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희끄무레한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은 아직 날이 새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텁텁한 기운을 풍겼다.
“이래서 전투기는 똑바로 뜨겠어?”
보닛에 기대 담배를 태우던 운전병 하나가 툴툴거리자, 군용차 짐칸에 올라타던 교환원들도 공연히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담배 연기만 뻑뻑 빨아들이는 병사의 뒷모습에선 희미한 두려움이 전해지고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관제실도 난항을 겪겠어요.”
“어디 우리만 어려운가요? 적군도 어렵겠지.”
벌써 짐칸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교환원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그중 가장 소식통에 밝다는 여자가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엔 브리틴 공군이 월등-”
“아, 거! 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다 탔으면 바로 출발할 겁니다.”
언제부터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운전병이 험한 기세로 뒤를 돌아봤다.
“전 그냥 사실을.”
“사실이고 나발이고. 진짜 군인도 아니면서, 무슨.”
“저도 엄연히 사망금 증서 쓰고 여기에 온 사람이에요!”
의미 없는 실랑이가 오가는 것을 지켜보던 베스도 괜스레 하늘을 살폈다. 연이어진 폭설이며 폭우가 그친 건 다행이었지만, 전투를 재개하는 날이라 하기엔 썩 좋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괜찮은 건가.
베스는 소맷단에 반쯤 가려진 손바닥을 남몰래 들여다봤다.
[보급 상자 뒤 샛길. 보초 없음.]
손바닥의 길쭉한 흉터 위로 스며든 잉크가 그새 조금 번져 있었다. 간밤에 그녀의 손에 그런 걸 남길만한 범인은 뻔했다.
어렴풋한 여명마저 보이지 않던 시각, 이르게 눈을 떴을 땐 이미 옆자리는 빈 채였다.
서운함은 없었다. 갑작스레 병사가 보고를 올리러 왔을 때, 그가 직접 사령관에게 가보겠다 했던 것도 생각났고, 행여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한들 전투가 치러지는 새벽에 군대장이 막사에 늘어져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남자는 딱 저다운 다정을 남기고 떠난 거였다.
“출발!”
소초에서 돌아온 병사가 단 위에 올라가 깃대를 흔들자, 얌전하던 차체가 곧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저들의 심장 소리 같은 엔진 진동에 다들 흠칫 얼굴이 굳어 서로를 쳐다봤다.
베스는 그제야 다급하게 주위를 돌아봤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 운전병은 무심히도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즐비한 군인들 사이를 훑는 베스의 눈동자가 점점 바빠졌다. 당최 누가 누구인지 구별되지 않을 만큼 다들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 남자만큼은 곧장 알아볼 수 있으리란 근거 없는 자신이 들었다.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
그러다 전선으로 이어지는 막사의 초입.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리란 희망보단 포기가 더 가까워지려던 찰나, 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멀찍이 군모를 눌러쓴 남자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베스는 확신했다.
저 남자가 데베르 클리프란 것과, 그의 시선 끝엔 제가 있다는 것을.
* * *
교환원을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잿더미로 아수라장이 된 시가지였다.
웬만해선 불에 타 엉망이 된 구 사령부를 버릴 것으로 판단하겠지만, 참모진을 비롯한 데베르의 의견은 달랐다.
사령부가 연달아 폭격당하면 아예 승전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니 적군의 허점 뒤에 숨자.
그리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사령부실이 바로 시가지의 종탑 지하였다. 운이 좋게 종탑이 살아남기도 했고, 이미 구축해 놓은 전화선을 살리는 것도 그곳이 가장 쉬웠기에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 다들 주목. 군대장님의 전언이다.”
사령부의 지휘 장교가 돌계단 위에 섰다.
그 짧은 시간에도 꽤나 훌륭히 임시 사령부를 구성한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전보다 훨씬 작은 인력만이 남은 교환원들에게도 비슷한 비장함이 흘렀다.
코앞에 닥친 전투는 그렇게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오늘의 전투가 시작인지, 끝인지 묻는다면 난 끝이라 답하겠다. 우리에게 종전은 오직 승전뿐…”
베스는 꼭 제 귀에만 들리는 것 같은 데베르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손바닥에 남은 글씨를 만지작거렸다. 피어나는 초조함에 식은땀이 배어 나올수록, 그가 남긴 편지는 보기 싫게 지워지기만 했다.
“…반드시 살아서 보도록. 제군들.”
전언이 끝나고 다들 제자리로 찾아가는 부산한 걸음들 속에서, 베스도 제자리에 앉았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힌 전화선들이 심란한 제 마음만큼이나 어지러웠지만, 정신이라도 차리고자 주먹을 꽉 쥐었다.
귀마개 같은 전시용 수화기를 귓바퀴에 단단히 고정했다.
아직까지 들려오는 건 치직거리는 연결음 외엔 없었다. 여기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도 반가움보다 불안감이 더 크겠지만, 막상 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단단한 체하려 해도 저는 늘 이 모양이었다. 못나고, 비겁하고, 겁쟁이인 그저 그런 모양.
“…스!”
귀를 막은 수화기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베스는 군대장의 혹시 모를 교신을 기다리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통신병!”
그때, 누군가의 손길에 베스의 수화기가 난데없이 확 벗겨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베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여길.”
“베스 제인스 통신병. 전달 사항이다. 나와.”
딱딱한 명령에 본능적으로 일어선 베스는 성큼거리며 앞서 나가는 남자의 걸음을 급하게 뒤쫓았다. 그는 사령부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타닥거리는 군홧발이 서로 엇갈리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나선형 계단 위로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데베르 군…!”
