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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78화 (178/206)

178화

[여기도 눈이 온다.]

나는 분명 미쳤으리라.

데베르는 수화기를 던진 채 그대로 막사를 뛰쳐나가며 그리 생각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하리라.

급히 차 시동을 걸고, 달려온 길을 구태여 거슬러 돌아가면서 그리 확신했다.

미치지 않고선. 정말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선 어떻게 저 목소리를.

“베스.”

그 여자라 생각할 수가 있을까.

“베스. 베스….”

그새 낯설어진 이름이 달게 입안을 맴돌았다.

돌아가는 길은 걸어온 길보다 멀었다.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에 창턱에 올린 한 손으로 잔뜩 상념이 깃든 제 입술을 문질렀다. 거칠게 짓뭉개지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숨은 하염없이 가열되고만 있는 제 열기를 전해줬다.

닮은 여자. 닮은 목소리.

어쩌면 같은 여자. 같은 목소리.

“미친 새끼.”

눈 내리는 소리를 착각한 건 아닐까.

그런 우스운 생각마저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곧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호텔 창가의 유행 지난 커튼 자락이 그의 이정표가 되어줬다. 조금 더 다가가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입구에 일렬로 서 있는 것도 보였다. 그들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더의 뒷모습 또한.

“데베르 대장님 오셨습니다!”

거센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거리 초입에서 차를 멈춘 데베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안에서 내렸다. 방만하게 열린 군복을 여밀 생각조차 못 한 채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어딘지 날것의 기운을 풍겨대는 중이었다.

네가. 어떻게.

머릿속에서조차 매듭지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빌어먹게도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다신 보지 못 하리라 체념한 그 눈동자가.

“데베르 대장!”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을 뻗어 얇은 손목을 잡아채 당기고. 제 품보다 한참은 작은 어깨를 끌어안고. 이 여자가 내쉬는 숨조차 가둬버릴 것처럼, 온몸으로 옥죄는.

“데베르!”

아더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어딨었던 거야….”

온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맥박 치고 있는 작은 호흡도 전해졌다. 은은하게 옷깃에 스미는 단 향마저 모두 베스 제인스였다. 심지어 저를 마주 안지 않는 가느다란 팔까지.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은 숨을 기껍게 토해내던 데베르의 호흡이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흠칫 굳었다.

“엇… 착각, 하신 거 같은데.”

품에서 여자를 밀어낸 데베르는 저를 올려다보는 순진하고도 잔인한 눈을 멍하니 마주했다. 말간 눈은 이 상황이 어색한지 살짝 찌푸려졌다,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착각… 하신 거 같아요.”

여자는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둘러봤다. 그곳엔 한껏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이 있었다. 모두 군복을 차려입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데베르, 나중에 얘기 좀 해.”

어느새 다가온 아더가 그의 귓가에 흘리듯 속삭이곤, 조금 더 단단히 목청을 높여 설명을 이어갔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소개를 잇겠습니다. 저는 넥서스군의 사령관 아더 메이너이자, 당분간 통신 부대 보조병이자 전화 교환원의 역할로 오신 여러분들을 책임질 담당관입니다. 각자 앞에 있는 병사, 혹은 장교들이 여러분의 담당 교신 상대입니다.”

입구 한 편에서 대기 중이던 군인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다른 교환원들의 앞에 섰다.

데베르는 제 앞에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여자를 우두커니 바라봤다. 조금은 큰 듯한 감색 군복을 걸친 여자는 입어 본 적 없는 군복이 어색한지 연신 소맷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교신은 중간에 통화가 가로채질 가능성 때문에 실제 이름 발설 금지, 계급 호칭 금지, 모든 지명과 이름은 별칭으로 부를 예정입니다. 그 점 주의하시고….”

아더는 슬쩍 데베르를 돌아보곤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해산하시죠.”

슬슬 흩어지기 시작한 호텔의 뜰에서 미동조차 없는 이는 데베르 한 명뿐이었다. 덩달아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가 그를 흘깃거리며 쳐다봤다.

“이름이.”

낮은 울림을 내는 목소리에 여자는 퍼뜩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스 제인스에요. 데베르 클리프 군대장님이신 건 이미 알고 있어요.”

정말 그를 오늘 처음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구는 태도에 데베르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음성은 생각보다 훨씬 태연했다.

“어디서 왔습니까.”

“메르딘입니다.”

주저 없이 답하는 목소리에 거짓은 없었다.

닮은 여자.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은 여자. 아니면….

추위에 새빨개진 여자의 손끝을 바라보던 데베르는 짐짓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 정중히 한 걸음 물러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아니에요. 워낙 제 이름이 흔하기도 하고, 제인스란 성도 웬만한 평민들은 다 가지고 있잖아요.”

어느새 텅 빈 뜰에는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주홍빛 하늘과 함께 늘어난 해그림자가 두 사람의 키를 더 키웠다.

“그, 저희 조금 전에 첫 교신도 했는데 들으셨죠? 푸른 숲. 초소 별칭이잖아요.”

몇 번 우물쭈물하던 여자는 기어이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어요.”

방긋거리는 게 습관인 것처럼 호선을 그리는 눈매가 부지런히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 믿기진 않을지언정 제가 아는 베스 제인스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그 여자가 제대로 저를 벌하려 그러는 것일지도.

데베르는 벌써 미친 지 오래인 제 판단을 어떻게든 갈무리하려 애썼다. 한 줌의 이성이라도 되찾고자,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욱여넣는 가슴 밑 구석이 메슥거렸다.

“우리 잘해봐요.”

