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80화 (180/206)

180화

“지금 뭐라고 했나요…?”

“부상병이 사령부로 먼저 갔다고 말씀드렸는데….”

파리한 얼굴로 되묻는 아이네스의 얼굴을 본 신출내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 곁에 서 있던 몰리 부인의 안색도 마찬가지였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늦게 돌아오길래, 그저 일이 서툴러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제가 잘못한 건가요? 병원부터 데려왔어야 했나요? 근데, 무척 급한 브리틴 사안이라고, 아! 군 기밀이라고 한걸요. 간호사가 군인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울상이 된 앳된 간호사가 발발 떨며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문득,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몰리 부인과 희게 질린 아이네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얼른!”

“비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급히 막사 깊숙한 곳으로 달려가는 몰리 부인과, 막사 입구로 뛰쳐나가는 아이네스 때문에 곳곳에 놓인 트레이들이 우당탕거리며 쓰러졌다. 평소 얼마나 점잖은 두 사람인지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 데베르에게…!”

“전화선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몰리 부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채 끝맺음을 하기도 전, ‘진짜’ 정찰병이 부리나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병원장님!”

혼란스러운 외침이 순간 적막해진 막사 안을 울렸다. 불행을 점치는 소리는 늘 그렇게, 사납게 귓전을 울리곤 했다.

정찰병에 길이 막힌 아이네스와 이제 막 전화기 앞에 앉은 부인의 눈이 마주쳤다.

“전화선이 끊겼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요!”

“오, 안돼….”

부인의 귓가에 가까이 닿지도 못한 수화기가 맥없이 허공에 떨어져 달랑거렸다.

* * *

통신 보조병인 전화 교환원들이 묵는 숙소는 지하 관제실 옆의 본디는 술 창고였던 후미진 방 하나였다. 흰 천 몇 개를 가림막 삼아 다닥다닥 붙어선 침대는 척 보기에도 숨이 막혔지만, 벽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를 막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름 장 역할을 하는 교환원 하나가 교환원들이 모두 돌아온 것을 확인하곤 두 줄로 늘어선 침대 사이의 붉은 등을 껐다.

모두가 함께 모여 있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장 내일부턴 밤낮없이 전화통을 붙들고, 관제실에 묶여 있어야 할 운명들이었다.

“시간 엄수하세요.”

교환장의 엄한 목소리를 들으며 베스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제 침대로 돌아갔다. 침대라 해봤자 낡아빠진 매트리스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허용된 유일한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옆 침대에 누운 교환원이 베스를 향해 소곤거리자, 베스는 침대 다리 밑으로 의료 상자를 밀어 넣으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사근사근한 미소에 교환원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좀 더 친해지면 반드시 캐내리라는 다짐을 연거푸 굳히며.

‘왜 잠들지 못하냐고 물었습니다. 잘 자야 훌륭한 제 전담 통신병이 될 텐데.’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뾰로통해진 입술을 곱씹으며 베스는 딱딱한 매트리스에 얼굴을 붙였다. 오늘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볼 생각이었다.

그때. 똑, 똑. 작은 노크 소리가 잠들려는 지하 숙소를 깨웠다.

교환원이 도착한 이후론 별다를 것 없이 잠잠하기만 하던 전선이었기에, 고작 밤중에 들린 노크 소리 하나만으로도 호기심 많은 아가씨들이 모인 숙소엔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누군가 “쉿!” 매섭게 쏘아붙이는 꾸지람도 들려왔다.

“베스 제인스 양.”

갑자기 들려온 제 이름에 베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찾으시는군요.”

교환장은 ‘누가’를 얘기하며 한 뼘도 안 되게 열린 문틈을 흘깃 눈짓했다.

후다닥 바구니에 담긴 코트를 꿰입은 베스는 얼른 문가로 뛰어갔다. 호텔 바깥만큼이나 시커먼 지하 계단은 누가 서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교환장이 든 희미한 램프 불빛이라도 있던 숙소 문까지 닫히고 나자, 짤막한 복도는 한 치의 빛조차 없는 암흑 그 자체였다.

“누구-”

“잠을 깨웠습니까.”

아. 그 남자다.

베스는 공연히 입술을 뻐끔거렸다. 남자는 여태 밖에 서 있다 왔는지 건조한 겨울바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치직. 탁. 계단 위의 알전구를 건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위는 밝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야. 베스는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야가 보여주는 흐릿한 인영을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느슨하게 벽에 기대선 남자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게 느껴졌다. 그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였다.

“언제든 와도 괜찮다고 하길래.”

그제야 베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자고 있었어요.”

꽤 당당한 여자의 대답에 데베르의 눈썹이 설핏 구겨졌다.

“내가 분명히 자라고 했을 텐데.”

낮은 음성이 꼭 저를 혼내는 듯해 베스는 냉큼 조금 전의 말을 정정했다.

“자려고 했는데….”

“했는데.”

“…부르셨잖아요.”

어딘지 잔뜩 억울한 듯한 목소리에 데베르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 피식 숨을 흘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베스는 찰나에 가까운 그 웃음조차 남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정정하려고 왔습니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데베르는 본론을 뱉었다.

어떤 정정이냐는 뜻을 대신해 동그랗게 커지는 눈이 그에겐 선명히 보였다.

“별칭. 부르기 별로라.”

“흰 늑대요…?”

“그거.”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단 반응이었다.

“제가 정한 게 아니라, 사령관님이 정했는걸요.”

