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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4화 (194/206)

194화

살기 어린 명령에 주위를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잽싸게 군용차에 올라탔다. 개중엔 시동을 걸자마자, 브리틴 왕궁을 향해 내뺀 것들도 있었다.

칼론의 주위를 지키고 있는 자는 천지 분간 못하고 침침한 눈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노파와 그의 최측근 수하 두어 명 정도뿐이었다.

“넥서스에서 넘어왔지?”

아까까지만 해도 브리틴어로 말하던 칼론의 갑작스런 넥서스어였다. 그 말에 노파의 주름진 볼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그는 마지막 확인을 하는 거였다.

“죽이진 않을 테니 똑바로 말하기나 해. 여기에 돈 냄새 맡고 기어 온 것들이 당신 같은 노인네 하나만은 아니니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낡아빠진 시가지의 기이한 활력을 돋우는 데엔, 눈앞의 노파처럼 전쟁 중 돈 좀 만져보려 건너온 이들이 한몫했으니까. 넥서스 보급로에서 훔쳐 온 술, 음식, 심지어는 어떻게 조제됐는지도 모를 환각제까지. 승전의 기운이 풍기는 곳이면 으레 외국어 좀 지껄이는 장사치들이 이것저것 팔 것을 들고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대답.”

“예, 예….”

이번엔 노파도 넥서스어로 대답했다. 덜덜 떨어대는 꼴이 이제야 대충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반면, 그 혼란 속에서 흔치 않은 운을 붙잡은 칼론의 입가엔 대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그래. 목걸이값은 치러야지.”

품 안에서 꺼낸 금화 몇 개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노파의 쪼글쪼글한 손안으로 떨어졌다.

그게 누군가의 목숨값이란 걸 모르는 노파는 눈앞의 군인이 사라지는 엔진음이 들리자마자, 서둘러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 * *

“뭐야?”

베스의 안대를 풀던 병사는 난데없는 위층의 소란에 애꿎은 천장을 쳐다봤다. 베스 또한 다소 급박한 브레이크 소리와 사람들의 뛰어다니는 발걸음에 불안스레 고개를 들었다.

병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처박곤 허리께에 묶인 열쇠뭉치를 꺼냈다. 찰그랑거리며 열쇠를 찾는 손길이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느껴졌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발걸음 소리가 점점 지하로 가까워져 오는 것만 같다면 그저 기우일까.

뭔가 수상해.

베스는 코앞의 밀실 문을 한 번, 복도 양쪽으로 뚫린 계단을 한 번 쳐다봤다. 그때. 어두침침한 복도 너머, 초면인 남자의 허여멀건 얼굴과 함께 얼핏 목걸이 줄 같은 게 달랑거리는 장면이 눈을 스쳤다.

설마.

“잡아!”

불안이 실제가 되는 건 순간이었다.

“저 계집애 잡으라고!”

어어, 난데없는 상관의 명령에 어버버 거리던 병사가 급히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안대가 풀린 포로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 뒤였다.

“제길! 길 막아!”

베스는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만큼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살벌한 남자의 손아귀가 곧바로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허, 으흑….”

탁탁거리는 발걸음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디로 갈지, 그 짧은 고민마저 사치였다. 본능을 따라, 길이 보이는 대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저 머릿속을 지배한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을 쫓아 발을 옮길 뿐이었다.

예상한 대로 지하는 한 층이 아니었고, 비슷비슷한 밀실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미로 같은 지하 계단을 돌고 돌다, 어느 순간 환한 빛을 보고 나서야 베스는 자신이 로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년 어딨어?!”

마지막 계단을 디디려던 베스는 재빠르게 지하 계단의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렸다. 로비에 발을 디딘 남자 두 명의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아래 계단참까지 들려왔다.

“로비까진 못 온 것 같습니다.”

“그럼 아직 지하란 소린데.”

“‘썩은 고기’ 쪽으로 간 거 아닐까요?”

“매번 눈을 가린 채 이동했다는데, 무슨 수로 썩은 고기를 찾아갔단 말이야!”

가만히 숨을 죽이고 저를 화두로 삼은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베스는 조심스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따로 챙겨놓은 뭉툭한 연고가 입고 있는 군복 주머니에서 만져졌다.

