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으윽… 가, 감히.”
“뭐가 감히야, 또.”
칼론은 귀찮은 기색을 여과 없이 내비치며 상대의 복부에 짓쳐 넣은 칼날을 자비 없이 빼냈다. 푹 소리가 날 만큼 거세게 들어간 칼날이 또다시 비슷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오자, 피를 토하던 남자의 허리가 돌연 둥글게 휘었다.
“어억…!”
풀리는 다리 힘을 어쩌지 못하고 저를 죽인 상대에게 기대오는 몸뚱이를 칼론은 가볍게 피했다. 이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남자의 인영을 핏물이 든 군화가 건성으로 건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될 가련한 육체가 가늘게 경련했지만, 칼론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존재치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희열이 감도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가 올 줄 알았으면 덜 귀찮았을 것을.”
그는 손에 쥔 칼을 다시 한번 거세게 그러쥐었다.
정오쯤부터 쏟아붓기 시작한 겨울비는 그칠 기미 없이 내리고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고 칼을 잡은 건데. 이 정도 빗소리였으면 외딴 왕궁에서 울려 퍼지는 총소리쯤은 가볍게 묻혔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약간의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 본 거지. 칼론은 가볍게 제 생각을 주워 담으며 주위를 돌아봤다.
“드디어 끝인가.”
그가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 길게 핏물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의 것은 아니었다. 도륙하듯이 헤집고 온 브리틴 왕족 놈들의 것이었지.
“왕실 혈통이라곤 한 방울씩 얻어먹은 것들이 왕족 행세는.”
쯧. 혀를 찬 칼론은 복도에 난 창에 칼을 내밀어 시뻘겋게 묻은 피를 건성으로 씻어냈다. 다가온 부하들에게 시체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린 그는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왕궁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선형 계단 끄트머리에서 슬쩍 아래를 보자, 질질 밖으로 끌려가는 시체들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게, 믿을 놈을 믿으셨어야지.”
되지도 않을 건방진 조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론은 마치 제가 주인인 것처럼 적막한 왕궁 복도를 활보했다. 오직 브리틴의 왕에게만 허락된 침실 문을 활짝 여는 손길에도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오랫동안 주인 없이 비어 있던 공간 특유의 공허한 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곳의 주인은 지금부터 자신이라는 게.
흡족한 마음이 밀려온 칼론은 꽤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 엎어졌다.
말이 왕실 후원이지, 짐승 우리나 다름없는 고아원에서 자라오며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던가.
눈앞에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리고, 이 세상에 오로지 제 존재만을 선명히 드러낼 그날을.
“하아….”
시원한 숨을 터트린 칼론은 창밖의 빗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이 정도 폭우면 공중전은 잠시 소강상태일 것이다.
얼른 끝을 봐야지.
살육을 끝낼 때마다 으레 그렇듯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밀려왔다. 머리카락보다 조금 엷은 빛을 띠는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이며 어슴푸레한 잠에 취하려는 찰나. 쨍하게 울려대는 전화 소리에 벌건 눈동자가 다시금 형형히 번뜩였다.
“쳐 죽일 전화국이 아직도 멀쩡한가 보군.”
살벌하게 욕을 읊조린 칼론은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곧 귓가에 들려오는 예상 밖의 소식에 비식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게, 정말 확실한가?”
즐거움을 담은 손끝이 그의 관자놀이께를 긁적였다.
수화기 너머의 부하병은 연신 맞다는 말만 읊조렸다.
“하워드가 죽었다고….”
운도 좋지. 제 순서가 얼마 안 남은 줄은 어떻게 알고.
원래 하워드와 입을 맞춘 대로라면, 오늘 자신은 섭정을 핑계로 모여든 호이든의 먼 모계 혈족들을 국경 너머로 호송해야 했다. 전부 호이든의 서거 이후 상황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호시탐탐 왕좌를 꿰차고자 혈안이 된 놈들이었다.
