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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83화 (183/206)

183화

붉게 반짝이는 유성의 꼬리표를 따라, 포터 한 대가 빠르게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 위는 가혹한 유성이 땅에 떨어져 펑, 펑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일시적으로 조금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잇새를 꽉 깨문 데베르는 더 밟을 것도 없는 액셀을 터뜨릴 듯이 내리눌렀다.

사령부가 있는 시가지가 가까워질수록 발광하는 시뻘건 불길도, 짙어진 화염 냄새도,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폭발 소리도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제기랄.”

분명 이쯤에선 보여야 할 호텔 외벽의 촌스러운 황칠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당한 건가. 목구멍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데베르는 핸들을 거세게 내려쳤다.

그때. 구부러진 거리를 급히 내달리는 포터의 보닛 위로 불붙은 거대한 목재 더미가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구겨진 보닛 탓에 반동을 이기지 못한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윽.”

한 집 걸러 한 집. 때때로 연이어 불이 붙은 집들은 거리를 끔찍한 화마로 뒤덮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에서 내린 데베르는 생각할 틈도 없이 호텔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베스!”

목에 시퍼런 핏줄이 돋아날 만큼 있는 힘껏 그 이름을 불렀다.

“베스 제인스! 들리면 답해!”

공습이 이만큼 진행될 정도면 살아남은 인원은 사령부는커녕, 가장 멀리 달아나기 위해 진즉 차에 올라탔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베스는.

“베스!”

데베르는 차마 여자에게 말하지 못한 저열한 비밀을 떠올렸다.

관제실과 전담 통신병들의 위치는 지하. 그 의미는 가장 안전히 전략실을 숨기기 위함도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일이 있을 시 가장 빠르게 은폐해버리기 위함이었다.

은폐. 핑계도 좋지. 그건 그저 죽음에 대한 방관이었다. 적군에게 작전 정보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일부의 희생을 보는 것이 낫다는 지극히 넥서스다운 판단.

“들리면, 크흡…!”

훅 입안으로 들어온 매캐한 가스에 데베르는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하지만 더 깊숙한 시가지를 향해 달려가는 다리는 한치도 느려지지 않았다.

또다시 그 여자가 죽었으면 어떡할래.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지워내기 위해선 계속해서 달려야만 했으니까.

이번엔 직접 확인할 텐데 너무 속상하진 않겠어?

낄낄거리는 소리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데베르는 더 크게 베스의 이름을 외쳐야만 했다. 집착에 가까운 외침이 불길에 휩싸인 거리를 울렸다.

“베-”

그러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데베르는 목청을 더 높이기는커녕 온몸이 굳는 걸 절감했다.

쏟아지는 폭격 아래, 오래된 목제 건물인 사령부는 질 좋은 장작 정도에 불과하단 건 당연한 이치였다. 데베르는 지금 그 당연한 사실 때문에 화가 치미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없어야만 할,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자그마한 등이 연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베스!”

그게 그를 미치게 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이 가득한 군복의 등허리 위로 풀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데베르는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베스의 양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라고 남아 있어! 여기가 어디라고…!”

제 몸통만 한 간이 발전기를 끌어와 쉼 없이 손잡이를 돌려대던 하얀 손등엔 생채기가 가득했고, 그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뺨마저 사방에서 끼쳐오는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전화….”

겨우 그 말만 뱉는 여자의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다. 어디선가 터지는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움칠거리는 떨림이 여과 없이 그에게도 전해졌다.

전화라고. 데베르는 그제야 발전기에 연결된 까만 전화기 한 대를 발견했다.

“알려, 드리려고….”

분명 사위는 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럽고, 허공엔 희끄무레한 잿가루가 정신없이 날려대고 있었지만 속삭이는 베스의 목소리만큼은 데베르에게 선명히 들렸다.

이러니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이러니.

“…네 목숨이나 챙기라고 했잖아. 아직도 못 알아먹어?! 도대체 언제까지 멍청하게-”

하지만 뒷말은 다급히 그를 끌어당기는 미약한 손길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동그란 이마가 가슴팍에 닿는 느낌이 선득했다.

“죽은 줄 알았어요.”

맞닿은 채 뛰어대는 심장 고동이 이 여자의 것인지, 제 것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연잇는 폭발음에 맛이 가버린 귓전에서 울리는 진동인지도 모른다.

“이리 와.”

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들을 감싸듯이 바라보고 있는 사령부 호텔의 남은 골조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곧 완전히 붕괴한단 신호였다.

“잘 들어. 무조건 내 손만 잡고 달리는 거야. 그리고, 내가 다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차를 구해서 서쪽으로 가.”

빠르게 읊조린 데베르는 베스의 손을 꽉 쥐고, 불타는 시가지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불길은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서 터져댄 수도관 때문에 아무도 없는 거리를 달리는 두 사람의 군복은 점점 젖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바퀴 달린 것들은 죄다 내뺀 건지 보이는 게 없었다. 아직도 시커먼 하늘 위엔 뱀 꼬리 같은 폭격기가 창궐하고 있는데도.

“아…!”

갑작스레 들려온 외마디와 함께 데베르의 팔이 뒤로 꺾였다. 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베스가 다리를 움켜쥐며 바닥에 넘어진 탓이었다.

본래 무릎을 덮는 기장이던 치마 한쪽이 허벅지 위까지 찢겨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살결엔 갓 생겨난 새붉은 상처가 방만하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전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제발!”

