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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5화 (195/206)

195화

아더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 붉은 섬광을 올려다봤다. 생채기 난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제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모를 핏물이 손에 묻어났다.

“사령관님, 지금 저게….”

곁에 서 있던 참모대장도 아더와 비슷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젖혔다.

새카만 하늘을 뒤덮고 날아오는 한 무리의 새 떼처럼 웬 전투기 무리가 전열을 갖춰 허공을 나르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들을 공격하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참모로 엎어졌던 넥서스군도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오늘 밤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정체 모를 아군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넥서스가 열세인 상황이었다.

작전명 ‘실패’가 여전히 진행 중이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수면 아래의 작업일 뿐. 드러나는 넥서스의 상황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족한 전술을 병력으로 압도하려는 코바흐와 그 뒤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브리틴. 심지어 칼론은 초반 공습 이후, 전선 쪽엔 웬만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방진 소식까지 전해 들은 참이었다.

“뭐지.”

아더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말만을 골라서 해야 할 자신의 처지조차 잊은 채, 오로지 브리틴 진영에만 폭격을 퍼붓는 날랜 전투기의 몸통을 응시했다. 그러다 고도를 낮춘 전투기가 눈앞을 지나치는 찰나, 어디선가 터져 오른 불꽃에 꺼멓기만 하던 날개가 선명히 비쳤다.

“데베르.”

그건 분명 데베르, 정확히는 클리프가의 군수회사에서 만들어 낸 전투기였다.

아더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미친 듯이 밀려드는 브리틴군을 피해, 그나마 남은 전선이라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하던 넥서스의 기울어진 승기가 다시금 손에 잡히려 하고 있었다.

아더는 재빨리 장갑차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지금이 기회다.

“진격! 전선을 지켜내! 박격포병 제자리로. 보병대 바로 뒤따른다!”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창했다. 브리틴의 기세에 질려 주춤하던 넥서스군도 공중을 호위하는 아군 전투기와 확신에 찬 사령관의 얼굴을 보곤 눈빛을 달리했다.

“클리프 군대장은 쉬이 죽지 않는다…! 우린, 우리의 군대장을 되찾는다! 넥서스는 결단코 지지 않는다!”

일순 아더의 눈동자에도 비상한 이채가 돌았다.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누군가가 입에 익은 부호를 외치며 참호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때에 맞춰 터져대는 박격포도 뿌연 연기를 공중에 날려댔다.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영광의 넥서스를 되찾으리!”

파도처럼 휩쓸기 시작한 구호는 어느새 전장의 비명과 겹쳐 웅장하게 들려왔다.

아더는 가장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장갑차에 매달린 채, 그들의 머리맡을 수호하는 낯선 아군을 다시 한번 올려다봤다.

어둠은 깊어갔지만, 전투의 열기는 꺼지지 않는 밤이었다.

텅 빈 기름통 안에 갇힌 불길이 활활 열심히도 타올랐다. 그 위에 얹힌 그을음 가득한 냄비 속엔 막사 근처에서 퍼넣은 눈이 녹고 있었다. 대충 옆에 놓인 깡통으로 눈 녹은 물을 퍼낸 아더는 피며 진흙이 한데 엉겨 붙은 손을 대충 씻어내기 시작했다.

또다시 내줄 뻔한 전선을 겨우 지켜낸 새벽이었다.

곧 지긋지긋한 전투는 다시 이어지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남은 때이기도 했다.

“사령관님. 오셨습니다.”

“들어와.”

손님이 오기 전에 어떻게 엉망인 얼굴이라도 씻어보려 했던 아더는 찜찜한 표정으로 물기 묻은 손을 털었다.

“여긴가요?”

널린 헝겊에 손을 닦던 그는 난데없는 가녀린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인영은 기다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소맷자락에 설핏 보이는 건 틀림없이 군복인데도. 아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시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새카만 로브 모자 아래에서 치렁치렁한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라프넬?”

아더는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닮았다는 얘기도 어릴 적엔 종종 들었죠.”

“아.”

그를 보며 싱긋 웃는 여자의 눈동자는 아더와 매우 닮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색채가 옅었다.

“넥서스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완벽히 얼굴을 드러낸 여자가 로브 자락을 드레스 치맛단처럼 잡아 무릎을 까딱였다. 그 아래로 보이는 건 반질한 여인들의 구두가 아닌, 투박한 군화였다.

“공주께서, 설마 전장을…?”

“네, 설마 그 전장을요.”

거리낌 없이 로브를 벗은 여자는 짙은 녹빛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울창한 숲이 왕국의 사면을 감싸고 있는 아르젠다운 군복이었다.

