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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6화 (196/206)

196화

라프넬은 저를 감싸 안은 남자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바깥엔 지긋지긋한 눈발이 또다시 날리고 있었지만, 벽난로가 잔잔히 타오르는 침실 안만큼은 모든 근심을 잊은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부지런히도 제 살을 태우며 온기를 만들어냈다. 그 평온한 듯 잔인한 소리에 한참을 귀 기울이던 라프넬이 고요히 물었다.

“칼론, 정말 그거면 충분해?”

침대 헤드에 기댄 칼론은 답지 않게 얌전히 묻는 라프넬을 한번 돌아보곤, 협탁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입술을 축인 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

흐음. 라프넬이 입술을 꾹 다문 채 콧김을 내쉬자, 남자가 낮게 웃는 떨림이 그의 가슴을 타고 전해졌다.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붙인 라프넬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고작 편지 한 통?”

“고작 편지 한 통.”

“아더에게 내 존재가 그리 의미 있다고 생각해? 데베르보다?”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라프넬.”

“그냥. 궁금해서.”

오늘따라 질문이 많은 라프넬처럼, 칼론 또한 평소답지 않게 유난히 다정했다. 티 한 점 없는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칼론의 입술이 닿았다.

“이러니까 꼭 웨인에서 네가 날 꼬드길 때 같아.”

“공주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열렬히 노력했지.”

“왜?”

능청스럽게 묻는 라프넬의 눈동자가 시릴 만큼 새파랬다. 칼론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탐낼 만하게 보였으니까.”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제 품에 한참은 남아도는 여체를 거세게 끌어안으며, 칼론은 그녀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더에게 안부 편지, 해줄 거지?”

라프넬은 눈을 감은 채 그의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만약 붉은 꽃의 향을 맡는다면 이런 향이 나지 않을까. 어딘가 매캐하면서도 중독적이고, 또 못내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그런 기이한 향.

고상하게 안부 편지라 했지만, 그 의미가 아더에게 브리틴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제국의 공주는 이미 브리틴의 수장에게 모든 걸 내줬으니, 저를 욕보이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협상하고 종전을 하자. 그 저열하고 막중한 임무가 고작 그녀의 펜대에 달려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라프넬은 예쁘게도 눈을 접으며 저와는 결이 다르게 날카로운 남자의 눈매를 만지작거렸다.

“베스, 그 계집애를 찾아낸 게 초상화 목걸이라며? 나도 그걸 갖고 싶어. 내 초상화도 그려서 목걸이로 만들어. 그리고 칼론 네가 늘 가지고 다녀.”

멍청하다 싶을 만큼 귀여운 명령이었다. 칼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프넬은 손가락을 슬쩍 내려 이젠 그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라프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도 점점 더 아래를 향했다. 오가는 숨이 조금씩 짙어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으음…. 내일 왕궁 후원을 산책하다가 초상화를 그릴래. 여기서 지켜보니 그곳이 제일 예쁘던데.”

라프넬에게 왕궁 바깥은 지금껏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이 영악한 공주는 안부 편지를 핑계 삼아, 그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하는 중이었다. 마치 협박과도 비슷한 모양새였지만, 은밀한 곳을 향하는 그녀의 손길은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내가, 읏. 거절할 수 없단 걸 알면서 이러네.”

결국 한발 물러선 칼론에 라프넬은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유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실, 난 단 한 번도 널 택한 걸 후회한 적이 없어.”

혼잣말처럼 읊조린 속삭임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먹혀들었다.

* * *

베스는 깜깜한 위장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티끌만 한 잡음에도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칼론의 부하병인 듯한 남자가 무어라 멀리서 말을 하자, 화장대 앞에 앉아있던 공주가 곧 걸음을 떼는 소리가 들렸다.

찰카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베스는 있는 힘껏 벽에 달린 자그마한 손잡이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윽.”

동그란 쇠붙이를 붙잡은 손톱이 갈라지고, 반복된 마찰열에 여린 피부 껍질이 벗겨질 때에서야 묵직한 화장대는 한 뼘 정도 옆으로 밀려났다. 베스는 그 한 뼘을 붙잡고 온몸의 무게를 실었다.

딱 몸이 빠져나갈 만큼의 틈만 만들어놓고, 서둘러 입고 있던 군복부터 벗기 시작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두서없이 뜯어내는 군복 단추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벗어 던진 군복 주머니에서 끄트머리가 그을린 종이 한 장이 튀어나왔다.

침실 안으로 들어선 베스는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손바닥만 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 펼쳤다.

사망금 증서였다. 저 또한 전장 간호사로 일하며 몇 번이나 써냈던 흔하디흔한 사망금 증서. 그러나 그 밑의 날카로우면서도 단정한 이름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데베르 클리프]

그녀가 아는 세상에서 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남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제1 수취인 : 베스 제인스]

시선을 조금 내린 베스는 그 아래의 제2 수취인 자리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제2 수취인 : 베스 클리프]

베스 클리프를 쓰기 전, 그답지 않게 고민을 했는지 이름 첫머리에 만년필 잉크가 동그랗게 번져 있었다. 공습이 터지고 진군행렬이 시작될 즈음, 종탑 위에서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아마도 사망금 증서를 쓰던 모습이었으리라.

하워드를 죽이겠다 결심을 굳히고 공습 속에서 제국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우연찮게 발치에 떨어진 이 사망금 증서를 발견치 못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베스 제인스… 베스 클리프.”

