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어느덧 창밖의 하늘 위로 타는 듯한 노을이 드리워지고 있었지만, 푸른 새벽빛이 돌 때부터 시작한 참모 회의는 여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웨인에서 동부 전선까지의 보급로 절반이 최근 폭격으로 막혔습니다.”
장교 하나가 작전 지도의 빨간 선을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식량이야 시간이 걸려도 조달은 하겠지만, 옮긴 격납고와 전선 사이의 교량이 모두 폭파당해서….”
“제공권을 확보하긴 어렵단 뜻이군.”
데베르는 끝을 흐리는 장교의 남은 말을 제가 대신했다. 곁에 서 있던 게일도 작전지의 다른 지점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거들었다.
“코바흐가 브리틴과 무슨 협약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여간한 게 아닙니다. 거의 인간 방패 수준이라, 물자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서부 전선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협약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이겠지.”
이번엔 아더가 끼어들었다.
“지난 전쟁에서 보통 깨진 게 아니니까. 그때 만난 멍청한 놈이 기어이 황제가 됐잖아. 굴욕을 갚겠다 이거지.”
“빌어먹을 야만족 새끼들.”
참지 못한 누군가가 감히 상관 앞에서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말리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브리틴과 넥서스 각 군의 군대장이 대치 중인 동부를 제외하곤, 전부 야금야금 적군에게 전선을 내주고 있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적군을 상징하는 작전지 위의 붉은 선이 갈수록 웨인을 향해 다가온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내일 출격을 앞둔 장교들을 압박하기엔 충분했으니, 그까짓 욕쯤이야. 문제가 되지도 못했다.
“아니면, 이렇게 둥그렇게 진을 치면-”
“안 됩니다. 바로 뒤에서 교두보부터 폭파당할 겁니다.”
“차라리 전력을 중앙으로 몰아서….”
테이블 위로 이런저런 작전 얘기가 이어졌지만, 뾰족한 수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데베르.”
어두워지는 창밖을 확인한 아더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래도 작전지만 보는 친구 놈이 답답해 그는 조금 더 세게 테이블을 쳤다.
“이젠 마무리를 지어야지.”
재차 연이어지는 부름에도 데베르의 시선은 작전지 위의 푸른 동그라미에 고정돼 있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데베르.”
“바깥의 눈이 녹았던가.”
“뭐?”
생뚱맞은 헛소리에 아더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처박은 고개만 들어도 확인할 수 있을 거란 말이 대번에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는 군대장의 체면을 생각해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벌써 눈이 녹기엔 넥서스의 겨울은 혹독하니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데베르는 그제야 지휘봉을 손에 들었다. 조금 전의 얼빠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이미 생각을 해놓았다는 듯 자연스레 작전 지휘를 이어갔다.
데베르 클리프 하면 떠오르는 공격적이고 대범한 성격의 이전 전술과는 달리, 상당히 방어적인 작전이었으나 이견을 내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당장의 넥서스는 전선을 지키며 겨울이 더 깊어지길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럼, 모두 살아서 보도록. 해산.”
마침내 긴 참모 회의가 끝났을 무렵엔 이미 완연한 어둠이 찾아온 뒤였다.
서둘러 막사를 떠나는 장교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데베르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혔다.
“게일 웰링턴 대령.”
퍼뜩 뒤를 돌아본 게일이 그가 서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낡은 나무 널빤지 위엔 여전히 작전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더 사령관도.”
나머지 장교들이 모두 문을 나가고 나서야, 데베르는 다시 입을 뗐다.
“눈치챘겠지.”
“당연하지. 칼론 그 미친 새끼.”
아더의 턱 근육이 불뚝 튀어 올랐다.
“칼론 대령이 대장님의 전술을 따라 하는 것 말씀이십니까.”
“맞아.”
아더만큼이나 데베르의 곁을 오래 지킨 게일도 단번에 말을 알아들었다.
“넥서스 전선 곳곳에서 국지적으로 벌어지는 전투 모양새가 내 예전 전술을 닮았어. 아마도 꽤 연구한 것 같은데.”
“그런 새끼가 지금껏 설원 너머 왕궁에서 한가롭게 연극이나 보고 있다니.”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그의 손끝은 푸른 동그라미의 양편을 가리켰다.
“오늘, 이곳에 코바흐군이 도착했거든.”
