사도 이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앞장섰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한 번 지나쳐 본 길들이 이어졌다.
베스는 어둠 속에서도 시야에 들어오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최대한 세세히 눈에 담았다.
익숙한 밀실 문 앞에 서자, 으레 지하실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열까요?”
그때 낯익은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베스를 데베르에게 데려가던 병사였다. 베스는 저도 모르게 떨려오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등줄기를 타고 덜 마른 염색물이 땀줄기처럼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를 얼핏 보더니 고개만 갸웃거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열어.”
밀실 안엔 브리틴에 잡혀 온 이후 베스와 함께하던 이들이 전과 비슷한 모양새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이젠 문가를 쳐다볼 힘조차 없는지, 그저 벽에 쓰러지듯 기대 꾸벅거리는 게 전부였다. 안으로 들어선 베스는 포로들을 지나쳐, 벽면에 붙은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의료품 바구니를 슬쩍 곁눈질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바닥이 더러우니 신발을 가져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높아진 베스의 언성에, 뒤편에 서 있던 병사 두 명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내가 방금 넥서스어로 말하기라도 했나?”
부러 성질을 부리는 척 휙 뒤를 돌며 바구니를 바닥으로 밀쳤다. 순식간에 엎어진 바구니에서 갖은 약봉지며 약통이 어지럽게 바닥으로 쏟아져, 적막한 밀실의 고요를 뒤흔들었다. 몇 개는 아예 바깥으로 굴러가 문가를 지키던 병사의 군화 코까지 건드렸다.
“공주님의 침실은 저희가 출입할 수 없어, 근처의 실내용 슬리퍼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이봐, 지키고 있어.”
“제기랄.”
병사 하나가 신발을 찾겠다고 로비로 사라지자, 졸지에 홀로 남은 보초병이 낮게 욕을 지껄이며 약병을 줍는 시늉을 했다. 베스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구석에 떨어진 제일 작은 봉지 하나를 소맷단에 감췄다. 병사가 미심쩍게 눈을 부릅떴을 땐, 방만히 벌어진 옷깃을 여미는 체하며 불룩 솟아오른 소매를 품 안에 숨긴 뒤였다.
병사가 문득 눈썹을 꿈틀거렸다.
넥서스 황족들이 눈동자가 새카맣다고 했던가?
“우선 이걸 신으십시오.”
하지만 보초병의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가야겠으니, 칼론이 도착하면 목욕 중이라고 알려.”
벌게진 남자의 귓바퀴를 확인한 베스는 침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지만, 엉금거리며 램프가 올려진 협탁까지 기어갔다.
“정신, 정신 차려.”
벌벌 떨고 있는 손 아래에서 땀이 배어난 약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봉지를 뒤집어 흔들자 스무 알 정도 되는 흰 알약이 협탁 위로 떨어졌다.
‘칼론은 늘 노을이 완전히 질 무렵에 침실로 돌아와.’
창밖으로 보이는 그림 같은 평원의 끄트머리는 어느덧 보랏빛으로 변모 중이었다.
베스는 서둘러 창가에 놓인 몇 개의 위스키병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근처에 놓인 촛대로 협탁 위의 약을 마구잡이로 으깨, 절반을 위스키병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마개를 다시 봉해 창가에 놓은 뒤, 남은 가루는 알코올램프 위에 놓인 삼발이에 올려놨다. 본래는 향을 피우기 위한 램프였지만, 지금은 목적이 달랐다.
삼발이 위에 놓인 조막만 한 쇠 접시가 불길에 달아오르자, 자글자글한 가루 위로 희뿌연 연기가 슬슬 피어났다. 베스는 곧장 숨을 멈추고, 약을 넣지 않은 나머지 술병들은 되는대로 침대 밑에 쑤셔 넣었다.
칼론은 반드시 저 약이 든 위스키만을 마셔야 하고, 침실을 가득 채울 이 기묘한 향을 맡아야만 한다.
왜냐면 저건 약이 아니라, 환각제이기에.
정갈한 정식 의약품 속에 섞인 껍데기만 비슷한 알약. 자세히 보면 모양이 제각기인 알약의 출처는 뻔했다. 전쟁통이면 늘 활기를 띠는 의료품 암시장을 노린 보호구역의 약쟁이들이 범인이리라. 벌써 그들이 한 번 손을 쓴 뒤, 멋 모르는 브리틴 병사들이 보급품을 훔쳐 온 게 틀림없었다.
“제발….”
더 빨리 향을 퍼뜨리기 위해 가운을 벗어 펄럭거리던 베스는 바깥에서 엔진음이 들리자 불안스레 창가로 고개를 뺐다.
“도착했어.”
창 아래의 붉은 머리칼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욕실로 뛰어들어, 욕조 끝에 달린 수도꼭지부터 한계치까지 돌렸다. 미끈거리는 식은땀에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 나서야, 겨우 욕실 문까지 잠가 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콸콸거리는 물줄기 사이로 침실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거침없이 실내를 거니는 묵직한 발걸음에선 조급함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라프넬?”
베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묵묵부답에 칼론이 뭐라 중얼거리는 게 어렴풋이 들렸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욕실 문에 바짝 붙어선 베스는 문틈에 귀를 갖다 댔다.
얼음통을 집게로 잘그랑거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났다.
“크읏.”
드디어 무언가 마셨는지 칼론이 쓴 입맛을 다시는 소리도 함께였다.
욕실 벽면에 걸린 크리스털 시계에 베스의 눈길이 옮겨갔다.
삼 분, 어쩌면 사 분. 그 정도만 여기서 버틸 수 있다면….
째깍거리며 넘어가는 초침이 유독 느리게 느껴지려는 찰나. 등 뒤의 손잡이가 갑자기 덜컥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흠칫 떤 베스는 겁에 질려 이미 잠긴 문고리를 공연히 힘주어 쥐었다.
“라프넬. 문 열어.”
어딘지 약간 나른해진 음성이었다.
베스는 다시 한번 침묵을 지켰다.
툭, 칼론의 두꺼운 몸통이 문 너머로 부딪히는 진동이 전해졌다.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고?”
음산해지는 목소리에 베스는 어둑한 욕실을 다급히 둘러봤다. 진작부터 욕조 밖으로 넘쳐난 물은 그새 발바닥께에서 찰랑거리는 중이었다.
“아직도 그 연못이 얼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네.”
갈수록 느릿해지는 목소리와 다르게,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손길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열라고 했잖아…! 라프넬!”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문이 쿵쾅거렸다.
더는 안 돼.
베스는 잠금쇠를 옆으로 밀친 채, 잽싸게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선반 위의 촛대를 풀어헤친 금빛 머리카락 뒤로 감추기가 무섭게, 바로 곁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척. 처억. 질척하게 떼 내는 발걸음은 베스가 아닌 욕조를 향했다.
베스는 고개를 들 엄두조차 못 내고, 수도꼭지가 잠기며 나는 쇠 긁는 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더 돌아갈 곳도 없을 만큼 꽉 잠긴 수도꼭지에서 뿌득거리는 마찰음이 났다.
“웃기지 않아?”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똑, 수면 위로 떨어졌다.
“네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