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사령관님.”
“아.”
저도 모르게 넋을 잃은 채 황량한 평원 너머를 바라보던 아더는 부하병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잘 보이긴 하네.”
아더가 서 있는 곳은 불과 어제, 데베르가 제 목숨값과 맞바꿀 뻔한 동부 전선의 종탑이었다.
꼭 모든 걸 순응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 가슴팍에 박히는 칼날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데베르의 지독한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얼빠진 새끼. 갑자기 감상에 빠져서는.”
급박한 상황이니만큼 모진 소리를 애써 떠올려봐도, 아더의 표정엔 어쩔 수 없이 오랜 친우를 향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아직 데베르와 저 사이엔 해결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잘 알았다. 물론 그 무심한 놈은 철저히 이해타산을 따지느라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용케 불길을 피해 장작더미 옆에 쓰러진 브로치를 갖다 건네준 건 나름의 속죄의식이었다.
“그 브로치 덕에 목숨 건진 것 보면, 베스 양이 나를 너무 미워하진 않은 건가 싶기도 하고.”
이기적일지언정 그런 자위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제가 이런데, 데베르는 어떠할까.
다른 이도 아닌, 바로 ‘그’ 베스 제인스의 죽음인데.
“‘평원 너머엔 브리틴 1군이 있다’라고 게일 웰링턴 공군 대령님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병사가 후다닥 아더의 곁에 뛰어와 보고를 올렸다. 확실히 쏟아붓는 눈발 때문에 망원경으로만 시야를 확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얼마 전까진 아군이던 브리틴이 순식간에 적군이라….”
“네?”
“아냐. 이제 막 부대에 합류한 신출내기 같은데 내려가서 진지 구축을 돕도록.”
그들이 탈환한 동부 전선의 시가지는, 시가지란 말이 민망할 만큼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으레 외국 방문이 잦은 넥서스의 상인들이 잠시 하룻밤을 묵고 가기 위해 만들어진 정거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덕에 예상치 못한 쾌재를 부르게 된 건 다름 아닌 전시 중인 군대였다. 멀쩡한 건물이 몇 없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임시 막사로는 훌륭했다.
아더는 종탑의 턱을 짚은 채, 병사들이 부서진 건물을 대충 보수하고 보급 차량이 실어 온 총탄이며 식량 따위를 적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꽤 오랜 시간을 그 위에 서 있던 아더는 야간 보초병이 교대를 위해 경례를 올릴 때에서야 계단을 내려갔다.
“하….”
헐거워진 허리춤의 소총을 단단히 총집에 집어넣다 말고, 문득 제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아마도 어제 육탄전의 결과인 게 분명했다.
그토록 많은 전투를 겪으면서도 상처 하나 제대로 나지 않는 몸이라 자조하곤 했는데.
팔자 좋은 황자란 멸칭은 이젠 옛말이라는 듯, 슬쩍 걷어 올린 군복 아래엔 이런저런 꼴로 생긴 상흔이 즐비했다.
“기뻐해야 하는 건가.”
피식 웃은 아더는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을 한 번 흔들곤, 고개를 젖혀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감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넥서스군의 군복 같기도, 한편으론 라프넬의 눈동자 같기도 했다. 욕망으로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이 아닌, 잔뜩 상처받았을 때의 가라앉은 눈 말이다.
넌 그런 눈을 하고 칼론을 따라갔을까.
문득 스친 생각에 호선을 그리던 아더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마냥 기뻐할 수는 없겠군.”
자신은 더 이상 팔자 좋은 황자가 아닌, 넥서스의 젊은 황제이니.
언젠가 다가올 선택의 무게가 벌써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러 와, 아더는 공연한 숨을 터뜨렸다.
부디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길 바랄 뿐이지. 대단한 진심을 지나가는 바람에 가벼이 흘려내는 건 저 나름의 삶을 견디는 습관이었다.
아더는 막사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짧아진 겨울 해 탓에 벌써 주위가 어둑한데도 불구하고, 시가지 입구는 줄기차게 들어서는 군용차량의 헤드라이트로 불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웅거리며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는 수송 차량은 때론 부족한 식량을, 때론 사망한 병사를 보충하기 위한 후발 합류병들을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사령관님.”
사령관을 알아본 운전병 하나가 잠시 차를 멈춰 경례하자, 아더도 대충 고개를 끄덕여 얼른 지나가라, 턱짓을 했다. 시가라도 한 대 태울까 하는 생각에 외벽에 기대서려던 그때. 아더의 시선이 눈앞을 스치는 짐칸 어느 한구석에서 멈추었다.
“잠시-”
하지만 잽싼 운전병은 이미 시원하게 액셀을 밟아버린 후였다. 웨인처럼 거리의 가로등 따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선은 헤드라이트가 사라지자마자, 금세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자연히 멀어진 짐칸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것이 짐짝인지, 사람인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더는 매캐한 매연만이 남은 거리에 망연히 서서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정제되지 못한 혼란스러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 * *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한 몰리 부인과 데베르 사이엔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부인은 하염없이 비품 목록이 든 서류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 앞에 선 데베르는 낡은 원목 테이블 어딘가에 난 흠집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데베르였다.
“열쇠를 받으러 왔습니다.”
열쇠란 말에 몰리 부인은 겨우 서류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황망하게 들어 올렸다.
“열쇠, 말인가요….”
데베르 클리프가 전쟁이 터질 때마다 몰리 부인에게 따로 약품 창고의 열쇠를 받아 가는 건 전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부인은 도저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스럽게 굴 수가 없었다. 고작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 게 전부일 뿐인데, 너무도 많은 게 달라졌지 않은가.
