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아….”
은연중에 거절이 나오리라 생각한 베스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릴 내고야 말았다.
데베르는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벌어진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오밀조밀한 생김새에 어울리는 붉고 작은 입술이었으나, 동그랗게 말린 입꼬리 탓에 새침하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 그보다는 꽤나 완고하면서도, 보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래, 아주 처음. 고집스럽게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던 베스 제인스가 그러했듯이.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느릿하게 감싸 물던 데베르는 퍽 죄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약을 가져올게요.”
그 시선을 눈치챈 베스는 이내 입술을 앙다물더니, 추위에 언 손끝만큼이나 귓바퀴를 새빨갛게 물들이곤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떠나려는 여자의 걸음을 붙잡은 건, 또다시 데베르였다.
밀려오는 감정에 순간적으로 미간을 구긴 그는, 늦지 않게 여상한 얼굴과 목소리로 돌아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제 아내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내 타령이라니. 되지도 않을 헛소리란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베스 제인스에겐 제법 먹힐 만한 개소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든. 혹은 잃은 척을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제 아내는 베스 양이 이러는 걸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네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들려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부인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아까처럼 맹한 얼굴을 할 줄 알았던 여자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지가 없으셔서요.”
눈을 마주쳐도 더 이상 허둥거리지 않았고, 차분한 얼굴 한편엔 약간의 서운함마저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다 저 빌어먹을 창가의 불빛이 모든 걸 너무도 선명하게 내비치기 때문이리라. 데베르는 그 사실을 짧게 저주했다.
“그래도… 부인께선 부군이 다친 손을 치료치 않아 흉터를 남기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치료하는 걸 원하지 않으실까요?”
상대가 아무 말이 없자,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 눈썹이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듯 들썩였다. 실망을 감추려는지 애써 짓는 밝은 표정은 전보단 자연스럽지 못했다.
“저라면… 그럴 것 같은데.”
여전히 답이 없는 상대를 잠시간 쳐다보던 베스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에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휙 모퉁이를 돌아가는 여자를 따라 쌓인 눈을 지르밟는 청량한 소리가 멀어졌다. 그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 들려오지 않는 순간, 데베르는 짤막한 한숨을 게워냈다. 고작 그 한순간을 참지 못해 기어이 한 발을 내디딘 자신에 대한 나직한 책망이 담긴 한숨이었다.
“젠장….”
살갗이 벗겨진 손마디를 건성으로 들여다보던 데베르는 잔뜩 피로감에 쌓인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라도 태우면 나을까 싶어 습관적으로 품 안에서 새 시가 한 개비를 꺼내 잇새에 물었지만, 몇 번 마른 입술 사이에 끼워진 시가를 까딱이는 걸로 족해야 했다.
모퉁이 너머,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여자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발견했기에.
“제가, 금방이라고 했죠?”
금방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지, 아니면 거짓을 사실로 만들려고 애를 쓴 건지 정말 금세 나타난 여자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쉴 때마다 허연 김이 풀풀 날렸다.
“가실까 걱정했어요.”
눈 위에 버려진 말짱한 시가 개비 옆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의료 상자가 놓였다.
그의 앞에 쭈그려 앉은 채, 상자 속의 약품을 찾는 얼굴이 잡아채고 싶을 만큼 충동심을 부추겼다. 흰 피부와 대비되는 짙은 감색 군복 아래 드러난 목덜미며,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귓바퀴며, 살짝 걷은 소맷단 아래 푸른 혈관이 비치는 손등까지.
머리끝까지 열이 쏠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중없이 끼쳐 드는 정염뿐만 아니라, 이 모습을 본 어느 사낸들 비슷한 감정을 품으리라는 저열한 질투까지 합세한 까닭이었다.
“사령부 지하가 바로 숙소예요. 거기가 관제실 역할, 엇.”
갑자기 팔꿈치가 잡힌 베스의 몸이 반항 한 번 못하고, 남자의 손길 아래 일으켜 세워졌다. 실상 팔을 잡은 것도 아닌, 남아도는 군복을 말아쥔 것이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런 자세로 있지 마세요. 누구 앞에서든.”