그러나 맹랑하게 내민 흰 손을 일별한 순간. 무언가 발견한 데베르는 거세게 이를 깨물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냉랭해진 그의 태도에 여자는 당황한 듯 큰 눈을 깜빡였다.

“…군인은 민간인 여성과 함부로 접촉할 수 없습니다.”

“저는-”

데베르는 그대로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한없이 조여오는 네크라인을 거친 손길로 헤집어도 뒤엉킨 마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 * *

“나도 어이가 없어 돌 지경이야.”

반쯤 빈 위스키병을 흔들던 아더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어젯밤 그 수송 차량에 통신 부대가 타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여자. 아, 물론 베스 제인스이긴 하지만. 아니. 그 베스 제인스가 아닌가?”

“오게 된 경위는.”

“알잖아. 원래 전화 교환원들은 전시 중엔 자주 통신 보조병으로 차출된다는 거. 이번엔 딕시 콜먼 양의 전화국 직원들을 부른 거지. 마침 통신병 절반이 폭격으로 사망했기도 하고.”

“딕시 콜먼 양은 뭐라고 했길래.”

“연락이 안 돼. 웨인이라고 멀쩡하겠어. 엉망이겠지.”

잠시 말을 멈춘 아더는 가만히 혀를 굴리다 문득 스친 생각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혹시 다친 거 아니야? 지뢰에 탄 옷의 주인이 베스 양이었던 걸 보면, 병원 폭격 당시 웨인에 있긴 했던 거 같은데.”

데베르는 별다른 대답 없이 술잔만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대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얼굴은 아까 전의 혈기는 온데간데없이 무감하기만 했다.

“너-”

“상관없어.”

술잔 옆에 놓인 약병을 연 데베르는 목구멍 깊숙이 흰 알약 하나를 집어넣었다. 입 안에 독한 위스키 향만이 남을 때까지 연거푸 술을 벌컥거리는 목울대가 쉴 새 없이 울렁거렸다. 기어코 한결 풀린 눈동자를 한 데베르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파에 길게 기대 눈을 감았다.

“…나에게 그 여자는 이미 죽었어.”

손안의 흉터.

그건 분명 한때 클리프 부인이었던 그 여자의 것이었다. 어떻게든 클리프를 벗어나고자,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매달고 도망친 그 여리고, 독한 여자의 것.

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데베르 클리프를 모른다는 듯이 군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한 번만….’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베스가 없는 약품 창고 앞에서 벌벌 떨며 빌었던 마지막 소원이 이리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욕심껏 빌어볼걸. 스치는 생각에 피식 웃은 데베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찬 바람을 쐐야겠어.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밀려와.”

웨인보다 일찍이 겨울이 찾아온 동부 전선은 그 이름만큼이나 살벌한 바람이 불어 대고 있었다. 아직 시가는 입에 물지도 않았는데도 숨을 내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시가 연기처럼 날렸다.

인적이 드문 호텔의 뒤편으로 걸어간 데베르는 벗겨진 칠 아래, 불그죽죽하게 드러난 외벽에 등을 기댔다. 건조한 시가를 앞니로 깨물자, 특유의 탁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누구야.”

“어….”

라이터에 불을 붙이느라 고개를 숙인 데베르는 무심히 시가를 빨아들이며 눈동자만 스르르 옆으로 굴렸다.

“누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후우. 한숨 같은 연기를 길게 뿜어낸 데베르는 모퉁이 끝에 서 있는 베스를 조용히 지켜봤다.

종전까지 불이 꺼질 리 없는 사령부의 모든 방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창문마다 노란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탓에 마치 수십 개의 달 아래에 선 듯한 베스의 모습은 꼭 환영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럼 전….”

“거기 있어요.”

얼른 돌아가려 몸을 비트는 베스를 붙잡은 건, 꽤나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있고 싶으면.”

베스는 잠시 제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맞은편 담벼락에 기대섰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되, 비쳐 드는 불빛에 서로의 얼굴은 분명히 보일 정도였다.

데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시가 연기 싫어하지 않나.”

“…익숙해요.”

“시가 연길 익숙하게 할 정도의 남자면 좋은 남자는 아닐 텐데.”

그는 싱겁게 웃으며 여자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튼 채 시가 연기를 뱉었다. 이내 내려간 남자의 입꼬리 탓에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알 수 없어 베스는 공연히 구두 뒤축만 툭툭 찍어댔다.

처음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빼곤, 데베르는 단 한 번도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비단 시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가는 곧 주인의 흥미를 잃은 듯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저기, 군대장님.”

군대장님. 베스 제인스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생경한 호칭에 데베르는 외벽 그늘 더 깊숙이 뒤통수를 기댔다.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그는 또다시 제 안의 무언가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해야만 했다.

“제가 손, 치료해 드릴까요?”

결국 도로 눈을 마주친 여자는 경계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보란 듯이 제 손마디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 많이 다치셨던데.”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군인은 민간인-”

“군인 대 군인으로요.”

다급히 말허리를 자른 여자는 지레 겁을 먹어 주춤거리다가, 곧장 또박또박 제 할 말을 전했다. 마치, 감히 너 따윈 거부할 수 없을 거라는 듯이.

“담당 통신병으로서 상관을 보필하는 거예요. 그래도 안 되나요?”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제가 그러면… 많이 불편하실까요?”

데베르는 외벽의 어둠을 틈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탐욕스럽게도 먹어 치웠다. 그래도 배가 부르진 않았다.

고작 시선 하나에 배가 부르기엔 저는 너무도 욕심 많은 사내였기에.

“불편하지 않습니다.”

문득 한 걸음을 내디딘 그의 뒤로 따뜻한 빛이 내리비쳤다.

“그럴 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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