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91화 (191/206)

191화

팔다리를 아무리 내저어도 매캐한 연기 사이로 닿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흐릿한 정신을 채 일깨우기도 전에 온몸이 거세게 아래로 내리꽂혔다. 거칠한 바닥에 쓸린 손바닥이며 드러난 종아리가 아플 법도 한데 이상스러울 만큼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아?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아마도 저를 향한 걱정이 멍멍한 귓가로 들려왔지만, 바닥에 엎어진 몸뚱이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건가.

문득 짙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때아닌 노곤함도 함께였다.

그냥 쉬고 싶어.

어렴풋한 생각을 하며 가물거리는 눈을 감아버리려는데 까슬한 촉감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뭐지. 금방이라도 감기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새하얀 백금 줄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매달려있는 금빛 브로치까지.

‘여기, 살았어요!’

목걸이를 움켜쥐려 바르작거리는 베스의 몸을 누군가가 부축해 일으켰다. 그제야 새카맣기만 하던 시야가 베일이 벗겨지듯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른 겨울 아침의 서늘한 공기 냄새와, 폭발의 여파로 생겨난 싸한 탄약 냄새가 어슴푸레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경관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여보…! 도와주세요, 잔재에 애들 아빠가 깔렸어요!’

난립하는 비명 사이로 이미 형체를 잃고 무너져내린 제국 병원 로비가 보였다. 베스는 하염없이 떨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죽였구나. 하워드를. 그 끔찍한 치를 결국엔.

비틀거리는 몸을 돌이켜 병원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다친 저를 붙잡았지만, 손을 내저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걸음을 정작 붙잡은 건, 깡마른 소녀 한 명이었다.

‘흑, 어, 엄….’

소녀의 앞에는 팔다리가 비틀린 시체 한 구가 쓰러져 있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소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죽죽 흘러내렸지만, 남루한 차림의 소녀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낡아빠진 코트는 이미 겉옷의 역할을 못 할 만큼 헤져 있었고, 그 안에 입은 철 지난 원피스도 한겨울의 넥서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꼭 예전의 제모습을 닮은 꼴이었다.

말 한마디 나오지 않는 목구멍을 꿈틀거리던 베스는 결국 입을 다문 채, 입고 있던 코트만 벗어 내밀었다. 울고 있던 소녀는 갑작스레 내민 코트를 받아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춥지 않니.’

저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소녀의 코트를 벗긴 베스는 제가 그 옷을 입었다.

‘가, 감사….’

소녀는 울먹거리며 베스의 두꺼운 코트를 걸치더니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어디선가 걸걸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에 깜짝 놀란 소녀가 부리나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작아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스는 순간 밋밋한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브로치. 그 남자가 준 브로치.

휘청거리는 다리가 소녀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다행히 소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직 멀쩡한 간호 숙소 또한 보였다.

‘얘…’

하지만 안도는 거기까지였다. 고막을 찢는듯한 폭발음과 함께 소녀의 뒷모습이 사라졌으니까.

잠시 잠잠해졌던 비명이 다시금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연기를 헤집으며 베스는 폭탄이 터진 숙소 화단 쪽으로 뛰어갔다.

‘베스!’

때아닌 제 이름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이 코트, 베스라고! 세상에, 내가 아침에 병원에서 봤단 말이야!’

소리는 무리의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베스? 그 클리프 공작부인?’

‘저게 클리프 공작부인이래요?’

인파에 휩쓸린 베스는 사람들의 틈 사이로 겨우 제 코트 끝자락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조금 전, 자신이 이름 모를 소녀에게 준 그 코트를.

그 앞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는 함께 제국 병원에서 일했던 바든이었다.

‘베스…라고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주위를 돌아보자, 녹색 코트를 차려입은 딕시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재수 없는 죽음이군.’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혀를 차며 돌아가고 나서야, 베스는 펼쳐진 상황이 대충이나마 이해가 갔다.

소녀의 머리가 없었다.

몸뚱이만 남은 시체의 비쩍 마른 손발이 허여멀건 게 정말 저 같기도 했다.

일개 소녀의 죽음이 아닌, 클리프 공작부인의 죽음에 경관들이 꽤나 심각한 얼굴로 시체를 살펴댔다.

내가 아니잖아. 그 불쌍한 어린 여자아이잖아.

제 죽음을 정정하려 발을 내딛던 베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곤 다급하게 코트 깃을 세웠다.

‘컥, 크흡. 진짜잖아?’

밭은기침을 토해내는 사내는 병원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하워드를 보필하던 자였다. 꼴이 엉망이긴 했지만, 몸을 쓰는 이답게 잽싸게 폭발을 피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곁엔 비슷한 차림의 장정들 몇이 더 다가와 섰다.

‘맞아. 그 여자 이 코트를 입고 있었어.’

‘젠장. 대장한텐 뭐라고 하지?’

‘대가리까지 사라진 시체 가지고 뭘 하겠어. 바로 보고해야지.’

‘산 채로 데려가기만 하면 그 새끼 잡는 게 더 수월해지는 건데.’

대장. 그 말에 칼론의 혈기 오른 얼굴이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흐르는 야심이 단순히 하워드의 수하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란 건 진즉 예상한 일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딕시를 지켜보던 베스는 슬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즐비한 인파와 짙은 연기는 좋은 가림막이었다. 저를 발견하지 못한 사내들을 조심스레 주시하던 베스는 아무도 없는 웨인 뒷골목을 향해 미친듯이 내달렸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긴 하루가 끝나기를 애타게 염원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도 세상은 몇 번이고 울듯이 진동했다. 어쩌면, 누군가 또 저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흔들리는 걸 착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베스는 더 깊은 골목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살고자 떨어대던 그 어린 날의 베스 제인스처럼.

