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여기가 어디지.
데베르는 울렁이는 시야를 바로 잡으려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천장까지 켜켜이 쌓아 올린 고서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 묘하게 낯익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하지만 다시금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하기도 전에 매서운 채찍이 등허리를 후려쳤다.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엎어진 데베르의 입술이 부드러운 바닥에 거세게 부딪혔다. 검붉은 색의 카펫은 피 몇 방울쯤은 떨어져도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했을 텐데.’
내 목소리인가.
꿈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굵직한 채찍이 또다시 작은 몸을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작은 몸…? 데베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제 손을 바라봤다. 뼈마디가 줄어들고, 손바닥에 빼곡하던 흉터와 굳은살이 사라진 말랑한 손. 그제야 확연히 낮아진 시선의 위치 또한 실감이 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시선의 끝에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한 군화코가 보였다.
‘난 쓸모없는 새끼는 거두지 않아.’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빌어먹게도 지겨운 그 말.
데베르는 살기 어리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제 위의 시커먼 남자를 노려봤다. 인영은 흐릿했다. 저와 똑 닮은 짙은 잿빛 머리카락과 벌어진 어깨나 키 따위가 비슷할 뿐. 마치 데베르 자신이라 해도 믿음직했다.
‘넌 유모가 첩자란 걸 알면서도 곧장 내게 말하지 않았어. 네 망설임의 대가로-’
그대로 벌떡 일어선 데베르는 미친 듯이 서재를 뛰쳐나와 적막한 복도를 내달렸다. 당장이라도 아버지가 짐승처럼 제 목덜미를 잡아채 끌고 갈 것만 같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선명했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꿈인가. 하지만 달려댈 때마다 귓가에 스치는 싸늘한 바람은 너무도 생생한데.
처음으로 클리프 성을 벗어나 아무도 없는 숲길을 달려갔다. 그러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정작 클리프 성을 완벽히 벗어난 순간부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작은 손이 그의 손끝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늑대가 잡으러 올지도 몰라. 내가 숨겨줄게.’
소녀라 하기에도 어린 꼬마 하나가 조약돌 같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넌 누구야.
까만 눈동자가 카시우스의 구두코처럼 반질거리고 있었다. 그 눈길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몸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듯이 아이를 따라 움직였다.
‘내 이름은 아가야.’
아가. 아가.
너무도 이상한데,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이름.
그때부터 몇 개의 장면이 조각난 파편처럼 산발적으로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데베르? 이름이 데베르야?’
호기심이 찰랑이는 새카만 눈동자.
‘아니야! 데베르, 내가 잘못했어! 안 건들게! 안 만질게!’
울상이 되어 매달리는 작은 얼굴.
‘전쟁이 뭔데?’
불안을 참아내느라 볼록하게 튀어나온 하얀 볼.
‘안 가면 안 돼? 싸우지 마. 다치지 마!’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던 어린 목소리.
‘나 잊으면 안 돼!’
잊지 말라는,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다정한 말.
갑자기 뼈가 뒤틀리며 자라나는 느낌과 함께 한없이 속이 메스꺼워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발악하는 사이, 희미한 향이 풍겨왔다. 분명 맡아본 향인데. 하지만 더 생각을 잇기가 어렵게 누군가가 차가운 헝겊으로 눈가를 문질러댔다. 마치 눈물이라도 닦아주려는 것처럼.
누구야.
입술을 달싹여도 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찰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심연 같은 방 안에서 비슷한 색을 띤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내게 손을 흔들어. 날 알아?
묻고 싶은 말을 채 묻기도 전에,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에 덩그러니 놓인 제가 보였다.
조금 전 눈가에 닿았던 헝겊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냉기가 손안에 느껴졌다. 매끈하고, 차가운 전투용 장총.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자라난 손아귀엔 어느덧 총칼을 오래 쥔 자 특유의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철컥. 장전하느라 총구가 아래로 향하자 발치에 떨어진 약통이 보였다. 저건 필시 적군의 군복 안에서 나왔을 테지.
휘청이는 몸이 총구와 함께 정면을 바라보자 한겨울의 늑대 같기도, 혹은 제 아버지 같기도 한 자가 보였다. 환영일까, 아닐까. 짧은 고민을 하는 사이, 기어이 지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쓸모없는 새끼.’
아, 어쩌나. 당신은 쓸모없는 새끼에게 죽을 운명이군.
방아쇠를 당기며 데베르는 영악스럽게 속삭였다. 제발 환영이 아니길. 그러나 스멀거리는 핏물이 기어와 그의 발을 적시는 순간, 어쩔 도리 없는 죽음의 무게가 그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을 어떻게든 목구멍 밖으로 꺼내고만 싶었다.
답답해. 헐떡이는 몸을 어떻게든 비틀어대고 있는데, 미온한 손이 그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윙윙대는 채찍 소리 사이로 이상스럽도록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데베르, 나중에 만나면 날 꼭 알아봐 줘. 아마 너만큼 키가 커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지?’
꼭 잊어버린 기억이 그제야 제 주인을 찾은 듯이.
“베스…!”
베드에 누워있던 데베르의 상체가 발작하듯 위로 솟구쳤다.
“데베르, 정신이 들어?!”
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아찔하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토악질을 겨우 눌러 내리며, 데베르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어지러운 시야가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랬어!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뻔했냐고!”