계단에 납작 몸을 엎드린 베스는 로비 중앙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바쁜 시선과 훤히 뚫린 출입구를 번갈아 쳐다봤다. 출입구 바깥엔, 또 그곳을 삼엄하게 지키는 브리틴 병사들이 보였다.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는 금방이라도 걸음을 지하로 돌릴 것처럼 움직거리고 있었다.

베스는 연고를 고쳐잡은 손에 힘을 줬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그럼 다시 지하로 가볼, 엇!”

“야, 저기!”

꽤 묵직하게 날아간 연고가 문가에 떨어져 병사들의 이목을 돌리자마자, 베스는 온 힘을 다해 로비로 뛰어올라 왕궁 위층 계단을 밟았다. 한 박자 늦게 적군의 군복을 발견한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왔다.

잡히면 모든 건 끝이야.

지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가 엄습했다. 컴컴하던 그곳과 달리 주위가 환해 더 그런지도 몰랐다. 점멸하는 샹들리에 불빛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를 사납게 찔러왔다. 금방이라도 눈이 멀 것 같았고, 잠시 숨만 골라도 머리채가 잡힐 것 같았다.

이상스런 고요가 감도는 왕궁 위층엔 오로지 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아니. 당연히 따라오는 발걸음도 존재하겠지만, 더할 수 없을 만큼 박동하는 심장 고동 소리 때문에 귓가에 들려오는 건 거친 날숨뿐이었다.

“어디, 어디로….”

몇 층을 뛰어오를 때만 해도 복도 끄트머리에서 저를 쫓는 병사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왜인지 이젠 더 올라갈 계단도, 눈에 띄는 병사들도 없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벗어나야만 하는데. 그래야지만, 그 남자를….

베스는 거대한 문을 닮은 벽을 정처 없이 더듬었다. 그래도 기다란 복도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황량하게 펼쳐져 있기만 했다.

바들거리는 다리로 복도의 중앙에 선 찰나. 끔찍한 현실을 알려주려는 듯 확신에 찬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베스는 저도 모르는 새 쥐고 있는 황금빛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이미 수차례 지하를 돌며 보이는 밀실마다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지금껏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었다.

이번엔… 예외가 될 수 있을까.

“분명히 이 위층에 있어! 양쪽 계단 전부 막아!”

하지만 지금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제발.

있는 힘껏 문을 밀치려 하자마자, 불쑥 가냘픈 몸이 부드러운 카펫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읏.”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에 베스는 퍼뜩 엎어진 몸을 웅크렸다. 문이 열렸다는 기쁨보다,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공포가 더 크게 덮쳐왔다.

브리틴 군이겠지.

“넌.”

질끈 감은 눈꺼풀을 언뜻 들어 올린 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거칠한 군화가 아닌, 새하얀 발 앞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베스, 제인스…?”

그 위에는 예상치 못한 푸른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 * *

분을 못 이긴 칼론의 손아귀에서 권총이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쥐새끼 같은 게 어디로 숨은 거야!”

철그렁 소리를 내며 멋없이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꼭 저 같아 더 화가 참아지지 않았다. 그가 서 있는 라프넬의 침실은 이미 한바탕 그와 그의 수하들이 뒤진 뒤였다.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진 탓에, 시트며 협탁은 이미 제자리가 아닌 곳에 널브러져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너무 화내지 마, 칼론. 겁많은 계집애라 왕궁을 벗어나진 못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땀이 배어난 칼론의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 넘겼다.

“데베르, 그 남자가 여기 있잖아. 걘 늑대 새끼라면 사족을 못 써. 내가 지켜봐서 알아.”

“더러운 것들. 감히 날 속이려고.”

라프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제 생각에 빠져 있던 칼론은 창가에 놓인 술병 중 그나마 멀쩡히 살아남은 병 하나를 쥐었다. 벌컥거리며 위스키를 마셔댈수록 벌겋게 달아오르는 건 비단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불그스름한 눈가에 맴돌던 형체 없는 살기가 문득 라프넬을 향했다.

“만약 네가 도피를 도와준 거라면, 아무리 너라도 곱게 살아남긴 어렵다는 걸 명심해.”

“내가?”