퀴퀴한 골목을 마침내 빠져나왔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 뒤였다.

풀어 헤쳐진 머리는 잿가루로 뿌옇게 뒤덮여있었고, 소녀의 유품이 되어버린 코트는 밤하늘보다 어두운 그늘을 그녀에게 드리웠다. 그림자 같은 몰골로 웨인의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가던 베스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저택의 담장 앞에서 멈추어 섰다.

불이 켜진 창문 안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전해졌다.

쿵.

문을 두드리는 주먹엔 힘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딕시, 나야.’

쉼 없이 들려오던 울음이 갑자기 뚝 그쳤다.

‘딕시.’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를 돕기 위해 발까지 동원해 문을 찼다.

쿵. 미처 두 번째 발 구름을 하기도 전에 거대하던 문이 활짝 열렸다.

‘베스?’

퉁퉁 부은 딕시의 얼굴을 보자, 눈치 없는 웃음이 언뜻 나올 뻔도 했다. 하지만 흐릿한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려는 찰나, 마지막 기력까지 소진한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내가 완벽히 죽을 수 있게 도와줘.’

절대 내 존재가 데베르 그 남자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끔.

아마도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베스, 베스!’

딕시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몸은 또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베스, 일어나. 일어나야 해.’

“…일어나요!”

퍼뜩 놀란 베스가 경련하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지금 그놈들이 오고 있다고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벌겋게 충혈된 베스의 눈동자가 허공을 부유했다.

“꿈꿨어요?”

낯선 얼굴은 베스를 어깨를 약하게 흔들다가, 문틈 사이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곤 입을 합 다물었다. 주머니 속의 얇은 종이 끄트머리를 매만지고 나서야, 베스는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이제야 와닿았다.

“잡아 온 게 겨우 이게 전부야?”

열린 철문 사이로 비쳐 드는 역광 때문에 말을 뱉는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설핏 보이는 건, 남자의 계급장이 전부였다.

“예. 그놈이 어찌나 전방 병원을 꼭꼭 숨겼는지, 지금도 정찰대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숨겨봤자 뻔하지. 해봤자 넥서스 언저리일 것 아니야.”

“그보다는 지금 ‘썩은 고기’ 상태가 영….”

“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려?”

문을 지키고 선 두 남자는 그들의 앞에 앉아있는 이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뭐, 대장님이 하면 하는 대로 그냥 얻어터지고만 있답니다.”

“전투기 폭발로 정신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죠. 근데 그놈이 보통 놈은 아니다 보니…. 일단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진 ‘썩은 고기’를 살려두긴 하실 계획이랍니다.”

바짝 정신이 든 베스의 맥박이 빠르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뜻을 알 수 없는 은어가 오가긴 했으나, 적어도 ‘썩은 고기’가 넥서스군을 의미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근데 저것들이 정식 간호사나 의사가 아니란 게 문젭니다. 어떻게, 보급 경로를 차단해서 약품 상자를 하나 건지긴 했는데 완전히 까막눈들이에요.”

“제기랄. 브리틴 의사들도 있잖아?”

“저번에 넥서스가 병원만 작살을-”

“아, 깜빡 잊었어.”

남자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툭툭 손가락으로 치다가, 주위를 돌아봤다.

“새로 온 놈 중에 약 좀 볼 줄 아는 사람, 손들어.”

서툰 넥서스어였다.

“없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다시 브리틴어로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면 저 ‘썩은 고기’는 어쩌지? 상태가 별로던데. 죽기라도 하면-”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벼락같은 고성이 복도 너머로부터 울려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건들거리던 두 사내가 대번에 군기가 바짝 들어 어깨를 빳빳이 폈다.

절뚝거리는 군홧발 소리가 문가로 가까워졌다.

“그게, 약을 알아볼 줄 아는 것들이 없어서-”

“아까 낮에 내가 데려온 반반한 애, 걔 어딨어? 그 계집애가 상처를 볼 줄 알아.”

시커먼 인영 하나가 사내들의 어깨를 거칠게 치받더니, 손가락으로 베스를 가리켰다.

“너, 나와.”

어둠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눈을 칭칭 감은 안대를 풀었을 땐, 또 다른 어둠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똑같기만 한 것 같은 계단을 지나고, 또 지나고. 몇 번인가 한 지점을 뱅뱅 돈 것만 같았다.

“헛소리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눈을 가렸던 헝겊은 이젠 베스의 입술을 봉했다. 숨이 막힐 만큼 단단히 조여 매는 남자의 손길에 베스는 고통에 찬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문틈이라도 존재했던 아까 전의 밀실과는 달리, 눈앞의 새로운 밀실은 마치 벽처럼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았다.

“적당히 치료만 하고 나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문을 열자마자 훅 비강을 스친 건 비릿한 쇳내였다.

등을 밀치는 손길에 억지로 방 안으로 들어서던 베스는 그 비릿한 날붙이 냄새 사이로 끼쳐 드는 단 하나의 향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가지런한 손톱 끝이 손바닥 안을 할퀼 만큼 거세게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야.”

그런 물음을 하는 당신을 마주 볼 자신이 내게 있을 리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