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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74화 (174/206)

174화

클리프 부인. 제국 병원 폭발. 사망.

일개 병사의 한마디를 곱씹는 장교들이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마치 그 속에 삼킬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감내하지 못할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감히 누구도 먼저 입을 뗄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막사 안을 감돌았다.

“경위는.”

하지만 이내 흘러나온 데베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탄내가 나는 상자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는 눈동자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위.”

“그, 그게. 목격자의 증언으로는.”

자신을 향한 주목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병사는 애써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것을 읊어 내리기 시작했다.

“몇 번째 폭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옷을 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 병원 폭발 직후 간호 숙소 뜰을 뛰어가다가 화단에 매복된 지뢰를 밟았다고 했습니다. 큰 지뢰는 아니었지만-”

가만히 병사의 보고를 듣던 데베르의 관자놀이께 근육이 ‘화단’이란 말에 움칠했다.

“화단에 조약돌이 많아서 1차 폭발 이후 상황을 수습하던 병사들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조약돌….”

데베르는 꼴이 우스워진 브로치가 마치 숙소 화단의 조약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젠 형체조차 없이 사라졌을 화단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하얀 조약돌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화단 앞에서, 여자는 그보다 새하얀 얼굴을 하고 데베르를 마주 봤었다. 꽤나 새침하게 쏘아붙이던 목소리와 달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너무도 순진해 그를 못살게 굴던 밤이었다.

‘이 상처는 붕대로 압박하기보다는 적당히 바람이 통하는 편이 나아요. 손 쓸 일이 많다면 붕대를 감으셔야겠지만…. 다행히 왼손이네요.’

금방이라도 밀어낼 것처럼 차갑게 굴면서도, 결국 한발 물러나는 모습이 기꺼워 밤새도록 괴롭히고 싶던 순간이기도 했고.

‘등에 있는 흉터는. 어떻게 해야 낫는데.’

‘왜. 이젠 전쟁도 끝났으니까 그냥 모른 척하려고?’

그리고 그때도, 자신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 여자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틈이 보이지 않으면 찌르면 된다, 그리 잔악한 자위까지 하며.

열기에 끝이 날카롭게 구부러진 브로치가 기어이 그의 손에서 피 한 방울을 냈다. 데베르는 그제야 제가 무의식적으로 브로치를 굴리던 손이 왼손임을 깨달았다.

“…그렇군.”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베르는 손안의 브로치를 코트 위로 떨어뜨렸다.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코트는 겨우 손끝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핏방울쯤은 우습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그랬나 보군.”

얌전히 성의 방공호에 앉아 저를 기다리지 않으리라고는 예상했다. 어쩌면 언덕에서의 마지막 데이트조차 넌더리를 내며 진작 웨인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은 그 병원 안에 있고, 모든 끔찍한 것들은 번트에 있을 테니. 새삼 놀라운 것도 없었다.

데베르는 망설임 없이 상자 뚜껑을 닫았다. 혹시나 그 안에 갇혀 있을 감정이 피어올라 저를 괴롭힐까,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비겁하게도.

“태워.”

“네?”

“데베르.”

깜짝 놀라 되묻는 병사의 얼빠진 물음과 아더의 나직한 만류가 동시에 겹쳤다.

“못 들은 건가. 태우라고 했을 텐데.”

의연한 목소리는 냉정하기까지 했다. 상자 밑의 작전지를 끌어당기는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통신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금의 전선이라도 지키려면-”

“데베르…!”

아더는 병사가 다시금 들고 나가려는 유품 상자를 거세게 낚아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데베르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함께 내리깔린 눈동자가 서늘한 기색을 띤 채 아더를 향했다.

“아더 사령관. 무슨 짓이지.”

아더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죽여 낮게 읊조렸다.

“사망이야. 베스 클리프 부인의 사망이라고. 그런데 태우라니. 시신도 수습 못할 정도였으면 이게 마지막 유품이란 뜻이잖아. 이해가 안 가?”

