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어두침침한 밀실 안에서 오로지 주먹만 한 램프 불빛에만 의지해 손을 놀리던 베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턱, 턱. 규칙적으로 내딛는 군화 소리가 복도 너머에서부터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한껏 기민해진 귀는 바깥에서 들리는 티끌만 한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문을 막은 기다란 쇠봉이 끼익거리며 밀려나는 소리가 들리자, 베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연기하며 한창 분류 중인 약통에 고개를 처박았다.
곧 소굴 같던 밀실 안으로 한 줄기 빛이 길게 들어왔다.
“나와.”
밀실 안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부름은 오직 베스에게만 해당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외출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몰래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거나, 그마저도 미안한지 못 본 척을 하곤 했다.
그러나 베스에겐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미적거리지 말고!”
너무 반가운 척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혹시나 데베르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자신은 그저, 불쌍하게 포로로 잡혀 온 일개 간호사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한다. 기회를 잡을 때까진.
며칠이 지났는지, 아니면 아직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환풍을 위한 자그마한 창조차 없는 밀실은 밤이고 낮이고 습한 물기만을 천장에서 떨어뜨렸고, 그 한기가 만들어 내는 음울한 기운은 모여 앉은 사람들을 축축 늘어뜨리게 했다.
“입.”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베스가 제법 고분고분하게 군다는 걸 깨달은 병사는 굳이 힘 빼지 않는 쪽을 택했다. 데베르가 있는 밀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가리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입을 봉하는 것쯤은 그녀가 직접 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베스는 최대한 길을 외우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왼쪽으로 스무 걸음. 그다음 계단을 내려가고.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서 열 걸음 가다가, 또다시 계단….
“아무리 봐도 약발이 안 듣는 거 같던데.”
그러고 나면 맡아지는 짙은 피비린내.
약품이 든 바구니의 손잡이를 꾹 쥔 베스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어쩌면 훨씬 더 망가진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몸을 조금이나마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입 안 깊숙한 곳에 진통제나 몇 알 집어넣는 딱 그 정도. 그마저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칼론이 이 밀실을 다녀가야지만 자신이 올 수 있었다.
이마저라도 반가워해야 하는 걸까.
처음 마주했을 때 미약하게 제 손가락을 깨물었던 건 뻔한 제 바람에 불과했던 건지, 남자는 그 이후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들려오는 목소리도 없었다. 핏물이 굳어 아예 암색이 되어버린 안대는 안 그래도 각이 뚜렷한 남자의 얼굴을 더 그늘져 보이게 했다.
아, 가까이 다가가던 베스의 걸음이 삐끗거렸다.
워낙에 사위가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남자의 상태가 마지막으로 본 것과 약간 달랐다. 어느새 벗겨진 군복 상의 아래에 드러난 어깻죽지가 불그스름한 게….
설마.
불안을 감지한 손이 먼저 파르르 떨렸다. 놓쳐버린 바구니 속에 담긴 약통이며 핀셋 따위가 바닥으로 정신없이 흩어졌다.
“뭐야?!”
문가에서 담배를 태우던 병사가 언성을 높였지만, 베스는 데베르의 등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못 본 거였으면 싶을 만큼 남자의 등은 흉측한 붉은 줄이 이리저리 가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손끝을 가져가자 끈적한 핏물이 여전히 묻어났다.
“야, 내가 손목은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영 귀찮다는 얼굴로 걸어오는 병사의 앞을 베스가 급히 막았다. 얼른 바닥에 떨어진 약 봉투 하나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잡힌 포로들에겐 펜촉은 물론, 그 어떤 날카로운 것도 불가하다면서 던져준 몽땅한 연필이 재차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등 뒤의 상처가 심해서 그대로 놔두면 감염돼서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워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수를 던진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저 남자 약이 잘 듣지 않는 몸이라, 지금 당장 치료해야 해요.]