“절 찾으신 줄 알았는데, 그저 제 바람이었나요?”

“제가, 캐리엇 공주를요?”

“캐리엇?”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의문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의 젊은 황제이자 사령관을 잠시 쳐다보고는 싱겁게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누군가의 농간에 넘어갔나 보네요.”

그녀가 협탁 위에 올려놓은 건, 부드러운 재질의 편지 한 통이었다. 정치적인 서찰을 보낼 때 으레 쓰는 빳빳한 종이가 아닌, 자칫 연애편지라 느껴질 만한 새하얀 종이에선 희미한 장미 향까지 풍겨댔다.

주춤거리며 편지를 펼친 아더는 첫 줄을 읽자마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데베르 클리프, 이 정신 나간 새끼.

[발렌티나. 오랜만이군요.]

제가 발렌티나 캐리엇 공주를 언제 봤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게 열다섯도 이전이었으면서.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편지를 읽어나가던 아더의 표정이 점점 누그러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였는지 있지도 않은 다정을 떨어대며 인사말을 떼긴 했으나, 이어지는 내용은 지극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쉽게 말해 넥서스의 기습적인 아군이 되어달라. 이후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은 물론, 아르젠 왕국의 주체적인 자립을 도와주겠다. 선왕의 서거 이후, 유일한 왕녀인 발렌티나 공주에겐 여러모로 혹할 만한 제안이긴 했다. 듣기론 아르젠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 책임감도 강한 여인이라 했으니.

“허, 본인이 황제라도 되는가.”

하지만 마지막 줄을 읽은 아더는 결국엔 참지 못하고 짧은 욕설을 뱉어냈다.

“이, 미친놈이….”

[같은 뜻으로 다시 볼 날을 생각하니 기대가 돼. 어릴 적 같은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 -아더-]

‘메이너’는 대체 어디에 갖다 버리고, 또 그 징그러운 다정을 떠느라 달랑 ‘아더’만 적힌 편지지가 그의 손안에서 팔랑거렸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이 낯간지러운 말을 한 주인이.

“제가 보낸 거군요.”

“네. 믿기진 않지만요.”

“외람되나, 이 편지는-”

“말씀 안 하셔도 알겠어요. 데베르 공작이겠죠.”

어깨를 으쓱한 발렌티나는 여상한 얼굴로 끓고 있는 물을 가리켰다.

“물이 펄펄 끓다 못해 증발하는 중인 것 같은데, 세수라도 하세요. 물론 우리에겐 아직 최악의 진창이 남아있긴 하지만.”

“브리틴이 먼저 손을 뻗었다고 들었는데.”

“손을 뻗은 방향이 아르젠의 숨통이라는 게 문제죠.”

장난기를 지운 발렌티나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제겐 아르젠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요. 저 또한 이 진흙탕에 발을 담그는 게 썩 유쾌하진 않지만, 나름의 전략이에요. 그간의 넥서스를 봐왔기에…. 그리고 데베르 클리프 공작과의 의리도 있고요.”

“의리?”

“선왕의 서거 이후, 모두가 먹기 좋은 디저트처럼 아르젠에 침을 살살 바르며, 온갖 군수 계약과 협약을 파투낼 때 유일하게 클리프 군수회사만 지속해서 계약을 맺어줬거든요. 왕위 계승을 미룬 일개 소국의 공주를 만만하게 여기지도 않으시고요.”

잠시 감상에 빠졌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단단해졌다.

“아르젠은 작을지언정 약하진 않아요. 방금도 직접 보셨잖아요. 지금 같은 때에 넥서스에게 아르젠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까요?”

“선물.”

아더는 ‘실패’ 작전을 입에 올릴 당시, 데베르가 뱉은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렸다.

‘아마 적절한 때에 선물이 올 거야.’

하여간에 치밀한 놈. 하긴, 브리틴의 포로가 된 제 존재마저 군사들의 사기 증진용으로 쓰는 놈인데.

고개를 끄덕인 아더는 담담히 손을 내밀었다.

“맞습니다. 잘해보죠.”

발렌티나는 아더의 손을 맞잡으며 눈을 크게 떴다.

“비록 사령관님의 친우분께서 쓰신 거지만, 편지를 보낸 주인은 엄연히 폐하이신 걸 잊지 마세요. 약조, 지키시란 뜻입니다.”

“그럼요.”

“제 목표는 칼론을 잡는 거예요. 혹시 그 곁에 살려놔야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작전이 좀 어그러지는데.”