여기저기 널브러진 커다란 궤짝 하나에 베스를 앉힌 데베르는 그 앞에 허리를 숙이고 여자의 손에서 떨어진 연고며 붕대 따위를 챙겨 내밀었다. 약간은 날이 선 그 모습에 베스는 입술을 꾹 걸어 잠갔다.
“친절은 베스 양의 의무가 아닙니다.”
고압적이던 눈동자는 어느새 베스의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베스는 무뚝뚝한 말을 뱉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맹랑한 눈맞춤이 버거운 듯 목울대를 짧게 울렁이더니, 이내 시선 대신이라는 뜻처럼 다친 손을 내밀었다. 누군들 보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릴 만큼 사납게 벌어진 그의 상처는 그녀의 주의를 대번에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어쩌다 다치신 건지 여쭤봐도 돼요?”
“….”
데베르는 못 들은 척, 천연덕스럽게 다른 말을 지껄였다.
“…왜 굳이 힘든 일을 선택했습니까. 여기보단 웨인이 훨씬 나을 텐데.”
아내가 불편해할 거란 말을 의식했는지, 최대한 그의 손 끄트머리만 붙잡고 소독솜을 문지르는 게 베스다웠다. 그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제가 앉은 궤짝을 짚은 탓에, 누군가 보기엔 남자의 품에 갇힌 꼴이란 것도 모르고 상처에만 골몰한 모습 또한 딱 그녀다웠고.
“힘들 게 있나요. 누군가는 직접 전장을 이끌기도 하는데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들을 줄 알고….”
소독약이 묻어 차가운 그의 손마디에 질척한 연고가 닿았다. 그 너머에서 전해지는 미미한 온기에 데베르의 눈살이 옅게 찌푸려졌다.
“…말할 줄만 알면 되는걸요.”
마지막으로 붕대를 만지작거리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붕대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능숙하시군요.”
“보조병은 모두 의무적으로 응급의료를 배우고 오니까요. 군대장님도 배워두세요. 다쳐서 돌아가면 부인께서 속상해하실 거예요.”
애꿎은 붕대 자락만 뜯어대던 베스의 고개가 들림과 동시에,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맞춤이 버거운 쪽은 이번엔 베스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사망했습니다.”
무심하리만치 잠잠한 잿빛 눈동자가 눈앞의 여자를 샅샅이 훑어나갔다.
“흔한 일이죠. 이런 전쟁통 속이라면.”
가볍게 일축한 데베르가 숙인 상체를 일으키자, 마치 긴 입맞춤이라도 끝낸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참았던 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려는 찰나. 그들의 발치에 난 조막만 한 창 하나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새하얀 발치를 붉게 물들인 불빛을 먼저 발견한 베스가 급히 일어나 짐을 챙겨 들었다.
“돌아오란 신호예요. 여기저기 밀회가 많아서 이렇게 돌아오란 신호라도 보내는 거래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데베르의 벗겨진 손마디를 홧홧하게 만들었다.
“아, 그거 아세요?”
몇 걸음 먼저 걸어가던 여자가 불현듯 뒤를 돌아보자, 그림자 진 속눈썹이 그녀의 떨림을 따라 함께 파르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는 ‘흰 늑대’인 거? 데베르 대장님이 계신 초소도 숲은 폭격에 불타서 하나도 없는데, 별칭은 푸른 숲이잖아요. 원래 어울리지 않는 걸로 지어야 들키지 않는다고 배웠어요. 다음 교신 땐 저한테 베스 양이라고 부르시면 절대 안 돼요, 아시죠?”
그 와중에도 참을성 없는 귀소 신호는 이젠 발광하듯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진짜로 가봐야 해요. 식별 암호명도 정해야 하는데, 그건 내일로 미뤄요. 전 웬만해선 깊이 잠들지 않아서 언제든 오셔도 괜찮아요.”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왜 잠들지 못하냐고 물었습니다. 잘 자야 훌륭한 제 전담 통신병이 될 텐데.”