해봤자 반쪽짜리 피도 못 받아먹은 것들이 제게 ‘감히, 네가.’ 따위의 소리를 할 때마다 얼마나 귀에 거슬렸던지. 더한 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성급히 칼을 휘둘러댄 탓에 날갯죽지가 뻐근했다. 평소였으면 좀 더 노련히 처리했을 텐데.
“…뭐?”
여러모로 피어오르는 아쉬움을 다스리던 그의 눈매가 별안간 사납게 일그러졌다. 순간적으로 그에게선 웬만해서 보기 어려운 혼란스러움도 스쳐 지나갔다.
“그 애가? 확실해?”
아…. 이리저리 턱을 비틀며 웅얼대는 목소리를 듣던 칼론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칼론 대장님. 지금 오셨습니다.”
때마침 침실 문을 두드리는 인기척에 칼론은 미련 없이 수화기를 내렸다.
침실을 들어설 때의 감흥이 그새 사라진 얼굴엔 약간의 지루함이 묻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조금 전 전화통으로 전해 들은 탐탁잖은 뒷소식을 곱씹었다.
“마차에서 내리십니다.”
한층 더 흐려진 하늘은 이젠 사위도 구분되지 않을 만큼 빗물을 퍼붓고 있었다. 칼론은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금발을 발견하곤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가 어딘 줄도 모르고 아직도 저리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잡념을 이내 지워낸 그는 새침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라프넬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렸어. 라프넬.”
라프넬은 날짐승처럼 비를 흠뻑 맞으며 걸어온 칼론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서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굵은 손가락의 손톱 틈마다 시뻘건 피가 스며든 게 보였다. 빗물도 지우지 못할 무참한 흔적을 손톱 사이에 끼우고도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마치 재밌는 일을 벌이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윽고 손을 맞잡은 한 쌍의 남녀가 아무도 없는 왕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야. 네가 있을 곳은.”
곧 찬란한 왕궁의 제일 위층, 본디 왕비의 것이었을 화려한 침실이 라프넬의 눈앞에 펼쳐졌다.
라프넬은 고고한 자태로 비에 젖은 후원이 그림처럼 펼쳐진 창가로 다가갔다. 냉기가 묻어나는 유리창 앞에 서자,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칼론이 가만히 다가와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라프넬 메이너, 혹시 후회해?”
모든 것을 얼릴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와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붉디붉은 눈동자가 투명한 창 너머로 마주쳤다. 얼음과 불이려나. 티 없이 맑은 창 안에 공존할 수 없는 두 존재의 모습이 들어오자, 라프넬은 불현듯 그 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그토록 원하던 건데.”
칼론의 젖은 머리칼을 느른하게 매만지는 손길이 야살스러웠다.
그래, 확실히 난 이런 쪽이 구미에 당기지. 목적이 명확한 공주의 손길에 칼론은 수치를 모르고 발정하며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미리 그의 명령을 받아 든 병사들이 왕궁 주위는 물론, 지붕 위까지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라프넬은 생각을 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저를 왕궁으로 이끈 남자의 품을 찾아 헤맸다.
* * *
막사 지붕을 뚫을 듯이 두드려대던 빗방울도 깊어지는 밤을 따라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램프 하나가 유일한 빛을 발하는 그곳엔 데베르뿐만 아니라 아더, 게일을 비롯한 웬만한 장교급의 군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비가 오는데도 이어진 난잡한 전투에 비투성이, 진흙투성이인 몰골로 각자의 상처에 소독약을 부어대고 있었다.
“그나마 오후엔 비가 온 게 천운이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게일이 나름 분위기를 풀어본답시고 우스갯소리를 하자, 아더도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갑작스런 선제공격. 그것도 언제부터 물밑 작업을 했는지도 모를 코바흐까지 합세해 쳐들어온 탓에, 안팎 할 거 없이 들쑤셔지기 시작한 넥서스군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황궁 온실 정원에 심어놓은 폭탄이 터지면서 시작된 초반 공격은 전략적으로 웨인 중심가와 번트에 집중되었다. 통상적으로 국경선을 치고 들어오는 게 전례인 점을 감안해보면, 제대로 난장을 벌여 보겠다는 뜻이었다.