언제라도 넘쳐흐를 듯한 감정이 넘실대는 아더와 달리, 데베르의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이해 못하는 건 자네 아닌가.”

“뭐?”

데베르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의 시계를 흘긋 보는 눈길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신경질마저 섞여 있었다. 그 표정은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남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팔자 좋은 황자 행세가 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지친 제국민들을 다독이고, 쏟아지는 폭격에 비감을 내비치며 자애로운 황제 노릇을 해.”

데베르는 곁에 놓인 작은 궤짝을 거칠게 테이블 위로 엎었다. 그 속에 담겨 있던 인식표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작은 쇳소리를 냈다. 개중 몇 개는 끄트머리가 그을려 있었고, 어떤 거는 완전히 뭉개져 새겨진 이름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고작 하루야. 기껏해야 이 하룻밤 사이에 내 부대에서만 수거한 목숨값이라고. 우린 앞으로도 이런 죽음을 수도 없이 마주할 거야. 지겹도록 봐왔잖아. 승전의 대가란 게 뭔지. 그런 내겐….”

데베르는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떴다.

“베스, 클리프도 그중 하나야. 특별히 다를 바는 없어.”

베스 클리프. 그리도 집착했던 이름이 가시처럼 목 끝에 걸렸다.

“내 상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메이너 황제가 되어 원수 역할로 이 전쟁에 참전해. 대신 실제 전투엔 못 끼어든다는 거 명심하고. 후사도 없는 젊은 황제의 죽음으로 또다시 넥서스를 황권 다툼에 처넣을 수는 없잖아.”

그간의 세력 다툼을 생생히 기억하는 귀족 장교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게일도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 메이너 사령관 역할을 하고 싶다면 입 닥치고 복종해. 다음 전투는 열흘 후가 아니라, 당장 이 새벽이 밝아올 때부터니까.”

말끔하게 끝을 맺은 데베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벌어진 맨몸에 그대로 새 셔츠를 꿰입기 시작했다. 그러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모두가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바로 그 데베르 군대장이 완성될 터였다.

“세 번이나 똑같은 명령을 해야 하나.”

상자를 든 병사가 나가고 곧 타닥거리며 불길 타오르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지만, 데베르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작전 회의에만 벌겋게 된 눈동자를 밝혔다.

“데베르 클리프.”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오고 게일을 필두로 하나둘씩 장교들이 막사를 나갈 무렵, 잠시 자리를 비운 아더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여전히 펼쳐진 작전지 위에 그가 내려놓은 것은 반쯤 녹아 일그러진 브로치였다.

“…세상엔 사라지지 않는 것들도 있어.”

“먼저 나가. 곧 뒤따를 테니.”

홀로 남은 데베르는 잠시 브로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작전지를 접어 가렸다.

그곳엔 제 아내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증언대 앞에 선 소식지 속의 남자는 없었다.

오직 넥서스의 군대장, 데베르 클리프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질척한 흙바닥이 질기게도 군홧발에 들러붙었다. 밤새 내린 눈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빛바랜 낙엽에선 한층 더 깊어진 넥서스의 겨울 냄새가 풍겼다.

지독한 풀 냄새를 연신 들이마시며 진군하는 병사들의 얼굴이 비장했다.

“전방 주시.”

데베르의 명령과 함께 매달린 잎사귀 하나 없는 마른 숲을 타고 파드득, 새의 날갯짓 소리 같은 장전 소리가 이어졌다.

한 무리의 짐승 떼 같은 군대의 발아래에 텅 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적군이 버리고 간 것처럼 황량한 저곳이 바로 오늘, 그들이 탈환해야 할 점거지였다.

‘전방의 전화선을 복구하려면, 무전탑 역할을 할 동부 전선의 종탑을 되찾아야 해.’

무식할 정도로 웨인을 향해 쏟아진 초반 포격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전화국은 멀쩡했지만, 최전방의 통신선은 개전하자마자 끊긴 지 오래였다. 이렇게 되면 적군의 신호를 가로채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군끼리도 정보 교환이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 뻔한 수순이었다.

