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약간 치켜들고 있던 데베르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베스는 조금 전의 제모습처럼 질긴 헝겊으로 눈가를 동여맨 그를 가만히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의자 등받이에 양손이 결박된 남자의 몰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늘 결벽적이다 싶을 만큼 완벽했던 웨인의 공작은 그곳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열어 젖혀진 군복 사이론 멍 자국이 그득했고,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반듯한 이마에도 이미 굳어버린 핏자국이 낭자했다. 필시 누군가 주먹으로 치받은 게 분명한 상흔이었다.
썩은 고기.
그건 데베르 클리프의 새로운 멸칭이었다.
베스는 도저히 그 꼴을 더 볼 여력이 없어 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라. 그 어려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손길은 굼뜨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이 남자와 있는 시간을 더 늘려보고 싶은 제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손목 아래론 건들지 마.”
베스의 손이 억센 밧줄에 살갗이 벗겨진 데베르의 손목으로 향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리틴병이 엄하게 경고했다. 지금은 다 죽은 것처럼 굴고 있지만, 언제라도 돌변할지 모르는 데베르 클리프를 견제하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이 베스는 우선 드러난 가슴팍과 목덜미의 상처부터 살폈다. 시퍼렇다 못해 검붉게 물든 자국들은 손가락만 갖다 대도 아플 만하건만, 남자는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고요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약들로 상처를 소독하고, 혹시나 부러진 곳은 없는지 군복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빨리 안 해?”
금방이라도 제 뒷덜미를 잡아챌 듯한 병사의 윽박에 베스는 얼른 약통을 손에 부었다. 새하얀 알약은 비록 진통제일 뿐이었지만, 적어도 이 남자의 하룻밤 정도는 고통 없이 잠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딴 곳에서 잠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만은.
이미 의식을 잃은 듯한 남자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핏물로 얼룩진 잇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안 가장 깊숙한 곳에 알약을 집어넣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나와!”
그때, 유난히 날카로운 송곳니가 할 일을 마치고 성급히 떠나려는 그녀의 손가락을 미약하게 깨물었다.
“….”
베스의 가슴팍이 작게 들썩였다.
손에 담긴 남자의 얼굴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핏물로 얼룩진 헝겊 사이로 무언가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베스는 그 형체 없는 시선을 놓칠 수가 없었다.
꼭 이 남자가 제가 왔다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
“뭐 하는 짓거리야?!”
기어이 문가를 지키던 병사가 거칠게 베스의 팔꿈치를 잡아채 끌고 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더러운 헝겊이 눈 앞을 가릴 때까지 베스는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진창에서 저 남자를 구해낼 건, 이번엔 오직 자신뿐이라고.
* * *
사령부실 지하에는 끔찍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처음 사령부로 들이닥친 세 명의 브리틴군이 베스와 함께 사라진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또 다른 브리틴 병사 몇 명이었다. 그들의 통제 아래, 넥서스군이 지니고 있던 무기는 모두 압수된 지 오래였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곧 대령이 온대. 귀찮아 죽겠네.”
저들끼리 주고받는 잡담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네스는 단단히 잠근 군복 단추를 재차 확인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아있는 아군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적군 때문에 무언가 해 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지휘 장교의 팔뚝에 난 상처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던 핏물은 이젠 굳어서 흐르지조차 않았다. 아직 살아있긴 한 걸까. 쓰러진 장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렴풋이나마 그의 상태를 짐작해 볼 뿐이었다.
“어? 이제야 왔나 보네.”
왔다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브리틴 병사를 따라, 그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아이네스도 함께 눈을 치떴다.
단단한 탑 벽 너머로부터 거센 엔진음이 들려왔다. 고작 장갑차 정도론 이런 진동을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투기라는 건데. 바깥 상황이 어떤지 저로선 알 수 없었지만, 불에 탄 건물 잔해로 어지러운 종탑 앞은 전투기가 착지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윙윙거리는 진동은 점점 더 거세게 벽을 타고 전해졌다. 천장에서 후두두 떨어지는 벽돌 잔재에 포로가 된 넥서스군의 얼굴 위로 잠시 희미해졌던 공포가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갑작스런 전투기 엔진과 바빠진 병사들의 발걸음. 모든 게 심상찮았다.
상념에 잡혀 있는 사이, 둥그런 계단을 타고 정갈한 군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사령부를 통제하던 브리틴군도 그 소리에 맞춰 전부 계단 앞에 일렬로 섰다.
“오셨습니까, 대령님!”
아이네스는 얼른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어쨌건 그들의 상관이 온다는 건 좋지 않은 전조였으니 몸을 사리는 게 우선이었다.
비겁할지언정 그래야만 했다. 어떻게든 무사히 살아남아야 저 대신 적군에게 끌려간 베스의 결단을 헛되게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마주친 몇 번의 시선 속에서, 그리고 브리틴 병사의 허벅지에서 탄피를 꺼내고 응급 처치를 하는 그 능숙한 손길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베스라고.
한때는 베스 제인스이자, 이제는 베스 클리프가 된 유일하고 소중한 제 친구.
난 반드시 살아야 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물기로 흐려지는 눈을 거치게 비빌 때였다.
“수고가 많군.”
게일…?
말도 안 되는 줄 안다. 브리틴군이 대령이라 칭하는 이의 목소리가 제 약혼자의 것이라 생각하다니.
“여긴 지금부터 내가 관리하겠다. 바깥은 전부 철수했으니, 자네들도 부대로 복귀하도록.”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곱씹어봐도 분명히 게일이였다. 목소리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특유의 흐릿하게 끝맺음하는 호흡조차 닮아있긴 어려운 일이었다.