“전 사람한테 짐승 새끼 이름 붙이는 거 싫어합니다.”

존대하는 말투와 달리 남자의 어조는 항상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그렇게 베스 양을 부르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그 안엔 잔열처럼 잔잔하게 깔린 다정함이 있었다. 적어도 베스는 그렇다고 여겼다. 비록, 그게 제 착각일지언정.

“메르딘은 웨인에서 멀어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제 가문 멸칭 중 하납니다. 짐승 새끼처럼 도륙하고 다닌다고 해서요. 적진에서 신호를 가로채도 금방 사령부 아니면 동부 전선 초소란 걸 눈치챌 테니 서로 좋을 게 없죠.”

그리고 남자는 그건 네 착각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주저 없이 자신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뱉었다. 어쭙잖은 동정도, 감정도 품지 말라는 지극히 군대장다운 태도에 베스는 조금 더 마음의 벽을 단단히 세웠다.

“…부인.”

치지직. 두 사람의 머리맡에 놓인 전구가 뒤늦게 발광의 신호를 보냈다.

본능적으로 빛을 향하는 베스의 시선을 붙잡듯이 데베르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부인.”

베스는 점등하는 불빛 아래,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전구 불빛에 그늘진 탓에 얕게 패였다 생각한 볼우물이 더 깊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깊이.

이상해.

마음이 깜빡이는 불빛을 따라 함께 일렁거렸다.

“앞으로 베스 양 별칭은 부인으로 하겠습니다.”

“전-”

“권유를 가장한 명령입니다. 보조병이라면 이견 없이 따라야 하는.”

순간, 쨍하는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위태롭던 전구가 환한 빛을 발했다. 눈이 부신 베스가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선뜻 한 발 더 다가와 기꺼이 그늘이 되어주었다. 그러자 선득한 음성이 여과 없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클리프 부인의 사망은 적진도 분명 알고 있을 테니 제가 부인이라 부른다 한들, 누구인지 유추하긴 어려울 겁니다. 가장 쉬운 유추는 전장 병원 아니면 웨인일 텐데…. 두 곳 다 베스 양과는 상관없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러다 혹시 다른 곳이 위험해지면-”

“여길, 죽으려고 온 건가.”

딱딱한 음성은 더없이 차가웠다.

“난 지금 베스 제인스 양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사령부를 지키겠다 말하고 있는데.”

반듯하던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굳이 감정을 내비치진 않지만, 불편한 기색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제가 어떻게 굴든 상대가 감안하는 게 당연하다는, 지극히 지배자의 태도였다.

“…죄송합니다.”

데베르는 제 가슴팍 아래 숙어진 시무룩한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팔랑거리는 긴 속눈썹이 오직 그를 위한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고작 꼴사나운 감상에 빠져서는. 자신을 향해 치미는 짜증스러움에 그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비틀곤 한숨을 쉴 때였다.

“할게요, 부인.”

제기랄. 튀어나오는 욕설을 겨우 깨무느라 날렵한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바닥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게요.”

감히 달래는 듯한 말투라니.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목소리였다. 받아 마시면 한껏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걸 이 여자는 몰라야 할 텐데. 얼핏 스치는 쓸데없는 생각에 데베르는 거칠게 제 목덜미를 한번 꽉 쥐었다.

언제나 그렇듯, 같잖은 핑계까지 앞세우며 여기까지 기어 온 제 잘못이었다.

“…들어가십시오. 늦었습니다.”

머뭇거리며 재차 뒤를 돌아보는 여자를 향해 숙소 문을 턱짓했다.

그래도 영 거짓은 아니었다. 베스 제인스를 저처럼 짐승 새끼로 불리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어서.”

“이것도 권유 아닌 명령인가요…?”

자신이 얼마나 건방질 만큼 깜찍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 여자를 당장이라도 씹어 삼키고 싶었다.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이건, 나를 증오하건 어쩌건 상관없이 오로지 제 욕정만 앞세워서.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이미 절절한 실패를 경험했지 않은가.

“부탁입니다.”

패전한 전투에 거듭 뛰어드는 멍청한 군인은 존재치 않았다.

존재치 않아야만 했다.

* * *

어둑한 방 안엔 잔 안의 얼음이 서로 맞부딪치는 서늘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직 밝아오기에는 먼 창밖을 쳐다보던 데베르는 창문을 열고 협탁 위의 시가갑을 젖혔다. 찰가당거리며 넘어간 철제 통 안의 가지런한 시가를 손가락으로 훑던 그는 결국 빈손으로 위스키병을 들어 올렸다.

눈이 그쳐간다.

전투가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머금은 위스키를 부드럽게 혀끝으로 굴리며 데베르는 낮게 하늘을 메운 구름을 응시했다.

이번엔 얼마 만에 끝낼 수 있을까. 봄이 오기 전엔 끝내려나. 과연 끝낼 수는 있는 건가.

만약 종전하면 베스 제인스는 어디로….

“지겨운 새끼.”

저 자신에게 냉담한 일침을 가하며 데베르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머리께가 뜨끈거리는 게 먹지도 않은 약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벗은 셔츠를 대충 매트리스에 던져 넣고 벨트 버클을 풀려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

복도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데베르는 소리를 죽이고 닫힌 문가로 다가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허리춤에 있던 소총이 재빠르게 장전을 마치려는 찰나였다.

콰앙. 순식간이었다. 요령 없이 열린 문짝과 함께 거구의 사내가 군대장의 잇새에 더러운 헝겊을 쑤셔 넣은 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