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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82화 (182/206)

182화

창밖의 세상은 푸르께한 새벽빛이 만연해있었다. 폭우, 그다음은 폭설. 너른 하늘을 지겹게도 메우고 있던 구름이 비껴간 새벽은 시릴 만큼 청량하기만 했다.

“이제 시작인 거야?”

라프넬은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물었다.

“아마.”

“칼론 대장님.”

때마침 찾아온 부하병의 부름에 얼핏 고갯짓을 한 칼론은 드러난 나신에 대충 셔츠를 걸쳤다. 잘 단련된 근육과 가무잡잡한 피부가 주는 느낌이 자못 색정적이었다. 한결같이 붉은 빛을 띠는 눈동자도 그만의 위험스러우면서도 나태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아쉽네. 이제 너랑 뒹구는 것도 못 한다는 게.”

지나치게 노골적인 언사에 라프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든 저렇든 제국의 공주로써 일생을 살아온 라프넬에게 때로 칼론은 유독 방만하게 굴곤 했다. 한편으론 장난 같기도, 다른 한편으론 진심 같기도 한 그 대화를 예전처럼 흘려버리기엔, 오늘 그녀는 조금 예민했다.

“무슨 뜻이야, 칼론.”

그런 말을 뱉을 때면, 장난스런 표정으로 곧 입을 맞추곤 했던 남자가 무감하게 옷만 꿰입고 있었으니까.

“설명해. 난 언제까지 이 왕궁에만 있어야 하지?”

그 미묘한 변화를 모를 라프넬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던 걸 오늘에서야, 굳이 이 새벽에서야 물고 늘어지는 건 제 안에 어떤 불안이 실체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언제까지? 왜, 전선 막사라도 가서 날 위로하기라도 하려고?”

“건방 떨지 마.”

“너야말로. 라프넬.”

어느새 군복을 거의 다 차려입은 칼론은 벨트를 조이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지겹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엔 짜증이 스며 있었다.

“네가 언제까지 라프넬 메이너라 생각하는 거야?”

살짝 턱을 치켜든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침대 위의 한 줌도 안 될 여자를 응시했다. 투명한 살결 위로 남자가 남긴 울혈을 가득 매달고 있는 라프넬은 그의 위협이 되기엔 너무도 유약한 모습이었다.

“대장님, 당장 보고드려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문가에 서 있던 병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자, 칼론은 침실 중앙의 협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 넥서스 공주가 있단 걸 아는 병사는 여전히 문가에서 우물쭈물했다. 이에 칼론은 말 대신, 조금 더 힘을 주어 협탁을 두드렸다.

명백한 신호였다.

“드,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칼론을 잠시 노려보던 라프넬은 옆에 놓인 가운을 급히 몸에 걸쳤다. 반면 여상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칼론은 태연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야.”

“…실패했다고 합니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네.”

라프넬의 눈치를 보던 병사가 목적어를 상실한 채 답했지만, 칼론은 단숨에 알아들었다.

애초에 첩자 하나를 데베르에게 보내면서도, 고작 그놈 정도가 데베르 클리프를 진짜로 죽이리란 기대는 없었다. 아무리 ‘그 여자’의 죽음에 정신이 팔려 어린 병사의 칼날에 제 몸뚱이까지 내줬다지만, 만만치 않은 놈임은 확실했으니.

“그리고….”

아직도 영 신경이 쓰이는지, 병사는 대장의 여자가 있는 침대 발치를 연신 힐끗거리다가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춰 보고했다.

“…넥서스 황제가 그곳에 함께 있다고 합니다.”

“아더 메이너가?”

스스럼없이 구는 칼론에 더 놀란 건 애꿎은 상대 병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듣는 라프넬 메이너도.

라프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얇은 시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상관없어. 데베르 클리프와 달리, 아더 메이너는 상당히 안정을 지향하는 놈이거든. 이미 제국군이 열세인 마당에 공격적인 시도는 어림도 못 낼 새끼야. 그보단 때가 지나면 협상을 요구하겠지.”

그는 창가에 놓인 술잔을 몇 모금 들이키다 말고, 난데없이 남은 술병을 얼음통에 부어버렸다.