어둑한 막사 안엔 칠이 벗겨진 베드가 즐비했다. 빼곡히 누워서 신음하는 이들은 모두 넥서스 군복을 입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베드를 벗어나려는 데베르의 어깨를 아더가 사납게 잡아당겼다.
“…놔.”
억눌린 목소리에 실린 분노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일렁였다.
“데베르. 깨어났구나.”
본디 푸른색이었을 몰리 부인의 간호복이 핏물로 불그죽죽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데베르를 바라보던 부인은 곧 입술을 말아 넣곤, 주머니에서 핏자국이 덕지덕지 붙은 브로치 반쪽을 꺼냈다.
“다행히도 군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이 브로치 덕에 칼이 빗나갔단다. 어린 병사라 힘이 세지 않았어. 곧장 아더가 방어한 덕택도 있지만.”
정신을 잃은 건 가스 중독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몰리 부인은 행여 눈물이라도 보일세라 급히 자리를 떴다. 부인이 떠난 자리엔 악착스럽게도 주인을 찾아온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몇 번쯤 현실을 가늠하느라 제 눈가를 손으로 덮고 있던 데베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몇 개의 램프가 흘러나오는 빛의 전부인 막사를 둘러봤다. 제 가슴팍부터 어깨까지 두껍게 동여맨 붕대를 비집고 핏물이 새 나온 것도 보였다.
“데베-”
“찾아야 해.”
열기에 휩싸인 눈동자가 기민하게 막사 곳곳을 훑어나갔다. 아더도 이번엔 차마 말리지 못하고 거칠게 마른세수만 해댔다.
여기에 분명, 베스 제인스가 있다.
데베르는 확신했다. 쳐져 있는 흰 커튼을 마구잡이로 열어젖히고, 모포를 뒤집어쓴 병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몇몇 지나가는 간호사의 앞을 가로막는 그는 고요히 이성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어딨어….”
판판하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 들었다. 찌푸린 눈매 끝에 매달린 상처가 슬슬 벌어지며 살벌한 안광을 더 번뜩이게 했다.
온갖 것들이 고통을 뱉어내며 제 존재를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왜. 이젠 말도 할 수 있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데베르는 욱신거리는 가슴팍의 통증은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 여자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없다는 거야.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넌, 이런 상처 받고 약한 것들을 놓치지 못하잖아. 그랬으니 꼴사나운 몰골로 번트를 방황하는 늑대 새끼마저 다정하게 바라봐줬겠지. 말을 걸어주고, 이름을 알려주고, 들어 본 적 없는 온기를 나눠주고. 이곳엔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득한데.
아집은 곧 집착이 되어 그의 걸음을 옭아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으윽, 헉…….”
데베르는 본능적으로 으레 전장 병원이 세워질 때 근처에 들어서는 약품 창고를 찾아갔다.
쾅. 쾅.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조차 없는 잔잔한 밤에, 낡은 판자문의 자물쇠를 거세게 내리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요령 없이 내리치는 주먹 마디가 새빨갛게 까지기 시작했지만, 데베르는 잇새를 꽉 깨물고 집요하게 자물쇠만 노려봤다.
이 안엔 있겠지.
쾅. 쾅.
더 상처 날 것도 없는 손에서 기어코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벌겋게 살가죽이 벗겨진 손아귀가 미련한 숨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아니야….”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머리통을 창고 문에 갖다 박듯이 맡겼다. 아무런 온기도, 그 어떤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죽은 널빤지일 뿐. 베스는 여기에 없는데도.
“…차라리 멀리 도망간 거라고 말해. 죽을 때까지 찾지 않을 테니. 제발, 그냥 사라진 거라고 말해.”
쇳소리 같은 불분명한 중얼거림이 입 안을 맴돌았다.
함께 맞지 못할 봄이 오면 번트의 오두막엔 뒤늦게 도착한 편지가 만개할 것이다.
넌 왜 날 싫어하는지. 그럼에도 날 잊지 말길 바라는 이기적인 욕심을 알긴 하는지. 단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 없는 첫사랑이란 말의 정의가 내겐 네 이름이란 것은 언제쯤 알게 될지. 만약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그날이 오더라도, 널 볼 때마다 우습게도 영원이란 것을 떠올린 내 모습만큼은 모르길.
이렇듯 전하지 못한 말들이 한 줄씩 피어올라 작은 화단을 가득 채울 때쯤엔 이미 편지의 주인은 사라졌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현듯 제가 또다시 속이 비틀려 그 여자를 찾아내 괴롭히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같잖은 욕심으로 그 여자가 도려낼 제 기억을 더 만들고 싶진 않았다.
“베스.”
마지막으로 건네준 보라색 꽃다발은 제 공간에 있는 베스의 남은 향기를 다 끌어모은 것이자, 쥐고 있던 마지막 한 줌을 건넨 것이었다.
날 떠나 자유로워질 널 위해.
다신 오지 않을 우리의 계절을 위해.
“한 번만….”
털썩, 문가에 기대앉은 데베르는 낙하하는 차가운 눈송이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비로소 깨달아졌다.
베스 제인스는 그가 결코 피하지 못할 겨울날의 눈이란 것을. 그리고, 닿으면 스러질 눈을 홀로 움켜쥐려 한 대가가 바로 오늘이란 것 또한.
내리는 설화를 닮은 물방울이 툭, 데베르의 턱을 타고 떨어졌다.
“…후회해.”
베스 제인스를 잃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을 타고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진심으로 후회해.”
후회라는, 영영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등 뒤에 새겨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