“그건….”
영 벽을 세울 것처럼 멀게만 굴다가도 갑자기 툭, 제 안의 어딘가를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행동에 베스는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어쭙잖은 사내들의 의도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래서 더 긴장하는 것이었다.
저런 눈을 하고 저런 목소리를 내는 남자 앞에서 과연 누가, 태연하게 굴 수 있을까.
“그냥… 그냥 잠이 잘 안 와요.”
어색한 미소를 꾹꾹 매달고 그를 바라보던 베스는 얼른 등을 돌리고 왔던 길을 다시 뛰어 돌아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데베르의 발치에선 붉은빛이 경고등처럼 연신 깜빡이고 있었다.
“그냥, 그냥이라….”
약이 묻은 척척한 손마디를 어찌할지 몰라 헤매던 손아귀는 결국 잡히는 것 없는 찬 공기만 그러쥐었다.
* * *
“어머! 이게 뭐야!”
“쉬, 쉿.”
간호사 한 명의 새된 비명에 바닥에 주저앉은 부상병이 얼른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옆구리부터 허벅다리까지의 군복을 핏물로 축축이 적신 병사는 낮은 신음을 짓씹고 있었다.
“부, 부상병이에요? 어서, 병원으로.”
전장 병원이 처음인 풋내기 간호사는 갑작스레 조우한 부상병을 보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시가전의 부상병들은 전부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허허벌판에 널브러진 이 남자는 또 무엇인지. 몰리 부인이 시킨 심부름을 위해 인적이 드문 약품 창고를 홀로 찾아가는 것만 해도 고역인데, 시체 같은 부상병까지 만나니 이미 너덜너덜해진 정신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제 어깨를 잡고.”
“괜찮습니다.”
남자는 영 못 일어날 것처럼 굴더니, 옆에 놓인 작대기를 짚고 제법 그럴듯하게 일어섰다. 절뚝거리긴 했으나, 뼈가 부러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시가전 때 건물 잔재에 깔려서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야 여기까지 기어 온 겁니다. 그보다… 사령부가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있을까요?”
“사령부요? 병원부터 가셔야죠!”
“제가 정찰병이라 급히 군대장님을 만나야 해서.”
“급히…?”
제 딴엔 야무지게 지침을 따른다고 했지만, 예상 밖의 사안에 대해선 서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몰리 부인께 여쭤보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브리틴이!”
잔뜩 격앙된 감정을 토해내는 남자의 목덜미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다 패전하면, 기껏해야 간호사인 당신이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아니요. 저는 배운 대로….”
당장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눈앞의 병사가 저를 어떻게 할 것만 같은 불분명한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흐읍!”
“급해요, 제가 너무나도 급해요. 간호사님.”
불시에 턱, 어깨를 잡는 병사의 손아귀 힘에 소스라치게 놀란 간호사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어둠 속 한편을 가리켰다.
“저, 저기. 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 돌면 시가지가 나오는데, 거기에 있는 호텔이라고만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군사 기밀이라….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말을 마친 간호사는 끼쳐 드는 두려움에 병사와의 거리를 벌리면서도, 눈에 띄게 기우뚱거리는 그의 걸음걸이를 계속해서 눈여겨봤다.
정말 병원은 안 가도 되는 건가. 사령부에 갔다가 돌아온다는 뜻인가. 브리틴 얘길 했는데, 설마 또 공습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겹쳤지만, 고민이 길어진 사이 남자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정찰병이라잖아.”
무책임한 안도를 뒤로하고 그녀가 창고를 향해 걸어갈 무렵, 남자가 뒤를 한번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병원 막사의 뒤뜰을 확인하는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더러운 넥서스 놈들.”
음산한 욕설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절뚝거리던 걸음이 조금씩 균형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점차 빠르게 시가지를 향해 뛰어가는 그는 더 이상 넥서스의 부상당한 정찰병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