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시커멓게 칠해진 차 한 대가 하워드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타오르는 듯한 웨인 중심가의 함성은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여전히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 팔이 결박된 채 차에서 내린 건 다름 아닌 베스였다.
“읍…!”
한껏 몸을 비틀며 의미 없는 반항을 해봐도, 헝겊으로 단단히 막힌 입술 새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하워드 저택만이 있는 텅 빈 거리엔 끌려가는 베스의 구두 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베스는 부족한 숨을 헐떡이며 억지로 저택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코끝으로 끼쳐 들어오는 하워드가 특유의 향내에 숨을 참아야만 했다. 단 몇 초. 향내가 비강을 스친 것만으로도 지난한 과거를 떠올리기엔 충분했기에.
덮쳐오는 공포에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건 본능이었다. 빌어먹을 하워드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 낸 베스 제인스의 본능.
속지 마.
베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기엔 더 이상 인질처럼 잡혀있던 올리비아도, 저 대신 매질을 참아내던 루카도 없다. 단지 끔찍한 제 기억만이 있을 뿐. 베스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동요하는 심장을 애써 누르고, 또 눌러 내렸다.
“으읍.”
누군가의 거친 손길에 지친 여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베스의 눈앞에 매끄러운 구두코가 보였다.
이 포화 속에서 저리 번지레한 구두를 신고 있을 이가 얼마나 될까.
바닥을 노려보던 베스의 시선이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갔다.
“쿨럭, 큽. 크윽.”
지척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기침 소리가 끔찍하게도 귓가에 거슬렸다.
“…풀어.”
고압적인 명령 한 마디에 베스의 입을 우악스럽게 싸매고 있던 천 조각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막힌 숨을 헉헉대는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은 조금씩 이성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고개, 들어라….”
베스는 하워드의 벌건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이에 하워드가 픽 입꼬리를 비틀었으나, 그마저도 토해내는 듯한 기침에 곧 사라졌다.
“크읏, 여전히 건방지군.”
“종탑 근처에 있는 걸 잡아 왔습니다.”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남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베스는 빠르게 하워드의 상태를 살폈다. 확연히 어두워진 안색. 두 마디를 채 잇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 예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지탱하느라 끄트머리가 상한 지팡이.
이제 호흡조차 어렵구나.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들은 베스는 조용히 셈을 했다.
“널 부른 이유는 하나야.”
약. 바싹 마른 하워드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계획대로라면 브리틴의 선제공격이 시작되는 즉시, 남몰래 웨인을 떠났어야 할 하워드가 아직도 이곳에 있는 이유는 뻔했다. 갑작스레 깊어진 유전병. 거동이야 수족을 부리면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당장 이 저택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굳어지기 시작한 심장은 큰 걸림돌이었다.
“망할, 콜린스가… 켁, 켈룩.”
뒷말을 더 듣지 않아도 베스는 알 수 있었다.
원래도 약품 취급에 민감한 콜린스 교수가 구금에서 풀려난 이후, 얼마나 더 보안에 신경 쓸지는 안 봐도 훤했다. 특히나 예고 없이 터진 전쟁에 중요 약품들은 있던 위치를 옮기는 것은 물론, 일부는 라벨까지 덮어 가렸을 것이다.
“…금고가 있어. 넌, 알 거다.”
이미 확신을 가진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번들거렸다.
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아찔한 직감이 스쳤다.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란 걸.
“대신 약을 빼돌리면, 날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세요.”
“당연히.”
하워드의 눈짓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베스의 몸이 강제로 왈칵 일으켜 세워졌다. 이번엔 저택을 벗어나는 베스의 뒤로, 수행인의 부축을 받은 하워드도 함께 따라 나왔다.
나란히 차의 뒷좌석에 앉은 하워드에게서 진한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제국 병원으로.”
바깥은 어느새 새벽 어스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안개를 뚫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하워드와의 동행이 이어졌다.
“여기 좀 봐줘요!”
“지금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나잖아! 의사며 간호사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으흑, 여보. 눈 떠…! 의사! 의사!”