“대단한 공작께선 뭘 즐겨 마시나 했더니.”

잔뜩 이맛살을 구기며 협탁으로 돌아가던 칼론의 걸음이 문득 멈칫했다.

“….”

형형하기만 하던 적안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다를 건 없었다. 군복 아래엔 탄탄한 근육이 있을 것이고,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한 군화 끈은 단단히 매여 있었다.

“제기랄.”

시험하듯 조심스럽게 한 발을 떼던 칼론은 제 뜻대로 곧장 움직여주는 허벅다리를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올랐다.

“아르젠은.”

고개를 쳐든 그의 얼굴은 그나마 빈정거리는 미소라도 걸치고 있던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살벌하게 질려 있었다.

“여, 연락을 취하는 중이지만-”

“젠장. 쳐들어가서 그 여왕인지, 공주인지 머리통을 끌고 와도 모자랄 마당에 무슨 결혼 장사라도 하는 거야?!”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협박을 했어야지.”

빈 술병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라프넬이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이미 그녀가 없는 듯이 구는 칼론에겐 무용한 몸짓이었다.

“끽해야 작은 왕국에 불과한 주제에 어딜 뻗대는 거야.”

아무리 열세라지만, 넥서스는 넥서스다. 코바흐를 인간 방패 삼아 전선에서 밀어붙이더라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멍청한 호이든이 엉망으로 들쑤셔 놓은 넥서스 군대가 데베르의 손 아래 완벽히 정렬을 갖추기까진.

데베르 클리프 그놈의 정신머리를 녹여버릴 치명적인 한 방이 뭐가 있을까.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던 칼론의 동공이 뱀처럼 좁아 들었다.

“…오늘 밤.”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명령어에 병사는 잽싸게 경례를 하곤 침실을 뛰어나갔다.

“뭐 하자는 거야, 칼론.”

드디어 나간 병사의 빈 자리를 확인한 라프넬이 대번에 쏘아붙였다.

“감히 날, 창부 취급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후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비튼 칼론은 두툼한 허리춤에 제 양손을 올렸다. 호흡할 때마다 거칠게 들썩이는 어깨에 밀려드는 그의 분노가 전해졌다.

“대답해. 난 오늘 당장, 이 좁아터진 왕궁을 나갈 거니까.”

눈치 빠른 라프넬이 왕궁을 배회하는 보초병들이 무엇을 감시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왕비의 침실이란 눈요기에 저를 묶어두고, 침실 시중이나 들게 하는 칼론의 태도는 노골적일 만큼 선명했으니 모르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었다.

“라프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귓가를 맴돌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침대맡으로 다가온 칼론은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려진 공주의 결 좋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정이 깃든 손길이었다. 그것만큼은 라프넬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만, 그 방향이 비틀려 있다는 게 문제일 뿐.

“내가 유일하게 사냥하지 않는 건, 버려진 작은 개새끼야. 예쁘더라고. 나만 보면서 꼬리 흔드는 게.”

미약한 열감이 있는 라프넬의 뺨을 거친 엄지손가락이 꾹 눌렀다 뗐다.

“하지만 낑낑거리면서 매달리는 건 싫어. 발정 나서 들러붙는 건 질색이고.”

칼론은 새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느른하게 미소 짓다가, 동그란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나는 널 오래도록 예뻐하고 싶어.”

달콤한 경고였다.

라프넬 메이너가 아닌, 그저 라프넬이 되어버린 과거의 공주를 향한 경고.

* * *

시찰단과 함께 군용차에서 내린 데베르와 아더는 시가전으로 엉망이 된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묵묵히 걸음을 떼다 말고 아더가 흘리듯이 물었다.

“데베르 대장, 몸은 좀 어때.”

“보시다시피.”

“내가 보기엔 끔찍한 수준인데.”

아더의 능청스런 대꾸에도 데베르는 별다른 답 없이 텅 빈 거리를 둘러보기만 했다.