데베르는 다가오는 자신을 기함하며 밀어내는 여자를 망설임 없이 안아 들었다. 급히 주위를 돌아보는 그의 시야에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작은 오두막이 걸렸다. 아마 마부들의 대기소였을 그곳은 시가지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어 아직 폭격의 불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두 사람이 어느새 빈 시가지의 끝과 끝을 함께 달음질했단 뜻이기도 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

문을 박차고 들어간 데베르는 오두막 한편에 베스를 기대 앉히곤,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수통을 꺼내 들었다.

“조금만 참아.”

그새 더 벌어진 허벅지의 상처를 살핀 후, 수통 안의 독하디독한 위스키를 그 위로 살살 부었다.

“읏.”

베스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겨우 고통을 참아내느라 잔뜩 깨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조금만. 조금만, 베스.”

“아, 으….”

결국 작은 머리통이 그의 팔뚝에 쓰러지듯 기댔다. 상처 위에 심하게 엉겨 붙은 잿가루만 얼추 씻어낸 데베르는 곧장 제 셔츠 자락을 길게 찢어 붕대처럼 허벅지를 동여맸다.

“됐어. 잘했어.”

여전히 탈력감에 빠져 그에게 늘어진 여체를 다시금 고쳐 안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엎어진 꼴이나 다름없었지만, 여자는 미약한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데베르는 머리맡에 난 창문을 흘깃 올려봤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넥서스 공군 전투기가 보일 것이다. 비행장만 폭격당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다. 그가 진즉 게일을 통해 본래 비행장엔 폐기 처분해야 할 전투기만 몰아넣고, 실제 위치는 바꾸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얼마쯤 걸릴까. 그 시간을 셈하느라 잠시 눈을 감고 있자,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자면, 안 돼요….”

잔뜩 초조한 목소리가 연이어 그를 흔들었다.

“아, 안돼. 눈 떠요. 빨리.”

맞닿은 몸을 얼추 일으켜 그의 멱살을 쥐기까지 하는 손길에 결국 데베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깥엔 여전히 살벌한 폭격이 빗발치고 있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저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으리라.

“자지 마요.”

다짐을 받아내듯 연신 눈을 맞추는 여자에게 데베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여자는 피로감에 젖은 얼굴로 다시 안겨 왔다.

“군대장님이 추울까 봐요.”

묻지도 않은 변명을 뱉는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를 껴안은 손엔 나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들이 디디고 있는 지반은 계속해서 흔들렸고, 적군의 전투기 모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름 끼치는 회전음도 여전했다.

가만히 서로의 호흡에 기댄 시간이 길어지려는 찰나, 베스가 조심스레 먼저 물었다.

“…저와 많이 닮았나요?”

“누가.”

데베르는 알면서도 답해주지 않았다.

“클리프 부인이요. 첫날 저하고 착각하셨잖아요.”

“닮지 않았어. 말 그대로 착각한 거야.”

그답지 않게 조금은 흐트러진 표정으로 거짓을 고했지만, 다행히도 여자는 추위 때문인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달라. 착각한 게 우스울 만큼. 그 여자는 살아 있더라도 날 기억하는 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이 없다는 걸 잠시 잊었어.”

“…왜.”

짤막한 침묵이 흐름과 동시에, 쉴 새 없이 터져대던 폭격이 갑자기 멈추었다. 손목시계의 미세한 초침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예리한 정적이 사위를 감쌌다.

“…왜 나쁜 기억만 있다고 생각하세요?”

“좋은 기억은 준 게 없으니까.”

“그건 군대장님만의 판단이잖아요.”

어느덧 반짝 고개를 올리곤 따져 묻는듯한 목소리에 데베르는 여자의 등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네가 클리프 부인이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

웅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던 여자는 제법 속이 상한 얼굴로 그를 살며시 노려봤다.

“그럼 애초에 다른 남자 만나게 두시지 그러셨어요.”

그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히고 가슴을 들썩였다. 웃음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시원하게 올라간 입매와 패인 볼우물에 그의 나직한 즐거움이 담겼다.

“다른 남자라.”

여전히 고개를 젖힌 채 가지런한 치열을 혀로 훑던 그가 묘한 표정으로 베스를 내려다봤다.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는 베스 제인스를 만나고, 그 마음을 키우던 첫 순간부터 저 아닌 누구에게도 이 여자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생각해 볼 법도 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데베르 클리프를 기억하지 못하는 베스가 다시 넥서스의 어딘가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다시는 클리프란 이름조차 듣지 못한다면.

“…그건 힘들 거 같고.”

이번엔 꽤 선선히 답을 주었다.

“내가 이기적이거든.”

그새 밤이 지나간 걸까.

어울리지 않는 새소리가 단잠을 방해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얼굴 위로 비쳐 드는 햇살이 환해, 데베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텅 빈 것만 같은데, 이상스러울 만치 마음은 편안했다.

아마도 꿈이겠지.

꿈속이라 할지라도 흔치 않게 찾아온 동요 없는 시간을 조금만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은 눈이 부실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빛줄기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깨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문득 아른거리는 작은 그림자가 눈꺼풀 위로 드리워졌다.

누구지.

데베르는 소담한 그늘 속에서 슬며시 눈을 떴다. 여러 갈래의 빛발이 아지랑이처럼 교차해 시야를 어지럽혔다.

처음 보인 건 그의 눈가를 가리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잔뜩 구겨진 감색 군복이었고. 그다음은.

햇, 빛.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이내 그를 향해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두 사람의 주위로 빛 부스러기가 살갑게 부유했다. 마치 반딧불이 하나 없던 지난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따사로운 한때였다.

햇빛….

그래, 햇빛.

“…눈부셔.”

쏟아지는 햇살을 핑계 삼아 제게서 멀어지는 여자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 여자가 가져오는 어둠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인정해야만 했다.

난 언제라도 베스 제인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그런 담담한 패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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