제국 병원은 입구라는 개념이 무색하게 정문과 후문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벌써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환자들이 누운 채 신음하는 그곳은 시작된 전쟁의 단면을 이르게 보여주는 중이었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병원에서 재투성이 몰골로 들어오는 베스를 눈여겨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뭉그적거리지 마십시오.”
느려지는 걸음을 눈치챈 하워드의 수행인이 옷자락에 감춘 총구로 베스의 등을 쿡 찔렀다. 베스는 제 코트 너머로 선연하게 느껴지는 동그란 총부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베스는 의료진 외엔 웬만해선 걸음을 하지 않는 일 층의 비품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를 돌아보자 멀찍이서 하워드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도망칠 생각일랑 말라는 듯, 쇠약해진 몸뚱이와 반비례하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기민하게도 그녀를 좇고 있었다.
끼익. 스산한 소리를 내며 열린 창고 안엔 수간호사라면 모를 수 없는 커다란 금고가 놓여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교수님이 약을 정확히 어디에 숨기셨는지 몰라서 확인해야 해요.”
베스는 금고로 손을 뻗지 않고, 일부러 벽면에 놓인 캐비닛을 향해 섰다. 캐비닛을 가리고 있는 묵직한 이동 트레이를 옆으로 밀어내는 평범한 행동엔 그녀를 지키고 있던 남자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떨리는 손끝에 애써 힘을 주며 베스는 의미 없는 서류철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한 연기였다. 인내심이 바닥 난 하워드가 절뚝대며 올 때까진 아주 약간의 시간이면 충분할 테니.
“어서.”
수행인의 일침과 동시에 거칠한 기침 소리가 가까워졌다.
“빨리하라니까!”
“읏….”
퍽. 위협적으로 베스의 어깨를 밀치는 손길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봉투에서 우수수 쏟아져나온 손바닥만 한 종이 수백 장이 눈처럼 발치를 덮은 그 순간. 무언가 발견한 베스가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큽, 뭐야!”
하지만 여유는 없었다. 하워드의 고성이 들리기가 무섭게 베스는 손에 든 종이를 행여 뺏길세라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당장 금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언가 더 지껄이려던 하워드도 잽싸게 금고 잠금쇠를 돌리기 시작한 베스의 손짓에 입을 다물고 하는 양을 지켜봤다.
“커흑, 역시.”
이내 시원스레 열린 금고 안에 보이는 익숙한 약병에 하워드의 얼굴에도 얼핏 미소 같은 게 스쳤다.
“…바로 투여할게요.”
베스가 서랍에서 빈 주사기를 빼내 들자, 곁에 서 있던 수행인이 사나운 기세로 주사기를 빼앗았다.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졸지에 빈손이 된 베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하워드를 돌아봤다.
“여기서 절 믿지 못해 투여를 미루면, 브리틴 의사를 구할 때까지 무사하실 수 있을까요?”
“….”
맞는 말이었다. 제아무리 첩자 사건에서 무죄 판결받은 하워드라 할지언정 일이 이만큼이나 벌어진 지금, 몰리 부부 내외를 만나기는 꺼림칙한 노릇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있는지도 모를 다른 의료진을 막연히 기다리거나 찾아 나설 시간도 없었다.
고민은 사치였다. 적어도 지금의 하워드에게 있어선.
“흐읍… 허튼짓, 생각도 말 거라.”
가쁜 숨을 내쉬던 하워드는 결국 근육이 다 빠져 흐느적거리는 팔을 내밀었다. 이어지는 끈질긴 협박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베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사기에 약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두우니 이쪽으로 오세요.”
마치 하워드에게 길을 내주려는 것처럼 바퀴 달린 트레이를 슬쩍 복도 쪽으로 밀어내자, 문가에 있던 하워드와 창고 깊숙한 곳에 서 있던 수행인의 위치가 바뀌었다. 보통 사람의 허리께 정도 오는 트레이가 미약한 방벽처럼 남자와 하워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더 가까이.”
희미한 여명이 끼쳐 드는 창가로 하워드를 이끌었다.
마침내 어슴푸레한 하늘빛 아래, 끈덕지게도 그녀의 불행을 갖고 놀던 작자가 들어왔다.