베스가 하는 말을 읽던 브리틴 병사의 얼굴에 순간 망설임이 스쳤다. 명을 받은 이상, 저 데베르 놈을 살려놓긴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얼핏 넥서스 공작의 멸칭이 떠올랐다.
“약쟁이라 고작 이 정도 가지곤 어려운 건가?”
잔뜩 의뭉스러운 혼잣말이었지만, 베스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오래 끌지 마. 어차피 죽일 놈인데, 며칠만 명줄 늘려놓는 거니까. 손목에 손댔다간, 네 손모가지부터 날아갈 테니 그런 줄 알고.”
살벌한 경고를 얻은 베스는 지체할 겨를 없이 데베르가 묶인 의자 뒤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뻘건 줄 군데군데에 예리하게 패인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선 벨트가 원흉인 듯했다. 벌어진 상처 위로 소독약이 묻은 거즈를 가져가자, 남자의 등 근육이 미미하게 움칠거렸다.
“흐….”
입을 가린 헝겊 때문에 숨소리도 꼭 흐느낌처럼 새 나왔다.
“3분 안에 처리해.”
남자의 어깨너머에서 여전히 담배를 뻐끔거리는 병사는 쓸데없는 짓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양 지겹게도 눈을 부라려댔다.
베스는 부지런히 약을 바르는 척하며, 슬그머니 한쪽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녀의 몸뚱이쯤은 거뜬히 가린 너른 어깨 덕에 작은 손이 오가는 세심한 방향은 그들을 지켜보는 칼론의 개에겐 보이진 않았다.
병사에게 보이는 한쪽 손은 보란 듯이 과장되게 움직이는 한편, 보이지 않는 나머지 손은 살며시 데베르의 손목을 쥐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끝나선 안 돼.
베스의 가는 손가락이 의자 등받이 뒤에 결박된 남자의 손끝을 미약하게 누를 때였다.
“흡.”
헛숨을 들이킨 베스는 슬그머니 눈꺼풀을 내리떴다.
아주 희미하게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작은 손톱을 톡, 톡 치고 있었다. 꼭 예전 그들의 손장난처럼.
또다시 착각인 걸까.
베스는 맞닿은 손가락을 조금 더 깊숙이 남자의 것과 얽었다. 그러자 이내 굵직한 손마디가 거세게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손등 위로 새파랗게 힘줄이 불거진 남자의 손은 분명히 그녀를 부르는 중이었다.
베스는 잡히지 않은 오른손으론 태연하게 약품 바구니를 뒤지며, 잡힌 손은 빼내 그의 손톱 끄트머리에 대고 판판하게 폈다. 마치 작은 도화지 같은 모양이었다.
더딜지언정 선명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머리카락 끝까지 쭈뼛거렸다.
“이제 나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굼뜬 거야.”
담배를 다 태우자마자 인내심이 다한 병사가 위협적으로 문을 찼다. 베스는 헐레벌떡 짐을 챙겨 나서며, 여전히 정신을 잃은 척 고개를 푹 처박고만 있는 잿빛 머리통을 마지막으로 일별했다.
또다시 제 눈을 더러운 헝겊이 가리기 직전, 베스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손바닥을 소중하게 그러쥐었다.
[칼날]
그는 제정신이었다.
* * *
짐승의 목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텅 빈 거리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보다 매서운 건, 어딘가 단단히 비틀린 기색을 여과 없이 내비치는 붉은 눈동자였다.
“분명, 분명히! 맥시멈 대령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세 명의 병사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넥서스 사령부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다.
“맥시멈은 지난 공습 당시 넥서스 진영 쪽에서 사망했는데. 시체가 기어 오기라도 했나?”
“군복에 적힌 맥시멈이란 이름을 똑똑히 봤는데… 그게….”
급이 낮은 부하병이 고위 간부의 실제 얼굴을 제대로 모르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간이 크네.”
더 낮아질 때도 없이 가라앉은 칼론의 목소리에서 짙은 분노가 느껴졌다.
