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짜악-
두툼한 손아귀 아래, 자비 없이 따귀가 후려쳐지는 소리였다.
“멍청한 새끼들이…!”
낮은 읊조림에 바닥에 엎어진 부하는 미약한 신음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성의가 무색하게 두툼한 칼론의 손은 쉼을 모르고 다시 허공을 향해 올라갔다.
짜악. 짝.
자칫 뺨을 치는 게 아니라 주먹질을 한다 여겨질 만큼 매서운 악력이었다. 멱살이 붙잡힌 탓에 이젠 쓰러지지도 못하고 모진 매질을 감내해야 하는 뺨따귀가 시뻘겋게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건 코바흐 놈들뿐만 아니라, 네놈들도 마찬가지야.”
간밤의 공습은 칼론 나름대로 공을 들인 작전이었다.
채 정비되지 않은 넥서스 육군이 밀리는 틈을 타, 방심해 있을 넥서스의 격납고를 깨부숴 제공권까지 압도하자. 그리하여 빠르게 브리틴의 승전을 가져오리라.
그러나 완벽해야 할 술책은 기가 막히게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틀리고 말았다.
“아마 데베르 군대장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격납고 위치를 남몰래, 윽!”
“네 주인이 데베르인가?”
“윽, 아, 아니. 카, 칼론.”
보다못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든 수하가 대번에 칼론에게 목덜미가 붙잡혔다. 덕분에 그제야 지긋지긋한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 놈은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브리틴에게 데베르는 그저 잡아야 하는 짐승 새끼야. 넌 사냥감에 존칭 붙여가며 총을 겨누는가 봐.”
“아, 윽….”
“기분 잡치게 만드네.”
모여든 칼론의 측근 수하들은 그의 심기가 평소보다 이상스러울 만치 더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라면 전선의 막사에 도착했어야 할 인물이 여전히 브리틴 왕궁에 앉아, 왕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도 이상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당장의 브리틴 실세가 칼론이란 것엔 이견이 없었지만, 뭐랄까. 지금 그는 과장되게 이 권력을 만끽하려 애쓰는 것 같달까.
“그래서, 브리틴 병원이 공격당했다고.”
“…예. 공습 이후 몇 대의 넥서스 전투기가 붙긴 했으나, 아군에 비하면 속도만 빠를 뿐 화력은 약한 것들이었습니다. 한참 추격전을 하다가 연료가 떨어질 즈음에 갑자기 넥서스 놈들이 서부 전선으로 돌진해 병원만….”
“게일 그 새끼가 너희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하늘에서 놀아준 거겠지.”
“죄송합니다.”
“제길. 격납고만 제대로 쳤어도 게일 웰링턴은 진작에 잿가루가 됐을 텐데.”
집착적으로 데베르 클리프의 뒤꽁무니를 핥으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놈의 전술, 전투 성향, 심지어 여자 취향까지. 하도 눈독을 들여 이젠 전부 안다 자부했는데.
교활한 늑대 새끼.
격납고와 활주로가 있는 비행장에 잘 닦인 폐기용 전투기들을 마치 새것인 것처럼 진열해 놓았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하, 하핫.”
붉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웃는 얼굴이 음산했다. 그러다 뚝 웃음을 그치더니 정색을 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대중없이 오락가락하는 제 태도에도 표정 한 번 찡그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부하들을 지켜보던 칼론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예, 대장님.”
그 손짓에 축객령에도 바깥을 나가지 않은 유일한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넥서스 전장 병원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 약품 보급 경로도.”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고 물러나려는 남자를 긴 손가락이 도로 불러세웠다.
“저 위에 여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느슨하게 굴지 마. 제 몸 상해가며 발악할 인물은 아니지만, 궁지에 몰리면 뭔들 못할까.”
“알겠습니다.”
툭툭 제 옷을 털며 일어난 칼론은 무심히 제 다리를 한번 쳐다보곤, 평소와 똑같이 걸음을 뗐다.
* * *
“정말… 아니란 말이죠…?”
아이네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베스 또한 거듭 같은 대답을 하는 게 미안스러워 고개만 얕게 끄덕였다.
“이게 말이 되나….”