“대장님, 그래도 제가 클리프 성의 본관은 지켜냈습니다.”
게일은 총알이 스쳐 지나간 팔뚝을 제멋대로 붕대로 감싸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애써 떨어대는 게일의 너스레에 막사엔 짤막한 웃음소리가 퍼졌으나, 하릴없이 침잠하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으윽….”
“아, 제기랄.”
곳곳에서 나직하게 터져 나오는 고통에 찬 신음은 너나 할 것 없었다. 한치의 신음성도 흘리지 않은 채 잇새를 꽉 깨문 데베르만 제외한다면. 그가 핏물로 척척한 셔츠를 벗자, 상처와 엉겨 붙어 있던 천 조각이 쩌적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독한 새끼.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제가 더 인상을 찌푸렸다.
“몰리 부인은 대체 언제쯤 오시는 겁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던데요. 저녁쯤 도착한 운전병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제대로 폭파당했답니다.”
“제국 병원이 말입니까?!”
짧은 찰나 소독약을 들던 데베르의 손이 멈칫했다. 그 의미를 아는 아더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확실한 게 아니면 그런 말은 삼가지.”
하지만 먼저 말을 뱉은 소령은 억울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확실합니다. 간호 숙소부터 시작해서, 연달아서 다섯 개 정도 터져댔는데 듣자 하니 사상자 중에 귀족도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
그간 입을 다물고 있던 데베르의 첫마디였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적에 심상찮은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아물지 않은 허리께의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깊이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는 제국 병원을 입에 담은 소령만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것까진 저도… 죄송합니다.”
푹 고개를 숙이는 부하병을 무감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데베르는 간이 테이블 위에 작전 지도를 넓게 펼쳤다. 미처 소독하지 못한 상처는 여전히 방만하게 벌어진 상태였다.
“집중.”
그는 앞으로의 대략적인 전술을 읊으며 기다란 손끝으로 지도의 한 지점, 한 지점을 짚어 나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끝을 타고 묽은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데베르. 피-”
“육로가 원활하지 못하니 당장의 총력은 공중전에 가한다.”
그는 아더의 만류에도 선혈이 흘러내리는 손을 대충 모포에 문댈 뿐, 시선은 여전히 작전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군대장의 형형한 기세에 아더를 제외하곤 다들 입을 합 다문 채 고개만 주억였다.
“시간 끌수록 패전에 가까워진다는 것만 명심해.”
그때. 천막 너머로 질척이는 흙바닥을 요란스레 긁는 바퀴 소리와 함께, 덜덜거리는 엔진음이 막사 바로 앞까지 닥쳐왔다.
“벌써 보급 차량이 올 리는 없고….”
누군가의 불길한 중얼거림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 하나가 막사 밖에서 관등 성명을 댔다.
“무슨 일이지.”
데베르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앳된 병사의 품엔 빗물에 구겨진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참모 회의에 말단병이 이리 느닷없이 얼굴을 들이밀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었다.
적군의 공습. 그리고….
“…말해.”
상자를 찢어발겨 버리기 전,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명령이었다.
제발 이번만큼은 빌어먹게도 들어맞기만 하는 제 예상이 틀리길 바라는, 그런 간절한 명령.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병사는 말을 잇기보단, 핏물이 묻은 작전지 위로 모든 걸 말해 줄 상자를 올려놓기를 택했다.
“열어.”
맥없이 열린 상자 속엔 마치 잿더미 같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
순간 데베르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설명.”
“그, 그게-”
사실 설명 따윈 필요 없었다. 모든 게 명확했으니까.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우그러든 금빛 브로치도.
흰 코트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게 태워진 넝마 조각도.
일렁이는 불빛을 따라 느릿하게 막사 안을 퍼져나가는 이 기묘한 고요마저도.
“클리프 부인께서 제국 병원 폭발로 사망하셨습니다….”
결국, 다가올 끔찍한 전언을 위한 전조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