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말해 봐.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죽은 클리프 부인의 얼굴을 하고서.”
정갈한 남자의 손톱 끝이 귓불을 갉작이는 느낌에 베스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끈질긴 남자의 손은 떠나갈 생각이라곤 없이 이젠 그녀의 목덜미를 은근히 감싸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맥이 팔딱이는 지점을 지그시 누르는 느낌이 선명했다.
“응?”
그가 고함을 칠 땐 생기지 않았던 미묘한 분위기가 천막 바닥을 타고 넘실거렸다.
괜히 군대장의 심기를 거슬렸다 험한 꼴이라도 볼세라 다들 내뺐는지, 천 쪼가리 하나를 둔 게 전부인 노천에서도 들려오는 게 없었다.
“네 쓸모가, 이런 걸 말하는 거였어?”
슬며시 턱 언저리를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이번엔 말랑한 뺨을 꾹 눌렀다. 덩달아 살짝 짓눌려 올라간 입술 끝이 불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말간 눈에 담기는 희미한 모멸감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냐?”
하지만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여자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환자복 아래의 드러난 발목을 슬쩍 감싸 쥐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 바르작댔지만 이미 잡힌 발목을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안타깝네. 이 좁은 침대에서 도망도 못 가고.”
그는 비릿하게 웃어 보이며 문가를 턱짓했다.
“바깥엔 개미 새끼 하나 없으니.”
발목을 쥐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손쉽게 제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낸 데베르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성기게 날리는 눈발을 그대로 맞고 온 머리카락 끝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였다.
발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은 천천히 올라가 처음엔 가느다란 종아리를 쥐었고, 다음엔 뼈밖에 없는 무릎을 쓸었으며, 마침내 아물지 못한 상처가 헤벌어진 허벅지에 닿았다.
뻣뻣하게 굳은 베스는 차마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지나치게 느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거기서 더 마를 것도 있었나….”
제 손에 온전히 담아내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번트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더 마른 듯한 몸이 데베르의 눈에도 어느 정도 들어왔다. 기가 막힌 감상에 그는 흉하게 벌어진 허벅지의 상처만 가만히 주시했다.
나무 조각에 찔렸다기엔 지나치게 깊은 상처였다. 보아하니 폭격의 여파로 날아온 쇠 파편이 원흉일 텐데도, 이 미련한 여자는 또 괜찮은 척을 했다. 그것도 이 빌어먹을 곳에 남아 있고 싶다고 애원하기 위해서.
“지금이 네 쓸모를 증명하기엔 제격 아닐까.”
“… 군사 재판감이에요.”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라니.
“내가 뭘 할 생각인 줄 알고 군사 재판감이라 하는 거지?”
태연하게 되묻는 얼굴이 잔악했다.
“왜. 내가 고작 얼굴 닮은 게 전부인 너와, 죽은 부인하고 했던 짓을 하자고 할까 봐? 아, 그런 딴마음이 생길까 봐 겁나냐고 물은 거로군.”
점점 제게로 기울어지는 남자의 그림자에 베스는 손을 뒤로 짚었다. 그래봤자 다리를 붙잡힌 채라, 눕는 꼴밖에 안 되는 데도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위험 신호는 진즉 발동해 깜빡이고 있었지만, 도망칠 구석은 존재치 않았다.
“해줄 수는 있고? 난 내 아내하고 이 짓, 저 짓 넘치도록 해댔는데.”
어느새 그녀의 허리께 옆 침대에 양손을 짚은 데베르는 금방이라도 정염을 끌어올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화내시는 거잖아요. 제가 남아 있어서.”
“착각이 과하네. 베스 양은.”
날 보면 겁이나 내는 주제에.
뒤로 물러간 데베르는 더없이 말끔한 얼굴로 일어섰다. 좀 전의 질척한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듯 마른 손을 몇 번 털어내는 그의 행동에 베스는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남자는 모욕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맞아. 딴마음이 생길까 봐 걱정스러워. 너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아내에 대한 좋은 기억마저 망칠까 봐.”
입술 끝을 비튼 그는 품에서 시가를 꺼냈다. 탁, 탁. 지포 라이터 긁는 소리가 그들 사이의 침묵을 채우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내가 널 진짜 부하병으로 대했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어. 네 그 주제넘은 태도를 참아준 건 그나마 얼굴이라도 닮아서야. 그런데 갈수록 거슬리잖아. 네가 내 추억을 망치는 게.”
긴 연기를 뱉어낸 그는 시가를 쥔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표정엔 짙은 연기만큼이나 진한 근심이 묻어났다.
닿은 시선이 버거웠다.
데베르는 그 눈을 보지 않으려, 시가를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했다. 저와 이 여자 사이엔 서로의 맨얼굴 따윈 눈치채지 못하게끔 희뿌연 시가 연기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보셨다시피 전 언제든, 누구하고든 뒹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그런 파렴치한이니 함부로 동정하지 말란 뜻입니다.”
시가를 물지 못하고 망설이는 찰나에도 매캐한 연기는 아스라이 흩어져 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연기가 사라지기 전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은 늘 비겁했기에. 이번에도 피했다.
“베스 양의 동정이 아깝습니다.”