“다 잡은 사령부를 멍청하게 놓아주고서도, 지금 내 앞에 낯짝을 들이밀 수 있다는 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개머리판이 뻑,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병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시뻘건 핏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칼론의 앞에 있는 누구도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데베르를 요격한 브리틴 전투기는 누가 몬 거야.”
“브리틴군엔 당시 동부 전선 쪽에서 출격한 이가 없어, 아무래도 코바흐군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 군이 같은 전투기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전투기의 행방은.”
“넥서스 진영에 연료 소진으로 추락했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확인은….”
칼론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창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산산이 조각난 창문 너머로 흐릿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전선 근처의 자그마한 브리틴 시가지에 자리한 막사는 나름 넥서스보단 승전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그건 과시적인 칼론의 성향이 부추긴 결과였다.
“넥서스 공작 늙은이가 있는 병원은 어떻게 됐어.”
“아직 찾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번에 사령부를 공습하며 잡아 온 간호사 하나가 꽤 쓸만해서 가로챈 넥서스 약들을 구분하는 거며, ‘썩은 고기’를 살피는 것까지 괜찮게 해 나가고 있습니다.”
“간호사…?”
“네, 하는 것 보면 그냥 뜨내기 잡일이나 하던 계집애는 아닙니다.”
제 다리를 힐끔 내려다본 칼론은 여상한 표정으로 턱을 비틀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건장한 체격의 그가 갑자기 왜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지 저들끼리 힐끔거렸지만, 그저 브리틴 왕가 흉내를 내려나 보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고귀한 혈통에 비정상적일 만큼 집착하는 그니까.
“라프넬은.”
“분부하신 대로.”
허름한 건물을 나오자마자 펄펄 날리는 흰 김이 깊어진 겨울밤을 알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음악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칼론은 저를 기다리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장 선두에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르밟으며 가고 있는데, 감히 그의 앞을 자그마한 노파 하나가 가로막았다.
“천사 같은 부인께 선물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잔뜩 등이 굽은 채 성성한 이를 드러낸 노파는 허공을 향해 치켜든 팔만 아니었으면 그냥 땅바닥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이 노인네가, 비켜!”
곁에 서 있던 부하가 대번에 노파를 밀어내려 하자, 칼론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목걸이? 보여 봐. 아직 기다리는 개새끼를 달래긴 해야 하니까.”
픽 웃은 칼론이 오만하게 명령하자, 이내 노파는 주름진 눈가를 휘며 손에 든 금줄을 만지작거렸다. 동그란 쇠붙이를 찾아 더듬거리던 손이 마침내 뚜껑을 열자, 흐릿한 색감이 어뜩 드러났다.
“뭐야, 대체.”
“초상화입죠.”
“별걸 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나?”
싸구려 금줄을 낚아채 제 눈앞에 갖다 대던 칼론의 눈빛이 묘해졌다.
새카만 머리카락. 묘하게 낯익은 흰 낯빛….
내가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엇, 저 여자.”
칼론의 꺼림칙한 상념을 끊은 건 노파를 밀쳐내려던 부하병이었다.
“대장님, 그 간호사 계집애입니다.”
뚝 끊긴 잠깐의 정적 뒤로, 막힌 것이 갈라지듯 걸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쭉한 입술을 타고 연달아 총이라도 쏜 것 같은 허연 연기가 끝도 없이 피어올랐다.
이제야 설명이 되었다.
수월하게 잡힌 늑대 새끼. 아군 전투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묘연한 행방. 죽은 제 수하의 갑작스런 등장까지.
그리고 이 빌어먹을 영악한 계집애. 베스 제인스.
“개새끼들이 날 물 먹이려고….”
모로 올라간 눈썹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벼락같은 명령이 삽시간에 주위로 떨어졌다.
“당장 왕궁 지하로 가! 가자마자 이 계집애부터 찾아내!”
하얀 얼굴이 담긴 초상화 펜던트가 잘못 찾아간 주인의 손아귀 아래에서 깜깜히 모습을 감췄다.
“반드시, 숨통이 붙은 채로 내 앞에 데려와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