그 미련한 남자는 자신이 죽고 나서야 전달될 이 사망금 증서를 통해 기어이 마지막 청혼을 한 것이었다. 너에게 나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클리프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면. 나 또한 너를 영원히 부인으로 생각했음을 알아달라고.

“대체 어떻게 견디라고….”

괘씸했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그 마음을 깨달았다고 덥석 껴안기엔 저는 너무도 겁쟁이였기에.

그래서 뻔뻔하게도 다른 사람인 체를 했다. 핑계 댈 건 많았다. 언제든 제 뒤를 쫓아와 그 남자의 발목을 움켜쥐려는 칼론과, 서로에게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생겨나던 숱한 죽음들.

하지만 가장 큰 속내는 모든 것을 잊은 채로 단 한 번만 그 남자를, 어릴 적 잃어버린 제 첫사랑을 마주 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누군가는 가장 깊숙한 전장으로 들어온 자신을 용감하다 말했지만, 전혀. 그저 겁이 많아 숨어든 것뿐이었다. 어릴 적 보호구역 구석을 끝없이 파고들던 베스 제인스처럼.

‘착각… 하신 거 같아요.’

과연 그 남자가 알까.

위험하니 더는 다가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으면서, 또 멍청하게 걸음을 내딛고 눈길을 주는 내 모습에 얼마나 한숨을 내쉬었는지.

‘제가 손, 치료해 드릴까요?’

외벽에 기댄 얼굴이 쓸쓸해 보여서.

‘할게요, 부인.’

당신의 입술에서 나온 부인이란 말이 못 견디게 설레어서.

‘…후회하지 않아요.’

이대로 영영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나서.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라면,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만 같이 있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덜컥 마음이 달아서.

‘내가 당신의 ‘부인’이니까.’

나도 한 번쯤은… 당신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신을 주고 싶어서.

어리석은 자신은 이만큼이나 멀리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을 결심해 여기까지 와놓고, 처음처럼 흔들린 이유를.

“베스 클리프.”

사랑이기에.

이어진, 그리고 이어갈 불행이 대가일지언정 여전히 사랑하고 있기에.

“당신은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거의 바스러지다시피 한 사망금 증서에 짧게 입 맞춘 베스는 램프 뚜껑을 열어 구겨진 종이를 불길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곧장 침실 곁의 욕실로 뛰어 들어가, 공주가 즐겨 입는 얇은 슬립과 실크 가운을 걸치고 거울을 쳐다봤다.

‘…공주님의 후회를 막으려고요.’

그 말에, 고고한 공주는 잠깐 벽에 기대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작게 입술을 달싹였었다.

‘욕조 옆에 염색약이 있어. 오래는 못 가. 고작 하루나 이틀 정도. 그래도 시커먼 네 머리카락에 들 정도로 독한 약이란다. 내가 굳이 쓰는 이유가 궁금하겠지…. 더러운 핏줄이 기어이 존재를 드러내서라고 답하면 적절한 설명이 될까.’

베스는 급하게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에 잡히는 아무 병이나 손에 부었다. 향긋한 향내가 이내 욕실을 가득 채웠지만, 제가 찾는 것은 쉽사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성마른 손길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통들이 어지럽게 쓰러졌다.

빨리 찾아야 해.

각종 향유를 코가 찌를 정도로 부어대고 나서야, 베스의 손에 마침내 샛노란 물이 떨어졌다. 얼른 고개를 숙인 채 새카만 제 머리카락에 되는대로 염색약을 부어댔다. 닿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고개를 처박고 흔들어대던 통이 텅 비고 나서야 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왕이나 황후의 침실엔 늘 비밀 통로가 있어. 가장 높은 여인이 적군의 포로가 돼선 안 될 일이잖아? 하지만 칼론은 그걸 몰라. 그는 왕족은커녕 귀족조차 아니어서 상상도 못 하지. 고로, 브리틴 왕국에서 이 길은 오직 너와 나만이 안다는 의미야.’

거울 속엔 아까와 달리, 찬란한 금발과 이질적인 까만 눈동자를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난 내일 후원으로 초상화를 그리러 가. 거기서 아마도 예쁜 새 한 마리를 볼 거고, 곁에 선 병사에게 사냥총으로 잡아달라고 할 거야. 총탄음이 울리는 순간, 난 이 침실 안에 없어. 네가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겠지.’

창밖을 조심스레 내려다보니 무리를 대동해 후원으로 걸어가는 라프넬의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칼론은 늘 노을이 완전히 질 무렵에 침실로 돌아와. 거기서부턴 네 몫이야. 그리고… 행여 들키더라도 난 널 모른 척할 거란다.’

다시 비밀 통로로 돌아가, 문을 굳게 닫은 베스는 가파른 계단을 손으로 짚으며 내려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길게도 이어졌지만, 돌아갈 곳은 존재치 않았다.

“다 왔어. 다 온 거야.”

드디어 다다른 막다른 벽 앞에서 허공을 더듬거리자, 차가운 손잡이가 손끝에 닿았다. 상기된 뺨을 살며시 철문에 갖다 대곤, 바깥을 오가는 이들의 희미한 브리틴어가 분명하게 귓가에 들려 올 때까지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조금만 더.

곧 있으면 라프넬 공주님이 말한….

그 순간. 탕, 하는 청량한 사냥총 한 발이 느지막한 오후의 평온을 깼다.

‘난 그때부터 깊은 후원 속을 헤맬 거야.’

시작된 노을을 알리는 무언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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