턱을 괸 데베르는 문득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청혼’을 하려는 거지.”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두 부하병을 향해 데베르는 푸른 동그라미를 둘러싼 지점을 둥글게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반지 모양. 돼지몰이라 하기엔 너무 천박하다 했던 그 작전.”
“아.”
그제야 알아들은 두 사람이 짤막한 탄식을 터뜨렸다.
지금 칼론은 코바흐전에서 데베르가 실패한 ‘청혼’ 작전을 재연하려는 것이었다. 집착적으로 데베르의 뒤꽁무니를 쫓은 이답게, 이젠 그의 우위에 서겠다는 노골적인 메시지가 담긴 전술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보급로를 끊으면서 고립시키려는 거야. 직접적인 군대장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전략일 테지.”
예사로운 얼굴로 작전지를 내려다보던 데베르는 게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령의 결혼이 언제지?”
“제, 결혼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 결혼.”
“예. 계획대로라면 다가오는 봄에 미뤄둔 결혼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변이 생겼네요.”
게일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갑작스런 질문을 하는 군대장의 의중을 알지 못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이네스 영애는 이번에도 전장 병원에 와 있던데. 본 적은 있고?”
“아, 아직입니다. 부상이 없는데 굳이 병원에 갈 수는 없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군인은 진지를 지켜야죠.”
참으로 저다운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데베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술을 뗐다.
“지금 막사를 나가는 즉시, 약혼녀를 보고 부대로 복귀해.”
“예?”
“명령이야.”
잠시 어벙한 얼굴을 하던 게일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지금 같은 일촉즉발의 시기에 약혼녀를 보러 가란 명령의 뜻은 너무도 뻔했으니까.
고요한 목소리가 막사의 정적을 깼다.
“자네에게 빚을 좀 져도 될까.”
“말씀, 하십시오.”
한층 낮아진 게일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거부하지 못할 부탁이란 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데베르는 충성스런 부하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어쩌면 마지막 부탁이 될 수도 있기에.
“이건 명령이 아니야. 자네가 거절할 때의 대안도 존재해. 전투기를 빨리 몰 수 있는 조종사는 넥서스에 아직 많으니까.”
“제가 할 때, 가장 빠르게 종전을 향할 수만 있다면… 전 언제든 합니다.”
게일은 단단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명령하십시오.”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데베르의 손이 다시금 작전지 위로 올라갔다. 잘 뻗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지점을 향해 게일과 아더의 눈동자도 함께 뒤따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넥서스 진지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손가락이 주욱 브리틴을 향해 직선으로 미끄러졌다.
“우리도 공습해야지. 아무도 모르게.”
* * *
“여길 이렇게 누르면 장전이 된 겁니다. 다들 웨인에서 배우고 오셨겠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당황해서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 지금 바로 숙지해 놓으세요.”
담당 하사가 제법 엄하게 말하며 교환원들을 둘러봤다.
허름한 판자 건물 안에 모여선 통신 보조병들은 하사의 등살에 떠밀려 서툴게 총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그 중엔 베스도 섞여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확실히 능숙하게 총을 장전하고, 안정적으로 자세를 취하는 모습에 하사도 금세 고개를 끄덕이곤 지나갔다.
“예전에 해봤어요? 어떻게 그렇게 한 번에 잘하지?”
쓴소리를 들은 옆의 교환원 하나가 울상으로 그녀에게 묻자, 베스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허공을 겨누던 총구를 뚝 떨구자, 문득 그 무게감이 버겁게 와닿았다.
다가올 내일의 전투를 위해 모여 있는 전화 교환원들은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아무리 잽싸게 공습을 피해 달아났다고 해도, 그게 생명의 보장을 말하진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침잠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죽으면 어떡하죠.”
제 맘대로 되지도 않는 총을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끝내 작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베스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느라 정신이 팔린 하사의 눈을 피해, 제 옆의 여자를 다독였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어요?”
“끝, 나면요…?”
“네. 끝나면.”
일부러 죽음과 정반대의 얘기를 하는 베스였다.
“말해봐요. 여기선 월급도 많이 받는데 돌아가면 뭘 하고 싶은지.”
살가운 그녀의 목소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교환원은 코를 몇 번 들이마시다가 희미하게 웅얼거렸다.
“…이요.”