앞의 말들이 모조리 거짓일지언정, 적어도 지금 하는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물론, 언제나 이기적인 천성은 이 여자를 걱정하는 게 아닌, 어떻게든 그 동정을 물고 늘어질 멍청한 저를 경계한 거였다.
어쩌지 못하는 이 여자의 다정함을 핑계 삼아 불쑥 제게로 당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밀 때도 있었다. 오두막에서 그의 눈가에 그늘을 드리우는 흰 얼굴을 봤을 땐, 뻔뻔스럽게 처음 보는 행세를 하고 싶기도 했다.
저는 거짓에 능하기에. 속여 먹는 데는 도가 텄기에.
또 이 순진한 여자를 살살 굴려 품에 안기게 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다소 우스운 생각까지 스쳤더랬다.
하지만 건방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웨인으로 돌려보내긴 글렀으니 주무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병사가 찾아와 전선 근처의 임시 막사를 알려줄 겁니다.”
행여 베스 제인스가 지금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는 것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모르는 체하려 했을지라도, 지독하게 착해빠진 베스는 막상 덜떨어진 전남편의 꼴을 보고 물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이렇게 손을 뻗어대는 것인지도.
그러나 그 손길을 이기지 못한 제가 다시금 움켜쥐려고 하면, 또 이 여자는 그 손아귀의 으스러짐이 아파 버둥거릴 것이다.
지독한 불협화음. 그가 내린 베스와 저 사이의 결론이었다.
어차피 비극인 결말이라면, 이 여자가 아주 훗날 데베르 클리프란 이름을 떠올릴 때 일말의 동정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그때 그 불쌍한 남자는 여전히 그 꼴로 살려나. 이런 궁금증이라도 생기길 원했다. 지금 이 후미진 곳에서 제게 남은 동정을 다 쏟아붓고, 더러운 손을 털 듯이 떠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인가.
욕심이겠지.
“누구든 베스 양을 건들면 아무거나 잡고 머리통부터 후려치세요. 잘하는 거 있으면서 웬 얌전입니까.”
덜 탄 시가를 대충 천막 밖으로 던져낸 그는 베스의 이마에 손바닥을 붙였다. 좀 전의 손길과는 달리, 불순한 의도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접촉이었다.
“아직도 뜨겁네.”
그는 간이침대 위에 떨어진 모포를 넓게 펼쳐 여자의 몸을 꽁꽁 감쌌다.
“달리지 못하는 거야 상관없다 쳐도, 열에 들떠 헛소리 전하는 통신병은 정말 쓸모없습니다. 진심이에요.”
베스는 격앙된 감정이 지나간 뒤의 잔잔한 파도 같은 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어서.”
얼핏 일으킨 몸을 쭈뼛거리며 다시 누이자, 커다란 손이 눈가를 덮었다. 예상치 못하게 끼쳐온 서늘한 남자의 향에 베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못해 참은 숨을 들이켜자, 코끝엔 적당히 차갑고 무거운 향만이 감돌았다. 시가 향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선, 시가를 쥐지 않았던 손인 게 분명했다.
“명령인데.”
데베르는 부러 더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자 굳은살 박인 손바닥 아래에서 쉴 새 없이 파닥거리던 속눈썹이 꾹 내리감기는 게 느껴졌다. 피식 싱거운 웃음이 새 나오는 혀끝이 썼다.
작은 철통에 담긴 장작더미가 연신 타오르고 있긴 했으나, 노상에 펼쳐진 천막 안의 공기를 데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추우면 말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얌전히 눈을 감은 여자를 확인한 데베르는 바깥으로 나가, 가까운 곳에서 천막을 지키고 있는 말단 병사에게 손짓을 했다. 군기가 바짝 든 병사가 우렁차게 목청을 틔우려 하자, 그는 제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곤 무언으로 다른 곳으로 가란 명령을 했다.
천막의 고요를 지켜낸 데베르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바닥에 버려진 시가를 뒤축으로 짓이겼다. 저마저 여자의 열기를 옮은 것인지 매서운 밤공기가 더는 차갑지 않았다.
그 사이. 몇 발자국도 멀어지지 않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은 베스도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가 떠나면서 적당히 조도를 낮춰놓은 램프 불빛이 노곤하게 천막 안을 비췄다.
아직 가지 않은 걸까.
오른 열 기운이 문제인지, 아니면 제 기분 탓인 건지. 지난번 손을 치료해줬을 땐 저보다 뜨겁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손이 오늘은 유독 시원했다.
베스는 누인 몸을 좀스럽게 움직이며 베게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곧이어 나온 꼬깃꼬깃한 종이는 끄트머리가 그을려 있었다.
“베스 제인스….”
저조차도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였다.
어둑한 조명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라곤 희미한 필체뿐이었지만, 베스는 그게 마치 누군가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봤다.
“베스 제인스…. 베스….”
종이 한구석을 소중히 짚던 손끝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램프 불빛도 어느 순간 더는 어렵다 여겼는지, 그녀보다 더 어두운 곳에 서 있는 인영을 얇은 천막에 비쳤다.
마치 실수인 것처럼.
“베스, 클리프….”
잠들지 못하는 여자의 머리맡에 말 없는 그림자가 지키고 섰다.
“베스 클리프.”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속삭인 베스는 마침표를 찍듯 눈을 꾹 내리감았다.
막 하나를 사이에 둔, 미묘한 동침이 시작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