그건, 곧 예정된 패전을 뜻했다.

허공에 들려 있던 데베르의 주먹이 쫙 펴짐과 동시에, 훈련받은 군사들이 일제히 주인을 잃은 시가지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거리 곳곳으로 흩어진 부대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이동에 박차를 가해갔다.

하지만 잠깐의 고요에 부대가 안심하려는 찰나. 픽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으억!”

“건물 매복이다!”

“두 시 방향 저격수!”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쏟아지는 총탄 세례 속에 적군과 아군이 진창으로 뒤섞였다. 건물 곳곳에서 넥서스군의 총에 맞은 브리틴군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거리 위의 총알받이가 된 넥서스군이 아까 전 밟아 온 낙엽처럼 그 위에 엎어졌다.

“가!”

데베르와 아더는 서로의 반대편으로 흩어져, 오로지 종탑만을 바라보며 내달렸다. 넥서스의 두 축이 나눠지면 자연히 적군의 총구도 두 무리로 나눠질 것을 예상한 전략이었다. 곳곳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것들이 날아와 진로를 방해했지만, 계획은 바뀔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넘어질 듯 말 듯 휘청이던 데베르는 이를 악물고 총탄을 퍼붓는 종탑을 노려봤다.

“먼저 가! 데베, 윽!”

멀지 않은 곳에 아더도 보였지만, 그는 브리틴군 하나와의 육탄전에 발이 묶여 있었다.

몇 개의 연막탄을 달리는 길 위에 터뜨려 저격수의 시야를 방해한 데베르는 마침내 종탑의 돌계단에 몸을 던지곤 거친 숨을 골랐다. 어쩔 수 없이 마셔댄 매캐한 가스에 머리가 깨질 듯이 조여왔다.

“하아, 하….”

벽에 붙어선 데베르는 길게 숨을 내쉰 후, 품에서 소총을 꺼내 소리 없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살벌하게도 쏘아대는 기관총이 묵직한 진동을 만들어 내며 계단을 울렸다.

여기만 탈환하면….

바로 위에서 보이는 낯선 군화에 데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컥!”

주저 없이 당긴 방아쇠와 함께 수염이 난 브리틴군 하나가 뒤로 넘어갔다. 재빠르게 시체를 밟고 기관총의 조종대를 비튼 데베르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사, 살려….”

서툰 넥서스어를 중얼거리며 벽으로 물러서는 나머지 병사 하나의 얼굴이 지나치게 앳됐다. 벌써 총에 맞은 건지 한쪽 팔을 감싸 쥐고 벌벌 떠는 눈동자엔 선명한 공포마저 서려 있었다.

순간. 그 위로 말간 베스의 얼굴이 환영처럼 겹쳤다.

[어리고 아파해서.]

노란 전구 불빛 아래, 시가 연기를 피하던 하얀 손.

잔뜩 겁먹은 얼굴과 달리 반듯하기만 하던 글씨체.

붉게 생채기 난 맨발을 뒤로 숨기던….

“으아악!”

틈을 눈치챈 어린 병사가 곧장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데베르!”

푹, 가슴 언저리가 찔리는 느낌과 함께 거칠한 바닥에 데베르의 무릎이 부딪혔다. 타탕. 연발하는 총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지.

“정신 차려!”

데베르는 속절없이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종탑을 차지한 인영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구원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 와중에도 눈치 없이 끼어드는 제 목소리에 데베르는 참지 못하고 조소했다.

오만한 새끼. 네가 감히 누구에게 그런 소릴 한 거야.

‘네 그 건방진 구원을 나도 받았으면 좋겠군.’

아, 그 말은.

허탈한 웃음을 들썩일 때마다 가슴팍이 찢어지듯 아려왔다.

“그 말은…….”

진심이었어.

“데베르!”

뒤늦게도 토해내지 못한 고백이 새카매지는 시야 사이로 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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