악수한 손을 떼 낸 아더는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다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굳어진 아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발렌티나는 이내 로브를 다시 뒤집어썼다. 가볍게 무릎을 까딱이고 막사를 나서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 편지 속의 어릴 적 같은 마음…! 그건 진즉에 사라졌어요. 제가 열한 살에 사절단 행사에서 고작 한 달 좋아한 걸, 지금까지 유효하다 착각하지 마세요!”

“데베르가 제멋대로, 아니.”

아더는 다소 어이가 없어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착각이라니. 어림도 없죠.”

“진짜로….”

영 탐탁잖은 기색으로 그를 응시하던 하늘색 눈동자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

이래저래 번잡스러운 아더의 새벽이 그제야 조용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칼론과 그 부하들의 집무실이 되어버린 브리틴 왕의 침실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공기를 짓누르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건, 본격적인 행동대장을 하는 그의 수하였다.

“저희 작전에… 저희가 말려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아르젠의 공습 때문에, 아더와 넥서스 핵심군이 몰린 동부 전선을 반지 모양으로 고립시키려던 작전은 되려 그들의 덫이 되었다.

공격적으로 앞에서 밀고 들어오는 넥서스와 뒤에서 공군 세력으로 교두보를 끊어버린 아르젠 탓에, 졸지에 브리틴 왕국을 중심으로 보급로가 끊겨가는 게 지도상으로도 훤히 보였다. 브리틴과의 연결이 끊긴 서부 전선의 코바흐가 되는대로 이어가는 전투의 결말 또한 안 봐도 뻔했다.

평소라면 대번에 고함을 치고, 성질을 부렸을 칼론은 의외로 태연하게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아르젠 계집애가 불통이란 건 진즉에 알고 있었어.”

칼론은 꽤 차분한 얼굴로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요즘 따라 대중없이 날뛰긴 했어도, 그 또한 넥서스군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함께 전투에도 뛰어들어본 노련한 군인이었다.

“황권이 바뀐 지 얼마 안 된 지금, 코바흐면 몰라도 브리틴까지 함락하기엔 시간이 걸려. 넥서스의 성난 민심은 건국기념일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전쟁이 이어지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거야. 그 모든 걸 묵살할 만큼 아더 메이너의 황권이 현재 완벽한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보는 칼론의 이성적인 모습에, 그를 바라보는 부하들의 눈빛에도 미미한 충성심이 비쳤다.

“코바흐를 내주고, 기회가 올 때까지 브리틴을 지킨다. ‘썩은 고기’, 아냐. 이젠 은어도 필요 없지. 데베르 클리프는 내일 사살해서 전선에 투하시키고, 넥서스 공주를 두고 아더와 협상해.”

아르젠과의 연합이 뒤틀린 이상, 데베르의 존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해봤자 넥서스군의 덧없는 사기만 오르게 할 뿐.

“라프넬 정도면 아더 그 새끼도 알아듣겠지.”

“라프넬 정도면 아더 그 새끼도 알아듣겠지.”

똑같은 말을 다른 장소에서 듣고 있던 라프넬은 헛웃음을 쳤다. 비웃음이 아닌, 정말 헛숨처럼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왕과 왕비의 침실을 잇는 짧은 복도에 선 그녀는 무표정하게 등을 돌렸다. 놀랍지도 서운치도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싶은 정도의 시시한 감정이 스치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아르젠의 첫 번째 공습은 브리틴 왕국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직은 공고한 제 왕국을 잠시 창밖으로 바라보던 라프넬은 화장대 앞에 섰다.

투명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남인 양 뜯어보던 그녀는 여전히 굳게 닫힌 왕의 침실 문을 흘깃 쳐다보곤, 느닷없이 화장대를 옆으로 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할 헛짓거리였지만, 라프넬의 표정은 결연했다.

“으읏.”

그렇게 얼마나 힘을 줘 댔을까.

어느 순간 끼긱거리는 소리가 거울 너머로 들리더니, 거짓말처럼 뻥 뚫린 벽이 덩그러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에 길게 이어진 계단도.

“헉. 흐….”

숨이 차 바들바들 어깨를 떨던 라프넬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곤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 속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에 노기가 서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여전히 멍청하구나.”

그 아래엔 웅크리고 앉은 연약한 여자가 있었다.

비쳐 드는 서광에 눈이 부신지 잠시 고개를 숙였던 여자는 이내 공주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아량을 베풀어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여태 거기 있니?”

제 아래에서 보는데도, 꼭 저보다 위에서 내려보는 듯한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도 싫었다. 죽을 만큼.

“…공주님의 후회를 막으려고요.”

그래, 이런 같잖은 말을 하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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