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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77화 (177/206)

177화

“베스 제인스 양이 살아 있는 거 같아.”

짧은 침묵이 협탁 위로 내려앉았다.

한껏 굳은 표정의 아더는 데베르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얘기가 지금 당장은 무용할지도 모른다. 혹여, 그럴지언정 앞으로의 모든 수를 계산하면…. 그러나 살짝 고개를 떨구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던 데베르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순간. 아더는 떠올리던 모든 사념을 지운 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제 머리론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데베르.”

지금 웃다니.

“하하.”

데베르 클리프는 웃고 있었다.

“아. 내가 실례했나 보군.”

가볍게 제 입꼬리를 한 손으로 매만지는 눈길이 느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뒤엎고, 아더의 멱살을 잡아챌 것 같던 그 짐승 같은 눈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막사를 들어섰을 때보다 훨씬 여유로운 얼굴로 위스키병을 기울였다. 알코올을 넘기며 약간은 느릿하다 싶은 정도로 고개를 젖히자, 퍽 희던 낯빛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기를 충전키 위한 말이었다면 판단을 잘못한 것 같은데.”

딱, 그 그림자만큼만. 어쩔 수 없이 제게 드리워지는 이 작은 어둠 정도만 허용키로 작정한 사람처럼 데베르는 말끔한 얼굴로 아더를 마주 봤다.

“심지어 모호한 말로.”

“확신을 두고 말할 순 없는 부분이란 걸 알잖아.”

“맞아. 확신을 가질 순 없지.”

데베르는 빈 잔의 입구를 둥글게 쓸었다. 까칠한 손끝에 닿는 매끈한 유리컵의 냉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또렷했다. 그는 누구보다 생생히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베스 제인스의 죽음은 믿음이나 소신 따위가 아니야. 이미 벌어진 사건이지.”

여유로운 데베르의 말투에 더 속이 타는 건 아더 쪽이었다.

“데베르. 내가 지금 네 사기나 충전하려고 이러는 걸로 보여?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서 그래. 오늘 밤, 지나가는 수송 차량에 베스 양이 끼어 있는 걸 봤어. 그래, 백번 양보해 그 여자가 아니라 치자. 하지만 그 여자와 똑 닮은 얼굴을 한 여자가 넥서스에 흔하다고? 심지어 이 후미진 동부 최전방에 오기까지 하면서? 지금 이곳은 민간인에겐 출입조차 금지야.”

아더는 거칠게 제 뒷머리를 털어댔다.

“그때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확인해야 했는데. 아둔한 새끼.”

자신을 향한 욕설을 거침없이 짓씹으며 아더는 뇌리에 남은 한 장면을 곱씹었다. 짐짝이 아닌, 아마도 사람들이었을 그 무리 속에 얌전히 앉아있던 하얀 얼굴.

“저 건너편에 브리틴이 있다는 걸 알잖아.”

데베르는 입술을 걸어 잠근 사람처럼 무감하게 아더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에 조금 더 초조해진 아더는 망설이듯 몇 번 미간을 긁적이다, 결국 군대장을 보필하는 사령관으로서 해야만 할 최악의 말을 던졌다.

“…첩자였던 여자야. 자의든, 타의든. 지금으로선 브리틴에 넘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여기이기도 하고. 우린 유품은 받았을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시체는… 확인치 못했어.”

“계속해.”

고상하게 계속하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더 지껄여보란 뜻인 걸 눈치 빠른 아더가 모를 리 없었다.

“만에 하나, 저쪽에서 베스 제인스 양의 구명을 핑계로 널 협박할까 봐 하는 얘기야. ‘진짜’ 베스 제인스가 아닌데도, 널 속이면서.”

“내가 망자의 귀환에 넥서스를 저버리고 전선을 뛰어넘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나 보군.”

“데베르.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지가 않아.”

아더는 허물어진 표정을 들킬세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여린 입안 살을 되는대로 씹어대느라 본래도 갸름한 볼이 더 홀쭉하게 들어갔지만, 사나운 입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이성적인 선택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라 판단되는 순간이 분명 와.”

이마를 괸 손으로 아마도 금이 쳐졌을 미간을 문질렀다. 질끈 눈을 감자, 얇은 속눈썹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아더는 제 커다란 손으로 완전히 눈가를 덮어버렸다.

“네게 베스 제인스 양은 그저 보통의 사람이 아니잖아….”

“아더 메이너에게 라프넬이 그러하듯이?”

“뭐…?”

데베르는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꼴꼴거리며 떨어지는 샛노란 알코올의 그림자가 희미한 램프 아래에서 일렁였다.

“아무리 봐도 난 지금 네가 라프넬 공주 얘길 하는 것 같은데. 공주의 성정에 야만적이라 치를 떠는 코바흐로 가진 않았을 거고. 아마 그 붉은 머릴 따라서 브리틴으로 간 건가.”

제게 내민 위스키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더는 곧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같은 놈.”

“네가 귀족회에게 황정을 맡기고 사령관으로 올 때부터 짐작한 일이야. 제국의 황제가 굳이, 고작 공작 따위를 상관으로 모실 이유는 없잖아. 그 모든 관계를 전복할 만큼 대단한 이유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마도 네겐-”

데베르가 턱을 까딱였다.

“라프넬이겠지.”