하지만 베스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데베르는 자그마한 계단참에 발을 딛자마자, 군모를 벗어던지고 제 뒤를 따르는 여자를 끌어당겼다. 그의 조급한 손길에 여자의 발끝은 몇 계단을 스치기만 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지려 했을 땐 그가 온몸으로 여자를 옭아맨 뒤였다.
거세게 뛰어대는 그의 가슴팍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베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무언가 잘못, 됐나요…?”
“아직은.”
미덥지 않은 대답에 베스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데베르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 여자의 체온을 느끼고, 향을 맡고, 이 부드러움을 손끝에 새겨야만 했다.
“돌아올 거야.”
그리고 이 고백을 전하는 것.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러려고 비행장을 향하던 운전대를 반대 방향으로 꺾는 이 미친 짓거리를 개시한 거 아닌가.
“그리고 돌아오면….”
불현듯 밀려온 망설임에 아주 잠시, 데베르의 숨이 파르르 떨렸다. 부디 이 여자는 그 떨림을 몰랐으면 싶었지만, 이미 제 얼굴을 보려 바르작거리는 걸로 봐선 이번에도 그른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 실패가 싫진 않았다.
이 여자가 저를 걱정할 때 띠는 눈빛이, 상처를 살피며 조금은 물러지는 눈매가, 볼멘소리를 하기 전 잘근거리는 입술 끝이 모두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약한 체를 했던 거고.
하지만 지금은 강한 체를 해야 했다.
없는 용기를 있는 척.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을 확신하는 척.
“내가 메르딘으로 갈게.”
어젯밤, 베스가 말한 ‘부인’이란 말을 데베르는 오래도록 되뇌었다.
단순히 교신 별칭을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 제가 아는 그 ‘베스 제인스’의 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나 섣불리 또 틈을 내줬다고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을 제 모습이 지레 끔찍하지는 않을까.
“내가 메르딘으로 가. 거기에 네가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데베르는 한발 물러섰다.
혹시 네가 후회하고 있다면, 나는 충분히 모른 척 속아 넘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네가 없는 메르딘을 어리석게도 잠깐은 헤매겠지만 거기까지라고.
제 세상에 더는 이 여자를 억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리고 만일, 예전의 데베르 클리프를 기억하지 못하는 베스가 정말 메르딘에서 그를 기다린다면…. 글쎄. 상상도 잘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데베르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놓기 싫다.”
맹세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행운마저 흘려내기엔 자신은 너무 이기적이었으니.
이어진 계단 위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군대장을 부르는 소리란 걸 아는 베스는 겨우 안긴 몸을 비틀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혹시 다치면-”
“명령해.”
벗었던 군모를 깊숙이 눌러쓰는 그의 입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난 꽤 충성스런 군인이라. 살아서 돌아오라고 하면 들어.”
“끝까지….”
제 목숨을 너무도 가볍게 얘기하는 모습이 못내 속상해 베스는 할 말도 잊은 채 그를 노려봤다. 그런데도 남자의 올라간 입매는 쉬이 내려오질 못했다.
다시 한번 클랙슨이 길게 울렸다.
“이제 진짜 돌아가야 해. 들어가.”
짧게 베스의 이마에 입 맞춘 데베르는 몇 계단씩 훌쩍 내딛더니, 금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좁은 탑 계단에 홀로 남은 베스는 희미하게 들려오던 엔진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저 남자만의 차가운 향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멍청한 짓이란 걸 알아….”
금세 흩어져버리고 말 향을 움켜쥐려 손바닥을 오므려대다니.
그럴수록 번져가는 잉크가 손톱 끝을 새까맣게 물들이리란 걸 알면서.
지루한 시간은 길게도 이어졌다.
아군의 첫 교신을 기다리는 사령부는 날이 밝아올수록 이따금 들려오는 기계음을 제외하곤 적막만이 흘렀다. 으레 첫 교신은 군대장이 보냈기에, 몇몇은 교환기 앞에 앉은 베스의 얼굴도 흘깃거리며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종루를 살피던 정찰병이 날이 완전히 밝았음을 알리기 위해 지하로 내려왔을 때. 베스의 교환기 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곧이어, 수화기 너머로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기는]
뚝뚝 끊기는 목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베스는 조심스레 전화선 코드를 건드렸다. 칙, 찌직. 듣기 싫은 소음이 몇 분간 이어지더니, 이내 선명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여기는 푸른 숲. 들리는가.]
이미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했을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렸다. 베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입매에 힘을 주며 송화기에 손을 가져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대담한 짓을 할 생각에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그래도….
[들리면.]
톡.
손톱 끝이 가볍게 송화기를 두드리는 행동.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송신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는 별거 아닌 동작이었다.
[들리면….]
톡. 톡.
까맣게 잉크 물이 든 베스의 손가락이 재차 송화기를 두드렸다.
‘듣고 있으면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라도 해.’
당신도 알까.
날 진창에서 구하러 와줬던 이는, 내 세상에 오직 당신 한 명뿐이란 걸.
[…수신 양호.]
당신이 군복 심장께에 내가 준 보잘것없는 연고를 지니고 다닌다는 걸 알아챈 그날 밤. 들킨 건 데베르 당신의 마음만이 아니었어.
[하아….]
당신이 내 심장 한구석을 가져갔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으니까.
[푸른 숲은 고요하다.]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된 건, 한구석만이 아니라는 거야.
“수신 확인.”
어쩌면 난, 처음부터 내 전부를 줬는지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도록.”
상처 입은 늑대 새끼.
번트의 푸른 숲 어귀, 처음으로 당신을 마주한 그 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