그곳엔 절뚝거릴지언정 풍채가 좋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중년의 남자가 베스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억!”
하워드의 재촉이 혀끝을 미처 기어 나오기도 전에, 예리한 주삿바늘이 그의 목덜미 깊숙이 꽂혀 들었다. 순식간에 급소가 찔린 하워드가 숨을 들이켜며 무릎을 꿇더니 베스의 뱃가죽에 이마를 기댔다.
“한 발자국만 더 떼면!”
더러운 하워드의 몸뚱이를 방패처럼 끌어안은 베스는 곧장 달려들려는 수행인을 직시하며 더 깊이 주삿바늘을 찔러넣었다. 나직한 속삭임이 고요한 창고를 울렸다.
“…한 발자국만 더 떼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
벌벌 떠는 하워드가 고갯짓으로 당장 베스를 죽이라 명령했지만, 허옇게 돌아간 눈은 이미 제 역할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 순간. 뇌성 같은 폭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병원이 크게 진동했다.
“폭탄이다!”
“도망쳐!”
쾅. 쾅. 일정한 사이를 두고 터져대는 난데없는 폭발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갑자기 위층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인파에 베스를 노려보던 수행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지금이야.
그때를 놓치지 않고 베스는 온몸을 던져 트레이를 밀어붙였다. 예상치 못하게 무릎을 치고 들어오는 무게감에 거구의 사내가 속절없이 사람들에게 쓸려 넘어졌다.
“어, 저기도 있다!”
누군가가 베스와 남자가 나동그라져 있는 복도 너머를 가리켰다.
“제기랄!”
계단참에 던져진 시커먼 폭탄을 알아본 남자가 부리나케 복도를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베스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워드를 지켜야 한다는 목적 따윈 안중에도 없이 내달리는 남자의 품에서 감추고 있던 총이 떨어졌다.
“흡, 하아….”
정문까지 거의 다다른 베스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거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워드 그치가 기어코 사력을 다해 창고를 벗어나고 있었다. 압도하는 죽음의 공포가 무슨 기적이라도 만들어 낸 것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제법 빠르게 움직거리며.
안 돼.
베스는 다시 하워드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총을 잡아 들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와!” 누군가가 경악에 외쳐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정말, 제 불행은 제 손으로 끊어내고 싶었으니까.
‘슬라이드도 안 한 상태에서 어떻게 총을 쏴.’
데베르, 난 아직도 전장의 약품 창고 안에서 당신을 본 그날을 기억해.
빠르게 총구 위를 잡아당기자 철컥하는 장전 소리가 들려왔다.
‘힘 세? 별로 안 센 거 같은데, 팔꿈치를 조금 굽혀. 반동 못 이겨.’
알고 있으려나. 당신 목소리는 겨울밤을 닮았다는걸.
덜덜 떨고 있는 가느다란 팔이 조금 굽혀졌다.
‘보여?’
‘흔들려요.’
어쩌면 모든 건 오늘을 위한 준비였을지도 모르지.
마비된 혀로 욕설을 짓씹는 하워드의 얼굴이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네가 호흡하고 있으니까.’
‘숨 쉬지 마.’
그 다정한 목소리에 기대 베스는 숨을 멈추었다.
잘게 흔들리던 총구도 때를 알아챈 것처럼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했다.
‘이제 쏴.’
난 더는 두렵지 않아. 당신 덕분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으헉, 으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하워드의 다리에서부터 선명한 핏물이 흘러 퍼지기 시작했다. 더 걸음을 떼지 못하는 하워드가 자리에 주저앉자마자, 베스는 손안의 총을 내팽개치고 열린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총탄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굉음이 복도 끝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쾅. 콰쾅. 쾅…! 순간 베스는 눈앞의 모든 풍경이 느리게 보이는 것 같은 환영을 경험했다.
저를 향해 손짓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질겁한 표정. 새하얀 허공을 눈발처럼 날리는 산산조각 난 유리창.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브로치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
연극의 막이 내려오듯 심연처럼 저를 휩싸는 새카만 연기 속에서 베스는 미소 지었다.
비로소 끝났다.
질기고 질기던 제 불행이.
후회는 없었다.