“라프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짓 따윈 없을 거야.”

“마찬가지야.”

길게 날숨을 뱉어낸 데베르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떴다. 그 시선의 끝엔,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검고 아득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뭐에 또 흔들리고 있는 거지, 데베르 클리프?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했을 텐데.’

역시. 당신 목소리는 늙지도 않는구나.

“날 쫓아다니는 망자는 하나로 족하거든.”

곧이어 들려오는 채찍 소리에 데베르는 까무룩 잠이 든 듯 눈을 감아버렸다.

* * *

퍼붓는 눈발을 헤치며 핸들을 돌리는 운전병의 어깨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필 뒷자리에 앉은 두 명의 상관이 하나는 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데베르 공작이라니. 운전병은 내쉬지도 못할 한숨을 삼켜내며 전달 사항만 줄줄 읊어댔다.

“대위님께서 어젯밤에 통신부대도 모두 도착했고, 임시 사령부도 어느 정도 채비를 갖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통신부대 일부는 오는 길에 공습당했다던데.”

아더의 물음에 병사가 냉큼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보충 인력을 데려오느라 조금 늦어진 거였습니다. 전화국에서 필요 인력을 보충했다고 들었습니다.”

“데베르, 함께 내릴 건가?”

먼저 내린 아더가 차 문을 연 채 묻자, 흘깃 바깥을 쳐다본 데베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령부 건물이 된 낡은 호텔이었다. 아마도 황금빛을 흉내 냈을 누런 페인트칠이 곳곳에 벗겨진 호텔은 평범하기만 했지만, 그 앞을 즐비하게 메운 군용차들이 이곳은 더 이상 평범한 여관 따위가 아니라 광고를 해대는 중이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 실은 이번 보충 인력이-”

“내려.”

“네? 엇.”

데베르의 명령에 헐레벌떡 운전석에서 내린 병사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꿰차는 군대장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더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가, 보닛을 두드렸다.

“데베르. 네 전담 교환병은 확인하고 가는 게 어때.”

“글쎄.”

데베르는 호텔 뒤편으로 바쁘게 오가는 군복들을 의미 없이 훑어보며 답했다. 이에 아더는 보닛 위에 쌓인 눈을 만지작대다 말고, 제법 진지하게 응수했다.

“데베르 군대장. 이번 전은 지난번 코바흐전과는 양상이 달라. 국지적 전쟁이 아니라서 통신이 제때 안되면 낭패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초소부터 가봐야겠네. 내겐 교환관의 얼굴보단, 그 목소리가 중요할 테니까.”

“고집하고는.”

“이 폭설이 넥서스 편이 되게 하려면 애 좀 먹어야지.”

기어를 당긴 데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핸들을 돌렸다.

한 무리의 군복 무리가 사령부 입구를 나왔지만, 이미 차는 떠난 뒤였다.

시가지의 끄트머리로 차를 몰수록 음산한 기운은 더 진해지기만 했다.

지금은 저 새하얀 지평선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곧 눈이 그치고 조금씩 서로를 향해 진군을 시작하다 보면 결국 시커먼 총구가 보일 것이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도미노처럼 경례를 올리기 시작한 부대원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데베르는 주위를 둘러봤다. 훈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냉담한 이곳이 바로 그의 전투지가 될 곳이었다.

날리는 눈발에 젖은 잿빛 눈동자는 설광을 반사해 평소보다 색채가 옅었다. 클리프가의 늑대 새끼. 그를 훔쳐보던 누군들 머릿속에 떠올릴 데베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저곳이 막사인가.”

갑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에 화들짝 놀란 부사관은 막사로 걸어가며 얼른 상황 보고를 이어갔다.

“본래는 밀매상들이 사용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허름한 가건물 안엔 쓸만한 것이라곤 녹이 슨 철제 침대 하나와 테이블 하나뿐이었다. 곧장 테이블로 걸어간 데베르는 전화기부터 확인했다.

“사령부와 연결은.”

“아직입니다.”

“나가 봐.”

수화기를 들자 지직거리는 소음이 전화선을 넘어왔다. 보고 받기론 신호선을 곧장 사령부로 연결했다 들었는데, 상황은 영 신통찮았다.

“통신. 여기는 푸른 숲.”

여전히 들려오는 거라곤 불규칙하게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연결음뿐이었다.

데베르는 수화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

“통신.”

나무판자를 엎어놓은 것에 불과한 테이블을 툭, 툭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그는 재차 같은 말을 내뱉었다. 문득 짙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여기는 푸른 숲. 들리면 응답하라.”

제기랄. 뻐근한 목덜미를 거세게 주무르며 살짝 고개를 비틀자, 얼룩진 창문 너머로 누구도 함부로 밟지 못하는 설원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핏물로 붉게 적셔질 곳일 뿐인데 저리도 새하얗다니.

잠시간 그 이상스런 평화를 지켜보던 데베르는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여기는 눈이 온다….”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작게 실소했다.

“들리면-”

그때. 지직거리는 소리가 돌연 크게 울리더니 뚝 끊겼다.

[…수신 양호.]

그때부터였다.

수화기를 넘어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멈춘 것은.

[…거기도 눈이 오는가.]

“….”

감히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아주 약간의 동요만으로도 깨질 것 같은 거짓말 같은 찰나가 이어졌다.

[여기도 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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