드레싱을 해주고 나서도 도통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아이네스는 멍하니 베스의 간이침대 곁에 서 있었다.
베스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게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간호 숙소 근처에 있다가 베스의 사망을 확인하고, 유품을 수습한 이도 다름 아닌 딕시였다. 무언가 잘못되었으리란 희망 고문조차 하지 못하게 아예 쐐기를 박아 버린 게 바로 클리프 부인이자, 제 친구인 베스 제인스의 죽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아니, 멀쩡히는 아니지만. 이리도 똑같은 얼굴로, 심지어 이름까지 베스 제인스이면서 다른 사람이라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건 그 의연한 몰리 부인이 봐도 말이 안 된다 소리쳤을 것이다. 그나마 부인이 후방 병원으로 급히 가셨으니 망정이지.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세요. 제 친구를 너무 닮아, 앗.”
“클리프 부인, 말씀이시죠?”
누구보다 클리프 부인의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마치 타인인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라니. 아이네스는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낮에 병원을 찾아온 아더의 부탁이 스쳤다.
‘메르딘에서 왔다고 합니다. 후방에서 웨인과 연락이 닿은 김에 딕시 양과도 통화를 했는데 정말 아니라고 하네요. 베스 제인스 양의 죽음은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고요. 제가 보기에도 우리가 알던 베스 제인스 양의 모습과는 아주 달라요. 좀 더 밝고, 음….’
그는 망설이다가 결국 남은 속마음도 비쳤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닮았지만, 어쨌건 다른 사람이라는 게 지금의 결론입니다. 데베르 앞에선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해 주세요. 지금 전시상황이… 좋지 못해서 하는 이기적인 제 부탁입니다.’
차라리 진짜 베스라면 얼마나 좋을까.
베스가 살아있다고 저도 모르게 기대했던 게 푹 식어버리자, 아이네스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실감하지 못했던 친구의 죽음이 불현듯 생생히 와닿아, 정작 그때는 흘리지도 못한 눈물이 지금에서야 삐져나오는 것이었다.
신열에 들떠 죽은 듯이 누워있던 베스가 비칠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천막 입구 앞에서 멈추어 섰다.
“어? 흡. 공작님이시구나. 들어오세요. 전 이제 다음 환자에게 가봐야 해서요.”
얼른 눈물을 훔친 아이네스는 곁에 놓인 트레이를 잡아들었다. 미처 닿지 못한 베스의 손은 맥없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기다리면 됩니다.”
“정말 나갈 참이었습니다. 그럼.”
기다리면 된다는 느긋한 대답을 하면서도 천막을 젖히고 들어오는 그의 걸음은 애초에 기다릴 생각이 없다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듯 아이네스가 사라진 자리엔, 간이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고 앉은 베스와 그녀에게로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는 데베르뿐이었다.
그는 병실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천막 안을 대충 훑어봤다. 유일한 여자 환자인 베스를 위해 식수나 모포를 보관하는 창고용 천막 한쪽을 급히 비워낸 거라, 주위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빙 주위를 둘러본 데베르는 천장에 매달린 램프 불빛이 가장 강해지도록 스위치를 돌렸다. 발갛게 발광하는 주홍빛 불 아래에 서자, 그늘진 베스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살아남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구태여 이곳의 여자 환자는 너뿐이란 얘길 할 생각은 없었다.
“대답.”
그가 명령하자, 고개를 푹 숙인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멀건 환자복은 낡은 흰 천을 원피스처럼 만들어 팔다리만 쑥 빠져나오도록 한 것에 불과했다. 그 탓에 유독 여린 어깨선이라던가, 상처 소독을 위해 허벅지 중간까지 드러난 맨 살결이 대책 없을 정도로 훤히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볼 사람이 없단 걸 알면서도 그 꼴이 영 눈에 거슬린 데베르가 근처의 모포를 펼쳐 여자의 어깨를 덮으려 하자, 힘없이 휘적이는 손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더워서요.”
덥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숙인 목덜미라던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귓바퀴가 램프 불빛 때문이라기엔 지나치게 불그스름했다.
“상관의 추위만 걱정하다, 제 몸 간수는 못 하셨나 보군요.”