다닥다닥 붙어선 집들이 에워싼 구부러진 거리에는 덮쳐오는 어둠과 함께 죽음이 내려앉아 있었다. 군홧발에 짓밟혀 꽃송이마다 목이 꺾인 화단, 쇠꼬챙이에 걸린 썩은 고기의 누런빛, 허옇게 곰팡이가 슨 식료품점의 과일들.

그것은 모두 선명한 죽음의 색채를 상징했다.

“아직까진 브리틴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해도 저물고 있으니, 전투는 내일 아침이 확실하겠군.”

종탑을 지키던 정찰병의 말에 아더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털어댔다.

데베르는 그들의 막사이자, 아마도 마지막 접전지가 될 시가지를 최종적으로 훑어보며 무심히 대꾸했다.

“준비해.”

심심하리만치 간략한 한마디였지만, 그 말의 무게를 아는 병사들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첩자와의 그 난리를 목도한 게 어젯밤, 아니. 바로 오늘 새벽 아니던가. 예상치 못한 첩자의 등장과 이를 해치우는 군대장의 그악스러운 모습은 병사들에게 막연한 공포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데베르, 정말 괜찮아?”

제 몸 하나쯤은 충분히 전략적인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을 아는 아더는 시가지를 벗어나 전선 초소에 도착해서도 재차 물었다. 그럴 법도 한 게, 데베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옷을 주워 입고 참모 회의부터 기어 나왔다. 다들 그 기세를 보며 질린다는 눈빛 반, 동경하는 눈빛 반을 보내던 걸 당사자는 몰라도 아더는 분명히 알아봤다.

“사실, 이런 일 질리게도 겪긴 했지만-”

“사령관님!”

별 위로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던 아더의 발이 초소를 지키던 부사관에게 붙잡혔다.

“젠장. 군대장이 여기 있는데 날 부르다니.”

“애석하군.”

“진짜 넌 그 얼굴로 되지도 않는 농담은 절대-”

잔뜩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아더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에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막사 안으로 홀로 들어선 데베르는 눈이 그친 평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갈수록 어둠은 이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이상도 하지.”

분명 모든 게 끔찍하게 비틀린 채 돌아가고 있는데, 모순적이게도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니.

뻐근한 눈두덩이를 양손으로 꾹 누르던 그는 결심한 듯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겨울밤은 너무 기니깐요.’

간밤의 꿈이 더없이 생생했다. 얼굴에 닿던 부드러운 살결이 지금까지도 감각을 괴롭힌다면 너무 같잖은 꼴일까.

연결음은 지직거리며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잠자코 그 조용한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데베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여기는 푸른 숲. 들리면 응답하라.”

끝내 이어지지 못하는 전화선이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실패인가….”

그때였다.

[수신 양호.]

데베르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내리떴다. 수화기를 쥔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전율하는 온몸의 감각이 또렷이 현실을 일깨우고 있었다.

[푸른 숲은 고요한가.]

이건 꿈이 아니라고.

[푸른 숲은-]

“고요하다.”

[….]

뒤통수를 깊이 벽에 처박은 데베르는 터져 나오려는 헛숨을 겨우 참아내며,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무엇이 보이는가.”

건너편에서 끼익하는 회전음이 났다. 아마도 지하 관제실에서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설치한 관측경을 돌려보는 모양이었다.

초조함과 비슷한 감정이 데베르의 목울대를 간지럽혔다. 마음이 달았다.

[지금은…]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통신병의 한마디 때문에.

[유성이 보인다.]

유성.

[쏟아지는 듯한 유성이 보인-]

그 순간. 찌지직거리며 끊긴 전화 연결음과 함께, 쉭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유성 무리가 보였다.

전장의 밤에 반짝이는 모든 것은 위험하다.

방아쇠를 당긴 적군의 총구, 하늘이 아닌 땅을 수놓는 거대한 자주포, 은밀히 밤하늘을 나르고 있는 정찰기를 향한 첩자의 랜턴 신호….

그것들은 으레 끔찍한 죽음을 가져오기 전엔, 영악스럽게도 빛나기만 하니까.

“베스….”

고로 이곳은 유성 같은 낭만적인 것이 있을 곳이 못 됐다.

“베스!”

그건, 아름다움만을 흉내 낸 잔인한 폭격의 불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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