피식, 라프넬의 붉은 입매가 비틀렸다. 실크 가운을 단단히 여미자, 그녀의 굴곡진 여체가 더 선명히 불빛에 드러났다. 야살스러운 듯 오만한 눈동자가 칼론의 열 오른 낯을 꼿꼿이 응시했다.

“나의 사랑스런 온실 정원에 그 끔찍한 폭탄을 심은 채로 네게 온, 내가?”

새초롬한 손가락이 남자의 단단한 턱을 쓸어내렸다.

“만약 내 도움이 없었다면 웨인 공습을 이만큼이나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더가 날 구하기 위해 별궁부터 향했기 때문에 초반의 혼란이 길어진 거잖아. 그래서 그 시간을 이용해 브리틴이 승전의 깃대를 잡은 거고?”

다소 누그러진 남자의 눈동자를 확인한 라프넬은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너도 보여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라프넬은 감싸고 있던 칼론의 얼굴을 탁, 밀치며 한걸음 물러섰다.

“내가 데베르가 아닌 널 택한 걸 말이야.”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 네가 머리끝까지 기어오르지.”

대번에 험악해지는 언사를 들으면서도 라프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칼론을 미치게 할 수 있는지는, 제가 가장 잘 알았으니.

“대장님, 썩은 고기는 여전히 갇혀 있단 걸 확인했습니다.”

때맞춰 끼어든 부하가 또다시 그의 귓가에 거슬리는 이름을 들려줬다.

“그럼 그 짐승 새끼가 제 주제에 어딜 간단 말이야! 묶여 있는 놈한테도 절절매는 한심한 것들.”

거침없이 내지르는 칼론의 걸음이 빠르게 지하를 향했다. 하나둘씩 그의 곁으로 모여드는 부하들은 간호사를 찾지 못했다는 뜻을 담아 자기네들끼리 고개를 저어댔다.

칼론의 걸음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너른 보폭으로 무게감 있게 내딛는 걸음엔 그의 거만과 고압적인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열어.”

이미 몇 번이나 걸음한 밀실 문 앞에 선 칼론은 습한 지하실 가운데에 여전한 모습으로 붙잡혀 있는 인영을 보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타깝네. 네 잘난 부인이 널 구출하진 못했나 봐.”

스르륵 풀린 칼론의 벨트가 꼭 뱀 꼬리처럼 바닥을 길게 훑었다. 그가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하건, 고요히 숨만 내쉬고 있는 데베르는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대답해!”

굵직한 고성이 밀실에 메아리쳐도, 고고한 인질의 모습은 똑같았다.

“왜, 너도 내가 우스워?! 젊은 새끼가 유전병으로 빌빌거리는 걸 보니까, 마치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정신 차려. 넌 내 손에 도륙이 날 운명이니까. 그 반반한 계집애도 같이 말이야. 아니야. 걘 나랑 좀 놀 거야. 내가 잘난 공작님 입맛을 늘 궁금해했거든.”

이미 이성을 잃은 칼론은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밀실 안으로 걸음을 뗐다. 허름한 의자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벨트가 채찍처럼 허공을 내리쳤다.

“나도 너처럼 살아봐야지. 가장 높은 곳에서 재미 좋게, 억…!”

데베르의 날갯죽지를 내리치려 높이 들어 올린 팔이 돌연 거세게 흔들렸다.

“빌어먹을, 하필!”

칼론은 대번에 제 다리부터 노려봤다. 그러나 이번엔 제 다리 탓이 아니었다.

재차 들어 올린 팔이 다시금 흔들림과 동시에, 딛고 있던 몸마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천장을 의문스럽게 쏘아보던 칼론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바깥을 지키던 정찰병이었다. 얼마나 급히 뛰어왔는지, 한겨울인데도 미끈거리는 정찰병의 얼굴에선 연신 땀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헉, 큽. 아르젠이….”

“아르젠?”

벨트를 꽉 쥔 칼론의 눈에서 점차 술기운이 사라졌다.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모든 공간은 뒤틀리듯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브리틴 왕궁이 이렇다는 건….

“비상, 비상 상황입니다! 아르젠이 전선에 당도해 브리틴을 공격 중입니다…!”

결국, 그 눈의 의문을 읽은 정찰병이 거하게 쐐기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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