다소 냉담한 말투와 달리, 그의 손은 거리낌 없이 여자의 뺨 언저리로 다가갔다. 한 손에 담기는 얼굴을 무감한 눈빛으로 잠시간 쳐다보던 그는 곧 미련 없이 손을 뗐다.
“열이 나네.”
“…미열, 입니다.”
“미열 정도가 아닌데.”
“해열제를 먹어서 금방 내려갈 거예요.”
아무 말 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 그의 행동에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담겼다.
“웨인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퍼뜩 고개를 쳐든 까만 눈동자가 천장의 불빛을 따라 함께 흔들렸다.
“왜, 어째서….”
“내게 부상 당한 병사는 쓸모없으니까.”
한 치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냉정한 말이었다.
여자가 급하게 상처를 감추려 허둥거리자, 낮은 경고가 뒤따랐다.
“바깥에 후송 차량 도착했으니 군복으로 환복하고 바로 타도록.”
“저, 저… 쓸모없지 않아요.”
바깥에선 떠날 채비를 마친 후송 차량이 요란하게 엔진을 들썩이는데도, 데베르의 귀엔 온통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자신은 쓸모없지 않다고 변명하는 그 간절하고 무의미한 애원만.
“웨인 전화국에서, 교신 시험도 봤어요. 제가 가장, 잘해서 데베르 대장님 전담이 된 거예요. 공습에서 살아남은 기존의 통신병들도 있었지만, 그 병사들은 애초에 1군 전담이 아니라서 자칫하다가 이중 첩자가 될 수도 있다고 하셨거든요. 군 정보를, 지나치게 알고 있다고요.”
열 기운 때문에 불규칙하게 할딱거리는 숨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다.
“쓸모, 있어요….”
그에게 뻗기라도 할 것처럼 꼼지락거리던 흰 손은 애꿎은 모포 자락만 꾹 쥐었다. 그러나 조금씩 아래로 처박히는 머리통은 밀려드는 제 서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쓸모없다고 말씀하세요.”
“차에 타. 명령이다.”
“애초에 비전투 보조병에, 허벅지는 나무 조각에 겉만 찔린 것뿐입니다. 사실 전 못 걸어도 상관없잖아요. 저의 쓸모는 딱 목소리…까지, 아닌가요?”
어느새 바깥에선 마지막 후송 병사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데베르는 또다시 같은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기어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는 마침내 저를 미치게 만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제발….”
“왜 이렇게 필사적이야.”
마지막 부상병을 태운 후송 차의 트렁크가 잠기는 소리를 들은 데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신경질적으로 구긴 미간에 선명하게 홈이 팼다.
“어제 그렇게 봐놓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치민 부아를 참지 못한 쩌렁쩌렁한 고함이 좁은 천막은 물론, 바깥의 지나가던 병사들까지 얼어붙게 했다.
모순적이게도 그 시선에 겁먹지 않은 이는 오직 한 명. 그의 분노를 여과 없이 직시하고 있는 베스 하나뿐이었다.
“젠장.”
멀어지는 엔진 소리가 마침내 들리지 않자, 데베르는 쌓인 궤짝 더미를 사납게 걷어찼다. 엉망으로 널브러진 궤짝 앞에서 거칠게 들썩이는 널찍한 등은 유난히 더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베스는 아직 열감이 가시지 않은 입술을 달싹였다. 제 딴엔 아주 용기를 낸 것이었다.
“공작님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세요….”
하지만 잔뜩 속상함이 담긴 목소리까지 감출 재주는 없었다.
“뭐가 겁나시길래.”
느릿하게 뒤를 돌아본 데베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곤 짧은 후회를 곱씹었다.
가장 저를 두렵게 하는 존재를 마주했음에 대한 탄식이었다.
“제가 클리프 부인을 닮아서 그러세요? 혹시나… 딴마음이 생기실까 봐…?”
꼭 알고 하는 듯한 오만한 질문에 데베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 맹랑한 말을 뱉는 여자에게 다가가는 건 단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짐승같이 형형한 눈동자가 제 아래의 여자를 위압적으로 응시했다.
“그렇다면, 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떠나갔던 그의 손이 다시금 열기 어린 뺨을 감싼 것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