전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베스란 이름은 그들 사이의 금기어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고, 한때는 웨인 가십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 아리따운 흑발의 아가씨는 이젠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만 했다.
전부가 이 모든 건 대의를 위한 것이라 떠들어댔다. 데베르 군대장을 앞세워 승전하기 위해선. 그리하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선.
그나마 다행인 건 최전방에 나와 있는 병사 중엔 베스 클리프 부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쓸데없는 뒷얘기가 떠돌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아시다시피 이번 전쟁은 사령부가 있는 막사와 병원 사이에 거리가 꽤 멉니다. 제가 매번 부인을 뵐 수는 없단 걸 아시지 않습니까.”
데베르의 말엔 자연스럽게 자신이 매번 다칠 것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다 핑계일 뿐, 행여 병원이 가깝다 한들 데베르 클리프는 피 칠갑을 하고서도 병원을 찾지 않으리란 것을 몰리 부인은 잘 알았다.
저럴 때 보면 참 베스와 닮았다 생각했는데. 그 아이도 고집 하나는 기가 막혔으니까.
갑작스럽게 덮쳐온 베스에 대한 생각에 부인은 화들짝 놀라 주먹을 꽉 쥐었다. 안된다. 저마저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서는.
“그렇죠, 데베르 대장. 내가 그 사실을 잠시 잊었네요.”
이내 거칠한 테이블 위엔 남루한 열쇠 하나가 올려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열쇠를 향해 뻗는 데베르의 손마디는 성한 곳 하나 없이 벌겋게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아니…!”
기함한 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분명 어젯밤 가슴의 자상을 치료할 때만 해도 없던 상처였는데.
“데베르, 세상에. 너 손이-”
“부인.”
미처 부인의 손이 닿기 전에 데베르는 제 손을 등 뒤로 물렸다.
“그냥, 약만 주십시오. 열쇠는 받아 가지 않겠습니다.”
데베르는 또다시 밀려오는 거북스러움에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미미하게 위로 치켜 올라가는 한쪽 눈썹 밑의 눈동자가 놓여 있는 열쇠를 담담히 바라봤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눈꼴사납게 품 안에 들고 다니는 건 불에 녹다 만 브로치 하나로 족했다. 저 빌어먹을 열쇠까지 품고 다니다간 제가 먼저 미쳐버릴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맹랑하게 베스 제인스가 제게서 열쇠를 뺏어가던 그 겨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주십시오.”
예우를 갖춘 부드러운 명령이었다.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부인은 막사 한 편에 놓인 작은 캐비닛에서 붕대며, 소독약, 연고, 마지막으로 데베르의 오랜 멸칭을 만들어 낸 흰 알약 통을 마지못해 꺼내 들었다.
“꼭 치료해요. 덧나지 않게.”
덧나지 않는 상처가 제게 있긴 했던가. 데베르는 떠오르는 비소를 능숙하게 참아내며 부인이 적당히 안심할 만큼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 *
“기다리던 군대장님이 이제야 오시는군.”
데베르는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놓인 궤짝에 손에 들린 약품들을 건성으로 처박았다. 그가 환각을 불러올 약보다 먼저 택한 건 마개가 열린 위스키였다.
“상처도 덜 아문 놈이 그리 퍼마셔도 되나 몰라.”
꼴깍거리며 움직이는 데베르의 목울대를 지켜보던 아더가 툭 물었다. 데베르는 대답 대신 물기 어린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협탁 위의 보고 서류들을 훑어나갔다.
“내일이면 사령부도 얼추 정비될 테니 가서 점검해. 회선 확실히 잡혔나 확인하고. 폭설만 그치면 바로 근접전이야. 게일이 올린 보고는 들었겠지.”
딱딱하게 내뱉는 말들은 지독히도 군대장다웠다.
“원색적인 호텔 방 안에 차려진 잘난 넥서스 사령부 말이지.”
아더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아더를 가볍게 일별한 데베르는 별다른 말 없이 펜대를 손에 쥐었다. 잠자코 기나긴 서류 뭉치의 하단에 클리프가의 서명을 박아 넣던 그도 결국엔 옅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 짓도 마지막이라 다짐한 순간도 있었다니. 제 운명을 모르고 한 같잖은 다짐이 오늘에서야 그를 우습게 만들었다.
“데베르, 할 말이 있어.”
데베르는 말해 보라는 듯 오만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와중에도 막사 중앙에 놓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는 여전히 클리프 군대장이기만 했다.
“군대장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데베르 공작한테 하는 말이야. 어쩌면 친우 데베르 클리프일 수도 있고.”
“아직 먹통이군.”
시가지 호텔에 마련된 사령부와 몇 번인가 통신 신호를 잡아보려던 데베르는 건성으로 수화기를 두드렸다.
“통신 부대는 도착하지 않은 건가.”
“데베르.”
“말해. 듣고 있어.”
“…닮은 여자를 봤어.”
돌연 끼쳐 든 정적을 깬 건, 무성의하게 전화기 위로 엎어진 수화기였다.
데베르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열린 서류철을 덮어 협탁 가로 치웠다. 그는 마치 어딘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굴어대는 중이었다.
“내일까진 회선이 복구돼야 할 텐데. 브리틴의 포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데베르, 농담하는 거 아니야.”
“이딴 얘기가 농담이 아니면 대체 뭐지.”
형형하게 밝혀진 데베르의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이 아더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던져버릴 듯이 협탁 끄트머리를 움켜쥔 손마디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완전히… 똑같아. 내가 보기엔 그래. 아무래도….”
기어이 이어진 대답이 가혹한 대화에 방점을 찍었다.
“베스 제인스 양이 살아 있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