“응?”
잘 들리지 않아 베스가 고개를 조금 숙이자, 이내 깜찍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연애요.”
잔뜩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연애를 말하는 얼굴은 어느새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우, 웃지 마세요.”
“애인이 있어요?”
“없긴 한데….”
채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이 연신 도로록 굴러다니다가, 누굴 보곤 멍하니 굳었다.
“다시 확인할 테니 연습하십시오.”
거기엔 살벌하게 그들을 돌아보는 하사가 있었다.
아, 눈치를 챈 베스는 하사가 등을 돌리자마자 벙긋거리는 제 입을 가렸다.
“우, 웃지 마세요.”
“아무래도 어려운 상대를 고른 것-”
한껏 목소리를 낮추느라 몸을 기울인 베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보곤 망연히 얼어버렸다. 마치 제 옆의 여자가 그러했듯이.
“뭐 있어요?”
이상함을 감지한 상대가 베스의 시선을 따라갔을 땐, 시커먼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비친 베스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앞의 하사는 왼손으로 슬라이드를 했지만, 여자는 자연스레 오른손을 올렸다. 그게 데베르만의 버릇이라는 건, 오직 그만이 아는 것이었다.
이내 맥없이 총구를 떨구는 얼굴은 어두웠지만, 막상 제 옆에 선 타인이 훌쩍거리자 이내 다정하게 눈을 빛냈다.
대체 언제 봤다고 저리 다정을 떨까.
그러다 눈이 마주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데베르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별다른 것 없는 전투 전야의 시간을 죽이러 나왔다가 우연히 교육 중인 통신병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 멈추어 서 있던 건 우연이 아니긴 했지만.
“데베르 군대장님…!”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그의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베스는 제 부름을 무시한 채 묵묵히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바쁘게 뒤쫓았다.
“데베, 읏….”
데베르는 제 뒤통수를 붙잡는 작은 신음을 듣고서도 막사로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런 발걸음은 기어이 절뚝거리며 그의 막사 앞까지 다가왔다. 적막한 내부를 넘실거리는 불빛이 바깥에 서 있는 여린 인영을 똑똑히 비춰 보였다.
삐끗거리는 간이침대에 쓰러진 데베르는 차라리 그 꼴을 보지 않으려 억지로 눈을 감았다.
“군대장님은 거짓말하셨어요.”
손까지 들어 제 눈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이대로 잠이나 들었으면.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다.
“딴 마음 드셨잖아요, 저한테.”
데베르는 정말 잠이라도 든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내버려진 여자의 목소리에서 결국엔 울음기가 묻어났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제기랄. 거칠게 천막을 젖힌 데베르의 표정은 그답지 않게 너무도 지쳐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지나치게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맞아. 거짓말이야. 딴 마음 들었어, 처음부터.”
허름한 천 조각을 마지막 남은 이성인 것처럼 움켜쥔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후회하기 싫으면 당장 돌아가. 난 아내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지긋지긋한 번트에서의 악연을 끝내주기로 약속했단 걸, 과연 이 여자가 알기나 할까.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르겠지.
“시간 지나면 후회할 짓일 뿐이야.”
“제 현실은 지금 여기에 있어요.”
“분명히 후회해.”
어쩌면 그 말은 저 자신을 향한 경고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게로 다가오는 베스를 피할 도리는 없었다.
떨리는 손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시선을 내리뜬 데베르와 까치발을 한 베스의 눈이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아직 어제의 미열이 남은 입술이 그의 아랫입술에 건조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데….”
그래. 데베르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은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사령부 외벽에서 이 여자가 약을 들고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 것. 구태여 별칭을 정정하기 위해 지하 숙소 문을 두드린 것. 눈앞의 어설픈 보조병쯤은 충분히 웨인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후송 차량이 떠나가게 내버려 둔 것.
그리고, 이 한 줌도 되지 않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가 입 맞춘 것.
“…후회하세요?”
전장의 밤에 반짝이는 모든 건 위험한데.
저만을 올곧게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우습게도 데베르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비로소 그를 놓아버리려는 손을 잡아챈 건 본능이었다. 도저히 더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본능.
“그럴 리가.”
반짝이고 위험한 베스 제인스.
내가 널 어떻게 거부하겠어.
“감히.”
나지막한 속삭임과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숨이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