끝내 참지 못한 아이네스가 테이블 다리 뒤에 숨긴 얼굴을 슬쩍 옆으로 내미는 순간.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가 봐.”
진짜 제 약혼자 게일 웰링턴이었으니까.
그는 브리틴 군복과 군모를 쓴 채, 가슴팍엔 브리틴 공군을 상징하는 훈장까지 달고 있었다. 능수능란하게 뱉는 언어조차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브리틴어였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아이네스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아직 칼론 대장님의 명령을 받지 못해서-”
“그래서 내 명령에 불복종한다? 일개 중사 따위가?”
“아니, 그게 아니라…!”
“빌빌거리며 말꼬리를 늘리는 건 대체 어느 군부대의 버릇이지?”
한껏 살벌한 얼굴로 일침을 놓던 게일은 문득 사령부 중앙의 테이블을 스쳐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게일은 눈앞의 병사 주위를 느릿하게 돌았다. 상관 앞이라 빳빳하게 허공만 응시하는 병사들은 티끌만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 자리를 잡은 게일은 태연히 말을 이으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넥서스 사령부를 향해선 가만히 검지를 입술 앞에 갖다 댔다.
“난 칼론 군대장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방금 도착했다. 금일 넥서스 전투기를 요격해, 데베르 클리프를 생포한 나를 감히 의심하는가.”
“아닙니다!”
우렁찬 외침이 지하를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즉시 복귀토록. 이곳은 내가 전원 사살할 것이다.”
사살을 말하며 게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계단참에 올라선 그는 종탑 위를 턱짓했다.
“나가.”
곧 브리틴 병사들이 철수하는 소리가 계단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게일은 수류탄 몇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여전히 저를 힐끔거리며 올라가는 브리틴군을 눈속임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사위엔 다시 날카로운 적막만이 맴돌더니 곧 자잘한 엔진소리가 가까워졌다.
“전부 일어나!”
군모를 벗어던진 게일은 급하게 팔을 휘저었다.
“대령님, 이게 대체!”
“시간 없어! 나가자마자 보이는 군용차에 부상병부터 싣고 떠난다. 실시!”
우르르 위로 뛰어 올라가는 병사들을 헤집고 나온 게일이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제 약혼녀를 끌어당겼다. 황당함으로 물든 아이네스의 얼굴만큼이나 그녀를 마주한 게일의 표정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아이네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후방으로 가란 명령 못 들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당신 브리틴 군복은-”
“설명하려면 길어. 아, 물론 당장 설명할 수도 없고. 차부터 타. 여긴 위험해.”
게일은 급히 아이네스의 손을 잡아채 종탑을 빠져나왔다. 코앞에 시동이 걸린 브리틴 전투기가 보였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넥서스 군용차에 올라탔다.
분명히 저걸 몰고 왔을 텐데. 좀처럼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아이네스가 옆자리의 게일을 돌아봤다. 묵묵히 창밖만 쳐다보던 게일은 결국 저를 노려보는 약혼녀의 기세를 못 이기고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 데베르 군대장님 명령이라서.”
대령의 핑계는 손쉬웠다.
* * *
막사에 남은 아더는 초조하게 게일의 도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품위 없이 떨어대는 다리 사이로 시갓재가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뛰어댔다.
“그 미친 새끼 말을 들은 내가 등신이지.”
시가를 쥐지 않은 손이 말끔한 금발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이 정신 나간 작전은 참모진이 모두 나간 뒤, 저와 게일만 남겨놓은 데베르의 말이 시작점이었다.
게일에게 결혼식이 언제니, 빚을 져도 되겠느니 변죽을 울리더라니. 결국은 폭탄 같은 말을 던지기 전의 밑밥에 불과했다.
‘넥서스의 전군이 전열을 가다듬으려면 적어도 봄은 되어야 해. 하지만 그랬다간 넥서스군의 절반이 코바흐와 브리틴에 의해 망자가 되겠지.’
기다란 데베르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설원 너머의 브리틴 왕국이었다.
‘칼론은 직접 만날 생각이야.’
‘협상하겠다는-’
‘협박.’
잘 다듬어진 얼굴 너머로 일렁이는 데베르의 열기를 모를 순 없었다.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칼론에게 협박당해야 해. 인질은 넥서스 군대장 정도?’
‘네 발로 잡혀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리는 아더와 달리, 데베르는 의연하게 손끝을 새로이 옮겨간 격납고로 옮겼다.
‘게일 대령은 봤을 거야. 새로운 격납고 구석에 브리틴 전투기 한 대가 있는 거.’
‘예, 봤습니다.’
‘호이든이 병상에 있을 때 들여온 거라 나름 최신형이지. 지금도 브리틴군에서 즐겨 사용하는 거고. 자넨 그걸 몰면 돼.’
‘넥서스 전투기가 아니라, 브리틴 전투기를 말입니까?’
데베르는 몽롱하게 취한 얼굴로 설원 너머를 응시했더랬다. 마치 그곳에 제 이상향이라도 있는 듯이.
‘난 무리한 공습을 감행하다가 브리틴 전투기에 요격당할 예정이야. 그리고 칼론이 있는 브리틴 왕궁으로 생포되어 가겠지. 칼론을 직접 죽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이 겨울에 종전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아더는 시갓불을 빨아들이느라 홀쭉해진 볼에 힘을 풀었다.
기어이 네가 내 명줄을 줄이려고 작정을 한 거지.
‘작전명은 [실패]’
“사령관님!”
때마침 브리틴 군복을 입은 게일이 밝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우리의 공습은 [실패]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